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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늘
    바늘 김 경 옥 쇠를 갈고 남은 몸이다 매끈한 은빛 몸매 뾰족한 침 끝, 더는 아무것도 없다 저 침에 닿을 때까지 사방 팔방 십이방 모서리 없어지고 이웃마저 사라질 때까지 얼마나 제 몸을 깎아냈을까 이 악물고 덜어내어 물러설 수 없는 절벽에 이르렀을까 갈고 닦는 일의 무한함이여 깎고 덜어내는 일의 은은한 아픔이여 가는 몸속에서 들리는 소리 하나에 기울이며 작은 귀 하나만 열어놓은 세월이여. --------------------------------------------------------------- 죽을 때까지 배우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는 말은 그저 지식을 말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이 무엇이며 왜 존재하고 있으며 이 세상은 또 무엇인가 하는 궁극적 질문을 안고 사는 존재다. 세상을 살아내는 일의 첫 번째가 나의 존재와 나를 존재하게 하는 이 세상이 무엇인지를 가늠하는 일일 것이다. 느티나무의 작은 박새 한 마리도 알에서 깨어나 날개를 퍼덕이며 제가 날짐승인지 들짐승인지부터 가늠하고 바람이 불면 어디로 날아야 한다는 것을 눈치 채며 자란다. 그렇게 모든 생명은 구체적 생활세계 속에서 자기 존재와 세상을 일치시켜내는 것이 세상을 살아내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 그 답을 말하고 죽는다. 태어나 죽기까지의 삶 자체가 스스로의 답일 것이니 그렇다. 다시 말하면 삶에는 정답이 없고 우리는 스스로를 살다가 죽을 뿐이다. (박두규. 시인)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3-11-13
  • 안개 유감
    「섬진강 편지」 -안개 유감 2023년 10월 22일 안개, 10월 23일 안개, 10월 24일 안개, 10월 25일 안개, 10월 26일 안개, 내리 닷새 아침 안개가 점령군처럼 구례를 장악했습니다. 안개가 옅은 날은 9시쯤이면 걷히지만 독한 날은 11시가 되어서야 해를 볼 수 있습니다. 섬진강과 서시천, 그리고 지리산 골짜기 아래마다 하나씩 있는 저수지들이 봄가을이면 구례를 안개의 마을로 만듭니다. 구례로 이사를 와서 8년이 지나고 나서야 안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구례 사람이면 다 알고 있는 안개의 피해를 모르고 아침마다 안개 예찬론을 펼쳤으니 얼마나 철부지로 보였을까요! 봄, 가을이면 일조량이 현저히 부족하고 습도가 높아 농작물들은 병에 취약하고 강마을 노인들은 기관지, 천식 등으로 고통을 받는답니다. 오죽하면 안개를 피해 산동으로 이사를 가려고 하겠느냐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그런데 최근에 지자체가 유치 신청한 양수발전소가 건설되게 된다면 구례는 그야말로 안개공화국이 되고 말겠지요. 섬진강댐보다 큰 규모의 댐이 2개나 들어선다면 1년 내내 안개에 시달리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거기다가 양수발전에 부족한 물은 섬진강에서 끌어 쓰게 된다니 그렇지 않아도 바닥으로 겨우 기어가는 섬진강물은 더 마를 것이고 가둬둔 물을 흘려보내게 되면 섬진강 하류의 오염은 뻔하지요. 구례는 지리산과 섬진강이 만들어 내는 때 묻지 않은 풍광들이 있어 귀촌자들이 선호하는 지역입니다. 귀촌 인구가 감소 추세인 최근에도 705명(2022년, 구례군 자료)이 귀촌했을 정도로 구례는 3년간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나를 포함한 구례지역 귀촌자들의 특성은 주로 자연환경을 중시하는 사람들로 최근 우리 마을에 7명의 젊은이가 이사를 왔는데 다들 구례의 천연 풍광에 매료되어 온 친구들입니다. 진정 애향 애민의 위정자들이라면 국비 1조 원이란 곶감으로 지역민들을 현혹하지 말고 “자연으로 가는 길, 구례”의 본심을 잊지 않도록 고심해야 할 것입니다. 댐이 들어서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어 30여 년 전에 댐이 건설된 순천 주암댐 주민들의 호소를 들어보시라! "자욱한 안개에 폐암까지"‥주암댐 주민 피해 호소 https://ysmbc.co.kr/article/d4H__7afKF797La-l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3-10-27
  • 몸 가르침 한 수
    몸 가르침 한 수 절에 있을 때 이야기다. 참 오래된 이야긴데 나는 대학 입시에 떨어지고 갈 곳이 없었다. 집에 있자니 부모님 보기도 민망하고 나가 돌아다니자니 어느 대학에 갔냐는 질문이 무서워 사람 만나는 것도 겁나고, 혼자 빈둥거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어서 작은 보따리 하나 들고 무작정 절로 들어갔다. 그 길로 거의 1년을 절집에서 살았는데 그해 여름의 일이었다. 그곳은 서래선림(西來禪林)이라는 비석이 입구에 서 있는 지장암(地藏庵)이라는 절이었는데 해안(海眼) 큰스님이 돌아가시고 사부대중의 발길이 끊기고 상좌들도 밖으로 나가 있어서 말 그대로 절간처럼 조용한 절이었다. 때는 한 여름이라 녹음이 짙을 대로 짙어져 숲 그늘에 누워 잔잔한 바람에 책이라도 보고 있으면 저절로 달콤한 낮잠에 빠지곤 하던 시절이었다. 그 여름 어느 날 객승이 한 분 오셨는데 작달막한 키에 별 말이 없는 얼추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스님이었다. 대개 스님들은 객으로 묵을 때면 예의상 곧잘 예불도 드리곤 하는데, 그 스님은 아침 예불이건 저녁 예불이건 한 번도 불당에 오르는 일이 없고, 도통 방에만 틀어박혀 나올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방에서 공부를 하거나 참선을 하는 것도 아니고 거의 종일토록 잠을 자거나 방에서 빈둥거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언제부턴가 그 스님은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한 낮에도 쉬지 않고 해가 질 때까지 죽어라고 일만 하였다. 특별히 할 일이 없는데도, 이를테면 아랫마당에서 법당까지 놓여 있는 돌계단을 괜히 파헤쳐 놓고 다시 하나하나 계단을 맞추어 쌓는 그런 일이었다. 내가 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멀쩡한 돌계단을 부수고 쌓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름에는 더우니 보통 이른 아침이나 저녁나절에 강한 햇살이 죽었을 때 일을 하는 법인데 이 스님은 태양이 이글거리기 시작하는 10시쯤에야 일을 시작하여 밖에 가만히 서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그런 뙤약볕에서 일을 하다가 해가 지는 무렵이면 일을 끝냈다. 정말 온몸이 땀에 젖어 금방 물에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젖은 채 하루 종일 일을 하였다. 이렇게 여러 날이 지났으나 스님은 매일매일 죽어라고 일만 했다. 그런 스님에게 나는 말 붙이기도 왠지 꺼려했는데 하도 궁금해서 언젠가 ‘스님, 왜 스님은 예불은 안 모시고 일만 한답니까?’ 하고 물었더니 스님은 별다른 표정도 없이 ‘나는 예불 드리는 거 몰라.’ 라며 마당으로 가서 또 괜한 돌계단을 허무는 것이었다. 진짜로 염불을 못하는 것인지 궁금했고, 염불도 못하면서 어떻게 스님이 되었는지도 궁금했다. 아니 무엇보다도 왜 그렇게 가장 더운 시간에 미친 듯이 일만 하는 지가 가장 궁금했다. 그 스님은 나의 이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고 언젠가 말도 없이 훌쩍 지장암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30년이 지난 지금, 가끔 그 스님이 생각난다. 아니 그는 3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나를 가르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일에 말만 앞세우고 말로만 해결하려 들며 몸은 까딱도 않는 나에게 말이 아닌 ‘몸’을 가르쳐준 스승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보다는 ‘몸의 행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강변하듯 그의 여름날 노동이 그의 수행법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수행은 말보다도 공부보다도, 온몸의 행위로 진실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기 위한 것은 아니었나 싶다. 입만 벙긋하면 거짓말이 튀어나오는 거짓 덩어리의 이 몸뚱어리, 살아온 세월만큼 두꺼워진 위선의 몸집, 거짓으로 가득 찬 비만의 몸뚱어리에게 ‘진실’이 무엇인가를 이처럼 명쾌하게 가르쳐주는 스승은 아직 없었다. 사실 요즘 현대인들은 가급적이면 모든 일을 ‘앉아서’ 처리하려고 한다. ‘몸으로 뛰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현대 과학기술문명과 컴퓨터 문화의 일반화로 사람들의 생활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져서 몸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치장’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사는 것 같다. 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상품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몸을 아름답게 가꾸려고 하는 것, 그 자체는 이해할 수는 있으나 그것의 궁극적인 지향은 결국 몸의 상품성을 높이는 것으로 귀착되는듯하여 씁쓸하다. 요즘 세태를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사실 인류의 역사가 자본주의의 역사로 넘어 오면서 전 지구적 시장경제를 통해 지상의 모든 것은 이미 상품이 되어 버렸으니 ‘몸’인들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요즘 부쩍 더 30년 전의 그 이름조차 기억이 안 나는 스님이 자주 내 앞에 나타나 어른거린다. (박두규. 시인) -노루귀 / 김인호
    • 지리산문화
    • 지리산 편지
    2023-03-08
  • 겨울 산에서
    ■ 시 겨울 산에서 이건청 나는 겨울 산이 엄동의 바람 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서서 겨울밤을 견디고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큰 그늘 속에 빠져 기진해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작은 암자에 며칠을 머물면서 나는 겨울 산이 살아 울리는 장엄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대개 자정을 넘은 시간에 시작되곤 했는데 산 아래, 한신계곡이나 칠선계곡 쪽을 지나 대원사 스쳐 남해 바다로 간다는 지리산 어느 골짜기 물들이 첫 소절을 울리면 차츰 위쪽이 그 소리를 받으면서 그 소리 속으로 섞여 들곤 하였는데 올라오면서 마천면 농협 하나로마트 지나 대나무 숲을 깨우고 산비탈, 마천 사람들의 오래된 봉분의 묘소도 흔들어 깨우면서 골짜기로 골짜기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오를수록 그 소리는 점점 더 곡진한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었는데 산 중턱을 넘어서면서 홍송들이 백 년, 이 백년씩 그들의 가지로 서로의 어깨를 걸친 채 장대한 비탈을 이루고 있는 곳까지 와서는 웅장한 코러스가 되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내가 사순절의 어느 날, 대성당에서 들었던 그레고리 찬트의 높은 소절과 낮은 소절이 번갈아 마주치는 어느 부분과 같았다. 이따금 이 산에 사는 산짐승들이 대합창의 어느 부분에 끼어들기도 하는 것 같았는데 그때마다 그레고리 찬트 속에서 짐승들의 푸른 안광이 빛나곤 하였다. 겨울 산이 울려내는 대합창이 온 산을 울리다가 서서히 함양 쪽으로 잦아들 때쯤 건너 쪽 지리산 반야봉, 제석봉의 윤곽도 밝아오는 것이었는데 날이 밝고 산의 윤곽들이 선연해지면 자작나무도 굴참나무도 그냥 추운 산의 일부로 돌아가 원래의 자리에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는 것이었다. 그냥 겨울 산이 되어 침묵 속으로 잠겨드는 것이었다.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3-02-26
  • 지리산 법화종주
    「섬진강 편지」 -지리산 법화종주 천왕봉,제석봉,연하봉,촛대봉,영신봉,칠선봉, 덕평봉,형제봉,삼각봉,명선봉,토끼봉,삼도봉 2박 3일, 지리산 품으로 출가를 했습니다 40km 지리능선 수많은 봉우리를 오르내린 수행길 절뚝이며 휘청이며 30시간을 걸으며 우리네 삶도, 사랑도 이렇게 숱한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깊어지는 것임을 온몸으로 배웠습니다. 폐절제 수술 3년이 지나고 망설이던 지리산 종주까지 무사히 마치고 나니 폐가 잘려 나간 자리에 새로운 기운이 차오르는 것 같습니다. 넘어지면 손잡아 주고 가파르면 끌어주고 카메라 짐을 나누어지어 준 지리산사람들 길동무님들이 있어 힘들다는 겨울 지리산 종주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마칠 수 있어 참 행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모두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섬진강 /김인호 *지리산 법화종주 ; 법계사에서 화엄사까지 오는 종주길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3-01-26
  •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학의 길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학의 길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 박 두 규 (시인) 1 코로나 국면을 맞고 보니 그동안 꾸준히 거론되어 오던 기후변화에 따른 전 지구적 위기라는 것이 코앞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문학은 무엇인가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우리는 문학에 대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논의를 해왔지만 지금의 현실상황을 보면 ‘지구 위기, 인류의 위기’라는 관점에서 문학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학도 과학이나 기술처럼 현실에서 우선적으로 ‘지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삶 문학에 일정 부분 복무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도 문학은 문학대로 지금껏 확장해온 영역이 있고 인류사 속에서 다양하게 그 역할을 해왔으며 또 어떤 특별한 상황 속에서는 그 상황에 맞게 대응해왔기 때문에 지금처럼 그렇게 하면 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이 상상력의 문학이고 영적 문학이라는 점과 ‘지구의 위기, 인류의 위기’의 현실에 대한 복무를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100년의 지구, 100년의 인류를 염두에 두며 글을 통해 더 세밀하게 그려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현재의 과학과 기술보다 100년의 현실을 앞서 이야기하고 노래하며 올바른 방향의 길을 찾는 더듬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2 요즘 쏟아져 나오는 학자들의 글들을 읽어 보면 기후 환경으로 인한 지구의 위기 상황은 현실의 감도보다 훨씬 심각하다. 지금 우리가 해마다 역대 기록을 갱신하며 겪는 자연재해는 단순한 재해가 아니라 대량학살의 위기이며 재앙의 시작이라고 봐야 옳다는 것이다. 인류가 자본주의 문명의 현행 기조를 고수할 경우 2100년에는 탄소배출량으로 인해 지구의 기온이 약 4도 이상 상승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북극의 빙상은 이미 붕괴된 지 오래고 알프스의 만년설은 70% 이상 녹으며 해수면은 최대 2.4미터 상승할 수 있다고 한다. 인구 천만의 자카르타 같은 도시가 물에 잠기며 세계의 주요도시는 거의 2/3가 해안에 위치해 있으니 그에 따른 발전소, 항구, 농경지 등 주요시설도 함께 위험해질 것이다. 그리고 적도 지방의 주요 도시들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한다고 한다. 이미 2018년 폭염 시에 로스엔젤레스 42도, 파키스탄 50도, 알제리 51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물 부족과 폭염으로 북위도 지역마저도 해마다 수천 명이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21세기가 끝날 무렵이면 코로나와 같은 새로운 질병들, 상상을 초월하는 산불과 홍수의 증가, 수천만 명에 이르는 기후 난민, 경제 대공황과 지역 간의 기후분쟁, 농산물 생산이 크게 줄면서 일어나는 자원전쟁 등 한 해 기준 100조 달러의 세계 피해규모가 예상된다니 앞으로 80년 안에 변화될 지구의 모습을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지금의 자본주의적 개발과 소비 패턴에서 조금도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진행되었을 경우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코로나19가 해결된다 해도 이전의 시절로 돌아가 예전의 일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지구와 인류는 이미 변화의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고 새로운 문명이 일어나는 시점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기존의 자본주의를 토대로 이루어낸 과학기술문명, 물질문명의 틀에서 벗어나 이전의 의식에서 한 단계 점핑된 도덕적 과학기술과 새로운 정신문명으로의 판짜기 변화가 절실해진 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현재 소비와 개발성장의 자본문명에서 전환하여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 갈 것인가를 이야기해야 된다. 포스트 코로나를 맞아 변화되어야 할 의, 식, 주, 의료, 교육 그리고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까지 기존의 질서와 그 틀을 어떻게 바꿔가야 할 것인지를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문학은 이 현실 변화의 중심에서 어떤 마음, 어떤 영혼을 가진 인간이어야 하는 것을 그려내야 하는 것이다. 3 지금껏 지구와 인류의 위기를 초래해온 자본문명을 벗어나 새로운 문명을 꿈꾼다면 먼저 기존의 자본주의적 가치관과 세계관 등 일상 속의 대중들에게도 정신적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 생각이 바뀌어야 그 삶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정제 없이 그대로 반영된 이데올로기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그렇게 이익을 극대화하며 개발과 성장의 경제논리로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이 자본주의다. 자본은 배고픔과 위험한 환경 조건에서 풍요로움과 안전함과 편리함을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그 도를 넘어 인간의 끝없는 탐욕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렇게 인류는 풍요와 편리를 거느린 현실 자본주의를 앞세워 공존공생을 위한 사회적 도덕과 윤리의 경계를 깨고 탐욕과 욕망을 당연하고 정당한 인간 정서로 편입시켰다. 단순하게 이야기 했지만 사실 이런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자본주의와 잘 어울려 끝없이 달려온 결과 현재의 지구와 인류의 위기를 맞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개인의 인간도 그 탐욕이 지나치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처럼 반성과 성찰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면 인류는 21세기가 끝나는 지점부터는 지금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혹독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사피엔스의 종말을 향해 추락해 갈 것이다. 그래서 문학예술은 지금의 시점에서 좀 더 집중적으로 21세기 이후의 현실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한 새로운 문명, 새로운 문학예술에 복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문명에 대응하는 문학을 생각하려면 자본주의의 속성인 탐욕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철학, 새로운 문화를 궁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어쩌면 삶의 본질과 모든 생명을 아우르는 총체적 근원으로부터 오는 것이어서 그것은 현실 자본주의를 벗어나 근본 진리의 삶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본래 모든 생명들은 함께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공존공생의 공동체적 존재라는 것과 그것을 위해 인간은 가장 경계해야 할 본성인 ‘탐욕’을 꾸준히 정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4 나는 이것을 문학이라는 영역에서 생각한다면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는 ‘단순한 삶’과 ‘소박한 삶’을 하나로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인데 ‘단순한 삶’의 문학은 개인 스스로를 전체의 한 부분이면서, 그렇기 때문에 전체라는, 그래서 전체를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라는, 이미 붓다나 예수 등 많은 현자들이 발견했던 동체대비, 궁극과의 합일 등 진리의 삶과 연계되어 있는 것이며 이를 현실로 가져오기 위한 문학을 말한다. 이는 ‘단순성’이라는 진리의 영역을 문학으로 가져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실현할 수 있는 ‘단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리의 삶은 당장 그렇게 살려는 스스로의 결단과 실천만 있으면 되는 ‘단순성’에서 시작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진리에 의해 사는 삶’은 어떤 거창한 것은 아니고 현재의 실상을 바로보고 그것에 어긋남 없이 사는 것, 다시 말하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삶의 실상은 모두가 있는 그대로 어울려(연기적 관계를 가지고) 전체가 하나의 생명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있는 그대로(본질 그대로) 어울려 순환하고 진화하는 것이 바로 ‘단순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변곡점에서 문학이 주시해야 할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소박한 삶’은 이런 ‘단순한 삶’을 현실로 가져오기 위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 사실은 방법이면서 그 본질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를 진화시켰던 인간의 탐욕은 끝없는 집착을 가져와 현재 지구의 기후재앙과 함께 모든 문제의 화근이 되었고 이 탐욕과 집착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소박한 삶’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본의 끝없는 성장 시나리오는 이제 그 한계에 왔다. 대체 에너지 등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과학기술의 노력과 성과가 있다하더라도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충족시킬 수는 없다. 결국은 소박한 삶으로 가지 않으면 해결 될 수 없는 것이다. ‘소박한 삶’은 스스로의 탐욕을 다스리는 삶이고 우리 사회의 대립과 갈등을 조화와 균형으로 이끄는 해답이라고 본다. 이‘소박한 삶’을 통해 모든 생명과 지구가 하나의 완결체로 존재할 수 있는 공존, 공생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문명을 극복하고 새로운 문명의 길로 가는 길목에 이러한 물질 중심의 삶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 문학적 화두를 통해 개인의 이기(利己)를 극복하고 무아(無我)와 탈에고(脫ego)의 수준까지 의식을 확장하여 탐욕을 순치(順治)하는데 기여해야 하는 것이 현재의 문학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코로나19와 같은 새로운 질병들과 지구의 기후재앙을 막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첫눈이 내린 노고단
    • 지리산문화
    • 지리산 편지
    202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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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까마귀, 황새 쫓다가 가랭이 찢어지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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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진강 편지」 -봄빛 무게 빗방울 머금은 지리산 자락 반야원 호수 홍매, 섬진강과 지리산 자락을 오가는 우아한 황새 나래짓, 천개의향나무숲 매화 꽃그늘로 날아든 나비 소녀 욕심껏 담아온 봄빛 무거워 삐끗한 허리에 혜미원 원장 일침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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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5
  • 지극정성至極精誠
    지극정성至極精誠 저희 『생명평화결사』의 평생교사이신 송기득 선생님 이야기를 좀 할까 합니다. 선생님은 수년 전 사모님께서 돌아가시자 자신의 삶도 이런저런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셨는지 그동안 발행해오던 잡지 『신학비평』을 폐간하시겠다고 하셨지요. 그때 주변에서 제자들이며 지인들이 극구 말려서 『신학비평』은 끝났지만 이후 그 여운을 담아내는 부록처럼 『신학비평 너머』라는 제호로 전보다 규모가 작아진 책을 내며 마음을 달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신학비평 너머』 원고를 청탁하시면서 말씀 뒤 끝에 이 『신학비평 너머』도 올해 겨울호를 끝으로 폐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왠지 그 말씀이 삶의 모든 것을 정리하겠다는 말씀처럼 들려 매우 당황스러웠습니다. 어쩌면 『신학비평』은 당신의 모든 일상을 길어 올리던 두레박 같은 것이며 여생의 가장 중요한 일이기도 할 것인데 이를 그만둔다는 말은 예삿말이 아닌 것이지요. 그래도 선생님의 판단인데 내가 이런저런 짐작을 해서도 또 말려서도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연기緣起에 의한 것이어서 오늘의 행위가 내일을 결정하게 되니 내가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해야만 운명도 나의 운명이 되는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선생님의 『신학비평 너머』 폐간 결정이 그러하신 것 같았습니다. 생성하는 것은 반드시 소멸이 따르는 것이라 하니 선생님께서 그 시기를 보시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어쨌거나 나는 『신학비평 너머』를 더 하시라는 말도 못 꺼내고 글이나 더 열심히 써서 보내겠다는 말을 하며 전화를 끊었지요. 그리고 나는 선생님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마음을 집중하니 성誠이라는 글자 하나가 떠올랐지요. 선생님의 삶 자체를 이 글자 하나가 오롯이 떠받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군 때의 경전인 『참전계경參佺戒經』을 보면 성誠에 대해서 이러한 말이 나옵니다. 誠者 衷心之所發 血性之所守 (성이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으로 타고난 참 본성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성誠에 대한 연변대학에 있던 최민자 교수의 해설을 보면 “일념으로 誠을 다할 때 자신의 誠門이 열리면서 스스로의 신성과 마주치게 된다. 매순간 정성을 다하는 것이 타고난 참 본성을 지키는 것이요 인간의 중심에 내려와 계신 ‘하나’님(‘삼일신고’에 나오는 一神降衷의 의미)을 경배하는 것이다.” “정성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고 마음을 바르게 갖는 것이며 잊지 아니하는 것이고 쉬지 않는 것이며 지극한 감응에 이르는 것이다.” 라는 글들이 나옵니다. 내가 송기득 선생님을 자신의 일상 삶 자체를 오롯이 성誠으로 사신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수년간의 지극한 돌봄과 그 죽음 이후 현재 삶만 보더라도 그렇고 선생님의 삶 전체를 한마디로 평한다 해도 성誠이라는 말이 가장 적합한 말인 듯싶습니다. 젊은 날 구도행의 시절도 성誠이요 학자로서 학문을 할 때도 성誠이요 가르침이나 모든 삶 행위도 성誠이요 사모님에 대한 극진한 모심도 성誠이었으니 그 지극정성의 삶 자체가 이미 참 본성으로 세속을 살아내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위의 책 내용에서 “정성이 뇌리에 깊이 새겨져 있으면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우러나오게 된다. 정성이 더욱 깊어져 우리의 몸 세포 하나하나에 그것이 각인되는 단계에 이르면 호흡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이는 존재의 전 과정이 정성의 발현인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가히 정성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역사상 알려졌거나 혹은 알려지지 않은 밝은이(覺者)들이 이에 속한다. 이는 한마디로 ‘나’(에고)를 잊고 ‘나’(참 본성)를 잃지 않는 경지이다.” 라는 대목을 보면 더욱 선생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선생님은 현재 아파트에서 두유나 과일주스 등으로 식사를 하시며 불편한 몸으로 혼자서 하루를 보내고 계십니다. 나는 그 선생님의 심정을 헤아려보다가 시를 한편 만들었습니다. 새는 낮게 날아 나무의 그늘로 그늘로만 옮겨 다니며 아무런 지저귐도 없이 폭염을 견디었다. 견딘다는 것은 영역과 영역의 경계를 사는 일이기도 해서 한편으론 외롭고 쓸쓸한 일이기도 했다. 모든 경계를 지우고 순일純一한 하늘을 보게 되는 어느 날이 온다면 오늘이겠지. 오늘이겠지. 그렇게 막연한 설렘 하나로 또 하루가 갔다. (박두규의 시 「또 하루가 갔다」 전문)
    • 지리산문화
    • 지리산 편지
    2024-02-09
  • 파랑 또는 파란
    파랑 또는 파란 송태웅 뒤뜰을 바다로 깔았다 하여 내 뒤뜰로는 파랑도 끼룩거리는 철새처럼 밀려오는 것인데 나의 배후가 짙푸르게 물들어 끊임없이 출렁인다 해도 당신은 그 어느 피안에서 흰 주단을 덮고 눕길 바란다 생은 한 필지의 주민등록지 위에 내리는 폭우와 싸워나가는 것 내 영혼이 노쇠한 낙타처럼 더 이상은 어디로도 갈 수가 없을 때 비로소 생은 신생 교회의 거대한 십자 네온사인 같은 헛된 경전을 집어던지고 겨우 허름해질 수 있는 것 생애 처음으로 내게 온 남루여 뒤뜰 토란잎에 맺힌 물방울처럼 고요히 내려앉은 파란이여 --------------------------------------------- 지리산 자락에 들어온 송태웅 시인의 삶의 또는 의식의 현주소가 변하는 과정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시다.몸도 마음도 바닥을 치고 있는 엄정한 현실 속에서 그는 가식과 위선의 헛된 지난 세월을 집어 던지고 허름한 마음으로 현실의 가난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그러자 그 신산스럽던 가난도 파란만장한 인생도 토란잎의 물방울처럼 고요히 내려 앉아 영롱하다. 그는 달라진 자신의 현실을 삶의 새로운 영역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그 가난이 비로소 ‘삶의 실재’를 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의 삶으로부터 오는 빛나는 각성과 성찰이다. 그리고 시인은 자신의 삶의 배후에는 물결처럼 끝없이 밀려오는 ‘파랑’이 있다고 말한다. 자본의 사회를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도 아닌 가난이라고 하는 세상에서, 가난은 무능함이고 비천함이며 장애라고 말하고 있는 세상에서, 그런 가난에 휘둘리지 않고 가난을 보듬어낼 수 있는 것으로 자신의 배후에는 ‘파랑’이 있다고 말한다. 그 파랑은 바닥을 치고 있는 자신의 몸과 마음의 현재를 치유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 ‘파랑’은 뒤뜰의 작물들이든 자연이든 농사든 시골이든 무엇이든 어쨌든 생명의 근원에 닿아있는 무엇일 것이다.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4-02-09
  • 입춘첩
    「섬진강 편지」 -입춘첩 뒷산은 밤새 흰 눈으로 쓴 입춘첩을 성삼재 이어지는 만복대 능선에 내걸었고 앞산은 얼음새꽃빛으로 쓰고 노루귀꽃빛으로도 쓰고 바람꽃빛으로 쓴 삼색 입춘첩을 골짜기에 내걸었다 온 목숨들 立春大吉 하고 建陽多慶 하시라고 .............................................................................................. 밤사이 지리산에 눈이 내려 입춘 설경을 보러 시암재에 올랐습니다. 만복대 능선길은 하얗게 눈이 쌓였지만 성삼재 넘는 바람은 입춘임을 아는 듯 보드랍기만합니다. 마을로 내려서는 밤재에는 솜털 보송한 노루귀가 분홍꽃빛을 터트리고 있고 골짜기 개울가에는 황금잔처럼 빛나는 얼음새꽃, 변산바람꽃이 피어 움츠렸던 숲을 깨웁니다. 마을 앞 쌍산재 매화도 몇 송이 꽃봉오리를 터트려 놓고 나를 부르는 입춘입니다. 그대도 움츠렸던 마음과 몸을 깨워 어여 봄을 맞이하시기를! -섬진강 / 김인호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4-02-06
  • '한겨레평화의숲‘과 김철호선생
    「섬진강 편지」 -'한겨레평화의숲‘과 김철호선생 구례 ‘한겨레평화의숲’에서 박소산 동래학춤 명인의 학춤과 김평부대금 명인의 공연을 가졌다. 새해를 맞아 가까운 이들이 서로의 안부도 전하고 모든 생명의 평화를 기원하는 조촐한 자리였지만 대자연 속에서 펼쳐진 공연은 살아 숨쉬는 감동의 무대였다. 특히 공연 무대가 된 ‘한겨레 평화의 숲'은 김철호선생의 치유와 화해, 생명과 평화의 정신이 깃든 숲이어서 그 의미가 남달랐다. '한겨레평화의 숲’과 김철호선생 생전에 지리산을 좋아했던 김철호(1923~1995) 선생은 6.25 전쟁 전후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들이 버러 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유골에 좌.우익이 어디 있겠냐'. '뼈의 색깔은 희다'라며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 60대 중반의 나이로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구례읍 봉서리 산기슭에 움막을 짓고 억울한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평화의 숲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기암 진단으로 현금 5억 원과 공원 조성부지 1만 2천 평을 치유와 화해, 생명과 평화의 정신을 드높이는데 써달라며 1995년, 한겨레 신문에 기탁하여 1996년 한겨레통일문화재단 발족의 주춧돌이 되었다. 김철호 선생은 1923년 화성에서 태어나 해방 이후 섬유·화학약품 제조업체를 경영하며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원공채를 실시하는 등 기업문화 발전에도 큰 공헌을 했다. 1983년에 노동자들의 휴양소로 써달라며 기증한 3만여 평의 땅은 현재 경기산재요양병원의 모태가 됐다. 김철호선생은 1995년 지병인 간암으로 타계하였으며 경기산재요양병원 내 화성소망교회에는 선생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생전 김철호 선생이 살던 움막터에 지은 김철호의 집 -김도경 낙동국악원장과 박소산 동래학춤명인의 액막이 공연 -김평부 대금명인 동학의 함성 공연 - 동래학춤 명인 박소산의 학춤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4-02-01
  • '구례 화엄사 화엄매' 천연기념물 지정 축하
    「섬진강 편지」 -'구례 화엄사 화엄매' 천연기념물 지정 축하 지리산 구례 화엄사의 홍매화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화엄사 홍매화는 각황전(국보) 옆에 있는 것으로 지정 명칭은 ‘구례 화엄사 화엄매’다. 화엄사 천연기념물에는 1962년 지정된 지장암 옆 올벚나무(1주)와 2007년 지정된 길상암 앞 매화(속칭 들매화·1주)가 있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지정된 각황전 옆 화엄매는 앞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4대 매화(순천 선암사 선암매, 강릉 오죽헌 율곡매, 장성 백양사 고불매, 구례 화엄사 들매화)와 달리 검붉은 꽃을 피우는 유일한 매화”라며 “학술적 가치는 물론이고 많은 국민에게 사랑받는 화엄사의 대표 경관으로 자리 잡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고 밝혔다. 조선 숙종(1674∼1720) 때 심어진 것으로 알려진 홍매화는 각황전 옆에 있어 ‘각황매’ 또는 다른 홍매화보다 꽃 색깔이 붉다 못해 검붉다고 해 흑매화(黑梅花)로도 불린다. (화엄사 홍보 자료 일부)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 선암사의 선암매, 담양 지실마을의 계당매, 전남대의 대명매, 고흥 소록도의 수양매를 호남 5매로 불렀는데 소록도 수양매의 고사로 이제 화엄사 홍매가 그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다. 화엄 홍매 -김인호 붉다 못해 검붉어 흑매라 부르는 화엄 홍매 꽃 피는 삼월이면 각황전 풍경소리도 붉어진다네 화엄세상이 어딘가 허공에 묻지 말고 300년 피고 지어 검붉어진 매화 꽃그늘 아래 화엄세상 밝히는 저 스위치를 딸깍 켜보시게 #구례화엄사화엄매천연기념물지정 #화엄사홍매 #흑매 #화엄홍매 #호남5매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4-01-26
  • 지리산 화엄사 주지스님 덕문스님의 화엄사 이야기 (화합의 역사, 암자, 옛 길, 함께하는 화엄사)
    화엄사 주지스님 덕문스님을 만나 화엄사의 역사와 미래에 대한 법담을 나누었습니다. 00:00 인트로 00:23 화합과 소통의 역할을 담당했던 화엄사 05:07 화엄사 8원 81암자가 형성된 과정 11:36 사찰과 암자가 이어지는 길 17:14 지역민, 국민과 함께 하는 화엄사
    • 지리산문화
    2024-01-23
  • 생명평화 기도문
    생명평화 기도문 박 두 규(시인) 내 안의 신성한 빛이 스스로 피어나 나를 밝게 하고 혼탁한 세상에 그 빛을 더하소서. 강가의 돌멩이가 하릴없이 물결에 쓸리는 일이나 꿀벌 한 마리가 태어나 죽는 일이 모두 우주의 질서이고 리듬인 것을 알게 하소서. 지상으로 떨어지는 도토리 한 알의 무게와 자욱한 안개 속 강을 건너는 새 떼들, 잠 못 이루는 그대의 슬픔까지도 모두가 평형을 이루게 하는 우주의 저울이며 일상의 평정심임을 알게 하소서. 수평의 저울이 기울고 우주의 리듬을 깨는 것은 오로지 나를 묶고 있는 나의 마음 때문이니 평화로운 마음의 집이 무너지는 것이나 종일토록 조울躁鬱 속 혼란의 시간이 흐르는 것은 내 탓이고 또 내 탓인 것을 알게 하소서.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처럼 사소한 슬픔과 기쁨에도 우주가 흔들린다는 걸 알게 하소서. 두려움에 휩쓸려 깊은 어둠의 숲을 헤맬지라도, 단호하게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처럼 스스로 벗어나 먼바다의 수평을 볼 수 있게 하시고 가여워하는 마음을 일으켜 스스로를 품어내게 하소서. 그리고 生의 균형감각을 찾아 우주질서의 대열에 들어 다시금 빛이 되게 하소서. 모든 생명은 스스로 사랑 그 자체이고 세상의 모든 일은 사랑으로 비롯되는 것임을 알게 하소서. 또한 매일매일 언제나 해가 뜨는 일처럼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의 사랑은 완벽하니 그 절대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부정하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가 먼저 고마워하고 내가 먼저 미안해하고 내가 먼저 용서를 구하고 내가 먼저 피와 땀을 나누고 내가 먼저 상대방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일이 그것이 내 사랑이며 신성임을 알게 하소서. 내 안의 신성한 빛이 스스로 피어나 나를 밝게 하고 혼탁한 세상에 그 빛을 더하소서.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4-01-09
  • 강을 바라보다
    강을 바라보다 강은 저무는 강이 가장 아름답다. 물론 이것은 매우 주관적인 나의 생각이다. 안개 자욱한 새벽 강인들 아름답지 않을 것인가. 나는 언제부턴가 강을 자주 바라보는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거처가 강가에 있다보니 좋든 싫든 하루 종일 강을 힐끗거리며 살고있는 것이다. 그리고 딱히 일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일과가 끝나는 저녁이면 나도 모르게 툇마루에 앉아 붉은 노을이 내려앉은 강을 바라보게 된다. 검붉은 노을의 강을 건너는 새들도 뜸해지면서 서서히 어두워지는 시간에 비례해 강은 점점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멀리 마을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며 마침내 주변이 다 어두워져도 강은 홀로 반짝이며 흐른다. 어둠 속 적막을 흐르는 빛나는 강물을 보며 앉아 있으면 지상에서 사라지는 것들이 사무쳐 온다. 이 시간이면 마음은 끝없이 깊게 내려앉아 저절로 명상의 상태에 이른다. 실제로 십여 년 전 이 두텁나루숲에서 ‘강을 바라보다’라는 이름을 붙이고 명상 캠프를 가졌었다. 그때 아난다마르가의 수행자 칫따란잔아난다 다다를 모시고 지역의 활동가들을 포함해 열댓 명 정도가 단식하며 ‘인간의 의식층’에 대한 강의를 듣고 명상을 배웠다. 명상은세상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상을 더 깊고 밝게 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명상은 자기중심적인 관점을 극복하고 세상을 하나로 만나기 위한 것이며 ‘지금 여기’에서 실천적으로 살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세상의 많은 현상과 그 지식의 현실은 당대의 삶을 규정짓는 환경이고 조건이지만 한편으로는 존재와 생명을 구속하는 것이기도 해서 이를 극복하고 삶과 죽음의 균형감각을 일구는데 명상은 매우 유효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고 떠나고 사라지는 것들의 무상함이 주는 생의 쓸쓸함과 두려움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이러한 소멸하는 것들에 대한 아픔을 이 나이토록 제법 훈련받아 왔지만, 나는 아직도 늘 그 무상의 끝자락에서 울음 운다. 세속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얼추 그렇지 않은가. 욕망과 집착의 낮은 의식층을 살고 있는 한 성인군자의 그것처럼 아무리 위선을 떨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지 않던가. 평생토록 많은 지식을 머리에 담아냈다 해도 실천이 없으면 삶의 지층에는 변화가 없듯이 우리는 길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속절없이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무런 말 없이 어둠 속을 흐르는 강물은 어둠 속의 빛을 끌어모아 반짝이고 또 반짝이며 우리에게 이런 생의 왜곡과 허망함을 가르쳐준다. (박두규. 시인)
    • 지리산문화
    • 지리산 편지
    2024-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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