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1-25(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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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례군 지역의 빨치산 활동사
    구례군 지역의 빨치산 활동사 남조선 노동당 구례군당은 5. 10단선 반대투쟁에서 수배된 인물 25명으로 1948. 6월초에 지리산 인민유격대를 피아골 계곡에서 조직하여 당사상 교육과 유격전술에 의한 강도 높은 훈련이 시작되었고 훈련중에도 투쟁실습에서 유격대조직 1개월만에 엽총 2정 칼빈총 5정 일제의 九九식 소총 3정과 일본도 등으로 완전무장하여 지리산 인민 유격대가 활동을 개시하였다. 지리산 인민유격대가 조직되어 활동을 시작함으로서 친일파 민족반역자 및 우익 인사들은 자유로운 생활이 어려워 졌고 밤으로는 경찰지서로 가서 잠을 자야했다. 또한 경찰도 산간벽지를 함부로 출입할수 없었을 뿐아니라 단신으로는 행동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일반 주민들도 좌익인사들을 욕하거나 비판도 못하게 되었고 좌도 우도 반대 하지 못하고 밤으로 찾아오는 빨치산들에게 식량과 물품을 은밀히 제공하게 되었다. 지리산 인민유격대는 성장을 거듭하며 1948. 10. 19일 여수 14연대의 반란을 맞아 그들에게 지리산과 백운산의 익숙해진 지리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하여 14연대는 국군보다 지리적 잇점을 얻게 되었다. 1948. 10. 25일 미명에 김지회가 인솔한 14연대 병력 400여명은 지리산 유격대를 앞세워 구례경찰서를 점령함으로서 혈투는 시작되었다. 1948. 11. 19일 밤12시 14연대 후속부대 지창수가 지휘하는 200여명과 김지회 병력 400 구례유격대 50여명등 650여명은 구례읍 2차 점령작전을 감행 했으나 성과 없이 작전개시 10시간여만에 퇴각함으로서 그들의 사기에 큰 타격을 받았는데 그후 1948. 12월 초순 김지회와 박종하는 200여 병력으로 산동면 쐬약재에서 12연대장 백인기가 인솔한 12연대 1개중대를 매복작전으로 섬멸시켜 군용트럭 6대 짚차 1대, 스리쿼터 1대등을 노획하여 소각시켰고 기관총 소총등 150여정의 무기와 수만발의 실탄을 빼앗았다. 이 작전이 끝나자 이현상은 구례군 유격대의 절반인원을 14연대에 편입시켜 피아골에서 뱀사골로 거점을 옮겼고 구례유격대는 지리산 인민 유격대라는 본래의 명칭을 14연대에 빼앗기고 단순히 구례유격대로 격하 되면서 전투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당시 14연대의 지휘체계는 정치위원에 이현상 사령관에 부사령관에 김지회 중위였고 구례유격대장은 박종하(구례 간전 논실출신)였다. 박종하는 여수, 광양, 구례의 유격대를 규합하여 백운지구사령부 유격대를 조직했는데 총인원 50명 무장 13정이었다.박종하는 능란한 유격전술인 편의대 활동 매복작전등으로 부대창설 1개월만에 완전무장부대 50명을 만들었고 1949. 6월 하순 박종하는 50명의 병력으로 광양군 진상면 신항리에 주둔중인 15연대 중화기 중대를 기습하여 박격포 2문 기관총 5정 소총 70여정 실탄 수만발을 노획하여 대부대로 약진하였다. 1949. 9. 16일 박종하는 전남 동부지구 유격대 100여명의 지원을 받아 순천방면의 국군지원 병력 지원로를 막게하고 자신의 부대 50명으로 하여금 하동 방면에서의 지원군을 막게하고 박종하 자신은 150명 병력으로 광양읍 서국민학교에 주둔한 15연대 1개 대대 병력을 공격하여 포로 600명 소총 700여정등 대대병력 보급품 전부를 노획하는 유격투쟁 사상 초유의 대전과를 올렸다. 이리하여 박종하 백운산 부대는 지리산 14연대 병력을 능가했다. 이때 지리산 병력은 1949년. 3월말 남원군 산내면 금풍정이라는 마을에서 국방군의 기습을 받아 홍순석 김지회가 사살되고 300여 병력을 잃어 잔존세력은 환자까지하여 150명 내외로 줄었고 실탄도 떨어져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이현상은 9. 16광양작전후 박종하부대를 지리산으로 불러 14연대 잔존세력과 합쳐 부대를 재편하며 박종하를 총참모장으로 기용하여 지리산 빨치산 투쟁의 지휘권을 박종하에게 맡겼다. 1949 겨울 국군과 경찰은 지리산과 백운산에 고지마다 주둔하면서 빨치산 토벌작전을 지속적으로 전개함으로서 빨치산 투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현상은 1950. 6월초 잔여 병력 150여명을 인솔하고 월북을 결심하고 지리산을 떠나 북상중 무주에서 6. 25 소식을 듣고 부대는 덕유산에 두고 대전에 가서 인민군전선사령관 김책을 만나 낙동강을 도강하여 낙동강 방위군 후방에 가서 유격투쟁을 전개하라는 지령을 받고 귀대하여 즉시 행동을 개시 고령군의 모처에서 낙동강을 도강하며 9. 28까지 구를 중심으로 유격투쟁을 전개하다가 9. 28을 만나 北으로 후퇴를 개시하며 강원도 후평에서 인민군 전선사령관을 만나 다시 남하하여 적 후방에서 유격투쟁하라는 명령을 받고 1950년 12월 말경 850여명으로 남부군(南部軍)을 편성하여 다시 남하를 시작 청주를 점령하고 속리산과 추풍령을 지나 덕유산에서 태백산 전투경찰대 207부대를 완전섬멸하고 다시 남하 산청군 가회지서를 습격 점령하였으나 이 전투에서 박종하가 전사하여 1948. 6월 피아골에서 조직한 지리산 인민유격대의 종말을 고했다 (자료제공, 빨치산 출신 정용호) -섬진강 노을
    • 지리산문화
    • 문장 속의 지리산
    2022-11-15
  • 호중별천(壺中別天)
    호중별천(壺中別天) - 최치원 동방 나라 화개동은 항아리 속의 별천지라네 선인이 옥 베개를 권하니 이 몸과 이 세상이 문득 천년이라 봄이 오니 꽃이 땅에 가득하고 가을이 가니 하늘에 낙엽 흩날리네 지극한 도는 문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이는 눈앞에 있었다네. 자연에 흥취 있다고 말들 하지만 어느 누가 이 기미를 알겠는가 무심히 달빛을 쳐다보며 묵묵히 앉아서 돌아가는 것도 잊어버리네 천지의 비밀을 말해 어찌 혀를 수고롭게 하겠는가. 강물이 맑으니 달그림자 비추네 장풍은 수많은 골짜기에서 일어나니 붉은 잎 가을 산과 하늘이라네. 東國花開洞 壺中別有天 仙人推玉枕 身世欻千年 春來花滿地 秋去葉飛天 至道離文字 元來是目前 擬說林泉興 何人識此機 無心見月色 默默坐忘歸 密旨何勞舌 江澄月影通 長風生萬壑 赤葉秋山空
    • 지리산문화
    • 시인과 시
    2022-11-15
  • 구례의 가을
    -구례 산동면 사포리의 가을(66x270cm, 2022년).JPG -(부분1) 구례 산동면 사포리의 가을(66x270cm, 2022년).JPG -(부분2) 구례 산동면 사포리의 가을(66x270cm, 2022년).JPG - 산동면 사포리 (화첩-1).jpg - 산동면 사포리 (화첩-2).jpg - 가랑마을에서 본 구례의 가을(47x60cm,2016년).jpg - 사도리 당몰샘( 60x47cm, 2016년).jpg - 사도리 하사마을(47x60cm, 2016년).jpg 작가소개 이호신 李鎬信 (아호 玄石,검돌) 한국화가로서 자연과 생태, 문화유산, 정겨운 마을 등 자연과 인간이 조하롭게 상생하는 세계를 그려왔다. 다양한 기법과 다채로운 색채를 응용하여 ‘생활산수화’라는 독자적인 화풍을 일궈 이 땅의 자연과 문화 현장을 화폭에 펼치고 있다. 2010년 지리산 자락 산청 남사마을에 귀촌한 뒤 생활산수화와 생활서화를 통해 다양한 조형의 변화와 변주를 모색하며, 언제나 이웃과 소통하고 나누는 작가이기를 소망하고 있으며 지리산-인 제 14호(2014년 5월호)에 '그림으로 만나는 지리산'을 연재한 이래 쉬지않고 지리산 그림순례길을 연재해주고 있다. *지리산그림순례를 시작하며(작가의 말) http://www.jirisan-in.net/news/view.php?no=443
    • 지리산문화
    • 이호신화백의 지리산 그림 순례
    2022-10-18
  • 생계부
    생계부(生計簿) 이 중 현 오늘도 시간의 재고가 겹겹이 쌓여 녹슬어갑니다. 시장이나 영화관, 길바닥이나 산자락에다 폐기하자니 걸음마다 비용이 청구됩니다. 시간이 나를 버릴 때까지는 시간의 무게를 견뎌야 합니다. 잔고가 아슬아슬한 사랑은 헤프게 소비하지 않을 작정입니다. 사랑이 마이너스로 내려가면 슬픔의 잔고가 올라올 것 같아서요. 꽃이나 길고양이에게 몇천 원 정도의 사랑은 지출할 수 있지만 과소비하는 것 같아서 가슴 두근거리는 요즘입니다. 월정액의 스마트폰으로 세상을 독서하는 것도 마감할 것입니다. 실은 스마트폰이 돈 받으며 나를 독서했는데 모른 척했습니다. 이제 고독을 적립하면서 이자까지 챙기며 나를 꾸리겠습니다. 유행 따라 환호했던 의상들이 옷장에 숨어 지냅니다. 유행이 알몸으로 나를 껴안을지라도 단호하게 거부하고 유행을 외면하는 유행으로 그와 거래하겠습니다. 헬스장에서 가슴 근육을 꿈틀거리게 하고 허벅지를 키우려고 땀 흘리며 지출하지 않겠습니다. 꿈틀거리고 싱싱한 사랑의 신상품을 꿈꾸기엔 대출받아 연명하는 헐벗은 목숨에게 부끄러움만 연체할 뿐입니다. 이중현 시인 * ‘소설문학 신인상(시)’, ‘세계의 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 * 시집 : ‘물끄러미 바라본 세상’ ‘아침 교실에서’ ‘사람을 보면 눈물이 난다’ * 동시집 : ‘공부 못하는 이유’ ‘힘도 무선전송 된다’ ‘나는 나’ * 동화집 : ‘나의 비밀친구’ ‘여울각시’ ‘마지막 은어낚시’ ‘운동장에 멧돼지가 나타났다’ 외 다수
    • 지리산문화
    • 시인과 시
    2022-10-13
  • 세석평전細石平田의 추억
    ☐지리산에서 온 편지 11 세석평전細石平田의 추억 잔돌평전의 저물녘 풍경 세석평전은 지리산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곳이다. 지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을 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경남의 중산리에서 바로 천왕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하나 있기는 하지만 그곳을 제외하고는 동서남북 어느 곳에서 오르건 세석평전을 거치지 않고는 천왕봉에 오를 수 없다. 그래서 지리산에 많은 대피소가 있지만 세석평전에는 늘 사람들이 많다. 세석평전은 오래 전엔 잔돌평전이라고 불렀다. 세細가 ‘가늘다’라는 뜻으로 세석은 작은 돌들이 많은 곳이라는 뜻이고, 높은 곳에 있는 펀펀한 땅을 평전이라 하니 세석평전은 작은 돌들이 많은 높고 펀펀한 땅이라는 뜻이다. 이 평전에는 철쭉이 군락을 이루며 피어 있고 지리산맥의 많은 능선들이 굽이치며 내리벋고 있어서 그 청량한 바람과 함께 펼쳐지는 풍광은 장엄 그 자체이다. 사람들이 지리산을 타면서 굳이 주능선 종주를 고집하는 이유는 노고단으로부터 천왕봉까지 서에서 동으로 전남과 경남에 걸쳐있는 첩첩 봉우리들이 만들어내는 긴 능선과 남과 북으로 여러 갈래 벋어있는 지 능선들의 유장한 지리산맥을 걷는 내내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곡과 능선을 넘나드는 구름들과 저물녘 빛을 받아 강하게 굼틀리는 산줄기들의 파노라마는 자신의 감옥에 갇혀 사는 이기적인 소인배를 벗어나 자연의 하나일 뿐인 알몸의 자신을 깊이 성찰하게 한다. 특히 겨울 산의 엄혹한 추위 속에서 수없이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지리산의 저물녘 풍경은 언제나 깊게 사무쳐 온다. 오만과 편견 그리고 세석대피소 뒤에 솟아있는 봉우리가 영신봉靈神峰이다. 그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아 한때는 무속적 신앙을 가진 무리가 영신대 아래 기도처를 잡고 집단생활을 하던 때도 있었다. 30년도 더 된 어느 해에 대성계곡의 작은세계골을 타고 영신대까지 오르는 계곡등반을 할 때였는데 세석평전에 텐트를 칠 요량으로(그때는 텐트 치는 것이 허용될 때여서 세석평전에 가면 울긋불긋한 텐트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곤 했다.) 천천히 계곡을 올랐다. 그리고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 영신대 근처에 이르러 나는 깜짝 놀랐다. 바위 틈새마다 촛불들이 켜져 있고 군데군데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텐트와 작은 비닐하우스들이 좁은 공간 여기저기 있는 걸 봐서 이들은 집단 기거하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 말을 붙일 엄두도 나지 않아 조용히 그들을 방해하지 않고 그곳을 빠져 나왔다. 대피소 쪽으로 올라와 보니 불빛도 보이지 않은 구석진 곳이었는데 기도처로써는 참으로 명당자리였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엄격하게 관리하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을 위하여 이 높은 산에까지 올라와 무리지어 기도를 할까. 기도로 자신이 원하는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것일까. 그 원하는 무엇이라는 것이 겨우 자신이나 가족의 부富나 안위 정도의 이기적인 것은 아닐까. 젊은 치기가 앞서 있던 당시로는 순전히 자의적인 짐작만으로 그들을 재단하고 무시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니 나의 오만과 편견이 얼마나 심했었나를 알 수 있다. 요즘 세태를 보면 개인이건 단체건 기업이든 정당이든 혹은 지역과 나라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역만을 최우선적으로 옹호하고 챙기는 것이 일반화된 정서인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고 전혀 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법으로 위법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괜찮다는 생활정서가 이미 우리의 구체적 생활에 깊이 들어온 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왠지 마음이 불편하다. 양심이라는 것이 불편해 하는 것이다. 사람다운 무엇인가를 팽개치는 것 같아 어떤 헛헛함이 밀려오는 것이다. 세석대피소의 추석 그 시절에는 세석 대피소도 그야말로 조그만 대피소였다. 지금은 증축하여 넓은 공간에 난방도 되어 그때에 비하면 호텔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때는 매우 좁고 한 겨울에도 난방 없이 잠을 잤다. 그리고 추석연휴가 되면 세석대피소는 만원이었다. 언젠가 그 시절 추석연휴에 지리산에 올랐다. 여러 명이 갔는데 텐트 가지고 가기 귀찮아서 대피소를 이용하려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올랐는데 예상 외로 대피소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대피소 수용 정원이 몇 명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한 다섯 배는 많은 인원이 들이닥쳤던 것 같다. 전에 혼자 잘만한 공간에 다섯 명이 누워야 했기 때문이다. 대피소 직원들은 바로 눕지도 못하게 하고 옆으로 몸을 세운 채로 칼잠을 자듯 꼭 끼워 눕게 했다. 날이 너무 추워 밖에 재울 수는 없었던 거다. 지금은 반드시 예약을 해야 대피소를 이용할 수 있으며 예약이 안 된 사람들은 아예 하산 시간이 확보되지 않으면 산 아래 출발지점 관리소에서 올려 보내지 않고 있다. 어쨌든 화장실에라도 다녀오면 누울 공간이 없어지기 때문에 화장실에도 갈 수 없었다. 그래도 그 정도는 고마운 축에 들었다. 왜냐하면 복도 공간에도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서 밤을 새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상상할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시쳇말로 육이오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도 밖에서 추위에 떨면서는 잠도 오지 않을 뿐 아니라 몸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어서 그냥 안에서 버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많은 인원이 좁은 공간에서 함께 자다보니 코고는 사람들도 많았고 더욱이 땀 냄새며 발 냄새가 지독해서 웬만한 사람은 잠을 들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잠을 자기 위해서는 독한 술이라도 몇 잔 마시고 떨어져야 하는데 또 그런 사람들 때문에 고약한 술 냄새까지 합세해서 여간해서 잠을 잘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어찌하다 두서너 시간 잠들 수 있다면 그것만 해도 고마운 것이었다. 하지만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도 다음 날 산행에 큰 지장은 없었다. 아침에 약간 찌뿌듯했던 몸은 한 시간 정도 산을 타며 땀을 흘리면 바로 말끔해졌기 때문이다. 한 겨울에는 그래도 괜찮았다. 겨울 산을 오르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 지리산문화
    • 박두규 시인의 지리산에서 온 편지
    2022-10-08
  • 피밭마을의 골짜기
    지리산에서 온 편지 10 피밭마을의 골짜기 어머니의 단풍구경 나이 80대 중반 무렵이었을까, 어머니는 바람이 쌀쌀해지는 가을이 오면 단풍구경 가자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나는 그때만 해도 바쁘게 밖으로만 돌던 때여서 ‘네, 그래요. 언제 피아골에라도 한번 가게요.’ 하면서도 그냥 스쳐지나가기 일쑤였다. 구례에 살 때여서 한두 시간만 시간을 내도 금방 다녀올 수 있다는 생각에 더 소홀했던 것 같다. 막상 이제 돌아가시고 나니 가을이 오고 피아골에 단풍이 곱게 물들기라도 하면 그 말씀이 늘 밟힌다. 그래도 언젠가 한번 어머니를 모시고 피아골에 갔던 적이 있었다. 피아골 초입의 단풍잎들이 처연하리만큼 붉게 물든 나무 아래로 모시고 가면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은 고작 ‘야, 참 곱다’ 한마디였다. 그리곤 별 말씀도 없이 그냥 한참을 앉았다 돌아오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만 해도 노인네의 짧은 한마디에는 한 생이 다 담겨있기도 하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젊은 것들은 지금 여기의 현재를 살아내기도 바빠서 울긋불긋 현란한 색들을 보며 그저 가을이니까 하는 정도의 계절감각을 가졌었다면 어머니 같은 노인네들은 저 화려한 시절의 절정기 뒤에 있는 인생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절절하게 느끼셨을 것이다. 지금 여기의 붉디붉은 절정의 단풍이지만 당신에게는 젊은 날의 과거로만 보였을까. 씁쓸한 듯 가늘게 뜬 눈빛과 오랜 풍상의 눈가 잔주름이 아직도 생생하다. 붉은 골짜기 피아골 피아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끝 마을은 직전마을이다. 피 직(稷)에 밭 전(田)을 쓰니 그 옛날 곡식이 귀했던 시절의 이름이다. 그 피밭골이 육이오 전쟁을 거치면서 너와 나, 적군과 아군, 좌익과 우익의 갈등과 대립을 함축하고 있는 이름인 피아골로 불리게 되었다. 피아골은 전쟁 당시 한때 인민공화국의 구례 군당이 숨어들었던 곳이며 그 비트는 피아골 삼홍소에서 계곡 좌측의 지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지금도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전투가 잦았을 것이니 계곡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피아골의 피아는 한자로 상대방(피)과 나(아)를 뜻하는 말이건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붉은 피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떠도는 말로 전쟁 이후 이 골짜기에서 한 트럭분의 유골이 나왔다고도 하니 어쨌거나 그 상처가 골짜기만큼이나 깊다고 할 것이다. 전쟁 훨씬 전에도 피아골의 붉은 골짜기 이미지는 있었다. 골짜기의 중간쯤에 있는 삼홍소가 그렇다. 삼홍소는 한자로 三紅沼라고 쓰는데 ‘셋이 붉은 물웅덩이’라는 뜻이다. 조선조의 생육신이며 선도의 맥을 이었다는 김시습이 이곳에서 시를 한 수 지었는데 단풍이 붉고, 그 빛이 물에 어려 계곡물이 붉고, 도도한 흥취에 술 한 잔 걸친 얼굴이 붉다하여 삼홍이라고 노래했다는 것이다. 온 천지가 붉은 이 삼홍소의 계곡에 앉아 있으면 당시 왕권을 둘러싸고 진행되던 피비린내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뇌하는 지식인 김시습이 보이는가 하면 한편으론 현실을 극복하고 인생을 관조하며 지혜롭게 한 생을 건너는 현자 김시습의 풍모가 그려지곤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혹은 어느 시대라 할지라도 현실의 삶과 이상의 삶은 늘 함께 하는 것이 아니던가. 어느 한쪽에 빠져 허우적이는 것이 어리석은 삶이라면 어쩌면 김시습은 자신이 처한 현실과 자아가 추구하던 이상을 아우르며 균형 잡힌 삶을 꾸려낸 각자覺者가 아니었나 싶다. 계곡등반의 허와 실 20년도 훨씬 전이었을 젊은 시절, 한동안 계곡등반을 즐겨했는데 피아골도 계곡등반을 했던 적이 있다. 직전마을에서 피아골 대피소까지는 등산로로 가고, 대피소를 지나서 바로 등산로를 벗어나 계곡만을 타고 주능선까지 오르는 길이었다. 대피소에서 지정 등산로를 타고 오르면 주능선의 피아골 삼거리에 이르지만, 계곡을 타고 오르면 반야봉 바로 밑에 있는 주능선의 노루목 근처에 이르게 된다. 계곡등반을 하는 것은 다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계곡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 그 물줄기의 시원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줄기의 처음은 어떻게 시작될까, 어디서부터일까, 하는 일반적인 궁금증과 함께 어떤 존재의 시원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같은 것이 강했던 것 같다. 일반적으로 모든 자연의 사물에 대한 존재의 근원은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설화나 전설 같은 상상력들이 포진하게 된다. 그래서 더 궁금증을 자극하고 괜한 동경이 생기는 것 아니던가. 하지만 계곡등반 같은 경우에는 반드시 분명한 그 처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나름 후련한 맛은 있었다. 하지만 ‘처음’이라는 막연한 시원에 대한 그리움의 의미는 깨지게 된다. 계곡의 끝자락에 이르게 되면 물도 없는 그저 돌멩이 몇 개 있는 평범한 지형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삶의 균형감각 나의 계곡등반은 어쩌면 이런 미화되고 포장된 의미들을 깨고 싶은 심정의 발로였는지도 모른다. 한 세상을 살며 이상과 동경은 꿈과 희망이라는 단어로 치환되면서 답답한 현실을 헤쳐 나가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환상과 비현실 속의 막연한 기대감으로 현실적이고 실질적 삶을 꾸려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계곡등반으로 계곡의 끝 지점을 확인하며 나의 현실인식을 다그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문학의 허구적 상상을 앞세워 살며 현실을 나의 에고로 왜곡하여 인식하거나 또는 그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피하지는 않고 있는가 하는 자기점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떤 뚜렷한 인식과 의도성을 가지고 계곡등반을 하지는 않았지만 돌아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얼마나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으로 살고 있을까. ‘실사구시’라는 말은 도법스님께서 많이 쓰시던 말씀이다. 나는 나름대로 ‘주어진 이 생生의 현실을 진리의 눈으로 바로 보고 그렇게 세상살이를 해내야 한다’는 말로 해석하며 들어왔다. 계곡등반을 그렇게 철학적으로 했다는 말은 아니고 그 행위의 저 깊은 안쪽에 그런 무의식적 발로가 있었기를 바라는 심정인 것이다. 모든 존재의 본성이 가지고 있다는 삶의 균형감각 같은 것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피아골을 자주 올랐다. 구례에 있는 가까운 곳이어서 그러기도 했지만 팔구십 년대라는 시대적 격동기를 살았던 내 존재의 현실을 올바로 가늠하고 또 그렇게 살기 위한 몸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지리산문화
    • 박두규 시인의 지리산에서 온 편지
    2022-09-08
  • 옥황님, 나는 못가오
    옥황님, 나는 못 가오 박 두 규(시인) 나는 지금도 가끔 혼자서 이 노래를 청승맞게 부르곤 한다. 아무도 없으니 마음이 풀어져 눈물이 촉촉해질 때도 있다. 몸이라는 것이 참 신비하기도 해서 생각만으로도 반응을 한다. 이 노래를 돌아가신 이광웅 시인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에 그렇다. 술이 몇 순배 돌면 시인은 축 처진 어깨에 고개가 기웃해져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시키지도 않은 노래를 부르곤 했다. 멀리 개울 물소리가 들려오듯 저절로 노래가 흘러나왔다. 군부독재 시절에 오송회 사건으로 억울하게 7년 옥살이를 하고 남은 것이 있다면 그곳에서 배운 이 노래뿐이라고 했다. 그는 옥살이를 비전향장기수 어른들과 함께 했는데 운동 시간에 늘 자신이 부축해서 함께 다니던 분이 있었다. 그분의 두 눈은 전투 중에 총알이 스쳐가 멀게 되었다는데 운동하러 나갈 때는 곁에 누군가가 있어야 했고 그 일을 이광웅 형이 했다고 한다. 그 분의 손을 잡고 운동장을 오갈 때면 그분이 중얼중얼 노래를 하곤 해서 북쪽의 노래들을 배우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작고한 박배엽 시인이랑 늘 어울려 다니며 술을 했는데, 어느 날 배엽이네 집에서 그 아내가 술상을 마련해놓고 이광웅 시인의 노래가 귀하니 녹음을 해놓자고 해서 우리는 함께 술을 마시며 테이프 녹음을 했다. 그 후 이광웅 시인이 죽고 그의 노래가 그리워질 때 그 테이프가 생각났다. 그래서 당시 전주MBC 라디오 피디로 있던 소설 쓰는 이병천에게 부탁해서 가지고 있는 테이프를 더 좋은 음질로 다시 여러 개를 만들었다. 그래서 주변의 지인들과 당시 활동가들이 나눠 가졌다. 그때만 해도 그 테이프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국가보안법에 해당되는 거여서 나는 당시 끌고 다니던 차의 바닥 시트 밑에 숨겨 놓고 차 속에서만 그 노래들을 들었다. 그렇게 그 노래들을 혼자서 차속에서 부를 때면 저절로 눈물이 나곤 했다. 그때 녹음한 노래가 한 열 곡정도 될 터인데 모두 이광웅 형이 부른 노래다. 그때 부른 노래들을 소개한 시를 훗날 첫 시집에 실었다. 월미도의 하얀 사과꽃 향기나/ 날개옷을 잃어버린 금강산녀/ 원수를 찾아 눈 덮힌 영을 내리던 반짝이던 눈빛의 헐벗은 전사들/ 그리고 얼어붙은 하늘을 휘날리던 모스크바의 붉은 깃발과/ 흰점꽃이 인정스레 웃는 고향의 하늘/ 당신은 이런 노래를 불렀지요/...중략...// 나는 산에 올라/ 원추리가 무리지어 피어나는 평전에 누워 쉴 때면/ 당신의 나직한 노래를 만나곤 합니다/ 가장 우울했던 시절에/ 가장 아름다운 꿈을 품고 있었다는 죄목으로/ 세상을 버리신 당신/ 당신의 노래가 이 산을 흐르며 떠나지 않으니/ 이제 저 산봉우리 어느 하나에 당신이 머무르셨군요/,,,하략... (「지리산10 -이광웅」 부분) 이광웅 시인을 만나 술 마시고 노래 부르던 때가 선생이 옥살이 마치고 나와 전주에서 학원선생으로 밥벌이를 하던 때였다. 이광웅 시인이 군산에서 나와 덕진 쪽에서 살던 때였는데 나는 늘 박배엽 시인과 함께 광웅이 형을 만나 술 마시며 그의 노래를 들었다. 우리는 덕진 왕릉 근처 숲이나 광웅이 형 집 등에서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배엽이는 검은 산만 떠가네 하는 ‘밤뱃놀이’라는 김민기의 노래를 쥐어짜듯 불렀고 광웅이 형은 ‘지리산녀’나 북한영화 월미도에 나오는 ‘나는 알았네’를 주로 불렀다. 그리고 나는 고 유희태 형의 집에서 복사해서 배웠던 ‘내 정성 부족함이 아니오’ 하는 김종률의 노래를 부르곤 했다. 광웅이 형이 ‘금강산녀’라는 노래를 부르면 꼭 당시 그의 심정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1절) 내 옷은 어디로 갔나. 그 누가 가져갔나./ 오늘 꼭 올라가야 내일부터 베를 짜는데/ (2절) 날개옷 잃고 서야 저 하늘 어이 날으리./ 날 두고 가는 선녀 말이나 전해다오./ (후렴) 직녀는 옷을 잃고 울면서 보낸다오./ 이 일을 어이하랴 옥황님 나는 못 가오. 천상의 사람 이광웅이 어쩌다 이 모진 세상에 내려와 부러진 날개를 붙잡고 옥황님, 나는 날 수 없다오 하며 하늘에 대고 하소연 하는 것만 같았다. 작은 어깨가 흐느끼듯 들썩이며 가늘게 새어나오는 한숨 같은 그의 노래를 들으면 슬픔이 목까지 차올랐다. 이광웅은 당시 폭압적이고 살인적인 군부독재가 앗아간 자유와 민주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그 상황 속에 자신이 처한 심정을 담아 이 노래를 불렀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의 나 또한 이광웅과 그때의 그리움에다 지금 내 문학과 세상살이의 상황에 처한 심정을 담아 이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노래라는 것이 늘 부르는 이의 심정을 말해주는 것이지만 그것과는 다르게 이 노래 자체가 본원적으로 담고 있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노래를 30년 가까이 부르다 보니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인데 아마도 이 노래는 인간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가진 본연의 슬픔과 그리움을 그리고 인간 존재의 절대 자유를 갈망하는 노래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 노래는 북한노래라는데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인데 어찌 이런 노래가 있을까? 하면서 내 사고의 편협함과 무지를 탓하곤 한다. 나는 이광웅 시인이 죽은 후 첫 시집을 냈는데 그 제목이 『사과꽃 편지』다. 이광웅 시인이 주로 불렀던 또 다른 노래 「나는 알았네」의 첫 구절 ‘봄이면 사과꽃이 하얗게 피어나고’ 에서 따온 제목이다. 첫 시집에는 이광웅에 대한 시를 두 편 실었다. 하나는 위에 소개한 「지리산 10 -이광웅」 이고 다른 하나는 첫 시집 제목으로 붙인 이 시다. 선생님, 사과꽃이 피었어요./ 은은한 갯바람 따라/ 새 한마리 날아와 앉았고요./ 눈부셔 하면서도 애써/ 하늘을 올려보던 모습이 생각나네요./ 사람들은 모두 잘 있어요./ 작은 어깨들 맞대고/ 오손도손 징역살이 잘 하지요.// 어제는 볕이 하도 좋아/ 그곳에 갔어요/ 선생님이 좋아하던/ 향그러운 술 하나 들고./ 햇볕으로 종일/ 몸 씻었어요./ 선생님 흉내내어/ 노래도 나직이 불러 보았지요./ 세상이 참으로/ 새털처럼 가볍게 느껴졌어요./ 서러운 사람들/ 무거운 세상이/ 금강산녀 날개옷처럼/ 가볍고/ 또 가벼웠어요. //선생님. 올해도 사과꽃은 피었어요./ 그 향내음/ 햇살 하나 휘감아/ 눈부셔/ 눈부셔/ 하늘도 볼 수 없네요./ 선생님의 하늘/ 올려다 볼 수 없네요. (「사과꽃 편지」 전문) 그가 옥살이 후유증과 함께 위암으로 죽고 1년 후 군산교도소 근처 어디에 있던 그의 무덤을 찾아가 소주 한잔 음복하던 그때의 풍경을 담은 시다.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술자리에서 이광웅의 노래를 불러왔다. 당시는 작고한 이광웅을 생각하며 부르던 노래였건만 세월이 흐르고 흘러 생전의 그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된 언제부터는 나의 노래가 되었고 나의 슬픔이 되었다. 사람들도 술자리에서 나에게 이 노래를 청하며 ‘박두규의 노래는 그 노래야’ 하니 얼추 나의 노래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광웅 시인도 그랬을 것이다. 옥에서 나와 쓸쓸해진 세상의 술자리를 전전하며 이 노래를 부를 때는 이미 장기수들의 슬픔이 아니라 자신의 슬픔을 노래했을 것이다. 가사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긴박한 상황의 월미도에서 고향과 조국을 생각하던 인민병사의 심정이 담긴 것이다. 가사를 첨부하며 글을 맺는다. (1절) 봄이면 사과꽃이 하얗게 피어나고/ 가을엔 황금이삭 물결치는 곳/ 아아 내 고향 푸른들 한 줌의 흙이/ 목숨보다 귀중한 줄 나는 나는 알았네/ (2절) 불타는 전호 가에 노을이 비껴오면/ 가슴에 못 잊어서 그려보는 곳/ 아아 내 고향 들꽃 피는 그 언덕이/ 둘도 없는 조국인 줄 나는 나는 알았네 (3절) 살아도 그 품속에 죽어도 그 품속에/ 언제나 사무치게 불러보는 곳/ 아아 어머니라 부르는 나의 조국이/ 장군님의 그 품인 줄 나는 나는 알았네/ (북한영화 『월미도』의 삽입곡 「나는 알았네」)
    • 지리산문화
    • 문장 속의 지리산
    2022-09-08
  •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나는 옛이야기3-견벽청야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나는 옛이야기4-견벽청야 견벽청야 堅壁淸野 굳은 견, 바람 벽, 맑을 청, 들 야 말 그대로 하면, 성벽을 굳게 하고 곡식을 모조리 걷어 들인다는 뜻이다.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해온 방어전술의 하나이다. 해자(垓子)를 깊이 파고 성벽의 수비를 견고히 하는 한편, 들에 있는 모든 곡식을 성내로 걷어 들여 공격해 오는 적의 군량미 조달에 타격을 입히는 전법으로, 우세한 적에 대한 수단으로 흔히 약자가 사용한다. 삼국지의 조조와 여포가 싸울 때 조조가 사용한 전법이기도 하고, 청태조 누루하치와 원숭환의 전투에서, 나폴레옹과 러시아의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대패 당한 전법이기도, 그리고 한국전쟁 때 11사단장 최덕신 준장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펼친 작전이기도 하다. 이번 이야기는 지리산둘레길 동강-수철 구간을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에 얽힌 이야기이다. 또한 이 이야기는 이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거창군 신원면에 있는 ‘거창사건 추모공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즉, 두 사건은 같은 사건이다.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기구의 폭력성은 국가의 본질적 요소이다. 그게 인민(people의 한국말은 인민이다. 이 말을 좌익들이 사용했기에 80년대엔 민중이란 말을 대체용어로 사용했다)을 법과 제도에 종속시키는 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런 국가의 폭력성이 깔끔하게 드러날 때가 전쟁 혹은 내란의 시기이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53년 남북전쟁이 휴전되는 9년 동안 한반도의 남과 북에선 새로운 국가를 성립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폭력이 일어난다. 그 정점이 전체 인구 10%인 300만명이 사망한 남북전쟁이다. 지리산둘레길에서 문득 스쳐 지나가는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은 지금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국가의 맨 얼굴을 직시할 수 있는, 아직, 살아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진하게 된 유엔군은 후방 안정을 목적으로 11사단을 창설한다. 11사단의 주 임무는 지리산 등 산악지대에 잔존해 있는 인민군과 빨치산 토벌이었다 이를 작전 명령 형태로 공식화시킨 것이 '적의 손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는 작명5호였다. 이는 거창·함양·산청 민간인 학살이 일개 하급 지휘관의 자의적인 판단이 아니라 사단장, 국방부장관,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지휘명령체계를 갖는 국가으이 공식 행위라는 것을 말한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당시 국가의 시선은 매우 경악스럽다. (지리산 일대) 약 7할 이상이 공비에게 협조하여 식량보급 및 정보를 제공하는 고로 이적행위로 인하야 아군작전에 지장을 초래케 하며 현재 소각당한 각 부락은 주간에는 대한민국이며 야간에는 인민공화국이라 아니할 수 없는데, 대한민국정부에 납세 혹은 국민된 의무는 전혀 없음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라 간주할 수 없음으로 지리산토벌작전에 적의 이용당하는 인원 및 가옥을 파괴하지 않으면 작전수행을 도저히 기할 수 없는 고로 불가분의 조치라고 생각함. - 헌병대 보고서, "지리산 토벌작전으로 인한 민심동요에 대한 조사복명지건" 거창군 신원면 관내는 완전한 인민공화국이며 공비에게 일시적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협조 충성을 다하고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특히 신원면 5개리 주민은 공비화되어 있었음으로 이적행위자로 칭할 바 아니라 완전한 적으로 간주할 수 있는 바. 차를 사살하였음은 작전상 당연한 조치로 인정됨. 숙청당한 지대의 거주민은 추호도 개전의 여지 전무한 자이며 금후 공비의 완전한 소탕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해당지대의 가옥 및 거주민을 처분하지 않는 한 금후 공비세력이 강화될 것이므로 당연한 처사로 인정됨 -거창경찰서 보고서(1951. 3. 8) 국민당 중앙군 출신의 11사단장 최덕신이 중국의 전통전술인 ‘견벽청야’라는 이름을 언급했지만, 실제로 연대장, 대대장 등 일본군·만주군 출신의 산하부대 지휘관들은 일본군의 삼광작전이나 초토화작전이 훨씬 더 익숙한 개념이었다. 이들은 이미 해방 후에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 그리고 지리산에서의 반란군 토벌작전에서 초토화 작전을 편 바 있다. 11사단은 빨치산 토벌작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산청·함양·거창에서 일본의 삼광작전을 그대로 진행하였다. 1951년 2월 2일 11사단 9연대는 경남 진주에서 함양으로 이동하였다. 9연대 3대대는 작전회의 지침에 따라 주어진 작전지역으로 이동하여 토벌작전을 시작하였다. 한동석 3대대장은 대대병력과 경찰, 청년의용대 병력 1개중대를 이끌고 2월 7일 10시경 신원면에 도착하였다. 애초 정보로는 신원면에 약 400~500명의 공비가 잠복하고 있다고 했으나 3대대가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단 한 명의 공비도 없었다. 단지 부녀자와 아이들, 노인들밖에 없었다. 이에 3대대는 신원면에 경찰과 청년대 병력 약 200명을 주둔시킨 다음, 산청 쪽으로 진격해갔다. 이때부터 지리산 주변의 산청·함양·거창 20여개 산골마을에서 1,400여명이 학살되는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1951년 2월 8일부터 11일까지 나흘 동안 9연대 3대대는 산청군 금서면, 함양군 유림면, 거창군 신원면에서 대규모 학살 사건을 자행했다. 2월 8일 아침, 지리산 줄기에 자리 잡은 산청군 금서면과 함양군 유림면 관내 10여개 자연부락의 날씨는 푸근했다고 전해진다. 아침 7시쯤 9연대 3대대 1중대 병력이 가현부락에 들이쳤고, 그들은 집집마다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40여 가구가 사는 마을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1중대는 놀라서 뛰쳐나온 마을사람들을 마을 앞 속칭 산제당 골짜기로 끌고 가서 집중사격을 가해 사살했다. 학살을 마친 부대는 가현부락의 소와 돼지들을 몰고 바로 아래 부락인 방곡마을로 향했다. 방곡에는 이미 2중대가 학살을 벌이고 있었다. 3대대 1중대는 2중대의 학살장면을 구경하면서 아래 점촌마을로 향했다. 당시 점촌마을에는 21가구 60명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 모두 부락 앞 논에서 총살당했다. 학살은 계속되었는데 그들은 학살 방식을 바꾸었다. 마을을 하나씩 초토화시키는데 시간이 너무 걸린다고 판단한 3대대는 아예 여러 마을주민들 한 장소에 집합시켜 학살한 것이다. 함양군 유림면 손곡리의 손곡·지곡마을, 산청군 금서면 자혜리의 상촌·하촌마을, 화계리의 화계·화산·주상마을 등 7개 마을 주민들은 군인들의 총부리에 떠밀려 9시부터 유림면 서주리 동천강변에 모였다. 3대대 군인들은 장정 9명을 동원해 동천강변에 교실 넓이만한 구덩이를 두 군데 파게 했다. 주민들의 무덤이 될 곳이었다. 오후 4시쯤 300여명의 주민들을 두 개의 구덩이 속으로 몰아넣고 수류탄을 까넣은 뒤 기관총을 난사해 학살했다. 공비토벌 전공을 올리듯 박격포까지 쏘았다. 이렇게 해서 2월 8일 10시간만에 이 일대 주민 705명이 학살되었다. 2월 9일 아침 3대대는 산청군 생초국민학교를 출발해 거창 방면으로 향했다. 부대는 2월 9일 밤을 산속에서 숙영한 다음, 2월 10일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 청연마을에 도착했다. 70여명의 마을주민들이 뒷산으로 끌려가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전원 살해되었다. 이날 오후 3대대 병력은 인근 와룡리와 대현리에서 주민들을 마을 앞 탄량 골짜기로 끌고가 학살했다. 탄량골에서 주민들을 학살한 3대대는 와룡리·과정리 일대의 주민들을 면소재의 신원국민학교로 모았다. 군은 12개 교실에 꽉 들어찬 주민 1,000여명 가운데서 현지 형사인 조용호, 박세복과 박대성 지서주임, 박영보 면장 등을 시켜 군·경 가족을 골라내게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나머지 주민들을 근처의 박산 골짜기로 끌고가 총살하였다. 이 박산골 학살 현장에서 500여명 가운데 3명이 살아남았다. 산청과 함양에서 학살된 주민의 경우 705명 가운데 10세 미만의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가 600여명에 달했다. 거창에서 학살된 719명 중 14세 미만의 어린이가 359명, 60세 이상의 노인이 59명으로 희생자의 75%가 어린이와 노약자였다. 민간인 학살사건이 알려지고, 정부와 군은 조직적인 은폐작전에 돌입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현지를 방문하는 한편, 비밀회의를 통해 경남 계엄민사부장 김종원과 특무대원 계종운, 거창경찰서 사찰계 유봉순 등에게 사건의 조작과 은폐, 왜곡을 지시하였다. 게다가 이승만 대통령은 거창사건이 외신에 대서특필되는 등 문제가 되자 “치마 속 부끄러운 곳은 외국에 내보이지 말라고 했지 않아”라며 은폐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신성모 또한 이승만의 의중을 받아들여 사건의 책임자인 최덕신에게 ‘걱정하지 말고 토벌작전을 계속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심지어 100만원의 격려금까지 내렸다. 이후 9연대는 유아사체의 처리, 경남도경과 거창경찰서는 여론단속과 반증수집, 국회의원 무마, 유족과 주민 협박 등의 역할 분담을 하며 조직적으로 은폐 활동을 벌였다. 인명피해 뿐만 아니라 가옥소각, 농우탈취, 교실방화 등 물적 피해에 대해서도 철저히 은폐했다. 그러나 이미 사건이 정치권과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더 이상 덮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3월 30일 국회는 본회의 의결을 통해 거창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국회와 내무, 법무, 국방부의 합동조사단 파견을 결정하였다. 국회조사단은 4월 3일 거창에 도착하여 신원면 현장을 향해 출발했다. 계엄사령부 민사부장 김종원은 조사단이 지나갈 길목에 공비로 위장한 군병력을 매복, 배치해 총격을 가했다. 그러나 이미 알려지기 시작한 거창사건은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5월 하순부터 거창사건에 대한 헌병사령부의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구 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부(재판장 강영훈 준장)는 김종원 징역 3년, 오익경 무기, 한동석 징역 10년을 선고하였다. 김종대는 무죄였다. 이 재판은 결국 사건을 축소·은폐하기 위한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던 셈이다. 재판 과정에서 거창 사건의 학살 진상을 밝히는 작업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유죄를 선고받은 피고인들도 1년 후 줄줄이 특사로 풀려나 다시 군에 복귀하였다.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9연대장 오익경은 출소 후 군에 복귀해 1956년 대령으로 예편했고, 1970년대 초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0년형을 선고받은 3대대장 한동석 역시 군에 복귀하여 9사단 부관, 수도사단 군수참모, 27사단 부연대장, 육군 첩보부대 교육대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5.16 후에는 강릉·원주 시장을 거쳐 보사부 행정서기관으로 영전하는 등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살았다. 김종원의 승승장구는 더욱 놀랍다. 김종원은 군에 복귀했다가 경찰로 옮겨가 자유당 정권 시절 경찰 총수까지 거치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였다. 학살의 책임자 최덕신 준장은 제1군단장을 지낸 뒤 육군 중장으로 전역하였으며, 박정희 정권 하에서 외무부장관을 거쳐 1963년 주 서독 대사를 역임했다. 동백림 사건 당시 서독 대사로서 서독 정부의 반발을 무마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결국 실패하여 외교 문제로 비화된다. 이 때문에 한국 정부는 국제적인 항의에 직면하게 되었고, 사태 수습을 위해서 박정희는 최덕신을 해임해 버렸다. 정권에서 내쳐진 최덕신은 1976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수시로 북한을 방문하고 공개적으로 6.25 전쟁 북침설을 주장하는 등 친북 활동을 벌이다가 1986년 아예 북한으로 망명하였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고 용서받지 못할 인간이다. 세월이 많이 지났다.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의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반쪽짜리 특별법이다. 산청함양거창사건에 대한 특별법도 1996년 ‘거창사건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란 이름으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산청함양거창사건 관련자에 대한 피해보상 등에 대한 법률 개정 혹은 특별법 제정은 20여년이 넘도록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지리산둘레길을 걷다 보면, 크고 작은 뭇생명들에게서, 수억년 세월을 지내 온 돌들과 물들에게서, 천년을 버팅겨 온 절집에서, 따뜻한 위안을 받는다. 그런데, 가끔 지리산에 묻혀 있는 아픔들을 바라볼 때가 있다. 그 또한 지리산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마치며... 1951년 국가는 민간인 1424명을 학살하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는가? “읍에서부터 우리를 참 깔보는 거에요. 거창사건을 잘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논께네 아까도 내가 이야기 했지만 오죽했으면 국민투표 할 때 우리가 100%했어요. 99%가 아니라 100%라. 박정희 시대 국민투표를 몇 번 했거든요. 그걸 열람해보면 우리가 100%에요. 글을 몰라서 그렇지 절대로 우리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고” 국가는 폭력을 통해 인민에게서 ‘국민됨’의 입증을 얻어 내었다.
    • 지리산문화
    2022-09-08
  • 그 날, 그 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 날, 그 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여순사건 관련 구례경찰서 집단총살 사건 [김인호 시인] 우리의 현대사는 이념갈등으로 인한 국가폭력으로 격심하게 얼룩지고 왜곡되어왔습니다. 이러한 이념시대의 폐해를 청산하지 못하면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부작용 이상의 고통을 후대에 물려주게 될 것입니다. 굴곡진 역사를 직시하여 바로잡고 새로운 역사의 비전을 펼쳐 보이는 일, 그 중심에 민간인학살로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호명하여 위령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름을 알아내어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을 존재하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 속에 묻혀 잊힐 위기에 처한 민간인학살 사건들을 하나하나 호명하여 기억하고 그 이름에 올바른 위상을 부여해야 합니다. <프레시안>에서는 시인들과 함께 이러한 의미가 담긴 '시로 쓰는 민간인학살' 연재를 진행합니다. (이 연재는 문화법인 목선재에서 후원합니다) 편집자 그 날, 그 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 나이 여든일곱 이 날 이때껏 먹도록 소원하지 않는 날이 없었네 아버지를 저승길로 안내한 열세 살 소년의 그날, 1948년 11월 18일 그 날, 그날, 그날로 돌아 갈 수만 있다면 내 원도 한도 없겠네 친구들과 놀고 있던 주조장 앞마당에 나타난 헌병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아는 사람을 찾을 때 자랑스럽게 손을 들었던 열세 살 소년의 그 날, 앞장서서 헌병들을 집에까지 안내했던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바랐네. ‘나는 아무 죄없응게 금방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경찰서로 끌려간 아버지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그 날 그날, 하필이면 반군들의 구례경찰서 장악을 위한 총공세의 밤이었네 콩 볶듯 볶아대는 총소리가 무서워 할아버지와 마루 밑에서 이불을 둘러쓰고 숨죽이며 밤을 지새웠던 그날 밤 반군들의 공습에 대비한 경찰들에 의해 그날 밤 아버지는 *경찰서 공터에서 총살을 당하고 말았다네. 반군들이 산으로 쫓겨 가고 거리가 쥐 죽은 듯한 아침 용기를 내어 넘어다본 경찰서 공터에는 시체가 즐비하였지만 더 가까이 가볼 수 없어 멀리서만 눈물만 훔쳤었네 경찰들이 마을사람들을 동원해 그 시신들을 봉성산에 묻었다는데 무 묻듯이 구덩이 세 개에다 죄다 묻었다는데 그 자리 빙 둘러 철조망 치고 군인들이 지켜서 달려가 시체를 찾아올 수도 없었네 한 세 달이 지나고서야 군인들이 철수해 할아버지가 아들을 찾으러 갔는데 송장냄새 어찌나 지독하고 알아볼 수도 없어 찾지를 못했다네 그날 이후 할아버지는 화병으로 아들 뒤를 따라가시고 나는 아버지를 저승길로 내몬 자식이란 멍에를 쓰고 한평생을 한으로 살아왔네 새끼줄에 묶여 사람을 죽이려면 조사나 하고 죽이라고 억울하다고 절규를 하며 즉결처형 당했다는 아버지를 가슴에 묻고 한 날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는 한 많은 삶을 살았네 내 나이 여든일곱 이날 이때껏 소원하지 않는 날이 없었네 아버지를 저승길로 안내한 열세 살 소년 적 그날, 1948년 11월 18일 그 날, 그날, 그날로 돌아 갈 수만 있다면 내 원도 한도 없겠네 [김인호 시인] -박덕서씨 이름을 찾았다 ▲ 구례읍 봉성산 밑에 있는 여순사건희생자위령탑. ⓒ김인호  프레시안 신문 기사 보기 ☛ https://v.daum.net/v/20220816091613427
    • 지리산문화
    • 시인과 시
    2022-08-26
  •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나는 옛이야기3-용유담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난 옛이야기3-용유담 용유담(龍遊潭), 용이 노닐던 연못이라니...... 지리산둘레길 금계-동강 구간을 걷다가 보면, 산길에서 뚝 하니 아스팔트 도로로 떨어지고, 어리버리한 채 냅다 벅수를 따라 걷다 보면, 용유담은 그냥 지나치고 말기 일수이다. 그런데, 조금 아쉽게도 용유담 한가운데를 흉측한 콘크리트 다리가 지나간다. 태풍 루사 때 유실된 다리를 2004년 새로 만들면서, 이렇듯 용유담을 반토막 내며 만든 것이다. 쯧.... 물론, 주민들의 일상의 평온함과 관광객의 편리함을 위해 크고 튼튼한 다리는 필요하지만, 꼭 이토록 모질게 반토막을 내면서 만들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은 지워지지 않는다. 용유담의 아래쪽에 있었던 옛날 출렁다리가 새삼 그리운 건, 낡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위치선정에 대한 옛사람의 안목이다. 이 용유담에는 알 만한 사람은 알고, 모를 만한 사람은 몰라도 되는 시시껄렁한 전설 하나가 전해져 온다. 옛날, 대게 모든 전설은 년도를 알 수 없는 ‘옛날’로 시작된다. 옛날, 이 용유담에는 ‘마적도사’가 살았더랬다. 이 마적도사의 실존은 용유담 위에 있는 ‘마적사’와 ‘마적대’ ‘마적동’의 존재로 능히 증명된다. 그래도 설마 하는 사람들이 있을게다. 전설에 나오는 마적도사의 실존을 믿고 안 믿고는, 물론 각자의 몫이다. 실존했던 마적도사에게는 말 잘 듣는 당나귀 한 마리가 있어, 마적도사의 심부름을 곧잘 하곤 했더랬다. 이 당나귀가 장에 심부름 갈 적엔, 마적도사가 도술을 부려 쇠막대기로 다리를 놓아주었다. 어느 날이었다. 항상 어느 날, 사건은 발생하게 마련인지라, 이 마적도사는 장기 두기를 워낙 좋아했는데, 그 어느 날 마적도사는 장기두기에 빠져 당나귀가 장에서 돌아오는 시간을 깜빡한 게다.(항간의 소문에 의하면 장기두기의 상대는 그 유명한 천왕할매라고 한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당나귀는 당연히 마적도사가 도술을 부려 다리를 놓겠거니 하고 기다리는데...... 그날따라, 용유담의 아홉마리 중, 여덞마리 용이 서로 싸우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마적도사는 당나귀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게다. 당나귀는 짐을 싣고 서서 힘을 다해 울부짖었으나 반응이 없어 그대로 지쳐서 죽었다고 한다. 당나귀의 죽음소식을 들은 마적도사는, 아차하고 후회를 했지만,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그 다음 대목은 동네 어르신의 말씀을 그대로 들어보자. “그래가지고 거서 나귀가 빠져 죽고, 말하자면 패해가 발생했다 아입니까? 장기 때문에 원인은 이리 됐다 해가지고 자기가 당나귀를 그렇게 질을 들이자면 엄청난 공을 들였을 거 아니요. 그런 당나귀가 죽어뿠으니까. 자기가 장기 때문에 그랬다 해가지고 장기판을 갖다가 돌장기판이제, 그 돌장기판을 떤지뿠는데, 하나는 길 건너에 말하자면 저 강 건너에 길에 가 떨어져 삐맀고, 현재 길, 도로 있는데... 한 쪼가리는 이 주변에 떨어져가 있는데 이 건네 떨어져있는 현재 어딨는가 몬 찾았고, 저 건너 하나는 거는 도로를 딲다가 장기판을 발견했대요, 돌장기판을. 그래 그걸 갖다가 발견을 했이먼, 그대로 보존을 했이먼 상당한 관광꺼리가 될낀데. 그 돌을 갖다가 우째 했는지 현재는 없어요. 그래가지고 당나귀가 달고 다니는 구슬방울. 방울도 일곱 개나 발견을 하고 그랬는데. 그래가지고 그기 또 이상한 일이 거기서 여 송전 사람이 도로공사 일을 했거든요. 일을 했는데, 방울을 멧 사람이 나눠가졌대요, 일하는 사람들이, 본 대로. 근데 그날 저녁에 가서 자고 나니까 전부다 없어졌대요. 이 도로 논 지 불과 십한오륙 년 전이거든요.“ 십오륙 년 전만 해도 흔적들을 찾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깜쪽같이 사라진 마적도사의 슬픈, 아니 마적도사 당나귀의 슬픈 전설은, 아직도 동리 주민들에게 그리고 용유담을 찾는 객들에게 전해져 오고 있다. 용유담엔, 용만 노니는 게 아니다. 용유담 양쪽 바위들에 빼곡하게 새겨진 각자(刻字 바위글씨)들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닐다 갔는지 알 수 있다. 그럼, 용유담의 각자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 볼까. 용담입문(龍潭入門). 이제는 도로와 다리로 네 갈래로 나뉘어졌지만, 옛사람들의 입장에서 용유담을 한번 방문해 본다면, 마천 혹은 휴천에서 백연마을을 거쳐 용유담으로 내려섰을 것이다. 그때, 그 입구에서 ‘용담입문’ 각자를 마주하면서, 아...이제 용유담이로구나... 용유담엔 여기가 용유담이란 걸, 떡 하니 알리는 각자가 세 군데나 있다. 용유동천, 동천(洞天)이란, 말 그대로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 즉 놀기 좋은 곳이란 뜻이다. 게다가, 방장제일강산 이라니...방장산은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닌가. 그렇다면, 지리산에서 제일 풍광이 좋은 곳이, 여기 용유담이란 말인데.... 조선 선비들의 지리산 유람록을 훑어보면, 반드시 용유담을 거쳐 가면서, 그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와 시를 한 수 씩 남겨 놓았다. 용유담 조구명 (1724년) 지세는 매우 깊고 그윽하며, 地勢陰森最 하천은 격렬하게 쏟아져 내리네 . 川流激射來 바람 불고 구름 일자 용이 솟아올랐다가, 風雲龍拔出 보금자리 찾아서 바위 뚫고 돌아오네. 巢宅石穿回 깊은 가을 날씨처럼 오싹한 느낌, 凜若深秋氣 마른 하늘에 날벼락 치는 용의 조화, 公然自日雷 위태로운 출렁다리 건너질 못하고, 危橋跨不測 바위 넘어 새 길 찾아 건너간다네. 生路渡方開 용유대, 세신대(몸을 정갈히 한다), 심진대(진리를 추구한다), 영귀대(논어의 한 대목으로, 유유자적한 삶을 꿈꾼다), 독조대(아...獨釣寒江雪), 경화대(동갑계), 강선대(신선이 내려와서 논다)....등 많은 계모임을 기념하는 각자들이 여기저기에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그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하다. 근데, 왜? 이리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글자를 새기고, 이름을 새길까? 그 이유는, 너무 간단한다. 단체사진, 단체셀카... 모여서 논 것을 기념해야하고, 기록을 남겨야 하는데.... 서울의 돈 많고 권력 있는 양반네들은, 화가를 불러서, 그림으로 남겨, 시화첩을 만들어 각자 나눠 갖는데, 그 보다 돈이 없는 치들은, 대신, 글자를 남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던 것이다. 용유담의 메인스트리트엔, 각자의 집대성, 아니 각자의 완결판이 모여 있다. 우선, 조선시대 유학계의 거두들의 이름이 주욱 나열되어 있다. 물론, 그 분들이 직접 새긴 것은 아니고, 후학들이 그들을 추모하는 뜻에서 새겼다. 문충공점필재김선생(文忠公佔畢齋金先生) 문정공남명조선생(文貞公南冥曺先生) 문민공탁영김선생(文愍公濯纓金先生) 문헌공일두정선생(文獻公一蠹鄭先生) 신라말에 유학이 들어왔지만 최치원은 골품제로 인해 좌절하고 신선이 되어 날아가고, 고려시대 안향이 성리학을 도입하고, 고려말 삼은(三隱,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으로 이어진다. 삼은은 고려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버티고, 삼봉이 사대부의 나라를 꿈꾸며 조선을 개국하지만, 그 역시 왕권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조선초, 왕권에 기댄 사대부, 즉 훈구가 왕과 권력을 분점, 아니 왕에 기대어 기득권을 유지한다. 안향에서 삼은으로 이어져온 사림은 조선초 야은 길재의 제자 김숙자, 김숙자의 아들 점필재 김종직으로 이어진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사후, 사관(史官)으로 있던 그의 제자 탁영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이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수록하였고, 이것이 연산군 대에 필화 사건으로 이어진다. 무오사화. 김종직의 제자 일두 정여창, 탁영 김일손, 한훤당 김굉필은 사화 때 죽임을 당하고, 또 부관참시 당한다. 환훤당의 제자 정암 조광조가 중종반정 이후 훈구파와 대립하여 사림을 이끌었으나, 주초위왕(走肖爲王)의 술수로 기묘사화 때 사사된다. 선조 이후 훈구파가 쇠락하고, 사림이 재등장하여 실질적인 사대부 지배세력이 된다. 권력을 잡은 사림은 이이와 이황으로 대변되는 서인과 동인의 당파를 성립하여, 동방5현(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문묘18현(최치원,설총,안향,정몽주,정여창,김굉필,이언적,조광조,김인후,이황,이이,성혼,조헌,김장생,송시열,김집,박세채,송준길)으로 자신들의 계보를 확립하면서 정여창과 김굉필, 조광조를 복원한다 그러나 점필재는 복원되지 못한다, 그와 삼봉은 조선의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이황의 동인세력은 이후 남인과 북인으로 분화되고, 다시 북인은 소북과 대북으로 갈라지면서, 정조 이후 권력의 중심에서 사라진다. 이이의 서인세력은 노론과 소론으로, 노론은 다시 시파와 벽파로 분화된다 정조 사후, 사림은 당쟁이 아니라 세도정치로 치닫고, 시파의 우두머리 김조순의 안동김씨, 풍양조씨의 조선으로 전락한다. 선조 이후 당쟁은 왕권과 사대부의 정책대결이고, 당파는 학문과 정치적 입장을 가진 정치집단이며, 그런 의미에서 긍정성을 가진다. 하지만, 정조의 탕평책의 실패로, 당파는 세도정치로 변모한다. 학문과 정치적 입장을 가진 집단이 아니라, 한 가문의 권력 독점으로. 그리고, 조선은 멸망한다. 용유담 각자 이야기를 하다가, 너무 뜬금포로 빠졌다....쩝....암튼... 그런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각자가 용유담에 있다는 말씀. 그리고, 용유담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땅문서가 있다. 인묘 은 사혜평 강공 현지지(仁廟 恩 賜惠平 姜公 顯之地) 이곳은 인종임금(재위 1544-1545)이 강현(姜顯 1486-1553)에게 하사한 땅이라는 뜻이며, 강현의 호는 신안(新安)이며 혜평(惠平)은 그의 시호이다. 벼슬은 형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13세손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봐서 1800년 이후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그런지...이곳 용유담과 인근 지역은 진주 강씨의 세력권이었다. 여기저기 강씨들의 집안내력들이 남아있다.(그 유명한 세진대도 그들의 작품이다) 땅문서 바로 옆에, 같은 진주 강씨인 한사(寒沙) 강대수(姜大遂: 1591~1658)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한사 강선생 대수 영귀소(寒沙 姜先生 大遂 詠歸所) 한사(寒沙) 강대수(姜大遂: 1591~1658)는 광해군과 인조때 벼슬을 했으며, 『한사선생년보(寒沙先生年譜)』(1899)에 따르면 인조8년(1630년), 영남관찰사 재직 중 하동 섬진강에 배를 띄우고 용유담으로 거슬러 올라 천왕봉에 올랐음이 기재되어 있다는데...근데 섬진강과 용유담은 수계가 다른데, 어떻게 배를 타고 왔을까...암튼, 옛날 사람들은 대단해.... 자, 그럼 이쯤에서 각자 이야기는 그만하기로 하고, 용유담에서 뻬놓을 수 없는, 가사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슬슬 마무리를 해야겠다. 조선의 국가 공식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용유담을 설명하면서, 가사어에 대한 언급이 있다. “마천소(馬淺所)에 있다. 지리산 북쪽 골물이 합쳐서 임천이 되었다. 용유담(龍遊潭) 군 남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임천 하류이다. 담의 양 곁에 편평한 바위가 여러 개 쌓여 있는데, 모두 갈아놓은 듯하다. 옆으로 벌려졌고 곁으로 펼쳐져서, 큰 독 같은데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기도 하고, 혹은 술 항아리 같은데 온갖 기괴한 것이 신의 조화 같다. 그 물에 물고기가 있는데 등에 가사(袈裟) 같은 무늬가 있는 까닭으로 이름을 가사어(袈裟漁)라 한다. 지방 사람이 말하기를, 지리산 서북쪽에 달공사(達空寺)가 있고, 그 옆에 저연(猪淵)이 있는데 이 고기가 여기서 살다가, 해마다 가을이면 물 따라 용유담에 내려왔다가, 봄이 되면 달공지(達空池)로 돌아간다.” 그래, 설마하니, 국가 공식 지리지에 존재하지도 않는 물고기를 언급할 리가 있겠나, 싶어, 용유담과 임천과 뱀사골을 샅샅이 뒤져 보지만, 지금까지 가사어를 발견하진 못했다. 아...조선의 지리지가 거짓말을 했구나 싶어, 실망하던 차에, 가사어에 대한 명확한 증거자료를 보게 되었다. 그래, 가사어는 실재로 있었구나.... 우선, 조선시대 여러 지도에, 가사어가 살고 있다는 반야봉 아래 저연(猪淵)이라는 표기가 명확히 나와있다. 지도에 나온 지명이 거짓일 리 없다. 그리고, 조선의 유명하고, 또 믿을만한 선비들의 글에, 가사어에 대한 이야기나 제법 나온다. 그렇다, 가사어는 존재한다, 아니 존재했다. 조선 정조 때 박제가와 함께 조선실학의 기반을 닦은 이덕무(李德懋)는 ‘듣는 대로 쓰고 보는 대로 쓰고 말하는 대로 쓰고 생각하는 대로 썼다’는 의미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를 남긴다. 그가 듣고 본 이야기 한 대목이 나의 주목을 끈다. "지리산 속에 연못이 있다. 그 위에 소나무가 죽 늘어서 있어 그 그림자가 언제나 연못에 쌓인다. 못에는 물고기가 있는데 무늬가 몹시 아롱져서 마치 스님의 가사와 같으므로 이름 하여서 가사어(袈裟魚)라고 한다.“ 조선 실학의 거두이자, 지금도 모든 정치인들이 존경한다고 입만 열면 언급하는, 다산 정약용의 스승이신, 이덕무가 사실이 아닌 것을 글로 남길 리 없겠다.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함양 군수를 엮임하고, 그 밑으로 일두 정여창, 탁영 김일손, 한훤당 김굉필을 길러 낸, 조선 사림의 총수, 김종직의 시 한편을 읽어보자. 達空寺下水梭花(달봉사하수사화) 紫鬣斑鱗味更嘉(자렵반린미갱희) 珍重廣文嘗不得(진중광문상부득) 却來天嶺病夫家(각래천령병부각) 달공사 아래에 있는 물고기는, 붉은 갈기 얼룩 비늘에 맛이 더욱 좋구나. 진중한 광문께서는 맛도 보지 않고서, 도리어 천령 병부의 집까지 왔네그려. 당대의 훈구파 세력에 맞서, 목숨을 걸고, 심지어 죽어서 부관참시까지 당해 가면서, 오로지 꼿꼿한 선비의 정신을 보여준, 사림의 총수 김종직이 가사어를 먹었다는 시를 거짓으로 지었다고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겠다. 중종 25년, 그러니까 서기 1530년, 왕명으로 지리지를 편찬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지금으로 치면, 국토교통부가 발행하는 일종의 종합지리지인 셈이다. 함양 편을 펼쳐보자. “봄이 되면 달공지(達空池)로 돌아간다. 그 까닭으로 엄천(嚴川) 이하에는 이 고기가 없다. 잡으려는 자는 이 고기가 오르내리는 때를 기다려서, 바위 폭포 사이에 그물을 쳐 놓으면 고기가 뛰어오르다가 그물 속에 떨어진다.’ 한다. 달공은 운봉현 지역이다.“ 조선이라는 국가가 편찬한 공식 지리지에, 가사어의 서식환경과 관측기록, 심지어 포획방법까지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그렇다, 가사어는 실재한 어류인 것이다. 1922년, 완산 최병칠이 편찬한, 운봉의 읍지인 ‘운성지’에 주목할 만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전래되어오는 말에 의하면 가사어라는 물고기가 있었는데, 용담에 사는 80세 노인이 그 물고기를 보았다고 하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중간에 어떤 무인(武官)이 가사어를 많이 잡고자 독약을 풀어 이 때문에 멸종되었다.” 중앙정부의 공식 지리지도 아니고, 왕명이나 김종직, 이덕무 같은 쟁쟁한 인물의 저서도 아닌, 일개 운봉읍지의 내용이어서, 그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할 순 있겠지만, 그래도 어엿한 역사사료인, 운성지는 가사어의 멸종을 육하원칙에 따라, 즉 언제 어디서 누가 왜 어떻게 했는가에 대해 정확히 기술 하고 있다. 이왕 하는 김에 조금 더 역사를 훑어보자면, 광해군 3년 1611년 남원부사 유몽인은, 근무는 안하고, 9일간 지리산을 산행하고 ‘유두류산록’이라는 산행기를 남긴다. 그 역시 인조반정이후 사형 당한다. 대게 지리산을 돌아다닌 조선의 선비들은 사형되거나, 부관참시되거나 아니면 조용히 은거하게 된다. 아무튼, 유몽인의 글에도 가사어가 등장하는데, “그 연못에 사는 물고기를 가사어(袈裟魚)라 부르는데, 이 세상에 다시없는 물고기로, 오직 이 못에서만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른다고 한다. 이에 어부를 시켜 그물로 잡게 하였으나, 수심이 깊어 새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 뱀사골 칠선골 한신골 맑은 물들이 모여 남강으로 가기 전, 한바탕 물의 향연을 펼치는 용유담에는 무수히 많은 역사적 사실과 자료, 그리고 그 보다 더 많은 전설과 이야기가 지리산 봉우리 숫자만큼이나 많이 고여 있다. 유몽인은 잡다가 놓치고, 국가 지리지에는 그 생태적 고찰이 있고, 김종직은 구워서 먹고, 운봉읍지는 그 멸종에 대한 세세한 기록까지 남겨 둔 가사어라는 한 어종의 이야기만도, 이렇게 무궁무진한데..... 지리산댐을 지어 수장시키려는 우리 시대의 한심한 노력들이 아직도 기웃거리고 있고, 그 욕심 때문에 용유담은 여즉 국가명승으로 지정되지 못하고 있다. 장마에 물이 불고, 계곡이 한번 뒤집어 지는 여름엔 용유담도 오랜만에 물들로 가득해 진다. 둘레길 걷다 지친 발을 담그기엔, 물이 너무 억세기에 탁족을 권하긴 어렵지만, 용유담 둘레를 찬찬히 한번 걸어보면서, 수많은 각자와 마적도사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일게다. 그러다, 혹시 자맥질하는 수달을 발견하시거든, 그 수달 입에 물려가는 그 물고기가 혹여 가사어가 아닐까 눈여겨 보시라.
    • 지리산문화
    2022-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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