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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지리산 편지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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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무장등不無長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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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온 편지 9
불무장등不無長嶝
불무의 꽃들
지리산의 8월이 오면 오르고 싶은 곳이 불무장등 능선이다. 숲은 무성하게 우거지고 숲의 오솔길엔 여기저기 여름 꽃들이 피어있을 것이다. 나는 꽃에 큰 관심 없이 산을 올라 다녔지만 불무장등을 다니던 어느 때부터 그 이름들이 궁금해졌다. 꽃이라기보다는 그 녀석들이 내 마음의 어느 구석을 침탈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가 마음에 새겨질 때면 이름부터 궁금해지는 것이 일상의 습習이어서 나는 그들의 이름을 찾아 불러주기 시작했다. 동자꽃, 솔나리, 수국, 꿩의다리, 비비추, 원추리...... 나는 평소 아름다움은 꽃이나 어떤 풍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행위,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오는 깊고 그윽한 어떤 느낌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산을 오르며 특히 지리산의 여름 산을 오르며 숲을 고요히 호흡해내는 작고 여린 꽃들의 순결한 숨소리를 들었던 것일까. 그 존재 자체부터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인간의 어떤 한계점에 있는 것이기도 해서 늘 막연한 슬픔으로 이어졌다. 그 무렵에 써졌던 시가 생각난다.
숲에 들어 비로소 나의 적막을 본다./ 저 가벼운 나비의 영혼은 숲의 적막을 날고/ 하얀 산수국, 그 고운 헛꽃이 내 적막 위에 핀다./ 기약한 세월도, 기다림이 다하는 날도 오기는 오는 걸까./ 이름도 없이 서 있던 층층나무, 때죽나무도 한꺼번에 슬퍼지던 날/ 그리운 얼굴 하나로 세상이 아득해지던 날/ 내 적막 위에 헛꽃 하나 피었다. (「헛꽃」전문)
불무장등의 이름
지리산 불무장등은 주능선의 삼도봉에서 화개 쪽으로 벋은 남쪽 능선인데 한자로는 不無長嶝이라고 쓰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그 설명도 각각이다. 불교와 관련한 설명은 ‘지리산은 문수보살의 일신인데 문수는 오로지 반야般若를 주관하며, 반야는 제불의 어머니(諸佛之母)이다.’ 라는 것에서 불모佛母가 불무不無로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불무장등 봉우리가 풀무 모양으로 생겨서 풀무잔등으로 불리다가 일제 때 국토의 우리말 지명을 한자화 시키는 과정에서 불무장등不無長嶝으로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무장등 능선을 올라가면 마지막에 주능선의 삼도봉에 이르는데 이 삼도봉도 본래는 날라리봉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그 형상이 낫날처럼 생겼다고 낫날봉인데 발음하기 쉽게 날라리봉으로 불리다가 한자화 과정에서 3개 도(전남, 경남, 전북)가 만나는 곳이니 삼도봉三道峰이라고 공식화 되어 지도에 올랐다.
하찮은 이름의 역사가 이렇듯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어디 있으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가를 따질 새도 없이 세월은 흐르고 흐르는 시간 중에 모든 것은 그렇게 변해간다. 우리 스스로도 늘 변하여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가 아니니 10대의 나와 50대의 내가 어찌 같은 ‘나’란 말인가. 위벽은 5일이면 바뀌고 피부는 한 달, 뼈의 골격조차도 3개월이면 모두 바뀌어 1년이면 몸속 원자의 98%가 바뀐다고 하니 사실상 고정된 ‘나’라는 실체는 없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오래된 기억만이 남아 세월을 왜곡할 뿐, 늘 새로워지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있을 뿐이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도계를 이루는 능선
불무장등 능선은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도계를 이루는 능선이다. 능선의 길을 오르다보면 발 한번 띄면 경상도요 또 한 발자국 옮기면 전라도일 때가 많다. 지금도 그렇지만 오래 전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동서 지역감정이 극에 있을 때 이 능선을 자주 올랐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왔다 갔다 도계의 경계를 지우며 이 능선을 오르면 마음의 지역 경계가 사라지는 듯도 하여 많은 위로를 받았던 것인데 한편으론 개인과 파당의 이익을 위해 남북으로 나뉜 나라를 다시 동서로 나누는 위정자들에 대한 분노가 증폭되기도 했었다.
내 주변에도 같이 NGO 활동을 했던 이들이 현실정치의 변화를 위해서라며 정가에 입문한 이들이 많이 있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는 것 같다. 물론 개인의 진정성이야 그대로 마음 속 어딘가에 있겠지만 일단 국회의원이 되었든 지방의원이 되었든 혹은 시장이 되었든 현실정치라는 것이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사람의 신념이라는 것도 수시로 변하는 일상 삶의 상황과 조건 속에서 원형으로 보존되어 그 신념에 의해 일상을 열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물며 정치에 있어서야 더 그렇지 않을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죽음을 담보로 그 신념을 지킨 자들도 없지 않았으니 희망이라는 단어도 빛을 잃지 않고 쓰이는 것 아니겠는가.
불무의 무덤들
하지만 내가 불무장등 능선을 오르며 가장 마음에 쓰였던 것은 죽음이었다. 이 능선에는 무슨 묘들이 그렇게 많은지 오르며 수시로 만나는 것이 무덤이었다. 누군가의 삶의 종지부들이 수없이 찍혀 있는 이 무덤들을 보며 숲의 살랑이는 무수한 이파리들만큼이나 많은 생령들의 부재를 떠올리곤 했다. 누군가는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라며 사는 것이 곧 죽어가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삶, 그 자체만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 안의 어딘가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또 애써 무시하려는 것도 아니지만, 늙고 병든다 해도 삶 그 자체에만 집중하면서 사는 것만이 그나마 스스로에게는 답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불무장등을 오르며 많은 여름의 꽃들과 무덤들을 보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무심하게 지나쳐가는 것이다.
-천마꽃 / 사진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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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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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지리산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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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지리산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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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이 깊은 문수골에 들어왔을 것이다. 나물만 먹고 살 순 없으니 손바닥만한 논배미라도 얻기 위해 함박꽃 지고 단풍잎이 붉게 물들 때까지 축대를 쌓고 계단처럼 논을 올렸을 것이다. 초승달 같은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아슬아슬한 계절을 건넜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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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사 등 뒤로 사람들의 발길이 없는 내원골을 한참 오르다 보면 서너 채의 빈집이 있다. 처사는 수년째 마당의 감꽃을 피우며 한 소식 기다리더니 어느 겨울머리에 나섰나 사립문조차 무너져 있다. 부엌문을 열면 낡은 찬장에 아직도 가지런히 놓여있는 숟가락과 젓가락이 슬프다. 먼지 수북한 망태기며 녹슨 호미도 그렇지만 방구들에 까지 올라온 잡초들의 인정머리가 또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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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종주등반을 하다보면 전남, 경남, 전북이 만난다는 삼도봉을 지나 ‘화개재’를 만나게 된다. ‘화개’는 저 아래 섬진강 가에 있는데 왜 이곳을 ‘화개재’라고 부르는지가 늘 궁금했었다. 하지만 오로지 두 다리만이 민초들의 교통수단이던 시절, 남원 쪽 마을의 장꾼들에게는 뱀사골을 올라 지리산 주능선을 넘어 목통골로 내려가는 길이 화개장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등짐 하나 들쳐 매고 꼭두새벽부터 뱀사골을 올라 주능선을 넘어야 화개를 가니 이 주능선의 ‘화개재’는 뱀사골에서 올라오는 남원 쪽 사람들이 불렀던 이름일 것이다. 이 재에 이르면 쉴 참에 담배 한대 말아 피고 화개장 까지 한달음에 내달았을 것이다. 걸쭉한 탁배기 한잔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장국밥이 생각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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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가다보면 가끔 ‘등산로 아님’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이것은 지정된 등산로 외에는 모두 사람이 다녀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져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다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다. 나무하러 다니고, 장 보러 다니고, 능선 너머 이웃동네를 넘나들던 길이고 삶의 일상 속에 있었던 길이다. 지금은 멧돼지 가족들이 다니고 노루가 가다말고 서서 잠깐 뒤돌아보는 길이 되었지만 아직도 다 살아있는 길이다. 다만 우리 스스로가 잃어버린 길이고 스스로 차단한 길이 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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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시루봉에 가면 외국인 산장이 있다. 80년대 후반 즈음이었을까. 그때만 해도 칠십이 넘은 산장지기 노인 한분이 있었다. 젊은 시절 외국인 부인을 지게에 지고 이 정상까지 올라왔다는 노인. 그 산장의 옆에는 물줄기를 막아 만든 풀장이 있다. 물줄기가 얼어버린 겨울이면 도끼로 얼음을 깨고 풀장의 물을 길어 저녁밥을 지었다고 한다. 멀리 노을이 지는 섬진강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직도 왕시루봉 정상에는 제국의 그늘이 가득하고 나는 그 그늘 아래서 점심으로 가져온 주먹밥을 베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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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전에는 외국인 산장이 노고단에 있었다. 풍토병 치료를 위해서 라고는 하지만 수십 채의 산장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그들이 올라와 쉴 때는 구례의 아낙네들이 보따리 짐을 싸들고 올라와 장이 섰다고 한다. 어린 함태식은 노고단에 올라 비키니 차림으로 햇볕을 쬐는 서양인들을 보았다고 했다. 한반도가 통째로 신음하던 그 일제식민지 시절의 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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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목은 장이 서던 곳이었다. 지리산 전체가 삼도를 잇는 길이었던 시절, 잠시 쉬던 장꾼들이 모여 서로의 물건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지금은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높은 산이 되어 하루를 쉬어가라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장터목은 장터목일 뿐이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다리가 굳어졌을 뿐 장터목은 지금도 장이 서고 싶다.
-반야봉 일출
-반야봉 철쭉
-지리산에서 보는 섬진강
-노고단에서 본 구례
<사진 :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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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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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온 편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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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온 편지 8
남부능선이 준 옐로카드
틈만 나면 지리산에 오르던 그 시절, 산에 갈 때마다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힘들게 산에 올라가봐야 도로 내려올 것인디 머하러 그렇게 산에 대니냐?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쌀이 나오는 것도 아닌디.” 나는 어머니께 무어라 할 말이 없어 그냥 “다녀올께요!” 하고 나오곤 했다. 에베레스트 최초 등반을 꿈꾸며 수없이 목숨을 걸고 산에 올랐던 조지 맬러리의 ‘왜 산에 가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간단했다. ‘거기에 산이 있으니까.(Because it is there)’였다.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답이다. 그런 그에게 ‘왜 사느냐’라고 물었다면 아마도 ‘목숨이 붙어 있으니까’라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사는 동안 모든 행위들에 이유나 의미를 부여하며 산다. 그 이유나 의미가 불분명하면 어떤 행동이든 망설이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행위가 ‘자신의 존재(에고)’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그것 때문에 자신의 감옥에 갇히게 되기도 한다. 어쩌면 죽는 날까지 자신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종신형을 사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인류사 속에 성인이라고 하는 분들이 적은 것은 그것을 말해준다. 성인들이야말로 자신의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경지에서 타자를 위해 사신 분들이 아니겠는가. ‘에고’ 없는 순수의식으로 산다는 것이 그런 것일 터이다. 조지 맬러리는 오로지 에베레스트에 오르겠다는 일념으로 살다보니 그 집중력에서 오는 어떤 순수성을 감지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거기에 산이 있으니까’라는 답변이 나왔을 것이다. 그것은 말장난이 아닌 일관된 신념의 단순성의 삶에서 나온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리산을 오르게 된 것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성을 지닌 빨치산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산에 오르고 또 오르다보니 정신과 육체 모두에 어떤 강한 에너지가 생겨났고 그로 인해 당시 처해 있던 개인적인 어려운 상황과 조건을 극복하고 삶의 의욕과 열정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때 자주 올랐던 곳이 남부능선의 지능선과 계곡들이었다. 지리산의 남부능선은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의 주능선 상에서 남쪽으로 내리벋은 긴 능선이다. 세석평전에서 시작하여 하동군에 이르는 능선으로 중간에 지능선들을 거느리고 있어 대성계곡과 단천계곡, 선유동계곡, 의신계곡 같은 지리산의 큰 계곡들을 형성하고 있고 그것들을 모두 품고 있는 지리산맥의 중요한 근간능선의 하나이다. 하지만 남부능선의 주능선 산행은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중간에 샘도 별로 없어 매우 지루한 등반로이다. 그렇다 보니 등산객들이 적어 길이 묵고 덤불이 우거졌으며 거미줄이 많아 더 불편하고 힘든 길이 되었다. 하지만 남부능선의 지능선과 골짜기들은 서로 잘 어울려 갈 때마다 새롭고 깊은 감동을 주었다.
어느 여름에 故 박배엽 시인과 함께 남부능선의 지능선에 있는 단천계곡을 타고 삼신봉에 올라 남부능선의 주능선을 따라 쌍계사로 내려오는 산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단천골은 현재 비등산로라서 다닐 수 없는 곳이지만 그 당시에도 7부 정도 오르면 길이 없어져서 나침반에 의지해 삼도봉을 향해 직선 구간을 치고 올라가야만 했었다. 어차피 길이 없어지면 스스로의 생각과 의지에 의해 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는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인생이라는 길을 걷게 된다. 그 길은 탐방로처럼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예측할 수 있는 길도 아니며 그저 나의 생각과 나의 의지에 따라 가고 있는 길일뿐이다. 그 생각을 이루려는 의지가 강하게 일어나는 순간 없던 길이 비로소 열리며 그 길이야말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오로지 나만의 길인 것이다. 물론 그것은 세상의 도덕률(야마)과 개인의 도덕률(니야마)이라는 바탕 위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야말로 세상을 제 홀로 사는 제멋대로의 길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단천골을 타고 남부 주능선의 삼신봉에 올랐고 하산을 위해 남부능선을 내려오는데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명의 청년을 만났다. 그런데 그들은 물병도 없이 알칼리성 음료 한 개를 달랑 들고 오는 것이다. 배낭은 매었지만 얼핏 보아도 산행 장비가 너무 허술하여 어디 가냐고 물으니 남부능선을 따라 세석평전까지가 오늘 산행이란다. 몇 마디 더 물어보니 산행 초짜들로 내 짐작으로는 그들의 산행이 좀 무리일 것 같았다.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해서 필요할 거라며 가지고 있던 물을 모두 내주었다. 그리고 삼신봉까지 가서 다시 생각해보고 세석까지 무리라고 생각하면 청학동으로 하산하라고 알려줬다. 삼신봉을 지나면 세석까지 가는 동안 하산할 길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들과 헤어지고 쌍계사로 내려가는 생불재(성불재, 상불재 등으로도 불린다) 삼거리에 이르렀는데 박배엽 시인이 여름해가 기니 바로 쌍계사로 내려가지 말고 능선을 더 타고 원강재를 지나 혜경골로 빠지자는 제안을 해왔다. 원강재로 가는 능선은 비등산로여서 길이 살아 있을지도 궁금하고 아직 안 가본 길이니 한번 가보자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산행과 체력에는 자신감이 있던 때라 원강재 쪽으로 길을 잡았다. 그렇게 한참을 가는데 허리까지 올라오는 무성하게 자란 길가의 풀에 묻혀 길이 잘 안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희미하던 길마저 사라져 순전히 감각으로 능선을 찾아 걷게 되었는데 마침내 해가 기울고 말았다. 렌턴을 꺼내 지도를 보니 옛길은 능선을 타고 원강재를 지나 혜경골로 내려가는 길이 나와 있긴 했으나 현재의 상황에서 그 길을 찾아 내려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캄캄한 밤, 길이 사라진 지리산의 능선 위, 비축한 물도 식량도 없이 지치고 허기진 상태였다.
우리는 상의한 끝에 등산로는 어차피 사라졌으니 능선은 그만 타고 지금 이곳에서 바로 하산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신촌마을 쯤에 나침판 지표를 맞추고 화살표 방향으로만 직진하기로 하고 능선을 벗어나 바로 하산을 시작했다. 없는 길을 가려니 무성한 가시덩굴지대를 만나 얼굴과 온몸을 긁히고 헤쳐 나가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 벼랑을 만나 우회해야 했고 물도 못 마시고 비 오듯 땀을 흘리며 탈진할 지경에 이르렀다. 배가 너무 고파 시계를 보니 10시가 넘고 있었다. 낮에 대학생들에게 물을 다 준 것이 무척 후회가 되었다. 물이 없으니 계곡을 찾아 내려가며 물소리가 들리기만을 고대했으나 쉽지 않았다. 없는 길을 헤쳐 나가자니 평소보다 3~4배 정도 더 시간이 걸리지 않았나 싶다. 도저히 더 갈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쉬어가려고 앉았는데 어디선가 쫄쫄거리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때 물 한 모금의 기쁨이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원효의 해골물을 알고 마신다 해도 이처럼 꿀맛이었을 것이다. 물줄기를 따라 넓은 계곡으로 나오자 등산로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온 길에 비하면 너무 편한 길이었다. 속도를 내어 신촌마을 근처로 내려오니 거의 자정이 다된 시간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산에 자주 다녀 생긴 자신감이 오만으로 넘어가는 즈음 지리산은 우리에게 자연 앞에서 겸허한 자세를 갖추라고 옐로카드를 꺼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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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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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빨치산 태동의 배경과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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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빨치산 태동의 배경과 몰락
지리산 파르티잔 이야기는 한반도 해방 국면의 정치적 상황과 민족사적 흐름, 그리고 국민적 정서를 정확히 인식하는 배경에서 다뤄져야 한다. 당시의 모든 항쟁적 사건들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진행된 것들이다.
해방 직전 일본의 패망이 짙어지던 1944년에 미국은 당시 막 시작되던 세계적 냉전체제 국면에서 한반도를 미국의 전초 기지화 하려는 계획을 진행하였다. 그래서 여론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 해방이 되면 어떤 체제의 국가가 건설되기를 희망하느냐는 질문에 자유민주주의국가 14%, 사회주의 국가 70%, 공산주의 국가 7%, 기타 9% 였다. 이에 미국은 해방 후 승전국의 입장에서 38도 선 남쪽으로 들어와 미군정을 시작했다. 북쪽은 소련이 직접 국가운영을 하지 않고 조력자의 입장에 있었던 반면 미국은 여론을 토대로 사회주의 국가 건립을 우려하여 군정으로 직접 남한을 통솔 운영했다.
그러면서 토지개혁과 일제 잔재 청산, 공평한 사회를 꿈꾸던 민족의 흐름을 역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시 조선공산당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46년에 대구철도노조가 깃발을 들고 대구 10월 항쟁이 일어난다. 10월 항쟁은 미군정 반대가 가장 큰 이유였다. 이후 10월 항쟁 수배자들은 산으로 들어가 야산대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파르티잔의 시작이라고 본다.
이후 미군정이 끝날 무렵 1948년 5.10 단선 단정에 반대하는 2.7 구국투쟁이 일어난다. 전국 총파업으로 진행되며 이때도 수배자들이 산으로 들어가며 야산대가 더욱 강화된다. 지역사령부를 두며 체계화 된다.
그리고 이어서 제주 4.3항쟁과 10.19 여순 항쟁이 일어난다.
-1948년 10월 여순항쟁 이후 김지회, 홍순석, 지창수 등이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 문수골로 들어옴. 48년 11월 이현상 지리산으로 투입
-1949년 야산대를 인민유격대로 재편성하여 토벌대와 전투.
-1950년 한국전쟁으로 8월에 인민유격대는 북한 정규군과 합세하여 작전을 펼침
-1951년 남부군 활동 전성기로 열차습격, 은행습격 등, 하지만 12월 들어 본격적인 토벌로
-1952년 토끼몰이식으로 대성골로 유인하여 박격포, 공군기 투입으로 빨치산 궤멸. 사살 300명, 포로 250명, 혹은 800여명이 죽었다고도 하는 등, 자료의 부정확
-1953년 7월 휴전협정 시 지리산 잔여 빨치산 언급 없음. 이현상 9월 사망
(이현상은 북으로 갈 수도 있었으나 스스로 지리산에 남음. 북에서 김일성의 권력투쟁으로 남노당 출신의 박헌영, 이승엽 등이 모두 처형 당함. 박현영은 여순때 병력노출 혐의 미군스파이로 몰려 죽음)
-1954년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 전남도당 박영발 사망으로 토벌 종료. 5월 정식 토벌대는 해산하고 지역에서 토벌 계속
-1955년 지리산 입산통제 해제
-1956년 43명 빨치산 생존 떠돌이
-1963년 11월 정순덕 총상 입고 체포
-지리산의 여명 / 사진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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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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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온 편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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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온 편지 6
선한 바람에 일렁이는 연두와 초록의 물결들
- 왕실봉 칠순 노인네 이야기
모처럼 지리산에 오르니 어린 나무 건 고목이건 모든 나무들이 새잎을 피워 올리고 있다. 온통 연둣빛 초록물결로 산이 일렁인다. 바람이 한번 훑고 지나가면 초록의 파도가 한차례 밀려오는 듯한 서늘함과 그 상큼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초록빛은 마음을 가장 편안하게 해주는 색깔이라고 하는데 초여름의 산에 오르면 이 초록의 신록에 묻혀 몸 안에 쌓여 있는 스트레스와 강박과 두려움 등 세속의 삶이 만든 정신적 생채기들이 모두 치유될 것만 같다.
사람들은 보통 몸의 건강을 위해 산을 많이 오른다. 그리고 몸이 건강하고 편해야 마음도 편안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요즘은 그 생각에도 많은 변화가 오고 있다. 몸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으며 오히려 마음을 잘 다스려 불치의 몸을 극복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선진의학에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정신적인 영역을 치료에 활용하고 있으며 인간의 영성까지 의학은 확대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예전에는 별 생각 없이 산행을 했으나 요즘은 산을 오르는 일은 몸과 마음과 영혼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합일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특히나 요즘과 같은 신록이 우거지기 시작하는 계절이면 아무리 바빠도 산행을 한다. 숲의 모든 생명들이 가장 활발하게 생명력을 발현하는 시기여서 그런지 신록에 묻힌 나도 그 기운에 합류하여 내면의 에너지가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살아있음’의 순수한 생명력을 깨인 의식을 통해 접할 수 있는 명상의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오랜만에 그렇게 왕시루봉에 올랐다. 지리산 왕시루봉 정상 바로 아래에 쯤에 가보면 외국인 선교사들의 산장이 있다. 말이 산장이지 지금은 오래되어 거의 폐허 상태이며 남장로교회 쪽 사람들이 주도하여 문화재 등록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외국인 선교사 산장의 문화재 등록은 사실 많은 생태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어 신중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
왕시루봉은 정상이 해발 1240m이니 이 산장들도 해발 1000m는 넘나들 것이다. 원래는 노고단에 있었는데(선교사 산장 터는 노고단 대피소 바로 옆자리에 있었으며 아직 그 흔적이 남아있다.) 한국전쟁 때 폭파되어 비슷한 고도의 이곳 왕시루봉 자락으로 옮겨와 다시 여러 채의 방갈로를 짓고 삼각형의 조그만 예배당도 만들고 지형을 다듬어 작은 둑을 쌓고 물줄기를 막아 간이 풀장까지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 풀장이 연못처럼 남아있다.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와 산장을 지은 것은 외국인들이 무더운 여름에 풍토병을 피하기 위해 에어컨 바람 정도의 적정 온도의 높이에 피서지로 지었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지리산 호랑이라는 함태식 선생께 들은 이야기인데 구례에 살던 자신이 10대 초반 때 여름에 노고단 외국인 산장에 가면(당시에는 노고단을 동네 뒷산 오르듯 쉽게 올라 다녔다 한다) 놀랄만한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우선 구례 사람들이 노고단 산장의 외국인 선교사 가족들에게 팔려고 나물이며 과일 등 다양한 먹을거리와 잡화를 이고 지고 가져와 작은 장이 섰다고 한다. 그리고 이 높은 노고단 산중에 발가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비키니 차림의 금발머리 여자들이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니 그 일제 강점기 시절에 어린 소년의 눈에는 별천지 세상에 온 것만큼이나 놀랐을 것이다.
80년대 후반 즈음이었을까. 내가 왕시루봉의 외국인 선교사 산장에 갔을 때 칠십이 넘은 산장지기 노인 한분이 계셨다. 하얀 수염이 덥수룩한 70대 중후반의 노인이었는데 작은 키에 산에서 다져진 다부진 몸을 가진 노인이었다. 산 아래는 고로쇠 물을 받아내는 2월의 봄이 시작되었건만 이곳은 아직도 한 겨울이었다. 식수로 쓰는 작은 물줄기가 꽁꽁 얼어 아직 다 풀리지 않아서 노인은 도끼로 풀장의 얼음을 깨어 물을 길어와 밥을 짓는다고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산장지기 노인이지만 이런저런 말을 붙여보니 산전수전 다 겪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신 분이었다.
이 노인은 왕실봉 아랫동네인 토지면에 사시는 분이었는데 젊은 시절 토지에서 왕실봉 산장까지 지게에 외국인 선교사 부인들을 지고 올라왔다고 했다. 70년대만 해도 서울역에서 짐을 나르며 생계를 유지하는 지게꾼이나 리어카꾼들이 있었다는 말은 들었는데 사람을 지게에 올려 산을 올랐다는 말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지게에 널빤지를 올리고 방석을 깔아 편안히 앉도록 해서 종종 선교사 부인들을 산장까지 데려다 주었다고 했다. 돈벌이가 귀한 시절이라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마다하지 않고 그 일을 했다고 하는데 맨몸으로 오르기에도 버거운 해발 1240m의 왕실봉을 올랐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상당히 비만한 선교사 부인을 지게에 싣고 올라가는데 너무 무거워 중간에 쉬는 일이 잦았다. 점심 먹고 한참 후에 오르기 시작했으니 산장에 갔다가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올 일이 걱정이었다. 어디쯤에서 쉬어 가게 되었는데 부인을 내려놓고 나무 그늘에 앉아 담배 한참을 하면서 혼자 푸념처럼 ‘아이고 뭘 처먹었는지 디지게 무겁네. 서양 년들은 다 저런가?’ 라고 내뱉었단다. 담배를 다 피우자 저만치에 앉아서 쉬던 선교사 부인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지게에 올랐고 다른 때보다 늦게 산장에 도착하여 내려가다가 지는 해를 볼 것 같았다. 그런데 지게 값을 달라고 하자 같이 올라온 그 선교사 부인이 한국말로 ‘저 사람이 올라오면서 나한테 욕 했어요. 돈 주지 말아요.’ 그러지 않은가. 우선 한국말을 할 줄 알았다는 것에 깜짝 놀랐고 돈을 안 준다는 말에 사색이 되었다. 어디에 호소할 수도 없는 힘없는 백성이 되어 노인은 터덜터덜 어두워진 산을 내려왔다고 했다.
그는 멀리 노을이 지는 아름답고 슬픈 섬진강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직도 왕시루봉 정상에는 낡은 방갈로들이 산재해 제국의 그늘이 가득하다. 나는 그 그늘 아래서 점심으로 가져온 주먹밥을 베어 물었다. 간단한 점심을 끝내고 지리산의 능선들과 계곡들을 바라보며 그 일을 떠올리니 새삼스레 아메리카라는 나라가 생각 속에 자리 잡는다. 인류 역사 속에서 가장 찬란한 문명이라는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종주국 아메리카, 한때는 우리도 아메리카 드림이라는 환상 속에 살았었지. 과연 인간이라는 종이 만들어낸 삶의 정답이 그곳에 있는 걸까? 나이 60을 넘어 알만큼 알고 살만큼 살아온 인생들에게 물어본다면 아마도 ‘천만에’라고 입을 모을 것이다. 돈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에 매달려 돈보다 더 훌륭한 가치, 더 아름다운 가치를 모르고 인생을 다 소진한다면 그것 또한 우물 안의 개구리로 살다 가는 것하고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지는 해를 바라보며 산을 내려왔다. 저무는 빛을 받아 아스라이 보이는 섬진강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고 선한 바람에 연두 초록의 물결들이 일렁이고 있었다. 삶의 정답은 아마도 이 풍경의 어디쯤에 숨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끝>
-왕시루봉에서 바라본 섬진강 / 사진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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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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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운동』에 대한 작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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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운동』에 대한 작은 생각
‘지리산 운동’이라는 용어는 아직은 좀 낯설지만 지리산 권에 있는 많은 단체나 소모임, 그리고 개인의 다양한 영역의 사회 변혁적 활동과 삶들을 하나의 큰 지향으로 엮어낼 수 있는 ‘지리산 공동체’적인 용어로 자리 잡았으면 하는 바램에서 몇 마디 거들까 한다.
21세기에 들어서기 전까지 우리 사회 변혁운동은 크게는 군부독재라는 반정부 투쟁 속에서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을 통합한 전국 단위의 조직력을 가지고 명확한 하나의 전선에 복무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현실사회주의가 실패하면서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되고 동구권이 몰락하는 국면 속에서 변혁운동의 중심주체들이 흔들리면서 운동의 내용과 형식에도 많은 변화가 왔다.
이전(반정부 투쟁 당시)의 운동은 당장 눈앞의 위중한 현실(열사들과 동지들의 죽음 등) 속에서 오로지 현실을 타개해야 하는 절박함으로 스스로의 내면을 성찰할 여유도 없이 비민주, 반인권 반통일을 대상으로 한 투쟁의 현실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전국적 상황을 보면 집단적, 지역적, 인적 구성에 따라 전선이 형성되고 그 내용이 매우 다양해지면서 운동의 폭이 좁아지고 조직 이기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지리산권의 많은 단체와 소모임 또는 개인적 활동까지 포함해서 ‘지리산 운동’이라고 명명해본다면 그것은 지금까지의 여타운동과 크게 두 가지의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나는 넓게 보면 ‘대안적 삶 운동’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리산 권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제 단체나 모임의 구성원들은 지역 주민들도 있지만 귀농, 귀촌인들이 상당수에 이른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자본주의 문화에 염증을 느끼고 대안적인 새로운 삶을 찾아 도시에서 지리산 자락으로 삶터를 옮겨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이 관심을 갖는 운동영역은 환경, 생태, 생명, 평화, 공동체, 등의 문제의식을 바탕에 둔 대안문화, 대안문명 찾기라는 운동적 성격을 갖는다. 이것은 크게 보아 인간 소외나 인간성 상실이라는 자본 중심적 삶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이것이 ‘지리산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다양한 사업과 활동의 바탕에 자리 잡고 있는 문제의식의 공통분모라고 할 것이다.
근대 500년은 모든 삶이 자본으로 집중되는 과정으로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발전, 그리고 자본주의의 확장과 함께 진행되었다. 근대의 과정 속에서 추구해온 물질의 풍요와 생활의 편리 뒤에 숨어 있던 인간의 탐욕이 근대화라는 명제 속에서 자연의 순환 질서를 깨기 시작했고 그런 과정 속에서 자본주의는 인간의 ‘탐욕’이라는 것을 구체적 일상 속에서 일정부분 정당화시켜 주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인간의 심성이 피폐되고 사회적 가치관과 개인 삶의 목표는 선과 진실로부터 멀어졌으며 현대인들의 삶의 중심에는 물질이 자리 잡게 되고 사회생활은 보다 많은 물질을 얻기 위한 시스템으로 구조화되어 갔다. 이렇게 물질만능주의 사고가 사회에 만연되면서 생명경시와 함께 개인의 평화 또한 심하게 위협받게 되었다.
‘지리산 운동’은 이러한 사회적 문제의식 속에서 태동하였기 때문에 자본가치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인본가치 중심의 삶으로 돌아가자는 근본 운동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새로운 삶의 문화, 문명을 꿈꾸는 대안 운동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지리산 운동’의 또 다른 특징은 사회의 구조를 바르게 변혁하려면 ‘인간의 본래 심성을 되찾는 운동’과 함께 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조직이나 단체 모임들이 이 부분을 직접적으로 표출하고 있지는 않지만 본래 심성을 되찾는 노력을 통해 개인의식과 사회의식의 확장을 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사회의 변혁은 어렵다는 생각들이 많은 사업 속에 녹아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간디가 식민지 상황에서 벌인 사탸그라하(진리파지眞理把持) 운동이 그러했다. 간디는 자신이 바라는 진정한 해방은 영국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보다도 자신으로부터 해방(절대자유)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한 사회의 변혁은 식민지에서 벗어나고 제도가 바뀌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회와 사람들의 의식이 함께 확장되어야 진정한 변혁이라고 했다. 그리고 간디는 종교를 통해 확장된 개인과 사회의 의식을 토대로 비폭력 투쟁이라는 전대미문의 운동방식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이는 성찰과 수행을 통해 개인의 의식을 확장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의 단군시절에도 그러했다. 그 시절의 사회적 삶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로 성통공완性通功完이라는 말이 있다. 본성을 꿰뚫어 공덕을 완성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본래 심성을 되찾는 수행을 통해 개인의 의식을 확장시키고 사회적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뜻으로 해독이 가능하다.
성통공완이나 샤타그라하 모두가 개인의 자기완성과 사회적 실천을 하나로 인식하고 진행시킨 높은 의식의 사회적 삶이라고 생각한다. 자기완성의 노력과 사회적 실천이 병행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사회적 제도를 바르게 고치고 바르게 운용하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이 그만한 역량과 수준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지리산 운동’은 지금껏 우리 변혁운동사에서 특별히 거론된 적이 없는 ‘개인의 자기완성’이라는 측면을 사회적 실천운동과 동등한 무게로 병행시키는 운동이어야 하고 그래야만 ‘지리산 운동’다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개인의 의식을 확장시키는 것과 사회적 실천이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는 기존의 우리 사회운동 방식보다는 한 단계 진화된 운동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본의 문제를 자본의 관점과 방식으로 풀지 않고 모든 생명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며 순환할 때 진정한 평화가 있다는 자연 중심의 사유와 철학을 바탕에 두고 풀려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 현실에서 민주적 제도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리산 자체가 모든 생명의 집합체인 것처럼 그래야만 개인과 전체의식의 확장을 기대할 수 있고 그러한 토대에서의 사회적 실천이 올바른 사회변혁을 가져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박 두 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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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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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온 편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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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온 편지 5
내원골 박처사
내원골 박처사를 만난 것은 지리산을 열심히 타던 시절, 아마 30대 후반이거나 40대 초반 쯤이 아니었나 싶다. 계곡의 얼음이 녹아내리고 산 구석지의 지저분한 잔설들이 바닥을 드러내는 봄의 초입이었을 것이다. 어느 주말, 지도를 보며 코스를 잡았는데 쌍계사 뒤쪽으로 들어가 내원골을 타다가 불일폭포로 넘어가는 코스였다.
쌍계사 조금 못 미쳐 오른쪽으로 계곡을 따라 오르면 내원골로 들어서게 된다. 이 내원골을 계속 타고 오르면 내원재를 만나게 되고 내원재에서 왼쪽으로 능선을 타고 오르면 생불재 삼거리를 만난다. 세석평전에서 내려오는 남부능선의 끝자락에 있는 삼거리인데 세석에서 삼신봉을 거쳐 내려오는 길과 불일폭포에서 오는 길과 청학동에서 오는 길이 만나서 생불재 삼거리다. 하지만 사실은 사거리였다. 이 내원재에서 생불재 삼거리에 이르는 능선길이 있기 때문에 사거리가 맞다. 그런데 생불재에서 내원재를 거쳐 원강재, 혜경골로 내려가는 길이 묵어버린 것은 사람들이 모두 유명한 쌍계사나 불일폭포를 찾아오기 때문이고 토착 주민들이 늙고 수가 줄어 내원골은 들어갈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나는 내원재까지 올라갈 생각은 없었고 내원골를 타다가 왼쪽의 능선을 가로질러 바로 불일폭포의 옆 사면길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내원골로 들어서 한참을 걸었는데 얼마나 되었을까. 갑자기 계곡 왼편 위에 자리 잡은 허름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불일폭포로 가기 위해 계곡을 벗어나 지능선으로 길을 갈아타야 하는 지점이었다. 가까이 가니 낡고 초라한 집이었지만 두 채가 더 있었다. 집을 들여다보니 잡초가 무성한 마당가에 늙은 감나무 하나가 지금은 없는 집주인의 한 때를 상상하게 해준다. 부엌문을 열어보니 먼지가 수북한 낡은 찬장에 아직도 가지런히 놓여있는 젓가락들이 보였다. 거미줄과 함께 벽에 그대로 걸려있는 망태기며 녹슨 호미도 그렇지만 방구들에 까지 올라온 잡초들을 보니 사람이 백년을 산다 해도 저렇듯 흐르는 세월의 한 과정일 뿐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한 집을 보니 초라한 양철 지붕집이지만 집 주변이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어서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담 너머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툇마루에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고 턱수염이 길게 자란 웬 도인이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봄볕을 가득 받은 툇마루에 고적한 산중의 고요 그 자체가 되어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 기운이 도저하여 말 한마디 붙이려는 생각도 못하고 문밖에서 망설였다. 그러다가 그래도 인사라도 나누고 갈 요량으로 사립문 옆에 주저앉아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의 명상은 꽤 길었다. 깜박 잠을 잤어도 잤을만한 시간이 지나고나니 명상을 끝낸 듯 했다.
내가 조심스럽게 기척을 내고 인사를 하니 들어오라 한다. 가까이서 보니 간간히 섞인 흰머리에 수염은 길었지만 노인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마른 몸매에 기름기 없는 건조한 얼굴이었지만 눈빛이 맑고 강한 느낌의 이목구비가 반듯한 중년의 사내였다. 먼저 인사를 하니 그는 긴 머리를 뒤로 묶으며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느냐고 묻는다. 불일폭포를 가는 중이라고 했더니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불일폭포는 쌍계사 쪽으로 가면 되는데 왜 이 위험한 길을 타려는 거냐고 물어왔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질문과 너무 흡사했다. 나는 그가 명상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무슨 사연이 있어 살기 좋은 세상을 두고 왜 이런 궁벽한 곳까지 흘러들었는지를 묻고 싶었던 것이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을수록 오히려 그에 대한 의문이 점점 더 많아졌고 흥미로웠다. 그가 바로 박처사라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다시 한 번 찾아올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불일폭포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했다. 우선 경사가 심했고 그 경사면의 길이 매우 좁고 미끄러워 잘못하면 굴러 떨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경관은 참으로 비경이어서 최치원이 은거했다는 설화가 괜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날 항상 정면 아래에서 올려다보기만 했던 불일폭포를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그 길은 바로 능선에서 폭포의 위쪽으로 내려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그 뒤로 나는 배낭에 쌀 한 말이나 라면 한 박스 등을 넣어가지고 박처사를 찾아가곤 했다. 그러다 조금 친해지는 즈음에 나는 박처사를 구례로 불러 식사 대접을 하면서 술을 한 차례 먹게 되었는데 말수가 적던 그의 말이 봇물처럼 터지고 말았다. 평소 하던 대화는 주로 그가 수련하는 도道에 대한 것이나 약초에 대한 것, 지리산 구석구석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는데 그날은 자신이 살아온 과거 이야기였다. 우리는 오랜 친구나 되듯이 서로 깊어져 많은 술을 마셨다.
그 후 바쁜 세속의 날들이 지나가고 다시 겨울이 오려는 즈음 내원골의 그를 찾아갔는데 집이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원래부터 박처사의 물건이라고는 옷가지 몇 벌이 전부여서 절방처럼 소박한 살림이었는데 그것마저 깔끔하게 치워진 빈집이었다. 나는 박처사가 떠난 것을 직감하고 편지라도 한 장 남겨놓지 않았나 찾아봤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왜 말도 없이 떠났을까? 아니, 왜? 왜 떠났을까. 물론 지금도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이제 짐작할 수는 있다. 그는 아마도 나를 만나는 1년 동안 즐겁기도 했겠지만 자신의 가던 길을 멈추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잠시 멈추었던 그 길을 갔던 것뿐이다. 진속불이眞俗不二라고는 하지만 그는 아직 속俗에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진眞에 이른 것도 아니었을 것이니 나하고 어울리는 것이 스스로에게는 무척 큰 갈등이었을 것이다. 나는 겨울 초입에 그렇게 그를 잃고 허전한 마음으로 겨울을 맞았다.
그리고 그 겨울 어느 날 내원골을 찾았다. 골짜기의 침묵만큼이나 눈이 쌓여 있었다. 사람을 생각하는 일이 그리 겨운지 대숲에 쌓인 눈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후두둑 쏟아졌다. 볕 좋은 툇마루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깜박 졸았는데 잠 속의 깊은 골짜기에도 세속의 눈은 내리고 처사는 먼 길을 돌아와 토방에서 홀로 눈을 털고 있었다.
그 뒤에도 몇 번인가 내원골을 찾았지만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나도 언젠가부터 내원골에는 들지 않았고 그 후 지금껏 박처사의 소식조차 접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마도 그의 성품과 의지를 짐작하건데 이미 성통性通을 하고 진속불이眞俗不二의 경지에 이르러 세속의 저자거리를 활보하고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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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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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빨치산의 시작과 끝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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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빨치산의 시작과 끝
지리산 파르티잔 이야기는 한반도 해방 국면의 정치적 상황과 민족사적 흐름, 그리고 국민적 정서를 정확히 인식하는 배경에서 다뤄져야 한다. 당시의 모든 항쟁적 사건들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진행된 것들이다.
해방 직전 일본의 패망이 짙어지던 1944년에 미국은 당시 막 시작되던 세계적 냉전체제 국면에서 한반도를 미국의 전초 기지화 하려는 계획을 진행하였다. 그래서 여론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 해방이 되면 어떤 체제의 국가가 건설되기를 희망하느냐는 질문에 자유민주주의국가 14%, 사회주의 국가 70%, 공산주의 국가 7%, 기타 9% 였다. 이에 미국은 해방 후 승전국의 입장에서 38도 선 남쪽으로 들어와 미군정을 시작했다. 북쪽은 소련이 직접 국가운영을 하지 않고 조력자의 입장에 있었던 반면 미국은 여론을 토대로 사회주의 국가 건립을 우려하여 군정으로 직접 남한을 통솔 운영했다.
그러면서 토지개혁과 일제 잔재 청산, 공평한 사회를 꿈꾸던 민족의 흐름을 역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시 조선공산당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46년에 대구철도노조가 깃발을 들고 대구 10월 항쟁이 일어난다. 10월 항쟁은 미군정 반대가 가장 큰 이유였다. 이후 10월 항쟁 수배자들은 산으로 들어가 야산대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파르티잔의 시작이라고 본다.
이후 미군정이 끝날 무렵 1948년 5.10 단선 단정에 반대하는 2.7 구국투쟁이 일어난다. 전국 총파업으로 진행되며 이때도 수배자들이 산으로 들어가며 야산대가 더욱 강화된다. 지역사령부를 두며 체계화 된다.
그리고 이어서 제주 4.3항쟁과 10.19 여순 항쟁이 일어난다.
▶1948년 10월 여순항쟁 이후 김지회, 홍순석, 지창수 등이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 문수골로 들어옴. 48년 11월 이현상 지리산으로 투입
▶1949년 야산대를 인민유격대로 재편성하여 토벌대와 전투.
▶1950년 한국전쟁으로 8월에 인민유격대는 북한 정규군과 합세하여 작전을 펼침
▶1951년 남부군 활동 전성기로 열차습격, 은행습격 등, 하지만 12월 들어 본격적인 토벌로
▶1952년 토끼몰이식으로 대성골로 유인하여 박격포, 공군기 투입으로 빨치산 궤멸. 사살 300명, 포로 250명, 혹은 800여명이 죽었다고도 하는 등, 자료의 부정확
▶1953년 7월 휴전협정 시 지리산 잔여 빨치산 언급 없음. 이현상 9월 사망
(이현상은 북으로 갈 수도 있었으나 스스로 지리산에 남음. 북에서 김일성의 권력투쟁으로 남노당 출신의 박헌영, 이승엽 등이 모두 처형 당함. 박현영은 여순때 병력노출 혐의 미군스파이로 몰려 죽음)
▶1954년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 전남도당 박영발 사망으로 토벌 종료. 5월 정식 토벌대는 해산하고 지역에서 토벌 계속
▶1955년 지리산 입산통제 해제
▶1956년 43명 빨치산 생존 떠돌이
▶1963년 11월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 총상 입고 체포
-천왕봉 설경(사진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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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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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온 편지 4 - 문수골 문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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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온 편지 4
문수골 문수 이야기
그 옛날,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지리산 이 깊은 문수골에도 들어왔을 것이다. 문수보살님의 공덕 한 조각이라도 얻으려는 생각으로 왔겠나, 그저 저버린 목숨 하나 의지할 구석 찾으러 허위허위 들어왔겠지. 이 골짝에 겨우 몸은 숨겼으나 나물만 먹고 살 순 없으니, 손바닥만 한 논배미라도 얻기 위해 함박꽃 지고 단풍잎이 붉게 물들 때까지, 축대를 쌓고 그 계단 위에 삿갓배미 논두렁을 올렸을 것이다. 그러구러 초승달 같은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아슬아슬한 계절을 건넜을 것이다. 그러고도 또 한 세월이 지나 인공人共 때 지리산에는 오갈 데 없는 한 무리들이 들어오는데, 아래 이야기 시 한편은 그때 이후로 이야기이니, 세월은 덧없이 흘러간다 하나 사실은 숱한 사연들에 떠밀려 가는 세월이 아닌가 싶다.
문수골에 사는 문수어매는 문수암에 밥하러 다니는 공양보살인데, 인공 때 그 불그스름허던 단풍들 죄다 꼬실라지던 무렵, 구례군당이 문수골로 숨어들어오던 이첨저첨에 부모 잃고 거천헐 데가 마땅찮았다. 그러다 문수암 늦은목재 너머 피아골 평도리 아재집에 오가다가 심심찮게 얻어먹던 절밥이 인연되어, 엔간히 철들 무렵에 아예 문수암 공양보살로 들어서게 되었더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부처님 고봉밥 올리며 이삼십 년 세월이 봄 한철 산벚꽃처럼 훌쩍 넘어가고, 소쩍새 청승맞은 울음소리에 밤은 그토록 깊어만 갔는데, 싸락눈 가물가물 내리던 어느 겨울 초입에 중년의 사내 하나가 문수암에 굴러 들어왔단다. 그는 하루에 두서너 마디 하는 말없는 불목하니가 되어 절마당에 널부러진 계곡 물소리도 쓸어내고, 남향받이 툇마루 밑에 잘 마른 장작개비 부처님들 가지런히 쌓아놓기도 하더니, 주지스님 세상구경 나가신 날이면 법당에 들어가 독경소리도 한 짐씩 져 나르는 것이었다. 한참 세월이 그렇게 또 가더니 어느 날, 공양보살이 사십구재 지내는 손님들 맞아 부산을 떨다가, 달빛도 없는 밤에 집에 가려고 지난 초파일날 쓸던 연등 하나 꺼내어 불을 밝히는데, 비가 오려나 바람이 불고 날은 심난한데 마침 그 말수적은 불목하니가 앞장을 서드란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중얼거리며 뒤를 따르는데, 그날따라 웬 미친바람이 그렇게 불어 나무 자빠지는 소리가 우지끈 계곡을 진동하고, 가물거리던 불빛마저 꺼지고 마니 허투루 사는 인생일망정 어찌 사연 하나가 없을 소냐. 물가에 풀 뜯는 흰 소 몰고 집에 들어와 애가 들어섰으니, 석씨 가문의 부처님 씨가 분명하고 문수골 문수암에서 태어났으니 애 이름은 석문수가 되어, 문수암 공양보살은 늙으막에서야 문수어매가 되었던 것인데, 문수는 계곡 날망 기슭에 비집고 자리잡은 집구석에서 뒹굴뒹굴할 때나, 애기나뭇짐 매고 문수골을 내려올 때도 말 한마디 붙여볼 놈이 없어, 저 혼자서 마당에서 푸덕이는 씨암탉이나 옷깃을 스치는 산죽, 자꾸만 다가오는 산그늘에게 무어라 중얼거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문수는 그 뒤로도 무어라 중얼거리기만 할 뿐, 세상 뭇놈들이 내는 소리는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 문수란 놈 문수암 절마당에서 장작 패며 코밑수염 꺼칠꺼칠해진지가 벌써 오래건만, 이적지 문수골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나무 자빠지는 소리만 들으며, 한 번도 이 골짜기 떠날 생각을 안 하고 중얼거리기만 하니, 누가 있어 어찌 그 속내를 알 수 있을 것인가. (졸시 「문수골 문수 이야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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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골은 구례의 유명한 아흔 아홉 칸 집 운조루가 있는 오미리 뒷고랑 물길을 따라 지리산을 올라가면서 시작되는 깊은 골짜기이다. 한참을 오르다 보면 문수암으로 오르는 길에서 물길이 나눠진다. 문수암 뒤편 능선이 왕실봉 능선인데 이 능선을 가로질러 늦은목재를 넘으면 바로 피아골이 나온다. 나는 언젠가 친구하고 이 늦은목재를 넘으며 왜 이 고개 이름이 늦은목재일까 생각했었다. 그 친구의 생각이 그럴 듯 했는데, 그것은 그 옛날 이 피아골 평도리 사람들이 구례에서 장보고 화엄사 뒷산 넘어 밤재마을로 와서 문수골을 건너 이 재를 오르면 해가 떨어지는 늦은 시간에 이를 것이니 늦은목재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랬다. 지금은 사라지거나 묻힌 길이 되었지만 능선을 가로지르는 길들은 당시 민초들에게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일상의 길이었다.
지리산 뿐 아니라 모든 산은 옛사람들에게는 삶터였고 생활의 현장이었고 일상의 길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산의 품성을 배우며 자랐다. 조급하지 않으며 숱한 생명들이 조화를 이루고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스스로도 모르게 얻은 그 자비의 품성으로 서로 나누며 모든 생명을 모시고 함께 살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산에서 내려오기 시작했고 자동차와 함께 속도문화가 일반화되면서 산은 사람들의 일상에서 멀어졌다. 속도의 걸림돌이 되어 파괴되었고 구경거리가 되어 짓밟혔으며 오히려 산을 내려와야만 삶이 풍요로워지는 세상이 되면서 사람들은 산에서 얻은 본래의 품성을 잃어갔다. 그리고 사람들의 삶은 공격적으로 변하였으며 불신과 분노와 증오가 증폭된 일상을 스스로 살게 되었다.
또한 지리산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애달프고 서러운 목숨들의 역사를 안게 되었다. 지금도 수많은 백골들이 녹슬은 총열들과 함께 묻혀있고 아녀자와 어린아이들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묻혀있는 산이 지리산이다. 역사를 바르게 사는 일이 현실 속에서는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는 일이며, 뭇 생명들의 삶과 평화를 헌납해야 하는 일인지를 지리산을 오르내리며 비로소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지리산은 그동안 잃어온 산의 품성을 되찾게 해주는 산이기도 하다. 지리산은 모성의 산으로 잃어버린 사람들의 착한 마음, 착한 품성에 대한 기억을 되찾게 해주는 산이기도 하다. 우리 본연의 품성과 근원에 대한 그리움을 짐작하게 해주는 산이다. 우리가 이 그리움의 마음, 그 자비의 품성을 일상 속에서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지리산을 이야기해야 한다. 지리산은 이러한 새로운 우리의 삶의 가치를 내장한 소중한 산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이런 생각과 함께 지리산의 길을 열어준 친구가 있었다. 서둘러 이승의 길을 떠났지만 내 마음 속 오랜 벗, 지리산을 떠올릴 때면 어김없이 그가 함께 생각난다. 그 굳고 정하다는 갈매나무 같은 녀석, 윤동주의 시처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늘 괴로워했던 녀석,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사는 일의 전부라는 것을 깨우쳐준 나의 스승, 젊은 시절 쉼 없이 지리산을 함께 올랐던 그녀석이 오늘 따라 무척 보고 싶다.
-형제봉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능선(사진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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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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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마음 속 어머니,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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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마음 속 어머니, 지리산
산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스스로 고립된 만큼의 세월이
산의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해마다 수수꽃다리며
때죽나무 같은 꽃으로 무리지어 피어났다
그리하여 지리산 어느 산길에서
동자꽃 한 송이를 만나도
우리는 그 아름다움의 탄식 뒤에 숨어있는
오랜 그리움을 읽어내야 한다
-지리산 동자꽃 / 사진 김인호
지리산은 오랜 역사 속에서 우리를 품어온 산이다. 그 옛날 더 이상 산 아래 세상에서 버틸 수 없었던 사람들이 지리산으로 왔다. 절망의 끝에서 차마 버릴 수 없는 목숨 하나 이끌고 이 산에 들어왔다. 그들은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들어 스스로의 어둠을 풀었고 산은 그들의 어둠을 품어 주었다. 지금도 세상살이에 지치고 힘든 자들이 지리산에 온다. 세상사람 모두가 등을 돌려도 산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오랜 마음 속 어머니처럼 부르지 않아도 항상 먼저 따뜻한 말을 건네주고 품에 안아준다. 그 사무치는 그리움이 깊을 대로 깊어 산 빛 너울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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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지리산을 어머니의 산이라 부른다. 실제로 그 품이 넓어 3개 도에 걸쳐 있으며 14억 5천 6백만 평이라고 한다. 이 산 속에 나무며 짐승이며 꽃이며 벌레들 그 무수한 생명들이 하나로 어울려 있는 생명공동체가 지리산이다. 그리고 이 지리산 자락 골짜기마다 그곳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과 자본의 폭력과 병든 도시를 외면하고 귀촌한 사람들까지 하나의 지리산이 되어 잘 어울려 살고 있다. 그들은 산이 거느린 어머니의 품성을 배우고 숲의 모든 생명들과 하나로 어울려 산다. 인간의 이기적 산물인 자본의 풍요와 편리함에 묻히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있는 이런 이들이야말로‘지혜智慧로운 이인異人’이며 지이산智異山의 사람들이 아닌가. 지리산은 한자로는 지이산智異山으로 쓰고 지리산으로 읽는다.
지리산의‘지리’한자 표기는 智異, 智利, 知異, 地理, 地利, 地而 등 다양하지만 현재 쓰고 있는 지리산(智異山)이라는 이름은 쌍계사에 있는 국보 제47호 진감선사 대공탑에 보인다. 이 탑의 비문은 신라 정강왕 2년(887)에 최치원이 썼는데 '지리산(智異山)'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리고 고려시대의『삼국사기』나『삼국유사』, 조선시대에 편찬한『고려사』에도 다른 한자 표기와 함께‘지리산(智異山)’표기가 나온다고 하니‘智異山’표기가 그래도 오랫동안 일관되게 쓰인 듯하다. 그리고 특히 불교에서는 지리산을 문수도장으로 부르며 지혜의 문수대성이 이산에 머물며 불법을 지키고 중생을 깨우치는 도량으로 삼았다 하여 지리산의‘지리’는 ‘大智文殊舍利菩薩’에서 智와 利를 빌려 智利山이라 하나 이는 후대에 불가적 입장에서 불린 것이라 보인다.
이처럼 지리산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 어느 상황에서 누가 부르느냐에 따라 다양한 이름들을 가지게 되었다. 지리산은‘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불렸는데『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백두산에서 흘러나온 산맥이 지리산에서 멈추었다 해서 두류(頭流)로 한다고 했다. 또 도교적 입장에서는 봉래산(蓬萊山)으로 불린 금강산과 영주산(瀛州山)으로 불린 한라산과 함께 지리산을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불렀는데 신선들이 산다는 신령한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여겼던 것이다.
이외에도 오행사상과 함께 오악(五嶽)의 개념이 생겼는데 동서남북과 중앙지역을 대표하는 산으로 그 오악 중 지리산은 남악(南嶽)이어서 남악산이라고도 불렀으며, 불복산(不伏山)이나 반역산(反逆山)이라는 이름은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큰 뜻을 품고 명산을 찾아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만 거부하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지리산은 여순사건과 6.25전쟁을 거치며 빨치산의 활동 근거지가 되면서 토벌작전이 벌어지던 시기에는 좌익과 우익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적구산(赤拘山)이라고도 불렀으니 지리산은 세파에 흔들리며 많은 이름들을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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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적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나 고승대덕의 길을 가려는 이들, 그리고 도망쳐 숨어들어온 노비, 살인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저자거리의 사람들, 혹은 동학 이후 성을 바꾸고 숨어든 자들, 이런저런 사람들이 제각기 사연 하나씩 가지고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온 곳이 지리산이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 좌우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빨치산이 되었고 하나의 조국을 꿈꾸며 목숨을 의탁한 곳이 지리산이었다. 지리산은 그렇게 어느 자식 하나 버리지 않고 모두를 품는 어머니였다.
해방 이후 지리산에는 빨치산의 역사가 강하게 새겨졌다. 그 시절, 빨갱이 가족이라는 것 때문에 시달리다가 더는 견딜 수 없어 산으로 올라온 노인도, 어린 조카도, 남편을 찾아 올라온 아내도, 아내 등에 업힌 간난아이도, 산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모두가 빨치산이 되었다. 그리고 빨치산의 역사는 아직도 살아있는 역사다. 만델라가 27년 옥살이 하고 대통령이 되었을 때 대한민국 교도소에는 30년 넘게 옥살이를 하고 있는 빨치산들이 수두룩했었다.
살을 도려내듯 추웠던 그 겨울 지리산, 토벌대가 올라오면 ‘나무 하나 군인 하나’라고 할 정도로 엄청난 병력이 올라왔다고 한다. 토벌대와 총격전이 벌어지고 도주로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돌고 돌아 그곳으로 다시 돌아오기도 해서 널브러져 있는 토벌대와 동지들의 시신을 만나기도 했다. 꽁꽁 얼어붙은 죽은 동지의 입 속에 남아있던 밥덩이를 꺼내 먹으며 달려야 했던 절망의 시절이었다. 한 달이면 보름도 넘게 굶으며 배고픔과 추위 속에 쫓겨야했고 잠깐 쉬며 앉아 있다 출발하면 움직이지 않는 동지들이 있었다. 어깨를 흔들면 앉은 채로 쓰러지던 벗들, 숨을 멈추는 마지막 순간 산 아래 늙으신 어머니 얼굴이라도 한번 떠올렸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빨치산들은 철저하게 고립되었다.
북으로 올라갈 수도 산을 내려갈 수도 없었다.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그들은 희망도 절망도 모두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지리산만이 그들을 품어주었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남과 북 누구 하나 그들의 생환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그들을 버렸을 때에도 지리산은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 하나 된 조국을 꿈꾸는 일이 그토록 서럽고 사무치는 일이었다. 그런 그들을 끝까지 품어준 것은 지리산뿐이었다. 그들에게 눈보라 몰아치는 지리산은 환한 미소를 짓는 늙은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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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늘 그곳에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역사 속의 시간과 그리움을 데리고 산은 늘 그곳에 혼자 있다. 하지만 언제나 외로운 건 우리다. 우리가 세파에 흔들리며 외로울 때면 산은 늘 푸른 대답을 먼저 보내온다. 다만 우리가 그 오랜 침묵의 답변을 읽어내지 못할 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산처럼 스스로 침묵해보지 못했고 갈등과 대립, 경쟁의 일상 속에서 산의 너그럽고 따뜻한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지리산은 우리 민족의 수천 년 역사 동안 그곳에 있으면서 우리의 모든 아픔과 절망을 안아주고 품어준 산이다. 지리산에 가서 하루라도 그 숲의 숨소리에 자신을 맡기면 번잡한 현실의 고민들을 잊게 하여 스스로의 깊은 고요 속으로 침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리산 순례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존재의 근원적 질문에 대한 현실살이의 바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리산은 우리가 어리석은 생각으로 현실 속에서 헤맬 때 스스로의 지혜롭고 선한 마음을 깨닫게 해주는 스승 같은 산이다. 피폐해진 몸을 살려내고 잃어버린 자애로운 마음을 회복시켜주는 산이며 현실사회의 바른 역사와 삶에 대한 지향을 잃지 않게 해주는 산이다. 이 모든 것이 지리산이 가진 어머니의 사랑과 자비의 품성으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지리산의 이러한 품성은 모든 것을 품어내고 삭여내어 새살을 만드는, 그렇게 끝없는 생명력을 분출하는데서 생겼으며 그것은 산을 이루고 있는 모든 생명들의‘어울림 삶’에 다름 아니다. 크고 작은 능선과 계곡들의 어울림, 그 속의 작은 숲길과 고라니와 딱따구리와 구상나무나 얼레지 같은 꽃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사람들까지 인드라망처럼 촘촘하게 엮긴 생명공동체가 만들어내는 사랑과 자비의 힘인 것이다. 동과 서가 어울리고 남과 북이 어울리며 온 누리가 하나 되는 세상은 이 모든 생명들의‘어울림 삶’으로부터 비롯되며 그 속에서 진주처럼 만들어진 결정체, 바로 사랑과 자비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지리산은 그런 상징이 되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끝> 『불광』(2022.1)
-지리산 주능선 / 사진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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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