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10-0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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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효자대추
    「섬진강 편지」 -효자 대추 텃밭밖에 없는 시골살이라 이웃들로부터 이것저것을 얻어먹는데 내가 유일하게 나눠줄 수 있는 품목이 대추다. 약을 치지 않으니 다른 과일들은 풋것으로 다 떨어져 버리는데 이 대추만은 해마다 풍성해 우리 집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다. 맛이 들기 전부터 오가며 따먹고 스무 봉지 정도 이웃들과 나눴으니 못해도 30킬로쯤은 땄나 보다. 마지막 대추 한 봉지를 섬진강가 박시인 집에 건네고 돌아오는 아침 강마을 나락빛도 넉넉한 황금빛으로 출렁인다
    • 문화예술
    • 섬진강 편지
    2026-10-08
  • [비아의 지리산 둘레길 완주3] 함양 편
    지리산둘레길 함양 구간은 금계에서 동강까지, 동강에서 수철까지 이렇게 두 구간에 해당한다. 남원인 인월 구간에 함양 구간인 금계로 넘어오고, 동강에서 다시 산청 구간인 수철마을로 넘어가게 된다. 다른 구간은 끝점을 기준으로 나눈 반면 함양 구간은 시작점을 기준으로 나눈 까닭은, 동강에서 수철로 넘어가는 구간이 거의 산청 구간이긴 하지만, 이래저래 행정편의로 나누고 보니 온전한 함양 구간은 한 구간만 해당하여 함양에서 시작하는 동강 구간도 함양에 포함해 본다. 꼭 지역을 나누어 둘레길을 걷는 것은 아니지만, 지역별로 미미한 차이점과 특징들을 볼 수 있다. 함양 산청 구간은 지리산 자락을 타고 넘는 마을과 길들이어서 경사가 다소 있는 숲구간과 임로길이 많다. 또한 남원의 2,3구간을 버스로 이동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함양의 금계-동강 구간도 버스로 다시 원점회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함양군은 군청과 대부분의 마을이 오도재 너머에 있고, 지리산 천왕봉 자락에 위치한 마천읍 마을만 지리산자락에 따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함양군이 있는 곳과는 별개의 다른 군의 마을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이유로 마천 사람들은 남원 인월방향으로 더 잦은 교류를 한다. 마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전라도 사투리와 경상도 사투리가 다소 뒤섞인 말투를 사용한다고 하니 굳이 지역을 구분하는 것은 행정상의 편이에 해당할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4구간. 금계-동강 (12.7km/ 난이도 상. 5시간) 지리산둘레길 함양센터에서 시작되는 둘레길이다. 인월에서 금계로 천왕봉자락이 있는 지리산을 바라보며 계곡 건너편 길을 걸어서 금계로 왔기 때문에, 다리를 건너 지리산 자락 안으로 들어는 코스이다. 의중마을 아름드리 당산나무에서 인증 스탬프를 찍고, 벅스의 화살표를 바라보면 두 갈래 길로 나뉜다. 지리산둘레길 ‘숲순환코스’다. 평탄한 아랫길을 따라 걷든지, 산길로 들어서든지, 방향을 선택하는 것은 자신의 걷는 역량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산이 좋아 왔으니 당연히 숲길을 권한다. 당산나무가 있는 의중마을에서 서암정사에 이르는 숲길은 정말 아름답다. 서암정사는 벽송사로 오르는 길 아래에 있다. 벽송사로 오르기 전에 아름다운 서암정사를 둘러볼 수 있는 것은 이 코스의 또 하나의 묘미다. 입구부터 탄성을 자아내는 바위와 조각들이 색다른 느낌과 풍광으로 반긴다. 또한 서암정사 석굴법당은 자연 암반에 굴을 파 극랑정토를 표현한 예술품에 가까운 조각상들로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다. 지리산 둘레길을 돌다 잠깐 옆으로 비켜갔다. 다시 벽송사 가는 갈림길로 돌아와 벽송사를 향해 오른다. 찻길로 나 있어 길은 넓고 시멘트길이나 경사가 다소 있는 편이다. 벽송사를 지나 산길로 들어서면 정말 가파른 등산로를 올라야 한다. 그러나 그리 길지 않으니 쉬엄쉬엄 오르면 된다. 어느 정도 오르면 오솔길이 이어지고, 다음에는 급경사 내리막길이다. 숲길을 따라 내려오면서 계곡도 건너고. 산길을 내려오면 당산마을에서 갈라졌던 ‘숲순환길’과 만난다. 급경사 산길이 힘든 사람들은 아랫길을 이용해 오면 된다. 여기서부터는 아주 길고 긴, 임로와 마을 포장도로가 이어진다. 숲길까지는 탄성을 지르던 사람들이 포장길을 내려오며 툴툴거린다. 포장도로를 걸어 마을과 마을을 지나는 길은 그늘이 없어 덥고 지루하다. 계곡을 따라 쭉 뻗은 길, 구불구불 마을길, 구시락재를 넘어가는 길. 그래도 주변 풍경을 바라보고, 건너편 마을의 풍경도 즐기고, 도토리를 주워 걸어가시는 할아버지, 물에 담아 많은 도토리를 불리고 계시는 할머니를 만날 수 있는 정겨운 길이다. 숲이 있고,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는 그래도 좋은 코스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완주가 목표가 아니라면 긴 숲길만 걸어도 좋은 길이다. 당산나무에서 서암정사, 벽송사로 갔다가 다시 순환지점을 타고 원점회귀하는 방법으로 선택하면 된다. 일행 중 한 사람은 이런 포장도로를 산길보다 더 좋아하기도 했으니 사람마다 길을 걷는 취향이 다름에 틀림없다. 5구간 동강-수철 (12.1km/난이도 중/5시간) 지리산둘레길 구간 중 유일하게 폭포를 만날 수 있는 구간이다. 거의 숲길로 이루어져 있어 난 이 길을 아주 좋아한다. 추모공원에서 산을 넘어가는 구간은 네다섯 번 걸었던 것 같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이 길 걷는 것은 마다하지 않는다. 동강마을에서 조금 걸어 점촌마을로 향하면 바로 ‘함양방면 표지판 시작점이 나타난다. 마을길은 함양에서 산청으로 이어지고, 산길은 함양과 산청을 넘나든다. 그러니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사실 동강-수철 구간은 ‘산청함양추모공원’에서 시작한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산청함양 추모공원은 산청함양사건 희생자 합동 묘역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지리산 토벌작전을 수행하던 중 무고한 민간인 705명을 학살하였는데, 이 때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모신 묘역이다. 지리산은 많은 역사의 아픔을 품은 산이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만큼 한국 현대사의 슬픔들이 곳곳에 새겨져 있기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추모공원을 둘러보고, 숙연한 마음으로 저수지길을 돌아 산길로 접어든다. 좁은 오솔길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자그마한 폭포를 만나게 된다. 상사폭포다. 늦봄까지 얼음이 남아 있는 서늘함에 잠시 피로를 식히고, 다시 길을 나선다. 폭포를 지나 등산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쌍재에 이른다. 쌍재는 함양사람들이 곶감을 지고 산청으로 넘나들던 고개이다. 쌍재와 고동재에서는 왕산이 바라보인다. 왕산은 가야 10대 왕인 비운의 왕 '구형왕'의 타원형 (구)돌무덤이 있다고 한다. 구형왕은 자신이 죄인이라하여 돌무덤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그래서 무덤에 풀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지리산둘레길 5구간에는 구형왕의 슬픈 이야기가 얽혀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쌍재에서 임로를 따라 오르면 또 하나의 고개가 나오는 데, 그래서 쌍재인가 보다. 아무튼 또 다른 쌍재에서 산길을 따라 올라 고동재에 이른다. 고동재는 고동형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고동재라 불린다. 신라군을 피해 피난 생활을 하던 '구형왕'의 군사가 멀리 산청의 황매산에서 신라군사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보고를 하자, 왕은 다시 피난길에 올라 왕등재에서 내려와 고동재를 넘으며 고동을 불며 쌍재를 지나 왕산을 넘어갔다고 한다. 비록 전설이지만 고동을 불던 왕의 심정은 어떠했을지 헤아려본다. 고동재부터는 내리막길이다. 경사도 급하지 않은 예쁜 숲길이다. 숲길을 따라 내려오다보면 나무가 울창한 임로를 만나고, 임로에서 수철마을까지는 금방 내려온다. 5구간은 추모공원에서 수철마을까지 거의 모든 길이 숲길로 이루어진, 그리고 슬픈 역사를 되새겨 보게 하는 아름다운 구간이다. 이제 산청으로 넘어왔다. 또 다른 아픔을 간직한, 그리고 또 다른 아름다움을 지닌 산청 구간을 만나 보자. 함양구간은 두 구간 밖에 해당하지 않아 좀 더 자세히 설명할 수 있었으나, 산청, 하동 구간은 구간이 많아서 간단히 설명을 해야 할 것 같다. 하긴 더 자세한 설명은 둘레길 홈페이지에 다 있으니 긴 말이 필요 없기는 하다.
    • 고을이야기
    2026-10-08
  • 쥐 잡기와 산통 깨기
    내 안에 있는 악마가 가끔 입 밖으로 욕을 내뱉을 때가 있습니다. 저런 쓰레기 같은, 망할 세상, 이라고요. 악마는 복수의 칼을 갑니다. 누군가에게 슬픈 일이 벌어졌는데도 쌤통이라고 말합니다. 잘못했으니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고요. 또 이 악마는 아주 비겁합니다. 큰 소리로 말하지 못하고 작은 소리로 말합니다. 광장에 나와 말하지 못하고 집안에서만 말합니다. 그래도 난 이 악마를 버릴 수 없습니다. 가끔 이렇게라도 욕하고 분노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으니까요. 할 수 있는 일이 겨우 이것밖에 없는 것 같다고 느끼는 날엔 더욱 그가 필요하지요. 누가 소리 지를 텐가 박연준 시인의 첫 소설 『여름과 루비』를 읽다가, 내 안에 숨은 악마에게 물었습니다. 소리 지른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요. 여덟 살 여름은 동네가 떠내려갈 정도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한 아줌마가 도망가려는 쥐의 꼬리를 한쪽 발로 잡고는 “집사님 빨리 연탄집게!” 하고 외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여름이 찢어질 듯 비명을 내지른 채 멈추지 않자, 아줌마는 여름에게로 와 화를 냅니다. 다 잡은 쥐를 여름이 소리 지르는 바람에 놓쳤다고요. 사람들은 쥐가 무서워서 소리를 지른 줄로 생각했을 테지만, 여름은 ‘쥐가 아니라 연탄집게의 도착’을 두려워했습니다.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날 일’을 무서워했던 여름은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름이 무서워한 일은 쥐의 죽음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날 그 교회 마당엔 쥐를 잡으려는 아줌마뿐 아니라 친구 루비를 잡으려는 남자애들도 있었거든요. 집에 방이 세 개고, 목욕탕이 두 개 있다는 루비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눈으로 확인해 보고야 말겠다는 남자애들이 루비를 앞장세워 기어코 그의 집에 따라가던 날이었습니다. 루비가 앞서고, 그 뒤를 남자애들이, 또 그 뒤를 여름이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여름은 굳이 루비의 말을 심판대에 세워 쥐 잡듯 잡도리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남자애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집에 가다 말고 루비가 교회 앞 벤치에 앉아 책을 보려 하자 그네들은 얼른 네 집으로 가자며 루비를 닦달합니다. “빨리 가라고! 순 뻥쟁이 아냐!” 여름은 아이들이 루비를 때린다면 달려가 말릴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바로 그때 아줌마가 쥐 꼬리를 밟고 집사님을 불렀던 것입니다. 여름이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면, 쥐가 잡혀 죽었을 것이고, 루비가 애들에게 맞거나 강제로 일으켜져 집으로 가야 했겠지요. 루비의 얼굴이 벌게졌고 쥐의 몸부림이 극에 달했을 때 여름은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렇게 소리를 지름으로써 루비는 남자애들로부터 달아났고, 쥐는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허탕 친 사람들이 여름을 쏘아봅니다. 여름은 너무 세게 오래 소리를 지른 탓에 목이 아팠습니다. 나는 이 장면에서 여름이 부러웠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안의 악마가 여름을 부러워했습니다. 소리를 질러서 산통을 깼으니까요. (아, 좋겠다…….) 와장창, 쨍그랑, 또는 쩍 나의 악마는 늘 산통을 깨고 싶어 합니다. 산통은 점을 칠 때 쓰는, 산가지를 넣은 통인데, 산통을 흔들다가 뚜껑에 난 작은 구멍으로 산가지가 튀어나오면 그 괘로 점을 쳤다고 합니다. 무슨 까닭인지 모르지만, 오늘날 ‘산통을 깬다’는 건 ‘다 잘되어 가던 일을 이루지 못하게 뒤틀다.’라는 뜻으로 쓰고 있어요. 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된 이튿날 산통을 깬 사람이 생각납니다. ‘제로웨이스트샵 알맹상점’의 고금숙 대표인데요, 그는 “탄핵안 가결 풍선 날리기, 나만 불편해?”라는 글을 자기 SNS에 올렸어요. 뭔가를 축하하기 위해 굳이 미세플라스틱을 지구에 흩뿌릴 필요가 있냐는 거죠. 그러면서 “누군가는 환경을 생각하자는 제안을 ‘기쁜 순간에 산통을 깬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산통을 깨고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해서, 나의 악마가 기뻐했답니다. 지난 8월, 산통 깨기에 진심인 사람들이 모여 ‘919 기후정의행진 지리산행동’을 준비했습니다. 기후위기를 부추기는 ‘자본 추앙 사회’의 흐름을 깨는 일을 산통 깨기라고 생각한다면 말이죠. 지리산에 케이블카를 놓는다고 해도, 벽소령을 뚫어 도로를 놓겠다고 해도, 한 기업이 하루 600톤이 넘는 지리산 지하수를 퍼내도, 여기저기 송전탑이 세워지고 농지가 사라진다고 해도, 3대 메가프로젝트로 막대한 이윤은 사기업이 가져가고 물 부족과 각종 오염은 시민이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 와도, 누군가는 화석연료의 풍요를 누리고 누군가는 기후재난으로 죽는 기후부정의가 벌어져도, 소리 지르지 않는다면 나는 연탄집게가 될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올해 지리산권 기후정의행진은 구례와 남원 산내에서 열립니다. 구례는 19일 오후 3시 구례읍사무소에서 출발해 봉성산 정상까지 행진합니다. 13일부터 19일에 걸친 기후정의 주간에는 크고 작은 시민 작당 모임도 열립니다(포스터 참고). 거대한 흐름이 아무리 내게 “믿으셔야 합니다” 할지라도 나는 의심하겠다, 그 흐름을 깨 보겠다, 하고 함께 말할 수 있는 기후정의행진에서 만납시다. 그때 우리도 여름처럼 소리를 질러 봅시다. 아무리 흔들어도 착취와 수탈만 나오는 이 산통을 같이 깨 봅시다. 이 글은 <봉성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 기후위기
    2026-10-08
  • [곰주옥 X 인간주옥] ⑦ 풍요로운 삶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풍요로운 삶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걷고, 지리산에 가고, 관심 가는 책을 읽고,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텃밭에서 갓 딴 채소로 먹을거리를 만들며 살아간다고 말할 것이다. 크고 특별한 일이 아니어도, 내가 좋아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그것은 나에게 풍요로운 삶의 한 모습이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풍요로운 삶을 위해 여러 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원하다 보면 욕심이 생기고, 그 욕심은 갈등으로 번지기도 한다. 풍요롭다는 것은 많이 가지는 것과는 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는 풍요로운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러나 그 권리를 빼앗긴 존재들이 많다. 인간의 먹이가 되거나 인간의 필요를 위해 이용되는 존재들이 그렇다. 구례곰마루쉼터(이하 곰쉼터)의 곰들도 당연한 권리를 빼앗긴 존재들이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한국에 와서 사육농장의 뜬장에서 평생을 살았다. 다행히 그들은 구조되어 곰쉼터에서 살고 있다. 곰쉼터는 곰들에게 안전한 공간이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곰들에게는 넓은 땅이 제공되지 않았고, 사육농장에서 살아오는 동안 잃어버린 몸의 기능도 있다. 그래서 곰들이 풍요로운 삶으로 나아가기에는 여전히 부족함이 많다. 그 부족함을 조금씩 채워가는 활동 가운데 하나가 ‘풍부화’다. 풍부화는 잃어버린 감각과 근육을 되살리고, 동물이 본래 가지고 있던 행동을 다시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활동이다. 곰쉼터에서 풍부화를 담당하는 신유리 님은 곰들을 위해 어떤 활동을 하고 있을까? “초반에는 이것저것 많이 해봤어요. 커피박을 사료 봉지에 넣어서 줘보기도 하고, 생수통에 넣어줘 보기도 했어요. 그때는 계획표를 만들어서 오늘은 마대, 내일은 생수통, 그다음에는 또 다른 것을 하는 식으로 로테이션 했지요. 그런데 곰들은 생각보다 흥미를 보이는 빈도가 높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여러 가지를 하기보다는 한 가지를 우물 파듯이 깊이 있게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어요. 예를 들면 일주일이나 한 달 동안 한 가지 풍부화 물품을 집중적으로 사용해 보는 식으로요. 지금은 곰들의 반응을 살펴보면서 조금씩 체계를 잡아가는 중이에요.” (2026년 10월 1일 신유리 님 인터뷰) 곰쉼터의 풍부화 활동에 곰들은 제각각 반응한다. 사람이 좋다고 생각한 것이 곰에게도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지난여름 곰쉼터에서는 얼린 과일을 매일 오후 1시에 하나씩 주기도 했다. 목욕통에 입욕제를 넣어 거품을 만들어주었더니 곰들이 좋아했지만, 가끔 그것을 마시는 곰이 생겨 중단했다. 곰들은 큰 타이어에서 눕는 것을 좋아한다. 호스로 만든 해먹을 사용하는 곰들도 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곰들도 성격이 다르다. 좋아하는 활동과 도구가 다르고, 예상하지 못했던 부작용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서 곰들을 위한 풍부화는 정해진 답을 실행하는 일이 아니라, 곰들의 반응을 살피고 시도하고 다시 바꾸는 과정에 가깝다. 풍부화 활동은 나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지난봄 구례의 카페들은 커피박을 모아 곰쉼터에 전달했다. 커피박 냄새를 맡으며 좋아하는 곰들을 보면서 행복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가 쓰레기로 버리는 것이 다른 존재에게는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그 과정에 나도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919 기후정의행진 지리산행동’의 날에는 곰들의 풍부화를 돕기 위해 칡덩굴을 수거했다. 칡덩굴은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칡을 걷어내고 있는 모습을 본 동네 어르신 한 분이 물었다. “뭐 하는 사람들이요?”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고속도로 다리 아래에서 도로공사 직원도 아닌데, 초등학생부터 지긋한 나이의 어른까지 여러 사람이 칡덩굴을 열심히 걷어내고 있으니 말이다. 이날 사람들은 성심껏 활동했고, 어느새 트럭 한가득 칡덩굴이 쌓였다. 40분 만에 수거를 마치고 곰쉼터로 이동했다. ↑고속도로 다리 아래에서 칡덩굴을 수거하는 활동 참여자들 ↑40분 만에 한 트럭 가득 칡덩굴을 모았다 곰쉼터에서는 수거한 칡덩굴을 곰들의 먹이이자 놀이도구로 활용할 수 있도록 칡공을 만들었다.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흔하게 자라는 덩굴이지만, 곰에게는 잎을 뜯어 먹고, 남은 덩굴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새로운 풍부화 물품이 된다. 칡공을 만드는 것까지가 이날 활동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문수사를 나온 무니, 수리, 부기에게 칡공을 전달할 수 있었고, 그들이 칡잎을 맛있게 먹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활동 참가자들은 칡잎을 먹는 곰을 보는 순간 모든 피곤이 날아가 버렸다고 했다. 뿌듯하고, 기쁘고, 고맙고, 앞으로 뭔가 더 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구례곰마루쉼터에서 칡공을 만드는 활동 참여자들 우리에게 흔한 식물이 곰에게는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숲에서 살아보지 못한 곰들에게 칡잎을 맛보는 일은 어떤 경험일까. 윤주옥 : 모든 곰들이 칡잎을 좋아하는 건 아니겠죠? 신유리 : 대부분 좋아할 것 같아요. 모든 곰들에게 주지는 않았지만요. 이곳에 처음 들어온 곰들에게 칡잎을 줬을 때는 다 좋아했어요. 새로 들어온 문수사 곰들도 좋아하고요. 윤주옥 : 진짜 너무 맛있게 먹더라고요. 칡잎을 좋아하나봐요. 신유리 : 칡잎만이 아니라 먹고 남은 덩굴을 가지고 노는 것도 좋아한답니다. (2026년 10월 1일 신유리 님과의 대화) ↑칡잎을 뜯어 먹는 곰 (사진 제공: 구례곰마루쉼터) 곰들이 칡잎을 먹고 남은 덩굴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면서 풍부화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풍부화는 곰에게 무언가를 ‘주는’ 일만을 뜻하지 않는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살펴보고, 좋아하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 예상하지 못한 행동이 나타나면 다시 방법을 바꾸는 일이다. 곰쉼터는 돈을 내면 누구나 찾아갈 수 있는 관광지가 아니다. 동물원도 아니다. 곰을 구경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라, 인간에게 이용당하며 살아온 곰들이 남은 삶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이다. 곰쉼터가 구례에 들어온다고 했을 때, 우리 역시 생추어리와 동물원, 동물구조센터가 어떻게 다른지 잘 알지 못했다. 곰쉼터가 왜 필요한지, 그곳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선뜻 와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칡덩굴을 모으고, 그것으로 칡공을 만들며, 곰쉼터에서 그 의미를 직접 확인하면서 조금씩 알게 된다. 곰쉼터는 곰들에게 안전한 삶터를 마련해주는 곳인 동시에, 우리가 다른 존재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곳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풍요로운 삶은 혼자 더 많이 가지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가진 시간과 힘을 조금 나누고, 그 작은 마음이 다른 존재에게 닿고, 그 존재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기뻐하는 것. 그렇게 서로의 삶이 조금씩 이어지는 것도 풍요로운 삶의 모습일 것이다. 그날 우리가 모은 것은 칡덩굴 한 트럭이었다. 누군가에게는 흔하고 귀찮은 덩굴이었을지 모르지만, 곰들에게는 먹고, 뜯고, 가지고 놀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던 사람들에게는 곰의 삶을 조금 더 가까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다. ↑곰마루쉼터 중간 방사장에 칡공을 넣어주는 활동 참가자 ↑중간 방사장에서 타이어 안쪽에 넣어둔 칡잎을 꺼내 먹는 곰 (사진 제공: 구례곰마루쉼터)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나 자신에게 다시 묻는다. ‘풍요로운 삶을 위해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앞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찾아볼 것이다. 다른 존재의 삶이 조금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면, 나의 삶도 그만큼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믿으면서. 사진 _ 정이어린. 윤주옥
    • 기획
    • 곰주옥X인간주옥
    2026-10-07
  • 핵발전소 32기의 나라에서 탈핵의 길을 걷는 순례자 - 청명 인터뷰
    "핵에서 벗어난다, 자유로워진다"— 탈핵순례자 청명이 말하는 탈핵의 의미 밀양송전탑에서 시작된 질문 하나가 한 사람의 삶을 바꿨습니다. 탈핵활동가 청명이 지리산사람들TV와 함께 우리나라 핵발전소 32기의 현실과, 16일간의 탈핵순례에서 마주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핵발전소, 석탄화력, 송전탑은 왜 늘 같은 마을에 함께 있을까요? 탈핵활동가 청명이 걸으며 확인한 에너지 생산과 소비의 온도차, 그리고 지리산에 정착해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이유를 들려줍니다. "아쉬움도 부러움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한 활동가의 이야기, 지리산사람들TV 청명 인터뷰 2부입니다.
    • 사람이야기
    2026-10-03
  • 내 얼굴도 저런갑서
    “늙어서 이쁜 사람 없어. 내 얼굴도 저런갑서" 옆자리에 앉는 할미가 귀에 대고 속삭인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나는 할미의 웃는 얼굴을 휴대폰으로 찍어 보여준다. 할미 얼굴이 달처럼 환해진다. '이쁜 사람 많아요. 봐요, 할매 얼굴' 두 눈이 감기며 활짝 웃는다. 입꼬리 주름도 활짝 웃는다. 주름은 주름진 세월을 알 리 없다. 숱한 시간이 어느 날 불쑥 얼굴을 들이댈 뿐이다. 얼굴에 파인 주름 앞에서 당혹스러운 적이 있다. 팔자 주름을 펴려고 입안에서 혀를 굴러도 보고 문질러 보고 입술을 내밀고 진동해봐도 꿈쩍않는 주름 앞에서 헛헛하지만은 않다. 주변에 널린 나뭇잎 하나 붙들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세한 결이 아름다운지 알아가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굴곡진 세월의 고랑, 잘 살았다는 어쩌면 우리에게 주는 훈장일지 모른다. 할미의 약봉지가 토요일과 일요일을 지나 월요일이면 노인복지센터로 돌아온다. “깜빡했어” 하는 할미는 약을 챙겨 먹지 못한다. 당부해도 자꾸 잊어먹는다. 늦게 퇴근하고 늦게 일어나는 가족과 시간대가 맞지 않아서 약 복용이 잘 안된다. 약이 너무 많다. 의사는 한 움큼의 약이 다 필요한 약이라고 하는데, 뭐래도 약이 많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센터에서는 순식간에 입안에 한 웅큼 약을 털어놓는다. 그 손이 왜 그리 쓸쓸한지 모르겠다. 할미 얼굴이 노인복지센터에 오면 편해지는데, 오늘은 맨 뒷좌석에 앉는 게 싫다고 한다. 다른 할미보다 인지능력이 좋아 좌석 배치에 양해를 구하다 보니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왜 나만 손해 봐야 하느냐고 하소연한다. 꾹 참다가 오늘 몰아서 화를 낸다. 내 곁에 앉아 평소 담아둔 말을 하고 또 하고 나는 듣고 또 듣는다. 아침밥을 못 먹어도 자는 아들을 위해 밥상을 차려놓고 방문 앞에서 “ㅇㅇ야! 아침밥 차려놨다.” 대답을 기다리는 어머니의 뒷모습, 구부정한 등이 애잔하다. 방문 앞에 흐르는 정적을 두고 한마디 한다. “엊저녁 늦게 와서 그래.” 마당에 키만큼 자란 들깻잎을 제치고 집을 나온다. 깻잎 향이 고소하게 길을 나선다. 덕분에 우리도 소녀처럼 킥킥대며 앞으로! 앞으로! 행진한다.
    • 고을이야기
    • 구례
    2026-10-01
  • 구례 동네 작가 정지아의 신간 찌니주의보
    구례 동네 작가 정지아의 신간 《찌니주의보》... 얼마 전 아이들이 다니는 중학교에서 학부모에게 책을 선물한다기에 이 책을 추천했다. 산 너머 사는 페친이 "아, 구례에 살았다면 더 재밌게 읽었을 텐데"라는 한탄을 읽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책을 펼치니 동중학교 아들 친구가 사는 간전면이 주 무대고, 내가 자주 달리는 수평마을, 그리고 내가 1년 살았던 양동마을, 오랫동안 구례에 살았다면 다 알 만한 레지사건들과 지명들이 나오니 책을 읽는 동안 그 풍경이 눈에 그려진다. 지리산에 터를 옮기고 지리산과 관련된 소설을 꽤 읽었는데 역시 지명이 주는 생생함이 좋았기 때문이다. 정지아 작가의 전작 《아버지의 해방일지》 역시 구례 산림조합 장례식장과 섬진강, 지리산 동네 가게 슈퍼 이런 것들이 나오다 보니 더 좋았기도 했고.. 아직 반의반도 안 읽었지만 역시 글 잘 쓰는 작가의 글은 재밌고 좋았다. 내가 정지아 작가를 좋아하게 된 것은 《빨치산의 딸》 때문이지만, 빨치산 이야기보다 작가 어릴적 이야기인 문척면에 살던 이야기가 사실 나는 더 좋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해방일지 이후의 글이 좋은 것 같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힘도 빠진 것 같고.. 그 전의 책에 비하여.. 구례에 20년 넘게 살았고 한때는 정지아 작가가 살고 있는 마을에 살기도 했지만 아직도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만난 것 같기도 하지만 긴 이야기는 해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녀의 책은 언제 만나도 좋았다. 뭐 구례 사람이 아니어도 읽어 보면 좋은 소설.. 구례 사람이라면 읽으면 두 배 세 배는 재밌는 책이다
    • 문화예술
    • 책마을
    2026-09-30
  • [안철환의 절기 이야기] 추석과 함께 가을의 정점 추분
    추분 지나면 낮보다 밤이 길어져 바야흐로 음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성장은 멈추고 2세를 준비하고 열매와 이삭이 영글어 갑니다. 일찍 익는 조생종들은 수확해 가을의 기쁨을 미리 즐기기도 하죠.추분은 음력 8월(酉월)의 정점이자 가을의 정점입니다. 추분 지나면 비와 더위로 성장의 에너지를 돕던 용도 내려와 이젠 가뭄과 찬 기운으로 열매와 이삭을 익게 해 긴긴 겨울을 대비 하는 거지요.그렇지만 이번 가을엔 가뭄이 일찍 와서 마음을 불안케 합니다. 백로 전인 9월1일 비 오곤 한방울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지 전 늦봄에도 가물어 감자 마늘이 흉작이었는데 지금 가뭄은 배추 무 등 김장 작물의 흉년을 예고하네요. 뿐이겠습니까? 벼에도 좋진 않죠. 그런데 저희 논의 벼는 아주 좋습니다. 여태까지 보면 최곱니다. 일반 벼보다 가뭄에 강한 토종벼라 그런지 모르겠어요. 가을 태풍 올지 모르니 좀더 두고 봐야겠지만요가뭄엔 직파가 최고라는 걸 가지가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종 가지를 직파한 것보다 일찍 심었는데도 직파 가지가 훨씬 좋습니다. 물도 직파 가지엔 거의 주지 않은 반면 모종 가지는 자주 주었는데도 크기나 수량이 형편이 없습니다. 직파한 고추도 이 가뭄을 너끈이 버티고 있네요. 고추는 직파만 해서 비교가 안되는 게 아쉽기는 합니다.올해처럼 고라니가 극성인 것도 가뭄과 관계있지 않나 싶습니다. 비가 오질 않으니 산에 먹을 풀도 적을테니요. 요즘 산엔 나무가 너무 우거져 빛이 들어가지 않아 새순도 별로 나지 않을거구, 가을엔 그나마 나무 새순도 없어 더욱 민가로 내려옵니다. 추분되면 밭의 무 배추 콩잎 고구마줄기 등 채소 잎이 한입에 딱 먹기 좋게 자라 더 피해가 크네요. 낮에도 산에서 쾌~액, 쾌~액 하고 우는 소리가 매일 듵릴 정도로 저희 밭을 맴돌고 있습니다. 불쌍하기도 하지만 어쩌겠어요. 배추 200포기 넘게 당하고 점차 다른 작물들 피해도 늘고 있어 참다 못해 오늘 드디어 그물망으로 울타리를 세웠습니다. 저도 먹고 살아야 하니요.추분은 추석과 함께 봐야 재밌습니다. 추분은 양력이고 추석은 음력입니다. 우리는 음력만 써온 걸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아닙니다. 양력과 함께 써 왔죠. 그걸 태음태양력이라 합니다. 계절의 변화는 태양이 주관하기에 태양의 달력인 절기력으로 따집니다. 태양은 불(火)이니 절기의 변화는 불의 변화입니다. 불의 변화는 태양의 각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태양의 각도가 제일 높은 하지에 화 기운이 최고에 이르고 각도가 제일 낮은 동지에 화 기운이 최저에 이르는 것처럼요. 그런데 양력만 갖고는 문제가 있습니다. 해 각도가 제일 높은 하지에 최고로 더워야 하는데 정작 더위는 하지 지나 소서 대서 쯤 최고에 이릅니다. 겨울 추위도 해가 제일 낮은 동지에 최고여야 하는데 동지 지나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소한 대한에 최고에 이르죠. 이상하죠? 해가 짧았다가 길어지면 난로 볼륨을 킨 건데 본격적인 추위가 들이닥치고 해가 길었다가 짧아지면 볼륨을 줄인 건데 복 더위가 들이닥치니 말이죠.이 현상은 복사열 때문입니다. 햇빛으로 화기운을 느끼는 것보다 햇빛이 달군 공기입자로 화기운을 느끼는 겁니다. 그런 간접적인 화기운이 복사열이거든요. 아궁이의 불이 한참 뒤에 구들돌을 달궈야 따뜻한 걸 느끼는 것처럼요. 그래서 해의 화기운을 느끼는 거는 해 각도보다 좀 늦게 나타납니다. 조상들은 그 간격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바로 달입니다. 갑자기 웬 달? 하실텐데요. 달은 바닷물을 밀고 당기며 물(水) 기운을 통제합니다. 밀물과 썰물은 어부가 사는 바닷가에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닙니다. 내륙에도 영향을 주지요. 어떻게 줄까요? 답은 강물에 있습니다. 바닷물이 밀고 들어올 때 강물 수위가 올라가고 썰물일 때 내려가지요. 강물 수위가 오르면 땅속 지하수 수위도 오를 것이고 그에 따라 내 밭의 수기운도 오를 것입니다. 밀물일 때 장마비가 쏟아지면 바닷물이 막고 있어 강물이 범람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씨를 음력 보름 전에 심으라 했습니다. 달이 보름 망월로 갈수록 밀물이 쎄져서 내 밭에 수기운이 올라 씨 심으면 뿌리가 잘 내리는 거거든요. 한강이 준설공사 하기 전엔 바닷물이 밀물 따라 흘러 들어왔습니다. 제일 깊게 들어올 땐 동호대교까지 가고 제일 낮게 들어오면 서강대교까진 왔습니다. 그래서 옛날엔 동호대교 상류를 동호라 했고 서강대교 하류를 서호라 해서 다리 이름도 그에 근거해 붙인 것입니다. 청년 시절 마포대교 근처 살았는데 바닷가도 아닌 동네에 갈매기가 많았던 걸 신기해했던 이유를 그제서야 알게 되었죠. 말하자면 강 주변사람들도 늘상 밀물 썰물을 보며 바닷물의 움직임을 알고 살았던 겁니다. 그리고 그게 농사에 영향을 준다는 것도 당연히 알게 되었죠. 양력으론 동지가 겨울의 정점이지만 추위로 볼 땐 소한 대한이 정점이라, 그걸 알 수 있게 동지 드는 달을 음력 11월로 했습니다. 해는 다시 길어지지만 맹추위가 찾아오는 소한 대한이 있는 달은 섣달 12월로 했지요. 그러니까 양력은 빛과 화기운의 변화를 알려준다면 음력은 더위와 추위, 곧 수기운의 변화를 알려주는 겁니다. 태음태양력을 쓴 조상님들의 지혜가 아닐 수 없는 거지요.음력 12월 섣달이 서양 달력으로는 1월입니다. 1월이란 봄이란 뜻인데 제일 추운 때가 어찌 봄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달력을 사용하니 사람들이 철의 변화를 잊은 겁니다. 추분이 음력 8월에 들어 가을의 정점인 것도 달의 영향입니다. 사실 해 입장에선 하지 지나면 가을이 시작된 겁니다. 그런데 하지 전에 달궈진 복사열이 뒤늦게 나타나 하지 지나서 기승을 부리고 폭염까지 나타납니다. 그러다 입추 처서 지나 복사열이 식어 가을이 시작되고 추분에 정점에 이르는 거죠. 폭염과 복사열을 식혀주는 게 장마이고 태풍인데요, 바로 비이고 수기운이죠. 이건 바다에서 옵니다. 특히 우리에겐 달궈진 북태평양 고기압이 히말리야와 대륙 북쪽에서 내려온 찬기운과 만나 장마전선이 만들어져 비를 뿌려줍니다. 지난 백로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히말리야 빙하가 사라지면 장맛비도 사라져 폭염과 가뭄이 심각해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달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달이 주는 수기운도 사라지진 않을 겁니다. 다만 수기운을 가져다주는 방식이 바뀌는 것인데 그게 기후 변화이지요. 문제는 바뀌는 과도기를 잘못 대처하면 돌이킬 수 없는 사막화와 종의 멸종, 식량위기가 들이닥칠 수 있다는 겁니다.음력을 알면 계절 변화의 다이나믹을 알 수 있고 나아가 기후의 변화도 어느정도 알 수 있습니다. 어느정도라고 한 건 이번 기후변화는 도시가 주도하여 그 변화의 양상이 아주 복잡하기 때문입니다.명절은 음력인 반면 절기는 양력입니다. 명절을 음력으로 쇤 건 계절 변화의 전환점을 명확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음력 설날은 동지 지나 두번째로 오는 그믐날이니 눈으로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했죠. 음력 8월 15일 추석 보름달도 한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7월 15일 백중 보름달과 헷갈릴 수 있는데요, 여름 장마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고 2차 장마가 오기도 하는 때이기도 한데다 작물의 이삭과 열매가 이제 맺혀 익기 시작하는 때라 가을의 정점이 아닌 거는 쉽게 알 수 있었어요. 게다가 종종 백중 사리라 해서 바닷물 간만의 차가 커 비 오는 경우도 많고요.그외 명절이었던 음력은 3월3일 삼짓날, 5월5일 단오날 7월7일 칠석날 9월9일 중양절인데요, 이게 다 양의 수인 홀수가 겹쳐 씨 심기 좋은 날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음력 보름전에 씨 심지만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거죠. 지금은 대부분의 명절은 사라지고 설날과 추석만 남았는데요, 이조차 얼마나 이어질지 모릅니다. 우리의 명절이 서양의 축제와 다른 건 제사와 차례가 있는 걸겁니다. 원래 서양 축제에도 제사 지내는 게 있긴 했습니다. 페스티발festival이라고 해서 양이나 가축을 잡아 피를 올려 신에게 바친다든가, 성인의 기일을 기리며 축제를 열기도 했죠. 아무튼 명절은 공동체 문화의 꽃인데요, 제사로 조상을 기리는 공동체 안에는 살아있는 사람들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죽은 조상도 함께하는 공동체라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죽은 귀신이 어디 있다고 함께 한다는 걸까요? 조상은 핑계일거고요. 더 중요한 건 현재의 우리들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미래의 후손들일 겁니다. 조상을 빙자해 우리의 공동체를 다지고 그 힘으로 후손이 살아갈 터전을 닦는 겁니다. 한 조상 아래 후손들이 모이면 같은 촌수 안에도 나이로는 3대만큼 차이나는 경우도 있고, 나이는 비슷한데 촌수로는 3대만큼 차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재와 미래가 함께하는 현장인 겁니다. 옛날엔 4대조상, 고조부모까지 제사를 지냈는데요, 그러면 8촌 형제까지 모입니다. 4대조상을 기리면서 현재의 인생들은 4대 후손까지 염두에 두는 삶을 삽니다. 1세대를 30년으로 잡으면 240년에 걸친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인 셈입니다. 뿌리가 깊을수록 미래가 울창할 수 있는 겁니다.이 터전과 나를 있게 해 준 조상께 감사하고 이 터전과 나는 후손을 위해 존재하는, 그래서 우리 공동체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하는 공동체라 보는 이유입니다. 이 터전은 부동산이라 해서 재산 축적의 수단도 아니고, 나는 그저 나만 편하게 잘 살면 되는 존재가 아닌 겁니다.작년 글에 결론으로, 절기를 알면 철이 들고, 철이 들면 몸이 반듯해진다고 했는데요, 설명이 부족해 좀 아쉬웠습니다. 철이 들면 왜 몸이 반듯해지지? 할 거거든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절기를 알려면 하늘을 자주 쳐다봐야 하고, 그 중에 해와 달과 별을 수시로 관찰해야 합니다. 몸이 반듯해지지 않을 수 없지요. 몸이 반듯해지면 마음이 둥글둥글해진다고도 했어요. 마음은 하늘을 닮고 싶어한다고 하면서요. 몸이 반듯해져 하늘을 자꾸 쳐다보면 하늘도 그렇고 해나 달이나 사실 별도 다 둥글둥글하잖아요.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추석 되시길...... * 대문사진 : 토종 않은뱅이벼. 토종벼는 이삭이 머리처럼 올라오다 익으면서 고개 숙이는 걸 확실히 볼 수 있습니다. 반면 개량벼는 잎사귀 어깨 쯤에서 이삭이 맺혀 고개 숙이는 게 좀 가려지지요. 조금이라도 잎사귀가 광합성을 더 하도록,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도록 개량한 것인데요, 수량은 많을지 모르나 멋은 별로에요. ㅎㅎ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 기획
    • 절기이야기
    2026-09-26
  • 구례 가을빛
    「섬진강 편지」 -구례 가을빛 구례 대표 가을빛, 사성암과 사포마을 다랭이논 가을빛에 한가위 인사 실어 보냅니다.
    • 문화예술
    • 섬진강 편지
    2026-09-26
  • 100년 전통 오일장이 무허가? 일심철물 60년, 산동 오일장과 함께한 세월 - 임순덕 어르신 인터뷰
    구례 산동에는 100년 역사의 산동오일장이 있습니다. 그 장터 곁을 60년 동안 지켜온 일심철물, 그리고 그곳의 주인 임순덕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한때 구례에서 두 번째로 유명했던 산동 오일장은 지금은 허가조차 없는 상태로 명맥만 겨우 이어가고 있습니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오늘도 장을 지키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지 들어봤습니다. 산수유와 맑은 물, 맑은 공기로 유명한 산동면. 그 산동의 오일장이 다시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요? 지리산사람들TV는 지리산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구독과 좋아요는 큰 힘이 됩니다. 00:00 인트로 00:31 산동 오일장 일심철물을 찾아서 01:41 산동 오일장은 2일, 7일장 02:05 60년 세월, 일심철물의 시작 02:34 100년 역사를 지닌 산동 오일장 03:38 하루아침에 무허가 오일장이 된 이유 05:21 코로나와 인구 감소, 쇠퇴하는 오일장 05:56 산동 오일장이 다시 활기를 찾았으면 06:56 8개 면 중 가장 컸던 그 시절 산동장 09:09 남편과 함께 일군 철물점, '일심'이라는 이름 11:41 현재 산동오일장의 모습 13:38 다시 활기를 찾기 위한 조건들 15:07 산동 자랑 – 맑은 물, 맑은 공기, 친환경 농산물 16:25 임순덕 어르신이 그리는 희망 #구례 #산동 #산동오일장 #오일장 #전통시장 #지리산 #구례여행 #산수유마을 #일심철물 #임순덕 #시골할머니 #인생이야기 #지리산사람들tv #구례산동면 #오일장투어 #윤주옥
    • 사람이야기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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