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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봄(春/見), 루이네
    지리산 봄(春/見), 루이네 강회진(시인, 독립연구자) 마음이 아픈 줄도 모르고 어른이 되어 앞으로 운이 좋아 80살 까지 산다고 쳤을 때 내게 남은 생은 살아온 날 보다 적다. 마음이 아픈 줄도 모르고 어른이 되었다. 무엇을 견디는지도 모른 채 인생이 지나고 있다. 나의 욕심으로 때론 너무 왔거나 지나갔거나 눈치 채지 못한 관계에 지치고 하지 않아도 될 일들까지 하느라 몸과 마음이 늘 고단했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는 없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나 진짜 나만을 위한 시간, 나를 위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더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드디어 나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하나. 오랫동안 지리산과 섬진강을 그리워했기에 구례, 하동을 꿈꾸었다. 언젠가 초여름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보았던 산내의 다랭이논 일렁이는 초록 물결과 손에 잡힐 것 같던 흰 구름, 고즈넉한 실상사의 저녁 예불 모시는 풍경들이 자꾸만 나를 불렀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모든 것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집을 구하기 어렵다는 산내에 빈 집이 나왔고 내놓은 아파트는 금방 입주자가 나타났다. 마치 오래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던 일처럼. 2. 세 가지면 충분하다 사람들은 내게 왜 그 먼 곳으로 가느냐 물었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먼 곳이라는 말일까? 나에게는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이곳이라 말하지 못했다. 마당에서 듣는 하루 두 번 실상사 범종 소리와 수달이 살고 있다는 람천의 우렁찬 물소리,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천왕봉. 이곳으로 이사를 위한 이유로 이 세 가지면 충분했다. 게다가 이곳은 내게 완벽하게 낯선 곳. 이사를 하는 날 고속도로에 눈발이 날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이사하는 날 눈이 오면 부자된다 안하요.”라며 애써 웃음을 보였다. 지리산 IC에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쿵쿵 뛰었다. 저 멀리 펼쳐진 지리산 자락이, 마을이 온통 눈으로 환하게 빛났다. 지리산에 곁들어 사는 일은 지리산이 허락해야 한다던데 드디어 나도 지리산의 선택을 받았구나. 다정한 지인들은 문패를 만들어 보내주었고 마당에 심을 꽃나무와 다양한 꽃씨를 보내주거나 어여쁜 커튼을 보내 새로운 출발을 기꺼이 응원해 주었다. 이사 후 두 번의 큰 눈이 내렸다. 저 멀리 눈에 덮인 천왕봉은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실상사 저녁 범종 소리를 들으며 구들방 아궁이에 불을 넣었다. 가끔 불씨가 아까워 고구마를 구워 강아지와 나눠먹었다. 그렇게 산내의 첫 겨울이 고요히 흘러갔다. 3. 산내는 산내말로 살래 맘씨 좋은 이웃이 밭 귀퉁이를 무상으로 빌려주셨다. 또 다른 이웃은 슬며시 거름을 부려놓고 가셨다. 감자를 심고 두둑 가에는 옥수수도 심어야지. 밭을 일궈 고랑 네 개를 만들고 거름을 뿌렸다. 다음날 맞춤비가 내렸다.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꽃씨를 담구고 씨감자 눈을 쪼개다보니 어느새 담장에 노란 개나리가 막 피어나는 춘분이 되었다. 밤마다 멀리 무논에서 개구리들이 정겹게 울어댔다. 어느 밤, 마당에 나가 올려다본 하늘, 선명하게 반짝이던 북두칠성이 말했다. 그래, 잘 찾아왔어. 너의 길. 이른 아침 단풍나무에 새가 날아와 한참을 앉았다 날아가는 흔하디흔한 그 풍경이 좋았다. 새들을 위한 모이를 뿌리고 수돗가 물을 갈아준다. 햇살이 길게 들어오는 이른 아침, 멀리 천왕봉을 게으르게 앉아 바라보는 그 시간을 놓칠까봐 아침 일찍 일어난다. 지리산에 와 매일 매일이 행복한 검은 개 루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면 이웃 어르신들이 묻는다. 어디사요? 놀러왔는가베? 아니요, 저 살래 살아요. 저 멀리 앞 산 노란 산수유 지면 대문 옆 감나무에도 반짝이는 새 잎 무성할 것이다. 마당에 정성껏 심은 모란이 피고 지는 깊은 봄이 흘러 옥수수를 따고 감자를 캐면 좋은 사람들 모아 잔치를 해야지. 지리산의 첫 봄, 살래의 첫 봄, 나의 첫 봄이 설렌다. -달궁수달래 /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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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09
  • 가여워 하는 마음
    가여워하는 마음 박두규/시인 어김없이 새날이 오듯 새해도 온다. 그리고 사람들은 바쁜 연말이나 연시의 와중에도 한 번쯤은 가는 세월이나 오는 세월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거나 다짐하게 된다. 나는 인생 간판에 시인 딱지를 붙이고 살다 보니 연말연시가 되면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가끔 되짚어보곤 하는 것인데 그때마다 박수근(화가)이 했다는 말이 떠오르곤 한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 기억에도 없는데 느닷없이 날아온 돌멩이처럼 나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수시로 울림을 준다. 예술이 아름다움의 영역이라면 그 아름다움은 선함과 진실함의 바탕에서 이루어진다는 어떤 믿음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의 말처럼 정말 평범한 일상생활 속의 착함과 진정함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그냥 스치고 지나갈 수도 있는 이 말이 나에게 강하게 올 수 있었던 건 아마 당시 이런저런 경전들을 읽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경전의 바탕이 선함과 진실함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때 그것들을 읽어내며 스스로의 단어로 정리해낸 말은 ‘가여워하는 마음’이었다. 그 즈음에 나온 시집의 제목을 ‘가여운 나를 위로하다’라고 붙인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새 정부가 들어선 후 이런저런 부족한 짓, 말도 안 되는 짓, 터무니없는 짓들을 많이 한다고 하는데 내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은 윤가와 그의 사람들에게는 이 ‘가여워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이긴 자가 진 자에 대해 그리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 또는 민초들에 대해 ‘가여워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됨의 근본이 없는 것이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연민도 없이 살아가는 것들이 무슨 정치며 예술이며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마음을 학문이나 사상에 앞서 삶 속에서 잘 보여준 옛사람으로 퇴계 이황 선생이 있다. 요즘 자본주의 기후 위기에 연계된 이런저런 책들을 보게 되었는데 21세기에 들어 사상적 출구를 모색하는 세계의 석학들에게 주목받는 사람 중에 퇴계 선생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퇴계를 생각하면 그의 사상이나 학문보다는 그가 살아낸 구체적인 일상 삶과 그를 통해 보여준 ‘가여워하는 마음’이 먼저 떠오른다. 그는 스물한 살에 결혼하고 아내 김해 허씨와 함께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지만, 아내가 결혼 6년 만에 병사한다. 그리고 3년 상을 치른 후 재혼하는데 맞아들인 권씨 부인은 정신질환이 있는 병약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퇴계가 마음속으로 존경했던 권주(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사약)의 아들 권질의 딸이었다. 권질은 조광조 숙청의 기묘사화 때 예안으로 귀양 와 있었는데 퇴계가 이따금 찾아가 문안 인사를 하며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권질은 병을 얻어 죽으며 여러모로 부족한 딸을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퇴계에게 딸을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퇴계는 마음속으로 존경하던 분의 집안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몰락하는데 자손들마저 불행해지는 것이 가슴 아파서 그 딸을 맞아들여 재혼하게 된다. 하지만 퇴계 선생의 진정 훌륭한 점은 결혼 후 그 정신적 질환이 있는 부인에게 ‘손님처럼 공경하는 법도’를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퇴계 선생이 공부하고 펼친 지식과 사상이 현실 속에 살아있는 학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또 그의 ‘가여워하는 마음’의 정도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알다시피 퇴계는 인간의 근본 마음 네 가지 중 앞세운 것이 측은지심(仁)이며 바로 ‘가여워하는 마음’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늘 4단四端의 마음을 중심에 두고 7정七情의 마음을 경계하는 것이 당시 선비들의 수행이고 공부였는데 선생은 삶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결혼생활도 16년 만에 권씨 부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퇴계의 ‘손님처럼 공경하는 법도’ 또한 그렇게 끝났는데 퇴계는 훗날 그 시절을 ‘결혼생활 16년 동안 더러는 마음이 뒤틀리고 생각이 산란하여 고뇌를 견디기 어려운 적이 없지 않았다’라고 술회한다. 이러한 고백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비록 퇴계가 그 시절을 자신의 덕을 쌓는 수양의 화두로 삼아 모범을 보였다고는 하나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나를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퇴계의 ‘가여워하는 마음’을 짐작하게 하는 또 하나의 일화는 그의 며느리 이야기다. 둘째 아들 채(寀)는 정혼한 상태였는데 그 아들이 결혼을 앞두고 급사하게 된다. 그래서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예식도 못 올린 며느리를 맞이해야만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퇴계는 당시 삼종지의三從之義의 엄격한 규율을 깨뜨리고 처녀의 몸으로 며느리가 된 여인을 친정으로 돌려보내 재가하게 한다. 퇴계 선생의 삶의 바탕에 있던 ‘가여워하는 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퇴계는 엄격한 유가의 선비였으나 깊은 인간애에 바탕을 둔 스스로의 삶을 꾸려내었으며 세상의 법도 이전의 ‘불법不法의 예’를 보인 진정한 유가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퇴계는 첫째 부인이 죽은 후 두 아들을 양육하기 위해 관례에 따라 첩을 들였는데 그 첩도 선생보다 먼저 죽게 된다. 첩에게서 낳은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 또한 자신의 호적에 올렸고 차후에 그 아들의 후손들이 적서의 차별을 받지 않도록 족보에 적서의 구별을 두지 않게 하였다. 또 퇴계 선생은 이런저런 굴곡의 가정사를 다 넘기고 홀아비 생활을 하는 중에 단양군수로 있을 때는 단종 복위에 참여했던 사대부의 후손으로 어린 나이에 관기가 된 기생 두향을 소실로 맞아 외로움을 달래고 남녀의 사랑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서자와 관기라는 당시 천한 신분의 사람에게도 시대의 법도를 넘어 사람의 근본에 있는 ‘가여워하는 마음’으로 차별 없이 대하였다. 나는 퇴계 선생의 아픈 가정사를 보면서 평범한 일상생활 속의 착함과 진정함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박수근이 말한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그 말의 깊이를 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황이라는 사람은 위대한 학자요 사상가이기 전에 ‘가여워하는 마음’이라는 존재의 근본을 깨달은 사람이고 그렇게 자신을 살아낸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작금의 우리 사회는 이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는가. 국정을 운영한 새 정부의 2022년을 보면서, 제 이익과 안위만을 생각하는 권력을 보면서, 그들의 치졸한 양아치 정치를 보면서, 윤가와 그 권력의 발뒤꿈치를 쪼아 먹고 사는 닥터피쉬들을 보면서, 그 언론과 정치권과 검찰과 윤의 사람들을 보면서, 언감생심焉敢生心 ‘가여워하는 마음’을 꿈꿀 수는 있을 것인가 하는 절망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나라를 맡긴 것은 국민이니 한편으론 할 말도 없다. 이는 모두 자본주의, 자유주의라는 왜곡된 이데올로기 안에서 돈만 있으면 되고 나만 살면 된다는 그릇된 가치관의 정서가 우리 사회 안에서 당위적 정당성을 얻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가치관의 변화 없이는 우리 사회의 ‘가여워하는 마음’은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퇴계 선생처럼 개개인의 진정성으로 실천하는 정도를 넘어 지난날 촛불처럼 온 국민이 지극정성으로 ‘가여워하는 마음’을 기원하는 계묘년이 되기를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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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6
  • 인간의 탐욕, 그 쓸쓸함에 대하여
    인간의 탐욕, 그 쓸쓸함에 대하여 박 두 규 (시인) 연말연시를 맞아 바쁘게 살다가 어쩌다 담배라도 하나 빼물면 ‘아, 한 해가 또 가는구나.’ 하며 나도 모르게 긴 숨을 내뱉게 된다. 무슨 큰 걱정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그 긴 숨은 한숨처럼 내뱉어져 스스로를 우울하게 한다. 어쩌면 그 우울함은 한 해가 가고 또 한 살을 먹고 그만큼 남은 삶이 줄었고 그만큼 죽음에 다가갔다는 무의식적인 뇌의 반응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이렇게 외부의 상황에 별다른 생각도 없이 반응하는 몸과 뇌의 기억에 끌려 다니는 것이 못마땅해서 자주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편이다. 그리고 그런 기억의 관성적 반응을 하는 나를 ‘들여다보는 나’의 편이 되어 다시 생각을 정리해내곤 하는 버릇이 있다. 그럴 때 시로 정리되는 경우도 간간이 있는데 올 연초에도 이런 시를 썼었다. “새해 첫 모심/ 오시는 숨, 기쁘게 모시고/ 가시는 숨, 미련 없이 여읜다./ 모든 게 고맙다./ 새해 꼭지를 따며 스스로에게 당부한다./ 허접한 일상을 살지라도/ 세상의 모진 바람에 고개 숙이지 않기를./ 이승의 궁벽한 어느 구석일지라도/ 아무런 미련 없이 처박히기를.” 지리산 자락, 섬진강 하류 기슭 어느 구석에 거처를 마련하고 처박힌 지도 벌써 10여년 세월이 흘렀다. 나는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사실은 새로운 인생살이를 꿈꾸며 들어왔다. 누구든 자신의 새로운 삶을 위해서는 그 상황과 조건을 바꿔내려고 새로운 각오를 한다. 나도 이곳에 들어오며 새 집을 짓고 상량문에 그 마음을 새겼다. 노자와 묵자에서 빌려와 無爲無不爲무위무불위와 愛人若愛身애인약애신이라는 글을 새겼는데 집이 내려앉을 때까지 얻지 못할 말을 새겨놓고 쳐다볼 때마다 후회하며 살고 있다. 無爲無不爲를 새길 때만해도 나름의 해석을 글로 정리하기도 했는데 그 일부를 보면 대충 이렇다. “......나무는 어디도 가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세상의 비와 바람을 다 맞는다. 그리고 꽃을 피워 봄이 있게 하고, 벌과 나비의 양식이 되고, 씨를 맺어 생명을 잉태한다. 평생을 한 곳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지만, 스스로에게 또는 세상에게 하지 않은 것이 없다. 사실은 이처럼 모든 것은 그 존재 자체로 스스로 빛나는 것이다.......” 무엇을 인위적으로 하지 않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無爲無不爲)는 그 말이 당시에는 너무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일상에서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높은 경지의 삶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냥 그 내용이 멋있어서 그렇게 나댔었나 싶다. 하지만 21세기 현대인들은 이 무위무불위의 진리를 용납하지 않는다. 저절로 운영되는 우주자연의 존재적 질서와 그 존재의 순환적 질서를 철저하게 깨며 이루어낸 것이 오늘날 현대문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은 자본주의를 만나 발전된 것이기에 오늘날 우리 문명사회는 자본의 본질적 특성의 하나인 탐욕을 내장하게 된다. 성장주의나 물량주의, 물질만능주의 그리고 지독한 이기주의, 이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탐욕을 그대로 실현시켜온 현대문명의 특징들이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자본의 논리는 끝없이 탐하는 인간의 탐욕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탐욕은 반드시 폭력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돌아보면 이러한 탐욕이 상류 기득권층의 카르텔을 자연스럽게 형성하여 보이지 않게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법을 만드는 정치인과 법을 집행하는 검사들과 그것의 여론을 주도하는 언론인들이 결탁하면 대한민국은 이들의 나라였다. 그 중심에는 무소불위의 권력인 검찰이 있었다. 검찰의 눈으로 보면 누구든 털면 나오는 것이고, 누구든 죄인으로 만들고 안 만들고도 그들의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러하니 골목대장 검찰의 주변에 붙은 언론인과 정치인들, 재벌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검찰은 이러한 카르텔을 형성하며 지금껏 부정부패를 저질러온 곳이지만 이것을 바로잡기는 너무 어렵다. 과거 군부독재 시절의 검찰은 모든 법의 우위에 있는 중앙정보부나 안기부 같은 기관이 충분히 통제할 수 있어서 청와대의 수족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족쇄에서 풀려난 지금은 검찰을 통제할 기관이 없으니 그야말로 최상위 포식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의 본질적 원인은 4,5백 년 동안 진화해온 자본주의 속에서 제어장치 없이 커온 인간의 탐욕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탐욕이라는 것은 생존의 욕구로부터 시작되고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 생존욕구가 탐욕으로 진화되는 경계선을 인간은 제어하기 힘들다. 그래서 사회적 도덕률과 법률로써 재어하려 하나 그 법률 자체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것도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法이라는 것이 글자처럼 물이 흐르는 것처럼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회라는 곳이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그곳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이 자신의 이익과 파당적 이익에만 매몰되어 변화를 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 국민들이 이들의 진영에서 휘둘리지 않고 우리사회의 바른 잣대로서의 그 몫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이런 일에 참여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탐욕은 이미 21세기의 삶 속에서 인간의 보편적 정서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다. 이 탐욕이야말로 폭력의 근원이고 모든 순환 질서를 깨는 근본 원인이지만 이것은 오늘날 현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에게는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당위적 삶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 또한 우리사회나 다른 누구의 탐욕에는 분노하면서 자신의 탐욕에는 관대한 그런 뻔뻔스러운 삶을 잘도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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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저기 민들레
    2022-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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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없는 지리산이 우리에게 건네는 말
    말없는 지리산이 우리에게 건네는 말 환갑이 넘도록 지리산 천왕봉은 딱 한 번밖에 오르지 못했다. 팔팔한 20대 중반, 1980년대 중반이었으니 벌써 약 40년 전이었다. 처음 출발한 우리 일행은 완전 초보 4명이었는데, 중간에 또 다른 초보들 2명씩 두 팀이 합류, 모두 8명이 같이 움직였다. 과연 해낼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섰지만, 여럿이 같이 가니 두려움도 확실히 줄었다. 당시 우리는 반선으로 들어가 뱀사골 초입 와운마을에서 꿀벌을 키우는 부부 댁에서 민박을 하고 뱀사골을 따라 올랐다. 반야봉이나 노고단, 피아골 쪽에서 오르는 이들에 비하면 ‘거저먹는’ 길이라 했다. 그러나 난생 처음 오르는 지리산, 내겐 정말 ‘지리한’ 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2박 3일 코스로 가느냐고 물었지만, 막상 내겐 4박 5일도 짧고 급했다. 알고 보니, 나는 1915미터 지리산을 마치 ‘동네 뒷산 가는’ 기분으로 올랐던 것! 이틀째인가 사흘째 되던 날, 정말 힘들다며 능선을 투덜투덜 걷는데, 50대 정도로 보이는 아저씨들이 몇 지나며 “이 더운데 뭐 할라꼬 사서 고생일꼬? 그냥 집에서 세숫대야에 발이나 담글 걸.”하는 푸념을 했다. 마치 내게 들으라며 한 말처럼! 그런데 지금까지 그 말이 내 기억에 있는 걸 보면 정말 와 닿았던가 보다. 지금 생각해 보니, 뱀사골을 따라 남쪽 화개재까지 올라 백두대간 능선을 타고 동북으로 토끼봉, 명선봉, 연하천대피소(삼각고지)까지, 다시 동쪽으로 형제봉, 벽소령을 거쳐 또 세석산장까지, 또 동북으로 연하봉, 장터목을 지나 천왕봉으로 가는 코스였다. 내려오는 길은 중산리 가파른 길을 택했는데, 사람들은 가장 ‘빠른 길’이라 했지만 내게는 아무리 빠르다 해도 역시 ‘지루한’ 길이었다. 지금까지 또렷이 가진 또 다른 기억은, 중산리 가파른 길을 내려오고 또 내려와도 마을이 보이지 않다가 (망바위인지 칼바위인지 그 인근일 텐데) 마침내 저 멀리 아득히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자 나도 모르게 “야호~, 다 내려왔다!”라며 탄성을 질러댔다. 바로 그 때, 중산리 초입에서부터 그 가파른 길을 힘들게 올라오던 사람들이 “뭐라꼬예? 이 정도면 거의 다 올라온 줄 알았는데, 이게 다 내려온 거라꼬예?”라며 한숨을 짓는 게 아닌가? 그 순간 ‘아차!’ 싶었다. 숨차게 올라오는 사람들의 마음도 모르고 나는 내 생각만 하며 “다 내려왔다!”며 크게 환호했던 것! -지리산 천왕봉 @ 지리산-인 등산과 입산 여하간 그렇게 4박 5일 동안 ‘사서 고생한’ 덕분인지 나는 그 뒤로 지리산 천왕봉 등반이라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바로 그 마음을 아는 듯, 어느 스님이 ‘등산’과 ‘입산’을 구별하는 걸 보고 무릎을 쳤다. 등산(climbing)이란 개념은 산을 타고 오르는 것이니, 정복의 이미지가 있다는 얘기다. 대체로 등산을 하면 최고봉에 올라 두 손을 들고 만세를 부르거나 반드시 ‘깃발’을 꼽고 사진을 찍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다. 친한 친구 중에도 등산 중독자가 있어, 가능한 한 주말마다 ‘묻지 마, 등산’을 하는데, 자기 목표는 1년 52주 중 최소한 50개 주말마다 산 정상에 올라 1년에 50개의 산을 정복하는 것이라 했다. 반면, 입산(entering)이란 산의 품속으로 살며시 깃드는 것인데, 자연스레 어머니 이미지가 떠오른다. 등산 개념에서는 온갖 장빗발이 중요하지만, 입산 개념에서는 마치 ‘동네 뒷산 가듯’ 편한 차림이다. 정복자 이미지와 달리 꼬맹이들처럼 엄마 품에 포근하게 안기는 기분으로 산에 가는 것! 나는 그 스님의 구분법에 맞장구를 쳤다. 결국 나와 일행은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등산길을 입산길로 착각했다! 그런 내가 엉터리 종주라도 하고 살아 오다니! 등산 아닌 입산! 바로 이거였다. 따지고 보면 나 역시 고향 마산의 무학산에서부터 창원의 천주산, 관악산 연주대, 설악산 대청봉, 속리산 문장대, 계룡산 천황봉, 한라산 백록담 등으로 제법 많은 등산을 했고, 정상까지 올라 사진도 꽤 찍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비록 엉터리였지만) 지리산 첫 종주 경험은 내가 ‘등산 개념과 거리두기’를 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설사 그 뒤로 등산을 하더라도 나는 ‘입산’ 개념으로 느긋하게 즐기며 산의 품에 깃들었다. 그러던 중 반갑고도 반가운 올레길(2007년 제주)과 둘레길(2008년 지리산)이 생겼다. -지리산 중봉 @ 지리산-인 입산으로서의 지리산 둘레길 유럽엔 프랑스 남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가는 약 800킬로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어 많은 세계인이 몰린다. 그 길을 다녀온 당시 언론인 서명숙 씨가 제주에도 그런 길을 만들자고 제안, 2007년부터 올레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지리산에서도 둘레길이 2008년부터 열렸다. 수직적인 등산 문화를 수평적인 입산 문화로 바꾸는 계기였다. 나 역시 간디학교 동기 학부모들(2004년 입학생 자녀 기준)과 함께 2008년 가을에 지리산 둘레길을 알차게 걸었다. 2008년 4월 처음 열린 지리산 둘레길(순례길)은 남원시 산내면 매동마을에서 시작, 함양군 마천면 금계마을을 거쳐 휴천면 세동마을로 간다. 산세가 매화처럼 예쁜 매동마을 전 이장님과 당시 부녀회장님은 “아침밥 든든히 먹고 길을 나서시라”면서도 산 좋고 물 좋고 인심 좋은 마을공동체를 지키느라 몇 해 전 막개발 바람에 대항해 4년 동안 목숨 걸고 싸웠다고 자랑했다. 두 주민이 옥살이를 하면서도 끝까지 싸워 이겨, 그 뒤에 녹색 체험마을까지 만들었다 했다. 우리 일행 모두 뜨거운 박수를 쳤다. 고불고불 아름다운 다랑이 논을 지나 거북이 등같이 생긴 등구재를 쉬엄쉬엄 올랐다. 고갯길 한참 아래 옹달샘 곁엔 원두막 모양의 쉼터가 있었다. 칠십 노부부가 마치 자식들 맞이하듯 반갑게 웃으셨다. 점심도 못 먹은 우리에게 ‘식은 밥’을 내놓으며 “이걸로 밥이 되것누!”라며 챙겨주셨다. 할배는 “얼렁 싱싱한 고추 좀 따 와야제” 하시고, 우리가 “고추는 여기도 많은데요…”라며 농을 걸자 할매는 “그런 맛없는 고추 말고…” 하시며 한바탕 웃겼다. 돈 받고 파는 막걸리와 라면이지만, 아직도 사람 냄새 풀풀 났다. 당시엔 광우병 쇠고기와 멜라민 소동이 세상을 뒤흔들었지만 지리산 그 곳엔 풋풋한 삶이 살아 있었다. 한참 걸어 멋진 당산나무 아랫녘 창원마을로 들어서니 따사로운 가을 햇살 속에 노인 몇 분이 나락을 말리느라 고무래질로 바빴다. “올해 농사 잘 됐나요?”라며 인사로 여쭈니, “예, 잘 됐어예!”라며 넉넉하고 환한 답이 돌아왔다. 노인의 얼굴도 수수밭과 조밭의 옹골찬 알곡처럼 풍요로워 보였다. 굽은 허리에 손수레를 밀고 가는 할머니를 도와 옆에서 뒤에서 같이 밀고 가는데 (한 해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나서 그런지) 목이 메고 눈매가 촉촉해졌다. 그렇게 지리산 높이는 2킬로도 안 되지만 둘레길은 300킬로나 되니, ‘지리산 순례길’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특히 곳곳에 걸친 옛길·숲길·고갯길·강변길·논둑길·마을길·농삿길 등을 서로 이어 한 바퀴 도는 길이니, 산도 만나도 사람도 만나고 강도 만나고 장승도, 마을도 만난다. 이렇게 둘레길은 뭇 생명을 하나로 잇는다. 2000년에 ‘지리산마음으로 세상을 배우자’며 시작된 공부모임이 2004년부터 제안, 마침내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완성한 지리산 둘레길! 2008년의 ‘지리산 숲길 공동협약서’에는 “사회는 진화합니다. 이념의 전장, 지역 갈등의 현장, 계급과 젠더, 우리를 둘러싼 모순이 지리산에 그대로 있습니다. 민관 협치, 지역 통합, 지리산둘레길 사업에 녹이려 했습니다. 주민과 행정이 분리되고, 전라도와 경상도, 좌익과 우익이 있는 지리산의 그늘을 하나의 길, 하나의 공동사회로 묶는 고리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분열과 갈등을 넘어 ‘하나로 이어짐’을 향하는 둘레길, 등산이 아닌 입산(入山)의 깊은 뜻이 바로 이 길을 통해 완성된다. -지리산 주능선 @ 지리산-인 남명 조식의 지리산과 지금 우리의 지리산 봉건주의 조선시대를 살다 간 재야학자 남명 조식 선생(1501~1572)은 환갑 이후에 지리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산청 덕산에 집(산천재)을 짓고 후학을 양성했다. 당시 선생은 맑은 개울 옆에 정자를 짓고 한시를 지었는데, 그것이 ‘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다. 請看千石鐘(청간천석종): 천 석들이 큰 종을 보게나 非大叩無聲(비대고무성):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네 爭似頭流山(쟁사두류산): 어떻게 하면 지리산처럼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아마도 선생은 지리산의 변함없음, 믿음직스러움에 깊이 매료된 것 같다. 그러기에 지리산의 품속에 깃드는 입산을 모두 12차례나 했다고 한다. 선생이 남긴 <유두류록>(1558)에는 선생이 지리산에 깃들며 단순히 자연만 본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고 역사를 보았다는 흔적이 소상히 남아 있다. 남명 사후 20년만에 벌어진 임진왜란(1592~1598) 당시 3대 의병장은 물론 총 57명의 의병장이 남명의 직계 제자였다. 또 그 제자들의 제자나 후배가 길러낸 의병들까지 합하면 모두 1만 명에 이르는 의병들이 남명의 영향을 받았다고 기록된다. 이는 아무래도 선생의 경의(敬義)사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경(敬)은 삼가기와 받들기를, 의(義)는 이해득실보다 정의로움을, 말보다 실천을 강조하는 사상이라고 압축할 수 있다. 남명 선생 이후 수백 년 세월이 흘러 봉건제 사회가 자본제 사회로 변모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일제의 식민지 수탈과 미군정으로 인한 분단을 경험했다. 미군정과 한국전쟁은 지리산을 ‘좌우 이념 대결의 현장’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막연히 “좌우 이념 대결의 현장”이라고만 하면 안 될 듯하다. 엄밀히 보면, 재빨리 ‘강자 동일시’를 통해 출세와 재물을 추구한 매판 지주계급과 “해방이 되면 우리 땅 몇 마지기 갖고 농사짓는 게 소원이요.”라던 평범한 민중계급 사이의 싸움이었다. 어쩌면 지금도 이런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지 모른다. <빨치산의 딸>에서 정지아 작가는 “오십 평생 남의집살이만 했다는 (빨치산) 김 영감의 손”에 대해 “지문이 다 닳아 없어지고 갈쿠리처럼 휘어 흉측”했지만, 그 마음만큼은 자기 땅에서 자기 힘으로 농사지어 알콩달콩 살고 싶은 소원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 “그 소박한 소원조차도 이뤄지지 않는 세상이 저 순박한 김 영감을 혁명의 물결로 밀어 넣은 것”이라 보는 작가는 “오십 평생 노동으로 지문이 닳아 없어진 김 영감이 자기 땅 한마지기 가지고 사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일까?”라는 화두까지 던진다. 그러나 1950년대의 이승만 독재, 1960년대~1970년대의 박정희 독재, 1980년대의 전두환, 노태우 독재 시절이 끝나고 1990년대 김영삼 문민정부와 김대중 국민의 정부를 거쳐 노무현 참여정부, (2008년 이명박 정부, 2013년 박근혜 정부를 지나) 그리고 2017년 이후 문재인 촛불정부까지 거쳤건만 여전히 지리산은 아프고도 쓰라리다. 그것은 전통적인 계급 전쟁 때문만은 아니다. 오늘날은 평범한 민중조차 다수가 자본의 자기증식 논리에 불과한 ‘개발과 성장’ 이데올로기를 뼛속 깊이 내면화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지리산에 대한 자본의 공격은 끊이지 않는다. 거의 정상까지 자동차가 올라가는 도로를 건설하는 것도 모자라 여러 개의 지리산댐(섬진강 구례양수댐, 곡성양수댐 포함)을 만들려는 계획, 케이블카를 설치하겠다는 구상, 산악열차, 짚 라인, 출렁다리를 놓겠다는 발상 등등 자본을 위한 ‘창조적 파괴’의 아이디어들이 쉬지도 않고 쏟아진다. 자본이 증식을 위해 악을 쓰며 발버둥치는 것은 어쩌면 자본의 본질상 당연한지 모른다. 하지만, 파괴와 위험을 예방해야 할 국가(중앙정부나 지방정부 모두)가 주민들 투표를 통해 권력을 대리 행사함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동일한 논리와 태도로 임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사막화하는 꼴이다. -골프장 건설을 위해 파헤쳐진 구례 산동 지리산 자락 @ 지리산-인 지리산의 속삭임 해월 최시형 선생의 “사사천 물물천(事事天 物物天)” 사상처럼, 매사가 하늘이고 만물이 하늘이기에 우리는 “땅도 함부로 밟을 수 없다”(조성환, “한국의 생명평화사상과 지리산운동”, <지리산의 마음> 중).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람을 포함한 만물이 서로 생명을 주고받는 ‘생명네트워크’라고 본다면, 개개의 사람은 물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심지어 돌멩이 하나조차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모두, 공감과 대화의 주체다. 생각건대, 46억년 지구 역사 중 인류의 역사는 400만 년 정도다. 또, 지금처럼 농사짓고 사는 시대는 불과 1만 년 전부터다. 그 중에서도 지금 같은 자본주의 시대는 길어도 400년! 자본과 인간이 공모해 만든 (특히 최근 100년간 굳어진) ‘집단자살체제’가 곧 코로나19와 기후위기, 6차 대멸종 위기다. 바로 이 총체적 위기에 인류가 세상 만물을 모두 조심스레 잘 받들며 살아도 모자랄 판! ‘과연 어떻게 살 것인가?’ 지리산의 품에 고요히 깃들면서, 둘레길을 걸으면서 모두 깊이 고뇌해야 할 화두다. “걸어가면서 묻는다.”는 멕시코 사빠띠스따 농민군들의 결기가 새삼 새롭다. 그러면서 백무산 시인의, “숲속을 거닐면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기보다 무엇으로부터 자신이 발견되는 것을 느낀다... 그 시선은 나의 내면을 감싸고 있는 단단한 껍질을 깬다.”는 말이 귀를 때린다(“인간성 중독과 머나먼 시선”, <녹색평론> 183호, 2023 가을). 지리산댐백지화 기념사업회(준)가 엮은 지리산운동 백서 <지리산의 마음>은 이렇게 말한다. “지리산의 눈으로, 지리산의 가르침으로, 지리산의 마음으로 살고자 하는 생명평화운동”은 “늘 현재 진행형”이라고! 사업가 김철호(1922~1995) 선생이 1990년, 많은 재물을 사회 환원하며 “뼈에는 색깔이 없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지리산 곳곳에 흩어진 좌익과 우익의 모든 영혼을 달래달라는, 사실상 유언이었다. ‘이제 우리는 그 모든 상흔을 딛고 생명평화와 공생공락의 가치로 거듭나야 한다.’ 말 없는 지리산이 수천, 수백 년에 걸쳐 (남명 선생의 감탄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으며” 묵묵히 우리에게 건네는 말은 바로 이게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라도 ‘가치를 낳는 가치’인 자본과 자본주의를 제대로 공부해야 될 성싶다. - 강수돌(고려대 명예교수, 전 마을이장) -지리산 일출 @ 지리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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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5
  • [지리산인 칼럼] “여러분은 사회적 시인(社會的詩人)!” You are Social Poets!
    “여러분은 사회적 시인(社會的詩人)!” You are Social Poets! 성염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 지리산 자락자락에 안겨 살면서 문정댐이니 케이블카니 산악열차로부터 마고할메 치맛자락을 지켜주려고 맘고생하는 이들에게 “여러분은 시인입니다. 사회적 시인입니다(You are social poets). 인간사회의 약자들을 갈라치기하고 창조계의 생물들을 쓰고 폐기(廢棄)하는 문화 풍조 속에서 지구라는 공동주택(common home)을 지키겠다고 꿈꾸는 시인들입니다.”라는 격려를 보낸 종교지도자가 있다. 로마 교황 프란치스코다. 2021년 10월 16일, 전 세계 사회운동가, 민중운동가들에게 보낸 메시지였다. 그는 10년 전 가톨릭교회에서 성베드로의 제266대후계자로 뽑히자마자 전 지구에 충격을 가해왔다. 13억 가톨릭신도들을 지도하는 기조문서 「복음의 기쁨」에서, 그는 쇠푼께나 있다고 거들먹거리며 세계 금융시장과 대기업들과 다국적기업들을 이미 장악한 ‘신자유주의’ 경제를 ‘살인경제(殺人經濟)’라고 단언하였다. 미국 보수언론인(Rush Limbaugh)에게서 ‘순 빨갱이(pure Marxist)’라는 욕설이 나옴직했다. 그리고 ‘하나뿐인 지구’라는 자연을 파괴하지 말자고, 생명체들을 멸종시키지 말자고 호소하는 「찬미 받으소서」라는 문서를 내놓자(2015)미국 폭스뉴스가 이 교황을 ‘지구상의 가장 위험한 인물’로 단정했다. 종교는 ‘생태 복음(生態福音)’이어야 프란치스코는 지구(地球)가인류와 모든 창조물의 ‘공동주택’이니까무릇 종교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반길 기쁜 소식, 곧‘생태 복음(生態福音)’이어야 한다고 확대한다. 그가 구상하는 그리스도교는 ‘지구에 충직하면서 모든 생명계를,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종교’다. ‘타자들에 대한 개방 여부’로 개인적 집단적 구원이 결정된다는 종교적 신조를, 이제 창조계 전체로 열어 우리 다함께 구원에 이르자고 요청했다. 4세기의 인물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사회적 사랑(amor socialis)’이라고 명명했다. 교황의 문서 「찬미받으소서」는 13세기 인물 아씨시의 프란치스코(1181-1226)의 시구에서 제목을 따왔는데 ‘하느님의 어릿광대’로 자처한 저 인물이 “저의 주님, 찬미 받으소서. 누이이며 어머니인 대지로 찬미 받으소서. 저희를 돌보며 지켜주는 대지는 온갖 과일과 색색의 꽃과 풀들을 자라게 하나이다.”라고 읊은 ‘태양의 찬가’는 이탈리아 시문학의 효시로 평가된다. 지구라는 환경 체계를 위협하고 공멸을 향해 가는 인류에게 우리 공동주택을 덮치고 있는 재앙을 알리고, 누구보다도 종교인들에게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의 전환, 생활양식의 변경, 그리고 생태영성(生態靈性)의 함양을 호소했던 현자였다. “우리와 함께 삶을 나누는 누이이며 두 팔 벌려 우리를 품어 주는 아름다운 어머니와 같은 지구가 지금 울부짖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비명에 귀 기울이고 창조계 전체의 신음을 귀여겨 들읍시다.”라고 하소연하는 프란치스코교황은취임 후 첫 방문국으로 택한 한국에서 방한 내내 세월호 배지를 가슴에 달고 다녔고, “그것 좀 떼고 중립을 지키시오!”라던 한국인 고위성직자에게 “타인의 고통 앞에는 중립이 없소!”라는 결연한 답변을 우리 국민의 뇌리에 남겼다. 1968년 창립된‘로마클럽’ 이래로 미래학자들이 지구온난화로 인한 인류세(人類世)의 임계점이 수년밖에 안 남았다고 경고하는데도, 아마존을 불 지르고 화석연료 소비를 증대시키고 산과 강에 삽질하며 무수한 종을 말살시키고 있는 짓은 “인류의 자살이요 환경학살이요 생물 종의 학살”이라는 것이 교황의 외침이다. 한번 저지른 환경파괴는 거의 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인류도 국가사회도 양단간의 선택기로에 놓여 있는 현시점에서, 환경운동가들이야말로 ‘죄의 구조’, ‘죽음의 체제’에 맞서서지구상의 생명을 구하겠다고 투쟁하는, 인류의 주춧돌이라고 독려한다. 교황은 이 메시지에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요청합니다. 광산, 석유, 삼림, 부동산, 농산품을 좌우하는 대기업들에게 호소합니다. 삼림 파괴를 중단하시오! 습지 파괴를 중단하시오. 산을 훼손시키지 마시오. 강을 오염시키고 바다를 오염시키는 짓을 그만두시오, 주민들과 곡물을 [화공약품으로]중독시켜가는 짓을 그만두시오!”라고 경고한다. 그는 세계 곡물회사들, 무기장사들, 허위와 조작을 일삼는 언론재벌들, 강대국과 국제금융기관들에게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같은 호소를 보냈다. ‘잘 사는 세상’이란 ‘인류 전체와 정의롭게’, ‘창조계 전체와 조화있게’ 살아감’이라는 가르침이다. 윤정권이 두려워하는 것은 ‘꿈꾸는 사람들’ 국민의 촛불 혁명을 꺼뜨린 현정권이 한반도의 가난한 이들과 노동자와 농민, 여성에 대한 증오와 갈라치기로 뭉쳐진 집단으로 드러나면서,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허가와 원전확대로 환경운동가들은허탈하다 못해 공포에 사로잡히는 듯하다. 교황은 우리에게 말한다. “기득권 수호에 앞장선 자들에게 가장 위험한 인물들은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강자들의 집단적 이기심, 약자들의 영합, 중도층의 체념을 시인들이 문제 삼으면서 심간을 편치않게 만드는 까닭입니다.” 우리의 꿈은 국민이 유일하게 권력에 접근하는 선거와 투표에서 반영되기도 한다. 한반도 남쪽의 국립공원들의 생태를 살리는 노력에 헌신하는 우리에게 프란치스코는 이런 격려를 보낸다. “무한성장의 야심으로 자연을 오로지 수탈하고 착취하고 폐기하는 사고방식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려면 꿈을 꿀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꾸는 꿈은 인류라는 종족에게 자유, 평등, 정의 그리고 존엄을 그려가고실현하려는 원대한 꿈입니다. ‘보다 나은 세상(a better world)’을 만들고 보전하여 후손에게 물려주려는 꿈입니다. 우리 시인들이 꿈꾸는 이 꿈을 통해서 창조주의 꿈이 우리 모두에게 관통하고 드디어 역사로 실현되기에 이릅니다.” 이 나라의 금력과 권력을 독점적으로 누리는 자들은 국민의 1%에 불과하며, 현정권의 제반행태는 공포가 핵심이다.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등의 진보정권의 출현에서, 그동안 중국, 일본, 미국에 의존해서 영화를누려온 노론파가 그 기득권을 영구히 누리지는 못하리라는 공포심을 감추러 자기들은 무슨 파렴치도 감행할 수 있다는허세를 보인다. ‘조직’의 그 허세를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으면 저자들은 허깨비다. 우리는 남북의 분단을 넘어, 그리고 우리네 금수강산이라는 창조계 전체와 더불어 조화를 이루는 삶을 꿈꾸는 까닭에 저자들이 우리를 두려워한다. 운동가들이 공포를 품을 것은 아니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저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매듭짓는다. “우리 함께 꿈을 꿉시다! 저 참담하고 오래도 가는 체념에 우리는 절대 빠지지 맙시다.” *이곳의 사진은 4월 14일 정부세종청사 앞에서 진행된 ‘414기후정의파업’에 참가한 박두규 시인, 최상두 대표가 찍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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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저기 민들레
    2023-04-22
  • 지리산 봄(春/見), 루이네
    지리산 봄(春/見), 루이네 강회진(시인, 독립연구자) 마음이 아픈 줄도 모르고 어른이 되어 앞으로 운이 좋아 80살 까지 산다고 쳤을 때 내게 남은 생은 살아온 날 보다 적다. 마음이 아픈 줄도 모르고 어른이 되었다. 무엇을 견디는지도 모른 채 인생이 지나고 있다. 나의 욕심으로 때론 너무 왔거나 지나갔거나 눈치 채지 못한 관계에 지치고 하지 않아도 될 일들까지 하느라 몸과 마음이 늘 고단했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는 없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나 진짜 나만을 위한 시간, 나를 위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더 늦기 전에. 더 늦기 전에. 드디어 나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하나. 오랫동안 지리산과 섬진강을 그리워했기에 구례, 하동을 꿈꾸었다. 언젠가 초여름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보았던 산내의 다랭이논 일렁이는 초록 물결과 손에 잡힐 것 같던 흰 구름, 고즈넉한 실상사의 저녁 예불 모시는 풍경들이 자꾸만 나를 불렀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모든 것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집을 구하기 어렵다는 산내에 빈 집이 나왔고 내놓은 아파트는 금방 입주자가 나타났다. 마치 오래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던 일처럼. 2. 세 가지면 충분하다 사람들은 내게 왜 그 먼 곳으로 가느냐 물었다. 대체 어디에서부터 먼 곳이라는 말일까? 나에게는 가장 가까운 곳이 바로 이곳이라 말하지 못했다. 마당에서 듣는 하루 두 번 실상사 범종 소리와 수달이 살고 있다는 람천의 우렁찬 물소리,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천왕봉. 이곳으로 이사를 위한 이유로 이 세 가지면 충분했다. 게다가 이곳은 내게 완벽하게 낯선 곳. 이사를 하는 날 고속도로에 눈발이 날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이사하는 날 눈이 오면 부자된다 안하요.”라며 애써 웃음을 보였다. 지리산 IC에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쿵쿵 뛰었다. 저 멀리 펼쳐진 지리산 자락이, 마을이 온통 눈으로 환하게 빛났다. 지리산에 곁들어 사는 일은 지리산이 허락해야 한다던데 드디어 나도 지리산의 선택을 받았구나. 다정한 지인들은 문패를 만들어 보내주었고 마당에 심을 꽃나무와 다양한 꽃씨를 보내주거나 어여쁜 커튼을 보내 새로운 출발을 기꺼이 응원해 주었다. 이사 후 두 번의 큰 눈이 내렸다. 저 멀리 눈에 덮인 천왕봉은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실상사 저녁 범종 소리를 들으며 구들방 아궁이에 불을 넣었다. 가끔 불씨가 아까워 고구마를 구워 강아지와 나눠먹었다. 그렇게 산내의 첫 겨울이 고요히 흘러갔다. 3. 산내는 산내말로 살래 맘씨 좋은 이웃이 밭 귀퉁이를 무상으로 빌려주셨다. 또 다른 이웃은 슬며시 거름을 부려놓고 가셨다. 감자를 심고 두둑 가에는 옥수수도 심어야지. 밭을 일궈 고랑 네 개를 만들고 거름을 뿌렸다. 다음날 맞춤비가 내렸다. 나른한 햇살을 받으며 꽃씨를 담구고 씨감자 눈을 쪼개다보니 어느새 담장에 노란 개나리가 막 피어나는 춘분이 되었다. 밤마다 멀리 무논에서 개구리들이 정겹게 울어댔다. 어느 밤, 마당에 나가 올려다본 하늘, 선명하게 반짝이던 북두칠성이 말했다. 그래, 잘 찾아왔어. 너의 길. 이른 아침 단풍나무에 새가 날아와 한참을 앉았다 날아가는 흔하디흔한 그 풍경이 좋았다. 새들을 위한 모이를 뿌리고 수돗가 물을 갈아준다. 햇살이 길게 들어오는 이른 아침, 멀리 천왕봉을 게으르게 앉아 바라보는 그 시간을 놓칠까봐 아침 일찍 일어난다. 지리산에 와 매일 매일이 행복한 검은 개 루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면 이웃 어르신들이 묻는다. 어디사요? 놀러왔는가베? 아니요, 저 살래 살아요. 저 멀리 앞 산 노란 산수유 지면 대문 옆 감나무에도 반짝이는 새 잎 무성할 것이다. 마당에 정성껏 심은 모란이 피고 지는 깊은 봄이 흘러 옥수수를 따고 감자를 캐면 좋은 사람들 모아 잔치를 해야지. 지리산의 첫 봄, 살래의 첫 봄, 나의 첫 봄이 설렌다. -달궁수달래 / 김인호
    • 이야기
    • 여기저기 민들레
    2023-04-09
  • 가여워 하는 마음
    가여워하는 마음 박두규/시인 어김없이 새날이 오듯 새해도 온다. 그리고 사람들은 바쁜 연말이나 연시의 와중에도 한 번쯤은 가는 세월이나 오는 세월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거나 다짐하게 된다. 나는 인생 간판에 시인 딱지를 붙이고 살다 보니 연말연시가 되면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가끔 되짚어보곤 하는 것인데 그때마다 박수근(화가)이 했다는 말이 떠오르곤 한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된 것인지 기억에도 없는데 느닷없이 날아온 돌멩이처럼 나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수시로 울림을 준다. 예술이 아름다움의 영역이라면 그 아름다움은 선함과 진실함의 바탕에서 이루어진다는 어떤 믿음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의 말처럼 정말 평범한 일상생활 속의 착함과 진정함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그냥 스치고 지나갈 수도 있는 이 말이 나에게 강하게 올 수 있었던 건 아마 당시 이런저런 경전들을 읽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경전의 바탕이 선함과 진실함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때 그것들을 읽어내며 스스로의 단어로 정리해낸 말은 ‘가여워하는 마음’이었다. 그 즈음에 나온 시집의 제목을 ‘가여운 나를 위로하다’라고 붙인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새 정부가 들어선 후 이런저런 부족한 짓, 말도 안 되는 짓, 터무니없는 짓들을 많이 한다고 하는데 내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점은 윤가와 그의 사람들에게는 이 ‘가여워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이긴 자가 진 자에 대해 그리고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 또는 민초들에 대해 ‘가여워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됨의 근본이 없는 것이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연민도 없이 살아가는 것들이 무슨 정치며 예술이며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 마음을 학문이나 사상에 앞서 삶 속에서 잘 보여준 옛사람으로 퇴계 이황 선생이 있다. 요즘 자본주의 기후 위기에 연계된 이런저런 책들을 보게 되었는데 21세기에 들어 사상적 출구를 모색하는 세계의 석학들에게 주목받는 사람 중에 퇴계 선생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퇴계를 생각하면 그의 사상이나 학문보다는 그가 살아낸 구체적인 일상 삶과 그를 통해 보여준 ‘가여워하는 마음’이 먼저 떠오른다. 그는 스물한 살에 결혼하고 아내 김해 허씨와 함께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지만, 아내가 결혼 6년 만에 병사한다. 그리고 3년 상을 치른 후 재혼하는데 맞아들인 권씨 부인은 정신질환이 있는 병약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퇴계가 마음속으로 존경했던 권주(연산군 때 갑자사화로 사약)의 아들 권질의 딸이었다. 권질은 조광조 숙청의 기묘사화 때 예안으로 귀양 와 있었는데 퇴계가 이따금 찾아가 문안 인사를 하며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권질은 병을 얻어 죽으며 여러모로 부족한 딸을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퇴계에게 딸을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퇴계는 마음속으로 존경하던 분의 집안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몰락하는데 자손들마저 불행해지는 것이 가슴 아파서 그 딸을 맞아들여 재혼하게 된다. 하지만 퇴계 선생의 진정 훌륭한 점은 결혼 후 그 정신적 질환이 있는 부인에게 ‘손님처럼 공경하는 법도’를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퇴계 선생이 공부하고 펼친 지식과 사상이 현실 속에 살아있는 학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또 그의 ‘가여워하는 마음’의 정도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알다시피 퇴계는 인간의 근본 마음 네 가지 중 앞세운 것이 측은지심(仁)이며 바로 ‘가여워하는 마음’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늘 4단四端의 마음을 중심에 두고 7정七情의 마음을 경계하는 것이 당시 선비들의 수행이고 공부였는데 선생은 삶 속에서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결혼생활도 16년 만에 권씨 부인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퇴계의 ‘손님처럼 공경하는 법도’ 또한 그렇게 끝났는데 퇴계는 훗날 그 시절을 ‘결혼생활 16년 동안 더러는 마음이 뒤틀리고 생각이 산란하여 고뇌를 견디기 어려운 적이 없지 않았다’라고 술회한다. 이러한 고백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비록 퇴계가 그 시절을 자신의 덕을 쌓는 수양의 화두로 삼아 모범을 보였다고는 하나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나를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퇴계의 ‘가여워하는 마음’을 짐작하게 하는 또 하나의 일화는 그의 며느리 이야기다. 둘째 아들 채(寀)는 정혼한 상태였는데 그 아들이 결혼을 앞두고 급사하게 된다. 그래서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예식도 못 올린 며느리를 맞이해야만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퇴계는 당시 삼종지의三從之義의 엄격한 규율을 깨뜨리고 처녀의 몸으로 며느리가 된 여인을 친정으로 돌려보내 재가하게 한다. 퇴계 선생의 삶의 바탕에 있던 ‘가여워하는 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퇴계는 엄격한 유가의 선비였으나 깊은 인간애에 바탕을 둔 스스로의 삶을 꾸려내었으며 세상의 법도 이전의 ‘불법不法의 예’를 보인 진정한 유가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퇴계는 첫째 부인이 죽은 후 두 아들을 양육하기 위해 관례에 따라 첩을 들였는데 그 첩도 선생보다 먼저 죽게 된다. 첩에게서 낳은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 또한 자신의 호적에 올렸고 차후에 그 아들의 후손들이 적서의 차별을 받지 않도록 족보에 적서의 구별을 두지 않게 하였다. 또 퇴계 선생은 이런저런 굴곡의 가정사를 다 넘기고 홀아비 생활을 하는 중에 단양군수로 있을 때는 단종 복위에 참여했던 사대부의 후손으로 어린 나이에 관기가 된 기생 두향을 소실로 맞아 외로움을 달래고 남녀의 사랑이라는 것을 하게 된다. 서자와 관기라는 당시 천한 신분의 사람에게도 시대의 법도를 넘어 사람의 근본에 있는 ‘가여워하는 마음’으로 차별 없이 대하였다. 나는 퇴계 선생의 아픈 가정사를 보면서 평범한 일상생활 속의 착함과 진정함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박수근이 말한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그 말의 깊이를 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황이라는 사람은 위대한 학자요 사상가이기 전에 ‘가여워하는 마음’이라는 존재의 근본을 깨달은 사람이고 그렇게 자신을 살아낸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작금의 우리 사회는 이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는가. 국정을 운영한 새 정부의 2022년을 보면서, 제 이익과 안위만을 생각하는 권력을 보면서, 그들의 치졸한 양아치 정치를 보면서, 윤가와 그 권력의 발뒤꿈치를 쪼아 먹고 사는 닥터피쉬들을 보면서, 그 언론과 정치권과 검찰과 윤의 사람들을 보면서, 언감생심焉敢生心 ‘가여워하는 마음’을 꿈꿀 수는 있을 것인가 하는 절망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나라를 맡긴 것은 국민이니 한편으론 할 말도 없다. 이는 모두 자본주의, 자유주의라는 왜곡된 이데올로기 안에서 돈만 있으면 되고 나만 살면 된다는 그릇된 가치관의 정서가 우리 사회 안에서 당위적 정당성을 얻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가치관의 변화 없이는 우리 사회의 ‘가여워하는 마음’은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퇴계 선생처럼 개개인의 진정성으로 실천하는 정도를 넘어 지난날 촛불처럼 온 국민이 지극정성으로 ‘가여워하는 마음’을 기원하는 계묘년이 되기를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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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6
  • 인간의 탐욕, 그 쓸쓸함에 대하여
    인간의 탐욕, 그 쓸쓸함에 대하여 박 두 규 (시인) 연말연시를 맞아 바쁘게 살다가 어쩌다 담배라도 하나 빼물면 ‘아, 한 해가 또 가는구나.’ 하며 나도 모르게 긴 숨을 내뱉게 된다. 무슨 큰 걱정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그 긴 숨은 한숨처럼 내뱉어져 스스로를 우울하게 한다. 어쩌면 그 우울함은 한 해가 가고 또 한 살을 먹고 그만큼 남은 삶이 줄었고 그만큼 죽음에 다가갔다는 무의식적인 뇌의 반응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이렇게 외부의 상황에 별다른 생각도 없이 반응하는 몸과 뇌의 기억에 끌려 다니는 것이 못마땅해서 자주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편이다. 그리고 그런 기억의 관성적 반응을 하는 나를 ‘들여다보는 나’의 편이 되어 다시 생각을 정리해내곤 하는 버릇이 있다. 그럴 때 시로 정리되는 경우도 간간이 있는데 올 연초에도 이런 시를 썼었다. “새해 첫 모심/ 오시는 숨, 기쁘게 모시고/ 가시는 숨, 미련 없이 여읜다./ 모든 게 고맙다./ 새해 꼭지를 따며 스스로에게 당부한다./ 허접한 일상을 살지라도/ 세상의 모진 바람에 고개 숙이지 않기를./ 이승의 궁벽한 어느 구석일지라도/ 아무런 미련 없이 처박히기를.” 지리산 자락, 섬진강 하류 기슭 어느 구석에 거처를 마련하고 처박힌 지도 벌써 10여년 세월이 흘렀다. 나는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사실은 새로운 인생살이를 꿈꾸며 들어왔다. 누구든 자신의 새로운 삶을 위해서는 그 상황과 조건을 바꿔내려고 새로운 각오를 한다. 나도 이곳에 들어오며 새 집을 짓고 상량문에 그 마음을 새겼다. 노자와 묵자에서 빌려와 無爲無不爲무위무불위와 愛人若愛身애인약애신이라는 글을 새겼는데 집이 내려앉을 때까지 얻지 못할 말을 새겨놓고 쳐다볼 때마다 후회하며 살고 있다. 無爲無不爲를 새길 때만해도 나름의 해석을 글로 정리하기도 했는데 그 일부를 보면 대충 이렇다. “......나무는 어디도 가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세상의 비와 바람을 다 맞는다. 그리고 꽃을 피워 봄이 있게 하고, 벌과 나비의 양식이 되고, 씨를 맺어 생명을 잉태한다. 평생을 한 곳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않지만, 스스로에게 또는 세상에게 하지 않은 것이 없다. 사실은 이처럼 모든 것은 그 존재 자체로 스스로 빛나는 것이다.......” 무엇을 인위적으로 하지 않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無爲無不爲)는 그 말이 당시에는 너무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일상에서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높은 경지의 삶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냥 그 내용이 멋있어서 그렇게 나댔었나 싶다. 하지만 21세기 현대인들은 이 무위무불위의 진리를 용납하지 않는다. 저절로 운영되는 우주자연의 존재적 질서와 그 존재의 순환적 질서를 철저하게 깨며 이루어낸 것이 오늘날 현대문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은 자본주의를 만나 발전된 것이기에 오늘날 우리 문명사회는 자본의 본질적 특성의 하나인 탐욕을 내장하게 된다. 성장주의나 물량주의, 물질만능주의 그리고 지독한 이기주의, 이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탐욕을 그대로 실현시켜온 현대문명의 특징들이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자본의 논리는 끝없이 탐하는 인간의 탐욕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탐욕은 반드시 폭력을 유발할 수밖에 없다. 돌아보면 이러한 탐욕이 상류 기득권층의 카르텔을 자연스럽게 형성하여 보이지 않게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법을 만드는 정치인과 법을 집행하는 검사들과 그것의 여론을 주도하는 언론인들이 결탁하면 대한민국은 이들의 나라였다. 그 중심에는 무소불위의 권력인 검찰이 있었다. 검찰의 눈으로 보면 누구든 털면 나오는 것이고, 누구든 죄인으로 만들고 안 만들고도 그들의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러하니 골목대장 검찰의 주변에 붙은 언론인과 정치인들, 재벌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검찰은 이러한 카르텔을 형성하며 지금껏 부정부패를 저질러온 곳이지만 이것을 바로잡기는 너무 어렵다. 과거 군부독재 시절의 검찰은 모든 법의 우위에 있는 중앙정보부나 안기부 같은 기관이 충분히 통제할 수 있어서 청와대의 수족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족쇄에서 풀려난 지금은 검찰을 통제할 기관이 없으니 그야말로 최상위 포식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의 본질적 원인은 4,5백 년 동안 진화해온 자본주의 속에서 제어장치 없이 커온 인간의 탐욕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탐욕이라는 것은 생존의 욕구로부터 시작되고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 생존욕구가 탐욕으로 진화되는 경계선을 인간은 제어하기 힘들다. 그래서 사회적 도덕률과 법률로써 재어하려 하나 그 법률 자체가 잘못되어 있으면 그것도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法이라는 것이 글자처럼 물이 흐르는 것처럼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회라는 곳이 그러한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그곳에 소속되어 있는 자들이 자신의 이익과 파당적 이익에만 매몰되어 변화를 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 국민들이 이들의 진영에서 휘둘리지 않고 우리사회의 바른 잣대로서의 그 몫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이런 일에 참여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탐욕은 이미 21세기의 삶 속에서 인간의 보편적 정서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다. 이 탐욕이야말로 폭력의 근원이고 모든 순환 질서를 깨는 근본 원인이지만 이것은 오늘날 현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성장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에게는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당위적 삶이라는 이름으로,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 또한 우리사회나 다른 누구의 탐욕에는 분노하면서 자신의 탐욕에는 관대한 그런 뻔뻔스러운 삶을 잘도 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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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저기 민들레
    2022-12-13
  • 꿘투
    꿘투 관장님께 권투는 권투가 아니라 꿘투다 20년 전과 바뀐 것 하나 없는 도장처럼 발음도 80년대 그대로다 가르침에도 변함이 없다 꿘투는 훅도 어퍼컷도 아니라 쨉이란다 관중의 함성을 한데 모으는 KO도 쨉 때문이란다 훅이나 어퍼컷을 맞고 쓰러진 것 같으냐 그 전에 이미 무수한 쨉을 맞고 허물어진 상태다 쨉을 무시하고 큰 것 한 방만 노리면 큰 선수가 되지 못한다며 왼손을 쭉쭉 뻗는다 월세 내기에도 어려운 형편이지만 20년 넘게 아침마다 도장 문을 여는 것도 그가 생에 던지는 쨉이다 멋없고 시시하게 툭툭 생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도장 벽을 삥 둘러싼 챔피언 사진들 그의 손을 거쳐 간 큰 선수들의 포즈도 하나같이 쨉 던지기에 좋은 자세다 (이장근의 시「꿘투」전문) 요즘 TV중계 속에서 공공연하게 돈벌이 혈투를 벌이는 종합격투기에 밀려 사양길에 오른 꿘투는 묘한 향수를 불러온다. 당시 헝그리 복서들은 그래도 뭐랄까 일정부분 순정적인 면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제 강점기의 깡패와 요즘 조폭의 차이라고나 할까. 폭력의 상품화라는 관점으로 보면 20년 전의 복싱이나 요즘 격투기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만 그래도 영혼들까지 자본에 팔아넘기는 요즘 세태와 비교해보면 꿘투에는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서러운 살림살이의 애환이라는 스토리를 함유하고 있기도 해서 왠지 조금은 다르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 시 속의 권투 도장 관장님도 20여 년 동안 돈벌이도 되지 않는 도장을 고집스럽게 운영하면서 권투를 버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는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꿘투 철학은 ‘꿘투는 훅도 어퍼컷도 아니라 쨉이다.’ 라는 것이다. 권투의 핵심은 쨉이라는 그의 생각은 ‘일상성의 철학’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우리가 사는 하루의 삶을 생각해보자.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화장실 가고 누구를 만나 수다도 떨고 직장에서 늘 하는 업무도 보고 집에 와서 텔레비전도 보고 잔다. 특별한 사건 없이 보내는 하루 일상은 대개가 이렇다. 이게 ‘쨉’이다. 사는 동안 어떤 특별한 큰 사건들을 만나는 것이 훅이나 어퍼컷일 것이다. 물리적 시간으로 봐도 일생의 팔구십 프로가 쨉이다. 다시 말하면 허접한 일상의 시간들이 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상의 시간들이 바로 삶의 과정이다. 많은 식자들은 삶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말한다. 목표를 중시하는 삶은 결과주의적 삶을 사는 것이고 그것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되었다거나 무엇을 이루었다는 것 자체보다는 어떻게 그것을 이루었느냐가 중요하다. 우리의 삶은 ‘어떻게’라는 그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목표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길을 걸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간다는 것은 방황이다. 그래서 목표는 필요하지만 결과주의적 삶을 살지는 말자는 것이다. 지리산의 어느 깊은 숲에서 홀로 피고 진 꽃은 실패한 꽃이고, 화려한 도심의 전시장에서 많은 사람이 아름답다고 칭찬받으며 전시되어 있는 꽃은 성공한 꽃일까. 날아가는 나비들에도 성공한 나비가 있고 실패한 나비가 있을 것인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본질에서 보면 생명들의 삶에는 실패나 성공은 없는 것이다. 다만 치열하게 그 생명을 발화하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일상성의 철학’은 이러한 일상적 삶의 의미성을 중심에 놓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늘 하게 되는 삶의 자질구레한 행위들을 자질구레하다고 말하지 말자는 것이다. 링 위에서 수없이 날리는 쨉이 결국은 경기 자체를 결정하듯 허접한 우리 일상이 결국에 가서는 우리의 인생 삶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문제는 매일 세끼 밥 먹는 일 같은 그 허접한(?) 일상을 어떻게 치열하게 살아내느냐는 이야기다. 우리가 무수히 ‘쨉’을 날리며 사는 일상에서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쨉’은 그냥 시도 때도 없이 생각 없이 날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을 깨어있으려는 치열함에 닿아있는 ‘평범함’이지 않겠는가. -빗점골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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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저기 민들레
    2022-11-15
  • 가난한 시인의 사회
    가난한 시인의 사회 -박두규 시인 오래전, 한 시인의 죽음을 두고 많은 시인들은 ‘한 시대의 퇴장’이라는 말을 했다. 그는 충분히 그럴만한 상징성이 있는 시인이었다. 1980년대 벽두에 처음으로 노동자 문학이라는 영역을 일궈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또 문단에서 비중 있는 중견시인으로서의 문학적 성과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이념적이고 정치사회적인 시만을 쓰며 투사적 삶을 산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서정성 짙은 본류의 문학을 했고 그런 성과를 이룬 많은 시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랬대서 그의 죽음을 ‘한 시대의 퇴장’이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죽음을 ‘한 시대의 퇴장’이라고 말한 것은 순전히 그의 일상적 삶이 가졌던 상징성 때문이다. 그는 부안군 변산 출신이며 전주고 1년을 마치고 중퇴한 ‘박영근’이라는 시인인데 그의 일상은 여느 현대인의 일상과는 너무나 달랐다.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한마디로 대책 없는 사람이었고 그를 이해하는 시인들의 눈으로 보면 이 시대의 형벌을 대속하는 자와도 같았다. 이 시대의 가장 큰 형벌이자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벌은 무엇일까? 그것은 죽음도 아니고 바로 가난이다. 현대의 가난은 단순히 물질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굴욕적인 것이며 비속해지는 것이며 비굴해지는 것이고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잃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가난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사람들이 바로 현대인들이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와 일상의 삶이 그렇게 구조화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시인 박영근은 그 가난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자본을 최고의 가치로 두는 현대라는 괴물에 저항하며 온몸으로 싸우던 전사였다. 무슨 사상과 조직을 가지고 기획된 싸움을 진행했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의 일상생활이 그랬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는 돈에 구속되어 있지 않았고 어쩌면 자유로웠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적어도 그에게 가난은 두려움으로 존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나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언젠가 나는 밖에서 행사를 하고 술 한 잔 후에 집에 12시를 넘겨 들어갔었다. 그런데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는데 급히 출두해달라는 것이었다. 박영근이라는 사람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서울에 있어야 할 그가 왜 이 한밤중에 순천의 파출소에 있는 것일까. 나는 급히 파출소로 갔다. 그는 술 한 잔을 하다가 무슨 이야기 끝에 내 이야기가 나왔고 내가 보고 싶었다는 것이다(그는 나의 고등학교 2년 후배다). 그게 전부였다. 그래서 그길로 바로 택시를 타고 전남 순천까지 왔던 것이다. 물론 그의 주머니에는 최근에 받은 몇 푼의 원고료가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혼자 사는 그로서는 한 달도 더 생활할 수 있는 돈이었겠지만 택시비로도 모자란 돈이어서 택시 기사가 파출소에 데려갔던 것이다. 덕분에 나도 그와 밤새워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출근도 하지 못하고 내 일상의 견고한 틀을 한 번 깰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일을 나만 겪은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해 그에 있어서 이러한 사건은 일상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에피소드는 많지만 어쨌거나 그는 이 자본에 길들여져 가는, 그리고 돈 앞에 무릎 꿇기 시작하는 사회와 사람들에게 억지를 썼던 것만은 분명하다. 아니 그건 분명 억지가 아니라 온몸으로 저항했던 거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렇게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 삶은 이 사회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가 새벽 2시건 3시건 거는 전화도 우리의 일상을 깨는 그의 일상이었으며 우리의 일상을 반대하고 이 세상에 저항하는 이 시대 마지막 순정한 영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죽음을 ‘한 시대의 퇴장’이라고 말한 이유는 이제 그처럼 살아낼 사람도, 그런 저항을 수용해줄 사람도 없는, 참으로 고적한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전화를 받고 나서 쓴 졸시 하나를 소개한다. 늦도록 술에 젖다가/ 전화를 거는 시인이 있다./ 새벽 3시가 넘어 전화를 받은 나는/ 갑자기 이부자리 속 남편에서/ 생뚱맞은 시인이 된다.// 창밖의 희붐한 빛살을 타고/ 취한 시인의 목소리가 건너 왔다./ 20여 년 서울 생활에/ 지금도 갈 곳이 없다는 시인의 말이/예전엔 은유로 들렸던 그 말이/ 이젠 그대로 슬픔으로 온다./ 슬픔의 그림자까지 그대로 따라 온다.// 하지만 어느 시인이 말한 것처럼/ 우리도 이젠 눈물도 아름다운 나이가 되어/ 새벽안개에 젖은 시인의 취한 목소리도/ 아무런 저항 없이 내 잠자리에 들어와 눕는다./ 달랑 목숨 하나 걸어 놓고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서글픈 것들도/ 이제는 차라리 아름다움으로 온다.// (졸시「시인의 전화」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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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25
  • 고마움은 한 번도 나를 비켜가지 않았다
    고마움은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박 두 규(시인) 글의 제목은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라는 책 제목의 패러디다. 이 책은 36년 옥살이를 한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 선생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만델라가 27년 옥살이 하고 대통령이 되었을 때 아직도 대한민국 교도소에는 30년이 넘은 장기수들이 수두룩하였고 선생은 그 중의 한 분이셨다. 하지만 나는 허영철 선생을 민족의 현대사를 정면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역사의 증인으로서보다 인간이라는 종(種)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를 보여준 한 사람으로, 또는 삶 속에서 ‘고마움’이란 진정 무엇인가를 알려준 스승으로, 내 마음 속에는 그렇게 남아 있다. 오래 전 일이다. 어느 늦겨울 전주의 젊은 친구들이 장기수 선생님들을 모시고 구례 지리산 자락으로 나들이 와서 하룻밤 같이 보낸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이틀 동안 내내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그분들의 ‘고마워하는 마음’을 보았다. 맑게 갠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다는 고마움, 이마를 스치는 신선한 바람 한 줄기의 고마움, 그 표정이며 몸짓 자체에 깊게 배어 있는 그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선생의 말투 하나 행동 하나가 티끌만큼의 가식도 없이 너무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고마움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하기야 36년을 오로지 수행으로만 보낸 세월인데 오죽하랴. 사과 하나를 건네받으며 사과 꽃을 피우게 한 햇볕과 뿌리를 적시게 한 비와 흙과 사과를 건넨 사람의 고마움까지, 사과 하나를 얻기까지에 기여한 세상의 모든 존재에 대한 고마움을 뼛속 깊이 새긴 자의 마음을 보았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겸허한 마음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내 안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자아의 영역에 타자의 영역을 내어준 것이고, 겸허한 마음은 내 안에 타자의 영역이 자아의 영역보다 더 넓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삶 자체가 경쟁이고 살기 위해 경쟁력을 갖추려다 보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기적으로 살게 되고, 내 스스로 경쟁력을 갖춰 이만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의 자만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상대방을 고마워하기 보다는 내가 그만큼 노력해서 경쟁력을 갖춰 얻은 것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타자는 경쟁의 상대요 대립적 존재이지 내 안에서 품어야 할 상대가 아닌 것이다. 우리가 고마워하는 마음과 겸허한 마음을 꾸준히 잃어온 것은 이러한 변화된 일상의 탓이 크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부를 창출하는 것만이 미덕이 되어버린 자본 중심으로 인간의 질서가 재편되면서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마음은 바닥을 치는 상태에 이르렀다. 사실 이 시대에 스스로 겸손해져서 상대를 진정으로 고마워할 줄 알고 낮은 자세를 취하며 사는 이가 얼마나 될까. 나를 내어주고 타자를 섬기는 겸허함은 현대의 일상에서 얼마나 유효한 덕목으로 남아 있을까. 나는 자아의 감옥을 벗어나 타자를 섬기는 선생의 그 텅 빈 마음의 ‘겸허함’을 보며 그것은 분명 36년의 옥살이 명상이 가져다준 깨달음일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게 사는 것이 진리의 삶이요, 나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는 절박함을 우리는 언제나 스스로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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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8
  • 공감본성
    공감본성 요즘 도시의 현대인들은 스스로의 각박한 현실 속에서 간혹 숨통이 막힐 것 같으면 휴머니티를 이야기하며 ‘시골 인심’이니 ‘시골 밥상’이니 하며 시골을 이야기 한다. 절대로 시골에 내려와 살 마음도 없으면서 왜 가만히 있는 시골을 들먹일까? 그 ‘시골’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나를 방어하지 않아도 되는 편한 곳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왠지 나만의 사정을 이해해 줄 것 같고 고단한 심신을 어머니처럼 품어줄 것 같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시골은 아직도 ‘공감 본성’이 그대로 일상의 삶 속에 녹아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인식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괴테는 “인간은 함께할 경우에만 진정한 인간이며 유일한 개인이라도 자신을 전체의 일부로 느낄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만 즐겁고 행복할 수 있다”라고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의미를 정리해서 말했다. 이것은 괴테의 말이지만 표현만 다를 뿐이지 과거 깨달음에 이른 성현들은 모두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해왔다. 하나만 예를 들면 맹자는“우물에 빠지는 아이를 보게 되면 예외 없이 소스라치며 다급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이건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도 칭찬받으려는 것도 아니고 무정하다는 비난이 두려워서도 아니다. 인간은 본래 동정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것들이‘공감본성’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이다. 오늘날에는 제러미 리프킨이 이런 이야기를 현대의 상황에 맞춰 ‘공감’이라는 개념으로 새롭게 그리고 설득력 있게 변주해내고 있다. 제러미 리프킨은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들도 공감본성이 있다고 말한다. 다윈도 고등동물들 중에 사회성이 있고 감정이 풍부하고 동료의 곤경을 걱정할 줄 아는 종이 많다고 이야기 한다. 오늘날 공감본성이 크게 회자되는 것은 그 공감본성이 인간 스스로가 가진 ‘본래성품’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 절실해진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가 자본주의 물결에 휩쓸리면서 ‘물질의 소유’가 삶의 절대가치로 올라오고 이것과 함께 경쟁주의, 속도주의, 물량주의, 이기주의 등의 많은 자본주의 문화가 형성되면서 인류는 끊임없이 공감본성을 잃어왔다. 내가 내 것을 소유하지 않고 지키지 않으면 이 험한 세상을 처자식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불안과 걱정에 몰두하며 살다보니 어떻게 공감본성이 발현될 수 있겠는가? 공감의식의 발현은 일상에서 나눔과 섬김이라는 행위로 나와야 할 텐데 그것은 가치관의 전환이라는 자기 인생의 전향적 사고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사회가 되었으니, 말이 쉽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하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주는 섬김 의식과 빵과 포도주를 나눠 먹으며 자신의 피와 살(목숨)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나눔 의식은,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이 ‘섬김과 나눔’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잘 말해준다. 우리 한국 사회만 해도 예수의 제자들이 한 집 걸러 두 집에 살고 있는 실정인데 예수가 깨달은 이 진리의 삶의 방식을 얼마나 실천하며 사는지 모르겠다. 이렇듯 공감본성을 현실사회에서 일깨우고 실천하며 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세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공감본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만이라도 계속 일깨워야 할 필요가 있다. 언젠가는 ‘본래의 나(공감본성)’를 되찾게 될 거라는 생각도 없이 산다면 얼마나 슬프고 불행한 인생인가. 인디언 일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인디언이 높은 산정에서 큰 독수리 알을 하나 발견하여 가져왔다. 마을의 닭 울타리 안에 놓았는데 암탉이 이 알을 품어 부화했다. 어미닭보다 큰 새끼독수리는 그렇게 태어나 흙에서 지렁이나 잡아먹고 그 큰 날개로 날지도 못하고 파닥거리기만 하며 어미 닭의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며 덩치 큰 평범한 닭으로 살았다. 어느 날 거대한 새 한 마리가 높은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날갯짓도 파닥거리지 않고 늠름하게 편 채로 높은 하늘을 빙 날고 있는 것이다. 너무 멋있고 아름다워서 어미닭에게 물었다. 어미닭은 그 새는 황금독수리라는 새이며 하늘의 제왕이고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존재라고 말하며 어서 지렁이나 잡아먹으라고 말한다. 그 독수리닭은 바쁘게 땅을 후비며 지렁이나 잡아먹고 살다가 마침내 닭이라는 이름으로 죽었다. 우리는 누구나 황금독수리 같은(공감본성을 가진 ‘본래의 나’) 존재인데 닭처럼 살다가 인생을 마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자신이 차원이 다른 아름다운 본성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라는 걸 모르고 닭으로 살다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많이 억울하지 않은가. 닭이라면 닭처럼 살다가 가도 괜찮겠지만 황금독수리가 닭처럼 살다 간다면 이처럼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섬진강변의 남바람꽃 / 사진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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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2
  • 니란자 강가의 숨소리
    니란자 강가의 숨소리 나이를 먹으면서 언젠가부터 ‘시간’은 그 많은 의미와 가치를 버리고 ‘늙음’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 나를 따라 다녔다. 그것은 삶의 지층, 그 어느 바닥에서 막연한 어떤 어둠과 절망의 우울한 안개를 뿜어 올리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그것이 매우 못마땅했고 불편했다. 그 ‘시간’이라는 관념을 극복하지 않으면 내 남은 생에 온전한 평화도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시간’에 골몰해 있을 때 불현듯 오래 전 읽었던 헷세의 소설 『싯타르타』가 생각났다. 기억은 가물가물 하지만 ‘시간’과 관련된 무엇인가 소설의 말미를 장식했던 것 같았다. 소설을 다시 읽으며 내가 찾던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시간이라는 것은 없다’라는 거였다. 소설 속의 싯타르타는 집을 떠나 스승들을 찾아 구도행을 하다 세속에 들어 돈도 벌고 여인을 만나 사랑도 하고 아들도 얻게 되나 다시 떠돌다 마지막으로 니란자 강가에 이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뱃사공 바수데바를 만난다. 끊임없이 흐르는 세월과 같은 니란자 강이 삶 자체를 상징하고 있다면 뱃사공 바수데바는 그 강을 자유롭게 건너다니는 각자(覺者)인데 시타르타는 강에서 그와 함께 보내며 깨달음을 얻는다. 강을 바라보고 강의 깊은 소리를 들으며 시간의 관념을 극복하고서 얻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 속의 나는 시간의 집적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몸’을 떠나 현존할 수 없으니 나에게 시간은 결코 관념이 아니며 골수에 박혀있는 존재의 한 부분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몸에 대한 해석을 바꾸어 몸을 다르게 인식해야 한다는 명상 의학자 디펙초프라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에게는 몸은 새로운 세포를 끊임없이 만들어 낼 뿐이지 노화라는 개념은 없었다. 그렇게 신체 세포는 항상 새것이며 나이 백 살을 먹어도 살아있는 몸의 세포는 낡고 오래된 것이 아니라 항상 새것이라는 것이다. 피부는 한 달에 한 번씩 새롭게 교체되고 위벽은 5일마다, 간은 6주마다, 골격은 3개월마다 새롭게 바뀌며 한 해가 지날 때면 우리 몸속 원자의 98%가 새것으로 교체된다는 것이다. 흐르는 강처럼 몸은 육안으로는 언제나 같아 보이지만 실은 항상 변하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디펙초프라의 몸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바른 것이며 그러하기에 ‘현존’이라는 개념이 진실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몸은 낡은 세포는 버려지고 늘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 그것으로 현존한다. 살아 있는 현재가 생명 자체이고 전부인 것이다. 이 전의 죽어버린 세포나 앞으로 생겨날 세포는 ‘몸’이 아니듯이, 말하자면 생명존재의 개념에서 보면 과거나 미래 같은 것은 원래 없는 것이다. 과거나 미래 같은 시간은 만들어낸 관념이며 습(習)일 뿐이다. 신체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한다고 여길 뿐이다. 그래서 강의 비밀은 ‘시간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상류의 폭포에도 하류의 나루터에도 강은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하며 인생은 하나의 강일뿐이다. 흐르고 있으면서도(변화하면서도) 과거나 미래라는 것이 없이 현재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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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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