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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길은 아름답다
    그 길은 아름답다 신경림 산벚꽃이 하얀 길을 보며 내 꿈은 자랐다 언젠가는 저 길을 걸어 넓은 세상으로 나가 많은 것을 얻고 많은 것을 가지리라 착해서 못난 이웃들이 죽도록 미워서 고샅의 두엄더미 냄새가 꿈에서도 싫어서 그리고는 뉘우쳤다 바깥으로 나와서는 갈대가 우거진 고갯길을 떠올리며 다짐했다 이제 거꾸로 저 길로 해서 돌아가리라 도시의 잡답에 눈을 감고서 잘난 사람들의 고함소리에 귀를 막고서 그러다가 내 눈에서 지워버리지만 벚꽃이 하얀 길을, 갈대가 우거진 그 고갯길을 내 손이 비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내 마음은 더 가난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면서. 거리를 날아다니는 비닐 봉지가 되어서 잊어버리지만 이윽고 내 눈앞에 되살아나는 그 길은 아름답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길이 아니어서 내 고장으로 가는 길이 아니어서 아름답다 길 따라 가면 새도 꽃도 없는 황량한 땅에 이를 것만 같아서 길 끝에서 험준한 벼랑이 날 기다릴 것만 같아서 내 눈앞에 되살아나는 그 길은 아름답다 - 하동공원 벚꽃 /사진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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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과 시
    2022-06-12
  • 만물이 지나가는 길
    만물이 지나가는 길 김영석 서리 낀 저녁 하늘 줄지어 철새들이 날아간다 어느덧 내 안의 길을 지나 하늘의 길 따라 날아간다 강물이 내 안 어딘가 물길을 지나 굽이굽이 벌 끝으로 흐르고 노루 사슴이 내 안의 오솔길을 벗어나 어드메 깊고 깊은 산길을 달린다 가랑잎도 바람에 불려 내 안 어느 공터를 구르다가 이슥한 뒤안으로 돌아간다 오늘도 돌탑에 기대어 서서 내가 바로 하나의 길이었다고 다시 한번 조용히 깨닫는다 내 마음의 밝음과 어둠 슬픔과 그리움과 쓸쓸함이 내 안의 길목을 지나가는 한갓 만물의 기척이었다고 다시 한번 조용히 깨닫는다 - 섬진강 노을 사진 / 김인호
    • 지리산문화
    • 시인과 시
    2022-05-10
  • 평화의 걸음걸이
    평화의 걸음걸이 나희덕 1. 1950년 늦여름 지리산 어느 마을에서의 일이다 새벽녘 동구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마을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그 외길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국군과 인민군이 총구를 겨누며 대치하고 있는 양쪽 산자락 사이 좁은 오솔길 주민들은 숨죽이고 총탄의 여울을 건너갔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외쳤다 아가, 뛰지 마라, 절대 뛰어서는 안 된다! 천천히, 천천히 걸어야 한다! 그 외침을 방패삼아 걷고 있는 소년 앞으로 한 청년이 겁에 질려 뛰기 시작했다 문득 총성이 들렸고 청년은 쓰러졌다 숨죽여 걷는다는 일 그것이 소년에게는 가장 어려운 싸움이었다고 한다 2. 평화의 걸음걸이란 총탄의 여울을 건너는 숨죽임과도 같은 것 두려워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두려움과 싸우며 총탄의 속도와는 다른 속도나 기척으로 걸어가는 것 심장을 겨눈 총구를 달래고 어루만져 거두게 하는 것 양쪽 산기슭의 군인들이 걸어 내려와 서로손 잡게 하는 것 그날까지 무릎으로 무릎으로 이 땅의 피먼지를 닦아내는 것
    • 지리산문화
    • 시인과 시
    2022-04-13
  • 쌀밥 먹는 시간
    쌀밥 먹는 시간 - 김은숙 경기도 여주땅을 지나다가 쌀밥집이라는 상호를 처음 보았는데 쌀밥이라는 낯익은 어휘가 한 집의 주인으로 반듯하게 서 있는 게 문득 새로워 차림표에 의젓하게 자리한 쌀밥 한그릇 반가이 청했는데 보통의 이런저런 반찬으로 차려진 밥상의 중심에 마지막으로 올라온 쌀밥 한 그릇 한참 동안 밥그릇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다가입 안 가득 담아 넣는 한 숟가락의 밥 사십여 년 지탱해온 내 몸의 모든 것이 때마다 떠 넣은 밥숟가락에 힘 입은 것이어서 내 디뎌온 발자국 하나하나가 이 쌀 한 톨 한 톨의 힘이 아닌 것이 없어서 앞에 놓인 쌀밥 한 그릇 한 숟가락의 밥이 새삼 가슴 뜨겁게 뭉클해지는데 뿌리 끝 흔들리는 절망에 닿아서도 서로를 부축하여 굳건히 어깨를 걸어온 벼들이 벌판 가득 일렁이고 불어오는 바람도 넉넉히 품은 서늘한 깊이가 고단한 일상의 허기를 채우는 이 땅의 가을 입안 가득 쌀밥을 꼭꼭 씹어 삼키며 한 톨 한 톨의 쌀알들이 뜨겁게 몸을 데우는 시간 영혼의 허기도 비로소 삭아들며 푸근해지고 한 그릇의 밥 앞에서 숙연해지는 가을 한나절 생활에 지치고 발걸음 무거운 이들에게도 나도 더운 김 솔솔 나는 뜨거운 밥 한 그릇 지어내고 싶다 -분홍노루귀 / 사진 김인호
    • 지리산문화
    • 시인과 시
    2022-03-09
  • 돌담
    돌담 김기홍 발길에 걸리는 모난 돌멩이라고 마음대로 차지 마라 그대는 담을 쌓아 보았는가 큰 돌 기운 곳 작은 돌이 둥근 것 모난 돌이 낮은 곳 두꺼운 돌이 받치고 틈 메워 균형잡는 세상 뒹구는 돌이라고 마음대로 굴리지 마라 돌담을 쌓다보면 알게 되리니 저마다 누군가에게 소중하지 않은 이 하나도 없음을 *김기홍 시인(1957~2019) 전남 순천 출생, 1984년 실천문학 등단, 시집 『공친날』 『슬픈희망』 -피아골 추동마을 (사진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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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과 시
    2022-02-07
  • 내 마음의 투명한 우수
    내 마음의 투명한 우수 강영환 별이 보일 때까지 하늘을 갈고 닦아라 그대 가슴에서 어둠을 몰아내고 별이 돋을 때까지 슬픔을 갈고 닦아라 투명한 네 마음을 보아라 어둠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침을 갈고 닦듯이 그대 발바닥에서 풀이 돋고 그대 팔목에서 곁가지가 뻗을 때 슬픔은 드디어 별이 되리니 그때, 투명한 네 길을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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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과 시
    2022-01-14
  • UFO 소나무
    UFO 소나무 이상인 한때 빨치산들의 야전병원이 있던 지리산 벽송사 옛 대웅전 자리 앞에 수령 600년 된 도인송 한 그루 새벽녘이면 알아들을 수 없는 신호음을 내며 화들짝 깨어난다고 한다. 그것은 하늘로 통하는 우주 정거장 푸른 UFO가 둥근 깃을 펼치며 이쪽과 저쪽으로 나뉘어 싸우다가 묻힌 영혼들을 이쪽과 저쪽을 가리지 않고 하늘로 실어 나르기 위한 준비 작업이라고 두 아름이 넘는 소나무 등걸 속에는 서로 화해한 영혼들이 타고 올라가는 물관부의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작동하고 검은 옷을 입은 밤새들이 날아와 비행접시의 균형을 잡아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과 소리들은 야음을 틈타 너무도 은밀하게 이루어져 누구에게나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고 하니 나도 한 스님의 말씀처럼 마음을 열고 몇 날 며칠을 기도하듯 기다려 소나무 등걸 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그 둥글고 푸른 우주 정거장, 이 세상의 표가 필요 없는 UFO를 타고 싶다 ▶ 이상인 약력 ◀ - 1992년 『한국문학』시, 2020년 『푸른사상』신인문학상 동시 당선. - 시집 『해변주점』 『연둣빛 치어들』 『UFO 소나무』 『툭, 건드려주었다』 『그 눈물이 달을 키운다』 - 순천작가회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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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과 시
    2021-12-20
  • 산청
    산청 -석연경 천년을 달려 산청에 다녀올까? 님을 만난 첫 봄 산청은 찬란이었지 산청이 가까운 것 같은데 어디던가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곳인가 천상의 햇살인 듯 밝고 맑아 눈부셔 한적한 오솔길도 빛을 뿜어내는 신비 나도 님도 세상도 환하디 환한 충만 저절로 비밀스런 웃음이 나오는 곳 아으, 우리는 육만 가지 통삼매에 들었던 것인데 번갯불 타고 내게 오렴 같이 가자 산청으로 석연경 밀양 출생, 2013 『시와 문화』시, 2015 『시와 세계』문학평론 등단 시집『독수리의 날들』, 『섬광, 쇄빙선』『푸른 벽을 세우다』가 있음 송수권시문학상 젊은시인상, 연경인문문화예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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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1
  • 기억의 향연
    기억의 향연 급히 머리를 감다 물이 비강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지나간 장면 두엇이 얼얼한 감각에 나타나기도 한다 예닐곱이나 되었을까 어머니와 함께 냇물에서 다슬기를 잡던 땐 어머니와 아들의 얼굴을 비춰주던 맑은 냇물과 어머니가 나를 깨워 밥술 위에 조깃살점을 올려주던 그 세상이 세상의 다인 줄 알았다 스물이 넘고 서른이 넘어 나를 부르던 어머니의 음성은 멀어지고 공중목욕탕 탈의실에 온몸에 문신을 한 사내들처럼 무지막지한 완력이 앳된 청년들을 붙잡아 욕조에 채운 물로 기도를 막아 죽인 이후로 물이 무서워졌다 화엄사 각황전 앞 홍매를 보러 성지순례단처럼 사람들이 몰려오고 서역에선 시야를 가리는 미세먼지가 아우성처럼 불어오는데 그 언젠가 한때는 그 모래바람과 함께 간다라의 음영 짙은 미간이 당도하기도 했으니 이제 나도 이순이 되어 구순 넘은 어머니가 실낱처럼 가늘어진 음성을 남기고 맑은 냇물을 흘려보내던 숲속 멧비둘기의 몸으로 돌아갈 날을 지켜보고 있으니 ....................................................................... 송태웅 2012년에 토지면 피아골 직전마을에 들어와 토지면 용두마을, 마산면 사도리 등으로 옮기며 구례에서 9년째 살고 있다. 구례에서 시집을 두 권 냈으며 다른 글쓰기를 모색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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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인과 시
    2021-06-01
  • 깃든다는 말
    깃든다는 말 애근히 산에 들어야만 산에 드는 것은 아니리 깃든다는 건 산에 들지 않아도 늘 산에 드는 것이리 깃든다는 건 그렇게 몸이 아니라 마음이리 깃든다, 깃든다 되뇌면 어머니 품같이 술술 잠이 올 것 같은 말 먼산주름 산과 산이 서로에게 깃들어 참 아늑하다 ......................................................................................... 노고단에 올라 동쪽으로 반야봉 너머 삼도봉 너머 세석평전 너머 천왕봉을 보고 서쪽으로 천마산 너머 통명산 너머 백아산 너머 무등산을 본다. 남쪽으로 섬진강을 끼고 백운산을 보고 금오산 너머 남해 망운산을 보고 북쪽으로 마이산을 덕유산을 가야산을 본다. 노고단에 올라 새벽 노고단에 올라 사방팔방 운해 위에 떠있는 산들을 본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먼산주름, 큰 산이 작은 산을 이끌어 다시 큰 산에게 이어주는 손길마다 따스함이 번져난다 노고단에 올라 가만 손 내밀고 불러본다 어머니! 김인호 광주출생 시집 「땅끝에서 온 편지」 「섬진강 편지」 「꽃앞에 무릎을 꿇다」 「지리산에서 섬진강을 보다」 펴냄 2014년 지리산권 방문의해 기념 사진공모전 최우수상 야생화 사진전 2회 개최, 시인들의 사진전 참여
    • 지리산문화
    • 시인과 시
    2021-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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