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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지리산 편지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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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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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을 위한 숲길-지리산 둘레길
온 세상이 초록으로 물드는 봄날, 문득 산과 들 또는 한적한 강둑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한번쯤은 누구나 할 것이다. 도심의 번다한 일상을 빠져나오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의식의 세계 너머에 있는 생명의 본질적 요구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나’라는 생명이 봄이라는 순환적 시간에 순응하려는 몸짓 같은 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만큼 억지를 부리며 사는 생명들도 없다. 막히면 돌아가고 높은 곳으로 역행하지 않고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강물처럼 지구상의 자연과 모든 생명들은 순리대로 살아가지만 유독 인간만이 자연을 거스르고 순리에 역행하며 산다. 어쨌든 우리는 이 화사한 봄날, 주체할 수 없는 생명력의 발현에 순응하기 위해서라도 한번쯤은 자연의 착한 자식이 되어 걸어야 한다.
지리산 둘레길은 태생부터가 좀 다른 데가 있다. 2004년 도법스님이 생명평화탁발순례를 시작하면서 지리산 전체를 한 바퀴 돌았다. 그때 스님은 자본주의 물질문명 속에서 영성을 잃어가는 현대인들이 이 지리산 숲길을 걸으며 참된 자신을 회복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셨다. 그래서 지리산 주변의 사회단체들과 힘을 모아 ‘지리산 숲길’이라는 사단법인을 만들고 산림청과 지자체를 설득하여 둘레길이 만들어졌다. 다시 말하면 지리산 둘레길은 단순히 건강을 위한 산책길이나 관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명상과 성찰을 위한 숲길이며, 이익과 탐욕으로 점철된 자본문명을 벗어나, 자신을 치유하고 정화하며 서로가 존중하고 섬기는 모두가 하나의 생명공동체라는 새로운 문명에 대한 기획에 속한다고 보아야 한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보면 이러한 요구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된다. 둘레길은 지리산 자락 깊이 숨겨져 있는 마을과 마을이 서로 오가던 길이고, 수령 300~600년의 당산 나무들이 곳곳에 있는 길이고, 원촌 총각이 숲속으로 나무하러 가서 탑동 처녀 만나고 오던 숲길이고, 파장 술 한 잔에 취해 넘던 고갯길이고, 삽 들고 물꼬 보러 가던 농로이고, 강바람에 천렵하던 강변길이다. 순박한 산골 사람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퇴적되어 있는 길이고, 삶의 순정성이 풍경으로 박제되어 있는 곳이다. 이렇게 둘레길은 전남, 전북, 경남에 3개 도에 걸쳐 5개 군을 아우르고 있으며 얼추 300km에 이른다. 2012년 3월 현재 16개 구간으로 되어 있으며 앞으로 3개 구간이 완성되면 지리산 둘레 전체가 하나의 길로 연결되는 것이다. (박두규 시인)
-지리산 둘레길의 당몰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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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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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온 편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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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온 편지 3
지리산, 비트 산행
어린아이는 엄마에게 많은 질문을 한다. “엄마, 코끼리는 왜 코가 길어?” 또는 “엄마, 바다는 왜 푸르데?” 이런 질문을 받으면 참 난감하다.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니 애가 못 알아들을 것이고 아니 그런 지식도 별로 없다. 그런데 아이들은 왜 그런 질문을 할까? 그건 당연히 그것이 이상하고 또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제 세상에 눈 뜬지 갓 4,5년 된 생명들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이상하고 신기하고 새로운 것들뿐이다. 그러니 외출하거나 여행을 할 때면 끊임없이 질문을 해대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낯선 이 세상은 얼마나 신기하고 즐거울까? 매일매일 주변에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면서 아직은 낯선 세상을 사니 그 세상이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울까? 하지만 많은 어른들에게는 늘 똑같은 풍경에 반복되는 세상이고 그래서 지겨운 세상일뿐이다. 다시 말하면 새롭지 않다. 그래서 어른들은 여행을 하게 된다. 어린아이들처럼 새로운 세상, 낯선 세상을 보며 세상을 새롭게 보고 싶은 것이다.
사실, 똑같은 세상을 늘 새롭게 볼 수 있고 새롭게 살 수만 있다면 그건 이미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옛 시에 ‘깨달음’이란 선시가 있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나무를 하고 물을 길었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다.
이 시를 보면 깨달음을 얻기 전이나 얻은 후에나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다. 그래서 깨달음은 물을 긷고 나무를 하는 일상의 현실에 있다는 것과 그 일상을 새롭게 보고 또 새롭게 사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지겨운 일상(현실)을 새롭게 볼 수만 있다면 세상은 신기롭고 즐거울 것이고 그렇게 늘 새롭게 현재의 일상을 살아낸다면 그런 행복이 어디 있으며 그것이 깨달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고 보면 우리 같은 범인들에게 여행이라는 것은 낯선 곳에서 삶의 새로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니 깨달음의 대리만족 쯤이나 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사실 여행을 많이 하지 못했다. 싫어하는 것은 결코 아니고, 돌아다니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편인데도 국내나 해외여행을 별로 하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 마음의 변화나 위로나 생활의 어떤 새로움이 필요할 때면 혼자서 훌쩍 산으로 간다. 가까운 산이 지리산이니 늘 지리산을 다닌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한때 한 몇 년은 작고한 박배엽 시인과 함께 지리산의 비등산로를 주로 다녔다.(그때만 해도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들어서기 전후여서 단속이나 벌금이 없었다) 그 길들은 한국전쟁 전후의 빨치산들이 주로 다녔던 길들이기도 하고 그 이전에는 나무꾼이나 장꾼들이 다녔던 길이고 현재는 고로쇠꾼들이 자주 이용하는 길들이다. 그 지리산의 낯선 지능선이나 지계곡을 혼자서 자주 탔던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따지고 보면 다 내 안의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였다. 지리산은 전북, 경남, 전남, 3개도에 걸쳐있는 넓은 산이어서 한번 헤매기 시작하면 요샛말로 장난이 아니다. 지금이야 GPS가 있지만 그때는 나침반과 지도 한 장 믿고 그냥 갔다. 그리고 사라진 길의 흔적을 더듬어 산을 타는 동안은 모든 걸 다 잊을 만큼의 긴장과 두려움이 함께 했다. 그것은 어쩌면 내면의 깊은 어디에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생명력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일상에서 데리고 사는 크고 작은 두려움들을 말끔하게 지워주는 역할을 했다.
나중에 지리산을 오르며 즐겨 찾아간 곳은 산사람(빨치산)들의 비트(비밀아지트)였다. 물론 처음에는 빨치산 출신 장기수 어른들이나 관련자들의 도움을 얻어서 찾아 다녔다. 비트라고는 하나 무슨 문화유산처럼 특정의 흔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현상 비트나 박영발 비트, 구례군당 비트는 그래도 그 흔적과 생활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으나 그 외의 환자트나 무기, 식량 등을 숨겼다는 비트들은 그저 이 근처였다는 것만을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들은 빨치산이라고 불렸지만 나는 그들이야말로 하나의 통일조국을 꿈꾸고 진정한 인간해방을 꿈꾸었던 한국전쟁 전후 당대의 역사를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사회가 그렇듯 모든 빨치산들이 그렇게 살았던 것은 아니겠지만 역사라는 큰 흐름에서 조망한다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나는 열심히 산을 찾던 8,90년대만 해도 시대적 상황 탓도 있었지만, 산을 오르며 비극적인 역사와 이데올로기보다는 빨치산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 그 사람들의 삶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를 사는 시인의 몫이기도 하고 지리산을 오르는 나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리산 연작시를 썼고 ‘그리움’이라는 단어에 모든 걸 담고자 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죽은 동지들에 대한 그리움, 조국 해방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존재의 고독에서 오는 근원적 그리움까지 지리산은 그 모든 그리움을 내장하고 있는 산으로 그려지기를 바랐다.
산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 오랜 마음 속 벗처럼 / 부르지 않아도 항상 / 푸른 대답을 보내오고 / 그리움이 깊을 대로 깊어 / 산빛 너울이 아프다. // 미친 눈보라, 갈 곳 없는 어둠에 묻혀 / 사십 년 징역을 곱게도 사는구나. / 물빛 하늘 얼굴들 / 살아서는 부둥킬 수 없었던 / 그리움 곁으로 가고 / 홀로 남아 / 상처 깊은 짐승처럼 / 우우우 웅크린 / 산. // 그대는 / 눈부신 억새꽃 바람결로 스미고 / 깊은 숲 그늘 돌 틈 / 철쭉으로 피어나 / 우리들 일상의 /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 다하도록 / 스스로가 다하도록 내려올 수 없어 / 산이 되었던 그대. // 우리 곁을 떠나간 벗들은 / 저 산 되었지. / 헐벗어 눈 덮인 저 산. / 그래, 바라던 조국을 만나 / 풀씨는 맺었나, / 슬픔은 없더나. // 저 산처럼 서야지. / 산이 거느리는 핏빛 그리움으로 / 살아남아야지. / 밤마다 이빨 빠지는 꿈을 꾸며 / 가버린 벗을 생각는 일은 / 이제 그만 두어야지. / 깊은 숲 그늘 바람, 숨 죽여 울면 / 아직도 너의 목소리가 들린다.// <졸시「지리산1-序」전문>
지리산 비트 산행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의 현장을 가는 것이기도 해서 어떤 묘한 비장감을 느끼게 해준다. 나는 그것이 매우 좋았다. 그리고 혼자서 하는 그 비등산로의 산행은 삶의 근원적 두려움과 외로움의 맨얼굴을 직접 만나게 해주었고 시종일관 긴장감과 어떤 설렘을 주는 신선한 것이어서 참으로 각별한 여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국립공원법이 정비되어 비등산로 산행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연구 목적이나 특별한 사유가 있다면 신고를 하고 허락을 받아 갈 순 있지만 쉽지 않다. 그래서 요즘은 정해진 탐방로만을 다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지리산을 오르는 일은 새롭다. 나무며 벌레며 새, 동물들, 그 모든 생명을 품은 산은 그 생명들이 뿜어내는 생명력으로 인해 하루하루가 모두 새롭고 신선하기 때문이다.
-남부군 비트터
-남부군 학습장
-남부군 이현상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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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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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이야기2 -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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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이야기2- 친구
지리산을 늘 함께 오르던 친구가 있었다. 세상의 모든 빛 중에 저무는 빛이 가장 강한 빛이라는 것을 안 것은 친구의 죽음 때문이었다. 노을이 지는 동안 능선들이 모두 침묵 속에 숙연해지는 것도 저무는 빛으로부터 시작되는 시간의 죽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화려한 도시의 빌딩 사이로 저무는 강한 빛을 보며 문득문득 외로워지는 것도 까닭모를 그리움도 모두 여기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친구가 죽고 나는 혼자서 산에 다녔다. 산정의 차가운 샘물을 마시면 간절한 마음이 먼저 목젖을 적셨고 구상나무에 눈이 가득 내리면 눈밭에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술잔을 나누던 친구가 생각났다. 그를 잃고 여느 짐승들처럼 겨울잠에 들고 싶었고 스스로도 잊고 혹독한 바람에도 깨어나지 않는 오랜 침묵이 되고 싶었다. 무심한 계절이 숱하게 지나가고 저물어 가는 산들의 어둠 사이로 그와 함께 다녔던 길 하나가 살아남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홀로 빛나는 것들에는 언제나 슬픔이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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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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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이야기1 -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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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이야기1- 그리움
그 옛날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들어왔다. 그들은 자신의 깊은 어둠을 산에 풀었고 산은 그들의 어둠을 품어주었다. 스스로 고립된 만큼의 세월이 지리산의 그리움이 되었다. 그리움은 해마다 수수꽃다리며 때죽나무 같은 꽃으로 무리지어 피어났다. 그리하여 지리산 어느 산길에서 동자꽃 한 송이를 만나도 우리는 그 아름다움의 탄식 뒤에 숨어있는 오랜 그리움을 읽어내야 한다. 손바닥만 한 논배미라도 얻기 위해 함박꽃 다 지고 서리 내리도록 축대를 쌓고 계단처럼 논을 올렸다. 초승달 같은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아슬아슬한 계절들을 그렇게 건너고 누군가가 또 들어오고 그렇게 또 시간이 흐르고 그들은 잃어버린 시간과 그리움을 데리고 말없이 살았다. 외로울 때면 산이 먼저 푸른 대답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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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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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의신 옛길’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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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의신 옛길’을 가다
박 두 규 (시인)
지리산은 많은 길들을 품고 있다. 지금은 탐방로라고 하는 이름으로 등산객들에게 허용한 길만을 다니게 하고 있지만 지리산엔 아직도 지역민들이 고로쇠를 채취하러 다니는 길이 있고 약초꾼들이 다니는 길, 지능선을 가로질러 옆 마을로 가는 길까지 다 살아있다. 그리고 옛적부터 장꾼들이 주능선을 넘나들던 계곡길이나 빨치산들이 다녔던 지능선을 가로지르는 길들도 이어지고 끊어지면서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 모든 산길들은 산의 규모나 위치에 따라 사정은 조금씩 달랐겠지만 크게 보면 산은 옛사람들에겐 삶터였고 생활의 현장이었고 일상의 길이었다.
이번에 다녀온 지리산 길도 옛 사람들에게는 일상생활 속의 길이었던 일명 ‘서산대사 길’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의신 옛길’이다. 물론 지금은 묻혀 진 길이고 의신 사람들은 건너편의 포장도로로 차를 타고 다닌다. 지리산 주능선에서 보면 의신 마을은 벽소령이나 선비샘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능선의 끝자락에 위치한 마을이다. 역으로 말하면 의신에서 빗점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벽소령이 나오고 능선을 따라 올라가면 덕평봉의 선비샘에 이른다. 말하자면 의신마을은 지리산 안 자락에 위치해 있는 세속의 끝점이면서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는 시작점인 것이다.
‘의신 옛길’은 그야말로 옛날에는 화개에서부터 시작한 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화개는 섬진강 가에 위치해 있으면서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초입이기 때문이다. 화개에는 지금도 화개장터가 있지만 과거 섬진강 하류에 있던 화개포구의 오일장은 해방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5대 시장중 하나로 전국의 어느 시장보다 많은 사람들이 붐볐던 곳이다. 육로로는 구례, 하동 지역에서 곡식들이 들어오고, 해로로는 여수, 광양, 삼천포, 충무, 거제 등에서 황포돛배들이 수산물을 가득 싣고 왔으며 보부상들은 전북 남원지역이나 경남 함양지역으로부터 지리산을 넘어왔다 하니 화개장의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의신 사람들은 이 화개장의 저자거리에 나와야 비로소 세상을 만나게 되고 장이 끝나면 다시 지리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의신 옛길’은 서산대사가 수행했다는 원통암으로 가는 길이기도 해서 ‘서산대사 길’이라고도 불린다. 화개에서 지리산을 향해 화개천을 따라 걷다보면 쌍계사가 나오는데, 지금 그 길은 아름드리 벚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어서 봄이면 상춘객들과 그 차량으로 몸살을 앓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서산대사가 걷던 당시만 해도 오솔길이었을 그 길옆에는 은어 떼가 유영하는 청정한 화개천이 흐르고 호젓한 길가에는 많은 들꽃들이 피어 있었을 것이다.
쌍계사를 지나 한참을 더 지리산 안으로 들어가면 신흥이라는 마을에 이르고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지금의 ‘의신 옛길’이 시작된다. 여기서 의신으로 가려면 의신계곡을 따라 포장도로로 올라가는데 ‘의신 옛길’은 의신계곡 건너 반대쪽에 있는 4.2km의 산길을 말한다. 지금은 이 길을 걷는 의신마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말 그대로 ‘의신 옛길’이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굴곡진 이 길을 걷자면 계곡의 물소리만 따라올 뿐 숲속의 적막감에 홀로 놓여 마음이 가라앉고 스스로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지리산의 깊고 험한 산중에 홀로 남은 외로움이나 두려움 같은 느낌이 아닌, 가볍고 고요하며 차분한 마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는 평온하고 안정된 상태의 그런 느낌으로 걸을 수 있어서 좋다.
나는 서산대사나 된 것처럼 2km 정도를 그런 마음이 되어 걸었다. 이어서 살짝 언덕진 고개를 넘으니 서산대사의 ‘의자 바위’가 나왔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의신사의 범종을 가져가려 하자 도술을 부려 돌 의자로 바꾸어 놓았다는 설화를 가지고 있는 바위다. 우리 주변의 많은 설화들은 대부분 그곳 민중들의 어떤 염원이 담겨있다. 그런데 왜 굳이 ‘의자’였을까. 물론 잠시 편하게 쉬어가자는 의미도 있겠지만 ‘서산대사의 의자’라는 점에서 보면 단순히 쉼터의 의미만을 담은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의자는 민초들이 아무 때나 쉽게 앉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며 그들의 문화와는 거리가 먼 물건이다. 보통은 존경할만한 지체 높으신 어른이 앉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돌 의자는 서산대사께서 민중들을 높이 보고 이 길을 다니는 민초들이 잠시 앉아 쉬면서 미천한 신분이지만 자기 스스로를 귀하고 높게 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天上天下唯我獨尊)을 주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미천한(?) 나는 서산대사를 떠올리며 한참이나 의자바위에 앉아 쉬었다.
이렇게 2시간 정도를 걸으면 의신 마을이 보인다. 나는 의신마을에 들어가 점심을 먹기 위해 두리번거리며 식당을 찾았으나 겨울 초입이라서 그런지 밥 먹을 곳이 없었다. 그때 작은 가게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곳의 한 귀퉁이 누렇게 변색된 종이에 ‘식사 됩니다’라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점심을 먹으며 원통사로 가는 길도 물어볼 겸 들어가니 웬 사내가 감을 깎고 있었다. 수염을 기르고 있었지만 작은 키에 다부진 체격이 60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주방에 있었는데 식사는 김치찌개만 된다고 하여 시키니 그야말로 평소 집에서 먹는 집밥 식단이 펼쳐졌다. 봄에 채취한 듯한 산나물과 함께 김치찌개가 한 냄비 나왔는데 그 새콤달콤한 맛이 제법이었다. 그 부부도 마침 점심을 먹으려는 참이었는지 내 옆에 나와 똑같은 상차림으로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나는 외지로 일보러 나갔다 돌아온 그 집 식구나 된 것처럼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한 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밥을 먹고 나니 12시 30분이었는데 쌍계사로 내려가는 버스 시간을 물으니 4시 20분이라고 했다. 무려 4시간의 시간이 있는데 원통사를 다녀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여기에서 1km 정도를 더 덕평봉 쪽으로 올라가야 서산대사의 수행처였다는 원통암이 나온다고 했다.
원통암으로 가는 길은 본격적으로 지리산을 오르는 것이어서 의신옛길보다는 가파른 길이고 조금 전에 밥을 먹어서 그런지 힘이 들었다. 50분 정도를 걸어 올라가니 원통암 문 앞에 이르렀는데 그곳에는 ‘서산선문西山禪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문고리 옆에는 조그마하게 ‘나는 누구인가’라고 쓰여 있었다. 서산대사와 같은 고승대덕들의 수행처였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암주의 의중이 읽혀졌다. 문을 열고 들어섰으나 인기척은 없었다. 지금껏 혼자서 숲길을 걸어 올라오며 그 정적을 충분히 느꼈는데 이 문의 안과 밖은 그 정적에 있어서 어떤 차이도 없이 고요 그 자체였다. 도량은 법당 끝의 채마밭까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서 이곳에 있는 수행자의 마음가짐을 짐작하게 했는데 앞마당에 서보니 멀리 아련히 보이는 섬진강의 S자 굴곡이 오랜 그리움처럼 걸려 있었다.
나는 헛기침도 하며 인기척을 내보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오지 않았다. 혹시 참선 중은 아닌지, 아무도 없는지 확인하려다가 생각을 바로 접었다. 서산대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 툇마루에 따뜻한 햇볕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래, 스님을 만나 멋쩍은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는 혼자서 저 툇마루에 앉아 지리산의 능선들과 아스라이 보이는 섬진강을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따뜻한 햇볕을 정면으로 받으며 툇마루에 앉았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니 온몸이 섬세하게 깨어나는 듯했다. 귀밑머리를 스치는 여린 바람결이며 청량한 숲 내음이 온 몸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었는데 그것이 그냥 너무 편했고 그 느낌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30분 정도를 앉아 있었으나 간간히 풍경소리가 들렸을 뿐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님도 공양보살도 없는 텅 빈 암자에서 나는 홀로 있는 기쁨을 잠시 느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혼자서 참으로 호젓한 시간이었다. 아니, 아니다. 혼자는 아니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따뜻한 어머니의 품 같은 지리산에 안겨 자애로운 눈길을 종일토록 받았으니 어찌 혼자였겠는가. 내 오랜 어머니와 함께 한 하루였다. <끝>
-빗점골 단풍/ 김인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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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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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고향, 나의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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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온 편지 1
아버지의 고향, 나의 지리산
- 「지리산에서온 편지」 연재를 시작하며
박 두 규 (시인)
내가 지리산에 발을 처음 디딘 것은 1964년 국민학교 1학년 어느 겨울이다. 그때만 해도 전북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제사를 모시러 가는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의 고향인 전남 구례군 산동의 어느 마을을 가게 되었다. 아침밥을 먹고 나선 길인데도 포플러 가로수가 늘어선 먼지 풀풀 나는 신작로를 달려 몇 번이나 완행버스를 갈아타며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남원에 닿았던 것 같다. 남원에서 산동을 가려면 지리산의 서북 능선자락을 따라 밤재를 넘어야하는데 겨울이고 어두워지자 눈길이 험하다고 노선버스가 끊어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망설임도 없이 이른 저녁으로 돼지국밥 한 그릇을 먹고 걸어가자고 했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엔 늘 걸어서 밤재를 넘었기에 너무도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던 것 같다. 나는 겨우 차 한 대가 다닐만한 벼랑끝 길을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걸었다. 남원과 구례의 경계라고 할 수 있는 밤재 고갯마루에 이르렀을 즈음 주변이 어두워지고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갈수록 어둠이 더 짙어지고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쳐왔다. 내가 추워서 못가겠다고 하면 아버지는 긴 옷자락 품으로 나를 감싸고 꼭 안아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 아버지의 그 따뜻한 품을 잊을 수 없다. 밖은 쌩쌩 눈보라가 몰아치건만 아버지의 품은 따뜻한 방 안처럼 아늑했다. 내가 ‘아버지 여기가 어디야?’ 라고 물으면 아버지는 ‘지리산이야’ 라고만 대답했다. 한참을 걷다가 또 ‘여기가 어디야?’ 물으면 ‘지리산이야’ 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결국 내가 더 걸을 수 없는 한계에 왔을 때 아버지는 나를 업고 자신의 겉옷을 덮어씌운 채 걸었다. 나는 아버지의 등 뒤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음메~ ’하는 소 울음소리에 눈을 뜨니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린 아버지의 고향집에 이르렀던 것 같다. 등에서 내려 아버지 손을 잡고 눈 덮인 마당에 발자국을 만들며 집으로 들어서자 모두가 반겨주었다. 제사는 잔칫날이나 다름없어서 백석의 시 「여우난골족(族)」처럼 온 가족 친지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이렇게 처음으로 지리산을 만났고 지리산에 묻혀있는 아버지의 고향집을 걸어서 갔다.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 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넛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동이, 육십 리라고 해서 파랗게 보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던 말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동이, 작은 홍동이, 배나무 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촌, 삼촌 엄매, 사춘 누이, 사춘 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볶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 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 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 가는 집 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랫목싸움 자리 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서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로 샛문 틈으로 장지문 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여우난골족(族) / 백석)
족(族)은 가족 친지들을 말하고 ‘여우난골’은 여우가 나온다는 곳이니 얼마나 궁벽한 곳인지 알만하다. 이 시는 명절날 여우난골 부근에 사는 일가친척들이 큰집에 모여 하루를 보내는 모습을 어린 아이의 눈을 통해 담아내고 있다. 아버지의 고향처럼 훈훈한 정취와 일가친척의 넉넉한 인정, 풍요로운 가족 공동체의 모습을 담고 있어서 나는 아버지 따라 지리산자락을 넘었던 일을 떠올리면 반드시 이 시가 생각난다.
아버지 고향집은 지금 생각하면 지리산 서북능선에 있는 만복대에서 산동으로 내려오는 지능선의 끝자락에 있는 골짝 마을이었던 것 같다. 1964년 당시엔 너무도 깊은 지리산 산골마을이었다. 하루 종일 걸려서 가야하는 험한 노정인데도 어린 아들을 지리산 고향집에 꼭 데리고 가고 싶었던 아비의 마음을 이제는 알 것도 같다.
그 뒤로 나는 대학생이 되어 지리산을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선배들을 따라 MT 때 노고단에 올랐고 그때만 해도 등산화도 배낭도 없이 낡은 운동화에 기타를 들고 박스에 먹을거리를 싸매어 철없이 올라 다녔다. 그러다 졸업 후 교사가 되어 아버지의 고향 마을이 있는 구례에 둥지를 틀게 되었고 월급이라는 것을 받으면서부터 그렇게 갖고 싶었던 등산화와 버너, 코펠을 장만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2인용 텐트까지 구입해 야영을 하며 제대로 된 등산이라는 걸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지리산에 깊숙이 빠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엔 지리산에 관련된 책은 거의 전무 상태였다. 월간지 「산」이나 산행 안내서인 「지리산」이 있었기는 하지만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산행 안내 정도가 아니라 지리산의 역사와 문학이었다. 그래도 접할 수 있는 문학이라고는 ‘빨치산’에 관한 소설이나 실록 등이었다. 장편소설로는 이병주의 「지리산」이나 이태의 「남부군」,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 등이었고 실록으로는 「남도부」, 「정순덕」 등이 당시에 읽을 수 있었던 지리산 이야기였다. 참으로 아픈 역사였다. 그렇게 책을 읽으며 혼자서 지리산의 모든 등산로를 섭렵했을 무렵 산행 파트너가 생겨 이후로는 주로 비등산로를 함께 다녔다. 그 친구나 나나 갓 문단에 등단한 시인이었고 무엇보다 지리산에 목말라 있던 우리는 매주 지리산에 올랐다. 당시만 해도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생기기 전후여서 비등산로에 대한 통제가 없을 때였다. 그래서 우리는 오만분의 일 지도인 군사작전용 지도와 나침판을(GPS가 없을 때여서) 가지고 다니며 지리산 어느 곳이나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산을 다니며 오늘에 이른 나에게 지리산은 아버지이고 스승이며 고락을 같이 하는 벗이고 사랑스러운 연인이다. 그리고 지리산은 오랜 옛날부터 갈 곳 없는 모든 사람들을 품어준 어머니나 고향 같은 곳이었다.
몰락한 백제 시절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추쇄꾼들을 피해 고향과 사람들을 등지고 지리산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고, 일상의 저자거리를 살 수 없는 사연을 가진 가난한 사람들이 가족을 데리고 들어왔으며, 조국의 해방을 꿈꾸며 겨울산을 헤매던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자본의 횡포로 인해 소외된 약자들이 도시로부터 내려온다. 그들은 자신의 깊은 어둠을 산에 풀었고 지리산은 그들의 어둠을 품어주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고립된 세월만큼 지리산의 그리움이 되어갔다. 그 그리움은 해마다 수수꽃다리며 때죽나무 같은 꽃으로 무리지어 피어났을 것이니, 지리산 어느 산길에서 동자꽃 한 송이를 만나도 우리는 그 아름다움의 탄식 뒤에 숨어있는 오랜 그리움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은 슬픔만이 아니라 얼마나 큰 生의 기쁨인가를 눈치 챌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이 흐르고, 흐르는 시간 중에 우리가 우리를 잃어버리고 있는 동안에도 지리산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늘 그곳에 있다. 지금도 지리산은 우리가 살면서 잃어버린, 역사 속의 시간과 그리움을 데리고 늘 그곳에 말없이 혼자 있다. 하지만 언제나 외로운 건 우리다. 그리고 우리가 흐르는 세월 속에 부표처럼 흔들리며 외로울 때면, 지리산은 늘 푸른 대답을 먼저 보내온다. 다만 우리가 그 오랜 침묵의 답변을 읽어내지 못할 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산처럼 단 하루도 스스로 침묵해보지 못했고, 단 한 번도 지리산의 외로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처음 지리산에 발을 딛었던 때의 그 젊은 아버지보다 한참 더 나이를 먹었지만 아직도 지리산만 오르면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설렌다.
달궁계곡 수달래(사진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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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두규(朴斗圭)
❏ 약력: 시인. 1985년『남민시(南民詩)』창립동인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1992년『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사과꽃 편지』,『당몰샘』,『숲에 들다』,『두텁나루숲, 그대』,『가여운 나를 위로하다』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生을 버티게 하는 문장들』,『지리산, 고라니에게 길을 묻다』등이 있다. 현재『한국작가회의』부이사장,『생명평화결사』운영위원장, 문화신문『지리산 人』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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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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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라진 하늘 아래 첫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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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에서 온 편지
지금은 사라진 하늘 아래 첫 동네
박 두 규(본지 편집인)
지리산 북서면 노고단 뒷자락에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심원마을이 있었다. 지금은 뱀사골 초입인 반선마을에서 노고단 성삼재로 해서 구례로 넘어가는 도로로 갈 수 있지만 오래 전에는 이 반선마을에서 계곡을 따라 노고단 쪽으로 한참을 올라가야 심원마을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참으로 궁벽한 곳이어서 집이 서너 채밖에 없었다. 하룻밤을 청하면 자연스럽게 민박이 되었는데 돈 받는 걸 어색해 하며 미안해 할 정도였다. 사람들의 출입이 거의 없는 골짜기였다. 처음에는 약초꾼들이 약초를 채취하며 임시로 거처하다가 겨울이 되면 철수하곤 하던 곳이었는데 차츰 나름의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와 자리 잡게 된 곳이었다.
나는 겨울 등반을 할 때는 피아골로 해서 반야봉에 올라 심원으로 내려가곤 했는데 그 쪽이 지리산 북사면이어서 눈이 녹지 않고 많이 쌓여 있기 때문에 그나마 구례에서는 겨울 지리산의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등산로였기 때문이다(지금은 폐쇄되어 갈 수 없다). 그 때 심원에 가면 묵는 곳이 민선생 댁이었다(그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그 삶을 존중하는 의미로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당시 민선생님은 60대 초로의 나이였는데 본디 강원도 출신이라고 했다. 젊은 시절에는 김대중씨가 강원도에서 활동할 때 그 밑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도 군사정권의 엄혹한 시절을 보내며 이런저런 세파에 휘둘리다가 어찌어찌하여 이곳까지 들어와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창식이라는 이름의 나와 동갑인 아들이 하나 있었다. 당시 우리는 30대 중후반 무렵이었는데 그는 정신지체가 있어서 초등학생 수준의 나이에 머물러 있었다. 작은 키에 볼살이 붙어 있어 어려 보였으나 수염이 까칠까칠하게 돋아 나이를 숨길 수는 없었다. 나는 참으로 순진무구한 그와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심원마을을 갈 때면 반드시 챙기는 것이 있었다. 창식이에게 줄 두툼한 사탕 봉지를 맨 먼저 챙기고 민선생님에게 드릴 미역이며 말린 홍합, 새우 등을 바리바리 싸서 가져가곤 했다. 창식이는 내가 가면 반가움의 첫인사가 ‘사탕 줘!’였다. 그리고 심원은 산중인데다 당시는 차도 없어서 저자거리에 나오기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민선생님에게는 바다에서 나는 건어물 같은 것이 최고의 선물이었다.
창식이와 나는 아궁이에 같이 앉아 불을 때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주로 그가 궁금해 하는 것은 바깥 세상에 대한 이야기였다. 도시의 목욕탕 이야기며 백화점 이야기 등을 하면 귀가 쫑긋해져 들었고, 창식이를 놀리려고 도시의 아가씨들 이야기를 하면 그저 평범한 이야기인데도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하곤 했다. 창식이는 군불을 듬뿍 땐 후 꼭 내 방에 와서 같이 잤는데 사람이 그리웠는지 수염이 거친 얼굴을 내 볼에 비비며 잠들곤 했다. 창식이의 꿈은 부산에 한번 가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부산을 다녀온 듯 했는데 그 기억 하나가 지금껏 바깥세상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끈이었던 것이다.
참으로 내가 본 가장 순수한 영혼 하나가 그 깊은 심원마을에 있었다. 그리고 그 맑은 영혼이 그 나이토록 꿈꾸어 온 것이 부산에 한번 다녀오는 것이라니. 그래, 어쩌면 그것이 인생인 지도 모른다. 평생 부산에 한번 다녀오는 그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그 간절함이 너무 감동적이고 아름다웠다. 사는 일이 저리도 단순한 것인데, 저리도 소박한 것인데 우리는 욕망에 휘둘려 온갖 걱정과 두려움을 이고지고 살며 좌절하고 절망하며 슬퍼하는지, 그러구러 나이를 먹다 문득 돌아보면 찰나의 한 생인 것을. 인생을 걸만한 간절함도 없이 이런저런 손익계산이나 하며 늙어가는 것인가.
내 머릿속에는 지금도 창식이네 집이 있던 심원의 사계절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나무들이 일제히 연초록 새 잎을 올려 만드는 젊고 푸른 세상, 무성한 녹음의 그늘을 끊임없이 흐르는 힘찬 물소리의 벅찬 생명력, 붉게 물든 환희의 시간들, 순백의 고요에 묻혀 끝없이 깊어가는 구도자의 풍모, 그렇게 지능선의 봉우리들이 첩첩이 이어져 주능선으로 벋어 있는 심원의 지리산은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구례에서 천은사를 지나 성삼재에 이르고, 재를 넘어 심원을 거쳐 뱀사골에 이르는, 지리산을 남북으로 횡단하는 도로가 생기면서 심원은 관광지가 되어 갔다. 번듯한 숙박시설이 생기고 산천어 횟집에 노래방까지 들어서는 어느 즈음 심원을 찾았을 때 창식이네는 이미 어디론가 떠나고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 창식이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부산으로 갔을까. 아니면 또 다른 하늘아래 첫 동네를 찾아 갔을까.
마을에 관광객과 피서객들이 붐비기 시작하면서 심원의 수려한 경관은 훼손되어 갔고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자 국립공원 관리공단과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이나 ‘지리산 사람들’ 같은 환경단체들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사실 심원마을은 지리산 국립공원 지역의 깊은 곳에 있어서 현행법상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마을이었다. 하지만 약초꾼들의 임시 거처로 사용될 때만 해도 큰 문제가 없었으나 지금에 와서 지리산 깊은 곳에 관광지와 같은 마을이 형성되고 갈수록 도시형으로 발전한다면 심각한 문제임에 틀림없었다. 해가 바뀔수록 문제는 더 심각해질 것이니 지금이라도 어떤 조치가 필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국립공원 관리공단과 시민단체들의 오랜 노력 끝에 정착한 주민들을 설득하고 보상하며 이주시키기에 이르렀고 현재는 마을이 완전히 폐쇄되고 다시 자연으로 복구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끝없는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 거대한 바위나 산과 바다 또한 끊임없이 그 안과 밖에서 변화의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행성들과 우주 자체도 쉼 없이 변화하고 있으니 변화하는 질서 속에서 예외인 것이 어디 있으랴. 작은 씨앗 하나가 집채만한 느티나무로 변하고 또 언젠가는 소멸하는 것이니 사람의 나고 죽음 또한 그렇지 않은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인생이 무상하다는 말이 오히려 무색하다. 이러한 진리를 나의 현실로 조금만 당겨보면 찰나의 시간 속에서 나는 지금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질투하고 분노하고 평생 돈을 쫒아 다니며 마감하는 인생이 삶의 정답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리산의 심원이라는 공간은 나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다. 조금 더 세월이 흐르면 언제 이 곳에 마을이 있었으며 순진무구한 노총각 창식이가 군불을 때던 곳이라고 하겠는가. 우리네 삶도 그러할 것이다. 지금 현재야말로 아름다운 추억인 것이지 먼 훗날 누가 있어 나를 호명하며 기억할 것인가. 이 아름다운 세상, 기적 같은 삶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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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