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11(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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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생의 가장 큰 죄
    인생의 가장 큰 죄 오래 전 일본의 명상 컨퍼런스에 다녀왔는데 그것은 아난다마르가 출가 수행자인 칫 따란잔 아난다와(칫 다다지)의 인연 때문이었다. 나는 그를 따라서 인도의 아쉬람 여행과 아르헨티나에서 열리는 국제 명상 컨퍼런스, 그리고 홍콩의 아시아권 명상 행사 등을 다녔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명상이라기보다는 명상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해외여행 하는 기분으로 따라다녔을 뿐이다. 칫 다다지는 한국 사람인데 서강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가서 경제학 박사 학위까지 받은 경제학자였다. 그리고 귀국하여 이런저런 국영 연구소를 다니며 가정을 꾸리고 잘살고 있었는데 어떤 계기로 우연처럼 인도에 가서 출가 수행자가 되신 분이다. 인도의 아난다마르가 수행공동체에서 줄곧 수행하며 지금은 아난다마르가의 다다(스승)의 단계에 올라 세계를 떠도는 지구인으로 현재는 주로 중국의 충칭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가난하다. 단체로부터 생활비를 따로 받는 것도 아니고 개인의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늘 밝고 긍정적이며 아무런 걱정 없이 나름의 일만 열심히 한다. 그 나름의 일은 사람들이 명상을 통해 스스로 개체의식을 밝히도록 도와주고 사회의식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난다마르가 사상과 철학의 핵심인 네오휴머니즘과 프라우트 사회를 실현하려는 것이기도 했다. 내가 생명평화결사에서 일할 때 이 단체에서 일하고 싶다며 스스로 찾아온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인도에 있다가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아난다마르가의 사회적 실천을 위해 생명평화결사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나는 그를 통해 한 생을 살며 왜,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삶의 근본 문제를 구체적 일상과 일치시키며 살아야 한다는 배움을 얻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자기완성을 위한 명상과 같은 구도행은 개인을 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실천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밥 먹고 일하며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 반복적인 하루 일상도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일인지를 깨닫게 해줬다. 그는 살면서 별난 하루가 아니더라도 매 순간 감동과 감격 속에서 일상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아, 매 순간 감동과 감격으로 이어지는 일상이라면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그에게 명상을 배우며 나는 조금씩 스스로를 걸러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 겨우 현실적 에고를 극복할 수 있는 어떤 영역에 대한 그리움이 생겼다. 그리고 이 영역을 꾸준히 넓히고 다지는 것이 어쩌면 매우 중요한 일이고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당시 어떤 책을 읽으며 ‘인생의 가장 큰 죄는 인생을 낭비하는 죄다.’라는 구절이 뇌리에 깊이 박혀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낭비인지, 무엇이 낭비가 아닌지도 잘 모르면서 우선 최선을 다해 명상 공부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길을 나서면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알고 가는 것이 당연한데, 하물며 인생길을 가며 그런 생각을 안 하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칫 다다지를 만나면서 그런 생각이 더욱 선명해지고 구체화 되었다. 그리고 ‘어디로’나 ‘어떻게’의 정답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누구나 똑같은 길을 갈 수는 없을 테니까. 다만 본질을 놓치지 않고 스스로 얼마나 충실하게 자기 현실을 소화하는가가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일상은 중요한 현실이지만 쉽게 그 속에 묻히게 되는 자신의 한계를 항상 조망하고 콘트롤할 수 있는 어떤 힘 또한 명상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칫 다다지에게는 그것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열심히 명상을 배우며 마음속으로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세속의 예를 다하려 애썼다. 그는 수행이 깊어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고 다정하며 누구에게나 격이 없고 매우 친절했다. 나는 그와 친구처럼 부담 없이 함께 지낼 수 있었다. 나는 ‘친구가 될 수 없으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 없으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라는 말을 떠올리며 그가 이 짧은 생에 친구이고 스승이 되어 함께 갈 수 있기를 소망했다. 무엇보다 인생의 가장 큰 죄를 짓고 싶지 않았다. (박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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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1
  • 완벽한 당신
    완벽한 당신 역사는 대부분 권력과 부와 사랑을 중심에 두고 진행되었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행복이 그곳에 있다는 사람들의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을 보면 권력은 폭력이고 부는 탐욕이며 사랑은 치유와 정화라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생각은 사람마다 또 다를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변화와 흐름 속에서 한목숨 살아내기 위해 자신에 그리고 자신의 현실에 매몰되어 사는 날이 많다 보니 똑같은 경험을 각기 다르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늘 상대방과 그 상대가 처한 현실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서로 오해가 생기고 갈등과 반목의 관계가 만들어져 살아온 것이다. 개인은 물론 가정과 가정, 국가와 국가, 나아가 인간과 자연까지도 말하자면 상대에게 마음을 쓸만한 여유도 없이 우선 바쁘게 나만 챙기며 살아온 것이다. 말은 늘 이해한다고 사랑한다고 우리는 하나라고 하면서 진정으로 그러한 마음을 품지 못하고 사는 것이 우리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이든 자신이 모르는 것은 일단 거부하거나 인정하지 않거나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대부분 사람이 자신이 아는 것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박사나 학자라 하더라도 한 인간이 아는 것이라고는 우주라는 실제 공간의 실제 현실에 비추어 보면 허공의 먼지만큼이나 사소한 것 아니겠는가. 그래도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것이 옳건 그르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고, 그것이 전부인 양 생각하며 산다. 많은 사람이 그러하니 어쩌면 그것이 인생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에고 의식에 매몰되어 사는 것을 불가에서는 치(痴),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세상의 실상, 그 실재(實在)를 살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자에 가려 사물과 그 이치를 바로 보지 못하고 옳고 그름을 떠나 자기 생각대로만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차라리 그편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내가 생각한 것이고 내가 그렇게 믿는 것이니 나는 그냥 이렇게 살겠다고 한다. 나아가 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하나의 우주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 생명을 하나의 우주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한 가치를 가지며 완벽한 존재라는 의미와 닿아 있는 말이다. 덧붙이면 현실은 전도몽상의 어리석음에 있지만 본래 성품은 그렇지 않고 완벽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군 때부터 삶의 목표로 성통공완(性通功完)을 이야기해 온 것 같다. 본래면목을 꿰뚫어 알아 세상에 공덕을 쌓는 것이 삶의 완성이라는 말로 읽힌다. 붓다도 모든 사람은 다 부처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런 결과적 발언이 귀에 쏙 들어오는 것은, 어렵기 짝이 없는 그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인정하듯이 이런 경지는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쩌다 제정신이 돌아와 잠깐 그런 상황을 수용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성자들의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늘 겸손을 말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삶의 모두라고 앞세우는 순간 그것은 이미 어리석음의 대열에 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겸손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행위가 아니라 이런 어리석은 자신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이라 하니 겸손이야말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 겸손의 자리는 상대방이 완벽한 존재라는 그 본성을 보고 받아들일 때 자연히 생긴다고 한다. 이러한 겸손의 경지를 몸이 알아서 할 때 소위 우주적 관점에서의 완벽한 당신, 완벽한 상황이라는 그 무엇을 우리는 겨우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본래 완벽한 존재이고 그 존재가 사는 현실이 완벽한 상황이라는 것을 그대로 수용할 수 있으려면 겸손을 바르게 알고 또 언제나 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황은 어떤 상황이라도 완벽하다./ 오늘밤 떠들며 술 마시는 내가/ 내일 아침 졸지에 이승을 떠난다 해도/ 사실은 완벽한 상황인 거지./ 꽃망울 주렁주렁 올라온 어느 봄날/ 느닷없는 눈사태가 설중매를 만들 듯/ 그래, 그런 거지./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만 모두가 필연이고/ 세상살이가 이토록 처연하다 해도/ 사실은 완벽한 상황인 거지./ 이 완벽한 나, 완벽한 현실을/ 늘 아니라고, 아니라고 불평하는 것도/ 사실은 완벽한 것이지. (졸시 「완벽한 당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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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06
  • 숲에 들어가는 나이
    숲에 들어가는 나이 나는 좀 우울했다. 한 달만 넘기면 어느덧 50수에 이른다고 생각하니 살아온 세월이 되짚어지면서 나의‘미래’라는 것도 이내 곧 바닥이 날 것만 같은 생각에 자꾸만 마음이 심란해지는 것이었다. 아직도 내 어느 구석엔 무수한 날들의 까마득한 미래가 있고, 밤 새워 술 마시고 노래할 수 있는 20대의 열정과 치기도 다 빠져나가지 않았는데 50이라는 숫자에 의해 나는 갑자기 노인의 대열에 들어 벼랑 끝으로 내몰린 듯하였다. 12월의 하루하루가 결코 상쾌하지 않았다. 이 답답한 중압감에서 벗어날 무엇이 없나 하는 차에 지인으로부터 단식하러 가자는 전화가 왔다. 마침 잘 되었다 싶었다. 장소는 제주도라 했는데 돈 들여 따로 관광도 할런지라 오랜 술로 찌든 속도 좀 다스릴 겸, 또 다가오는 50수의 중압감도 날려 보낼 겸, 마음은 어쩔망정 가벼운 발걸음으로 제주행 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갑판에서 쌩쌩한 겨울바람을 맞으며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옷을 잔뜩 껴입어서 그런지 춥다는 생각에서는 벗어났으나 그렇다고 무슨 상념에 잠길 것도 없이 한참을 그저 멍멍하게 수평선을 바라보며 바다를 건넜다. 추자도를 지나니 멀리 한라산의 하얀 봉우리가 눈에 들어왔다. 망망대해에 멀리 한 점의 존재가 눈에 들어오자 비로소 현실감에 몸이 가늘게 떨렸다. 제주로 향하는 나의 현재가 구체적 감각으로 다가왔다. 제주에 닿기 전에 무엇인가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니 제주단식이 생의 한 획을 그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설렘이 내 안에서 일렁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5일 단식 기간 내내 나의 화두는 50이라는 숫자였다. 인도에서는 50대와 60대 정도의 나이를 ‘바나플러스’라고 했다. 그 말은 ‘산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나이’라는 뜻인데 나이 50이 되면 숲에 들어 명상을 해야 하는 나이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태어나서 20대 정도까지가 세상에 나갈 공부를 하는 기간이라면 3,40대 정도가 세상에 나와 가정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기간이고 5,60대 정도가 세속의 부와 명예 등 그동안 쌓은 것들을 다 버리고 숲에 들어 명상을 하는 나이였다. 이후는 숲에서 나와 죽을 때까지 세상을 떠도는 것이다. 하지만 제주단식에서 나는 무슨 특별한 깨우침을 얻거나 삶이 달라졌다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특별한 사건이라면 다만 스승 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분은 단식의 방장 어른으로 참여하여 같이 단식을 하셨는데 나의 단식은 오로지 그분을 만나기 위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선생님은 단식 기간 내내 그냥 조용히 우리 모두의 흐름을 타고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단식 기간 중에 특별한 좋은 말씀이라거나 감동적인 무슨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별다른 말씀도 없이 조용히 우리와 함께 흐름을 타고 계실 뿐이었는데 선생님과 같이 있는 동안에 나는 저절로 존경하는 마음이 일어났고 많은 감화 감동이 내 안에서 저절로 일었다. 이 특이한 체험은 나를 내내 긴장시켰고, 나의 심란했던 50수를 설렘으로 맞을 수 있도록 한 계기가 되었다. 이 선생님 같은 분이 바로‘숲의 세월’을 보낸 분이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50수를 맞는 단식을 통해 일단은 숲에 들어야 하는 나이라는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퇴계를 읽으면서 그도 학생기와 출세기를 거쳐 50세에 관직을 스스로 그만두고(임금이 강하게 말렸으나 끝내 도망간다) 도산서원이라는‘숲’에 들어가 심경(心經)에 몰입했으니, 처지와 상황은 다르지만 세상에서 사는 동안 쌓았던 권력과 영화를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것만은 확실했다. 나도 숲에 들고 싶었다. 그리고 퇴계가 그랬듯 나의 현실에서‘숲’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교직생활을 마감하고 귀촌하여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을 하는 것이 나에게는‘숲’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지인들은 시인이‘숲’에 들면 어떻게 저자거리의 번뇌와 갈등을 시에 담을 수 있겠느냐는 걱정을 했지만 나는 그동안 키워온 무절제의 욕망과 그렇게 굳은 일상의 습(習)을 도려내고 싶은 것뿐이었다. 스스로 변해야 한다는 내면의 간절함이 있었고 세상을 탓하기보다는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내 안에서 주먹처럼 올라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문학은 어쩔 수 없이 나를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던가. 내가 문학을 좇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사실 숲에 드는 일은 단순히 세속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나’라는 에고를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맞이하기 위한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진정한 자기 존재의 본질을 인식하는 일에 다름 아니며 생명이 가지는 우주적 균형감각을 되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50고개를 넘으며 숲에 들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내면의 소리를 맞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숲에 들어 몸과 정신과 영혼까지도 자본에 절어 있는 나를 변화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박두규. 시인.) ▣ 이 글은 산문집「生을 버티게 하는 문장들」(2017년 간행)에 수록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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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1
  • 바늘
    바늘 김 경 옥 쇠를 갈고 남은 몸이다 매끈한 은빛 몸매 뾰족한 침 끝, 더는 아무것도 없다 저 침에 닿을 때까지 사방 팔방 십이방 모서리 없어지고 이웃마저 사라질 때까지 얼마나 제 몸을 깎아냈을까 이 악물고 덜어내어 물러설 수 없는 절벽에 이르렀을까 갈고 닦는 일의 무한함이여 깎고 덜어내는 일의 은은한 아픔이여 가는 몸속에서 들리는 소리 하나에 기울이며 작은 귀 하나만 열어놓은 세월이여. --------------------------------------------------------------- 죽을 때까지 배우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는 말은 그저 지식을 말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이 무엇이며 왜 존재하고 있으며 이 세상은 또 무엇인가 하는 궁극적 질문을 안고 사는 존재다. 세상을 살아내는 일의 첫 번째가 나의 존재와 나를 존재하게 하는 이 세상이 무엇인지를 가늠하는 일일 것이다. 느티나무의 작은 박새 한 마리도 알에서 깨어나 날개를 퍼덕이며 제가 날짐승인지 들짐승인지부터 가늠하고 바람이 불면 어디로 날아야 한다는 것을 눈치 채며 자란다. 그렇게 모든 생명은 구체적 생활세계 속에서 자기 존재와 세상을 일치시켜내는 것이 세상을 살아내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 그 답을 말하고 죽는다. 태어나 죽기까지의 삶 자체가 스스로의 답일 것이니 그렇다. 다시 말하면 삶에는 정답이 없고 우리는 스스로를 살다가 죽을 뿐이다. (박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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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를 찾아서
    2023-11-13
  • 안개 유감
    「섬진강 편지」 -안개 유감 2023년 10월 22일 안개, 10월 23일 안개, 10월 24일 안개, 10월 25일 안개, 10월 26일 안개, 내리 닷새 아침 안개가 점령군처럼 구례를 장악했습니다. 안개가 옅은 날은 9시쯤이면 걷히지만 독한 날은 11시가 되어서야 해를 볼 수 있습니다. 섬진강과 서시천, 그리고 지리산 골짜기 아래마다 하나씩 있는 저수지들이 봄가을이면 구례를 안개의 마을로 만듭니다. 구례로 이사를 와서 8년이 지나고 나서야 안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구례 사람이면 다 알고 있는 안개의 피해를 모르고 아침마다 안개 예찬론을 펼쳤으니 얼마나 철부지로 보였을까요! 봄, 가을이면 일조량이 현저히 부족하고 습도가 높아 농작물들은 병에 취약하고 강마을 노인들은 기관지, 천식 등으로 고통을 받는답니다. 오죽하면 안개를 피해 산동으로 이사를 가려고 하겠느냐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그런데 최근에 지자체가 유치 신청한 양수발전소가 건설되게 된다면 구례는 그야말로 안개공화국이 되고 말겠지요. 섬진강댐보다 큰 규모의 댐이 2개나 들어선다면 1년 내내 안개에 시달리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거기다가 양수발전에 부족한 물은 섬진강에서 끌어 쓰게 된다니 그렇지 않아도 바닥으로 겨우 기어가는 섬진강물은 더 마를 것이고 가둬둔 물을 흘려보내게 되면 섬진강 하류의 오염은 뻔하지요. 구례는 지리산과 섬진강이 만들어 내는 때 묻지 않은 풍광들이 있어 귀촌자들이 선호하는 지역입니다. 귀촌 인구가 감소 추세인 최근에도 705명(2022년, 구례군 자료)이 귀촌했을 정도로 구례는 3년간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나를 포함한 구례지역 귀촌자들의 특성은 주로 자연환경을 중시하는 사람들로 최근 우리 마을에 7명의 젊은이가 이사를 왔는데 다들 구례의 천연 풍광에 매료되어 온 친구들입니다. 진정 애향 애민의 위정자들이라면 국비 1조 원이란 곶감으로 지역민들을 현혹하지 말고 “자연으로 가는 길, 구례”의 본심을 잊지 않도록 고심해야 할 것입니다. 댐이 들어서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어 30여 년 전에 댐이 건설된 순천 주암댐 주민들의 호소를 들어보시라! "자욱한 안개에 폐암까지"‥주암댐 주민 피해 호소 https://ysmbc.co.kr/article/d4H__7afKF797L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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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섬진강 편지
    2023-10-27
  • 겨울 산에서
    ■ 시 겨울 산에서 이건청 나는 겨울 산이 엄동의 바람 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서서 겨울밤을 견디고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큰 그늘 속에 빠져 기진해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작은 암자에 며칠을 머물면서 나는 겨울 산이 살아 울리는 장엄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대개 자정을 넘은 시간에 시작되곤 했는데 산 아래, 한신계곡이나 칠선계곡 쪽을 지나 대원사 스쳐 남해 바다로 간다는 지리산 어느 골짜기 물들이 첫 소절을 울리면 차츰 위쪽이 그 소리를 받으면서 그 소리 속으로 섞여 들곤 하였는데 올라오면서 마천면 농협 하나로마트 지나 대나무 숲을 깨우고 산비탈, 마천 사람들의 오래된 봉분의 묘소도 흔들어 깨우면서 골짜기로 골짜기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오를수록 그 소리는 점점 더 곡진한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었는데 산 중턱을 넘어서면서 홍송들이 백 년, 이 백년씩 그들의 가지로 서로의 어깨를 걸친 채 장대한 비탈을 이루고 있는 곳까지 와서는 웅장한 코러스가 되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내가 사순절의 어느 날, 대성당에서 들었던 그레고리 찬트의 높은 소절과 낮은 소절이 번갈아 마주치는 어느 부분과 같았다. 이따금 이 산에 사는 산짐승들이 대합창의 어느 부분에 끼어들기도 하는 것 같았는데 그때마다 그레고리 찬트 속에서 짐승들의 푸른 안광이 빛나곤 하였다. 겨울 산이 울려내는 대합창이 온 산을 울리다가 서서히 함양 쪽으로 잦아들 때쯤 건너 쪽 지리산 반야봉, 제석봉의 윤곽도 밝아오는 것이었는데 날이 밝고 산의 윤곽들이 선연해지면 자작나무도 굴참나무도 그냥 추운 산의 일부로 돌아가 원래의 자리에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는 것이었다. 그냥 겨울 산이 되어 침묵 속으로 잠겨드는 것이었다.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3-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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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매의 미학
    열매의 미학 언젠가 어떤 프로그램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죽음과 죽음의 세계를 한 문장으로 써보는 시간이 있었다. 참으로 다양한 생각과 표현들이 있었지만 정리해보니 단순했다. 죽음은 현실에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는 것이며 스스로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며 어둡고 컴컴한 어느 밤길을 홀로 걷는 것처럼 외롭고 두려운 것이었다. 그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상상력의 한계였다. 죽은 뒤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여기의 현실에 집중하며 사는 것도 버거운 일인데 죽은 뒤를 생각해서 무엇 하랴. 이름을 남기는 것?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 남은 사람들이 나를 오래도록 기억해주는 것? 도대체 그게 죽어버린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살아있는 사람들은 자기 현실의 삶을 도모하기 위해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이겠지만 죽은 자에게는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서 죽음은 현실적으로는 내 삶의 끝자락에 위치한 삶의 한 부분으로써만 의미가 있다. 나를 위하여, 내 삶의 완성을 위하여, 스스로에게 주어진 이승의 시간을 아름답게 맺는 것으로 죽음은 그렇게 현실의 삶으로만 존재한다. 죽음에 대한 진실은 오로지 이것 하나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죽음 이후는 현실이 아니니까, 생각으로만 존재하는 공포니까, 그러니 끊어라 잊어라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벗지 못하고 산다. 오랜 수행과 성찰을 해온 현자들은 이 두려움에서 벗어났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이 공포를 가지고 산다. 그런데 사실 이 공포는 죽음에 대한 공포라기보다는 현재를 잃을 것에 대한 공포다. 사람들은 이 현실의 삶을 그만 둔다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이 현실을 살며 늘 괴롭네, 슬프네, 죽고 싶네, 하면서도 이 현실을 떠나기는 싫은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것이다. 사실 자신의‘현재’를 사랑하고 열심히 살아내는 것은 진리의 영역이고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이것과는 좀 다르다고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의 본질에는 소유욕 같은 것들이 끼어있기 때문이다. 지금 누리고 있는 것, 가지고 있는 것, 알고 있는 것, 세상에 태어나 지금껏 소유하게 된 모두를 한꺼번에 잃는다고 하니 두렵지 않겠는가. 거기에다 한 번인 이 세상에, 하나인 목숨까지 가져간다니, 내 존재를 깡그리 가져간다니 어찌 슬프지 않고 두렵지 않을 것인가. 이 죽음을 극복하지 않는 한 궁극적으로 사람들은 현실 속에 진정한 희망을 세울 수 없을 것이다. 열매의 미학은 이 어디쯤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죽음의 극복을 위한 것이 열매의 미학이라는 생각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든 생명들의 세상이고 모든 생명들의 삶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궁극적으로는 열매를 맺는 일로 귀결된다. 뿌리를 내리는 일도 싹을 틔우는 일도 잎을 올리는 일도 꽃을 피우는 일도 열매를 맺는 일도 그리고 죽는 일도 모두가 생의 절대적 과정이요 순간순간이 온 생명이다. 꽃을 피우는 것만이, 열매를 맺는 것만이 삶의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삶에 무슨 목적이나, 다다라야 할 결론이 따로 있을 것인가. 그저 연기(緣起)의 과정일 따름이 아닌가. 다만 이 우주의 순환질서에 종속된 한 생명으로서 생명의 순환에는‘열매’가 그 질서의 고리로써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열매는‘씨앗’이다. 그리고 그 씨앗은 나의 생명을 함축한 것이고 나의 일생을 갈무리 한 것이고 나의 부활을 꿈꾸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은 이러한‘열매’를 생산하는 존재다. 아무리 척박한 땅에서도 열매는 맺는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소나무가 많은 솔방울을 서둘러 맺듯이, 그리고 산란을 위해 모천으로 돌아오는 연어들처럼 모든 생명은 궁극으로는‘열매’라는 새로운 생명을 생산하는 일에 복무하며 한 생을 보낸다. 생명의 한 사이클이 이루어지는 끝에, 사람들이 죽음이라고 말하는 그 끝자락에 새로운 생명이 열리며 또 다른 시작을 예비하는 것이다. 그것이 열매이고 씨앗이다. 이 열매에 의한 생명의 순환을 생각하면 생명이라는 우주적 담론 속에서는 죽음이란 애초부터 하나의 관념인지도 모른다. 죽음이란 없으며 오로지 생명의 순환질서가 존재할 뿐이다. 그 순환의 고리가 열매요 씨앗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생명의 순환질서를 하나의 원으로 생각한다면 죽음이라는 우리 일상의 종말적 의미의 공포 개념은 어디에도 끼어들 틈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 죽음은‘나’라는 ‘에고’에 스스로 매몰될 때 오는 것이지 거대한 생명의 순환질서 속에서는 죽음이라는 좌표점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죽음의 지점이라고 할 만한 곳에는 어김없이 ‘열매’가 열리고 씨앗이 되어 새로운 생명을 세우니 죽음의 자리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나의 존재를 한시적이고 독립된 하나의 생명으로 보지 말고 통시적이고 연기적(緣起的)인 존재로 인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죽음을 극복하는 단초요 그것을 도와주고 풀어주는 열쇠가 바로‘열매’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나’라는 개체적 존재는 세상의 모든 생명들과 그물망처럼 얽혀져 있으며 서로가 서로의 의지처가 되어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붓다가 말한 바와 같다. 그것은 자신을 연기적 존재로 인식하는 일이며 세상의 모든 생명들은 개체적 존재로는 단 한 시간도 살 수 없다는 말이다. 태양이 있기에, 비가 내리기에, 밤과 낮이 있기에, 날아다니는 생명들과 지상의 생명들과 물속의 생명들이 있기에,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기에‘나’라는 한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나를 연기적 존재로 인식했을 때 하나의 단독적 개체가 가지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고 나눔과 섬김의 정신을 회복할 수 있다. 이미 우리와 모든 생명은 존재 자체가 자신의 생명을 나누고 섬기는 성결한 의식을 치르며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나’라는 열매를 맺는 일이 그것이다. 내 스스로 하나의 생명을 잉태시키고 기르는 행위야말로 나누고 섬기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것이‘나’라는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닌가. 생명을 잉태시키는 일은 내 생명을 나누는 일이고 그 생명을 기르는 일은 섬기는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이 열매의 미학이 갖는 바탕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위대하고 신비로운 생명이나 그 아름다운 자신을 모르고 살아갈 뿐이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변명의 여지도 없이 분명 나의 잘못이다. (박두규. 시인.)
    • 지리산문화
    • 지리산 편지
    2024-10-10
  • 지리산 들꽃사진전
    「섬진강 편지」 -구례들꽃사진반 세 번째 전시회에 부쳐 <멸종 위기종의 대흥란과 구례들꽃사진반> 해마다 맨 처음 만나는 얼음새꽃(복수초)이 지난해보다 열흘쯤 일찍 피어 환호성을 올렸지만 우려가 더 컸습니다. 우려했던 대로 빠르게 피던 꽃의 개화가 갑자기 멈춰서 벚꽃 없는 벚꽃축제가 열렸고 화엄사 홍매도 예년보다 늦어 애를 태웠습니다. 기록적인 폭염을 불러온 이상기후는 꽃들에게도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노고단의 원추리는 점점 개체수가 줄어들고 뚱딴지같은 외래종 꽃들이 자리를 잡아갑니다. 우리 세대에 사라지는 꽃들이 점점 늘어나는 만큼 지리산, 섬진강의 들꽃 생태를 기록하는 구례들꽃사진반 회원들의 활동은 크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값을 따질 수 없는 소중한 일이라는 자부심을 가집니다. 특히 올해는 설앵초, 기생꽃, 자란초를 찾아 험난한 길을 오르내리며 흘린 땀만큼 특별한 해로 기억될 것입니다. 또한 멸종위기종의 대흥란을 발견하여 지리산 식물 연구에 커다란 기여를 한 것은 지난 해 ‘구례의들꽃’ 책자 발간에 이어 구례들꽃사진반의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세 번째 회원전에는 새로운 얼굴들이 대거 참여하여 큰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한 해 동안 애써주신 회원, 특히 신입회원 여러분께 고마움을 전하며 우리 마음에 담긴 이 들꽃들이 많은 이들의 마음에도 환한 빛으로 가 닿기를 바랍니다. * 들꽃사진 전시장으로 가장 어울리는 지리산 천은사 보제루에서 구례들꽃사진반 회원들의 들꽃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10월 20일까지 보름동안 전시를 하니 지나는 길에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섬진강 / 김인호 #섬진강편지 #천은사 #보제루 #구례들꽃사진반 #들꽃사진전시회 #야생화 #지리산 #섬진강 -천은사 대흥란 -대성골 복주머니란 -화엄사 약난초 -노고단 지리터리풀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4-10-06
  • 길거리에서 영문도 모른 체 죽어간 순천의 소녀를 위하여
    「섬진강 편지」 - 영문도 모른 체 죽어간 순천의 소녀를 위하여 낯선 도시가 아니네. 우리가 사랑하는 도시네. 우리가 어울려 사는 도시네. 낯선 거리가 아니네. 우리가 늘 지나던 거리네. 어제도 우리는 저 거리를 지나 집으로 왔지. 그러나 한 소녀는 영영 집으로 가지 못했네. 아무런 잘못도 없이 묻지마 칼부림에 주검이 되었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간 소녀의 죽음은 낯선 도시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피를 흘리며 쓰러져간 소녀의 죽음은 낯선 거리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네. 비명과 절규 속에 피 흘리며 쓰러져간 소녀의 죽음은 바로 우리가 오가는 길에서 일어난 일이네. 소녀는 낯선 소녀가 아니네. 저 건너 마을 친구 옆집의 꿈 많던 소녀라네. 낯선 도시 낯선 거리 낯선 마을 낯선 사람의 일이 아니라네. 소녀의 죽음은 혼자만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죽음이라네. - 섬진강 / 김인호 * 10월의 첫 아침 자욱한 섬진강 안개를 바라보며 잠시 추모의 시간을 가져봅니다. 잘 가서 거기서는 아픔 모르고 비명 모르고 피흘림 모르고 평안하기를 빕니다.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4-10-01
  • 놋젓가락나물
    「섬진강 편지」 -놋젓가락나물 지인의 소개로 지리산 자락에서 처음 만난 놋젓가락나물, 늘 새로운 꽃을 만나러 가는 길에는 설레임이 있지요. 바래봉 아래 운봉고원의 가을바람을 느끼며 놋젓가락나물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참 환한 마음 길이었습니다. 투구꽃과 놋젓가락나물은 꽃으로는 구별이 어렵습니다. 두 꽃의 구별법은 투구꽃은 꽃이 줄기 끝에 달리고 놋젓가락나물은 덩굴 끝에 꽃이 달리는 덩굴성이라는 것입니다. 놋젓가락나물 이름 유래는 덩굴이 놋젓가락처럼 생겼다는 유래와 뿌리의 독성이 강해 놋젓가락을 갖다 대면 색이 변한다는 설이 있습니다. 사약의 원료로 쓰였다는 투구꽃 종류는 생약명으로는 草烏(초오)로 불리는데 덩이뿌리가 까마귀 머리를 닮았다 하여 오두(烏頭), 뿌리 갈래가 까마귀의 부리 모양이라 오훼(烏喙)로도 불립니다. 서양에서는 투구꽃의 독으로 늑대를 죽인다고 '늑대죽임풀'이라고도 부르네요. 사약에 대한 야사 중의 하나입니다. 사약을 마시기 직전 송시열의 유언은 "약을 더 달여오게"였다고 합니다. 참, 사약을 목숨을 죽이는 死藥이라 쓰는 줄 알았는데 임금이 하사한 약이라는 賜藥으로 쓰네요. - 섬진강 / 김인호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4-09-30
  • 지리산 가을빛
    「섬진강 편지」 -지리산 가을빛 추석 아침, 아침 뜨락에 물을 주다가 뒤뚱뒤뚱 풀섶으로 돌아가는 큰 두꺼비를 보는 순간 아버지가 다녀가시는구나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시원하시라고 등목을 해드리며 담장 아래까지 잘 배웅해 드렸어요. 정원 박쥐나무가 또 꽃을 피우고 백일홍들도 씨앗이 떨어져 새싹을 내더니 또 꽃을 피웁니다. 추석인데도 폭염특보가 그치지 않아 해도해도 너무한다는 말이 딱인 날씨가 이어지니 다들 어찌해야 할 줄 모르는 것 같습니다. 불타는 지구, 밤새 안녕하셨는지 안부를 묻고 안색을 살펴야 하는 날들입니다. 덥다고 종일 에어컨을 돌려대니 그 배출열로 뜨거워진 지구가 더 뜨거워지는 악순환을 부르겠지요. 동남아 여행에서 웃통을 벗고 거리를 활보하는 남자들이 볼썽사나웠는데 생각해 보니 그 사람들이 친지구적인 사람들이네요. 실은 저도 올여름은 참을 수가 없어 집안에서 웃통을 벗고 지내다 깜박하고 벌거벗고 영상통화 전화를 받아 손자의 비명을 들었던 일도 있었지요. 9월 들어 심은 김장배추 모종들이 다 타버려 집집마다 몇 번씩 배추를 심어야 한다니 이제 김장배추 농사도 계절을 바꾸던지 품종을 바꾸던지 무슨 수를 내야 할 것 같다. 극단적인 이상기후는 마음도 피폐하게 만드나 봅니다. 짜증은 늘고 해야 할 일은 좀처럼 나아가지 않아 밀린 만큼 걱정만 늘어납니다. 차가 막힐까 봐 아이들이 서둘러 다녀가는 바람에 추석 아침은 먼바다까지 물이 빠져나간 큰 사리 때처럼 마음이 휑하여 컴퓨터 앞에 앉아 이리 중얼대봅니다. 한가위 인사가 횡설수설이 되었지만 가족들과 이웃들과 즐거운 시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초저녁이면 마을 앞 비석거리에는 반딧불이가 날고 들판은 가을빛으로 물들어가니 이제 마음을 추슬러 가을맞이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노고단의 가을꽃빛을 동봉합니다. -섬진강 / 김인호 -정영엉겅퀴 -산오이풀 -쑥부쟁이 -구절초 -바위떡풀 -가실쑥부쟁이 -오이풀 -산비장이 -수리취 -물매화 -숙은촛대승마 -과남풀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4-09-17
  • 인생의 가장 큰 죄
    인생의 가장 큰 죄 오래 전 일본의 명상 컨퍼런스에 다녀왔는데 그것은 아난다마르가 출가 수행자인 칫 따란잔 아난다와(칫 다다지)의 인연 때문이었다. 나는 그를 따라서 인도의 아쉬람 여행과 아르헨티나에서 열리는 국제 명상 컨퍼런스, 그리고 홍콩의 아시아권 명상 행사 등을 다녔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명상이라기보다는 명상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해외여행 하는 기분으로 따라다녔을 뿐이다. 칫 다다지는 한국 사람인데 서강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가서 경제학 박사 학위까지 받은 경제학자였다. 그리고 귀국하여 이런저런 국영 연구소를 다니며 가정을 꾸리고 잘살고 있었는데 어떤 계기로 우연처럼 인도에 가서 출가 수행자가 되신 분이다. 인도의 아난다마르가 수행공동체에서 줄곧 수행하며 지금은 아난다마르가의 다다(스승)의 단계에 올라 세계를 떠도는 지구인으로 현재는 주로 중국의 충칭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가난하다. 단체로부터 생활비를 따로 받는 것도 아니고 개인의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늘 밝고 긍정적이며 아무런 걱정 없이 나름의 일만 열심히 한다. 그 나름의 일은 사람들이 명상을 통해 스스로 개체의식을 밝히도록 도와주고 사회의식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난다마르가 사상과 철학의 핵심인 네오휴머니즘과 프라우트 사회를 실현하려는 것이기도 했다. 내가 생명평화결사에서 일할 때 이 단체에서 일하고 싶다며 스스로 찾아온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인도에 있다가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아난다마르가의 사회적 실천을 위해 생명평화결사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나는 그를 통해 한 생을 살며 왜,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삶의 근본 문제를 구체적 일상과 일치시키며 살아야 한다는 배움을 얻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자기완성을 위한 명상과 같은 구도행은 개인을 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실천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밥 먹고 일하며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 반복적인 하루 일상도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소중한 일인지를 깨닫게 해줬다. 그는 살면서 별난 하루가 아니더라도 매 순간 감동과 감격 속에서 일상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아, 매 순간 감동과 감격으로 이어지는 일상이라면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그에게 명상을 배우며 나는 조금씩 스스로를 걸러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 겨우 현실적 에고를 극복할 수 있는 어떤 영역에 대한 그리움이 생겼다. 그리고 이 영역을 꾸준히 넓히고 다지는 것이 어쩌면 매우 중요한 일이고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당시 어떤 책을 읽으며 ‘인생의 가장 큰 죄는 인생을 낭비하는 죄다.’라는 구절이 뇌리에 깊이 박혀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낭비인지, 무엇이 낭비가 아닌지도 잘 모르면서 우선 최선을 다해 명상 공부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길을 나서면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알고 가는 것이 당연한데, 하물며 인생길을 가며 그런 생각을 안 하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칫 다다지를 만나면서 그런 생각이 더욱 선명해지고 구체화 되었다. 그리고 ‘어디로’나 ‘어떻게’의 정답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누구나 똑같은 길을 갈 수는 없을 테니까. 다만 본질을 놓치지 않고 스스로 얼마나 충실하게 자기 현실을 소화하는가가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일상은 중요한 현실이지만 쉽게 그 속에 묻히게 되는 자신의 한계를 항상 조망하고 콘트롤할 수 있는 어떤 힘 또한 명상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칫 다다지에게는 그것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열심히 명상을 배우며 마음속으로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세속의 예를 다하려 애썼다. 그는 수행이 깊어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순수하고 다정하며 누구에게나 격이 없고 매우 친절했다. 나는 그와 친구처럼 부담 없이 함께 지낼 수 있었다. 나는 ‘친구가 될 수 없으면 진정한 스승이 아니고 스승이 될 수 없으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라는 말을 떠올리며 그가 이 짧은 생에 친구이고 스승이 되어 함께 갈 수 있기를 소망했다. 무엇보다 인생의 가장 큰 죄를 짓고 싶지 않았다. (박두규. 시인.)
    • 지리산문화
    • 지리산 편지
    2024-09-11
  • 은행나무 아래서
    은행나무 아래서 조 영 옥 가장 찬란란 모습으로 제 몸을 던지는 은행나무 아래서 한 잎 두 잎 허공 중의 은행잎과 작별을 했다 가야할 길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소멸 속에서 생명을 얻는 자 생명을 통해 소멸에 이르는 자 세상은 둘이라 생각했다 오래토록 그렇게 서 있었다 세상은 어두워지고 문득 고개를 들면 하늘을 가로지르는 영겁의 길 이별은 서로가 하나가 되는 것 만남은 그대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렇듯 은행잎과 내가 다르지 않아 은행나무 아래서 나도 나무가 되었다 ------------------------------------------------------------------------------------ 1990년 경은 사회적으로 민주와 반민주의 구도 속에서 군사독재정권과의 선명한 전선이 형성되어 민주와 통일의 큰 변혁의 물꼬가 터져 흐르던 격동의 시기였다. 그때만 해도 조영옥은 해직교사로서 교육운동을 했던 걸출한 여전사로서의 이미지가 강했고 시를 쓰고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녀의 시에는 조직활동가로 살아온 세월 속에서 단련된 대담함과 성실성, 소탈함과 겸허함, 그리고 늘 스스로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일상 속 삶이 잘 녹아있다. 이 시는 가을빛의 중심에 있는 은행나무 아래서 떨어지는 은행잎들을 보며 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를 사유한다.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4-09-11
  • 아버지와 아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석주관
    「섬진강 편지」 - 아버지와 아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석주관 석주관은 남해에서 섬진강을 거슬러 전라도 내륙으로 통하는 관문이자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군사 전략상 매우 중요한 요새로 고려 때부터 이곳에 진영이 설치되어 왜군의 침략을 막던 곳이다.석주관(石柱關)은 구례 동쪽으로 25리에 있으며, 좌우로 산세가 험하고, 강변에 길이 있는데, 사람과 말이 가까스로 지난다. 북쪽에는 커다란 협곡이 있고, 그 안에 수십 리의 긴 강이 있다. 고려(高麗) 말기에 왜구를 막기 위하여 강의 남북쪽 산에 성을 쌓았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성터만 남아있다. 여기에서 호남(湖南)ㆍ영남(嶺南)으로 나누어 진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구례편> 정유재란을 일으킨 왜군은 의병들의 근거지인 호남지방을 공격하기 위한 길목인 석주관을 점령하였다. 1597년 10월 31일, 구례 자모장 왕득인이 의병 50명을 모아 왜군들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석주관에서 싸우다 몰살당하고, 한 달 보름 후에 그의 아들 왕의성이 다시 의병을 모아 화엄사의 승병들과 함께 석주관에서 싸우다 대부분의 의병들이 숨졌다. 아침 운해 사이로 드러나는 저 섬진강 줄기는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기만 한데 시절이 하 수상해 목숨을 걸고 석주관을 지키던 왕득인, 왕의성 부자가 하늘에서 임진년이 다시 오는 것 아니냐 잠 못 들고 걱정하시것다. - 섬진강 / 김인호 -칠의사 사당 -칠의사 묘역 -석주관산성 -석주관과 섬진강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4-09-09
  • 독버섯 중의 독버섯
    「섬진강 편지」 -독버섯 중의 독버섯 오르는 길에서는 세발버섯인줄 알고 지나쳤는데 내려오면서 다시 보니 확연히 다르다. 알고보니 희귀하고 무시무시하고 희귀한 버섯, 만지기만 해도 독이 오르는 독버섯 중의 독버섯이다. 붉은사슴뿔버섯!! *사슴뿔버섯과 점버섯속에 속하는 대표적인 독버섯이다. 버섯 중에서 가장 강력한 맹독을 지닌 것으로 악명이 높다. 이 버섯이 가지고 있는 트리코테신(Trichothecene)이라는 독소는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독극물 중에서는 보툴리눔 톡신, 테트로도톡신과 함께 가장 위험한 물질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방사선 피폭과 비슷한 증상을 나타내는데, 이는 위에서 언급한 트리코테신이 단백질 합성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방사선 피폭이 DNA가 손상되면서 신체 복구에 필요한 설계도를 잃어버린 상황이라면, 이 트리코테신은 복구에 필요한 단백질 공급을 원천적으로 막아버리는 상황인 것이다. 이렇다 보니 복용자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는 데다 다른 버섯과 달리 포자, 신경독도 아니라서 해독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무위키 자료> 이 산책길을 자주 이용하는 지인들에게 두루 알리고 국립공원측에 알리고 독버섯 경고문 설치 요청을 했다. 이야기를 들은 버섯전문가께서는사람들 눈을 현혹하는 독버섯이라 아예 뽑아 없애야 한단다. 그렇지만, 그 숲에 그 버섯이 피어나는 나름의 까닭이 있지 않을까? 무엇이 맞을까? #붉은사슴뿔버섯 #연기암 #세발버섯 #독버섯 #독버섯중의독버섯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4-08-25
  • 참게이야기
    「섬진강 편지」 -참게 이야기 참게 이야기 섬진강 매운탕 집 뒤뜰에 큰항아리 가득 참게가 들어 있는데 그 항아리 뚜껑이 없어 다 도망가지 않을까 물으니 걱정 없지요 참게란 놈들 참 이상한 놈들이어서 한 놈이 도망을 가려고 기어오르면 밑에 다른 놈들이 꼭 그놈의 다리를 붙잡아 끄집어내려 놓고 말지요. 아무리 뚜껑을 열어 놓아도 결국 한 놈도 지척인 강으로 못 돌아간다는, 참게들 이야기 듣다가 그렇구나,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다 그만 섬뜩해집니다 - 김인호 시집 「섬진강 편지」중에서 오늘 우연히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영문판 참게이야기를 보고 깜짝 놀랐다. 2002년 '참게 이야기' 시를 쓰면서 느꼈던 섬뜩함을 똑같은 톤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첨부된 그림만 봐도 무슨 내용인지 딱 감이 왔다. On one sunny afternoon a man was walking along the beach and saw another man fishing in the surf with a bait bucket beside him. As he drew closer, he saw that the bait bucket had no lid and had live crabs inside. “Why don't you cover your bait bucket so the crabs won't escape?” he asked. “You don't understand.” the man replied, "If there is one crab in the bucket it would surely crawl out very quickly. However, when there are many crabs in the bucket, if one tries to crawl up the side, the others will grab hold of it and pull it back down so that it will share the same fate as the rest of them." Do you relate to this story of the crabs in the bucket? 어느 화창한 오후, 한 남자가 해변을 따라 걷다가 다른 한 남자가 미끼 양동이를 옆에 두고 파도 속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양동이에는 뚜껑이 없고 살아있는 게들이 들어있었습니다. “게들이 도망가지 않게 왜 뚜껑을 덮지 않나요?” 그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모르는군요.” 그 남자가 대답했습니다. “양동이에 게가 한 마리만 있다면, 금방 기어 올라 도망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 마리의 게가 양동이에 있으면, 하나가 옆으로 기어오르려고 할 때 다른 게들이 붙잡아 끌어내려 결국 모두가 같은 운명을 맞게 됩니다.” 이 게들의 이야기가 당신에게도 공감되나요?> https://www.linkedin.com/pulse/have-you-heard-story-crabs-bucket-jere-hill 이 글의 필자는 어디에 사는 누굴까? 정말 궁금하다.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4-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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