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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뿔호반새와 남원 운봉을 찾은 따오기로 본 우리들의 탐조문화
- 지리산을 찾는 손님 뿔호반새와 따오기, 하지만 그들이 찾아온 것은 실수였을까? 탐조 에티켓을 지키지 않는다면 괜찮은 문화 생활일지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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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뿔호반새와 남원 운봉을 찾은 따오기로 본 우리들의 탐조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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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희망가 1
- 섬진강 편지」 -여의도 희망가 1. / 지리산 천은사 노랑망태버섯 ‘우리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 나부끼는 젊은이들의 깃발 아래서 젊은이들의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그놈에게’ 가사는 다 알진 못하지만 더 나은 내일의 희망가라는 건 압니다. ‘우리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젊은이들의 몸짓을 따라 어깨춤을 추었다. 그 리듬을 다 따라 하진 못하지만 평화의 춤이라는 건 압니다. ‘탄핵윤석열탄핵윤석열탄핵“ 젊은이들 구호를 따라 외칩니다 내 작은 목소리는 함성에 묻히지만 거대한 물결이 되다는 건 압니다. 추운 날씨에도 밤이 깊어 가도 흐트러지지 않는 젊음대오 여의도에 가서 젊음이 소리치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여의도에 가서 젊음이 만드는 내일을 보았습니다. 여의도에서 돌아와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이번에 펴낸 ‘나를 살린 풍경들’ 책 속의 지리산 섬진강 사진들로 <여의도 희망가> 시리즈로 연재를 시작합니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섬진강 /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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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희망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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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 키즈의 생애 2편 세상은 멀고 술은 가까이 있었다.
- 세상은 멀고 술은 가까이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수현은 나경 선배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나경 선배를 만나지 못했다. 수현은 나경 선배가 다니는 국문과에 가봤지만, 나경 선배는 학교에 나오지 않은 지 꽤 되었다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나경은 어디로 간 것일까? 수현은 생각했다. 고등학생 때 만난 나경 선배는 어쩌면 수현이 이 대학에 들어온 이유 중에 하나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 살 차이였지만 수현은 나경 선배를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학교에 없었다. 어디로 간 것인지 수소문했지만 분명하게 아는 사람이 없었다. 열혈 전사처럼 보였던 나경 선배는 알고 보니 열혈 운동권도 아니라고 했다. 몇 번 나온 시위에서 수현이랑 몇 번 만난 것이 전부였다. [나경선배는 그냥 운동권이라기보다는 운동을 지지하는 주변 인물 정도에 불과해..] 이게 대부분의 평가였다. 수현은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몇 번 만난 선배가 좋다고 이 학교를 선택한 것도 그렇고 어디로 가버렸는지도 모르는 나경 선배 주변 친구들도 그렇고…. 그녀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수현은 생각했다. 4월이 된 학교는 4.3 항쟁 세미나를 한다는 대자보가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3월이 등록금 투쟁이 계절이라면 4월은 4.3 항쟁과 4.19로 5.1일 노동절과 5.18로 연결되는 집회 시즌이었다. 세미나를 통해 신입생들을 확보하려는 동아리, 학회, 학생회가 열심히 홍보하기는 했지만, 참가 인원은 많지 않았다. 명확한 전선이 있었던 80년대가 지난 90년대에 접어든 학생 운동은 조금씩 시들해지고 있었다. 수현은 고등학교때 읽은 순이 삼촌이 생각났다. 해결하지 못한 비극의 불꽃은 언제든 다시 고개를 들고 살아나 산 사람의 목숨을 가져간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일들이 많았다. 사회에 남아 있는 불의한 것들을 해결하는 것이 대학생의 임무라고 수현은 생각했다. 투쟁의 대상이 명확할 때는 전선이 투명하고 투쟁의 불길은 쉽게 오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선은 희미하고 집회보다는 도서관을 가는 학생들이 더 많은 시대였다. 학생 운동을 하기 위해 대학에 입학한 수현은 이 상황이 불편했다. 시들해진 것은 투쟁 전선이 아니라 운동권들의 나약함이 문제라고 수현은 생각했다. 여전히 군부 독재의 2인자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고, 작년만 해도 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린 학생들이 몇 명인가? 여전히 통일은 멀고 노동자들의 삶은 팍팍했다. 수현은 당장 무엇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선배들을 찾아가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이야기해 보면 그만 생각하라며 술을 사주는 선배 말고는 특별하게 대안을 가진 사람도 없었다. 아니 대학생들이 할 만한 일이 없었다. 세상일은 멀고 술은 가까이 있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있었다. 이제 곧 방학의 시작이었다. 학교엔 농민 학생 연대활동을 모집한다는 현수막이 보였다. 수현은 참가하지 않았다. 수현은 농사일이라면 이미 집에서 충분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할을 하려면 집에서 집 농사일을 돕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가하게 농촌활동을 갈 만큼 집안이 넉넉하지도 않았다. 수현은 여름에 돈을 벌어야 했다. 여름 방학이 시작하자마자 수현은 막노동일을 나갔다. 강진은 농활로 수현은 막일 현장으로 각자의 길을 선택했다. 강진은 수현이 부러웠다. 수현은 생각에 막힘이 없었다. 강진은 우연히 문학서클 선배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집회까지 나가게 되었다. 첫 집회에서 강진이 던진 화염병이 안 깨지자, 전경이 그걸 다시 강진에게 던졌다. 그런데 우물쭈물하다가 자기 다리에 불이 붙어 버린 것이다. 그 일로 학교에서 유명해졌고 선배들도 강진을 아꼈다. 하지만 스스로 운동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강진의 부모님은 오래전 세상을 떠났다. 그가 아는 부모님의 모습은 10여 년 전에 이미 멈춰 있었다. 사실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막내로 태어난 강진은 터울 많은 누님 집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성적에 따라서 대학에 입학했다. 아니 다른 곳에 다닐 형편이 되지 않았다. 화물차 운전을 하는 매형의 벌이로는 다른 지역에 있는 대학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어떻게든 누나 집에서 대학까지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강진은 하고 있었다. 강진의 누이 명숙은 처음 강진이 집회에서 다친 것을 보고 오래전에 사고로 떠나 부모 생각이 났다. 명숙은 겁이 덜컥 났다. 강진도 이러다 죽는 것이 아닌가. 방송에서 데모하다가 죽은 학생들을 명숙은 기억하고 있었다. 더구나 명숙이 처음 일을 했던 공장에서도 데모하다가 다치고 끌려간 언니 오빠들이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기도 전에 명숙은 부모를 대신해서 동생을 키워야 했다. 명숙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공장에 들어가서 일했다. 그리고 거기서 만나 화물차 운전기사였던 철민과 결혼했다. 다행히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다. 동생 강진과 사는 것도 그는 좋아했다. "내가 화물차 운전 때문에 멀리 떠나는 날이 많잖아” “동생과 함께 있는 것이 더 맘에 놓여" 남편이 이런 말을 했을 때 명숙은 눈물이 나왔다. 고마웠다. 강진은 이 모든 일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3월이 가기도 전에 집회에 나갔다가 화상을 입었다. 누나에게는 대충 다른 일로 다쳤다고 에둘러 말했지만 강진은 맘이 편하지 않았다. 아무 고민 없이 학생운동에 전념하는 수현이 강진은 그래서 부러웠다. 수현아, 너는 학생운동 하는 것…. 고민 없어? 강진이 물었을 때 수현은 간단하게 말했다. “없어.” 강진은 그렇게 짧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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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 키즈의 생애 2편 세상은 멀고 술은 가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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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 칼바람
- 「섬진강 편지」 -노고단 칼바람 경찰서 로터리에서 비상시국 촛불을 켜고 돌아와 잠들었는데 새벽에 깨어 불안감에 휩싸여 다시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비상계엄 획책한 저들이 변명 한마디 없이 그 자리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 못내 불안하다. 전쟁, 이 땅을 전쟁의 참화 속으로 내몰 수 있는 자들이 아닌가. 속이 바짝 탄다. 입 밖으로 차마 내뱉기 어려운 말이 입안에서 맴돈다. 새벽길 나서 노고단 정상 칼바람 속에서 참혹한 일들을 막아달라고 노고할미에게 빌었다. 해가 뜨지 않은 바람 드세고 어두운 날이다. -섬진강 /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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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 칼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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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샘물 취수로 말라가는 지하수, 소음과 진동으로 살기 힘들어진 집. 산청군 삼장면의 피해현장을 찾아서 1부
- 산청군에는 4개의 먹는샘물 공장이 제주도 삼다수 보다 많은 양의 물을 취수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지하수 고갈과 하루에 최대 400대 까지 다니는 대형 물 운송 차량으로 인한 소음,진동 피해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먹는 샘물 업체는 취수량을 더 늘려달라고 신청을 한 상황입니다. 삼장지하수보존비상대책위원회 분들과 피해의 현장을 둘러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먼저 피해의 현장을 돌아봤습니다. 대책위 분들과 나눈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영상으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00:00 말라가는 지하수 - 산청군 삼장면 00:47 8년 전 보다 현저히 줄어든 수량 (8년차 귀농인 인터뷰) 01:47 주민의 반대의견을 듣고도 군에 전달하지 않는 이장들 03:06 삼장면의 두 먹는 샘물 공장 03:15 말라 죽은 정자 옆 고목나무 두 그루 03:39 말라버린 덕교마을 구시샘 04:57 미신고 지하수 관정은 조사에서 빼려고 하는 산청군 05:57 지하수 수위가 15m 정도 낮아진 농가 06:34 말라버린 과수원의 수도 08:49 과수원 근처의 죽은 고목 09:11 하루 400대의 물 운송 차량, 소음 진동 피해 사례 1 11:25 계속 금 가는 옥상, 소음 진동 피해 2 12:15 금이가서 위험한 담장, 소음 진동 피해 3 13:08 금간 벽, 소음 진동 피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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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샘물 취수로 말라가는 지하수, 소음과 진동으로 살기 힘들어진 집. 산청군 삼장면의 피해현장을 찾아서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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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정상 등산모임 '노피클(No Peak Club)' 과 함께한 1박 2일 산청여행
- 주말마다 일정으로 가득 찼던 11월. 16일 토요일에는 ‘노피클’ 프로젝트 참가자들과 중산리 두류생태탐방로에 다녀왔다. 노피클? 피클을 안 먹는 사람들? 그게 아니라, ‘No Peak Club’ 의 줄임말이란다. 정상(peak)에 가지 않는 등산모임. 등산이라고 하면 ‘산을 오른다’ ‘정상에 올라간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정상을 찍고 와야 산에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분위기. 그런데 꼭대기에 올라가야 산에 갔다 온 걸까? 그냥 산 아래나 산 중턱에서 좋은 공기만 마셔도 만족스러운 사람들도 있다. 숨 막히는 인공공간에서 긴 시간을 보내다 보면, 솔직히 산 입구에 가서 숨만 쉬어도 좋은 것이다. 10월에는 산청에서 한 달 살기를 하는 미나름 (40)씨와 자주 만났는데, 2년 전 낙상을 겪은 후 재활치료를 하고 있어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가는 것은 무리이지만 좋은 공기를 마시기 위해 지리산 ‘입구’에 자주 갔다 온다고 했다. 자칭 ‘산소수집가’ 미나름 씨는 로컬에서 난 식재료로 비건 음식을 직접 요리해 먹으며, 인스타에 그림일기를 남긴다. 산을 경험하는데 있어 정상정복 문화, 종주 문화와는 사뭇 다른 방식이다. 노피클은 기후의제에 관심 있는 청년들이 산을 경험하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는 프로젝트다. 모임명에서 정상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배경에는 지리산을 포함한 여러 지자체에서 추진하는 케이블카 사업이 있다. 노피클을 기획한 기후솔루션 연구원 양예빈 님은 “지자체에서 모든 등산객들이 정상에 도달하기 원하며 장애인/노약자 등 교통 약자들이 이러한 니즈로부터 배제되어 있다고 공통적으로 주장하는데, 노피클은 사실과 전혀 다른 말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최근에 등산하는 등산문화는 정상을 정복하는데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산을 향유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노피클이 11월 16~17일 지리산 산청을 방문하는 일정에 산을 지리산의 매력을 전달해 줄 사람, 케이블카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을 구한다고 연락이 왔다. 짧은 시간이지만 지리산에도 다녀오고, 산청에 이주해서 문화사업, 카페사업과 같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역살이를 해나가고 방문하는 사람들을 환대하는 이들도 만나고 싶다고. 전에 대책위에 있는 햇살이 집을 방문한 손님들과 산청 여행 코스를 짜서 매우 만족스럽게 이틀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어 연결해주었다. 햇살이 숙박제공과 차량 가이드 역할을 선선히 승낙했고, 단계의 북카페 ‘소북’과 원지의 ‘남다른 이유’를 방문지로 선정했다. 첫날 지리산 방문은 케이블카 예정지인 중산리를 방문해서 두류생태탐방로를 걸었다. 노피클 을 맞이하기 위해 원지 버스터미널에서 ‘지리산케이블카반대’ 피켓의 뒷면을 재활용한 ‘그대여, 정상가지 말아요’ 피켓을 들고 있자니, 한 노신사가 피켓의 뒷면을 보고 “아무도 안보는 데 그거 들고 있어서 뭐해?” 라고 말했다. “나는 서울 사람인데, 서울에는 곳곳에 데크로 탐방로가 조성되어 있어서 노약자가 다니기가 매우 편하게 되어 있어. 지리산도 그렇게 되어야지. 요즘 지자체들이 산에 이렇게 다 시설을 만들어. 관광객 유치하기 위해서. 나이든 사람들이 많잖아? 나이든 사람 인구 비중이 높으니까, 나이든 사람한테 예산을 쓰는 거야. 요즘에 다 다니기 편하게 잘되어 있어. 어떨 땐 지역이 서울보다 더 개발되어 있는 거 같아. 새로 싹 다 해놓고.”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요, 라고 말해도 계속되는 노신사의 가르침을 견디고 있는데, 산청 주민으로 보이는 50대 남성 한 분이 옆에서 대뜸 말했다. “아니, 그런데 지리산에 케이블카를 만든대요? 어디요?” “중산리에요. 2000억 들여서 만든대요. 아직 허가 떨어진 건 아니고, 군에서 추진하고 있어요. 지금 설계 용역 진행중이고요.” “뭐라고요? 전혀 몰랐는데. 지리산 다 망쳐놓게 생겼네.” 노피클 일행이 탄 버스가 도착해서 인사를 나누고 길 건너편으로 이동할 때까지 아저씨는 외쳤다. “그러면 안 되지!!” 노피클 일행은 8명으로, 햇살과 내 차에 나누어 타고 중산리에 갔다. 중산리가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 ‘이곳만은 지키자’에 선정되어 주차장에 축하 현수막을 달았었는데, 시천면사무소에서 떼어내어 찾아볼 수 없었다. 관에서는 케이블카를 추진하고, 중산리 주민들은 케이블카가 관광 수입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니, ‘이곳만은 지키자’ 선정이 탐탁치 않은가보다. 케이블카가 주변 업소들의 매출 증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고, 몇 년 동안 공사의 소음과 교통불편 속에 살아야 하는 것을 왜 모를까? 케이블카가 하늘에서 떨어지나? 몇 달 전 산청군수는 시천면 주민과의 간담회에서 케이블카 예산이 2000억이라고 밝혔으며, 적자의 위험도 인정한 바 있는데, 케이블카에 반대하는 이장 1인은 그 자리에서 린치를 당하다시피 했다. 산청군은 매년 800억 가량 순세계잉여금이 생긴다. 지자체장이 당선되면 공약사업을 이행할 수 있도록 선물처럼 잉여금을 준비해 놓는 것은 선수들끼리의 비밀. 사회복지비나 교육예산으로 주민에게 돌아가야 하는 돈을 꿍쳐놨다가 난개발에 쓰는 셈이다. 요지에 회전교차로 설치도 되어있지 않은데 교통량이 많지도 않은 도로를 직선화하고 넓히는 곳은 왜 그리 많은지. 덤프트럭과 살수차 좀 안 봤으면 싶다. 앞으로 예산도 줄어든다고 하니, 정말 필요한 곳이 어디인지 잘 알아서 현명하게 쓰기 바랄 뿐. 읍 입구에서 케이블카 반대 피켓팅을 했던 어느 날, 한 주민이 케이블카에 돈이 얼마냐 드냐고 물어봐서 1,177억(2023년 신청서 추정예산) 든다고 했더니, “그런 돈이 있어요? 그러면 빈집이나 좀 고쳐주지! 온데 다 허물어져 가는 구만!”이라고 일갈했다. 제발 난개발, 그만 좀 하자. 해발 1915m 까지 안 올라가고 600m 부근에서 숨만 쉬어도 좋으니. 자기 집 뒷산에도 데크탐방로 많은 도시 관광객이 탈 케이블카가 아니라, 앞으로 기후변화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청년들이 자족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과 시스템을 마련하면 어떨까. “사실 저는 이런 데크탐방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노피클 윤호 님이 말했다. 동감이다. 사람이 흙을 밟아봐야 할 것 아닌가. 모든 것이 자본으로 가공되어 가는 이 문명에서 남아있는 야생의 공간에서 안식을 찾고 싶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때론 선택의 여지가 없다. 가공된 공간 중 그나마 자연이 생존해 있는 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잠깐 내 이야기. 지리산 천왕봉이 맞은편에 보이는 송의산(539m) 꼭대기 오지에서 35년을 살면서, 다른 산에는 딱히 가보고 싶은 욕구도 없고, 천왕봉에 꼭 올라가 봐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집에 누워서도 산새소리와 풀벌레 소리, 사시사철 변화하는 숲, 별이 총총한 하늘, 기후변화에 따른 식생의 변화와 숲의 천이를 지켜볼 수 있었다. 다른 장소에는 또 다른 멋진 나무와 풀과 새들이 살고 있겠지만, 그건 그들의 영역 아니겠는가. 이 고요한 산속에 포크레인이 들어와서 산을 뭉개고, 거대한 시설이 들어와서 관광객이 우글거리는 건 전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싫은 일은 남한테도 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먼 곳에 놀러 가더라도 조경이 된 시끄러운 관광지는 일부러 피했다. 일단 그런 관광지에서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천연의 커먼즈가 돈을 내야 소비할 수 있는 자본으로 전환된 공간에서는 왠지 마음이 편치 않다. 케이블카와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두류생태탐방로로 등산로 입구까지 올라갔다가 카페 중산리까지 짧은 구간 도로를 따라 내려왔다. 멀쩡한 탐방안내소와 중산주차장을 부수고 다시 짓는 중이라 어수선하고 교통이 혼잡했다. 이보다 더 한 걸 하겠다니. 지리산 탐방에 배정한 두 시간 반이 후딱 갔다. 저녁식사는 덕산 산나물 뷔페식당 ‘열매랑 뿌리랑’에서 먹고, 햇살네로 이동했다. 뒤풀이를 하며 좀 더 심도 깊은 자기소개를 했고, 지역 막걸리 4종 블라인드 테스트를 했다. 다음 날 아침엔 햇살네 생강수확을 도왔다. 틀밭에서 생각을 뽑아 흙을 털어내고 자루에 담는 작업. 정원에는 무화과가 있었는데, 날씨가 오래도록 더워 여태 달린 열매가 있었다. 감이나 무화과 따위 무르고 달콤한 과일을 좋아한다는 윤호 씨가 열매를 따먹고는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여태까지 먹어본 무화과는 무화과가 아니었어!” 우리가 생강을 뽑는 동안, 햇살은 시래기국을 끓였다. 중산리에서 내려오는 길에 지리산콩마을에서 얻어온 감, 원지 목화빵집에서 산 빵, 햇살이 끓인 시래기국, 올리브유에 담근 말린 토마토와 밤잼으로 아침을 먹었다. 시래기국이 밥 말고 빵과도 참 잘 어울리는구나. 기름진 흙을 만지고 계절의 열매를 먹는 이런 소소하고 충만한 행복. 사람은 땅과 닿아 있을 때 부드러운 단단함을 느끼게 된다. 맨발걷기 ‘어싱(earthing)'이 유행인데, 어싱을 말 그대로 옮기면 흙-하기, 지구-하기다. 비단 맨발걷기가 아니라, 대지와의 접촉을 통해 지구의 생명들과 내가 직접 연결된 감각을 일깨우고 내가 지구가 되는 것이다. 아침식사 후 방문한 카페 소북. 한옥을 개조한 카페인데 방 하나를 ‘밀당책방’이라는 작은 서점으로 꾸리고 있다. 대부분 주인장 내외인 어린와자와 모모의 서가를 그대로 옮겨온 것이지만, 신간이나 주인장이 관심 있는 새 책도 꽤 많다. 어린왕자와 모모는 서점의 책들에 짧은 독후감을 메모해서 붙여 놓았다. 나도 서점을 운영하지만 책 읽은 시간이 거의 없는데, 입고한 책들을 다 읽고 감상까지 남길 수 있다니, 부러울 따름. 최근에는 고양이를 주제로 한 그림책들을 여러 권 전시해 놓았는데, 주인장 내외가 고양이 애호가인 모양이다. 택을 개조한 이 카페에는 고양이 몇 마리가 살고 있어서, 집사가 마루 아래에 난방이 되는 고양이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놓았다. 진정 한미한 삶이 무엇인지 아는, 맨발로 땅을 밟고 맨몸으로 풀밭에 뒹구는 어싱을 그대로 실천하는 존재들. 천안에서 산청으로 이주한 주인장 내외는 운명처럼 이 고택을 만나 손수 리모델링했다. 처음엔 본격적인 서점을 하고 싶었지만 카페가 너무 잘되어서 서점보단 카페 손님 치르는 일로 바쁘다고. 안주인인 모모는 밀당에서 지역 사람들과 책모임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 카페로 개조한 본채의 안방에서 생활하다 지금은 창고가 있던 자리에 멋진 별채를 만들어 옮겨갔는데, 유리문을 옆으로 밀면 정원과 별채 바깥의 서가가 그대로 통하는 멋진 형태다. 구조설계를 주인장인 어린왕자가 직접 했다고. 참 재주가 좋은 부부다. 소북에 가면 구석구석에서 주인장 내외의 알콩달콩 귀여운 감성을 느낄 수 있다. 농사와는 관계없지만 생활공간과 일터가 하나로 된 효율적인 삶의 형태. 모모는 짧은 만남의 시간을 뒤로하고 <남다른 이유>로 출발하는 젊은이들에게 남은 케이크도 친절하게 포장해주고, 고양이 엽서도 한장씩 선물해주었다. <남다른 이유> 는 신안면소재지 원지에 있다. 타지에 가서 살다가 고향인 산청으로 온 남달과 리유 남매가 운영했던 카페로, 남매의 선한 인상과 따뜻한 분위기, 세련된 감성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어 원지에서 커뮤니티 공간 노릇을 했었다. 올 9월에 주인장인 남달이 불시에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었는데, 많은 이들이 이 공간이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해 산청 청년 모임 ‘있다’를 중심으로 ‘그늘과 언덕’이라는 후원단체를 만들고 멤버십으로 운영을 이어가기로 했다. <남다른 이유>에서 만난 사람은 산청군 지속가능협의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김우용 씨와 자연출산 둘라인 조해미 씨 부부. 카페 내부가 개조 중이라 지속가능협의회 사무실로 이동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부는 생태적인 삶을 살고자 2020년 아무런 연고가 없는 산청으로 귀촌을 했다. 처음엔 시골집을 구해서 살다가 불편한 주거, 아이 양육 문제 등 여러가지 이유로 지금은 원지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해미 씨가 남다른 이유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인연으로, 카페의 영업을 주로 담당하기로 했다. 우용 씨는 '카페 운영은 처음에 꿈꾸었던 손수 집을 짓고 텃밭을 가꾸는 자급자족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있지만,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어 함께 무언가를 계획하고 펼쳐나가는 지금도 만족스럽다'고 했다. 산청에 거주하는 30대, 40대 청년들의 느슨한 네트워크인 '있다'에서는 공동텃밭을 경작하고 있으며, 올해는 문체부 지원사업인 '예술로어울림'에 선정되어 1억 규모의 주민대상 예술체험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현재는 산청 성심원에서 사용하지 않는 구 교육관을 내어주어 공방으로 꾸미려는 참이다. 누군가는 생활을 하는 레지던시가 될 가능성도 있다. 요즘엔 청년이 시골에 살려고 해도 아이를 키우면서 자족적인 생활을 할 만한 빈집을 구하기도 어렵고, 시골살이 전반에 필요한 기술에 접근하는 것도 공적 지원 없이는 어렵게 되었다. 처음부터 돈이 많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필요한 물질을 스스로 생산하여 끝없는 욕망과 소비를 가속하는 임금노동에 드는 시간을 절감하고, 왔다갔다 유통과 교환에 드는 거리를 단축하여 탄소중립을 실천하고, 무위자연 안빈낙도 하는 것은 생태주의자의 로망이지만, 모든 커먼즈가 소유의 대상인 자본으로 전환된 세상에서 현실은 주거를 해결하기 위해 일단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이다. 시골이 초고령화 되고 있기에, 주거와 생활을 해결한다 한들 아이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고 육아의 짐을 나누어 갖는 단순한 문제 해결도 면단위 마을에서는 자동차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이렇듯 생태주의자의 이상을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청년 세대가 지역을 떠나지 않고 작은 읍이나 면소재지에서 자신에게 맞는 역할을 찾아 지역의 생산물과 자원이 외부로 빠져나가지 않고 지역 안에서 선순환하며 진화하는 데 기여한다면, 가족이라는 작은 테두리에 한정되지 않고 보다 넓은 지역 공동체에서 자급자족을 이루는 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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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 산청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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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정상 등산모임 '노피클(No Peak Club)' 과 함께한 1박 2일 산청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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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이 그리워
- 겨울이면 유난히 극성을 부리는 산프란시스코(San Francisco)의 짙은 밤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운 창밖을 내다보면서, 조금 전에 태평양을 건너와 미국 서쪽 해안까지 실어온 텔레비전 뉴스를 따라 멀리 눈 덮힌 지리산 노고단을 향하여 눈을 감고 그리움에 시름겨워하다가 컴퓨터를 켜고 이렇게 앉았다. 기후에 대한 기록이 있어 온 이래 가장 많은 11월의 폭설이 한국을 덮쳤고, 수많은 피해를 냈다는 고국의 뉴스를 들으면서 나는 눈 덮인 노고단의 아름다운 모습이나 떠올리며, 한가한 그리움에 젖어 이 글을 시작하니, 처지가 달라지면 느낌도 달라지는 한심한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20년을 살았던 지리산파크 아파트 701호에선 아름답게 눈 덮인 겨울의 노고단을 바라보기가 가장 좋은 위치였다. 여름이면 비가 내린 뒤에 지리산의 웅장한 산허리를 감고 피어오르는 안개가 마치 백룡(白龍)이 춤추며 하늘로 오르는 모습이라고 매번 감탄하기도 했지. 초여름 신록이 피어나기 시작하면 연두색 새 잎새들이 무리지어 솟구쳐 온 사방에 신선한 생기를 뿜어대던 그 찬란한 향연을 나만이 독점한 듯이 이기적인 기쁨을 만끽하기도 했지. 아아 그리운 구례,.... 지리산 노고단, 섬진강 물여울, 백운산의 먼 병풍, 밤재를 넘어 달려 내려오던 구례 평야의 시원한 바람, 나의 한국 생활 20년 동안 가장 많은 발자국을 찍었던 서시천 언덕의 다정하고도 유연한 구비들, 구례는 사시사철 향기에 젖은 그야말로 금환낙지(金環落地)의 땅이 아니더냐! 그런데 사실 그리움의 초점은 아름다운 산하를 지닌 구례의 자연환경이란 공간만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함께 웃고, 떠들고, 마시고, 노래했던 사람들과 더불어 지냈던 세월이란 시간이 더욱 아프게 내 가슴에 가라앉아 있다. 하나 하나 이름과 얼굴을 그리면서, 차마 잊지 못하는 사연들도 떠올리며, 내가 한국에서 살았던 삶의 자취를 아직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내 나이가 80을 넘었고, 주변에서 하나씩 사라져간 사람들이 마지막에 치매를 앓다가 가신 분들이 꽤 많으니, 나 자신도 절대 장담 못 하는 연령에 도달했기에, 한시적인 기억에라도 아직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지난 5월 6일에 구례의 젊은이들이 모여 시간과 정성을 드려 미국으로 떠나는 나를 위해 송별연을 베풀어주며, 현수막에 여러분들이 한마디씩 남겨준 글씨를 나는 지금 내 방 벽에 걸어두고 수시로 콧잔등 시큰거리며 바라본다. 나 자신도 그토록 떠나기 싫었던 구례를 기어코 떠나와야만 했던 자신의 운명에 대해 지금도 솔직히 슬퍼하고 있다. 나 죽거든 시신을 화장해서 화엄 계곡 어디엔가 나무 밑에 한 삽 푹 뜨고 뼈가루를 파묻어달라고 유언을 써서 벽에 걸어두기도 했었는데, 그게 불법이라서 실현이 안 되었는가, 이제는 먼 나라 미국 땅 산프란시스코 바다에 유골을 뿌려달라고 유언서를 벽에 걸어 둘 작정이다. 태평양 넓은 바다를 떠돌다가 뼈가루 한 알갱이라도 조국의 해변에 다을 수 있을지...(그럼 뭘해, 공연히 한 번 말이나 해 보는 것이지...) 내 말투가 잡탕으로 이루어진 터라, 구례에 사는 동안 사람들이 몇 차례 나의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고, 그때마다 언제나 구례는 나의 타향이었다. 그래서 충청북도 제천에 있던 호적을 구례로 옮겨놓고 나도 전라남도 구례 사람이 되기로 작정했었다. (전라남도? 남자들이 홀딱 벗고 나체로 사는 동네란 뜻인가?) 이제는 그것마저 쓸데없는 짓이 되고 말았다. 나의 두 아들 녀석들도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 유학생으로 온 아비를 따라 왔다가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미국에서 교육받고 자란 미국 시민권자들이 된 50대의 사내들이니, 한국에 돌아갈 희망은 절망일 뿐이다. 호적이고 주민등록이고 다 쓸데없는 장소에서 그들도 죽어갈 것이고, 가계를 기록한 족보도 소용없는 나라에서 영어를 쓰면서 살아가는데, 그들이 비록 한국말을 곧잘 하기는 하지만, 정작 진지한 의사표시는 영어로 하는 녀석들이다.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과도 영어로 대화하기기 불편한, 간단히 말해서 나는 실향민(失鄕民)이다. 괜히 멋을 부려 영원한 에뜨랑제라고 프랑스말로 자조한다. 제천의 심심산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6년, 한문 서당 3년, 중학교 3년을 지냈고, 고등학교는 부산에서, 대학교는 서울에서, 대학원은 미국에서, 그래서 학교 따라 떠돌며 보낸 세월 동안에 내 말투는 온갖 사투리가 범벅처럼 뒤엉킨 부대찌개가 되어버렸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산프란시스코에서 전동차로 한 40분 거리에 있는 이른바 East Bay (東彎) 지역의 Hayward 란 동네다. 도산 안창호 선생께서 한국인들을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한 지역도 East Bay에 소속된 오클랜드(Oakland)였다. 여기 Hayward에 2차 대전 후 영어가 불편한 일본인 1세 노인들을 위해 2세들이 40 가구 3층 목조건물을 지어, 일본식 정원에 비단잉어들이 유영하는 연못에 일본식 도리이까지 곁들인 시설을 만들었다. 1세들이 나이 들어 점차로 사라지게 되자 일본인 후예들이 이 건물을 캘리포니아 주 정부에 헌납했고, 주 정부 당국은 이들의 아름다운 뜻을 살리고자 60가구를 더 지어 붙여 Y 자 모양의 100가구 아름다운 3층 목조건물을 완성하여 이름을 에덴 이쎄이 테라스(Eden Issei Terrace)라고 부른다. 그러니 나는 지금 에덴 동산에 살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이 건물에 한국인 노인들이 한 25가구 입주해 있어서 제일 수가 많고, 일본인은 단 한 가정이 남아 있을 뿐이다. 도서실에는 아직도 일본 서적들이 상당히 많이 있고, 방 한칸은 특히 일본식으로 단장된 곳을 보존하고 있다. 현재로는 여기 있는 일본 책들을 즐겨 읽는 사람이 아마도 바로 나 하나뿐일 것이다. 그리고 유일한 일본 할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장 정중한 예의를 갖추고 대해주는 사람도 나 하나뿐일 것이다. 내 아내는 한국인 할머니들을 부추겨서 노래 동아리를 만들고, 매주일 한 차례씩 가라오케 시간을 즐기며, 영어가 불편한 한국 할머니들의 유일한 통역관 노릇도 하는, 이른바 한국 할머니부대의 소대장 노릇을 잘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상대할 할아버지들도 없으니, 그저 혼자 책도 읽고, TV로 Youtube를 통해 하염없는 시간들을 때우고, 종종 10마일쯤 떨어진 해안 골프장에 혼자 나가서 서툰 골프채를 휘두르고 오기도 한다. 행여 외로운 신선놀음이라고 부르지 말라! 나의 눈물은 가슴 속으로 흘러내리고 있으니까. 그 좋아하는 테낄라(Tequila) 술도 누구 더불어 마실 상대도 없으니, Tequila가 그만 The Killer(살인자)로 변한다. 아아 구례에서 더불어 술도 마시고 책도 읽던 친구들, 내가 주책(酒冊)바가지들로 이름을 붙였던 그 늙은이들도 사무치게 그립다. 나의 노년을 지탱해주는 경제적 도움은 미국에서 살아온 30여년 동안에 내었던 사회보장제도 세금과 연금을 합해 에덴 이쎄이테라스에 입주 가능한 자격 때문이다. 소득이 너무 많으면 들어올 수 없는 저소득 노인 아파트라서, 일부 영리한 한국 할머니들은 재산을 전부 자녀들에게 양도하고, 자기 은행 잔고는 최소한으로 줄여서, 가짜로 가난해진 노인 신세로 10년을 기다려 이곳에 들어온다. 산프란시스코 지역 주택값은 미국 전역에서도 뉴욕과 더불어 최고 수준이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12평 아파트면 대략 월 3000달러 정도인데, 이곳 저소득층 노인아파트에선 그것의 10분의 1정도 월세를 내고 산다. 나로서는 죽을 때까지 미국 정부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이제는 정말 마음이 안 가는 곳이다. 산프란시스코는 미국 전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낭만의 도시로 한때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인 곳이기도 했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1953년 한국전쟁 직후,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으로, 처음에는 장세정이 노래 불렀으나, 나중에는 백설희의 꾀꼬리 같은 절묘한 목소리로 부른 노래로 널리 알려진 산프란시스코란 트로트 노래가 있다: 1.비너스 동상을 얼싸안고 소근대는 별 그림자, 금문교 푸른 물에 찰랑대며 춤춘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나는야 꿈을 꾸는 나는야 꿈을 꾸는 아메리칸 아가씨. 2.네온의 불빛도 물결따라 넘실대는 꽃 그림자. 빌딩에 날아드는 비둘기를 부른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내일은 뉴욕으로 내일은 뉴욕으로 떠나가실 님이여. 3.메트로포리탄 오페라에 꿈을 꾸는 님 그림자. 달콤한 그 키스에 쌍고동이 울린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나이트 여객기가 나이트 여객기가 유성같이 날은다 나는 이 노래를 지금도 3절까지 외워서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산프란시스코는 Homeless (노숙자)들의 난장판으로 변해서, 거리 곳곳에 일인용 천막들을 치고, 주변을 쓰레기더미로 만들며, 대낮에도 길거리에 팔을 늘어뜨리고 허리를 굽힌 채로 몇 시간이고 서 있는 좀비들 같은 마약에 취한 인간들이 점령한 더러운 거리로 변했다. 심하게 말하면 뉴욕, 쉬카고, 로스안젤레스, 휴스톤, 아틀란타 등등 미국의 대도시들이 거의 같은 모습들이다. 나는 산프란시시코로 자동차를 몰고 나가 주차할 생각이 없다. 숱한 자동차들이 파괴되고 물건들은 도둑맞고, 밤이면 절대로 혼자 다닐 생각조차 못하는 위험지역들이 미국의 도시들이다. 미국은 총기, 마약, 홈리스 때문에 망해가고 있는 중이다 . 한국은 이에 비하면 지상 천국이다. 그러니 미국, 유럽, 전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이 한번 한국에 오면, 그냥 거기에 눌러앉아 살고 싶어 하는 나라가 되었지. 도처에 WiFi 인터네트가 깔렸고, 밤중에 홀로 거리를 산책해도 위험하지 않고, 언제라도 택배가 가능하고, 병원 가기가 이웃집 가기처럼 편한 나라는 아마도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 (물론 요즈음 응급실 뺑뺑이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이상한 놈이 용와대에 앉아있기 때문이고). 여기 미국에선 내가 병원 갈 일이 있어서 의사 예약을 잡는데, 자그만치 1달 뒤로 예약일을 잡아야 하는 미국의 병원 현실에 그만 질렸다. 사실 나는 이민 1세 한국인들 가운데서는 그래도 영어를 잘하는 편이리라. 미국인 교회에서 영어로 목회를 한 것만도 6년이나 했으니. 그래도 집 밖에만 나가면 영어에 영어(囹圄)된 신세가 괴롭다. 한국말은 잘할 자신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지리산의 넓은 품속에 안긴 구례, 5일 시장이 서는 날이면 나는 참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그곳에 나가 어슬렁거리다 아는 사람 만나면 막걸리도 마시며 이야기도 나누고, 구례 향교에 나가 뒤늦게 고전 공부도 하면서 사람들도 사귀고, 3, 4월이면 환장하게 피어나는 꽃들 속에 파묻혀 몽환적인 감상에 젖어 살기도 했지. 더구나 나 같은 늙은이를 친절하고도 정중하게 상대해 주는 구례의 젋은이들이 왜 이다지 그리운가? 아아 돌아가고 싶어라, 내 고향 구례로! 아아 그리워라 지리산인이여! - 2024년 12월 1일 언재 한성수 (焉哉 韓盛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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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이 그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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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4일 성명서] 헌정 유린 내란 수괴 윤석열을 탄핵하고 처벌하라!
- 오늘 윤석열 대통령은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국회는 3시간 만에 계엄 해제를 의결했습니다.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는 명백히 헌법 위반이며 윤석열은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닙니다. 지리산지키기시민연대를 포함한 지리산권 시민사회단체는 ‘헌정 유린 내란 수괴 윤석열을 탄핵하고 처벌하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전문 올립니다. [성명서] 헌정 유린 내란 수괴 윤석열을 탄핵하고 처벌하라! 1. 윤석열은 대통령이 아니다. 그는 미치광이다. 지난밤 윤석열은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회는 3시간 만에 계엄 해제를 의결했고 윤석열은 다시 3시간 후 계엄을 해제해야만 했다.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는 명백히 헌법 위반이다. 헌법에 따르면 비상계엄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서만 선포할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그런 징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계엄 요건조차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군 병력은 국회 본청 유리창을 깼고 국회의장과 여야 대표 체포를 시도했다. 서울 시내에는 장갑차와 헬기가 출동했다. 이것은 내란이자 폭동이다. 윤석열의 계엄 선포는 법과 국민을 농락한 반민주적 작태이자 온갖 비리, 범죄로 궁지에 몰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친위 쿠데타이다. 이제 국민은 단 하루도 편히 쉴 수 없다. 윤석열 일당은 국민들이 피와 땀으로 쟁취했던 민주주의를 산산히 부수고 있다. 우리는 언제든 독재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잠도 편히 잘 수 없다. 이게 21세기 민주 사회가 맞단 말인가! 윤석열은 철 지난 반공 이념을 휘두르며 촛불 시민과 국회를 국가 전복 세력으로 몰았다. 무너져가는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이 참담한 상황을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윤석열 일당이 저지른 헌정 유린, 내란 행위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 그들의 범죄, 부패를 발본색원해야 한다. 이 땅의 주인은 국민이다. 우리는 윤석열을 더 이상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 주권자로서 준엄히 외친다. 하루 빨리 윤석열을 탄핵하고 내란, 폭동의 죄를 묻자! 하루 빨리 윤석열을 탄핵하고 민주주의와 민생을 회복시키자! 2. 국민들은 이번 내란 행위를 통해 국가 폭력은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음을 생생하게 보았다. 사실 지리산, 설악산, 가덕도, 새만금 등 무수한 생명의 보금자리에서는 오래전부터 국가 폭력이 계속돼 오고 있었다. 특히 역사적으로 지리산은 국가 폭력의 한복판에 있었으며 여전히 그 상처가 아물지 못한 곳이다. 우리는 생명의 편에 서는 사람들로서, 지리산과 뭇 생명의 평화와 공존을 바라는 사람들로서 또 다른 국가 폭력이 반복되지 않도록 어떤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할 것이다. 위헌, 위법한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 정부의 온갖 폐단은 오늘날 기후위기를 불러온 탐욕과 이기심과도 맞닿아 있음을 모두 되새기길 바란다. 우리는 착취와 갑질, 명령과 복종, 혐오와 편가르기로 이어져 온 우리 사회를 반성하고 개혁하는 데 시민으로서 함께할 것이다. 생명의 편에서 연대해 온 모든 이가 한목소리로 이번 내란 사태를 규탄하고 기후위기를 풀어가는 데 뜻을 모을 것이다. 2024년 12월 4일 지리산지키기연석회의. 지리산종교연대. 지리산사람들. 시민의숲.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지리산산악열차반대남원대책위원회. 대안행동바로. 남원역사연구회. 남원산성연구회. 최초춘향영정복위시민연대. 구례양수댐반대대책위, 중산리반내골주민연대. 지리산케이블카반대산청주민대책위원회. 하동기후시민회의. 하동녹색당. 하동참여자치연대. 함양군농민회. 함양기후위기환경연대. 함양난개발대책위원회. 함양시민연대. 케이블카없는지리산실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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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4일 성명서] 헌정 유린 내란 수괴 윤석열을 탄핵하고 처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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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참교육 키즈의 생애 1편 "봄날"
- 1편 봄날 매캐한 최루탄 연기가 벚꽃처럼 피어올랐다. 수현은 날아오는 화염병이 강진 앞에서 터지는 것을 봤다. 화염병이 터지자, 강진의 바지에 불이 붙었다. 강진은 떨고 있었다. 수현이 강진에게 달려가 불을 껐다. 부지에 불이 붙어 있었다. 강진이 머뭇거리는 것을 본 체포조가 강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도망쳐” 수현은 강진의 손을 잡고 교문 안으로 달려갔다. “다행이다. “잡힐 뻔했잖아.” 교문 안으로 들어와 확인해 보니 불탄 바지가 찰거머리처럼 강진에 다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바지를 떼자, 강진의 피부와 함께 벗겨졌다.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억… 강진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병원에 가자… 아프지…. “ “아…. 괜찮아…. “ 강진은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 “뭐가 괜찮아…. 아파 보이는데….” 그해 강진과 수현은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같은 과에 들어왔다. 고등학교 때 말이 없고 얌전하던 강진이 시위 현장에 나온 것을 본 수현은 많이 놀랐다. 그럴 놈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수현은 집에서 학교까지 강진을 부축했다. 화상에 심해서 혼자 걷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강진은 학교 근처에 살았다. 수현은 자취방에서 강진이 사는 곳까지 매일 걸어갔다. 그렇게 수현은 강진과 벚꽃이 질 때까지 함께 걸었다. 꽃이 지자, 강진은 혼자 걸었다. 강진은 문학서클에 가입했다. 강진은 고등학교 때 친구보다는 책하고 가까운 아이였다. 친구들이 운동장이나 체육관으로 향할 때 강진은 조용히 교실에 남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 국문과에 갈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강진은 국문과가 아닌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생각이 있었는지 문학서클에 가입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운동권 서클이었다. 선배들을 따라 그날 처음 집회에 나갔다 화상을 당한 것이었다. 강진의 다리에는 커다란 화상자국이 남았다. 강진이 혼자 걷게 된 이후 그들은 한동안 보지 못했다. 수현과 강진 둘 다 서클 활동에 빠져 있었다. 강진이 가입한 해방문학 동아리는 말만 문학 동아리지 “운동권 양성소”라고 불리는 유명한 동아리였다. 강진의 권유로 수현은 그 서클에 가본 적이 있었다. 서클 방은 학생회관 지하에 있었다. 수현이 지하 서클 방을 열고 들어가자 5~6명의 꽤 나이가 있어 보이는 선배들이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었다. 벽에는 사회과학책들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강진이 만나러 왔는데요?” "네가 수현이냐?" "네" "강진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너 고등학교 때부터 학생 운동을 했다며? "네……. 뭐…. 그런 그것은 아니고 그냥 참교육 운동할 때 강당에서 연설을 좀 하기는 했습니다." "대학생들 집회 때 따라다니기도 하고요" "너 나경이를 안다며?" 네…. 나경은 수현이 고등학교 때 만난 선배다. 수현은 고등학교 때 경찰서 근처에서 혼자 자취를 했었다. 경찰서 앞에서 집회가 자주 있었다. 집에만 있기 심심했던 수현은 시위대를 따라가 본 적이 있었다. 그날도 경찰서 앞에서 집회하던 날이었다. "야. 너 고등학생 아니야?" "네…. 그런데요. 고등학생이 여기 나오면 어떡해…. 나경은 어린 수현이 걱정되었다. 잡히면 너 고생한다. 그럼, 누나는요. 잡히면 고생 안 하나요? 뭐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대학생이고 너는 고등학생이잖아…. 상황이 달라…. 뭐…. 저는 달리기 잘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누나…. 딱 보니 잘 달리지 못해 경찰에게 잡힐 것 같은데요. 야. 너 누나를 뭐로 보는 거냐. 누난 절대 안 잡힌다. 왜요? 누나는 변신하면 되거든. 나경은 가방 안에 가발과 다른 옷을 보여 주었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나경과 수현은 그 후로 몇 번 시위 현장에서 만났다. 사실 나경를 만나기 전에도 수현은 대학교 앞 사회과학 서점에서 일명 운동권 필독서를 사서 읽고 있었다. 철학에세이, 공산당 선언, 강철군화, 전태일 평전, 그람시나, 역사란 무엇인가 같은 책들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집회에 참여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수연이 그런 책에 관심을 가진 것은 친구 때문이었다. 대학생 형이 준 책이라면 수현에게 친구가 빌려준 책이 시발점이 되었다. 해직한 선생님들이 만든 거꾸로 읽는 교과서와 세계사를 읽었다.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서정주가 친일파라고” 그런데 왜 그런 사람의 글을 공부해야 하지. “역사는 누구 입장에서 쓰는 거야? 왕의 역사와 백성의 역사는 다른 것 아닐까? 새장에서 태어난 새는 나는 자유를 모르지만, 새장으로 잡혀 온 새는 언제나 하늘을 마음껏 날던 자유가 그리운 것이다. 수현은 스스로 교실과 교과서라는 새장안에 갇혀서 진정한 자유를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질문들이 끝없이 이어졌고 수현은 책을 읽기 전과 후가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 후 나경 선배와 몇 번 만나면서 막연하게 대학교에 들어가 학생 운동을 해야겠다고 수현은 생각했다. 어쩌면 수현에게 나경과 학생 운동은 대학에 입학해야 할 유일한 이유 있는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때 수현의 꿈은 노동운동가였다. 수현이 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힘없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조직을 만들어 힘을 키우고 불의 일에 대항해서 싸우는 일은 멋있어 보였다. 가난한 농부들이 연대하여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 싸우고 가난한 노동자들이 권리와 임금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당연 것 처럼 보였다. 수현은 전태일 열사처럼 “노동해방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대학에 들어갈 생각이 없어졌다. 교실안에 친구들이 입시를 위해 공부하던 고 3학년때 수현은 고향 마을에 독서 모임을 만들었다. 책을 읽고 함께 토론하는 고등학생들의 모임이었다. 수현이 살던 마을엔 논과 들뿐이 시골 농촌 마일이었다. 아이들 부모는 농민이었고 모두 하나 같이 가난했다. 수현은 매주 토요일 밤에 아이들과 마을회관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오빠 이런 모임을 꼭 해야 해요?” “왜 우주야?” “이상해?” “아니" “오빠가 이상해 보여?” “아니” “그런데 이야기가 너무 어려워?” “세상이 그렇게 살기 어려워?” “열심히 일하고 절약해서 살면 잘 수 있잖아? “그렇게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우주는 수현보다 두 살 어린 옆집 아이였다. 어려서부터 수현을 좋아했다. 모임을 만들자고 하자 가장 반기던 아이였다. 매일 밤 마을회관에 모이던 아이들만 15명 이상이었다. 수현의 모임의 회장으로 매일 밤 아이들에게 일주일 동안 읽었던 책 이야기를 해주거나 매주 주제를 만들어 토론하는 모임을 이끌었다. 아이들은 매주 모여서 함께 논다는 것만으로도 그 모임을 좋아했었다. 수현은 아이들과 모임을 가지면서 대학에 들어가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회에서 나경을 만나고 나서 대학에 가야겠다고 수현은 생각하게 되었다. "수현아! 우리 서클에 가입하지 않을래" "친구 강진도 있고…. "전 이미 가입한 서클이 있어요. "아. 그래. "서클 두 개 가입한다고 잡아가는 것도 아닌데…. 근데 선배님들은 나이가 있어 보이는데요? 우리…. 나이가 좀 있기는 하지…. 학생 운동이라는 것이 간단한 것이 아니거든…. 네…. 수현은 서클에서 나왔다. 그때 강진이 서클로 들어오고 있었다. 수현아. 오랜만이다. 우리 서클에 왔구나. 같이 들어가자. 내가 선배들 소개해 줄게. 아니야…. 이미 만나고 왔어…. 그래…. 우리 서클에 가입할 거야? 아니야. 왜? 생각이 좀 달라…. 그래…. 나중에 보자.” 강진이 가입한 서클은 총학생회 간부를 주로 배출하는 유명한 서클이었다. 수현은 이미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현은 이 서클이 자신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강진이는 알고 가입한 것일까?” 강진이 학생 운동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수현은 믿을 수 없었다. 수현이 고등학교 때 참교육 선생님들의 부당해고에 분노에 강당에서 연설했을 때 수현을 이상하게 쳐다보던 강진의 눈빛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에 가입한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강진의 인생이니 개입할 일은 아니라고 수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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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참교육 키즈의 생애 1편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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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첫눈 소식
- 「섬진강 편지」 - 지리산 첫 눈 소식 여기저기 눈소식입니다. 지리산에도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첫눈이 왔습니다. 눈은 소통의 메신저입니다. 영문자판에 한글로 '눈'을 쳐보세요. 'SNS'입니다. 소원했던 친구에게 첫눈을 핑계로 전화를 해봐야겠습니다. 눈이 오면 누나가 많이 생깁니다. 설악산 눈 와? 전화를 하면 설악산 누나가 생기고 대둔산 눈 와? 전화를 하면 대둔산 누나가 생깁니다. 새롭게 태어난 하얀 세상, 첫눈 소식을 전합시다. 아침 일찍 노고단에 올라 첫눈을 맞이했습니다. 어렵게 올랐는데 살을 에는 칼바람에 20분을 못 견디고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자연 앞에 겸손하라! 새삼 깨달으면 지리산길 설설 기어 내려온 첫눈 오는 날이었습니다. -섬진강 /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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