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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마가지나무꽃
    「섬진강 편지」 - 길마가지나무꽃 올해 첫 꽃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해마다 얼음새꽃(복수초), 변산바람꽃을 보고 나서 길마가지나무꽃을 만났었는데 올해는 얼음새꽃이 애를 태우는 사이에 길마가지나무꽃이 먼저 피었습니다. 연기암 가는 산길에 길마가지나무꽃이 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2023년 1월 7일, 구례들꽃사진반 벗들과 함께 찾아가보니 믿기지 않게 몇 송이가 피었습니다. 먼저 피었던 몇 송이가 시든 걸로 보아 처음 꽃 핀 것은 4~5일 전이었던 것 같네요. 엄동설한에 이리 아름다운 꽃을 피워 우릴 불러주니 좋긴 하지만 새끼손톱보다 작은 꽃이 다시 몰아칠 칼바람을 어찌 견뎌낼지요. 향이 진해 가는 길을 막는다는 꽃인데 채 몇 송이 피지 않아 향은 아직입니다. 길마가지나무는 높이 2~3m까지 자라는 인동과의 낙엽성 관목으로 이름의 어원은 소나 말의 등 위에 얹어 짐을 싣는 안장을 길마라고 하는데 길마가지나무 열매의 모양(사진)이 길마를 만드는 길마가지와 똑같습니다. - 섬진강 / 김인호 -길마가지나무 열매 모양이 길마를 닮았다 (천리포수목원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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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생태 이야기
    2023-01-14
  • 오리 날다
    오리 날다. 1월의 목동반은 남원의 신선자락길로 들었다. 신선자락길은 뱀사골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따라 산내면 원천마을로 이어지는 옛길이다. 이 길은 계곡 가까이 붙어 있어 사람의 흔적이 적은 길로 오소리와 담비 등 야생이 살아있으며 생동감이 넘친다. 또한 이 길은 나무와 얽히고설킨 덩굴식물이 엄청난 크기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여간해서는 만나기 힘든 오리나무가 있다. 언제부터인가 오리나무가 숲에서 보이지 않는다. 숲에는 물오리나무만 있고, 사람의 손때가 묻은 곳에는 사방오리나무만이 자란다. 그래서 웬만한 사람들은 오리나무를 알아보지도 못한다. 일 년에 한두 번씩 물에 잠기는 땅을 가장 좋아하는 오리나무는 버드나무, 참느릅나무처럼 물을 떠나서는 살기 힘들다. 만나기 힘든 오리나무, 앞에 두고서도 알아보기 어려운 오리나무가 이번 목동반의 주제이다. 오리나무의 겨울눈. 성냥개비를 닮았다. 오리나무의 어원은 오리마다 심어서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나는 이런 말은 우스개 소리로나 하는 말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오리마다 심었으면 지금도 오리나무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어야 하는데 도무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리마다 심었다는 것은 국책 사업일진대 이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오리마다 심었다는 말은 나무 이름에 유래를 끼워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럼 오리나무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왔을까? 우리가 아는 오리는 집에서 기르는 집오리를 말한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날아와서 물에서 자맥질하며 물고기를 잡아먹고 살다가 갑자기 날아가버리는 새들, 즉 물에서 먹이활동을 하며 사는 새들을 통칭 오리라고 불렀다. 이들 오리 종류의 새를 쇠오리, 흰뺨검둥오리, 청둥오리, 원앙 등으로 구분 지어 부르지만 이름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지금도 오리라고 간단하게 부른다. 멸종위기종에서 해제되어버린 새가 있다. 딱따구리 종류 중에서 가장 큰 새인 크낙새는 멸종위기종에서 해제되었다. 멸종위기종에서 해제되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개체수가 늘어나서 아주 흔하게 되면 해제된다. 다른 하나는 멸종이 되면 해제된다. 가슴 아프게도 크낙새는 후자인 경우이다. 크낙새는 크기가 45cm에 달하는 새다. 이 새가 둥지를 틀려면 100년 이상 살아온 서어나무나 오리나무처럼 물을 가까이 있으면서 오래 사는 나무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일제의 산림수탈, 6.25전쟁, 무절제한 산림훼손을 거치면서 우리의 숲은 오래된 커다란 나무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것은 나무의 크기만 사라진 것이 아니고, 큰 나무가 있어야 살아가는 크낙새의 보금자리가 사라진 결과로 이어졌다. 크낙새가 사라진 지금 크낙새가 둥지를 틀고 난 뒤 그 둥지를 이용하는 오리는 이제는 둥지 틀 고목이 없어서 아파트의 보일러실에 둥지를 틀기도 한다. 오리나무에 둥지를 트는 오리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오리나무와 함께 잊혀 갔다. 하지만 오리나무에는 오리가 새끼를 낳아 길렀었다. 물가 주변에서 살아가는 나무에 새끼를 낳아 기르는 것을 보고 ‘오리가 사는 나무‘라는 의미의 ’오리나무‘라 이름지었던 것이다. 또 다른 이름의 유래는 오리나무의 열매다. 이는 ‘수달아빠’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최상두샘이 해준 말이다. 오리나무는 겨울에도 쉽게 구분할 수 있는데 이는 열매를 늦은 봄까지 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열매가 오리의 똥을 닮아있어 오리나무라고 부르는 것 같다고 한다. 정말 오리의 똥을 보면 오리나무 열매와 많이 닮아있다. 오리마다 심었다는 말보다는 훨씬 일리가 있어 보인다. 오리나무. 겨울이라 나무를 식별하긴 어렵다. 가지끝에 달린 열매가 보인다. 오리는 솟대 위에도 앉아있다. 물론 진짜 오리는 아니고 나무로 깎아 만든 오리가 솟대 위에 앉아있다. 솟대 위의 오리는 삶이 고단했던 민초들의 소망을 간직하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날아와 물에서 살다가 갑자기 날아가버리는 오리를 보면서 옛날 사람들은 오리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존재로 여겼었나 보다. 그래서 하늘을 날 수 있는 오리에 사람들은 작은 소망을 기원하여 그 소망이 하늘에 닿기를 바랐던 것이다. 어느 시대나 삶이 퍽퍽하면 어떤 강한 존재에 의지하게 되듯이 현실의 고단함이 내일에는 미래의 자식들의 삶은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놓은 것이 오리이기에 오리가 힘차게 날아 하늘에 닿았으면 하는 바람을 같이 해본다. 오리나무의 특징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물을 좋아한다. 물은 식물도 좋아하지만, 동물도 좋아하고, 사람이 살아가는데도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은 물을 중심으로 마을을 만들고 밭과 논은 만든다. 그리고 길을 만들고 수로를 만든다. 사람과 같은 공간을 두고 경쟁하는 것은 동물뿐 아니라 식물도 커다란 위험이다. 버드나무처럼 어마어마한 번식력과 생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사람과의 경쟁에서 견뎌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오리나무는 목재가 좋아 목기, 탈(하회탈의 재료), 나막신 등 생활 도구로 사용되었고, 몸에 이롭다는 보신 문화가 더해지면서 점차 사라져갔다. 오리나무의 다른 특징은 뿌리혹박테리아와의 공생이다. 뿌리혹박테리아의 위대함은 질소고정이다. 공기 중에 78%나 존재하는 질소는 모든 생명이 성장에 필요 요소이다. 하지만 과자봉지 외에는 아무도 사용하지 못하는 질소를 그 작은 세균이 식물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프리츠 하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질소 이야기에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화학자인 프리츠 하버가 빠질 수 없다. 하버는 암모니아 합성으로 지금의 80억 인류를 가능하게 만든 사람이다. ‘공기로 빵을 만든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하버의 암모니아 합성은 멜서스의 트랩을 멋지게 깨뜨려버렸다. 하지만 그 위대함을 상쇄시킬 만큼의 죄악을 인류에 끼치기도 했다. 나치독일의 홀로코스트를 있게 한 독가스를 제조했다. 자신도 유대인이면서 자신의 사촌을 비롯한 수많은 유대인과 집시들을 죽음으로 몰아놓은 가스를 제조한 것이다. 그리고 독가스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 농약이 되고 많은 지역의 봄을 침묵시켰다. 20세기의 성배인 질소를 멋지게 만들어냈지만 최악의 과학자로 이름을 남긴 프리츠 하버는 오리나무와 질소 앞에 항상 생각나는 이름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솟대가 떠오른다. 실상사의 돌도 만든 솟대 솟대. 우리 지리산을 지키는 사람들도 솟대이고 솟대 위의 오리가 아닐까 한다. 하늘과 민초들의 삶을 이어주던 오리처럼 사람과 자연, 사람과 지리산 사이에서 솟대와 오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사람 중심이 아닌 더불어 사는 삶을 고민하는 것. 우리가 소중한 만큼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자연의 고마움을 아는 것. 인간의 볼 권리가 자연의 생명을 우선하지 않는 것. 인간의 편리함에는 항상 자연의 희생이 동반된다는 것 등 무수한 파괴의 현장을 알리고 무심코 뽑아 쓰는 휴지 한 장, 종이컵 하나에도 생명이 들어 있음을 알고 이어주는 오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2022년. 오리야 날자. 다시 한번 힘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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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생태 이야기
    2022-02-10
  • 한신으로 들다
    한신으로 들다 사람들은 나무를 참 좋아한다. 지리산에서 나무를 만나고 싶다던 누군가가 지난여름에 뜬금없이 ‘목동반’을 만들자고 한다. ‘목요일은 나무 동무’를 줄여서 ‘목동’이란다. 이름이 귀엽다. 매주 목요일마다 숲으로 깃들면 좋으련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에만 들기로 했다. 2021년 9월 구례를 시작으로 하동, 산청, 함양, 남원 방향으로 매월 지리산을 돌아보기로 했다. 12월은 함양 한신계곡으로 들었다. 한신은 깊고 넓은 계곡으로 인해 여름에도 한기를 느끼게 하는 계곡이라는 뜻이란다. 겨울 숲의 나무는 잎이 없어 여간해서는 알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겨울에 나무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나뭇잎이 없는 나무는 일단 눈높이에서 보이는 줄기로 시선이 간다(줄기가 벗겨지는지, 갈라지는지, 모양, 색깔, 상처에 흐른 수액의 색깔, 껍질눈의 모양 등을 봐야 한다). 그리고는 시선을 올려 잔가지(나무초리)를 본다. 나무초리가 마주나는지 어긋나는지고 봐야 한다. 그리고 지난가을의 열매가 있는지 찾아본다. 겨울눈도 들여다봐야 한다.(겨울눈과 나무초리에 털이 있는지, 맨눈인지 비늘로 쌓여있는지, 비늘 조각은 몇 쌍인지, 모양과 크기, 색깔도 살펴야 한다.) 여전히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서 나무를 볼 때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사람은 위아래로 훑어보면 기분 나빠하는데, 나무는 위아래로 훑어봐야 한다”라고 항상 강조한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나무마다 찬찬히 훑어보고 들여다보며 길을 걷는다. 고로쇠나무, 고욤나무, 산뽕나무, 느티나무, 느릅나무 등을 읽어본다. 걸음이 느리다. 그러다 보니 한신계곡 입구에서 벌써 간식을 풀었다. 마침 지나가는 등산객이 웃는다. 시작부터 먹고 가는 모습이 재밌어 보이기도 보인듯하다. 느리게 나아가다 보니 해가 들지 않는 계곡은 더욱 춥다. 손과 발이 시리다. 속도를 내어 걸어본다. 재촉하는 걸음에도 계속 나무는 눈에 들어온다. 층층나무와 곰의말채나무를 비교해본다. 가로로 껍질눈을 가진 산벚나무와 개회나무도 비교해본다. 지각변동을 하듯 껍질이 벗겨지는 박달나무, 아주 얇게 그물 모양으로 껍질이 벗겨지는 피나무를 본다. 그리고 한신계곡에서 가장 많은 나무인 서어나무를 만난다. 서어나무의 이름은 유래를 찾기가 쉽지 않다. 한자로 서목(西木)이라 하여 ‘서쪽 나무’라는 의미란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다른 유래가 있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나의 시선을 남원시 운봉읍 행정마을의 마을 숲으로 서 있는 서어나무숲에 머문다. 우리나라의 마을숲은 풍수지리학으로 보통 설명이 된다. ‘마을을 보호하는 숲’이란 뜻의 비보림(裨補林)은 마을의 액과 재난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물고기가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어부림(魚付林), 마을의 기운을 담아주는 역할을 하는 수구막이 등이 있다. 이중 행정마을의 서어나무 마을숲은 마을의 액을 막기 위해 만든 숲이다. 키가 20~30m에 달하는 서어나무는 밝은 색의 껍질을 가지고 있다. 엄청난 위용의 서어나무는 마을로 들어오는 나쁜 기운을 쉬이 막아낼 듯싶다. 서어나무는 우리 문화에서 실용적으로 사용되는 곳이 없다. 불땀이 없어 장작으로는 매력이 없고 껍질이 얇아서 표고목으로 활용도가 높지 않다. 줄기가 곧지 않아 목재나 가구를 만드는 용도로도 쓰지 않는다. 하지만 행정마을의 마을숲처럼 마을의 중요한 자리에 서 있는 모습으로는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냥 서 있으면 된다. ‘서 있으면 되는 나무’라는 뜻에서 ‘서나무’가 되고 지금은 ‘서어나무’라 불리는 듯싶다. 목재나 가구재로도 사용이 안 되는 이유는 울퉁불퉁한 줄기가 한몫을 한다. 그 줄기가 아주 특이해서 사람들은 ‘근육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왜 이런 줄기를 가지고 있을까? 줄기의 굴곡은 양분이 모여서 생긴 것이다. 양분은 한 곳으로 모이는 것은 힘을 준 모양을 말해준다. 커다란 나무의 줄기가 굴곡이 생기려면 어린 나무 시절부터 울퉁불퉁하게 힘을 주던 것이 누적되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서어나무는 숲이 변해가는 천이과정에서 마지막 단계에 들어오는 나무이다. 서어나무가 우점한 숲은 안정된 숲이라는 말이다. 서어나무는 숲에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200년의 천수를 누린다. 그러나 숲의 주인으로 위풍당당한 서어나무는 사실 겁쟁이 나무였다. 다른 나무에는 별거 아닌 바람에도 어린 서어나무는 두려워서 반응을 했다. 이리저리 불어오는 바람마다 에너지를 쓰면서 줄기의 굴곡이 생긴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위풍당당한 모습에는 두려움에 떨던 어린 시절이 숨어있었다. 이제 2022년 임인년이 시작되었다. 지난해처럼 우리는 한 해를 보낼 것이다. 2021년이 그랬듯이 어떤 상황은 나를 힘들게 할 것이고, 또 어떤 관계는 나에게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 관계, 상황들이 삶의 근육을 만들어준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날들을 지나왔지만 또 어떤 바람에 흔들릴지도 모르는 시간을 살아갈 터이다. 수 십 년을 버텨 근육이 가득한 서어나무는 이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을까? 두렵지 않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살아가는 내내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면서 살아내는 것. 그것이 삶일 것이다. 서어나무와 다르지 않은 나의 삶.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별에도, 서어나무에도, 그리고 나에게도.
    • 이야기
    • 지리산 생태 이야기
    2022-01-07

실시간 지리산 생태 이야기 기사

  • 제22대 국회의원선거에 나오는 후보자들에게 지리산권 시민사회 공동제안
    지리산권 5개 시군에서 활동하는 지리산지키기연석회의를 포함한 28개 단체 제22대 국회의원선거에 나오는 후보자들에게 지리산권공동제안 2024년 3월 11일, 지리산권 5개 시군(구례, 남원, 산청, 하동, 함양)에서 활동하는 지리산지키기연석회의를 포함한 28개 단체는 4월 10일 실시되는 제22대 국회의원선거에 나오는 후보자들에게 <지리산 보전과 지리산권 공동체 회복을 위한 지리산권 시민사회 공동 제안>(지리산권공동제안)을 공식 요청하였습니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지리산은 우리나라 1호 국립공원으로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은 최상위 보호지역이며, 40여 종이 넘는 멸종위기야생생물이 살고 있고, 사람들의 삶과 문화가 녹아있는 전통지식의 보고입니다. 또한 지리산의 물이 모이는 엄천강, 경호강, 섬진강은 사람만이 아니라 사라져가는 물살이 동식물들을 품어주는 생명의 강으로, 강에서 시작된 문명은 강을 따라 독특한 빛깔로 변화, 발전되었습니다. 이에 28개 단체는 후보자들이 지역의 개발과 성장만을, 표만을 의식한 약속을 내놓거나 지리산과 지리산에서 발원한 엄천강, 경호강, 섬진강을 언제든지 팔아먹을 자원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지리산과 강들, 그곳에 사는 생명들과 함께 살아가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리산권 5개 지자체는 지리산과 강들을 토목공사의 대상으로 생각하여 숲을 파괴하고, 야생동식물을 내쫓고, 세금을 낭비하는 사업을 멈추지 않고 있으며, 법과 제도를 무시하고, 주민 삶터를 짓밟고, 민주주의를 조롱하고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이에 후보자들이 맹목적 개발을 통한 공멸이 아니라 상생과 협력을 통한 공생을 꿈꿀 수 있도록 주민들의 손을, 지리산의 손을, 강들의 손을 잡아달라고 호소하면서, 이를 위해 ‘지리산권 5개 시․군 국회의원과 지자체장들이 함께 모여 지리산과 강들의 보전과 지속가능한 이용을 이야기하도록, 지금 추진되는 여러 개발 사업이 상생의 관점에서 재검토될 수 있도록 노력’해 줄 것을, 그리고 ‘지리산의 자연과 문화가 유네스코 복합유산에 등재’되도록 힘써달라고, 마지막으로 ‘성삼재․정령치도로 이용 개선’과 ‘지리산 반달가슴곰 복원사업 20년이 지리산권 축제’가 될 수 있도록 애써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28개 단체는 제22대 국회의원선거 한 달을 앞두고 발표한 지리산권공동제안과 함께 선거구별 국회의원 후보자들에게 5개 시군 각각에서 추진되는 개발 사업을 분석하여, 재검토할 것을 요구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첨부문서. <제22대 국회의원 후보자들에게 보내는 지리산 보전과 지리산권 공동체 회복을 위한 지리산권 시민사회 공동 제안문> (2쪽) 첨부사진 1. 지리산골프장 예정지에서 진행된 생명평화기도회 (2023년 6월 21일) 첨부사진 2. 노고단에서 진행된 지리산산악열차 백지화 퍼포먼스 (2023년 9월 23일) 첨부사진 3. 구례군청 앞에서 진행된 <설악산×지리산, 끝까지 지켜낸다> 기자회견 (2024년 3월 7일)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위기
    2024-03-11
  • 보고 보고 또 보고 싶다. 함양에서 진행된 호사비오리 포럼
    호사비오리의 개체수는 2014년 조사 자료에 의하면 약 1,940쌍, 총 4,660여 마리 정도 생존해 있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러시아에 1,654쌍 중국에 166쌍, 북한에 116쌍이 분포하는 것으로 조사가 되었고 한국은 월동지로 200~300여 마리 정도 찾아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일반 비오리에 비해 작은 먹이를 먹으며 경계심이 강한 호사비오리는 주로 여울이 있고 한쪽은 인가가 없거나 사람의 출입이 어려운 절벽, 또는 숲으로 가려진 공간을 이용한다. 그러나 이런 환경은 계속해서 사라지고 있다. 하천 정비사업과 댐건설, 준설사업과 강변에 설치되는 파크골프장과 캠핑장 등 체육시설 때문이다. 겨울이면 찾아오는 이 귀한 손님을 언제까지 계속 볼 수 있을까? 해마다 계속해서 보고 싶다. 그래서 계속해서 보고싶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수달친구들의 최상두 대표가 개최한 이 포럼은 함양 엄천강 옆에서 진행이 되었다. 포럼의 제목은 ‘해마다 보고싶다’ 였다. 이 포럼에는 노영대 감독(자연다큐 감독) 김연수 기자(전 문화일보 기자), 박종길 박사(야생조류 필드 가이드 저자) 우포자연학교 이인식 교장 윤병열 한국탐조연합 공동대표 등 각개 전문가와 많은 활동가가 참여하였다. 이번 포럼에는 섬진강과 만경강, 지석천, 회천, 엄청상, 덕천강, 갑천 등 전국 강과 하천에서 관찰된 호사비오리의 모니터링 결과도 발표하였다. 1박 2일로 진행된 포럼은 1일 차에는 모니터링 결과 발표, 2일 차에는 엄천강과 남강 호사비오리 합동 모니터링을 진행하였고 총 75개체를 관찰할 수 있었다. 모니터링을 마치고 포럼의 제목처럼 해마다 볼 수 있기를 바라며 헤어져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내년에 같은 주제로 다시 만나기를 기원하며. 사라진 뒤 다시 복원 사업을 시작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 있을 때 잘 해야 한다는 교훈은 많이 봐왔지만 아직 깨닫지 못한 것 같다. ▲ 호사비오리 수컷, 옆구리에 있는 비늘무늬와 버리깃이 있다는 점, 곧은 부리가 특징이다. ▲ 가운데 있는 갈색머리가 호사비오리 암컷, 수컷과 동일하게 옆구리에 있는 비늘무늬 곧고 붉은색 부리, 머리깃이 있다는 점이 일반 비오리와 구별이 된다. ▲ 비오리 암컷, 호사비오리와 다르게 버리깃이 많지 않고 옆구리에 비늘무늬가 없으며 부리 끝이 검고 휘어져 있다. ▲ 비오리 수컷, 호사비오리와는 다르게 머리깃이 없고 옆구리에 비늘무늬가 없으며 부리 끝은 검고 휘어져 있다. ▲ 호사비오리의 서식지를 위협하는 가장 큰 문제는 강 준설과 수변 수목제거, 수변 체육시설등이 있다. ▼ ▲ 서시천 수변에 진행되고 있는 파크골프장의 모습
    • 이야기
    • 지리산 생태 이야기
    2024-02-22
  • 사흘이나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경탄한 지리산 제일의 전망대
    12월 중순인데도 봄날처럼 따뜻한 날씨였다. 지리산 자락의 함양 금대산(金臺山, 851.5m)으로 오르는 산길 길섶에는 쑥부쟁이의 연보라색 꽃이 반갑게 남아 있었다. 함양 마천면은 예로부터 지리산 가는 으뜸 관문이었으며, 지리산을 조망하는 이름난 전망대가 많았다. 오도재 위의 삼봉산과 마천의 임천(瀶川)을 내려다보는 금대산 등, 이 지역은 지리산 주능선의 북쪽에서 지리산을 전망하기 좋은 지형이다. 함양 금대암 금대 너럭바위 위 전망(사진 이완우) 함양 마천면의 금대산은 임천강을 사이에 두고 지리산을 마주하고 있어서 산줄기로는 지리산 주능선에 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금대산에 있는 금대암과 안국사 등의 사찰을 지리산 절집으로 기록했다. 임천강 물줄기의 근원을 지리산의 만복대 반야봉과 노고단 등의 지리산 주능선으로 보았고, 지리산의 개념을 산줄기와 물줄기를 통합하여 이해한 것이다. 함양 금대암 금대 너럭바위(사진 이완우) 함양 금대산은 '지리방장 제일금대(智異方丈 第一金臺)'로 알려져 왔다. 지리산에서 이곳 금대산 또는 금대암이 으뜸가는 전망대라는 의미이다. 부처가 앉는 자리인 연화대를 금대라고 하는데,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서방 정토에서 공덕이 으뜸인 자에게 앉게 하는 자리를 금대라고도 한다. 마천면의 임천 옆 도로에서 건너편 도마 마을의 그림처럼 펼쳐진 다랑논 논배미를 보며 금대암까지 2.5km의 임도를 올라갔다. 이 임도의 중간 지점에 안국사로 향가는 갈림길이 있다. 금대암 가는 임도는 경사도가 만만치 않으며 산줄기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한다. 금대암에 이르면 암자 앞에 높이 40m에 이르는 우리나라 최고 수령이라는 전나무가 눈에 띈다. 이 전나무가 지리산의 기상을 표상하는 듯하다. 나한전 옆에 집채만 하게 우람한 너럭바위 윗면은 천연 좌대(坐臺)로서 이곳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는 조망은 장엄하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의 지리산 주능선과 서북능선이 함양 마천면을 중심으로 활처럼 휘어져 생동감 넘치는 전망이 펼쳐졌다. 함양 금대암 앞 전망(사진 이완우) 금대암에는 도선 국사의 일화(逸話)가 전해온다. 그가 지리산 여러 곳을 돌아보며 수행하면서 이곳 금대암 너럭바위에 이르러 지리산 주능선의 전망을 보았다. 그는 사흘 동안이나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며 감탄했다고 한다. 도선 국사는 이곳에 머물러서 이 바위 옆에 나한전을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 시대에 관리나 선비들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 기록에는 함양에서 지리산의 유산(遊山)을 출발하는 사례가 많았다. 조선 시대의 성리학자들에게 유산은 심성 수양의 실천과 탐구의 과정이었다.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두류기행록'에 의하면 그가 이곳 금대암을 방문(1489년 4월 16일)하여 승려들의 범패 수련을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한 승려가 물을 긷고 있었다. 뜰에는 모란 몇 그루가 있어 반쯤 시들었어도 매우 붉었다. 승려 20여 명이 뒤따르며 범패를 하고 있었는데 속도가 매우 빨랐다. 금대암이 범패의 정진 도량이라고 한다. 그 법이 정일하여 잡됨이 없고, 나아가되 물러섬이 없었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매진한다고 했다. 함양 금대산 능선길 암괴 천연 방장(사진 이완우) 함양 금대산 지역은 신라의 정치 세력과 관련이 깊다. 태종 무열왕 때인 656년에 이 산에 안국사와 금대암을 함께 창건하였다. 이곳 금대암에서 임천 건너 내려다보이는 군자리에 있었던 군자사(君子寺)는 태종 무열왕의 외조부인 진평왕이 어린 시절 3년간 머물렀던 잠저 터이다. 군자사는 천년 사찰로 조선 시대 중기까지 건재하였고, 금대암과 군자사는 지리산 유람을 시작하는 거점이었다. 조선 시대에 선비나 관리들은 금대산 금대암에서 지리산을 조망하고, 금대산을 내려가 군자사에 며칠씩 머물기도 하였다. 유서 깊은 천년 사찰이었지만 지금은 그 흔적도 찾아보기 힘든 군사사터를 금대암에서 가늠해 본다. 박장원(朴長遠, 1612~1671)의 '유두류산기'에 그가 지리산을 유산하며 군자사에 머물렀던 기록을 남겼다. 대전(大展)과 방옥(房屋)이 모두 매우 크고 화려하다. 절 서편에는 새로 지은 별전이 하나 있는데 금빛과 푸른빛으로 화려하게 단청하였고 '삼영당(三影堂)'이라 한다. 이 당 안에는 청허(淸虛), 사명(四溟)과 청매(靑梅) 세 대사의 진영(眞影)이 있다. 금대산 정상 금대 암릉(사진 이완우) 금대산 정상은 금대암에서 0.7km 능선 길을 올라가야 한다. 함양 마천면 지역은 노출된 바위와 기반암이 검은색이 짙은 석질이 좋은 마천석 화강암이다. 산 능선에 돌출한 검은색 화강암 바위들은 품격이 출중하다. 산 능선 산길 양쪽에 집채만 한 바위가 비스듬히 맞대 산길이 천연 방장을 이루고 있다. 비바람을 피하며 머물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되겠다. 금대산 산마루에 커다란 바위들이 모여 앉아 지리산 주능선을 바라보고 있다. 가깝게 등구 마을이 보이고, 오도재가 보였다. 휴천면으로 흐르는 임천강이 보이고, 천왕봉 아래 칠선 계곡이 보였다. 지리산 천왕봉, 중봉, 제석봉에서 노고단까지 생동감 넘치는 기상으로 주능선이 이어지고 있다. 금대산 정상에서 백운산(白雲山, 903m)으로 향하는 1km의 능선 길은 돌출된 바위와 울창한 숲을 지난다. 백운산 정상은 나무들이 무성하여 지리산 조망이 쉽지 않았다. 지리산은 청산으로 움직이지 않고 고요한데, 백운산은 흰 구름이 오고 가고 있으며 한가로웠다. 금대산에서 백운산으로 이어지는 산마루 구간은 지리산의 동부능선에서 서북능선까지 잘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로 손꼽힌다. 금대산 정상 지리산 조망(사진 이완우) 백운산에서 손에 잡힐 듯한 풍경으로 오도재와 삼봉산을 조망하고, 금대산으로 되돌아왔다. 금대산에서 안국사 방향으로 내려오는 지름길은 조릿대 군락 사이로 오솔길이 선명했다. 조릿대 잎이 숲속 바람에 흔들리는데, 습기 머금은 오솔길의 황토색 토양은 먼지 없이 깨끗하였다. 금대산을 내려오면서 내내 생각해 보았다. 금대산이 지리산의 드높고 맑은 기상을 품고 싶은 신라 태종 무열왕의 염원이 서린 산이 아니었을까? 금대산과 금대암의 시대를 초월하여 금빛으로 빛나는 '금대(金臺)'에서 속세의 인연으로는 태종 무열왕의 사위가 되는 원효 대사의 정토 사상이 연꽃 향기처럼 피어나고 있는 듯했다. 지리산 여느 산줄기의 등산은 수려한 지리산 자연의 풍광에 더하여 역사와 설화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인문학적 유산(遊山)으로서 의미가 가치가 새롭다. 임천강변의 우람한 '지리방장 제일금대(智異方丈 第一金臺)'의 표지석은 지리산 제일 전망대로 여겨지는 금대산 탐방의 설레는 시점이며 뿌듯한 종점이었다. 지리방장 제일금대 표지석(사진 이완우)
    • 이야기
    • 지리산 생태 이야기
    2023-12-11
  • 지리산 작은 사찰에서 소아과 전문 의서를 간행하였다니
    절기로는 대설(大雪)을 이틀 앞둔 지난 5일 아침은 늦가을 같았다. 함양 마천면의 임천(瀶川)강 옆 도로에서 지리산 안국사로 올라가는 1.3km의 산길은 맑은 바람의 청량한 기운이 가득하였다. 강 건너 도마 마을의 다랑논이 아침 안개 어린 풍경 속에 그윽하게 보였다. 지리산 임천 풍경[사진 이완우] 함양 마천면의 금대산(851.5m) 자락에 있는 안국사(安國寺)는 지리산을 가깝게 바라보고 있다. 이 사찰은 신라 시대 태종 무열왕(603~661) 때인 656년에 창건되었다.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안정된 통일 국가를 이룩하기 위해 강력한 왕권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함양 안국사는 그 이름에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무열왕의 의지와 그 시대 사람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지리산 안국사[사진 이완우] 함양 안국사는 조선 시대 후기에 어린이의 병을 고치기 위한 소아과 의서인 보유신편(保幼新編) 편찬하여 민간에 널리 보급한 의미 있는 곳이다. 지리산의 작은 사찰에 전해오는 이 소중한 역사와 이야기를 찾아보는 탐방을 하였다. 보유신편은 1843년에 성주 독용산성에 있는 안국사(安國寺)에서 초간본을 간행하였다. 이곳 함양 안국사의 승려 정훈(正訓)이 1844년에 이 초간본 보유신편을 가져와서 이 지역 함양의 유학자인 노광리(盧光履, 1775~1856)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 책을 세상의 의자(醫者)들이 실속 없는 책으로 보니 오래 지나면 없어질까 염려됩니다. 이에 재산을 털어 이 책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고자 합니다. 선생은 한마디 말씀을 적어주시어 책머리에 올리게 해 주십시오. 집집이 이 책을 소장하고 활용한다면, 어린이는 병을 고쳐서 자비의 배를 타고 장수(長壽)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곳 함양 안국사에서 1845년 칠석날에 노광리의 서문을 붙인 소아과 목판본 의서 보유신편(保幼新編)을 중간(重刊)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그런데 이 보유신편 책자는 성주와 함양의 안국사 두 사찰에서 간행되기 200년 전에 대전에서 신만(申曼, 1620~1669)이 써서 전해오던 책이었다. 논문 '주촌 신만의 보유신편 편찬과 주촌신방'(양승률, 2012)에 보유신편의 저자인 신만과 이 책이 써진 과정이 잘 밝혀져 있다. 대전 지역에는 고려말부터 그 지역의 한 유력 가문에 의해 미륵원이 건립되어 여행자들의 숙식과 의료를 제공하였었다. 이런 적선 활동은 조선 시대에도 이어져서 백성을 위해 약방문과 우리말 약초 이름을 정리하고 복용법 등을 쉽게 제시하였다. 지리산 안국사 전경[사진 이완우] 신만은 병자호란 후 송시열 문하에서 학업 하였는데, 외아들이 천연두에 감염 사망하였다. 그는 향촌민의 질병과 고통에 큰 관심을 가지고 실용적인 의약서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신만은 미륵원의 적선 전통이 의국(醫局)으로 운영되며 전해오는 대전 지역의 진잠 주촌(현 대전시 유성구 용계동 일대)에 거주하면서, 직접 약초 재배와 임상 등을 연구하고 소아의 질병 대처 방안을 많이 처방하여 보유신편을 저술했다. 이렇게 17세기 중반에 쓰인 소아과 의서인 보유신편을 200년 후인 19세기 중반에 상주의 안국사에서 간행하였고, 사찰 이름이 같은 함양의 안국사에서 지방의 유림과 사찰이 서로 소통하고 협조하여 백성들에게 필요한 의서를 간행하여 향촌에 유포하였다. 지리산 안국사 풍경[사진 이완우] 어른 열 명은 고칠지언정 소아 한 명은 고치기 어렵다. 소아는 오장 육부가 취약하고 기혈이 안정되지 않았다. 경락, 혈맥과 숨결이 가는 실과 같아서 허하기도 하며 실하기도 쉽고, 냉했다가 실해지기도 한다. 소아는 증상을 말하지도 못하고, 손으로 아픈 곳을 가리키지도 못한다. 이러한 동기로 17세기 후반에 신만이 보유신편을 집필하고, 19세기 중반에 상주 안국사와 함양 안국사에서 이 책자를 간행한 것은 시대를 초월한 소아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었다. 우리나라에 안국사(寺)라는 이름의 유서 깊은 사찰이 여러 곳에 있는데, 이들 사찰은 이름부터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염원을 담고 있는데, 나라 국(國)은 왕조 시대에는 임금만을 의미하기도 했다. 소아과 전문 의서를 발간한 함양 안국사에서는 백성을 위한 진정한 안국(安國)의 마음을 실천하였다. 지리산 안국사는 새롭게 전각을 건립하고 도량의 확장 공사가 한창이었다. 사찰 입구에 있는 고색창연한 4기의 부도가 지리산을 배경으로 홍시가 매달린 낙엽 진 감나무와 색다른 대조를 이루었다. 소아과 전문 의서를 간행한 소중한 역사가 전해오고 있는 함양의 안국사는 지리산의 산줄기에 잘 어울리는 마음이 넉넉한 사찰이었다. 지리산 안국사 감나무[사진 이완우]
    • 이야기
    • 지리산 생태 이야기
    2023-12-06
  • 지리산의 아우라를 보려면 이곳을 오르세요!
    구례군 산동면과 남원시 산내면 사이의 백두대간 능선에 만복대(萬福臺, 1,433m)가 둥두렷이 솟아 있다. 만복대에서 달궁계곡을 지나 반야봉으로 이어지는 산동면과 산내면의 행정 구역 경계는 산자락을 눈으로 가늠해야 한다. 이 지역에서 백두대간의 마루금은 섬진강과 낙동강의 분수계가 된다. 구례군 산동면은 백두대간 마루금을 넘어서 달궁계곡으로 지역을 뻗쳐 낙동강 수계를 형성한다. 구례 상위마을 산수유 열매, [사진, 이완우] 백두대간 마루금 능선길에 이곳 만복대를 오르는 경로로 으뜸은 정령치에서 남쪽으로 2.0km의 능선길이다. 남원시 산내면에서 구례군 산동면으로 넘어가는 지리산 주능선 관통 도로인 861번 지방도로의 성삼재가 있다. 성삼재에서 북쪽으로 작은고리봉을 지나 묘봉치를 거치는 5.5km 능선길이 만복대에 이르는 버금 경로이다. 구례군 산동면 상위마을에서 북동쪽으로 계곡을 타고 3.0km 올라서 묘봉치에 이르고, 묘봉치에서 2.2km 능선길로 만복대에 이르는 경로도 있다. 만복대 조망, [사진, 이완우] 지리산국립공원은 가을 산불조심 기간을 설정하여, 11월 15일부터 12월 15일까지 만복대에 접근하는 탐방로도 통행이 금지되는 구간이다. 지난 14일 늦가을 아침에 산수유 열매가 붉게 물든 산동면 상위마을에서 묘봉치를 거쳐서 습기 머금은 산길의 서릿발을 밟으며 만복대에 올랐다. 너덜지대를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들리는 탐방로는 낙엽이 두껍게 쌓여 미끄럽기도 하였다. 조릿대 군락지, 너덜지대 바윗길과 낙엽 쌓인 푹신한 흙길을 번갈아 지나간다. 해발고도 700m 지점에 이르니 지리산 국립공원에서 관리하는 휴게 쉼터와 나무 데크길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계곡 물소리가 그친 곳부터 가파른 지형을 탐방로는 나선형으로 등산로 경사를 완화하면서 한 걸음씩 올라간다. 만복대 근경, [사진, 이완우] 묘봉치에 올라서니 만복대를 향하는 능선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거듭하며 걷기에 적당하다. 만복대 정상이 멀리서 보인다. 둥두렷한 산봉우리가 너그럽다. 만복대 정상 아래 동남쪽으로 펼쳐진 아늑한 지형의 작은 골짜기가 도장골이다. '도장'은 향토적인 어휘로 곡식을 저장하는 광이나 창고인데 주택의 안방에 붙어 있기도 했다. 지리산 만복대는 지리산에서 복과 덕을 가장 많이 간직한 포근한 곳이라고 한다. 이 만복대 바로 아래에 아늑한 지형의 도장골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상으로도 잘 어울린다. 만복대 정상, [사진, 이완우] 만복대 정상에서는 반야봉을 가장 가깝게 볼 수 있고, 만복대 남쪽의 노고단에서 동쪽의 천왕봉까지 지리산 주능선이 한눈에 조망된다. 노고단 서쪽으로 차일봉(종석대)의 양쪽 봉우리가 마치 기와집 지붕의 용마루 양쪽의 치미처럼 보인다. 만복대에서 바로 앞에서 뱀사골까지 심마니 능선을 뻗치며 자태가 늠름한 반야봉과 중봉은 지리산 주능선 조망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노고단에서 반야봉과 만복대의 사이로 내려오면서 열린 달궁계곡은 뱀사골과 마천면까지 이어지는 큰 골짜기는 백두대간의 종점인 지리산 주능선의 장엄한 아우라와 지체 구조를 더 돋보이게 한다. 노고단과 차일봉 조망, [사진, 이완우] 만복대에서 바라보는 천왕봉은 형세가 가파른데, 노고단과 반야봉은 봉우리가 둥두렷이 두텁고 평온하다. 아마 노고단과 반야봉이 천왕봉보다는 더 오래 풍화된 지형으로 보인다. 만복대는 노고단에서 달궁계곡을 따라 함양군 마천면의 임천까지 펼쳐진 웅장한 골짜기 위로 반야봉을 중심에 두고 서쪽 최고봉인 노고단에서 지리산의 정상인 천왕봉까지 45km의 지리산 주능선이 함께 조망되는 감동적인 전망대 역할을 한다. 달궁계곡과 천왕봉 조망, [사진, 이완우] 만복대와 반야봉 사이의 달궁계곡은 늦가을의 마른 갈색 단풍의 색채와 정적에 잠겨 있다. 달궁계곡은 반달가슴곰의 보금자리로 보호되고 있다. 만복대 정상 가까이에 형성된 습지는 생태계의 보고이다. 만복대의 기슭에는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들이 다양하게 서식하고 있으며 지리산 생태계의 소중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만복대에서 머무르면서 확인한 지리산의 지리산다운 진정한 아우라의 감동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늦은 가을 차가운 바람에 마른 억새의 꽃이삭이 하얗게 물결치는 스산한 정서를 뒤로하고 만복대에서 내려왔다. 봄 여름의 생명력이 피어나는 계절에 다시 만복대를 찾아서 생명력 넘치게 푸른 지리산의 풍요로움에 안겨보리라 다짐하였다. 운봉고원 조망, [사진, 이완우] 만복대에 올라온 경로를 다시 되돌아 묘봉치를 거쳐 구례 산동면 상위마을로 내려왔다. 묘봉치 아래 계곡에서 상위마을에 가까워지니 계곡을 따라서 계곡 따라서 검정 호스가 줄을 지어 내려온다. 봄에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는 아랫마을 주민들의 설비였다. 경사진 지형에 다랑논 흔적이 계속 이어지고 경작을 포기한 논바닥 평지에는 산수유와 차나무 등이 자라고 있었다. 만복대에서 상위마을까지 내려오는 5.2km 산길은 반야봉을 중심으로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이어지는 지리산 주능선의 장엄한 감동이 진한 여운으로 계속 남았다. 봄이면 노란 꽃으로 지리산 자락을 물들였던 산수유나무마다 붉은 열매가 가을 오후의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구례 상위마을 다랑논 흔적, [사진, 이완우]
    • 이야기
    • 지리산 생태 이야기
    2023-11-18
  • 진흥왕의 손자가 지리산으로 피신한 사연은?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에 있는 삼정산(三丁山, 三政山)[1,156m] 정상의 세 봉우리는 상무주암, 문수암과 삼불주암(三佛住庵)을 거느리고 있다. 가운데 문수암에서는 지리산 천왕봉이 암자 앞의 산줄기에 막혀서 보이지 않고, 상무주암과 삼불주암에서는 동남쪽으로 10km 직선거리의 지리산 천왕봉과 중봉, 하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리산 삼불주암 천왕봉 전망, [사진, 이완우] 이들 세 암자는 지리산 7암자 코스의 셋째, 넷째와 다섯째 암자로서 지리산 칠암자 코스의 중심 지역에 있다. 삼정산의 남쪽으로 지리산의 도솔암과 영원사가 지리산의 주능선에 가깝게 높은 위치에 있고, 북쪽에 약수암과 실상사가 지리산 북쪽의 람천의 흐름을 지켜보며 지리산 7암자 코스의 시작과 마무리 지점을 이룬다. 11월 중순의 늦가을 지리산 문수암을 거쳐 삼불사 찾아가는 산길은 낙엽 밟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이 암자는 도마마을에서 2시간을 걸어와야 하므로 찾는 이가 거의 없는 조용한 암자이다. 법당에는 ‘삼불주(三佛住)’ 편액이 한가롭게 걸려 있을 뿐이고, 산신각과 요사채 등 사찰 전각들은 황토와 돌을 섞은 돌담 벽으로 이루어져 소박하고 친근한 느낌이다. 지리산 삼불주암 편액, [사진, 이완우] 법당 옆에는 3층 석탑이 서 있는데, 개성적인 양식이 눈에 띈다. 석탑의 1층과 2층의 탑신 네 면에는 불상, 사천왕상과 신장상 등의 부조가 있다. 1층 탑신의 전후 면에 있는 이불병좌상(二佛倂坐像)은 흔하지 않은 양식이고, 옥개석에 기왓골을 표현한 양식 기법은 거의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최근에 조성한 석탑이지만 미래의 석탑 양식을 지향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지리산 풍경을 수십 년간 사진 찍어왔던 류요선(남원시 이백면 강촌마을)씨는 20여 년 전에 이곳 삼불주암이 비구니 참선 도량이었을 때 실상사에서 약수암과 도마마을을 거쳐서 찾아왔다고 말한다. 그가 이 암자에 도착한 봄날 늦은 오후에 뜨락 옆의 정갈한 텃밭에는 금낭화가 군락을 이루고 피어 있었다며, 그때 찍은 금낭화 사진을 보여주었다. 지리산 삼불주암 금낭화(1995년 봄) [사진, 류요선] 이곳 삼불주암의 주지인 효성(曉星) 스님이 류요선 씨에 향기로운 차 몇 잔을 여유롭게 권하였다. 스님은 지리산 천왕봉 너머로 이른 아침 해가 떠오르는 풍경은 참으로 맑고 깨끗하여 인상적이며, 비 내린 후 산자락에 피어나는 운무는 무념무상의 경지를 표현하는 듯하다고 했다. 밤하늘의 별빛과 고요한 달빛에 환한 도량은 또 얼마나 고적하며 평온하게 아름다울까? 류요선 씨가 효성 스님에게 지리산 풍경 사진 몇 장을 우편으로 보내주기로 약속한다. 스님은 메모지에 암자 아래의 마천면 도마마을 한 집 주소를 써서 건네준다. 이곳 암자에 오는 택배나 우편물은 아랫마을의 한 집에서 수령하여 머물러 있다가, 마을 주민이 이 암자에 올라올 일이 있을 때 가져다준다고 한다. 지리산 암자의 시간은 속세와는 다르게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지리산 삼불주암 법당 벽면 채반, [사진, 이완우] 이곳 삼불주암으로 도마마을에서 올라오는 삼정산 자락이 견성(見性) 골이다. 이 골짜기에는 “까마귀나 까치도 경(經)을 외우며 간다”는 속담이 예로부터 전해온다. 까마귀나 까치도 경(經)을 외우며 간다. 수수께끼 같은 이 속담은 함축적이며 흥미롭다. 이 속담은 이 지역에 전승하는 설화를 반영하고 있는데, 이 지역에 불교 활동과 민간에 대한 영향력이 그만큼 컸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7세기 중반인 신라 무열왕 때에 마적 대사가 이 지역 하천인 용유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삼정산에 문수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 중기에는 인오(印悟, 1548-1623) 대사가 이 지역 지리산 영원사에서 수행할 때 함양 장터를 다니며 백성들과 소통하고 교화하면서 함께 산을 넘던 고개(오도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지리산 삼불주암 삼층 석탑, [사진, 이완우]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며 삼정산 아래 기슭인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에는 군자사지(君子寺址)가 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567~632, 재위 579~632)이 국왕으로 즉위하기 이전 10살의 어린 나이에 이곳에 피신하여 3년을 지냈다고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534~576, 재위 540~576)이 승하하자, 진흥왕의 둘째 왕자가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9)으로 즉위하였다.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태자(銅輪太子, ? ~572)의 어린 아들(후대 진평왕)은 숙부가 왕위를 잇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 국경 지대인 지리산 자락의 함양의 이곳으로 피신하였다. 진지왕이 즉위 3년만에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되고, 진평왕이 13세의 나이로 신라 국왕으로 즉위하여 18세부터 친정하였다. 진평왕 어린 시절의 함양 지리산 자락 피신과 3년 후 화백회의에 의한 진평왕 즉위 등의 역사적 사건은 당시 신라 왕실의 왕권을 향한 권력 투쟁을 암시한다. 지리산 삼불주암 삼층 석탑 조형물, [사진, 이완우] 국왕이 즉위하기 전에 잠룡(潛龍) 신분으로 거주한 저택을 잠저(潛邸)라고 한다. 진평왕은 어린 시절에 거처했던 함양 지리산 자락의 잠저에 군자사(君子寺)를 건립했다. 이곳 군자사는 조선 시대에 지리산을 유산(遊山)하는 관리나 선비들이 머물렀다가 하동암을 거쳐 천왕봉으로 오르는 주요 거점이었다. 진평왕이 어린 시절에 이곳 지리산 자락에 머물면서 아들 낳기를 지리산 산신에게 기원하여서 이곳 지명을 군자리(君子里)라고 한다는 지명 설화가 전해오는데, 진평왕의 아들은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선덕여왕과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딸이며,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진평왕의 외손주이다. 진평왕이 이 지역에 세운 군자사의 사찰 이름에서 군자리라는 지명이 유래했다고 볼 수도 있다. 진평왕은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王卽佛) 관념을 확립하였으며, 자신의 직계 가족을 부처의 집안과 동일시하였다. 진평왕은 다양한 방법으로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정치 제도를 정비하고 활발한 외교 정책을 펼쳐서 진흥왕에 이어서 신라의 삼국 통일 기틀을 다졌다. 지리산 삼불주암 삼층 석탑 부조, [사진, 이완우] 군자사는 진평왕이 어린 시절을 보내며 국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때를 기다렸던 의미 있는 장소로서 진평왕의 53년 재위 기간에 왕실의 안녕과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왕명에 의해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지리산을 오르내렸을 행렬에서 “까마귀나 까치도 경(經)을 외우며 간다”는 이 지역의 속담이 발생하였을 수 있다. 이 속담 속의 까마귀나 까치에서 같은 옷을 입은 단체가 줄지어 산길을 이동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지리산 삼불주암에서 지리산의 천왕봉과 중봉, 하봉을 바라보고, 시선을 돌려 산 아래 견성골 산자락을 찾아본다.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 능선, 골짜기와 계곡에는 역사와 설화들이 씨줄과 날줄로 잘 짜여 천오백 년 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지리산에서 내려오는 오후의 산길은 낙엽이 밟히며 버석거리는 소리와 조릿대 군락지가 바람에 흔들리며 서걱대는 소리로 가득하였다. 지리산 삼불주암 흙집 산신각, [사진, 이완우]
    • 이야기
    • 지리산 생태 이야기
    2023-11-18
  • 작은 석굴에 천 명이 앉을 수 있다는 깊은 의미는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에 있는 삼정산(1,156m)은 백무동과 한신계곡을 넘어서 지리산 천왕봉을 마주 보고 있다. 이 삼정산 정상의 으뜸 봉우리 아래에 문수암이 자리 잡았다. 지리산 칠암자를 잇는 숲길을 찾아 영원사에서 고개를 넘는 제법 힘든 산길을 1.8km 걸으면 상무주암에 도착하고, 대체로 평탄한 숲길을 0.8km 진행하면 바위 절벽 중간에 도량을 마련한 문수암에 이른다. 지리산 삼정산 바위 끝 문수암, [사진]이완우 이곳 문수암에서는 지리산의 중봉이 보이고 천왕봉과 그 오른쪽 지리산 주능선은 앞산 줄기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이 암자에서는 함양 방면이 잘 조망되며 멀리 가야산(1,432m)이 보인다. 산의 이름부터 가야 문화를 암시하고 있는 가야산은 불교문화가 시대적으로 일찍 꽃 피웠을 수 있다.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품에 안은 가야산은 예로부터 뛰어난 지덕을 갖춘 불교 성지로 여겨졌다. 우리나라 불교는 서역과 중국을 통해 북방 경로로 4세기 후반 삼국 시대에 고구려와 백제에 전래하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인도에서 해양으로 1세기 중반에 가야에 불교가 전래하였을 가능성이 학계에서 제기되었고, 가야 지역의 문화재와 설화에서 그 방증을 확인할 수 있다. 지리산 삼정산 문수암과 천인굴, [사진]이완우 문수암 터전의 바위 굴을 깨달음의 거처로 삼은 수행자들 지리산의 문수암은 신라 시대에 659년(무열왕 6)에 마적 대사가 수행의 도량으로 터 잡았다고 한다. 이곳에 바위의 절리가 풍화되어 틈새가 벌어져 형성된 천연 석굴이 있는데 이 지역 주민들은 전란 때마다 천 명에 이르는 피난민들이 이곳을 찾았다고 하여 천인굴(千人窟)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천연 석굴은 수십 명이 들어앉기도 빠듯하게 보인다. 이 지역 함양의 향토지인 『함양군사』(2012년)에 마적 대사의 행적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휴천면 엄천강 상류 용유담 주변의 마적 대사 전설 탐방로를 따라가면 마적동, 마적사 터, 대사 배나무, 바둑판 바위, 대사 우물과 마적대 등 마적 대사와 관련된 설화와 유적지가 풍부하다. 엄천강과 용유담에는 등에 무늬가 있는 물고기가 살고 있었는데, 그 물고기의 무늬가 마적 대사가 입었던 가사와 같다고 하여 ‘가사어’라 불렸다는 기록이 조선 시대의 문헌에 있다. 이 물고기는 높은 산 깊은 계곡의 차가운 계곡물에 사는 연어과의 열목어로 추정된다. 지리산 삼정산 문수암 천인굴 내부, [사진]이완우 용유담 지역은 지리산의 천왕봉, 노고단과 백무동 등과 함께 지리산 성모 산신 신앙의 터전이었다고 한다. 마적 대사가 용유담 주변을 시끄럽게 하는 용들을 쫓아내며 던진 바둑판이 조각나면서 이 계곡의 바위가 되어 널려 있다는 설화가 전하는데, 용유담 일대에 마적 대사가 불교를 유입하면서 이런 설화가 남겨진 것으로 보인다. 엄천강과 용유담 주변에 활동하던 마적 도사가 자신의 활동 지역과 가까운 지리산 자락의 삼정산으로 올라와 천연 석굴에서 수행하고 이곳에 문수암을 세웠을 것이다. 혜암(慧庵, 1920~2001) 스님은 현대 한국 불교의 대표적 선승이다. 그는 가야산 해인사의 해인총림 방장을 지낸 혜암 스님이 가야산이 보이는 이곳 천인굴 앞의 폐허가 된 문수암 터를 발견하고, 1965년에 암자 건물을 다시 세워 수행의 도량으로 삼았다. 하루 한 끼니 식사만 한다. 눕지 않고 오래도록 앉아서 좌선한다.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수행에만 전념한다. 이렇게 혜암 스님은 일종식(一種食), 장좌불와(長坐不臥)와 두타고행(頭陀苦行)에 철저하였다. 스님의 '공부하다 죽어라.’와 '공부만이 살길이다.'라는 일관된 수행 태도는 수행자들의 많은 귀감이 되고 있다. 지리산 삼정산 문수암 천인굴, [사진]이완우 지리산의 수행 방장이었던 천연 석굴, 그 문수사 천인굴의 의미 문수암의 작은 천연 석굴에 천 명이 앉을 수 있다는 천인굴 이름은 비밀을 간직한 만트라처럼 화두가 되어 탐구심을 자극한다. 이 석굴에 천 명이 들어갔다고 과장한 것은 천인굴이 구도와 깨달음의 정신적 터전이며, 이곳이 영향력이 큰 수행자의 거처인 천연 방장(方丈, 수행자의 사방 3.3m 정사각형 방)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유마경(維摩經)에는 재가(在家) 불자였던 유마 거사가 그를 문병한 3만 2천 명을 그의 작은 방장에 모두 앉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작은 방에 수많은 사람이 들어가 앉았다는 설화는 수행자의 교화력이 그만큼 컸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자신의 방장을 방문한 문수보살에게 유마 거사가 말했다. “중생에게 병이 있으니, 나에게도 병이 있다. 그들이 나으면, 나도 낫는다. 보살의 병은 자비에서 일어난다.” 유마 거사의 병은 육신의 질병이 아니라 중생들을 교화하고자 하는 자비심의 표출이며 반야의 지혜였다. 지리산 삼정산 문수암의 견성골 조망, [사진]이완우 문수암 천연 석굴 천장에서 불교 경전에 나오는 인드라의 구슬 그물을 연상한다. 인드라 하늘은 하나의 그물로 덮여 있는데, 그 그물은 줄지어 엮어진 구슬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구슬 하나하나는 다른 모든 구슬 비추고 있다. 어떤 구슬 하나라도 소리를 내면 그물로 연결된 다른 모든 구슬도 공명한다. 이 인드라 구슬의 그물은 한 수행자의 깨달음은 많은 사람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공명하게 한다는 비유이다. 자연 현상이나 사물에는 작은 구조가 전체 구조와 닮은 형태로 끝없이 되풀이하는 프랙탈 구조가 있다. 이렇게 한 수행자의 깨달음이 수많은 중생을 깨달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대승적 비유와 상징을 이 천연 석굴에서 찾아본다. 문수암 천인굴 앞에서 지리산의 하늘을 올려다본다. 바람은 맑고 가을 단풍이 고운데, 하늘에는 가볍게 구름이 피어나면서 사라지고 있었다. 지리산은 방장산이라 불리며, 불교에서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의 도량이라고 한다. 지리산 칠암자의 여느 사찰이나 암자의 승방 못지않게 이곳 문수암 천인굴은 수행자가 찾고 싶었던 방장으로 여겨진다. 지리산 문수암의 지리산 주능선 조망, [사진]이완우
    • 이야기
    • 지리산 생태 이야기
    2023-11-08
  • 화장실을 사찰에서 해우소라고 부르는 깊은 뜻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의 지리산 자락에 상무주암(上無住庵)이 있다. 지리산 칠암자 숲길을 거느린 삼정산의 정상을 이루는 세 봉우리에서 지리산 주능선인 벽소령을 바라보는 첫째 봉우리 아래에 상무주암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암자는 9세기 중반에 영원 대사가 지리산 영원사와 함께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리산 삼정산 상무주암, [사진]이완우 영원사를 출발하여 1.8km의 너덜 바윗길을 걸어서 빗기재를 넘으면 상무주암에 도착한다. 11월 초순의 가을 산 낙엽들은 바람결에 흔들리며 서늘한 기운에 잡념이 들 새 없이 가볍게 낙하한다. 봄 여름에 걸쳐 이룬 엽록소의 장막을 걷으며 숲은 환해져 간다. 겨울 산의 추위와 침묵을 예감하며 낙엽들은 쏟아져 내린다. 상무주암 도량을 바라보며 내리막 산길이 평지로 바뀌면서 지리산 주능선 원경이 활짝 열렸다. 지리산 줄기의 봉우리들이 장쾌하기 이를 데 없다. 하늘에는 적운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구름은 한 장소에서 20분 정도 바라보고 있으면 천천히 모양이 변하여 없어지기도 한다. ‘머무름이 없다’는 이름의 암자에서 머무름 없이 변화하는 구름을 바라보니 새롭다. 지리산 상무주암 앞 오솔길, [사진]이완우 암자는 입구에 탐방객의 출입을 사양하는 정낭이 걸쳐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지리산 깊은 산중의 작은 암자에서 제주도의 풍물인 정낭의 표식을 보니 친밀한 느낌이 든다. 암자 마당 앞 돌담 축대 아래로 난 오솔길을 걸으며 약수터에서 목을 축인다. 이 암자는 공양간 안에 바위 틈에서 물이 고이는 샘이 있고, 탐방객을 위해 암자 앞 오솔길에 약수터가 있다. 암자 앞 내리막 비탈의 다랭이 텃밭에 여러 가지 채소가 푸르게 가꾸어졌다. 암자 공양간 샘의 물줄기가 약수터에서 흘러내려 웅덩이에 모이고 다랭이 텃밭의 수원지가 되어 채소를 자급자족할 터전을 구성하였다. 암자와 함께 도량을 이룬 다랭이 텃밭을 보니 농사일을 수행으로 여기는 스님들의 하루 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지리산 상무주암 다랭이 채마밭, [사진]이완우 매년 봄 부처님 오신 날에는 이곳 지리산 칠암자 순례길이 열리고 많은 참배객이 도솔암, 영원사, 상무주암, 문수암, 삼불주암, 약수암과 실상사에 이르는 14.5km의 숲길을 즐겁게 고행 삼아 걷는다. 우리나라의 산티아고 순례길이라고 할 만하다. 그날에 이곳 상무주암은 참배객들의 점심 공양 장소가 된다. 해마다 이곳에서 수백 명의 점심 공양 한마당이 펼쳐진다고 한다. 상무주암과 경봉 스님 해우소 이야기 암자 앞을 지나가는 돌담 축대 아래 오솔길에서 암자 법당의 상무주(上無住) 편액이 보인다. 이 편액은 20세기 우리나라 불교계 고승인 경봉(鏡峰, 1892-1982) 스님의 친필로서 그의 법명인 원광(圓光)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젊은 시절에 경을 보다가 하루는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스스로에게는 반 푼어치의 이로움도 없다[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는 구절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아 더 열심히 본질적인 공부에 노력했다고 한다. 지리산 상무주암 지리산 주능선 조망, [사진]이완우 경봉 스님은 사찰의 화장실을 가리켜 해우소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붙인 스님이다. 그가 통도사 극락암의 조실이었던 1950년대 어느 날 화장실에 해우소(解憂所)와 휴급소(休急所)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대변 공간이 해우소였고, 소변 공간은 휴급소였다. 자기 자신만의 공간인 해우소에서 마음속의 번뇌, 망상, 근심 등을 다 버리라는 경봉 스님의 깊은 뜻이 있었다. 스님은 세상 살면서 가장 급한 것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찾는 일인데, 세상 사람들은 별로 바쁠 것 없는 것을 바쁘게 찾으며 산다고 하였다. 그래서 매일 몇 차례 찾는 휴급소는 필요 없이 급한 마음을 쉬어 가라는 뜻이었다. 결국 필요 없는 급한 마음은 멈추고, 진정으로 급한 자기 자신을 찾으라는 역설적 표현이기도 하다. 사찰에서 말해서는 안 되는 세 곳이 삼묵당(三黙堂)인데 승당(僧堂), 욕실(浴室)과 해우소이다. 침묵하라는 것은 신중하게 내면을 성찰하라는 의미이니 삼묵당은 곧 수도의 장소이다. 깊은 산중 사찰의 해우소는 지형적 특성을 이용한 누각식 구조가 많다. ‘정월 초하루에 힘을 주면 섣달그믐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찰의 해우소는 높낮이가 있는 개성적인 건물이며, 시원한 바람이 불어 마음을 정결하게 해 주는 장소이다. 지리산 상무주암 전망바위 바둑판 문양, [사진]이완우 상무주암에서 고려 시대 스승과 제자인 선승 3명의 이야기 고려시대 보조 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은 불교를 혁신하기 위해 신앙 단체인 수선사를 결성하고 이끌었다. 현재의 조계산 송광사는 처음 이름이 정혜사(定慧社)이며 1205년에 왕명으로 수선사(修禪社)로 바꾸었고, 고려 말기에 송광사(松廣寺)로 개칭되었다. 수선사는 보조 국사가 결성한 단체이며, 송광사의 이전 사찰 이름이었다. 1197년에 이곳 상무주암에 보조 국사가 머무르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보조 국사의 제자인 혜심(慧諶, 1178년~1234) 선사가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을 지었는데, 혜심의 제자인 각운 선사 역시 이곳 상무주암에서 스승의 저술을 자세히 풀이한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를 저술했다고 하는데, 이들 저술은 고려 시대 선문(禪門)의 필독 서적이었다. 이들 저술의 구성은 수많은 선문(선문답)마다 염송(깨달음 경지의 선시)을 달고 다시 상세히 풀이한 설화(주석, 설명)를 덧붙이는 삼단 구성을 되풀이하는 형식이 기본이었다. 각운 선사가 염송 설화를 엮을 때 오랜 저술로 붓끝이 닳아 자주 못 쓰게 되었다. 어느 날 어디선가 족제비 한 마리가 나타나서 꼬리를 내밀었고, 그 꼬리털로 붓을 만들어 『선문염송설화』 30권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자 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붓끝에서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이곳 지리산 상무주암에는 이 사리를 보존하여 쌓았다는 3층의 필단사리탑(筆端舍利塔)이 남아 있다. 오랜 세월 이어진 염송 설화 저술의 어려움으로 기진한 각운 선사가 쓰러져 세상을 떠나자 ’붓끝에서 사리가 나왔다‘고 과장한 극적인 요소의 설화가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 상무주암 바둑판 문양 바위, [사진]이완우 지리산 상무주암에 전해지는 스승과 제자로 이어진 세 선사의 수행과 저술 활동으로 보아 이 암자가 고려 불교의 선풍 진작에 큰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혼자 선정에 들었는데 허수아비 같았다. 얼굴은 거미줄이 덮었고, 새 발자국이 무릎에 찍혀 있었다. 이곳 상무주암에 거주하며 수행하는 모습을 묘사한 이 표현은 수행자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구도에 전념했는지를 느끼게 해 주어 숙연해진다. 상무주암 옆의 가파르게 서 있는 바위 서슬을 찾았다. 이곳은 지리산 주능선의 천왕봉, 중봉과 제석봉이 뚜렷이 보이는 전망대로 이 암자의 스님이 가끔 찾아와 휴식하고 명상하는 장소로 보인다. 바위에 기대어 자란 듯한 소나무 가지 사이로 지리산 주능선이 보여서 색다른 풍경이었다. 이곳 바위 위에 바둑판 문양이 세 곳에 조각나게 그려져 있다. 바둑판은 형식과 규격에 맞지 않아 바둑을 두기 위한 목적은 아닌 듯하다. 푸른 하늘, 지리산 정상, 소나무 등과 어울리는 운치 있는 바둑판 문양을 살펴보면서 전망대 바위에서 오래 머물렀다. 상무주암을 떠나며 사찰 건물의 규모나 형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무주암에 머물렀던 역사, 인물과 깨달음으로 향하는 구도자의 마음을 만나고 떠났다. 어느 큰스님은 떠나는 수행자나 신도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뒤돌아 머뭇거리지 말고, 똑바로 앞으로 가거라! 지리산 상무주암 산길 삼정산 조망, [사진]이완우
    • 이야기
    • 지리산 생태 이야기
    2023-11-04
  • 물 없는 산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낚은 것
    지리산 자락인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에 한때는 내지리(內智異)에서 사세(寺勢)를 크게 펼쳤던 영원사(靈源寺)가 자리하고 있다. 이 사찰은 9세기 후반에 영원 대사가 창건하여, 불교가 탄압받던 조선 시대에 부용(芙蓉) 영관(靈觀), 청허(淸虛) 휴정(休靜), 사명(四溟), 유정(惟政)과 청매(靑梅) 인오(印悟) 등 수많은 고승이 수행에 전념하여 조선 불교의 명맥을 이어갔다. 지리산 영원사 지리산 주능선 조망, [사진] 이완우 11월 초 단풍이 어우러진 늦가을 숲의 산행은 고즈넉한 정적에 눈과 귀가 맑아져서 사색하며 걷는 길이었다. 양정마을에서 영원사까지 2.5km의 임도가 포장되어 자동차로 올라갈 수 있다. 영원사는 지리산을 10km 마주 보고 있는 삼정산(三丁山, 1,156m) 아래 동남향의 양지바른 곳에 자리하며, 도솔암에서 실상사에 이르는 지리산 칠암자 산길의 한 사찰이다. 영원사 도량에서 무량수전, 삼영전과 산령각 등 전각을 둘러보았다. 이 사찰에 전해오는 영원 대사의 사찰 창건 연기담, 인오 조사의 수행담과 백초월 스님의 항일 독립운동 등 수행자들의 이야기는 전설, 설화와 역사를 생생하게 전승하는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다. 지리산 영원사 무량수전, [사진] 이완우 영원 대사의 사찰 창건 연기 설화 『우리 고장의 전설』(함양문화원, 1994) 책자에 이 사찰을 창건한 영원 대사와 사제간에 얽힌 인연 이야기가 사찰 창건 연기담(緣起談)으로 채록되어 있다. 부산 금정산 범어사의 동자승이었던 영원 대사는 지리산으로 수도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그의 스승은 제자에게 지리산에 도착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동자승은 스승과 범어사가 그리워 고개를 넘으며 뒤돌아보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지리산 영원사 무량수전 앞 돌길, [사진] 이완우 동자승은 지리산에 도착하여 현재의 영원사 터 가까운 곳의 토굴에서 정진 수행하였다. 8년의 세월이 지났으나 영원 대사는 깨우침을 얻지 못하여 이 산을 그만 내려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한 노인이 산에서 숲속의 허공에 낚싯대를 세우고 고기를 낚고 있었다. 노인은 이 산에서 8년 동안 물고기를 기다렸는데 2년은 더 채워보겠다고 했다. 영원 대사는 느낀 바가 있어 다시 토굴로 발걸음을 옮겼고, 더욱 수행에 정진하여 큰 깨달음을 얻었다. 산에서 물고기를 낚는 이 노인은 아마 동자승을 지리산으로 보내고 제자의 득도를 기원하며 기다리는 범어사 스승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영원 대사가 도를 깨우치고 금정산 범어사를 찾아가니, 범어사에 있는 스승은 뱀이 되어서 제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야 영원 대사는 자신이 동자승으로 지리산에 올 때 뒤를 돌아보지 말라던 스승의 금기를 어겨서 스승이 뱀이 된 것을 알았다. 범어사의 스승은 도를 깨우친 영원 대사를 보고는 바로 죽어서 남자아이로 환생하였다. 영원 대사는 지리산 이곳 삼정산 자락에 영원사를 창건하였다. 영원 대사는 범어사의 스승이 환생한 아이에게 승방에서 공부하게 하며, 승방의 작은 창 구멍으로 황소가 들어올 때까지 지성으로 수행하라고 하였다. 몇 년 지나서 과연 황소가 창 구멍으로 뛰어 들어오며 우레 같은 소리가 났다. 아이가 황소가 들어온다고 외치는 순간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이 영원사 사찰 창건 연기담은 제자의 성공을 바라며 사사로운 정을 끊고 수행에 정진할 것을 당부한 스승의 바람과 제자가 성공하여 다시 스승을 깨우침으로 이끈 사제 간의 끈끈한 정리로 이어진 이야기로서 마음에 닿는다. 지리산 영원사 삼영전, [사진] 이완우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끌고 나라를 구한 인오 조사 조선 시대 중기에 청매 인오[1548-1623] 조사는 영원사에 거처를 두고, 가까운 산 중턱의 토굴에서 참선 수도하였다. 그는 틈틈이 산죽을 잘라 조리를 만들고 소나무의 관솔을 잘라서, 험한 산길을 걷고 고개를 넘어서 함양의 장터에 내다 팔았다. 그는 장터에서 물건값은 주는 대로 받았다. 팔리지 않은 물건은 그대로 장터에 두고 와서 누군가 가져가서 요긴하게 쓰도록 배려하며 산속 승려로서 백성들과 소통하려고 하였다. 그는 이렇게 영원사에서 수도하는 중에 삼봉산과 법화산을 잇는 능선 허리를 넘어 함양 장터까지 150여 리 길을 하루에 왕래하곤 했는데, 어느 날 오도재(悟道峙)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함양의 오도재는 '인오 조사의 함양 장에 가는 길의 고개'라는 뜻과 '도를 깨우친 고개'라는 뜻의 중의적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인오 조사가 함양 장터로 오가던 삼정산 기슭에 '견성(見性)골'이 있어서 "까마귀나 까치도 경(經)을 외우며 간다"고 한다. 인오 조사가 함양 장을 다니면서 백성들과 소통하고 교화의 힘이 컸음을 이렇게 지명에 얽힌 설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리산 영원사 산령각, [사진] 이완우 인오 조사는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끌고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섰으며, 조선 불교의 중흥에 노력했다. 그는 ‘십무익송(十無益頌)’을 지었는데, “마음을 돌이켜 비추어 보지 않는다면, 경전을 읽어도 이익이 없다[心不返照 看經無益]."는 등 수행자들이 참고할 만한 열 가지 경책을 열거한 내용이었다. 인오 조사는 노년에 영원사 조실로 있었다. 그가 열반에 든 날, 절터가 환한 빛으로 둘러싸였다. 영원사 동쪽 능선에 스님의 사리를 모아 사리탑을 지었는데 밝게 빛나서 방광사리탑이라고 불렀다고한다.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한 수행자 백초월 스님 영원사는 대한민국 일제강점기의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백초월(白初月, 1878~1944) 스님이 13세에 출가한 수행 도량이었으며 마음의 고향이었다. 초월 스님은 1919년, 3·1운동 이후에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를 발표하였고, 의용승군제를 추진하였다. 그해 7월, 천은사(泉隱寺)와 화엄사(華嚴寺) 등 여러 사찰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였고, 애국청년들을 선발하여 상해임시정부와 독립군을 양성하는 길림(吉林)으로 파견하였다. 그는 지속적인 항일 독립운동과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건강이 악화한 뒤에도 미치광이로 행세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구속이 되었으나 그때마다 정신이상자로 석방되었으며, 친일 승려를 강하게 규탄하였다. 1939년 초월 스님과 가까웠던 신도가 만주로 탈출하면서 봉천행(奉天行) 화물 열차에서 ‘대한독립 만세’라고 글씨를 쓴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순국하였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한평생을 항일 독립운동에 노력하였다. 우리나라 정부의 상훈 인터넷 사이트에서 스님의 이름을 검색하면 스님의 건국훈장 애국장의 상훈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지리산 영원사 도량 가을 풍경, [사진] 이완우 영원사 도량에서 동남쪽으로 지리산 주능선이 조망된다. 영원사 경내는 정성스러운 손길이 곳곳에 닿아 있어 맑고 깨끗한 산사의 풍경이 단아하였다. 영원사의 오후 햇살에 사찰 앞에 드리우는 산그늘이 갈색 풀밭과 초록색 풀밭과 어울리면서, 검은 화강암인 마천석의 큰 바위로 정연하게 쌓은 가람 앞의 축대와도 잘 조화된 풍경이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 백견불여일행(百見不如一行)'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지리산 삼정산의 유서 깊은 사찰인 영원사에서 수행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백견불여일문(百見不如一聞), 백행불여일문(伯行不如一聞)'이라고 되뇌어 보게 된다. 이곳 지리산 칠암자 산길을 걸으며(行) 백 번 산사의 풍경을 보는 것(見)보다 이 영원사 사찰에 전해오는 세 스님의 이야기를 한 번이라도 듣는 것(聞)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리산 칠암자 산길에서 지리산의 소중한 이야기들이 문화적 자산으로 생명력 있게 전승되기를 바란다. 지리산 영원사 도량 앞 가을 풍경, [사진] 이완우
    • 이야기
    • 지리산 생태 이야기
    2023-11-03
  • 아시나요? 지리산을 방장산이라고 부르는 까닭을
    지리산은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방장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1장(丈, 3.3 m) 크기의 정사각형 방이다. 방장은 덕이 높은 승력의 처소를 의미하기도 하며, 큰 수행 도량의 최고 어른을 이르기도 한다. 유마거사(維摩居士, 석가모니의 재가 제자)는 내 마음이 청정해지는 곳이면 그곳이 곧 도량이라고 했다. 삼정산 영원사 오전, [사진]이완우 유마경(維摩經)에 함축성이 풍부한 이야기가 있다. 유마거사가 병이 들었는데, 그가 거주하는 사방 1장의 방장(작은 방)에 그를 문병 온 3만2천 명이 모두 그 방에 앉았다고 한다. 이때 방장은 유한한 넓이를 가진 공간이 아니고, 무한히 포용할 수 있는 수행 도량의 내면적 포용성을 상징한다 하겠다. 함양군 마천면과 남원시 산내면 사이에 지리산 삼도봉에서 뻗어내린 산줄기로서 바위가 험한 삼정산(三丁山, 1,156m)이 있다. 이 산 아래에 하정, 음정과 양정 마을이 있어서 삼정(三丁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 산 정상에 당당한 세 봉우리가 천왕봉, 제석봉과 중봉의 지리산 주능선의 중심인 세 봉우리 형상을 닮아 있으며 가까이 마주보고 있어서 예사롭지 않다. 함양군 마천면의 마천(馬川) 물길로 향하는 이 삼정산 줄기의 왼쪽은 뱀사골 계곡이고, 오른쪽은 벽소령으로 오르는 계곡과 백무동 계곡이 가까이 있다. 이 삼정산에서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남동 사면은 바위가 돌출되며 세로로 서고 가로로 뻗은 지형이어서 수행 도량들이 험준한 공간에 둥지를 틀고 있다. 이 산의 함양 땅 기슭에 도솔암, 영원사(靈源寺), 상무주암(上無住庵), 문수암(文殊庵)과 삼불주암(三佛住庵) 등 수행처인 도량이 있다. 남원 땅 기슭에 약수암과 산지 평원에 실상사가 있다. 이들 도솔암에서 실상사에 이르는 7 도량을 연결하는 산길을 '지리산 칠암자 순례길'이라고 부른다. 삼정산 영원사, [사진]이완우 이 숲길의 산행거리는 약 14.5㎞이며, 7시간 안팎이면 걸을 수 있다. 도솔암은 그 길의 출발점에 있지만, 도솔암은 비법정 탐방로이므로 부처님 오신 날 하루만 이 길의 탐방이 허용된다. 삼정산 능선 따라 도량 찾아가는 산행 11월 초순 늦가을에 영원사에서 상무주암, 문수암과 삼불주암을 왕복하는 산행 탐사를 하였다. 마천면 양정마을에서 영원사에 이르는 포장 임도를 승용차로 오르다가, 가을 숲이 좋아서 영원사 1km 앞둔 임도의 길섶에 주차하고 걸어서 올라갔다. 영원사에서 상무주암까지는 1.8km의 너덜 바위길과 낙엽 쌓인 숲길을 한 걸음씩 힘들여 오르고 내려가기를 몇 번 반복해야 한다. 영원령(빗기재)에서 왼쪽 길로 가면 지리산 주능선인 삼각고지와 형제봉을 거쳐 벽소령으로 가는 길이다. 상무주암에 가까운 곳에 이르면, 삼정산으로 오르는 0.4km의 등산로가 있는데 출입금지의 안내판이 있다. 산정으로 향한 비탈길은 경사가 급해서 탐방이 위험하다. 상무주암은 출입하는 어귀에 정낭이 걸려 있어 도량으로 진입하는 발길을 멈추어야 했다. 가로 걸린 정낭은 수행 정진하는 산사 도량의 고요함은 존중해야 마땅하고 완곡히 제안하는 듯하다. 상무주암 옆 바위 서슬을 전망대 삼아 바라보는 지리산 주능선은 감동적이었다. 문수암까지 0.8km의 숲길은 걷기에 평탄하다. 문수암은 바위 절벽 중간에 자리를 찾아 올라앉은 듯하다. 문수암의 천인굴(千人窟)은 바위의 절리가 풍화되어 틈새가 벌어져 형성된 제법 큰 공간이다. 삼정산 상무주암 전망대, [사진]이완우 삼불주암 가는 길은 문수암에서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하는 0.8km의 산길은 제법 힘든 과정이다. 삼불주암은 한때는 비구니 암자였다. 삼불주암에는 삼층탑이 하나 있는데, 탑신의 사면에 사천왕, 보살, 부처 등 부조가 있어 둘러보는 의미가 있다. 삼불주암 아래의 삼정산 자락에는 ‘견성(見性)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까마귀나 까치도 경(經)을 외우며 간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견성은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축약일 것이다. 삼정산 기슭에 깨달음을 향한 수행자들이 인고의 세월과 정성이 많이 펼쳐져 있음을 이 견성골 이야기가 암시해 준다. 삼불주암에서 약수암과 실상사로 가는 길을 가늠해보며, 이애 발걸음은 영원사 방향으로 돌렸다. 삼정산 산행에서 영원사, 상무주암, 문수암과 삼불주암의 암자 건물 등 외형적 가람보다, 수행자들의 구도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는다. 삼정산 도량에 전해오는 수행자들의 이야기 영원조사(靈源祖師)는 신라 경문왕대(861~874)의 고승이다. 그는 이곳 삼정산의 토굴에서 8년 째 수행에서 얻은 바가 없이 산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한 노인이 물도 없는 산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 낚고 있었다. 노인은 산에서 허공에 낚싯대를 던져 8년 동안 물고기를 기다렸는데 10년은 채워보겠다고 했다. 이말에 영원조사는 다시 토굴로 돌아가 정성을 다한 노력으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설화가 전해 온다. 이 영원조사는 영원사를 창건하였으며, 상무주암은 861년에 영원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정산 문수암, [사진]이완우 조선 시대 임진왜란 때 승군을 이끌고 나라를 구하고 불교 중흥에 노력했던 인오(印悟, 1548~1623) 조사가 영원사에서 수행하였다. 그는 이곳 삼정산에 오래 머물렀다. 그는 삼봉산과 법화산을 잇는 능선 허리를 넘어 함양장터까지 150여리 길을 하루에 왕래하다가 어느날 한 고개 마루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 그 고개가 현재의 함양의 ‘오도재(悟道峙)’이다. 영원사에 가까운 도솔암도 인오 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인오 조사의 문집에 ‘머무름 없는 암자(無住臺)’라는 제목의 글이 있는데, 상무주암에서 머물며 지은 시로 보인다. 상무주암은 고려 시대에 보조 지눌(普照 知訥, 1158~1210)이 머무르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마적대사는 신라 시대 무열왕 때에 활동했던 고승이다. 함양군 휴천면의 엄천강 상류에 있는 용유담에는 마적대사의 설화가 많이 전승한다. 마적대사가 659년(무열왕 6년)에 문수암을 창건했다고 한다. 문수암 도량에 있는 천인굴은 암벽의 절리를 따라 자연히 생긴 바위 틈이다. 천인굴은 수십 명이 들어갈 바위 틈의 공간인데, 천 명이 들어간다는 천인굴이라 과장한 까닭은 천인굴을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구도의 정신적 영역으로 보아서 일 것이다. 문수암의 천인굴은 삼정산의 사찰이나 암자의 도량과 비교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토굴인데, 그 투박한 시원적인 모습에 오래도록 머무르게 된다. 이 천인굴이 유마거사의 방장처럼 여겨졌다. 병이 난 유마거사의 방장에 문수보살이 방문하여 법담을 나눈다. 이 천인굴 옆에 신라 시대에 마적대사가 창건한 도량이 문수암이라니 마음에 서늘한 바람이 부는 듯하다. 삼정산 삼불사, [사진]이완우 삼정산 자락에서 지리산을 방장산이라 까닭을 찾아서 삼정리의 하정 마을은 운치 있는 소나무 숲에 선유정(仙遊亭)이 자리하며 사냥꾼과 선녀의 옛 이야기를 전승한다. 옛날에 삼정산 계곡에 무지개가 하늘로 섰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였다. 선녀들이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 삼정산 계곡에서 밥을 지어 옥황상제의 밥상을 마련하여 하늘로 올라가곤 했던 것이다. 이 다음 줄거리는 여느 선녀와 나뭇꾼 유형의 이야기처럼 하늘로 돌아가지 못한 선녀가 사냥꾼과 지상에서 살다가 날개옷을 찾아 하늘로 올라갔다는 내용이다. 이 설화의 핵심은 이 삼정산 계곡에서 선녀들이 옥황상제의 밥을 지어 하늘로 올라간다는 상징적인 내용이다. 밥짓는 과정은 구도의 과정을 유사하다고 본다. 정성껏 쌀을 씻어서 불을 때고 물을 끓이며 뜸을 들이는 밥짓기는 심신을 정화하고 정성을 다하여 인고의 시간을 거쳐서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의 과정을 비유하는 것이 아닐까? 삼정산을 내려와서 실상사 앞 도로를 지나 산내면 고갯길에 멈추었다. 힘들게 기슭에 올랐던 삼정산 정상을 바라본다. 저 삼봉산의 세 봉우리가 지리산 주능선의 천왕봉, 중봉과 제석봉을 대응하며 삼불주암, 문수암과 상무주암 세 도량을 품고 있다. 삼정산 영원사 오후, [사진]이완우 지혜를 상징하는 지리산은 지혜로운 보살인 문수보살이 으뜸으로 연상되는 산이다. 지리산의 천왕봉에 해당하는 삼봉산의 가운뎃 봉우리에는 문수암이 자리하고 있다. 예로부터 삼정산 기슭에서 산나물을 채취하고 약초를 캐며 산에 들던 주민들은 '우- 우-.'하는 소리를 내며 서로 연락을 하며 소통하였다고 한다. 이 소리는 산과 호응하여 일체가 되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야호-, 야호-'하는 산과 따로 겉도는 듯한 인위적인 소리와 달리 '우- 우-.'하는 소리는 숲속을 흐르는 바람 소리이며, 바위가 계곡의 물소리에 호응하는 소리로 들린다. 삼정산 기슭과 계곡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울렸던 주민들의 이 안으로 깊이 울리는 소리를 언젠가 들어보고 싶다. 문수사의 천인굴의 바위 틈새의 고요한 공간은 잊을 수 없다. 지리산에 수행의 도량이 생기기 이전에 산짐승들이 이 바위 틈에서 머무르고 아침에 지리산 주능선에서 돋는 해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바위 틈에서 어둠을 지새고 아침에 밝은 해를 바라보는 짐승들은 얼마나 맑고 순수한 마음이었을까? 지리산의 오래되고 자연스런 방장의 하나인 삼정산 정상 아래 문수사의 천인굴을 다시 찾아가련다. 앞으로도 지리산을 오르면서 지리산을 방장산이라 부르는 까닭을 찾아보아야겠다. 삼정산의 여러 도량을 답사하며, 문수암의 천인굴에 마음을 오롯이 남겨두고 내려왔음을 잊지 않았다. 지리산 삼정산 정상 원경, [사진]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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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생태 이야기
    2023-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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