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8-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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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기농 양파 재배와 양파 크게 키우는 비법
    남원에서 유기농 양파를 재배하는 농가를 만났습니다. 지난번 수해로 인해 집을 잃고 지금은 하우스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개월 전에는 하우스에 불까지 나서 힘든 농가입니다. 그래도 양파는 쑥쑥 자라서 수확할 때가 되었네요. 유기농 양파를 재배할 때 어려운 점과 양파를 크게 키우기 위한 비법을 들어 봤습니다. 올해는 작년 저장 양파 때문에 양파 가격이 낮다고 합니다. 양파는 위에도 좋고 모든 요리에 꼭 필요한 채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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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꿈을 찾는 농부들
    2022-04-13
  • 추억 그리고 하동 녹차찐빵
    추억 그리고 하동 녹차찐빵 추억 그리고 하동 녹차찐빵 길거리에 걷다 보면 흔하게 보이는 가게 중 하나가 찐빵가게다. 구례 같은 시골에도 스타벅스나 롯데리아는 없어도 찐빵가게는 1-2개가 있다.그만큼 흔하고 흔한 것이 찐빵이다. <찐빵은 흔하다. 하지만 제대로 만든 찐빵은 결코 흔하지 않다.> 찐빵이 흔한 이유는 뭘까? 그것은 그만큼 먹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찐빵을 먹는 이유는 뭔가? 그것은 추억 때문이 아닐까? 누구나 어렸을 때 어머니가 막걸리에 발효시켜 만들어진 찐빵의 맛을 기억할 것이다. 지금은 찐빵이 겨울에 먹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순전히 찐빵 만드는 기업의 광고 때문이고기억 속에 찐빵은 대부분은 여름에 만들어 먹었다. 딱 이때 장마철 말이다. 콩과 벼도 심고 아직 고추는 익지 않아서 따지 않아도 되는 딱 이맘때 어머니는 모처럼 농사일을 쉴 수 있었다. 그 동안 바쁜 농사일에 챙겨주지 못한 자식들을 위해 찐빵을 만드셨던 것이다. 처마에 떨어지는 낙숫물을 받던 커다란 고무 다라이에 물이 차고 넘치는 날 막걸리를 넣어 발효된 밀가루에 팥을 넣어 만들어 주던 그 찐빵 맛의 추억은 삭막한 도로를 지나다가도 찐빵만 보면 나도 모르게 어머니의 얼굴과 함께 겹쳐지곤 했다. 2005년 가을 유독 하늘이 파란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하동에서 찐빵을 만든다는 두 분을 만났다. 박중욱씨와 양대화씨였다. 딸이 하나 있다. 박중옥씨는 천식을 앓고 있다. 그의 천식은 모든 것을 까다롭게 만들었다. < 울산에서 만나 결혼했다. 중매였다.> 울산에서 만나 결혼했고 거기서 살다가 천식 때문에 더 이상 일이 하기 힘들어 고향인 하동에 내려왔다.누나가 찐빵을 만들고 있어 거기서 빵을 배웠다. 하지만 그는 천식이 있었고 수입밀가루로 만든 빵은 그의 몸이 먼저 거부했다. 그래서 그의 우리밀로 찐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먹어도 문제가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찐빵에 관심이 갔다. 우리밀로 만들과 팥도 국산 팥을 쓴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동 터미널에 주차를 하고 찾아가보니 시장통 골목에 작은 가게가 있었다. 그들의 작업장이장 판매장이었다. 맛짱이라는 가게였다. 여느 시골읍내 장터골목의 찐빵집이었다. 밖에는 찐빵을 찌는 찜 솥이 있고 만두도 있었다. 부부가 빵을 찌고 만두를 만들어 파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찐빵집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다른 것이 외부가 아니라 재료에 있었다. "우린 마가린을 쓰지 않아요. 마가린을 쓰면 모든 참가제를 쓴 것과 같아요.이미 마가린 속에 참가제가 다 들어 있거든요. 통밀 만을 이용합니다.통밀이 거칠기는 하지만 밀 본연의 맛의 충실합니다. " 우리팥을 이용해요. 비싸지만 그것만 사용합니다. 우유 계란을 사용하지 않아요. 손으로만 만들어요. 만들기 어렵지만 손으로 만든 것이 훨씬 부드럽고 맛이 좋아요" 부부가 하루 종일 만들 수 있는 빵의 양의 약 600개라고 한다. 하지만 매일 이렇게 만들 수는 없다. 보통 하루에 300개 정도의 빵을 만든다. 1년에 만들 수 있는 양이 이미 정해져 있다. 109,500개다. 5개씩 포장되어 있으니 21,900봉이다. 하루에 60봉이다. 이것이 이들이 매일 팔 수 있는 찐빵의 전부다. 더는 없다. < 양대화님> 그렇다고 이들이 처음부터 완벽한 찐빵을 만든 것은 아니다.박중옥대표는 " 우리 빵의 레시피는 올해 만들어 졌어요" 매일매일 연구하고실험해서 겨우 완성했죠. 결국 8년이 걸려 완성된 레시피다. < 박중옥님> 그의 말대로 그의 빵은 처음보다 부드럽고 맛있다. “아무리 몸에 좋아도 맛이 없으면 찾지 않으니까요. 설탕을 조금 사용하고 단맛을 올렸고 통밀의 거친 맛을 빼고 부드러워졌어요.우유를 사용하지 않고 부드럽게 만들기는 쉽지 않거든요.” < 찐빵이 무겁다. 꼼수 없이 그냥 팥이 많아서다. > 하동녹차찐빵을 손에 잡으면 무게부터가 다르다.다른 찐빵들이 비싼 팥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구사지만 이들은류현진의 돌직구처럼 그냥 팥을 많이 넣어 만든다. 다른 꼼수는 없다. 우리밀빵이라고 해서 구입했더니 알고 보니 팥은 수입 팥이고국산 팥을 사용했다고 구입했더니 마가린이 들어 있는 등의 이런 저런 꼼수가 없다. 안심하시고 드셔도 됩니다. 그렇다 그냥 믿고 드시면 된다. 그저 정직하기 때문이다. 혹시나 들어있는 꼼수가 있을까 봐 항상 신경 쓴다. 재료를 확인하고 꼼꼼히 살펴서 혹시라도 나쁜 것이 있을 까봐 먼전 살핀다.이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 아이들이 좋아한다. 맛있으니까> 현재 그들은 하동 악약으로 작업장을 옮겼다. 꽤 큰 공장이다. 하지만 여전히 두 사람이 전부다. “공장이 넓어져서 작업하기 편해서 좋아요. 깨끗하고요.” 공장개소식에 참가했을 때 어느 개업 장에 방문했을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 < 요즘은 체험행사도 한다. 찐방도 만들어 놓고 지리산 여행을 하고 오면 발효된 빵을 쪄서 가져간다.> 보통은 크게 시작하지만 작은 골목에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온 두 분의 노력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손으로 만든 것은 정직하고 더 많은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세상이다. 손으로 직접 만들어 부드럽고 좋은 재료를 썼는데 맛도 좋다.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다른 것과 비교 할 수 없다. 좀 작게 만들어도 되지 않냐고 하지만 양심이 또 그렇지 않다. <뜨거워도 먹고 싶어한다. 왜 맛있으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 길로 걷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은 이와 같은 사람들 때문에 변한다. 그들이 그들의 길을 가기 때문이고 그것은 곧 새로운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들의 손은 바쁘고 그 손에서 새로운 빵들이 만들어진다. 어느때 먹어도 좋다. 그들이 만든 것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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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꿈을 찾는 농부들
    2022-03-17
  • 오리 날다
    오리 날다. 1월의 목동반은 남원의 신선자락길로 들었다. 신선자락길은 뱀사골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따라 산내면 원천마을로 이어지는 옛길이다. 이 길은 계곡 가까이 붙어 있어 사람의 흔적이 적은 길로 오소리와 담비 등 야생이 살아있으며 생동감이 넘친다. 또한 이 길은 나무와 얽히고설킨 덩굴식물이 엄청난 크기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여간해서는 만나기 힘든 오리나무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오리나무가 숲에서 보이지 않는다. 숲에는 물오리나무만 있고, 사람의 손때가 묻은 곳에는 사방오리나무만이 자란다. 그래서 웬만한 사람들은 오리나무를 알아보지도 못한다. 일 년에 한두 번씩 물에 잠기는 땅을 가장 좋아하는 오리나무는 버드나무, 참느릅나무처럼 물을 떠나서는 살기 힘들다. 만나기 힘든 오리나무, 앞에 두고서도 알아보기 어려운 오리나무가 이번 목동반의 주제이다. 오리나무의 겨울눈. 성냥개비를 닮았다. 오리나무의 어원은 오리마다 심어서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나는 이런 말은 우스개 소리로나 하는 말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오리마다 심었으면 지금도 오리나무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어야 하는데 도무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리마다 심었다는 것은 국책 사업일진대 이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오리마다 심었다는 말은 나무 이름에 유래를 끼워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럼 오리나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왔을까? 우리가 아는 오리는 집에서 기르는 집오리를 말한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날아와서 물에서 자맥질하며 물고기를 잡아먹고 살다가 갑자기 날아가버리는 새들, 즉 물에서 먹이활동을 하며 사는 새들을 통칭 오리라고 불렀다. 이들 오리 종류의 새를 쇠오리, 흰뺨검둥오리, 청둥오리, 원앙 등으로 구분 지어 부르지만 이름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지금도 오리라고 간단하게 부른다. 멸종위기종에서 해제되어버린 새가 있다. 딱따구리 종류 중에서 가장 큰 새인 크낙새는 멸종위기종에서 해제되었다. 멸종위기종에서 해제되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개체수가 늘어나서 아주 흔하게 되면 해제된다. 다른 하나는 멸종이 되면 해제된다. 가슴 아프게도 크낙새는 후자인 경우이다. 크낙새는 크기가 45cm에 달하는 새다. 이 새가 둥지를 틀려면 100년 이상 살아온 서어나무나 오리나무처럼 물을 가까이 있으면서 오래 사는 나무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일제의 산림수탈, 6.25전쟁, 무절제한 산림훼손을 거치면서 우리의 숲은 오래된 커다란 나무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것은 나무의 크기만 사라진 것이 아니고, 큰 나무가 있어야 살아가는 크낙새의 보금자리가 사라진 결과로 이어졌다. 크낙새가 사라진 지금 크낙새가 둥지를 틀고 난 뒤 그 둥지를 이용하는 오리는 이제는 둥지 틀 고목이 없어서 아파트의 보일러실에 둥지를 틀기도 한다. 오리나무에 둥지를 트는 오리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오리나무와 함께 잊혀 갔다. 하지만 오리나무에는 오리가 새끼를 낳아 길렀었다. 물가 주변에서 살아가는 나무에 새끼를 낳아 기르는 것을 보고 ‘오리가 사는 나무‘라는 의미의 ’오리나무‘라 이름지었던 것이다. 또 다른 이름의 유래는 오리나무의 열매다. 이는 ‘수달아빠’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최상두샘이 해준 말이다. 오리나무는 겨울에도 쉽게 구분할 수 있는데 이는 열매를 늦은 봄까지 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열매가 오리의 똥을 닮아있어 오리나무라고 부르는 것 같다고 한다. 정말 오리의 똥을 보면 오리나무 열매와 많이 닮아있다. 오리마다 심었다는 말보다는 훨씬 일리가 있어 보인다. 오리나무. 겨울이라 나무를 식별하긴 어렵다. 가지끝에 달린 열매가 보인다. 오리는 솟대 위에도 앉아있다. 물론 진짜 오리는 아니고 나무로 깎아 만든 오리가 솟대 위에 앉아있다. 솟대 위의 오리는 삶이 고단했던 민초들의 소망을 간직하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날아와 물에서 살다가 갑자기 날아가버리는 오리를 보면서 옛날 사람들은 오리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존재로 여겼었나 보다. 그래서 하늘을 날 수 있는 오리에 사람들은 작은 소망을 기원하여 그 소망이 하늘에 닿기를 바랐던 것이다. 어느 시대나 삶이 퍽퍽하면 어떤 강한 존재에 의지하게 되듯이 현실의 고단함이 내일에는 미래의 자식들의 삶은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놓은 것이 오리이기에 오리가 힘차게 날아 하늘에 닿았으면 하는 바람을 같이 해본다. 오리나무의 특징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물을 좋아한다. 물은 식물도 좋아하지만, 동물도 좋아하고, 사람이 살아가는데도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은 물을 중심으로 마을을 만들고 밭과 논은 만든다. 그리고 길을 만들고 수로를 만든다. 사람과 같은 공간을 두고 경쟁하는 것은 동물뿐 아니라 식물도 커다란 위험이다. 버드나무처럼 어마어마한 번식력과 생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사람과의 경쟁에서 견뎌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오리나무는 목재가 좋아 목기, 탈(하회탈의 재료), 나막신 등 생활 도구로 사용되었고, 몸에 이롭다는 보신 문화가 더해지면서 점차 사라져갔다. 오리나무의 다른 특징은 뿌리혹박테리아와의 공생이다. 뿌리혹박테리아의 위대함은 질소고정이다. 공기 중에 78%나 존재하는 질소는 모든 생명이 성장에 필요 요소이다. 하지만 과자봉지 외에는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는 질소를 그 작은 세균이 식물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프리츠 하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질소 이야기에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화학자인 프리츠 하버가 빠질 수 없다. 하버는 암모니아 합성으로 지금의 80억 인류를 가능하게 만든 사람이다. ‘공기로 빵을 만든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하버의 암모니아 합성은 멜서스의 트랩을 멋지게 깨뜨려버렸다. 하지만 그 위대함을 상쇄시킬 만큼의 죄악을 인류에 끼치기도 했다. 나치독일의 홀로코스트를 있게 한 독가스를 제조했다. 자신도 유대인이면서 자신의 사촌을 비롯한 수많은 유대인과 집시들을 죽음으로 몰아놓은 가스를 제조한 것이다. 그리고 독가스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 농약이 되고 많은 지역의 봄을 침묵시켰다. 20세기의 성배인 질소를 멋지게 만들어냈지만 최악의 과학자로 이름을 남긴 프리츠 하버는 오리나무와 질소 앞에 항상 생각나는 이름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솟대가 떠오른다. 실상사의 돌도 만든 솟대 솟대. 우리 지리산을 지키는 사람들도 솟대이고 솟대 위의 오리가 아닐까 한다. 하늘과 민초들의 삶을 이어주던 오리처럼 사람과 자연, 사람과 지리산 사이에서 솟대와 오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람 중심이 아닌 더불어 사는 삶을 고민하는 것. 우리가 소중한 만큼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자연의 고마움을 아는 것. 인간의 볼 권리가 자연의 생명을 우선하지 않는 것. 인간의 편리함에는 항상 자연의 희생이 동반된다는 것 등 무수한 파괴의 현장을 알리고 무심코 뽑아 쓰는 휴지 한 장, 종이컵 하나에도 생명이 들어 있음을 알고 이어주는 오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2022년. 오리야 날자. 다시 한번 힘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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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생태 이야기
    2022-02-10
  • 한신으로 들다
    한신으로 들다 사람들은 나무를 참 좋아한다. 지리산에서 나무를 만나고 싶다던 누군가가 지난여름에 뜬금없이 ‘목동반’을 만들자고 한다. ‘목요일은 나무 동무’를 줄여서 ‘목동’이란다. 이름이 귀엽다. 매주 목요일마다 숲으로 깃들면 좋으련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에만 들기로 했다. 2021년 9월 구례를 시작으로 하동, 산청, 함양, 남원 방향으로 매월 지리산을 돌아보기로 했다. 12월은 함양 한신계곡으로 들었다. 한신은 깊고 넓은 계곡으로 인해 여름에도 한기를 느끼게 하는 계곡이라는 뜻이란다. 겨울 숲의 나무는 잎이 없어 여간해서는 알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겨울에 나무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나뭇잎이 없는 나무는 일단 눈높이에서 보이는 줄기로 시선이 간다(줄기가 벗겨지는지, 갈라지는지, 모양, 색깔, 상처에 흐른 수액의 색깔, 껍질눈의 모양 등을 봐야 한다). 그리고는 시선을 올려 잔가지(나무초리)를 본다. 나무초리가 마주나는지 어긋나는지고 봐야 한다. 그리고 지난가을의 열매가 있는지 찾아본다. 겨울눈도 들여다봐야 한다.(겨울눈과 나무초리에 털이 있는지, 맨눈인지 비늘로 쌓여있는지, 비늘 조각은 몇 쌍인지, 모양과 크기, 색깔도 살펴야 한다.) 여전히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서 나무를 볼 때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사람은 위아래로 훑어보면 기분 나빠하는데, 나무는 위아래로 훑어봐야 한다”라고 항상 강조한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나무마다 찬찬히 훑어보고 들여다보며 길을 걷는다. 고로쇠나무, 고욤나무, 산뽕나무, 느티나무, 느릅나무 등을 읽어본다. 걸음이 느리다. 그러다 보니 한신계곡 입구에서 벌써 간식을 풀었다. 마침 지나가는 등산객이 웃는다. 시작부터 먹고 가는 모습이 재밌어 보이기도 보인듯하다. 느리게 나아가다 보니 해가 들지 않는 계곡은 더욱 춥다. 손과 발이 시리다. 속도를 내어 걸어본다. 재촉하는 걸음에도 계속 나무는 눈에 들어온다. 층층나무와 곰의말채나무를 비교해본다. 가로로 껍질눈을 가진 산벚나무와 개회나무도 비교해본다. 지각변동을 하듯 껍질이 벗겨지는 박달나무, 아주 얇게 그물 모양으로 껍질이 벗겨지는 피나무를 본다. 그리고 한신계곡에서 가장 많은 나무인 서어나무를 만난다. 서어나무의 이름은 유래를 찾기가 쉽지 않다. 한자로 서목(西木)이라 하여 ‘서쪽 나무’라는 의미란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다른 유래가 있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나의 시선을 남원시 운봉읍 행정마을의 마을 숲으로 서 있는 서어나무숲에 머문다. 우리나라의 마을숲은 풍수지리학으로 보통 설명이 된다. ‘마을을 보호하는 숲’이란 뜻의 비보림(裨補林)은 마을의 액과 재난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물고기가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어부림(魚付林), 마을의 기운을 담아주는 역할을 하는 수구막이 등이 있다. 이중 행정마을의 서어나무 마을숲은 마을의 액을 막기 위해 만든 숲이다. 키가 20~30m에 달하는 서어나무는 밝은 색의 껍질을 가지고 있다. 엄청난 위용의 서어나무는 마을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쉬이 막아낼 듯싶다. 서어나무는 우리 문화에서 실용적으로 사용되는 곳이 없다. 불땀이 없어 장작으로는 매력이 없고 껍질이 얇아서 표고목으로 활용도가 높지 않다. 줄기가 곧지 않아 목재나 가구를 만드는 용도로도 쓰지 않는다. 하지만 행정마을의 마을숲처럼 마을의 중요한 자리에 서 있는 모습으로는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냥 서 있으면 된다. ‘서 있으면 되는 나무’라는 뜻에서 ‘서나무’가 되고 지금은 ‘서어나무’라 불리는 듯싶다. 목재나 가구재로도 사용이 안 되는 이유는 울퉁불퉁한 줄기가 한몫을 한다. 그 줄기가 아주 특이해서 사람들은 ‘근육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왜 이런 줄기를 가지고 있을까? 줄기의 굴곡은 양분이 모여서 생긴 것이다. 양분은 한 곳으로 모이는 것은 힘을 준 모양을 말해준다. 커다란 나무의 줄기가 굴곡이 생기려면 어린 나무 시절부터 울퉁불퉁하게 힘을 주던 것이 누적되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서어나무는 숲이 변해가는 천이과정에서 마지막 단계에 들어오는 나무이다. 서어나무가 우점한 숲은 안정된 숲이라는 말이다. 서어나무는 숲에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200년의 천수를 누린다. 그러나 숲의 주인으로 위풍당당한 서어나무는 사실 겁쟁이 나무였다. 다른 나무에는 별거 아닌 바람에도 어린 서어나무는 두려워서 반응을 했다. 이리저리 불어오는 바람마다 에너지를 쓰면서 줄기의 굴곡이 생긴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위풍당당한 모습에는 두려움에 떨던 어린 시절이 숨어있었다. 이제 2022년 임인년이 시작되었다. 지난해처럼 우리는 한 해를 보낼 것이다. 2021년이 그랬듯이 어떤 상황은 나를 힘들게 할 것이고, 또 어떤 관계는 나에게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 관계, 상황들이 삶의 근육을 만들어준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날들을 지나왔지만 또 어떤 바람에 흔들릴지도 모르는 시간을 살아갈 터이다. 수 십 년을 버텨 근육이 가득한 서어나무는 이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까? 두렵지 않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살아가는 내내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면서 살아내는 것. 그것이 삶일 것이다. 서어나무와 다르지 않은 나의 삶.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별에도, 서어나무에도, 그리고 나에게도.
    • 연재
    • 지리산 생태 이야기
    2022-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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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멸종위기 물고기 보전 협약식
    지난 7월26일 함양군 대회실에서 남강 수계 멸종위기 담수어류 보전협의체 업무협약(MOU) 있었다. 국립생태원, 낙동강유역환경청, 진주시, 산청군, 함양군,진주교육지원청, 산청교육지원청, 함양교육지원청, 수달친구들, 진주환경운동연합, (사)한국민물고기보존협회, (주)생물다양성연구소 참여 했다 협약목적은 국립생태원과 남강 수계 관계기관은 멸종위기 담수어류(여울마자 등) 보전및 서식지 보호 활성화, 멸종위기 담수어류 보전 및 서식지 보호, 멸종위기 담수어류 가치 홍보 및 시민 교육, 기관의 상호 합의한 협력 사항 및 공동 발전 방안 마련 하고자 진행 되었다.
    • 우리마을
    • 함양
    2022-07-29
  •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나는 옛이야기1-대전리 석불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나는 옛이야기-대전리 석불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면 산과 계곡, 마을과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걸으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두리번거리면, ‘지나간 시간들’을 만날 수 있다. 거창하게 국보니 보물이니 지정된 문화재만이 아니라, 옛사람들의 손길이 묻어 있는 소중한 것들을, 거기에 담겨있는 앳된 옛이야기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지리산둘레길 오미-방광 구간을 걷다 보면, 한 칸 보호각에 갇혀 계시는 부처님 한분을 만나게 된다. ‘구례 대전리 석조비로자나불입상’이 그분의 공식 이름이다. 보호각에 세워지기 전에는 가로 6m, 세로 6m, 높이 1.1∼0,6m의 방형 돌담속에 계셨다. 1992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남악사지 지표조사’때 공식적(?)으로 이 불상이 알려지게 되었고, 1994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6호로 지정되었는데, 아마도 그 이후 지자체에서 보호각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보호각을 세우면서, 세심한 마음이 없었나 보다, 부처님의 발목이 시멘트 구덩이에 푹 빠져 버렸다. 쯧. 아쉽게도 이 부처님에 대한 문헌자료나 역사기록은 아직까지 없다. 그래서 주변 마을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와 부처님의 생김새만으로 그 내력을 엿볼 수밖에 없다. 마을사람들은 이 부처님에 계신 곳을 ‘미륵골’이라 부른다. 1992년 조사 때 주변에서 건물의 주초석과 기와조각, 벽돌조각 등이 발견되어 아마도 절집이 있었을 거라는 추정만 할 뿐이다. 조사 당시 절단된 부처님의 목 부분을 누군가 시멘트로 붙여 놓은 것을 조사팀이 시멘트를 제거하고 다시 접착제로 붙였다고 한다. 나무아미타불! 우리나라 문화재 앞에 붙어 있는 안내판이다. 읽고 또 읽어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게 적혀있다. 아마도, 문화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저하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것 같다. 첫째, 왜? 비로자나불이라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다 둘째, 머리카락이 나발이고 정수리가 육계라는데 이게 뭔뜻인지? 셋째, 법의는 통견이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넷째, 나발, 육계, 법의로 고려초 제작이라고 하는데....그 이유도 모르겠다. 양쪽 볼이 풍만하고 소박하면 통일신라 양식이라니...그건 또 뭔지? 첫째, 왜? 비로자나불이라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다. 부처님의 이름부터 알아봐야 한다. 아무런 기록도 없고, 사찰과 관련된 정보도 없을 때, 불상의 명칭을 확인하는 방법은 보통 수인(손의 모양, 손이나 손가락으로 맺는 모양)을 통해서이다. 보살상의 경우 머리에 쓰는 보관(寶冠)의 모양으로, 앉아 있는 자리의 모양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보관에 화불(化佛)이 있으면 관음보살, 보관에 보병(寶甁)이 있으면 대세지보살, 민머리이거나 두건을 쓰고 있으면 지장보살로 구분한다. 또 사자좌에 앉아 있으면 문수보살, 코끼리좌에 앉아 있으면 보현보살로 구분한다. 부처님이 혼자 계시지 않고 좌우에 다른 불보살과 계시다면, 좌우협시보살을 통해서 부처님의 명칭을 확인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계시다면 아미타불로, 좌우에 문수와 보현보살이 계시다면 비로자나불로 파악한다. 물론, 삼존불일 때 이런 전형을 벗어나는 예도 많기에, 절대적인 구분이라고 봐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대전리 불상은 보살상은 아니고, 좌우에 다른 불보상이 있지도 않기에, 오롯이 수인을 가지고만 판단해야 할 것이다. 대전리 석불의 수인을 명확하게 파악하기엔 너무 많이 손상되었다. 수인의 대략적인 모양은 왼손으로 오른손의 손가락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은 왼손이 오른손 위에 있으면서 깍지를 끼고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렇듯 가슴 앞에서 양손을 모아 주먹을 쥐는 수인을 지권인이라 하고, 이런 수인을 하는 부처는 비로자나불이다. “형상은 두 손을 모두 금강권(金剛拳 : 엄지손가락을 손바닥에 넣고 다른 네 손으로 싸 쥐는 것)으로 만들고 가슴까지 들어올린 후, 왼손 집게손가락을 펴 세워서 위쪽 오른손 주먹 속에 넣는다. 그 주먹 속에서 오른손 엄지와 왼손 집게손가락이 서로 맞닿는다. 이때 오른손은 법계를 뜻하고 왼손은 중생을 뜻하여, 이 수인은 법으로써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가 있다. 또 일체의 무명 번뇌를 없애고 부처의 지혜를 얻는다는 뜻이기도 하며, 이(理)와 지(智)는 둘이 아니고 부처와 중생은 같은 것이며, 미혹과 깨달음도 본래는 하나라는 뜻이기도 하다. 대일여래(大日如來) 즉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결하는 수인이다.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만 이 수인을 하므로 이 수인을 한 불상은 곧 비로자나불이다.” 지권인에 대한 불경의 설명에서는 왼손 엄지를 오른손이 잡는다고 나와 있지만, 대전리 석불은 반대로 오른손을 왼손으로 잡고 있다.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은 통일신라 8세기 중엽에 들어와서 9세기에 성행한 것으로 본다. 더불어 조성 초기부터 비로자나불의 지권인 수인이 뒤바뀌는 변형이 종종 나타나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변형된 지권인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대전리 석불의 수인이 좌우가 바뀐 지권인 혹은 깍지낀 지권인이라 하더라도, 비로자나불임은 명확하다. 둘째, 머리카락이 나발이고 정수리가 육계라는데 이게 뭔뜻인지? 부처님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부처님의 모습을 불상으로 또는 그림으로 그리려다 보니, 무언가 법칙이랄까 원리가 필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불교가 발생한 이후 약 500년간 인도에서는 불상을 만들지 않았다. 서기전 1세기 무렵부터 인간의 형상으로 불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인간과는 다른 특징을 가진 부처의 외형을 삼십이상 팔십종호(三十二相 八十種好)로 규정하게 되었다. 이미 열반에 들어 존재하는 자로서의 의미가 없는 부처를 인간의 몸으로 만드는 것은 이전에 없었던 부처의 형상을 창안해야 한다는 점에서 고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생물과도 다른 부처라는 존재의 철학적 의미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오랜 수행의 과정을 거쳐 깨달음을 얻은 여래임을 중생들에게 확신시킬 수 있어야 했다.거듭되는 윤회의 시간 동안 선업(善業)을 쌓고, 수행을 통해 다시없는 깨달음을 얻은 몸은 삼십이상 팔십종호를 갖춘다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삼십이상 팔십종호는 인간이 갖출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진리가 구현(具現)된 상태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같은 모습처럼 보이지만 인간과는 다른 특징인 삼십이상 팔십종호를 온전히 갖춘 모습으로 부처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삼십이상 팔십종호는 부처의 형상에 대한 규정이자 약속이다.” 〈중아함경〉에는 27번째 특징으로 머리카락을 들고 있다. “정수리에 육계가 있어 둥글고 가지런하며 머리칼은 소라처럼 오른쪽으로 돌아 오른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방광대장엄경〉에는 “정수리에 육계가 있다, 소라 같은 머리칼이 오른쪽으로 돌아 오르고 그 빛은 검푸르다” “머리칼이 아름답고 검다, 머리칼이 가늘고 부드럽다, 머리칼이 어지럽지 않다, 머리칼이 향기롭고 깨끗하다, 머리칼에 다섯 개의 만(卍)자가 있다, 머리칼이 빛나고 소라처럼 돌아 오른다”고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간송미술관 최완수 실장에 따르면, 원래 인도문화권의 남자들은 머리카락을 위로 거둬 모아 상투를 틀고, 그것을 그루터기로 삼아 터번을 둘렀다. 더위나 모래바람으로부터 머리카락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인도는 계급사회, 자연히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려고 높은 신분일수록 상투와 터번에 많은 금은보배를 장식했고, 이러다 보니 상투가 더 높아졌다. 초기 불상조각가들은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 머리카락을 정수리 부근에서 묶어 상투를(후일 육계란 명칭으로 확정) 만든 형태의 불상을 조성했다. 처음에는 상투 끈으로 머리카락을 묶었으나, 불상 양식이 점차 진전되면서 끈은 사라지고 상투만 표현됐다. 요약하자면, 나발(螺髮)은 소라 나(螺)와 머리털 발(髮)이다.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아 올려진 머리카락 모양을 말하며, 육계는 그런 나발들을 정수리에서 묶어 세운 상투를 의미한다. 대전리 석불의 머리 부분도 많이 손상되어 눈으로 명확하게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우선, 나발의 형상은 연주문(連珠文, 작은 원을 구슬을 꿰맨 듯 연결시켜 만든 문양)형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에서 유행하던 나선형과는 조금 다르다. 정수리에 있는 육계는 제법 큰 편이다. 삼도(三道)는 부처님 목 주위에 표현된 3개의 주름인데, 이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또는 생사 윤회하는 삼계(三界) 등을 뜻한다고도 한다. 대전리 석불의 목부분에 있는 삼도는 예전에 절단되어 시멘트로 붙이고 다시 수리하는 과정에서 눈으로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셋째, 법의는 통견이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삼의일발(三衣一鉢)이란 말이 있다. 세가지 옷과 발우 하나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이나 수행자들의 검소한 삶을 표현하는 말이다. 스님들의 옷을 인도에서는 가사(袈裟 Kasaya)라 하고, 삼의(三衣)란 상의(上衣-승가리). 중의(中衣-울다라승). 하의(下衣-안타회) 세 가지인데, 그 중에서 상의인 승가리를 법의(法衣)라하여 가사의 대표로 삼는다. 부처님이 이 상의인 승가리(법의)을 입으시는 방식이 있다.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뉘는데, 하나가 통견이고 또 하나가 우견편단이다. 통견(通肩)은 통양견법(通兩肩法)의 약칭으로, 불교에서 가사(袈裟)를 입는 한 방법으로, 양어깨를 모두 덮는 방법을 말한다. 대개, 승려가 사찰 밖으로 외출하거나 속인의 집에 들어갈 때의 착의법이며, 불상의 경우는 법의를 이 방법으로 입고, 옷자락을 왼쪽 겨드랑 밑으로 당겨서 왼손으로 잡는다. 우견편단(右肩偏袒)은 오른쪽 어깨는 가사를 벗어서 노출하고 왼쪽 어깨만 걸쳐 있는 형식이다. 인도 풍습에는 왼쪽보단 오른쪽이 더 귀하게 여기고, 화장실 등 천한 일은 왼손을 사용했다. 사실 고대인도의 많은 신(神)들의 모습을 보면 더운 날씨 때문에 대부분 웃옷을 입지 않거나 혹은 왼쪽 어깨만 걸친 우견편단 복장이다. 따라서 우견편단(右肩扁袒)은 부처님 만의 고유한 복장이 아니고 인도인들의 복장풍습에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통견의 양식도 두 가지 갈래로 나뉜다. 옷주름의 모양으로 구분하는데, 흔히 아육왕식과 우전왕식으로 구분 짓는다. 아육왕식(阿育王式 Ashoka) 옷 주름은 목에서부터 가슴, 다리를 거쳐 발목에 이르기까지 U자형의 주름이 연속적으로 늘어져 있는 형식이며, 우전왕식(優塡王式 Udayana)은 가슴 위에서 내려온 옷 주름이 허리 부분에서 양쪽으로 나뉘어 두 다리 위에 따로 U자형이 표현된 형식이다. 그럼, 대전리 석불의 법의를 살펴보자. 착의법은 양어깨에 옷이 걸쳐져 있는 통견이고, 상체의 옷주름은 U자형으로 가슴 가운데에서 양어깨와 팔목까지 주름이 반복적으로 겹쳐져 있다. 하체의 옷주름은 상체에서 내려온 U자형 주름이 허리에서 Y자로 나뉘어 지며, 양다리에서 각각 U자를 그리며 발까지 내려온다. 그래서 대전리 석불의 법의 양식은 우전왕식 통견이 된다. 넷째, 나발, 육계, 법의로 고려초 제작이라고 하는데....그 이유도 모르겠다. 양쪽 볼이 풍만하고 소박하면 통일신라 양식이라니...그건 또 뭔지? 문헌과 자료로 고증하기 불가능한 불상은, 위에서 언급된 나발과 육계, 법의 양식, 불상의 전체적인 모양, 부처님의 이름 등으로 제작 연대를 유추해 내는 게 통상적인 방식이다. 우선 법의의 양식에서 대전리 석불의 제작 연대를 유추해 보자.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머니 마야부인에게 법을 전하기 위해 도리천에 올라가 있는 동안, 코삼비국의 우전왕(Udayana)이 세존을 너무도 그리워하여 전단나무로 5척 높이의 부처님 형상을 만들게 하였다. 이 상서로운 최초의 불상은 각지에 널리 유행하였다. 당나라의 현장은 우전왕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전단상을 직접 목격하였는데,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 불상을 모사하였고, 이때 “진(眞)을 얻은 것”으로 여겼다고 전한다. 이것은 우전왕이 만든 불상이 석가모니 입멸 전에 만들어진 불상이므로 세존의 본래 모습을 담고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불상의 전파과정에서 이러한 복제는 단순한 형상의 복제에 그치지 않고 ‘신성의 복제’로 이어졌다. 이후 이 불상과 같은 가사형식을 한 불상을 학계에서는 편의상 우전왕식 불상이라 부르게 된다. 이러한 우전왕식은 한반도에 719년 감산사 미륵보살입상에서 처음 나타나며, 8세기 이후 신라 불상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더욱 도식화되어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에서는 무릎 부분의 옷주름이 몇 번 반복되는 양식화로 이어진다. 이에 비해 대전리 석불의 가사 옷주름은 신라 불상의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려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또한, 비로자나불 조성으로 연대를 유추해 볼 수도 있다. 한반도에서는 8세기 중엽부터 비로자나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해 남북국시대 신라 후기에 크게 유행해 그 흐름이 조선까지 이어졌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보관을 쓴 보살형의 비로자나불을 조성했으나 우리나라는 주로 지권인을 한 불상이 대다수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독존상이 주로 조성됐는데 조성시기가 명확한 불상 중에 석남사 비로자나불상이 766년으로 가장 빠르고 장흥 보림사 비로자나불상이 859년, 철원 도피안사 불상이 865년으로 뒤를 잇는다. 비로자나불은 석불이나 철불로 조성되면서, 초기에는 거의 좌상으로 만들어 지다가 고려시대에 좌상에서 입상으로 변화를 나타낸다. 하지만 대형 석조 비로자나불입상은 현재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며, 관촉리 비로자나불입상과 대전리 불상이 대표적이다. 대전리 석불이 관촉리 석불 보다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대형 비로자나불 입상으로는 가장 초기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1992년 조사 당시, 주변에서 발견된 塼(벽돌)과 瓦片(기와조각) 등이 고려초의 것으로 파악되어, 대전리 석불은 대략 9세기말에서 10세기초에 조성된 불상으로 파악된다. 고려초에 이렇게 큰 석불을 조성한 이유는, 신라하대인 9세기 불상의 양식을 이은 온화한 부처의 이미지로는 통일 고려의 강력함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웠기에 웅대하고 강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불상의 이미지가 필요했을 것이고, 또한 불상을 좌상이 아닌 입상으로 제작해 부처님의 보다 적극적인 중생구제의 모습을 표현했을 것이다. 대전리 비로자나불의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 하고, 다음에는 대전리에서, 아니 한국 불교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에 대해 이야기 해보기로 한다. 석불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이 인물은 누구인가?
    • 지리산정보
    • 산행정보
    2022-07-19
  • 닭의난초
    닭의난초 우리나라 난초 중에는 제비난초, 잠자리난초, 병아리난초 등 동물 이름이 붙은 것이 꽤 많다. 닭의난초도 그중 하나이다. 보통 그 동물의 특징을 갖고 있는데 닭의난초도 꽃잎 모양이 닭의 부리를 닮았다. 꽃빛은 황갈색으로 개화시기는 7월 초순이고 키는 30~70cm로 한 뼘에서 두 뼘 정도이다. 몇 해째 정령치에서 흰제비란과 같이 볼 수 있어 좋다. 잠자리가 날아와 모델을 해주어 함께 잘 놀았다. -섬진강 / 김인호
    • 연재
    • 오늘 만난 우리 들꽃
    2022-07-18
  • 두지터. 절망을 지우는 길
    6월 목동반 산행은 백무동에서 칠선계곡으로 가는 길인 두지터이다. 백무동 버스터미널에 모인 사람들 앞에서 못난이쌤이 이번 산행 일정은 잦나무 군락까지 갔다가 돌아내려 오는 길이라고 설명하였다. 김귀옥․김문숙 선생님이 작년 산행에 갔었는데 “두지터 길은 잦나무 군락이 아니라 일본잎갈나무 군락이라고 하셨다.” 하여 가서 확인해 보자고 하며 길을 시작했다. 알록제비꽃 숲 입구에 알록달록 올라온 알록제비꽃 잎을 시작하여 참반디꽃들이 소박하게 피어 있었다. 백무동에 계곡에는 밤새 비가 왔는지 바위들이 미끄러워 다들 조심조심하며 길을 올랐다. 그 지독한 가뭄을 뚫고 나무는 꽃을 올렸고, 꽃을 피웠던 나무는 열매를 달고 있었다. 작살나무의 향은 여전히 작살나게 좋아 김귀옥 선생님은 이름을 허벌나무로 바꿔야 한다고 하셨다. 향이 허벌나게 좋아서. 그렇게 작살나무에 취하고 서로의 농담에 웃기도 하면서 길을 걸었다. 예전에 이 외길 숲 속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분들은 지금처럼 과학이 가미된 등산화도 없이 통풍이 잘되는 옷도 없이 산길을 고스란히 발로 느끼며 땀을 흘리며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 삶의 흔적들은 숲에 쌓여 진 돌담과 밤새 비바람에 떨어진 맺지 못한 감나무 열매와 호두나무 열매들이 보여 준다. 마을에서 살지 못하고 이 깊은 숲까지 들어온 그분들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숲은 분명 친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들어온 사람들을 배척하지 않고 오소리에게 그랬듯이, 반달곰에게 그랬듯이, 그리고 미역줄나무에게 그랬듯이 친절하지 않으나 무심히 그 생명을 품었을 것이다. 너의 이름은? 길이 외길이다 보니 선두 잡은 못난이쌤과 거리가 먼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몇몇 나무 앞에서 토론을 하기도 했다. 작살인지 병꽃인지 헷갈렸던 나무는 나뭇잎을 따서 못난이와 가까웠을 때 물어본 김문숙 선생님 덕분에 괴불나무로 정정 되었고, 고광나무라고 생각했던 나무는 말발도리로 정정이 되었다. 두지터 가는 길은 덩굴나무가 많았다. 칡과 머루가 나란히 오르고 있어 칡과 머루의 다른 점을 알게 되었고 평소 헷갈렸던 노박덩굴과 털노박덩굴이 친절하게 자신들의 다른 점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미역줄나무의 굵기를 보고 다를 놀라워하면서 선녀 부채 같았던 열매를 슬며시 만져보기도 했다. 깊은 숲에서나 볼 수 있는 할미밀망덩굴. 나무를 공부하지 않으면 다들 풀이라고 외칠 사위질빵이 자신의 목본 정체성을온온몸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선녀가 든 부채모양의 열매-미역줄나무 어떤 시간을 살았길래 이렇게 깊은 주름이 있는 걸까? 털노박덩굴 두지터 오르기 전 잦나무와 일본잎갈나무 논쟁은 잦나무로 판명이 났다. 다들 잦나무 향이 이렇게 코에 맴도는데 어떻게 다른 나무로 착각했냐고 하니 김귀옥 선생님이 그때 걸었을 때는 겨울이었고 우산을 들고 있어서 땅을 보고 걸으셨다고 하셨다. 그래도 선생님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잦나무 군락 직전에 아름드리 일본잎갈나무가 서 있었다. 양팔을 벌려도 다 안을 수 없을 정도의 굵기였다. 아마 그 나무 요정이 김귀옥 선생님과 김문숙 선생님의 눈을 홀리지 않았을까? 하여 우리도 반쯤 두지터 길에 홀려 미소를 가득 안고 길을 걸었다. 어제는(6월29일) 남원시청 앞에서 산악열차 반대 촛불집회를 다녀왔다. 다들 힘든 싸움이 될 거라고 한다. 형제봉의 산악열차 문제가 지금 남원으로 번져 정령치에 산악열차를 놓겠다고 한다. 꺼진 불이라고 여겼던 설악산 케이불카는 불씨가 오르더니 다시 활활 타오르고 있다. 우리의 산과 강은 아마 더 큰 시련이 올 것이다. 두지터 길을 함께 걸으면서 어제 느꼈던 절망이, 그 한숨이 점점 지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산과 강을 파헤치려는 의도를 무산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든 것은 아니다. 김소연 시인의 시집 ‘시옷의 세계’에서 “절망과 어려움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밥처럼 나누는 것이다. 나누는 사이로 희망이 끼어들어 이유를 완성한다.”라고 하였다. 이 절망을 내 이웃과 밥처럼 나누다 보면 그 밥이 힘이 되고 희망이 되지 않을까? 지금 절망 중이신 분들은 이웃과 함께 두지터 길을 걸으시라. 그 호젓한 길들이, 풀들이, 나무들이 당신과 연대해 줄 것이고, 숲은 그 옛날 절망을 품고 들어온 사람들에게 품을 열어준 것처럼 우리에게도 무심히 길을 열어 줄 터이니......
    • 연재
    • 지리산 생태 이야기
    2022-07-13
  • 지리터리풀
    지리산 특산의 터리풀, 지리터리풀이다. 세계적으로 지리산에서만 자라는 특산식물이다 지리터리풀은 노루오줌이나 터리풀과는 꽃빛이 차이가 난다. 터리풀은 꽃의 색깔이 연분홍인 반면 지리터리풀의 꽃은 붉은색에 가까울 정도로 색깔이 진하고 아름답다. 아마 지리산 산사람들 그 핏빛 이야기들이 붉디붉은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리라. 노고단에서 돼지령 가는 길목 길목에 피어있는 지리터리풀 꽃들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할 수 있어 꽃을 보는 마음이 여느 해보다 기쁘다. 지난 6월 29일 국회에서 ‘여순사건특별법’이 제정되어 73년 통한의 세월을 지나 드디어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의 길이 열렸다 끌려간 아버지가 어디에서 어떻게 돌아가신 줄도 모르는 13살 소년이 86세가 되도록 어디다가 그 원통함을 말도 못하고 통한의 세월을 살았는데 이제라도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의 길이 열렸다는 감격스러운 마음에 마을 앞과 구례읍내에 여기저기 현수막을 내걸었다 현수막 속의 이현식씨 마음을 지리터리풀 붉은꽃들에게 전하는 아침 노고단 숲길이 선연하다
    • 연재
    • 오늘 만난 우리 들꽃
    2022-07-12
  • 그가 30년을 소작농으로 사는 이유
    그가 30년을 소작농으로 사는 이유 15년 전 남원 금지면에 있는 영농조합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리고 매년 몇 번씩 만났다. 그렇게 15년이 지났다. 나는 그를 30대에 만나 50대가 되었다. 그는 40대에 나를 만나 60대가 되어 간다. [농부 김갑식] 농부 김갑식 올해 59세다. 남원 금지 출신이다. 고향에서 농부로 40년이 보냈다. 소 10마리와 논1000평과 하우스 10개가 그가 가진 농사다. 한 마디로 복합 농이다. 금지면 농협 앞에 있는 비닐하우스에 찾아가면 그는 항상 있었다. 멀리 가지 않았다. 그는 늘 하우스에 붙박이처럼 살았다. "친환경은 관찰이 중요해요." "친환경 자재는 일반 농약 한 번이면 되는 것을 10번은 쳐야 하거든요 그리고 한 번 번지고 나면 잡기가 어려워 매일 매일 관찰해야 합니다." [올해 심은 블랙망고수박] 그는 유기농과 무농약 농사를 짓고 있다. 그래서 그는 하우스에 붙어 작물들의 상태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작년에 심은 블랙 사파이어 포도 농장을 둘러봤다. 포도가 몇 개 익었다고 해서 가봤다. 아직 맛이 들지는 않았다. 8월이 되어야 맛이 든다고 했다. 뜨거운 하우스를 빠져 나왔다. 6월의 열기와 장마의 습기까지 담은 끈끈한 바람이 불었다. 사방의 열기가 가득 해서 우리는 피할 곳이 없었다. 넓은 논 한 가운데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이 말라 입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한증막에 들어간 것처럼 답답해졌다. 15년 만에 처음 그는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92년에 귀농을 했어요. 도시에서 일하다가 돈 조금 벌어 시골에 내려왔죠. 내려오니까 다들 소를 키우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소를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보증만 서면 농협에서 돈을 잘 빌려줬습니다. 그렇게 소가 100마리까지 늘었어요. 그런데 운이 없게 IMF가 왔다. 소가 똥값이 되었다. 그리고 빚 3억이 남았다. 그 당시 대출 이자가 18%인 시대였다. 그렇게 그가 정신을 차려 보니 3억에 빚을 진 30대 농부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농사지은 지 곧 4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도 소작농이다. “빚 갚고 먹고 사느라 땅이 한 평도 없어요. 다 임대입니다” 하우스 한 동 200평의 임대료는 년 60만 원 정도라고 한다. 철골은 땅 주인의 것이고 비닐이 직접 바꿔가면 사용한다. 10동의 하우스를 짓고 있으니 1년 임대료는 600만 원이다. 많을 때는 20동 정도를 지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나이가 있어 더는 힘들다고 했다. "지금도 그 빚이 1억5천이 남아 있어요. 그것만 없으면 아무 걱정이 없는데…. 농사지어서 그걸 갚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그는 항상 피곤해 보였다. 그 이유가 있었다. 무거은 빚을 한 짐을 지고 있으니 삶이 편안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를 키우다가 빚을 졌잖아요. 이 동네가 소를 많이 키웠는데 지금은 소 키우는 사람이 없어요. 그때 다 망해서 그래요. 소라면 징글징글 하죠. 빚 지고 야반도주한 친구도 몇 명 있어요. 이 동네에서 나만 지금까지 소를 키우고 있죠. 소 키워서 빚을 졌으니 다시 소를 키워서 빚을 갚고 싶거든요. 지금 새끼 낳은 소가 10마리가 있으니 곧 그렇게 될 겁니다. 70 먹기 전까지는 갚고 싶은데 그게 될지 모르겠네요.” 얼마 전에 차 하나를 폐차했어요. 네…. 그때 야반도주한 친구가 먹고 살려니 트럭을 사야 하는데 신용불량이라 내 명의로 차를 샀거든요. 27년 만에 차를 폐차했어요. 그동안 혹시라도 사고가 나면 어쩌나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걱정 하나가 사라졌네요. 그것만 사라져도 맘이 10%쯤 가벼워졌어요. 그는 앞으로 10년 안에 빚을 갚고 돈도 좀 벌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가능할 것인가? 40년간 1억5천을 갚았는데 10년 안에 그 돈을 갚기가 쉽지 않아보인다. 농부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번 넘어지면 다시 세우기기 쉽지 않다. 그래도 지금까지 땅에서 버티고 서 있는 그가 대단해 보였다. 더운 바람이 물러가고 시원에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오래된 낡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른 하우스로 달려갔다.
    • 연재
    • 꿈을 찾는 농부들
    2022-06-29
  • 국립공원을 관광지로 만든 주범(성삼재·정령치도로)
    지리산 이야기 (3) 국립공원을 관광지로 만든 주범(성삼재·정령치도로) 도심처럼 국립공원도 교통체증·매연·소음 '몸살' 배혜원 시민기자(지리산필름 대표)·윤주옥 시민기자(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대표) (webmaster@idomin.com) 2021년 05월 03일 월요일 서울올림픽 맞춰 관광도로 건설 후 연간 차량 약 45만 대 운행…2007년 대도시급 미세먼지 측정 당장 아스팔트포장 못 뜯는다면 주민 운영 친환경차량 이용하고 일반차량은 통제하는 도로 돼야 2003년 가을, 나는 성삼재도로를 처음 걸었다. 나 혼자가 아니라 초등학생부터 60대 어른까지 50명 정도가 함께였다. 천은사에서부터 걷기 시작한 우리는 심한 굴곡과 급경사지를 달리는 차량이 내뿜는 매연과 타이어 타는 냄새, 소음에 아찔했던 기억이 있다. 천은사에서 출발해 약 10㎞를 걸어 올라간 우리는 달궁에서 약 9㎞를 걸어 올라온 분들과 성삼재휴게소에서 만나 지리산에 대한 마음, 성삼재도로를 걸으면서 느낀 점 등을 이야기했다. 다시는 걷고 싶지 않다는 분도 있었고, 달리는 차량으로 위험했지만 걸을 만했다는 분도 있었다. 2003년 이후로 나는 1년에 한 번 이상은 성삼재도로를 걷는다. 성삼재도로를 걸어서 오르자는 캠페인을 할 때도 있었고, 성삼재도로 주변에 사는 나무와 풀을 조사하려고 또는 지리산국립공원을 관통하는 성삼재도로가 다른 지역의 도로와는 어떻게 다른지 조사하기 위해서였기도 했다. 내가 성삼재도로를 걷는다고 하면, 첫 번째 반응은 '몸에 안 좋을 텐데 뭐 하러 걷느냐?'였다. 그럴 때면 생각한다. 맞다, 성삼재도로를 걷는 것은 몸에 좋지 않다. 그러면 이곳이 삶의 터전인 반달가슴곰은, 히어리는, 쇠딱따구리는, 그들 모두는 얼마나 힘겨울까. 국립공원공단이 2007년에 발간한 연구보고서를 보면 성삼재도로 주변의 대기질 농도가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노고단대피소보다 전반적으로 짙은 농도를 나타냈다. 가장 심각한 항목은 미세먼지였는데, 2007년 10월 26일(금)∼28일(일) 조사 시 성삼재휴게소는 대기환경기준을 초과했고, 대도시 지역(서울시 월평균 60㎍/㎥)의 평균 농도보다 높은 101㎍/㎥을 나타냈다. 소음 측정 결과도 성삼재도로 주변은 주간 평균 58.6∼65.3㏈로 국립공원이라는 지리적 특성을 고려하면 낮은 수치가 아니다. 내가 걸으면서 느꼈던 구토와 어지럼증은 상상이 아니라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 하늘에서 본 성삼재도로. /김인호 시민기자 자동차 문화가 보편화된 세상에서 성삼재도로를 달려 지리산국립공원에 오르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1100m 깊고 높은 곳에, 그것도 우리나라 제1호 국립공원인 지리산을 달리는 도로가 어떻게 생길 수 있었을까? 구례 천은사에서 남원시 산내면을 연결하는 성삼재도로는 1985년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차관을 포함한 약 68억 원 예산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을 보기 위해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이 지리산국립공원을 편하게 관광하도록 건설됐다고 한다. 성삼재도로와 함께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와 산내면 달궁을 연결하는 정령치도로를 건설하고, 1991년에는 성삼재주차장을, 1993년에는 정령치주차장을 만들면서 지리산국립공원은 이리저리 잘리고 파헤쳐졌다. 성삼재·정령치도로로 야생동물 이동통로가 단절되면서 연간 100건 정도의 로드킬이 발생하고, 도로를 건설하면서 심은 외래 수종들로 도로 주변 생태계와 경관은 변화하고 있다. 성삼재·정령치도로는 지리산국립공원의 이용행태를 바꿔 놓아, 도로가 생기기 전과 비교하여 지리산국립공원 탐방객은 2배, 노고단 탐방객은 7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화엄사에서 시작해 연기암을 지나 국수등, 집선대, 코재를 땀 흘리며 천천히 걸어야만 오를 수 있었던 1507m 노고단은 성삼재까지 자동차로 오를 수 있는, 슬리퍼를 신고도 갈 수 있는 유흥지가 된 셈이다. 1988년이니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는 지리산국립공원 심장부까지도 아스팔트 도로를 깔아 돈만 벌면 되는 시대였고, 도로가 건설되면 지역에 큰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도로만 건설되면 잘살 수 있다는 '도로 신화'는 지리산자락 마을들을 스쳐 지나는 관광지로 만들었다. 성삼재·정령치도로가 생기기 전, 지리산 아래에서 하루 묵고 지리산에 오르던 등산객들, 밥도 먹고, 차도 마시던 도시 사람들은 이제 물까지 사 가지고 온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지역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성삼재도로에 뒤엉킨 차량들. /윤주옥 시민기자 이런 지역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을 비집고, 표면 뭐든지 된다는 정치인과 돈을 따라 움직이는 토건업자들은 지리산에 케이블카와 산악열차를 건설하겠다고 한다. 2012년 남원시, 함양군, 산청군, 구례군은 지리산국립공원 반야봉, 천왕봉, 노고단에 4개의 케이블카를 올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다행히 환경부 국립공원위원회가 모두 부결시켰지만 지금도 틈만 나면, 선거가 가까워지면 지리산 케이블카를 이야기한다. 정치인과 토건업자들은 케이블카만이 아니라 산악열차도 필요하다고 한다. 하동군은 형제봉에, 남원시는 성삼재·정령치도로에 산악열차를 깔겠다고 나서고 있다. 4개의 케이블카와 2개의 산악열차,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지리산국립공원일까, 왜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5월 1일, 나는 남원시가 계획 중인 지리산 산악열차 1구간인 정령치도로를 걸었다. 부슬부슬 비가 내려 스산하고 싸늘한 날씨였다. 그러나 걷기를 시작하자마자 만난 초록의 향연은 시끄럽던 마음을 위로하고 평화롭게 했다. 3시간쯤 걸어 도착한 정령치엔 우박이 내리고 있었다. 자연의 변화, 숲의 냄새, 새 소리, 모두 천천히 걸어야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함께 걸은 분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다. 질주하는 오토바이에 무서웠지만 고추나무 꽃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나는 성삼재·정령치도로가 도로가 아니라 산길이라면 더 좋겠지만, 도로여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삼재·정령치도로를 지금처럼 놔두고, 똑같은 방식으로 이용하면서, 지리산국립공원 보전을, 반달가슴곰과의 공존을, 녹색뉴딜과 탄소중립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보호지역 중 보전의 정도가 가장 높다는 국립공원에, 1100m 고지에, 1년이면 45만 대 이상의 차량이 아무런 제한 없이 달릴 수 있다는 현실에 환경부와 국립공원공단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닌가 싶다. ▲ 지난달 29일 열린 성삼재·정령치도로 전환연대 출범식. /정결 시민기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성삼재도로의 아스팔트 포장을 뜯어내어 원래 상태로 복원하면 된다. 그런데 지금 당장 그럴 수 없다면 도로 이용 방식을 바꾸면 된다. 일반차량은 지리산 아래에 놓고, 지역주민들이 운영하는 친환경 차량을 타고, 지리산국립공원의 과거와 지금, 이곳에 사는 야생 동식물에 대해, 지리산 곳곳이 간직한 이야기를 들으며, 지리산국립공원으로 들어가면 된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과 단체들은 지난 4월 29일 국회 앞 산림비전센터에서 '성삼재·정령치도로전환연대'(이하 전환연대)를 출범했다. '전환연대'는 기후위기시대, 탈탄소사회로 가는 길에 성삼재·정령치도로는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장기적으로 모색함과 함께, 당장의 과제로서 일반도로인 성삼재·정령치도로를 국립공원도로화해 일반차량의 출입을 통제하고, 구례와 남원의 주민들이 공동운영하는 친환경 전기버스만 다닐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전환연대의 활동으로, 전환연대와 같은 뜻이 있는 지역사람들과 국민의 바람으로 지리산국립공원에 새로운 역사가 쓰일 것이라 기대한다. 1967년 지리산국립공원 지정, 1988년 성삼재·정령치도로 건설, 2004년 반달가슴곰 복원사업 본격적 시작과 함께 2025년, 2030년의 어느 날이, 성삼재·정령치도로의 정의로운 전환의 날로 기록될 것이라고 믿는다. 지리산은 우리나라 제1호 국립공원이며 사람과 야생 동식물 모두의 삶터이며, 생명의 산이다. 현 세대가 이 땅을 떠나도 100년, 200년, 1000년 이곳에 있을 지리산과 지리산에 깃들어 살아가는 생명들을 위해, 그리고 기후위기시대에 국립공원이 먼저 나서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성삼재·정령치도로의 전환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 이 기사는 경남도민일보에 실었던 기사를 재수록하였습니다.
    • 연재
    • 지리산자락 사람들
    2022-06-20
  • '식물이름에 왜 동물이?
    오늘은 식물이름에 숨어 있는 동물을 찾아봐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토끼풀’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 센스쟁이~ 또 뭐가 있을까요? ‘제비꽃’ 광한루에서 뇌병변장애인 대상으로 숲체험을 했다. 한가로이 거닐면서 그 분들과 동물이름이 들어 있는 식물을 찾는다. ‘소나무요’ 어! 금새 숨어 있는 동물을 찾아낸다. 근데 소나무의 소가 그 소일까요? 일단 소리로는 같으니 그렇다하고 또 찾아봐요. 소나무 아래에 또 보이는데 뭘까요? 자~ 생각해 봅시다. 개미에게 자손을 멀리 퍼뜨려 주라고 씨앗에 개미가 좋아하는 영양물질을 배달비로 붙여 놓는~ 보라색 꽃을 피우고 오랑캐꽃이라고도 하는~ 몰라요. 다 잊어먹었어요 ㅎㅎ 꽃이 보이지 않으니 몰라본다. 제비꽃 잎인데 이제 아시겠지요? 아! 제비라는 새가 숨어 있었네요. 제비꽃이라는 이름은 꽃이 물 찬 제비와 같이 예쁘다거나 튀어나온 꽃뿔의 모양이 제비를 닮았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옛 문헌에서 뒤통수의 한가운데에 골을 따라 아래로 뾰족하게 내민 머리털을 ‘제비초리’로 표현한 것에 비추어, 제비꽃은 꽃의 생긴 모습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광한루에서는 오늘 드라마 촬영을 한다고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김혜수가 주연이라는데 꼬빼기도 볼 수가 없다. 철통?수비?를 한다. 광한루와 오작교로는 접근을 차단하는데 혹여 우리들이 카메라에 잡힐까봐서란다. 그런 탓으로 무료입장이란다. 우리들은 그들이 머얼리 보이는 곳으로 다니며 식물속의 동물을 찾는다. 잔디관리를 아무리 잘한다 해도 그들은 비집고 들어선다. 누굴까요? ‘토끼풀’ 징그러운 토끼풀~~ 모두 토끼풀에 데인 사람들 같다. 토끼풀은 땅속으로도 달리고 땅위로도 달린다. 몽골에서 생토끼가 땅굴을 파놓고 들락거리는 것을 봤는데... (토끼풀과 잔디는 지표면과 지하에서 서로 공간을 나누어 가지지만, 토끼풀은 마침내 지표면을 피복함으로써 잔디는 빛 경쟁에 밀려 살아남지 못한다.) 토끼풀이라는 이름은 토끼가 잘 먹는 풀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유럽 원산으로 20세기 초반에 도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토끼풀’이라는 한글명은 <조선식물향명집>에서 최초로 발견된다. 여기 또 한 가지 있는데 잎을 먹으면 신 맛이 나고 고양이가 배 아플 때 먹는 소화제~ 아! 내장산에서 먹었는데... 먹었다는 것만 생각나죠? ㅋ 괭이밥이랑께요~~ 우리들은 소화불량일 때 뭘 먹는가요? 괭이밥이라는 이름은 식물체에 들어 있는 산 성분이 소화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어 고양이가 소화가 되지 않을 때 뜯어 먹는 풀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광한루 서문 입구에 노란꽃을 피우고 있는 이름표까지 달고 있는 기린초를 보고는 여기도 하나 있어요. 기린~~ 기린초의 기린이 목이 긴 동물 기린이 맞는지... 암튼 소리가 같으니~ 기린초라는 이름은 한자어 기린초(麒麟草)에서 유래한 것으로, 두꺼운 잎과 노랗게 피는 꽃 모양이 상상속 동물인 기린(麒麟) 또는 그 뿔을 닮았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월매집 담장 가에 살구가, 살구색이 어떤 색인지를 보여주며 먹음직스럽다. 떨어진 살구가 맛있다는데 하나씩 주워들고 쪼개 먹는다. 씨가 깔끔하게 떨어진다. 대여섯 개씩 먹으면 좋으련만... 앵두가 빨갛게 이쁘다. 연못가에 부처꽃이 피었다... 오늘 만난 식물속의 동물을 복습해서 뇌를 깨운다. 기린초, 괭이밥, 토끼풀, 제비꽃, 소나무 오늘 만나지는 안했지만 혹시 생각나는 식물속의 동물 있을까요? 뱀딸기요! 맞아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뱀딸기가 있었네요~~ 뱀딸기라는 이름은 중국에서 전래된 ‘蛇苺’(사매)를 차용한 것으로 이를 번역하면 뱀딸기가 되며, 열매와 자라는 모습 등이 딸기를 닮았으나 그보다 못하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오늘 식물속의 동물을 찾아보니 어땠나요? 재밌었어요~~ 담주에 시험 볼 테니 잊어버리지 말기!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는 식물이름 속의 동물이 있는데 우선 곤충 이름이 들어 간 식물은 개미자리, 잠자리난초, 나비나물, 매미꽃, 모기방동사니, 벼룩나물, 사마귀풀, 땅빈대. 파리풀, 나나벌이난초 등이다. 곤충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류도 있다. 까치박달, 까마귀베개, 닭의장풀, 제비꽃, 꿩의밥, 공작고사리, 오리방풀, 병아리난초, 참새피, 뻐꾹나리, 두루미천남성, 매발톱나무, 황새냉이, 해오라비난초, 새깃고사리, 방울새란 등이다. 양서파충류도 있다. 개구리발톱, 올챙이고랭이, 거북꼬리, 자라풀, 뱀딸기 등이다. 그렇다면 포유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많다. 괭이밥, 쥐똥나무, 박쥐나무, 강아지풀, 곰취, 범꼬리, 호랑버들, 기린초, 노루귀, 말나리, 족제비싸리, 토끼풀, 여우구슬, 고슴도치풀, 다람쥐꼬리, 돼지감자 등이다. 어떤가? 거의가 친근한 동물들이다. 식물은 낯설기도 하겠으나 식물속의 동물들은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친근하다. 어류도 있으며 절지동물도 있고 상상을 뛰어 넘는다. 붕어마름, 미꾸리낚시, 낙지다리, 가재무릇, 조개나물, 새우나무, 부게꽃나무, 거미고사리, 지네고사리 등이다.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라는 책에서 한번 찾아보았다. 시간이 많아서가 아니다. 우리 땅에 뿌리내리고 오래도록 살아 온 동물과 식물들을 뱀사골을 찾은 탐방객들이 모른다. 국적 불명의 식물들과 동물들은 잘 알면서 우리 것들을 모르는 게 맘이 상했다. 왜 그럴까... 정말 왜 그럴까...
    • 연재
    • 지리산 생태 이야기
    2022-06-18
  • 남생이 탐사단 - 봉서리 남생이가 다니는 길을 탐구한다
    남생이는 이웃 중에서도 가장 느린 이웃입니다. 느린 이웃을 생각해 보면 어린이와 노인, 장애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생이가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길은 다른 느린 존재들도 안전한 길이 되지 않을까요?
    • 지리산운동
    2022-06-13
  • 공감본성
    공감본성 요즘 도시의 현대인들은 스스로의 각박한 현실 속에서 간혹 숨통이 막힐 것 같으면 휴머니티를 이야기하며 ‘시골 인심’이니 ‘시골 밥상’이니 하며 시골을 이야기 한다. 절대로 시골에 내려와 살 마음도 없으면서 왜 가만히 있는 시골을 들먹일까? 그 ‘시골’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나를 방어하지 않아도 되는 편한 곳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왠지 나만의 사정을 이해해 줄 것 같고 고단한 심신을 어머니처럼 품어줄 것 같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시골은 아직도 ‘공감 본성’이 그대로 일상의 삶 속에 녹아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인식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괴테는 “인간은 함께할 경우에만 진정한 인간이며 유일한 개인이라도 자신을 전체의 일부로 느낄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만 즐겁고 행복할 수 있다”라고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의미를 정리해서 말했다. 이것은 괴테의 말이지만 표현만 다를 뿐이지 과거 깨달음에 이른 성현들은 모두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해왔다. 하나만 예를 들면 맹자는“우물에 빠지는 아이를 보게 되면 예외 없이 소스라치며 다급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이건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도 칭찬받으려는 것도 아니고 무정하다는 비난이 두려워서도 아니다. 인간은 본래 동정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것들이‘공감본성’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이다. 오늘날에는 제러미 리프킨이 이런 이야기를 현대의 상황에 맞춰 ‘공감’이라는 개념으로 새롭게 그리고 설득력 있게 변주해내고 있다. 제러미 리프킨은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들도 공감본성이 있다고 말한다. 다윈도 고등동물들 중에 사회성이 있고 감정이 풍부하고 동료의 곤경을 걱정할 줄 아는 종이 많다고 이야기 한다. 오늘날 공감본성이 크게 회자되는 것은 그 공감본성이 인간 스스로가 가진 ‘본래성품’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 절실해진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가 자본주의 물결에 휩쓸리면서 ‘물질의 소유’가 삶의 절대가치로 올라오고 이것과 함께 경쟁주의, 속도주의, 물량주의, 이기주의 등의 많은 자본주의 문화가 형성되면서 인류는 끊임없이 공감본성을 잃어왔다. 내가 내 것을 소유하지 않고 지키지 않으면 이 험한 세상을 처자식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불안과 걱정에 몰두하며 살다보니 어떻게 공감본성이 발현될 수 있겠는가? 공감의식의 발현은 일상에서 나눔과 섬김이라는 행위로 나와야 할 텐데 그것은 가치관의 전환이라는 자기 인생의 전향적 사고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사회가 되었으니, 말이 쉽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하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주는 섬김 의식과 빵과 포도주를 나눠 먹으며 자신의 피와 살(목숨)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나눔 의식은,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이 ‘섬김과 나눔’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잘 말해준다. 우리 한국 사회만 해도 예수의 제자들이 한 집 걸러 두 집에 살고 있는 실정인데 예수가 깨달은 이 진리의 삶의 방식을 얼마나 실천하며 사는지 모르겠다. 이렇듯 공감본성을 현실사회에서 일깨우고 실천하며 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세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공감본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만이라도 계속 일깨워야 할 필요가 있다. 언젠가는 ‘본래의 나(공감본성)’를 되찾게 될 거라는 생각도 없이 산다면 얼마나 슬프고 불행한 인생인가. 인디언 일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인디언이 높은 산정에서 큰 독수리 알을 하나 발견하여 가져왔다. 마을의 닭 울타리 안에 놓았는데 암탉이 이 알을 품어 부화했다. 어미닭보다 큰 새끼독수리는 그렇게 태어나 흙에서 지렁이나 잡아먹고 그 큰 날개로 날지도 못하고 파닥거리기만 하며 어미 닭의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며 덩치 큰 평범한 닭으로 살았다. 어느 날 거대한 새 한 마리가 높은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날갯짓도 파닥거리지 않고 늠름하게 편 채로 높은 하늘을 빙 날고 있는 것이다. 너무 멋있고 아름다워서 어미닭에게 물었다. 어미닭은 그 새는 황금독수리라는 새이며 하늘의 제왕이고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존재라고 말하며 어서 지렁이나 잡아먹으라고 말한다. 그 독수리닭은 바쁘게 땅을 후비며 지렁이나 잡아먹고 살다가 마침내 닭이라는 이름으로 죽었다. 우리는 누구나 황금독수리 같은(공감본성을 가진 ‘본래의 나’) 존재인데 닭처럼 살다가 인생을 마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자신이 차원이 다른 아름다운 본성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라는 걸 모르고 닭으로 살다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많이 억울하지 않은가. 닭이라면 닭처럼 살다가 가도 괜찮겠지만 황금독수리가 닭처럼 살다 간다면 이처럼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섬진강변의 남바람꽃 / 사진 김인호
    • 연재
    • 지리산인 칼럼
    2022-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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