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지리산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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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늘
    바늘 김 경 옥 쇠를 갈고 남은 몸이다 매끈한 은빛 몸매 뾰족한 침 끝, 더는 아무것도 없다 저 침에 닿을 때까지 사방 팔방 십이방 모서리 없어지고 이웃마저 사라질 때까지 얼마나 제 몸을 깎아냈을까 이 악물고 덜어내어 물러설 수 없는 절벽에 이르렀을까 갈고 닦는 일의 무한함이여 깎고 덜어내는 일의 은은한 아픔이여 가는 몸속에서 들리는 소리 하나에 기울이며 작은 귀 하나만 열어놓은 세월이여. --------------------------------------------------------------- 죽을 때까지 배우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는 말은 그저 지식을 말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이 무엇이며 왜 존재하고 있으며 이 세상은 또 무엇인가 하는 궁극적 질문을 안고 사는 존재다. 세상을 살아내는 일의 첫 번째가 나의 존재와 나를 존재하게 하는 이 세상이 무엇인지를 가늠하는 일일 것이다. 느티나무의 작은 박새 한 마리도 알에서 깨어나 날개를 퍼덕이며 제가 날짐승인지 들짐승인지부터 가늠하고 바람이 불면 어디로 날아야 한다는 것을 눈치 채며 자란다. 그렇게 모든 생명은 구체적 생활세계 속에서 자기 존재와 세상을 일치시켜내는 것이 세상을 살아내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 그 답을 말하고 죽는다. 태어나 죽기까지의 삶 자체가 스스로의 답일 것이니 그렇다. 다시 말하면 삶에는 정답이 없고 우리는 스스로를 살다가 죽을 뿐이다. (박두규. 시인)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3-11-13
  • 안개 유감
    「섬진강 편지」 -안개 유감 2023년 10월 22일 안개, 10월 23일 안개, 10월 24일 안개, 10월 25일 안개, 10월 26일 안개, 내리 닷새 아침 안개가 점령군처럼 구례를 장악했습니다. 안개가 옅은 날은 9시쯤이면 걷히지만 독한 날은 11시가 되어서야 해를 볼 수 있습니다. 섬진강과 서시천, 그리고 지리산 골짜기 아래마다 하나씩 있는 저수지들이 봄가을이면 구례를 안개의 마을로 만듭니다. 구례로 이사를 와서 8년이 지나고 나서야 안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구례 사람이면 다 알고 있는 안개의 피해를 모르고 아침마다 안개 예찬론을 펼쳤으니 얼마나 철부지로 보였을까요! 봄, 가을이면 일조량이 현저히 부족하고 습도가 높아 농작물들은 병에 취약하고 강마을 노인들은 기관지, 천식 등으로 고통을 받는답니다. 오죽하면 안개를 피해 산동으로 이사를 가려고 하겠느냐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그런데 최근에 지자체가 유치 신청한 양수발전소가 건설되게 된다면 구례는 그야말로 안개공화국이 되고 말겠지요. 섬진강댐보다 큰 규모의 댐이 2개나 들어선다면 1년 내내 안개에 시달리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거기다가 양수발전에 부족한 물은 섬진강에서 끌어 쓰게 된다니 그렇지 않아도 바닥으로 겨우 기어가는 섬진강물은 더 마를 것이고 가둬둔 물을 흘려보내게 되면 섬진강 하류의 오염은 뻔하지요. 구례는 지리산과 섬진강이 만들어 내는 때 묻지 않은 풍광들이 있어 귀촌자들이 선호하는 지역입니다. 귀촌 인구가 감소 추세인 최근에도 705명(2022년, 구례군 자료)이 귀촌했을 정도로 구례는 3년간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나를 포함한 구례지역 귀촌자들의 특성은 주로 자연환경을 중시하는 사람들로 최근 우리 마을에 7명의 젊은이가 이사를 왔는데 다들 구례의 천연 풍광에 매료되어 온 친구들입니다. 진정 애향 애민의 위정자들이라면 국비 1조 원이란 곶감으로 지역민들을 현혹하지 말고 “자연으로 가는 길, 구례”의 본심을 잊지 않도록 고심해야 할 것입니다. 댐이 들어서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어 30여 년 전에 댐이 건설된 순천 주암댐 주민들의 호소를 들어보시라! "자욱한 안개에 폐암까지"‥주암댐 주민 피해 호소 https://ysmbc.co.kr/article/d4H__7afKF797La-l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3-10-27
  • 몸 가르침 한 수
    몸 가르침 한 수 절에 있을 때 이야기다. 참 오래된 이야긴데 나는 대학 입시에 떨어지고 갈 곳이 없었다. 집에 있자니 부모님 보기도 민망하고 나가 돌아다니자니 어느 대학에 갔냐는 질문이 무서워 사람 만나는 것도 겁나고, 혼자 빈둥거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어서 작은 보따리 하나 들고 무작정 절로 들어갔다. 그 길로 거의 1년을 절집에서 살았는데 그해 여름의 일이었다. 그곳은 서래선림(西來禪林)이라는 비석이 입구에 서 있는 지장암(地藏庵)이라는 절이었는데 해안(海眼) 큰스님이 돌아가시고 사부대중의 발길이 끊기고 상좌들도 밖으로 나가 있어서 말 그대로 절간처럼 조용한 절이었다. 때는 한 여름이라 녹음이 짙을 대로 짙어져 숲 그늘에 누워 잔잔한 바람에 책이라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달콤한 낮잠에 빠지곤 하던 시절이었다. 그 여름 어느 날 객승이 한 분 오셨는데 작달막한 키에 별 말이 없는 얼추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스님이었다. 대개 스님들은 객으로 묵을 때면 예의상 곧잘 예불도 드리곤 하는데, 그 스님은 아침 예불이건 저녁 예불이건 한 번도 불당에 오르는 일이 없고, 도통 방에만 틀어박혀 나올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방에서 공부를 하거나 참선을 하는 것도 아니고 거의 종일토록 잠을 자거나 방에서 빈둥거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제부턴가 그 스님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한 낮에도 쉬지 않고 해가 질 때까지 죽어라고 일만 하였다. 특별히 할 일이 없는데도, 이를테면 아랫마당에서 법당까지 놓여 있는 돌계단을 괜히 파헤쳐 놓고 다시 하나하나 계단을 맞추어 쌓는 그런 일이었다. 내가 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멀쩡한 돌계단을 부수고 쌓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름에는 더우니 보통 이른 아침이나 저녁나절에 강한 햇살이 죽었을 때 일을 하는 법인데 이 스님은 태양이 이글거리기 시작하는 10시쯤에야 일을 시작하여 밖에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그런 뙤약볕에서 일을 하다가 해가 지는 무렵이면 일을 끝냈다. 정말 온몸이 땀에 젖어 금방 물에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젖은 채 하루 종일 일을 하였다. 이렇게 여러 날이 지났으나 스님은 매일매일 죽어라고 일만 했다. 그런 스님에게 나는 말 붙이기도 왠지 꺼려했는데 하도 궁금해서 언젠가 ‘스님, 왜 스님은 예불은 안 모시고 일만 한답니까?’ 하고 물었더니 스님은 별다른 표정도 없이 ‘나는 예불 드리는 거 몰라.’ 라며 마당으로 가서 또 괜한 돌계단을 허무는 것이었다. 진짜로 염불을 못하는 것인지 궁금했고, 염불도 못하면서 어떻게 스님이 되었는지도 궁금했다. 아니 무엇보다도 왜 그렇게 가장 더운 시간에 미친 듯이 일만 하는 지가 가장 궁금했다. 그 스님은 나의 이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고 언젠가 말도 없이 훌쩍 지장암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30년이 지난 지금, 가끔 그 스님이 생각난다. 아니 그는 3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나를 가르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일에 말만 앞세우고 말로만 해결하려 들며 몸은 까딱도 않는 나에게 말이 아닌 ‘몸’을 가르쳐준 스승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보다는 ‘몸의 행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강변하듯 그의 여름날 노동이 그의 수행법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수행은 말보다도 공부보다도, 온몸의 행위로 진실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기 위한 것은 아니었나 싶다. 입만 벙긋하면 거짓말이 튀어나오는 거짓 덩어리의 이 몸뚱어리, 살아온 세월만큼 두꺼워진 위선의 몸집, 거짓으로 가득 찬 비만의 몸뚱어리에게 ‘진실’이 무엇인가를 이처럼 명쾌하게 가르쳐주는 스승은 아직 없었다. 사실 요즘 현대인들은 가급적이면 모든 일을 ‘앉아서’ 처리하려고 한다. ‘몸으로 뛰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현대 과학기술문명과 컴퓨터 문화의 일반화로 사람들의 생활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져서 몸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치장’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사는 것 같다. 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상품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몸을 아름답게 가꾸려고 하는 것, 그 자체는 이해할 수는 있으나 그것의 궁극적인 지향은 결국 몸의 상품성을 높이는 것으로 귀착되는듯하여 씁쓸하다. 요즘 세태를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사실 인류의 역사가 자본주의의 역사로 넘어 오면서 전 지구적 시장경제를 통해 지상의 모든 것은 이미 상품이 되어 버렸으니 ‘몸’인들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요즘 부쩍 더 30년 전의 그 이름조차 기억이 안 나는 스님이 자주 내 앞에 나타나 어른거린다. (박두규. 시인) -노루귀 / 김인호
    • 지리산문화
    • 지리산 편지
    2023-03-08
  • 겨울 산에서
    ■ 시 겨울 산에서 이건청 나는 겨울 산이 엄동의 바람 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서서 겨울밤을 견디고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큰 그늘 속에 빠져 기진해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작은 암자에 며칠을 머물면서 나는 겨울 산이 살아 울리는 장엄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대개 자정을 넘은 시간에 시작되곤 했는데 산 아래, 한신계곡이나 칠선계곡 쪽을 지나 대원사 스쳐 남해 바다로 간다는 지리산 어느 골짜기 물들이 첫 소절을 울리면 차츰 위쪽이 그 소리를 받으면서 그 소리 속으로 섞여 들곤 하였는데 올라오면서 마천면 농협 하나로마트 지나 대나무 숲을 깨우고 산비탈, 마천 사람들의 오래된 봉분의 묘소도 흔들어 깨우면서 골짜기로 골짜기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오를수록 그 소리는 점점 더 곡진한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었는데 산 중턱을 넘어서면서 홍송들이 백 년, 이 백년씩 그들의 가지로 서로의 어깨를 걸친 채 장대한 비탈을 이루고 있는 곳까지 와서는 웅장한 코러스가 되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내가 사순절의 어느 날, 대성당에서 들었던 그레고리 찬트의 높은 소절과 낮은 소절이 번갈아 마주치는 어느 부분과 같았다. 이따금 이 산에 사는 산짐승들이 대합창의 어느 부분에 끼어들기도 하는 것 같았는데 그때마다 그레고리 찬트 속에서 짐승들의 푸른 안광이 빛나곤 하였다. 겨울 산이 울려내는 대합창이 온 산을 울리다가 서서히 함양 쪽으로 잦아들 때쯤 건너 쪽 지리산 반야봉, 제석봉의 윤곽도 밝아오는 것이었는데 날이 밝고 산의 윤곽들이 선연해지면 자작나무도 굴참나무도 그냥 추운 산의 일부로 돌아가 원래의 자리에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는 것이었다. 그냥 겨울 산이 되어 침묵 속으로 잠겨드는 것이었다.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3-02-26
  • 지리산 법화종주
    「섬진강 편지」 -지리산 법화종주 천왕봉,제석봉,연하봉,촛대봉,영신봉,칠선봉, 덕평봉,형제봉,삼각봉,명선봉,토끼봉,삼도봉 2박 3일, 지리산 품으로 출가를 했습니다 40km 지리능선 수많은 봉우리를 오르내린 수행길 절뚝이며 휘청이며 30시간을 걸으며 우리네 삶도, 사랑도 이렇게 숱한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깊어지는 것임을 온몸으로 배웠습니다. 폐절제 수술 3년이 지나고 망설이던 지리산 종주까지 무사히 마치고 나니 폐가 잘려 나간 자리에 새로운 기운이 차오르는 것 같습니다. 넘어지면 손잡아 주고 가파르면 끌어주고 카메라 짐을 나누어지어 준 지리산사람들 길동무님들이 있어 힘들다는 겨울 지리산 종주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마칠 수 있어 참 행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모두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섬진강 /김인호 *지리산 법화종주 ; 법계사에서 화엄사까지 오는 종주길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3-01-26
  •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학의 길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학의 길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 박 두 규 (시인) 1 코로나 국면을 맞고 보니 그동안 꾸준히 거론되어 오던 기후변화에 따른 전 지구적 위기라는 것이 코앞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문학은 무엇인가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우리는 문학에 대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논의를 해왔지만 지금의 현실상황을 보면 ‘지구 위기, 인류의 위기’라는 관점에서 문학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학도 과학이나 기술처럼 현실에서 우선적으로 ‘지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삶 문학에 일정 부분 복무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도 문학은 문학대로 지금껏 확장해온 영역이 있고 인류사 속에서 다양하게 그 역할을 해왔으며 또 어떤 특별한 상황 속에서는 그 상황에 맞게 대응해왔기 때문에 지금처럼 그렇게 하면 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이 상상력의 문학이고 영적 문학이라는 점과 ‘지구의 위기, 인류의 위기’의 현실에 대한 복무를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100년의 지구, 100년의 인류를 염두에 두며 글을 통해 더 세밀하게 그려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현재의 과학과 기술보다 100년의 현실을 앞서 이야기하고 노래하며 올바른 방향의 길을 찾는 더듬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2 요즘 쏟아져 나오는 학자들의 글들을 읽어 보면 기후 환경으로 인한 지구의 위기 상황은 현실의 감도보다 훨씬 심각하다. 지금 우리가 해마다 역대 기록을 갱신하며 겪는 자연재해는 단순한 재해가 아니라 대량학살의 위기이며 재앙의 시작이라고 봐야 옳다는 것이다. 인류가 자본주의 문명의 현행 기조를 고수할 경우 2100년에는 탄소배출량으로 인해 지구의 기온이 약 4도 이상 상승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북극의 빙상은 이미 붕괴된 지 오래고 알프스의 만년설은 70% 이상 녹으며 해수면은 최대 2.4미터 상승할 수 있다고 한다. 인구 천만의 자카르타 같은 도시가 물에 잠기며 세계의 주요도시는 거의 2/3가 해안에 위치해 있으니 그에 따른 발전소, 항구, 농경지 등 주요시설도 함께 위험해질 것이다. 그리고 적도 지방의 주요 도시들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한다고 한다. 이미 2018년 폭염 시에 로스엔젤레스 42도, 파키스탄 50도, 알제리 51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물 부족과 폭염으로 북위도 지역마저도 해마다 수천 명이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21세기가 끝날 무렵이면 코로나와 같은 새로운 질병들, 상상을 초월하는 산불과 홍수의 증가, 수천만 명에 이르는 기후 난민, 경제 대공황과 지역 간의 기후분쟁, 농산물 생산이 크게 줄면서 일어나는 자원전쟁 등 한 해 기준 100조 달러의 세계 피해규모가 예상된다니 앞으로 80년 안에 변화될 지구의 모습을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지금의 자본주의적 개발과 소비 패턴에서 조금도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진행되었을 경우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코로나19가 해결된다 해도 이전의 시절로 돌아가 예전의 일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지구와 인류는 이미 변화의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고 새로운 문명이 일어나는 시점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기존의 자본주의를 토대로 이루어낸 과학기술문명, 물질문명의 틀에서 벗어나 이전의 의식에서 한 단계 점핑된 도덕적 과학기술과 새로운 정신문명으로의 판짜기 변화가 절실해진 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현재 소비와 개발성장의 자본문명에서 전환하여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 갈 것인가를 이야기해야 된다. 포스트 코로나를 맞아 변화되어야 할 의, 식, 주, 의료, 교육 그리고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까지 기존의 질서와 그 틀을 어떻게 바꿔가야 할 것인지를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문학은 이 현실 변화의 중심에서 어떤 마음, 어떤 영혼을 가진 인간이어야 하는 것을 그려내야 하는 것이다. 3 지금껏 지구와 인류의 위기를 초래해온 자본문명을 벗어나 새로운 문명을 꿈꾼다면 먼저 기존의 자본주의적 가치관과 세계관 등 일상 속의 대중들에게도 정신적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 생각이 바뀌어야 그 삶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정제 없이 그대로 반영된 이데올로기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그렇게 이익을 극대화하며 개발과 성장의 경제논리로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이 자본주의다. 자본은 배고픔과 위험한 환경 조건에서 풍요로움과 안전함과 편리함을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그 도를 넘어 인간의 끝없는 탐욕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렇게 인류는 풍요와 편리를 거느린 현실 자본주의를 앞세워 공존공생을 위한 사회적 도덕과 윤리의 경계를 깨고 탐욕과 욕망을 당연하고 정당한 인간 정서로 편입시켰다. 단순하게 이야기 했지만 사실 이런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자본주의와 잘 어울려 끝없이 달려온 결과 현재의 지구와 인류의 위기를 맞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개인의 인간도 그 탐욕이 지나치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처럼 반성과 성찰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면 인류는 21세기가 끝나는 지점부터는 지금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혹독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사피엔스의 종말을 향해 추락해 갈 것이다. 그래서 문학예술은 지금의 시점에서 좀 더 집중적으로 21세기 이후의 현실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한 새로운 문명, 새로운 문학예술에 복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문명에 대응하는 문학을 생각하려면 자본주의의 속성인 탐욕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철학, 새로운 문화를 궁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어쩌면 삶의 본질과 모든 생명을 아우르는 총체적 근원으로부터 오는 것이어서 그것은 현실 자본주의를 벗어나 근본 진리의 삶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본래 모든 생명들은 함께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공존공생의 공동체적 존재라는 것과 그것을 위해 인간은 가장 경계해야 할 본성인 ‘탐욕’을 꾸준히 정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4 나는 이것을 문학이라는 영역에서 생각한다면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는 ‘단순한 삶’과 ‘소박한 삶’을 하나로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인데 ‘단순한 삶’의 문학은 개인 스스로를 전체의 한 부분이면서, 그렇기 때문에 전체라는, 그래서 전체를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라는, 이미 붓다나 예수 등 많은 현자들이 발견했던 동체대비, 궁극과의 합일 등 진리의 삶과 연계되어 있는 것이며 이를 현실로 가져오기 위한 문학을 말한다. 이는 ‘단순성’이라는 진리의 영역을 문학으로 가져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실현할 수 있는 ‘단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리의 삶은 당장 그렇게 살려는 스스로의 결단과 실천만 있으면 되는 ‘단순성’에서 시작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진리에 의해 사는 삶’은 어떤 거창한 것은 아니고 현재의 실상을 바로보고 그것에 어긋남 없이 사는 것, 다시 말하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삶의 실상은 모두가 있는 그대로 어울려(연기적 관계를 가지고) 전체가 하나의 생명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있는 그대로(본질 그대로) 어울려 순환하고 진화하는 것이 바로 ‘단순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변곡점에서 문학이 주시해야 할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소박한 삶’은 이런 ‘단순한 삶’을 현실로 가져오기 위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 사실은 방법이면서 그 본질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를 진화시켰던 인간의 탐욕은 끝없는 집착을 가져와 현재 지구의 기후재앙과 함께 모든 문제의 화근이 되었고 이 탐욕과 집착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소박한 삶’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본의 끝없는 성장 시나리오는 이제 그 한계에 왔다. 대체 에너지 등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과학기술의 노력과 성과가 있다하더라도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충족시킬 수는 없다. 결국은 소박한 삶으로 가지 않으면 해결 될 수 없는 것이다. ‘소박한 삶’은 스스로의 탐욕을 다스리는 삶이고 우리 사회의 대립과 갈등을 조화와 균형으로 이끄는 해답이라고 본다. 이‘소박한 삶’을 통해 모든 생명과 지구가 하나의 완결체로 존재할 수 있는 공존, 공생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문명을 극복하고 새로운 문명의 길로 가는 길목에 이러한 물질 중심의 삶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 문학적 화두를 통해 개인의 이기(利己)를 극복하고 무아(無我)와 탈에고(脫ego)의 수준까지 의식을 확장하여 탐욕을 순치(順治)하는데 기여해야 하는 것이 현재의 문학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코로나19와 같은 새로운 질병들과 지구의 기후재앙을 막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첫눈이 내린 노고단
    • 지리산문화
    • 지리산 편지
    2022-12-16

실시간 지리산문화 기사

  • 2024 봄꽃 사진 모음
    「섬진강 편지」 -2024 봄꽃 사진 모음 언 대지를 뚫고 나온 경이로운 얼음새꽃 첫 송이로 시작된 봄꽃들 변산바람꽃, 너도바람꽃, 꿩의바람꽃, 노루귀, 솔이끼, 만주바람꽃, 산자고, 현호색, 얼레지, 큰괭이밥이 우리들에게 환한 인사를 건네주었고 지금 숲에서는 깽깽이풀도 꽃을 피워 올립니다. 그리고 어제 섬진강변의 구례 남바람꽃도 첫 송이를 피웠습니다. 기다리던 남바람꽃 소식은 따로 전하겠습니다. - 섬진강/ 김인호 -언 땅을 뜷고 피어난 첫 얼음새꽃 -눈섞임물소리에 깨어나는 꽃들 -어떻게 저기까지 올라갔을까? -온기를 나누며 옹기종기 변산바람꽃 -새해 노랑나비를 맨처음 만나면 행운이 온다는데 그만 노랑나비를 만났고 말았다, 변산바람꽃과 노는 남방노랑나비 -봄꽃들은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돌밑이나 나무뿌리 속에 자리를 잡았다. -청노루귀를 지켜보는 눈빛들 -홍노루귀 배경이 편하해서 좋았다 -너도바람꽃 폭포버젼 -지리산 구슬이끼 - 만주바람이 피어 황사바람이 부는건지 황사가 불어 만주바람꽃이 피는건지, 하여간 둘의 때는 딱 맞는다. -꿩의 바람꽃 -산자고 -마을 뒷산 보춘화가 많아 좋다 -얼레지 장관 -얼레지와 히어리 다중촬영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4-03-25
  • 얼레지 장관
    「섬진강 편지」 - 얼레지 장관 화엄사 홍매소식을 전하느라 며칠 숲에 못갔는데 그새 숲은 멋쟁이 무늬치마 얼레지가 판을 벌렸습니다. 반짝이던 만주바람꽃빛 이울고 얼레지가 환합니다. 산자고, 큰괭이밥, 히어리, 꿩의바람꽃, 얼음새꽃이 간간이 출연을 하지만 이번 주간 숲의 주인은 얼레지입니다. 수백 수 천의 얼레지들이 깨어나는 숲은 장관입니다. 행안부장관 법무부장관 무슨 무슨 장관들은 째비도 안되는 진짜 빛나는 얼레지 장관입니다. -섬진강 / 김인호 -꿩의바람꽃 -산자고 -얼레지 -얼레지 -얼레지 -히어리 -얼레지와 히어리 다중촬영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4-03-20
  • 화엄사 홍매 소식
    「섬진강 편지」 -화엄사 홍매 소식 숲에 다녀왔습니다 만주바람꽃, 꿩의바람꽃, 현호색, 얼레지 꽃이 환하고 이른 깽깽이, 할미도 꽃을 피웠습니다 다음 주 숲은 더 환하겠습니다. 화엄사 홍매 소식을 전하기 위해 아침 일찍 화엄사에 들렸습니다. 반쯤 꽃을 피웠네요, 다음 주말까지는 화엄사 홍매의 매혹적인 빛에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일 아침(3월 16일) 7시 30분에는 화엄사 스님들이 포토타임 울력으로 모델을 서준다니 기대되네요. #화엄사홍매 #50프로개화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4-03-15
  • 마음과 나
    마음과 나 “인간을 속박하는 것도, 해방시키는 것도 마음(Mind)이다. 왜 마음이 속박과 해방을 일으키는가? 왜냐하면 인간보다 덜 발달된 존재들은 독립적인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은 타고난 본능에 의해 이끌린다. 그러나 인간은 독립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속박이나 해방으로 향하는 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인 차이다. 마음은 언제나 어떤 대상을 가지고 있다. 여러 경전에서, 대상을 “아보거(ábhoga)”라고 한다. 아보거는 마음에 음식을 주는 대상, 즉 정신적 양식을 의미한다. 만약 이 양식이 제한적이라면 마음 또한 제한된다. 만약 이 양식이 무한하다면, 그 무한한 양식을 얻기 위해 애씀으로써 마음도 무한해진다. 제한적이든 무한하든 어떤 양식을 마음의 대상으로 삼을지는 오로지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다. 인간이 위대해질지 평범해질지는 온전히 그가 무엇를 바라는가에 달려있다.” 슈리슈리 아난다무르띠의 『아난다 바차나므리땀』에서 위는 인도의 ‘아난다 마르가 요가 명상 수행공동체’의 창시자 아난다무르띠(P.R. 사카르)의 말씀이다. 위 내용이 실려있는 『아난다 바차나므리땀』이라는 책은 아난다무르띠가 매일 방문하는 대중들을 친견할 때 했던 짧은 말들을 책으로 묶은 것으로 30여 권 출간되었으며 그중 제1권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위에서 말한 인간을 속박하는 것도 해방 시키는 것도 마음이라고 하는 그 마음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독립적인 마음이라고 한다. 이 독립적인 마음은 동물에게는 없으며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에고(ego)’에 다름 아니다. 동물에게는 에고가 없다. 그래서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의지’라는 것도 없고 ‘자존심’ 따위도 없다. 그저 본능만이 있어서 먹고 자며 생명을 지키고 번식시키는 것만이 삶의 전부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독립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개체의식이라고나 할 수 있는 이 ‘에고’는 ‘나’라는 존재 의식을 갖게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사람은 존재의 한계를 갖게 되기도 한다. 그것이 속박이고 개체가 존재적 사고를 하는 범주이고 한계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 에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만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그 속박 속에서 살다가 그것이 속박인지도 모른 채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렇다고 에고를 버려야 하는 것으로만 인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에고는 우리를 ‘나’라는 감옥에 갇히게 하는 속박의 주범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에고로부터 개체의 의식을 확장 시키는 수행을 통해 해방, 대자유의 길을 찾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내 안의 신성을 발견하고 지고의 의식과 합일에 이르기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반드시 어떤 대상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이 돈이든 이성이든 어떤 다양한 대상으로부터 마음이 나온다. 그 대상을 “아보거(ábhoga)”라고 하는데 다시 말하면 그 마음의 대상, 마음이 취하는 먹이, 정신적 음식이 아보거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내 생각을 이 순간 물들이고 있는 대상인 것이다. 우리 육체가 음식이 필요하듯 우리 마음도 늘 음식이 필요하고 그 음식을 끊임없이 취하고 있는데 그것이 곧 생각의 대상이고 마음의 대상이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 방금 사라지거나 때론 길게 머물기도 하는 그 모든 마음의 대상, 그것이 바로 아보거인 것이다. 그런데 이 아보거는 인간의 의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이 마음의 양식이 제한적이라면 마음 또한 제한되며 이 양식이 무한하다면 그 무한한 양식을 얻기 위해 애씀으로써 마음도 무한해진다. 제한적이든 무한하든 어떤 양식을 마음의 대상으로 삼을지는 오로지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많은 사람은 대부분 물질적인 대상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것은 유한한 것이기 때문에 궁극의 기쁨을 주지 못하고 순간적인 즐거움만을 줄 뿐이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데 이처럼 유한한 대상에 집중하면 그것을 얻을 수 없다. 영원한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을 영원한 대상에 집중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명상의 원리이기도 한 것이다. 많은 사람은 궁극의 기쁨을 원하면서도 무한한 지고의식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대상에 집중하는 모순에 빠져 살고 있다. (박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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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편지
    2024-03-11
  • 황홀 4
    황홀 4 이 민 숙 민들레 씨앗은 어디로 날아갈까 알려하지 말아라 멀어서 황홀한 그대 살빛 너머에는 45억 년을 기어와 지금도 기어가고 있는 달팽이의 설움이 있다 흙빛 설움, 바람 부는 허공을 바라보며 가슴을 털어 비우고 있다 텅빈 산정에 흐르는 구름 한 잎, 허공이 황홀이다 염려하지 말아라 민들레 씨앗도 너무 멀리 날아가서 기진할까 봐 피아노 건반을 건너뛰지 않는다 베토벤의 한 손가락도 놓치지 않는다 음표 하나가 영원인, 민들레 깃털 되어 날아가는 고흐의 귀! 아무 것도 들을 수 없는, 절벽이 황홀이다 꿈꾸지 말아라 꿈이 아니다 사랑은, 민들레 씨앗보다 꿈보다 더 멀리 날아가는 그리움의 수액을 받아마셔라 대지의 몸이 척박해질 때 노랗게 기진하는 그리움을 뿌려라 차마고도의 끝에서 걸어온 낙타가 짐을 부리고 잠이 드는, 사막이 황홀이다 ------------------------------------------------------------------------------- 이 시는 ‘민들레’를 소재로 해서 시인 내면의 어떤 사유를 ‘황홀’이라는 시어로 집약해낸 것으로 보인다. 자유로운 생명을 상징하는 민들레 씨앗이 날아가는 곳이 어디일까. 그 생각은 45억년의 우주적 시간 속 존재의 설움까지 나아가고 가슴 속 그 설움을 허공을 바라보며 비워내다가 허공처럼 그렇게 모두 비워내는 것이 삶의 극치에 이르는 ‘황홀’ 아니겠냐고 말한다. 불가에서 ‘공空’이르는 깨달음의 황홀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다시 허공으로 사라지는 민들레 씨앗을 보며 저 생명이 (건반을)건너뛰지도 않고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 삶의 과정 속에 있는 엄혹한 현실, 절벽 같은 그 현실 자체에서 다시 꽃을 피우는, 차라리 ‘황홀’이라고 말한다. 생명을 가진 존재는 생명이 붙어있는 지금의 현실만이 전부이며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절벽 같은 절망 속에 있다 해도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황홀’이며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은 결코 꿈이 아니며 현실 속의 사랑 또한 꿈이 아니니 그것들에 대한 현실적 갈망, 근원적 그리움을 따라 걷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 갈망과 그리움의 짐을 싣고 걸어와 잠이 드는 그 사막 또한 ‘황홀’이라고 말한다. (박두규. 시인)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4-03-11
  • 2월에 새로 사귄 친구들
    「섬진강 편지」 - 2월에 새로 사귄 친구들 2월 들어 황새를 만나면서 뱁새가 보고 싶어 뱁새를 찾다가 원앙을 만났고 원앙이 동박이를 소개해줘 동박이를 만났고 동박이 만나러 다니다가 흑두루미 주소를 알아 찾아 인사를 나눴고 흑두루미집에 함께 사는 독수리를 만났다. 지난 주말에는 지리산사람들 총회에 갔다가 함양 엄천강 호사비오리를 만났는데 렌즈가 작아 잘 담지 못했다. 조만간에 대형 망원렌즈를 구입할 것 같은 예감이다. 보내준 흑두루미 사진을 보고 아이들이 흑두루미를 보러 가겠다고 한다. 도시의 아이들이 나의 친구들에게 관심을 보여주니 기쁜 일이다. 그렇다고 새로 사귄 친구들 때문에 그대를 잊은 것은 아니다. -섬진강 / 김인호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4-02-29
  • 최초 춘향사당을 복원하고 최초 춘향영정을 봉안하라!
    문재인 정부 하에 일제잔재청산 정책으로 악질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춘향영정의 부활을 경계한다.
    • 지리산사람들
    • 지리산사람들 활동이야기
    2024-02-29
  • 봄눈 녹듯
    「섬진강 편지」 - 봄눈 녹듯 깨어나는 병아리빛 산수유 꽃봉우리 위에 밤사이 눈이 내렸다. 고양이 세수를 하고 산동 상위마을로 달려가 풍경을 읽는데 금새 눈이 녹아내려 무슨 글인지 따라 읽을 수가 없다 봄 눈 녹듯, 지난 밤 마을 회관 술자리에서 토닥거린 친구들 마음도 이 봄 눈 녹듯 녹아내렸으면 좋겠다. 피었느냐 소식 물어오는데 화엄사 홍매는 아직, 아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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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섬진강 편지
    2024-02-26
  • 구례 지리산자락에 황새가 돌아왔다
    저 까마귀, 황새 쫓다가 가랭이 찢어지겠네!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4-02-19
  • 봄빛 무게
    「섬진강 편지」 -봄빛 무게 빗방울 머금은 지리산 자락 반야원 호수 홍매, 섬진강과 지리산 자락을 오가는 우아한 황새 나래짓, 천개의향나무숲 매화 꽃그늘로 날아든 나비 소녀 욕심껏 담아온 봄빛 무거워 삐끗한 허리에 혜미원 원장 일침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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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섬진강 편지
    2024-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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