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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환의 절기 이야기] 가을 익어가는 백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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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령백로는 보통 음력 8월에 들지만 올해는 7월 25일에 들었습니다. 8월의 시작이 백로인데 7월에 들었으니 빠른 백로입니다.음력 8월은 12지지 중 유酉월로 유는 항아리에서 술 익는 모습을 표현한 겁니다. 7월에 시작한 가을이 8월에 익어가는 거겠지요. 7월 처서에 팬 이삭이 8월 백로에 익기 시작하는 건데요, 그래서 백로가 되서야 늦게 팬 이삭은 쭉정이가 됩니다."백로에 벼 이삭패지 않은 집엔 가지도 말아라" 라는 속담은 얻어먹을 게 없다는 뜻일거구요, 괜히 민폐끼칠 걸 저어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8월의 정점은 추분과 추석입니다. 이 대목에선 진짜 드릴 말이 많으니 그 때 가서 하기로 하고 요번엔 백로에 집중할까 합니다.가을이 무르익는 백로이젠 진짜 본격적인 가을에 들어섰습니다. 새벽엔 이불 덮어야 남은 잠 청할 수 있는 때가 된 것이죠. 찬 기운에 놀라 창문 닫고 겹이불 덮었는데도 이미 깬 잠을 이어가지 못 해 이글을 긁적이고 있네요.그런데도 한 낮은 여름이 아직 남아있어 조심은 해야 합니다.백로에 딱 맞춰 출수를 완료한 벼 이삭의 익어가는 모습은 진짜 그럴듯합니다. 그 거 보고 싶어 눈에 어른 거릴 정도니요.모종하지 않고 씨로 심어 지주 없이도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고추와 가지는 보는 것만으로도 듬직하기만 합니다. 때를 놓쳐 너무 웃자란 놈을 모종해 기대도 안했던 들깨와 콩들도 고추 가지 못지 않은 기세를 보면 미안키도 하지만 대견한 마음이 크네요. 논 둑에 심은 콩은 자리잡자마자 떡잎만 남기고 과감히 적심해주는데요, 웃자라 이미 떡잎은 대부분 떨어져 어딜 잘라줄지 몰라 물어보는 아내를 저는 그냥 모른 척 하고 말았어요. 아내도 결국 죽거나 말거나 대충 하고 뒤돌아선 모양이대요. 풀 속에서 목숨줄 겨우 잇고 있는 놈에게 숨통을 터 주려 풀을 벤 건 순전히 벼를 위한 거였어요. 근데 그러고 나서 힘을 내기 시작하더니 벼를 흉내 내려는 건지 그럴 듯하게 코투리를 달고 키우고 있는거지 뭡니까. 어린 콩코투리 즙을 쪽 빨아먹어 쭉정이 만드는 개미허리노린재도 올 해는 나타나질 않아 코투리가 예쁘게 익어갑니다.들깨는 웃자라도 잘 사는 편이지만 이번엔 좀 심했습니다. 그렇게 뻘춤히 웃자란 들깨를 고구마 심듯 누여 심고 윗 순을 잘라주라는 제 말에도 아내는 심드렁했지요.워낙 생명력이 강한 놈이라 믿긴 했지만 뿌리 내릴 때쯤 북을 주며 바라보는 제 마음도 심란하긴 매 한가지였어요.그럴 때는 그냥 잊고 마는 게 상책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들깨는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여지껏 키운 것 중 단연 제일입니다. 열심히 순도 지르고 잎사귀도 따다 먹었지요. 이젠 이놈도 가을이 온 걸 눈치 챘는지 잎의 기세가 약해져 있더만요. 에너지를 모아 꽃을 피우려 용을 쓰고 있는 겁니다.네팔 소식을 그냥 넘기려니 개운치가 않습니다. 남 얘기가 아니기도 하고 또 우리 잘못 같아 더 그렇습니다.사실 기후 변화는 지구 입장에선 하나의 생리현상 같은 걸지 모릅니다. 감기 같은 거라 할까요?구석기 시대처럼 이동하는 삶에선 기후변화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답니다. 기후 따라 이동하면 되니까요. 아마 기후변화 때문에 아프리카에서 전 지구로 퍼져갔을 겁니다.그런데 농사지으며 붙박이 삶이 위기를 키웠습니다. 어디 갈 데도 없고 갈 방법도 잊어버렸습니다. 게다가 이번 기후변화는 도시문명이 주도하고 있어 그 심각성이 더 합니다. 네팔이 그걸 얘기해주고 있는데요 당장의 홍수는 새발의 피일지 모릅니다. 빙하가 사라지는 게 더 큰 문제이지요. 히말라야 빙하는 남극, 북극과 또 다른 극으로 몬순기후의 발원지입니다. 그 덕에 장마가 있어 폭염에도 견디고 살 수 있는 거겠죠. 알프스, 안데스 고산 빙하도 그런 역할을 합니다. 지구 곳곳의 고산 빙하들이 지구의 다양한 기후 조건들을 만들어주어 인간도 그 외 많은 생명들도 풍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겠지요.더 중요한 사실은 고산 빙하들이 바로 많은 강들의 발원지라는 사실입니다. 빙하가 사라지면 강들도 말라버릴 수 있다는 점이죠. 강도 사라지고 몬순도 사라져 비도 오지 않는다면 지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기후변화의 끝판은 바로 가뭄입니다. 제가 되도록 물 적게 주고 작물의 자생력을 키워보려 농사짓는 나름의 명분입니다. 되도록 직파한다든가, 지주를 세워주지 않는다든가 논에 물을 자주 뺀다든가 하는 식이죠.고추든 가지든 직파를 하면 지주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뿌리를 깊게 내려 스스로 버티고 쓰러지지 않으려 열매를 많이 달지 않지요. 적당히 감당할만큼만 열매를 여니 쓰러지지도 않고 거의 병도 없습니다. 가지는 더 쉽구요, 토마토는 아직 모종을 하지만 지주는 세워주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수량은 적지만 물도 안 주고 지주도 안 해주는데 병도 없다면 전체적으론 가성비가 높지요. 더 중요한 건 가뭄에 대비한 이른바 한전旱田농법의 주요 방법이라는 겁니다. 전통농법의 지혜이지요.논에도 벼가 자리잡아 그늘을 드리우면 풀이 힘을 못 쓸 때 물을 뺍니다. 그러다 이삭 팰 때 물을 넣는데 자작자작할 정도 넣고 그것도 이삼일 있다 빼지요. 수확할 직전까지 물 담아 놓는 논하곤 다릅니다. 물이 상시로 담겨 있으면 논 흙이 혐기상태가 되어 발생하는 메탄도 거의 없을 겁니다. 거름도 완숙된 거나 오줌으로 웃거름 정도만 주니 메탄가스든 그보다 더 무섭다는 아산화질소 같은 온실가스가 별로 발생되지 않을 거라 자신하지요.몇년 전까진 저희 논에 장마 때 아니면 아얘 물이 없었어요. 논 벼인데도요. 모내기도 건답에서 했지요. 훨씬 전엔 벼도 직파를 했어요. 그러다 지금처럼 제한 급수를 하고 모내기를 하는 건, 제초와 밀 이모작 때문입니다. 확실히 물을 채우니 피사리를 한 두번밖에 하질 않아요. 수량도 1.5배는 되구요. 더 결정적인 건 밀과 이모작이 된다는 겁니다. 직파하면 일찍 심어야 해서 이모작이 안되거든요.암튼 지금처럼 물을 많이 쓰는 농사방식은 기후변화에 아주 위험합니다. 물을 아끼며 농사지었던 조상들의 지혜가 절실합니다. 네팔사태가 일러주는 메시지를 저는 그렇게 해석하지요.옛날처럼 기후변화에 따라 이동하며 살 수는 없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붙박이 삶이 기후변화를 억제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 땅이 가뭄으로 사막화되는 걸 막아야 하니까요. 이동하는 삶은 떠나면 그뿐이니 사막화를 막지는 않을거잖아요. 지금 지구 곳곳의 사막들이 그렇게 방치되어 생긴 것들이 많을 겁니다.그렇지만 지금처럼 물도 낭비하고 끝없는 단작농사로 토양을 망가뜨리고 도시에선 온실가스를 펑펑 뿜어대면 지구엔 더 많은 사막들이 생길겁니다.반대로 조상들의 지혜를 살리면 대안을 만들 수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당장의 문제를 막지는 못해도 노아의방주 같은 대안은 되지 않을까요? 내일 당장 하늘이 무너진다해도 나는 오늘 한알의 콩씨를 심으려 하는 명분이지요. 그것도 즐거운 마음으로요.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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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