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1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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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숲(에 나무가 있어야지 골프장이 있냐) 음악회♬
    작년에 구례군 산동면 사포마을 뒷산에서 21만㎡ 너비의 면적의 숲이 사라졌습니다.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부터 지리산 국립공원 경계 인근까지 최소 2만 5천 그루의 나무가 베어졌습니다. 구례군과 시행사는 이 자리에 1000억원을 들여 45만 평 너비의 대형 골프장을 지을 거라고 합니다.골프장 사업을 막아내고 무단 벌목지에 봄을 돌려주기 위해 음악회를 엽니다. 음악회에 앞서 지리산골프장 개발 예정인 벌목지 답사도 준비했습니다.다시 숲으로 돌아갈 날을 위해 음악과 이야기와 마음을 모으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2024년 4월 6일(토)▶ 오후 1시, 벌목지 답사 사포마을회관 (구례군 산동면 사포길 72)에서 시작- 지리산 난개발에 대한 소책자를 읽고나서, 주민분의 안내로 벌목지를 함께 걷습니다.▶ 오후 4시, 숲 음악회사포저수지 옆 공터 (구례군 산동면 관산리 401)♬ 공연자- 오프닝 : 캄캄밴드- 살래 재즈 트리오와 옥수수- 김목인☞ 참가비 20,000 원 이상 (카카오뱅크 3333-11-3005007 이신지원)☞ 주최 : 지리산골프장백지화연대, 지리산방랑단, 동아시아에코토피아포스터배경 사진: @phoma_photo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방랑단
    2024-03-18
  • 안개 유감
    「섬진강 편지」 -안개 유감 2023년 10월 22일 안개, 10월 23일 안개, 10월 24일 안개, 10월 25일 안개, 10월 26일 안개, 내리 닷새 아침 안개가 점령군처럼 구례를 장악했습니다. 안개가 옅은 날은 9시쯤이면 걷히지만 독한 날은 11시가 되어서야 해를 볼 수 있습니다. 섬진강과 서시천, 그리고 지리산 골짜기 아래마다 하나씩 있는 저수지들이 봄가을이면 구례를 안개의 마을로 만듭니다. 구례로 이사를 와서 8년이 지나고 나서야 안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구례 사람이면 다 알고 있는 안개의 피해를 모르고 아침마다 안개 예찬론을 펼쳤으니 얼마나 철부지로 보였을까요! 봄, 가을이면 일조량이 현저히 부족하고 습도가 높아 농작물들은 병에 취약하고 강마을 노인들은 기관지, 천식 등으로 고통을 받는답니다. 오죽하면 안개를 피해 산동으로 이사를 가려고 하겠느냐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그런데 최근에 지자체가 유치 신청한 양수발전소가 건설되게 된다면 구례는 그야말로 안개공화국이 되고 말겠지요. 섬진강댐보다 큰 규모의 댐이 2개나 들어선다면 1년 내내 안개에 시달리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거기다가 양수발전에 부족한 물은 섬진강에서 끌어 쓰게 된다니 그렇지 않아도 바닥으로 겨우 기어가는 섬진강물은 더 마를 것이고 가둬둔 물을 흘려보내게 되면 섬진강 하류의 오염은 뻔하지요. 구례는 지리산과 섬진강이 만들어 내는 때 묻지 않은 풍광들이 있어 귀촌자들이 선호하는 지역입니다. 귀촌 인구가 감소 추세인 최근에도 705명(2022년, 구례군 자료)이 귀촌했을 정도로 구례는 3년간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나를 포함한 구례지역 귀촌자들의 특성은 주로 자연환경을 중시하는 사람들로 최근 우리 마을에 7명의 젊은이가 이사를 왔는데 다들 구례의 천연 풍광에 매료되어 온 친구들입니다. 진정 애향 애민의 위정자들이라면 국비 1조 원이란 곶감으로 지역민들을 현혹하지 말고 “자연으로 가는 길, 구례”의 본심을 잊지 않도록 고심해야 할 것입니다. 댐이 들어서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내어 30여 년 전에 댐이 건설된 순천 주암댐 주민들의 호소를 들어보시라! "자욱한 안개에 폐암까지"‥주암댐 주민 피해 호소 https://ysmbc.co.kr/article/d4H__7afKF797La-l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3-10-27
  • 노고단(성삼재) 버스 운행시간 안내
    「섬진강 편지」 - 노고단(성삼재) 버스 운행시간 안내 승객이 없다고 운행 중단을 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운행되고 있는 노고단(성삼재) 버스 운행시간입니다. 지인의 운행시간 문의가 있어 정리를 한 김에 자료로 남겨둡니다. 평일에는 오전, 오후 2회 운행을 하고 주말에는 오전 2회, 오후 2회로 총 4회 운행을 합니다. 노고단(성삼재) 버스 운행 시간표 (운행기준 : 2023. 05. 01일부터) 1. 주중 (월~목) 2회 운행 시간표 - 오전 구례터미널 출발 (09:00) 지리산국립공원 화엄사 제1주차장 경유(09:10) 성삼재 출발(10:00) -> 구례 터미널 도착 - 오후 구례터미널 출발 (14:20) 지리산국립공원 화엄사 제1주차장 경유(14:30) 성삼재 출발(15:20) -> 구례 터미널 도착 2. 주말(금,토,일)연휴, 휴가철, 단풍철 - 오전 1차 구례터미널 출발 (08:40) 지리산국립공원 화엄사 제1주차장 경유(08:50) 성삼재 출발(09:30) -> 구례 터미널 도착 - 오전 2차 구례터미널 출발 (10:20) 지리산국립공원 화엄사 제1주차장 경유(10:30) 성삼재 출발(11:20) -> 구례 터미널 도착 - 오후 1차 구례터미널 출발 (14:20) 지리산국립공원 화엄사 제1주차장 경유(14:30) 성삼재 출발(15:20) -> 구례 터미널 도착 - 오후 2차 구례터미널 출발 (16:20) 지리산국립공원 화엄사 제1주차장 경유(16:30) 성삼재 출발(17:20) -> 구례 터미널 도착 *노고단 아침풍경 사진모음
    • 우리마을
    • 지리산 정보
    2023-09-17
  • 구례 성삼재 버스 운행 재개
    5월27일 부터 구례 성삼재구간 버스 운행이 다시 시작 되었다. 운행 중지 되었던 성삼재행 버스가 다시 운행 하기 시작했다. 구례 터미널 첫 버스는 2시40분 성삼재발 마지막 버스는 5시30 분이다. 운행이 중지되어 불편을 격던 등산객들의 불편을 해소 할 수 있게 되었다. 운행시작일 2022.5.27 부터 공영버스터미널 061-780-2730 구례여객운수사 061-782-5151
    • 우리마을
    • 지리산 정보
    2022-05-31
  • 하동의 아동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하동의 아동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교육소멸, 지역소멸을 벗어날 수 없는가 학교를 살리는 것이 지역을 살리는 일이다 하동 지역의 아동 수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2021년 4월 기준 하동군에는 27개의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있으며 18개의 초등학교(분교 포함)가 있다. 초등학교 4~6학년은 716명, 초등학교 1~3학년은 545명,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다니는 5~7세 아동은 329명으로 연령이 낮아질수록 아동 수가 감소하고 있다. 노량초등학교, 진정초등학교, 양보초등학교, 북천초등학교, 화개분교에는 2021년 기준 1학년 입학생이 없으며 묵계분교의 경우에는 2, 3학년 재학생이 없다. 양보초등학교의 경우에는 병설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이가 1명이고 1, 2학년 모두 학생이 없다. 쌍계초등학교 병설유치원의 경우에는 어린이가 한 명도 없어서 2022년에는 휴원이 확정되었다. 아동 감소가 학교와 유치원 감소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악양초등학교 병설유치원, 2021년도 원아 수는 2명이다. 학생이 이렇게 줄어드니 ‘1면 1교(하나의 면마다 하나의 초등학교)’ 원칙이 무너질 위기에 있다. 학생 수 200명이 넘는 하동, 진교를 제외한 다른 초등학교는 대부분 학생 수가 70명이 넘지 않는다. 하동군 내 지역 불균형이 심각하다. 아동 수가 적은 지역의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아이를 1명이라도 보내 학교를 존속시키자는 쪽과 이미 아이들이 줄어들고 있으니 다른 면과의 통폐합으로 조금이라도 큰 곳으로 가자는 쪽으로 의견이 분분하다. 양보초등학교와 병설유치원의 경우, 최근 ‘경남작은 학교 살리기 사업’에 지원하였으나 선정되지 못하였다. 이 사업은 초등학교 자녀를 둔 가구의 이주를 통해 폐교 직전의 작은 학교와 소멸위기 마을간의 상생발전을 도모하는 사업이다. 양보면에 사는 최병용 씨(69세)는 “학교를 살리는 것이 곧 지역 사회 공동체를 살리는 것이고 촌에 젊은 사람들이 들어오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양보에 야구장이 있거든요. 실내 야구연습장까지 잘 갖춰놨으니 좋은 선생님을 델꼬오고, 초등학생 유소년 야구클럽을 만들고, 거기에 살 집을 지어 놓으면 좀 오지 않을까?” 라며 내년에도 공모사업에 지원할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또래가 없으면 아동 발달과 교육 환경에 악영향을 준다 아동 수의 급격한 감소는 아동의 발달과 교육 환경에도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 첫째, 또래 집단이 없으니 친구 관계를 형성할 수 없다. 또래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니 사회성 발달이 떨어질 수 있다. 둘째, 아동 수가 적으면 교육기관의 돌봄에서 소외될 수 있다. 유치원은 정원이 3명 미만일 경우에 단독으로 돌봄교실을 개설할 수 없다. 이 경우 초등학교 1~2학년과 함께 돌봄이 이루어져 돌봄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셋째, 교육서비스의 질이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 교원 수는 학생 수에 따라서 결정되는데 학생 수가 적어지면 교원 수도 적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교원 수가 감소해도 행정업무는 줄어들지 않아 업무량이 가중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교사가 수업 외로 해야 하는 업무량이 늘어나면 학생들에게 소홀해질 수도 있다. 하동군에 거주하는 20세 미만의 인구 수는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자표출처: 통계청(2022년 1월 기준) 하동군 인구통계자료 참조 아동 수가 줄어드는 위기를 자연 속 전인교육의 기회로 삼아야 아동 수가 줄어들고 있는 현실은 교육의 위기이자 지역소멸의 위기다. 그러나 이것은 역설적으로 경쟁교육이나 학력 중심의 교육을 넘어서 도시와 차별화된 자연 속에서의 전인교육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 하동이 가지고 있는 기회의 요인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교육복지를 실현할 교육예산이 충분하다. 교육지원청의 초중고 교육예산 외에 장학재단의 여력도 넉넉하다. 하동군장학재단에는 약 170억 원의 장학금이 예치되어 있으며 올해 예산만 해도 15억 8천만 원이다. 현재 학생 수에 비춰보면 적지 않은 금액이다. 둘째, 하동은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연과 접하면서 살 수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이다. 도시의 환경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 자연환경을 교육자원으로 삼고 전인교육을 실천한다면 전국의 학부모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다. 넉넉한 교육예산과 천혜의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전인교육을 바라는 사람들이 몰려오게 하면 어떨까. 그 힘으로 지역소멸이 아니라 지역부흥으로 나 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학부모는 물론 교육지원청, 하동군청, 하동군민들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김건해 기자
    • 우리마을
    • 하동
    2022-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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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디학교 "팔레스타인의 눈물과 저항, 그리고 연대" 특강...팔레스타인 난민 살레흐 씨, 이정구 교수 참여
    안녕하세요. 지리산 산청 소식을 전하는 포네입니다. 7월 11일에는 산청 간디고등학교에서 ‘팔레스타인의 눈물과 저항, 그리고 연대’ 라는 제목의 특강이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난민 살레흐(28)씨와 부산대 개원연구원 이정구 박사를 초대하여 1부, 2부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특강이 진행되는 간디학교 강당에는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응원하는 스티커, 엽서 등 굿즈가 마련되어 있었고, 팔레스타인 국기와 간디 학생들이 그린 한반도와 팔레스타인 형상들, 아나키즘 기호가 걸려 있었어요. 강당에는 간디학교 학생과 교사들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분쟁에 관심 있는 지역의 이웃들도 모여 있었습니다. 아는 분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강연이 시작되기 전에, 간디학교 학생들의 여는 마당이 있었어요. 젊은 기운이 느껴지는 춤 공연이었습니다. 이어서 살레흐씨의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살레흐 씨는 대학시절 영어로 경영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강연은 영어로 진행이 되었어요. 통역은 간디 학생들이 맡아 주었답니다. 살레흐 씨는 1997년에 가자지구에서 태어나 2022년에 전쟁을 피해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살레흐 씨는 “가자가 팔레스타인 도시인데, 어째서 내가 가자에서 난민이었을까요?” 라는 질문으로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살레흐 씨 집안은 본래 가자 바깥에 집이 있었는데, 분쟁으로 인해 가자로 피난을 가서 살게 되었기 때문이래요. 살레흐 씨는 방학이 되면 할아버지 집으로 놀러 가 삼촌과 놀곤 했는데, 작년 10월에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할아버지 집이 파괴되고, 할아버지와 삼촌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지금 9개월 째 일어나고 있는 집단학살로 35,000명 가량이 사망했고, 1만 명이 실종되었습니다. 실종된 대부분이 아이들과 여성입니다. 78,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고, 11,000여 명의 부상자들은 치료를 위해 이동해야 했습니다.” “영상은 끔찍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보고 싶지 않으면 눈을 감으셔도 됩니다.” 살레흐 씨는 제노사이드의 실상이 담긴 사진과 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8개월 전 처참하게 파괴된 가자의 거리와 아이들이 무너진 건물에 깔린 영상, 파괴된 거리를 걷는 세 명의 사람들이 저격당해 죽는 영상, 구급차를 공격하는 영상, 전기가 없어 핸드폰 불빛으로 수술하는 사진. 이스라엘은 병원을 공격해서 의료시스템을 파괴했습니다. 이런 공격 뿐 아니라, 물과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55명의 아이들이 먹을 게 없어 죽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보여드린 건 일부에 불과합니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나고 있을까요? 팔레스타인인들은 75년 이상을 고통 받고 있습니다.” 영국이 1917년에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나라를 만들 것이라고 한 후, 1948년부터 시오니스트들의 이동이 시작되었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점령했습니다. 살레흐 씨는 점령지의 확장을 ppt로 보여주고, 가자 지구의 상황을 설명했어요. “국경과 해안을 봉쇄하여 주민들이 자유롭게 여행하거나 이동하는 것을 막았고, 하루에 몇 시간만 전기 사용이 가능했습니다. 주민들은 물 같은 기본적인 자원을 제공받지 못하였고, 식수 부족으로 많은 질병이 생겼으며, 요리용 가스 공급 중단으로 사람들이 원시적인 방식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살레흐 씨 가족은 매우 운이 좋은 편이라, 전쟁이 시작되고 40일 가량 가자에 있었지만 이집트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한번 이상 죽을 위기를 겪었고, 알 시파 병원에 가면서 미사일 파편에 맞는 등 위험한 상황을 겪었다고 합니다. 이모와 조카는 아직도 가자에서 텐트 생활을 하고 있으며, 조카는 전쟁 중에도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며 사진을 보여 주었어요. 살레흐 씨는 대학 시절 학교 사진과 처참한 폐허가 된 현재의 대학교 사진을 보여주며, 최고 우등생이었던 친구가 연락이 두절되었으며, 아마도 죽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 소원은 팔레스타인이 자유로워지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서 세상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일상을 사는 것입니다.” 살레흐 씨의 소원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1부가 끝나고 포스트잇에 질문을 적는 시간이 있었고, 2부는 부산대 객원연구원 이정구 박사가 자료를 통해 중동의 역사적·지리적 배경과 이스라엘 국가 탄생의 배경과 과정, 시온주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해결책을 이야기했습니다. 유대인은 아주 오래전부터 디아스포라였기 때문에, 19세기~20세기 초 유럽에서는 경기가 좋지 않으면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으며, 러시아에서는 유대인 집단 학살이 있었습니다. 드레퓌스에게 프랑스 정부가 간첩 협의를 씌운 일명 ‘드레퓌스 사건’ 이후, 테오도르 헤르츨이라는 유대계 헝가리 언론인은 유대인만의 국가가 필요하다며 ‘세계 시온주의운동’을 제창했다고 합니다. 이정구 교수는 시온주의가 두 가지 의미에서 사악하다고 했습니다. 1. 힘 있는 강대국에 빌붙어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오스만 튀르크 술탄한테 가서 도와달라고 했는데 안 되니까, 영국에 가서 “우리에게 나라를 세워주면 인도 가는 길을 조용하게 해주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당시의 제국주의에 의존해서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 2. 유대인들‘만’의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다른 민족과 공존을 거부하였다.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민족주의. 이교수는 19세기 말~20세기 초 인도, 중국, 미국에 살던 유대인의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나라의 옷을 입고 동화된 모습이었는데요. 지금도 1,300백만 유대인 중 600명이 미국에 살고 있으며, 이들이 팔레스타인에 가지 않는 이유는 시온주의에 동의하지 않고, 이미 정착한 곳을 떠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미국의 유대인들이 시온주의와 이스라엘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을 유대인은 ‘알리아(상승을 뜻하는 히브리어)’라고 부르며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데, 시온주의자들이 영국을 등에 업고 이스라엘을 만들 때 아무도 살지 않는 황폐한 땅에 가서 사는 거라고 했지만, 그 지역에는 팔레스타인인이 계속해서 살고 있었지요.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만행을 비판하면,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위원회에서는 ‘반유대주의’라고 하는데요. 미 대학생들이 팔레스타인 학살을 비판하자, 바이든도 이것을 ‘반유대주의’라고 했습니다. ‘반유대주의’는 홀로코스트와 동의어로 쓰이는 무서운 말입니다. 유대인이 과거 제노사이드를 당했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미국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통파 유대인은 ‘메시아가 올 때 까지 국가를 세우면 안 된다’는 신앙이 있기 때문에 시온주의에 반대한다고 합니다.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유대인이 이집트를 탈출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왔을 때, 거기에는 블레셋 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블레셋의 땅이라는 뜻이죠. 유대인은 블레셋을 정복했습니다.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의 골리앗은 블레셋의 장수입니다. 유대인의 역사책인 구약에 이 정복은 성전으로 묘사되지만, 블레셋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봉변도 그런 봉변이 없죠. 평화롭게 잘 살고 있는데, 어디서 떠돌이 민족이 들어와 여자와 아이들을 살해하고 땅을 빼앗다니. 고대의 역사가 근대에 와서 반복되고 있는 거지요. 이후 ‘가나안’은 신바빌로니아에 정복되어 유대인은 근대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디아스포라를 겪게 됩니다. 세계사는 정복과 패망, 이주의 역사죠. 디아스포라 상태 유대인들이 근대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을 때(알리아), 팔레스타인인들은 처음에 그들이 정착하도록 도와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배타적 민족주의를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것이죠. 이정구 교수는 이스라엘 비판을 홀로코스트(제노사이드)라고 부를 수는 없다며, 배타적 민족주의 국가인 이스라엘과 시온주의가 사라져야 하며, 먼저 이스라엘에 어마어마한 무기를 공급하는 미국이 손을 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1948년 이후로 쫓겨난 팔레스타인인들의 귀환권을 인정하고, 가자와 서안 지구의 점령과 정착지 확장을 종식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국가를 해체하고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 지역에 하나의 비종교적인 민주주의 국가를 세워서 모든 주민에게 동등한 시민권을 보장해야 합니다. 오스만 제국이 무너졌다고 해서 그 국민들이 다 죽은 것도 아니고,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가 무너지면서 백인이 다 죽은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사라지고, 비종교적, 비민족적 국가가 건설되어야 합니다.” 이 교수는 팔레스타인 지지 운동과 국제적 연대를 강조하며, “국제적 연대라고 하는 것은 국제기구들의 활동이 아니라 전 세계 민중들이 이스라엘과 미국을 규탄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지지하는 거리 시위, 행진, 집회 등의 활동을 말합니다. 집회‧시위 등이 전 세계에서 벌어져서 이스라엘과 미국의 지도자들에게 압력이 되도록 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살레흐 씨가 보여준 참담하고 절망적인 가자의 사진들을 보면, 멀리 떨어진 우리가 시위, 행진, 집회를 한다고 해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미사일을 막을 수 있을까 의심스럽지만,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 낫겠지요. 무력武力을 더 강력한 무력武力으로 해결해야 할까요, 무력無力으로 무력화無力化 가 가능할까요? 눈물과 저항, 연대를 통해 다양한 민족을 포용하는 비종교적 국가가 어렵사리 탄생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종류의 계층구조와 차별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입니다. 배타적 민족주의도 처음에는 이민족의 공격과 침탈로부터 부족을 보호하고 부강해지기 위한 수단이었을 테지만, 민족주의의 주체가 더 이상 약자가 아닐 때는 타민족에게는 악랄한 배척자로, 내부의 약자에게는 지독한 파시즘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배타적 민족주의가 사라지고 나면, 유대인이나 팔레스타인인이나 다른 어떤 민족이나 가지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의 진짜 문제가 드러나지 않을까요? ‘안 죽으려면 죽여야 한다’, ‘내 유전자를 남기려면 경쟁자를 죽여야 한다’, ‘타자는 다 경쟁자고, 나를 죽일 수 있다’는 일차원적인 두려움에 근거한 폭력성이 인간의 DNA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세상의 전쟁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질의응답> Q. 유엔은 어떤 활동을 하나요? A. (이정구) 유엔은 있으나 마나 한 기구입니다. 살고 있는 사람을 내쫓으며 UN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을 세웠어요. 난민구호기구를 만들고 할 일을 다 했다는 식이죠. UN은 약소국에 좋지 않은 일을 합니다. Q. 가자에서 있었던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하고 계시는지요? A. (살레흐) 트라우마 극복은 어렵지만, 트라우마 때문에 무너진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극복해야 상황을 더 알릴 수 있고, 팔레스타인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습니다. Q. 가자에 사는 가족은 안전한지? 연락은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 A. (살레흐) 가자지구 안에 있기 때문에 안전하지 않지요. 물과 음식부족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통신이 자주 끊기기 때문에 일주일에 메시지 한 번 정도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Q. 이스라엘에 왜 직접적인 제지가 이루어지지 않나요? A. (이정구) 이스라엘이 ICC에 제소당해 네타냐후가 전범으로 판정을 받았으나, 네타냐후의 행동을 제지할 수 없습니다. 국제기구를 통해 문제해결을 하는 것은 요원합니다. 미국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무기를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네타냐후에게 하지 말라고 하는 중이지만, 이것은 자신들이 전쟁을 너무 많이 벌리고 있기 때문에 말리는 것입니다. 국제기구와 상관없이 팔레스타인지지 운동이 필요합니다. Q.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합니다. 살육과 전쟁은 멈추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식민지를 경험했고, 유대인도 홀로코스트로 고통을 당한 적이 있는데, 시온주의가 없어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이정구) 정통파 유대인은 시온주의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메시아가 올 때 까지 국가를 세우면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지요. 또한 홀로코스트는 유대인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닙니다. 게르만족의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고자, 유대인을 포함한 소수민족 모두를 말살하고자 한 것입니다. 조금 전에 강연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배타적인지 않은 비종교적이고 민주적인 국가가 건설되어야 합니다.
    • 2024 산청의 해
    2024-07-15
  • [2024년 7월, 지리산에서] 그런 날이 있다
    그런 날이 있다. 몹시 지리산에 가고 싶은 날, 그런 날에 지리산으로 향할 수 있다는 건, 큰 행복이다. 장마라고 하기엔 좀 이상한, 해가 나다가 소나기가 쏟아지길 반복하는 날들 사이, 비 소식이 없던 7월 12일의 일이다. 낮밥을 싸고 텃밭에서 딴 토마토를 챙겨 집을 나섰다. 화엄사에서 시작하여 용소, 참샘, 국수등, 코재를 지나 노고단까지 가볼 생각이었다. 화엄계곡엔 물이 넘쳐났다. 저 위 무넹기에서 물을 돌린 덕분에 화엄계곡은 사시사철 물 많은 계곡이 되었다. 남원 달궁계곡 분들이 양해해준 덕분이다. ↑ 장마가 시작되면 화엄계곡엔 물이 넘친다 <지리산사람들>은 화엄사숲에 관심이 많다. 화엄사숲은 서어나무, 참나무 등이 많은 낙엽활엽수 숲이다. 그런데 용소를 지나면서 숲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낙엽활엽수 대신 편백나무가 가득한 숲이 된다. 겨울이면 숲의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는데, 편백나무 숲 아래엔 작은 나무나 풀들이 거의 살지 않아 썰렁하다. 여름인 지금도 그렇다. ↑ 화엄사 낙엽활엽수 숲(위)과 편백나무 숲(아래) 편백나무는 습하고 따뜻한 지역에 사는 나무이다. 오구균 박사는 ‘편백나무는 지리산에 살던 나무는 아닌데, 편백나무가 빨리 자라는 특성이 있어 경제 수목으로 심었으나 돈이 되지 않자 그냥 놔둔 것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편백나무 씨앗이 땅에 떨어져도 싹을 틔우지 못했지만, 기후변화로 따뜻하고 습해지니, 싹을 틔우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긴 시간 동안 화엄사숲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모니터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장마 때 숲을 거닐면 곳곳에서 버섯이 발견된다. ‘아, 여기에 방울토마토가..’ 손이 가다가 멈췄다. 버섯이다. ‘독버섯’이라 불리는데, 먹는 순간 온몸이 마비될 수도 있다고 한다. 후덜덜이다. 용소를 지나 연기암으로 오르다 보면 서어나무 쉼터를 만난다. 고인이 된 이경재 선생님이 구례에 오셨을 때 이곳을 함께 왔었는데, 그때 들은 이야기로는 여기 서어나무 쉼터는 야영장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야영이 금지되면서 이곳은 서어나무 숲으로 변하는 중이다. 연기암 길에서 참샘으로 오르는 길에는 아치형 출입구와 온갖 안내판이 서 있다. 아치형 출입구도 그렇지만, 대문짝만한 안내판도 이곳에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화엄계곡을 통해 지리산에 오르는 분들이 물을 채울 마지막 장소인 참샘, 참샘에 김해 어느 산악회에서 리본을 달아 놨다. 저 산악회는 참샘과 어떤 인연이 있을까? 정기적으로 이곳에 와서 청소라도 하는 걸까. ↑ 연기암길에서 잠샘으로 오르는 초입 아치형 출입구와 대형 안내판 ↑ 참샘에 달아 놓은 김해 OO산악회 리본 지리산에서는 눈만 크게 떠도 새와 양서파충류, 곤충 등을 쉽게 볼 수 있다. 떡 버티고 있는 두꺼비도, 사람들의 발소리에 구애받지 않고 먹이활동을 하는 들꿩도,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메뚜기도, 그리고 지리산이 그리워 걷고 있는 나도 지리산은 묻지 않고 품어준다. ↑ 두꺼비(위), 들꿩(가운데), 메뚜기(아래) 국수등에서 잠깐 쉬었다면 집선대까지는 쉬지 않고 천천히 오르는 것을 추천한다. 오르다보면 서서히 안개가 밀려오는데, 안개가 짙어질수록 집선대가 가깝다고 생각하면 된다. 오늘 집선대에 안개가 꽉 찬 것을 보니, 선녀들, 또는 신선들, 아니면 도깨비들의 모임이 있는가 보다. 집선대를 지나자 안개가 걷혔다. 참 묘한 일이다. ↑ 집선대가 근처는 온통 안개 세상이다 숲이 환해지니 이것저것 눈에 띄는 것도 많다. 돌도, 쓰러진 나무도, 계곡 물보라도, 모두 모두 소중한 숲의 식구들이다. 아.. 그런데, 이런.. 저건, 고로쇠나무에 수액 호스가 꽂혀있네, 한 그루만이 아니라 여기, 저기, 또 저쪽에도 이곳의 고로쇠나무들은 지금까지 호스를 꽂고 있었다. 고로쇠 수액 채취가 끝나면 철거해야 하는데, 아직도 꽂고 있다니.. 먹고 사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문제가 있어 보인다. 고로쇠나무들은 고무호스를 몸의 일부로 평생 달고 살아야 할까? ↑ 집선대를 지나 코재 방향 탐방로 주변 고로쇠나무에 꽂혀 있는 호스 이제 코재다. 코재를 오르면 성삼재에서 노고단으로 가는 큰길과 만난다. 땀을 흠뻑 쏟고 나니 뻥 뚫린 길이 나왔고, 길 양쪽으로 큰뱀무, 큰까치수염, 산꼬리풀, 둥근이질풀 등 여름꽃들이 한창이다. ↑큰까지수염(위), 산꼬리풀(아래) 노고단대피소에서 낮밥을 먹었다. 노고단대피소는 예전 대피소가 내진설계 D등급으로 진단되어 다시 지었단다. 신축 노고단대피소는 재생에너지 100%를 약속했는데, 잘 지켜지려나. 국립공원 대피소들이 산 아래에서 전기를 끌어다 쓰면서(산에서는 화석연료 발전을 안 한다고 자랑하는) '넷제로'를 말하는 건, 참 민망한 일이다. ↑ 노고단대피소 노고단삼거리에서 구름 가득한 반야봉을 바라보며 나무데크를 걸어 노고단으로 향했다. 여름 노고단은 꽃밭이다. 노고단 입구에서 노고단까지 가는 동안(600m이니 천천히 또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충분하다.) 해가 나왔다가 구름이 몰려왔다가를 서너 차례 반복한다. 이곳이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순간들이다. ↑ 노고단(위), 노고단에서 바라본 종석대와 서북능선(아래) 7월 12일 노고단에서 만난 꽃들은 물레나물, 말나리, 기린초, 지리터리풀, 산오이풀, 노루오줌, 미역줄나무, 큰뱀무, 꿩의다리, 둥근이질풀, 동자꽃, 원추리, 톱풀 등이다. 나는 내가 아는 만큼만 이름을 불렀으니, 내가 모르는 꽃들까지 합친다면 정말 많은 나무와 풀들이 노고단을 만드는 셈이다. ↑ 둥근이질풀(위), 미역줄나무 꽃(가운데), 원추리(아래) 노고단에서 내려와 성삼재까지 오는 길에는 산수국이 보라, 파란색으로 빛나고 있고, 곳곳에서 짚신나물, 물봉선 등도 볼 수 있고, 노각나무에서 떨어진 꽃도 만날 수 있었다. 이 길은 너무 넓고, 잘 닦여 있어 낯설지만, 지리산을 만나려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곳이니 고마운 마음으로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산수국(위), 성삼재길에 떨어진 노각나무 꽃(아래) 성삼재에서 반야봉과 만복대를 바라본다. 지난해 12월 구례군은 바로 이곳에 지리산 케이블카 상부정류장을 짓겠다는 계획서를 환경부에 제출했다. 버스도 다니고, 승용차로 올라올 수도 있는 곳에 케이블카를 만들겠다는 사람들, 이유가 있겠지만 누구를 위한 케이블카인지 정말 이해되지 않는다. ↑ 2023년 12월 구례군은 성삼재 주차장에 지리산 케이블카 상부정류장를 놓겠다는 계획서를 환경부에 제출했다 (사진: 김인호) 게다가 지리산국립공원으로 올라오는 케이블카는 국비가 단 1원도 지원되지 않고 민간사업자가 투자할 수도 없으니, 거의 모든 비용을 군비(설악산 오색 케이블카의 경우는 총사업비 1천172억 원 중 양양군이 부담할 비용이 948억 원이다. 80% 이상을 양양군이 부담한다. 구례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로 부담해야 하는 건설사업이다. 군민을 위한 복지, 교육예산을 케이블카 건설을 위해 쓰겠다는 것이며, 케이블카 운영 과정에 발생하는 적자 역시 군민 세금으로 메꾸겠다는 것인데, 구례군민인 나는 정말 걱정이다. 걱정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좀더 노력해야겠다.
    • 지리산 오늘
    • 기후 위기
    2024-07-14
  • 수박밭 그 사나이 " 조 승 현"을 기리며
    농부 조승현을 만난 것은 지난 2008년 7월이었다.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수박 때문이었다. 수확을 며칠 앞둔 그는 갑자기 판로가 막히게 되었다. 약속했던 업체가 수박을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수소문해서 내 전화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했다고 했다. 그는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사무실로 찾아왔다. 수박은 출하시기를 늦추기 힘들고 보관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갈 곳 없던 유기농 수박에 나에게로 왔다. 그와 함께... 그리고 수박을 팔기 시작했다. 그의 사연을 들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수박을 모두를 판매할 수 있었다. 그는 택배를 보내면서 100g이라도 모자라면 그 안에 모자란 돈을 넣어 보냈다. 그는 신뢰를 보여준 소비자에게 다시 신뢰로 보답했다. 그의 수박덕에 유난히 더웠던 2008년 여름은 시원했다. 하얀 러닝에 검정 고무신은 그의 "교복"이었다. 이 모습이 내가 그를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다. 아이는 컸고 그는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 그는 하동군 횡천면에서 노모와 아이들 셋 그리고 서울에서 시집온 아내와 함께 살았다. 그의 아내는 서울에서 태어나 도자기를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 "3년 안에 가마를 만들어 준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말한 세월이 20년 넘게 흘렀다. 가마는 없다. 그녀는 농부가 되었다. 흙 만지는 것으로 좋아했으니 흙에서 사는 것이 좋지 않으냐? 는 조승현 씨의 말에 그녀는 미소를 짓는 것으로 답했다. 좋은 것인가? 아닌 것인가? 묻고 싶었다. "농사를 지어서는 몇 백만 원 하는 가마를 만들어 줄 수 없더군요. 한해 농사짓고 아이들 키우는 것도 힘이 들어요. 그래도 농사를 짓는 것은 좋아요." 그는 젊어서는 유럽 배낭여행을 다니기도 했고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고 했다. 그는 특허도 받았다. 벼를 이용한 액비다. " 비싼 비료를 사용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해서 농사를 짓는다. 다른 것은 넣지 않아요. 유기농에서 허용하는 자재도 쓰지 않습니다. 수박은 수박의 힘으로 크고 저는 최소한의 것을 투입합니다. 그의 수박은 정직했다. 다른 수박과 비교하면 당도가 낮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도를 올리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안 하는 것입니다. 수박 본연의 맛에 충실하게 위해서입니다." 그는 시인이다. 그가 수박을 향해 쓴 시들을 공개한다. 손 단디 잡아라 빛을 향한 목마름은 니 책임이다. 수박꽃 늘 명심하십시오 푸른 잎 속에 억센 줄기 속에는 꽃과 향기가 자라고 똠 품고 있다는 것을 꽃은 어데서 왔을까요? 애들처럼 살고 싶다. 주구 엄마는 허리가 끊어진 듯 질질 엉덩이를 끌며 속옷으로 땀을 얼마나 훔쳤는지 얼굴이 벌겄타 세상 넓고 넓은데 온 천지 꽃 중에 봄이 피는데 더워 못살겠네 말을 하면서 수박새끼튼 뭐 한다고 주워 모으느냐? 아이야 저 넓은 봄 가운데로 가라 짧고 짧은게 피는 것인걸.... 쌔가 만발이나 빠질 봄아 봄아 이 쌔빠질 봄아 피려면 혼자피지 혼자서 흔들리지 이 마음도 너 맘이더냐? 오늘도안녕 매일매일 인사해요. 녹색의 마음으로 인사를 받아주죠 파란 안녕! 으리기다 허리를 낮추어 고개를 숙이고 잎이 넘어질세라 순이 엉길세라 허리를 나추어 고개를 앞조리어 보인다. 여기도 까꿍 저기도 까꿍 현대 농업에게 난 믿는다. 사람들은 높은 당도의 맛을 원하지만 단시간에 그것이 통하겠지만 세상 가득 식물들은 수억 년 동안 동물들의 입맛을 결정해 왔다. 어디 열매가 같은 맛 나는 열매가 있더냐 적어도 나의 농법은 식물들 스스로 겪어 냈을 때 그 속의 면역된 물질의 맛이 있다고 생각하지 우리의 어릴 때 입맛을 자주 더듬어 보게 하지 어릴 땐 무엇이든 맛있었지. 왜 그럴까? 우리의 입맛도 세놰 당하고 강요당하고 있지 않을까? 묻는다. 현대 농업에게!! 우리수박맛있어요. 수박 본래의 맛입니다. 수확 앞둔 수박밭에서의 단상 잎이 누렇게 변합니다. 뿌리의 잎은 노화로 기능을 잃어 갑니다. 마지막까지 있은 힘껏 영양분을 수박에게 이동해 줍니다. 수박은 터져라 모든 영양분을 축적합니다. 수박넝쿨은 잎이 마를 때까지 씨앗을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포기란 없습니다. 농부는 1년에 몇 번을 태어남과 죽음을 지켜봅니다. 농부는 자연의 섭리에 잘 순응합니다. 사람 만이 내리사랑이 있겠습니까? 자연의 이치나 사람의 사랑이나 참으로 고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몇 해 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는 평생 돈이 안 되는 유기농을 고집했다. 그는 한 번도 부자로 살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연락이 없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렇게 세 번째 해가 바뀌던 어느 날 처음 그날처럼 불쑥 전화를 해서 벌을 키우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를 만나러 갔다. 섬진강을 따라 화개, 하동을 지나고 산청 가는 도로 옆에 있는 그의 작은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오래전 그 모습 그대로라고 저는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날 불쑥 찾아와서는 암에 걸렸다고 했다. 그렇게 두 해가 지나고 그리고 올봄 첫 꿀이 나왔다고 그가 전화를 했다. 항상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데이... 한 번 놀러 오시라케도.... 막걸리라도 한 잔 합시데이... 그러게요. 곧 가볼 께요... 봄이 가기 전에 오라고 했는데 나는 가지 못했다. 바쁘지도 않았는데.. 그런데 조승연 농부의 아내분이 연락이 왔다. "조승현 씨가 6월 6일 돌아가셨어요....." "네...?" "무슨 이야기죠..."라고 물었지만 벌써 눈물이 났다. "연락을 하시지 그랬어요?" "아.. 갑작스럽고.. 그러지 못했네요. 죄송해요" " 연락처도 바꿔야 하고 꿀도 남아서.. "이렇게 전화를 했어요...... "농사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어떻게 해봐야죠 "아이들이 있는데요..." 봄이 가고 여름이 오자 그는 떠났다. 착하고 순박한 농부들이 점 점 세상을 떠난다. 나도 이제 이 판에서 떠날 때가 되어간다. 내가 좋아했던 농부들이 땅에서 삶에서 떠나고 있다. 그의 가난하지만 우직하고 정직한 농사를 나는 늘 응원했다. 이제 내가 응원하고 싶은 농부들이 줄고 있다. 선하고 착하고 그래서 보면 눈물이 나던 조승현 농부의 명복을 빕니다. 함께해서 좋았어요.
    • 우리마을
    • 하동
    2024-07-02
  • 지리산 어디에도 케이블카는 안 된다
    6월 24일 (월) 낮 2시 경남도청 기자회견장에서 ‘지리산 케이블카를 반대하는 전국 186개 단체’가 참여하는 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분들은 ‘지리산을 그대로! 국립공원 1호 지리산은 정치인들의 표 장사 대상이 절대 될 수 없다. 지리산을 팔아먹지 말라! 지리산 케이블카 추진, 당장 중단하라! 지리산 어디에도 케이블카는 안 된다! 환경부는 케이블카 신청서 즉시 반려하라!’고 외쳤습니다. 지금 지리산에는 케이블카 3개(구례/남원/산청, 이중 구례와 산청은 환경부에 신청서를 제출했고, 남원은 용역 중입니다), 산악열차(남원), 골프장(구례), 벽소령도로(하동~함양간) 등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립공원 1호, 반달가슴곰이 사는 땅이 이 모양이니.. 다른 곳은 더 볼 것도 없겠지요. 정말 어처구니없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지리산을 그대로!’를 실천하는 분들로 구성된 <케이블카 없는 지리산 실천단>은 7월 1일 (월) 11시, 환경부(세종시) 앞에서, ‘지리산 케이블카 신청서 반려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로 했습니다. 오늘 기자회견문 공유합니다. 케이블카, 지리산 어디에도 안 된다 경상남도와 산청군은 국립공원 1호, 지리산에 케이블카 건설하려는 만행을 당장 중단하라! 국립공원은 고작 4년 임기 정치인의 것이 아니다. 지리산 케이블카의 망령이 다시 깨어났다. 지난 주 경남도의 지시로 산청·함양 지리산 케이블카 단일노선이 산청 중산리 구간으로 결정되었다. 이 무슨 어이없는 만행인가? 지자체간 협의로 노선을 단일화하면 케이블카 허가를 검토하겠다는 환경부의 가이드라인 때문이라고 하지만, 주민동의 없이 국립공원을 짓밟을 권리가 지자체장들에게 있는가? 표 장사를 위해 근거도 없이 지역경제 활성화를 들먹이는 그들에게 시민들의 혈세를 낭비하고 환경을 파괴할 권리는 없다. 1000억 원이 넘는 사업비 전부를 지자체 예산으로 충당하면 주민들을 위한 복지예산이 대폭 삭감될 수밖에 없고, 수익 가능성이 거의 없이 주민 세금으로 향후의 운영비를 감당해야 한다. 이런 상황을 주민들에게 분명히 알리고 동의를 구한 적이 있는가? 주민동의 없이 밀실에서 그들끼리 죽이 맞아 결정한 케이블카 사업에 우리는 분노한다. 지리산 케이블카 추진을 위한 노선 단일화 같은 만행을 멈추고, 케이블카 추진을 당장 중단하라! 국립공원은 그대로 보존하고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생태자산이지,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라고 지정된 것이 아니다. 손상되지 않은 자연환경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국립공원의 첫 번째 목적이다. 환경부가 지리산권 케이블카 신청을 2012년 부결, 2016년, 2017년, 2022년 계속 반려한 이유는 보존가치가 높은 동식물의 생태를 훼손하고, 기존 탐방로와의 연계로 환경파괴를 초래할 수밖에 없으며, 지역 간 갈등을 유발하는 등 문제점이 많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산청·함양 노선이 단일화되었다고 이런 문제들이 해결된 것인가? 지리산 그 어디에도 케이블카가 들어서서는 안 된다. 국립공원은 국토면적의 4%에 불과하다. 케이블카를 건설하겠다는 중산리 구간은 대부분 자연보존지구로, 국토의 1%도 안 되는 보존가치가 높은 곳이다. 한번 파괴되면 원상회복은 불가능하다! 후손들에게 죄 짓지 말고, 지리산을 마음대로 손대지 말라! 그래야 모든 생명과 인간들이 평화롭다! 케이블카 건설로 지역경제가 대박날 거라는 헛소리는 집어치워라! 이제 케이블카 건설은 재앙이다. 전국 관광케이블카 41곳 중 38곳이 적자다. 25곳이 2012년 후 과열된 개발열기로 건설되었고, 모두 적자다. 비슷한 시설끼리 경쟁하며 수렁에 빠진 것이다. 정치인인 지자체장들이 표 장사를 위해 단기적 성과에 목맨 결과다. 한때 케이블카 건설의 모범사례로 불린 통영케이블카도 2023년 탑승객은 이전의 1/3 수준인 42만 명으로 급격히 줄어 39억 적자로 전락했다. 지리산 주변에도 이미 사천, 하동, 거제 등에 케이블카가 있고, 이들 모두 적자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리산 케이블카는 무슨 근거로 수익을 낼 것이라 장담하는가? 산청군청에서 환경부에 제출한 케이블카 신청서를 보면 탑승객이 첫해 55만 명이고, 30년간 꾸준히 증가해서 30년 후에는 77만 명이 케이블카를 타야 사업비를 건질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어이가 없지 않은가? 통영도 현재 40만 명이 겨우 넘는데, 산청이 최초 탑승객이 55만 명이나 되고, 인구감소, 에너지 위기 시대에 30년 간 탑승객이 계속 늘어날 것이라니 말이 되는가? 기후위기, 식량위기, 생태위기는 10년 내에 닥칠 수 있다. 지금 케이블카 관광 얘기는 정치인의 무책임한 표 장사에 불과하며, 지역인을 수렁에 몰아넣고 토건업자만 배불리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환경부는 케이블카 신청서를 즉시 반려하라! 지리산 어디에도 케이블카는 세울 수 없다! 미국에는 모두 63개의 국립공원이 있으나 케이블카는 한 대도 없다. 스위스에는 스키를 위한 관광케이블카가 460개나 있으나, 국립공원에는 한 대도 없다. 일본에는 1970년 이후 국립공원에 신규 케이블카가 한 대도 생기지 않았다. 아무리 환경공법을 말해도, 자연보존지구 내에 10개의 철탑을 세우고, 천왕봉 가까이 상부정류장을 만드는데, 심각한 환경파괴는 불 보듯 뻔하다. 아무리 지역경제 활성화를 핑계 삼아도, 케이블카는 적자를 면할 수 없다. 설악산 케이블카가 흑자인데도 인근 설악동 관광지구가 완전히 몰락한 현실을 보면, 케이블카가 지역경제에 미치는 효과는 정반대로 재앙이 될 것이다. 환경부는 작년에 제출된 산청군청의 케이블카 신청서를 즉시 반려하라! 환경부가 뭉개고 있으니, 지자체들이 계속 엉뚱한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엉터리 분석에 근거한 신청서를 즉시 반려한고, 환경부의 책무를 팽개치지 말라! · 지리산을 그대로! 경남도와 산청군의 지리산 케이블카 추진, 당장 중단하라! · 국립공원 1호 지리산은 정치인들의 표 장사 대상이 절대 될 수 없다. 지리산을 팔아먹지 말라! 지리산 케이블카 추진, 당장 중단하라! · 노선 단일화 필요 없다! 지리산 어디에도 케이블카는 안 된다! 환경부는 케이블카 신청서 즉시 반려하라! 2024. 6. 24 케이블카 없는 지리산 실천단, 지리산지키기연석회의, 구례기후위기모임, 구례양수댐반대대책위원회, 사단법인반달곰친구들, 성삼재정령치도로전환연대,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지리산사람들, 중산리반내골주민연대, 지구를위한작은발걸음,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남교사모임, 기후위기남원시민모임,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대안행동 바로, 사회민주당 전북특별자치도당, 대안행동 바로, 시민의 숲, 시민주권남원행동, 시민참여제도연구회, 지리산산악열차반대남원대책위원회, 경남녹색당, 경남불교환경연대, 지리산케이블카반대산청주민대책위원회, 산청녹색당, 전교조산청지회, 지리산초록걸음, 진보당산청지역위원회(준), 산청진보연합, 전교조산청지회, 통일산행달뜨기, 함께평화, 하동참여자치연대, 하동기후시민회의, 하동녹색당, 섬진강과지리산사람들, 수달친구들, 옥동토석채취반대대책위, 전교조함양지회, 지리산종교연대, 함양기후위기환경연대, 함양군농민회, 함양난개발대책위, 함양대광마을주민대책위원회, 함양녹색당, 함양시민연대, 사천여성회, 문화사랑센터, 사천진보연합, 민주노총사천지부, 전교조사천지회, 사천농민회,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광주환경운동연합, 광주전남불교환경연대, 광주전남귀농운동본부, 광주에코바이크, 상상창작소 봄, (사)광주시민센터, 광주전남녹색연합, 황룡강생태환경문화지킴이, (사)시민생활환경회의, 두바퀴랑위드 사회적협동조합, 기후행동비건네트워크, 광주전남녹색소비자연대, 광주YMCA, 진보당 광주광역시당, 민주노총 광주본부, 참여자치21, 광주인권지기 활짝, 광주참교육학부모회, 가톨릭공동선연대, 광주녹색당, 녹색정의당 광주시당, 무등산 무돌길협의회, 참된세상 참된자아 참배움터, 무등산보호단체협의회, 생명을노래하는숲기행, 광주전남민주언론시민연합,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광주여성노동자회, 광주여성민우회, 광주여성의전화, 광주여성회, 광주여성센터, 광주여성장애인연대, 전남여성장애인연대, 광주여성인권지원센터,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광주시민단체협의회, 광주재능기부센터, 전국교수노동조합 광주전남지부, 광주민족예술인단체총연합, 광주진보연대, 광주YWCA, 우리농촌살리기운동 천주교광주대교구본부, 광주소비자공익네트워크, 광주전남시민행동,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환경과생명을지키는광주교사모임, 진주기후위기비상행동, 민주노총진주지역지부, (사)진주참여연대, 생활정치시민네트워크 진주같이, 진보당 진주시위원회, 진주녹색당, 진주시여성농민회, 진주여성민우회, 진주여성회, 진주참여연대, 진주텃밭협동조합, 진주YWCA, 진주YMCA, 한살림경남생협 진주지부, 경남환경운동연합, 김해환경운동연합, 사천남해하동환경운동연합, 마산창원진해환경운동연합, 양산환경운동연합, 진주환경운동연합, 창녕환경운동연합, 통영거제환경운동연합, 환경과생명을지키는경남교사모임, 전남환경운동연합, 고흥보성환경운동연합, 광양환경운동연합, 목포환경운동연합, 순천환경운동연합, 여수환경운동연합, 장흥환경운동연합, 녹색정의당 전남도당, 희망해남21, 여수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여수ymca, 여수ywca,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여수지회,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여수시민협, 여수일과복지연대, 여수대안시민회, 전남진보연대, 민주노총 전남본부, 전국농민회총연맹 광주전남연맹, 전국공무원노조 전남본부, 전교조 전남지부,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광주전남연합, 광주전남추모연대, 진보당 전남도당, 화순진보연대, 광양진보연대, 나주진보연대, 전남교육회의, 6.15공동위원회 전남본부, 전남녹색연합, 전북환경운동연합,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북교사모임, 환경운동연합, 안동환경운동연합, 청주충북환경운동연합, 제주환경운동연합, 포항환경운동연합, 서울환경운동연합, 대구환경운동연합, 인천환경운동연합, 원주환경운동연합, 강동송파환경운동연합, 서산태안환경운동연합, 여주환경운동연합, 화성환경운동연합, 천안아산환경운동연합, 안산환경운동연합, 익산환경운동연합, 충남환경운동연합, 속초고성양양환경운동연합, 춘천환경운동연합, 원주환경운동연합, 안양군포의왕환경운동연합, 고양환경운동연합, 성남환경운동연합, 파주환경운동연합,경주환경운동연합, 당진환경운동연합, 예산홍성환경운동연합, 대전환경운동연합, 부산환경운동, 세종환경운동연합, 울산환경운동연합 (지리산 케이블카를 반대하는 전국의 186개 단체)
    • 지리산 오늘
    • 지리산 위기
    2024-06-26
  • 궁금해, 지리산- 김종직의 유두류록 길을 따라 걷다
    안녕하세요~ 지리산 산청 소식을 전하는 포네입니다. 지난 6월 20일(목)에는 지리산사람들과 지리산이음, 다시지리산에서 주최하는 답사 프로그램 ‘궁금해, 지리산- 함양편’이 있었어요.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구(2020. 삼우반)> 저자인 류정자 선생님이 550년 전 김종직이 지리산을 탐방하며 걸었던 길의 일부를 안내해 주셨습니다. 김종직(金宗直, 1431년 6월 ~ 1492년 8월 19일)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성리학자이며, 1470~1475년까지 함양군수를 역임했습니다. 함양군수 재임 시절 1472년 음력 8월 14~18일까지 5일간 지리산을 탐방하고 유두류록(遊頭流錄)이란 산행기를 남겼는데 류정자 선생님이 여러 차례의 탐방을 통해 코스를 확인했다고 합니다. 적조암 주차장에서 모여 인사를 나누고 출발합니다. 적조암까지 가는 길이 구불하고 좁았는데 암자가 너무 커서 놀랐어요. 김종직이 걸었을 당시에는 지리산 구석구석에 암자가 350여 개나 되었다고 해요. 김종직의 유람도 어느 스님이 안내를 했습니다. 유두류록을 읽어보면 고열암에서 하루 자게 되는데 오늘은 거기까지 가보자고 하십니다. 김종직인 언급한 절이 4개인데 이곳들을 찾아내는데 15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적조암 위 마지막 민가를 지나 산길로 들어서자 새소리가 들려왔어요. 김종직이 지리산을 유람했을 때는 국립공원이 시작되는 돌배나무가 있는 지점까지 조랑말을 타고 올라갔다고 합니다. 중간에 출입금지 팻말이 있는데, 류정자 선생님의 건의로 올해 초 탐방로로 허가를 받았다고 해요. 노장대(독바위)까지 2m 넓이의 야자매트를 깔 예정이라고 합니다. 산속에는 군데군데 돌로 쌓은 축대가 있어서 과거에 민가와 경작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중간에 금낭화 군락지가 있었는데, 옛날 운암마을 터로 경남인민유격대 대원들이 한참 머물렀던 곳이라고 합니다. 유격대는 법화사에서 결성되어 1947년에 이곳으로 1,200명이 옮겨와 머물렀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빨치산이 숨어 살았던 곳. 조릿대 숲을 헤치고 산을 더 올라갑니다. 중간에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류정자 선생님이 빨치산 이야기를 한 번 더 해주셨어요. 이 근방에 빨치산 식량저장소였던 삼각바위와 굴이 있다고 합니다. 발견되었을 당시 박쥐가 날아다니고 곡식이 삭아서 먼지에 발이 빠질 지경이었대요. 조릿대를 헤치고 더 올라가니 500년 된 돌배나무가 나왔어요. 돌배나무가 이렇게 오래 사는 나무였군요. 돌배나무는 이 개체 말고도 오다가 두 그루를 더 보았어요. 수고가 워낙 높아서 열매가 날렸는지 어떤지는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돌배가 떨어질 무렵 배낭을 메고 주우러 오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배꽃이 필 때 오면 환상적일 거 같은데 시기를 맞추기는 어렵겠지요. 김종직은 이 지점까지 조랑말을 타고 왔대요. 가다가 큰 바위 옆에서 잠깐 휴식.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지장사 터가 있는데, 빨간 얼룩이 군데군데 묻은 바위가 있대요. 무엇인가 하면 빈대의 핏자국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암자가 많이 사라진 건 숭유억불 정책 때문이기도 하지만, 빈대가 너무 많아서 그랬다는 재미난 이야기. 절이 없어진 후 무시무시한 빈대도 없어졌겠지만, 우리는 지장사 터엔 들리지 않고 오른쪽으로 나아갔습니다. 조릿대숲을 벗어나자 산이 점점 가팔라졌습니다. 올라가는 길에는 작은 동굴도 있고, 올라가니 산내가 내려다 보이는 큰 바위(환희대?) 도 있었습니다. 이 다음에 나오는 절터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암자 이름은 잊어버렸네요. 큰 바위 아래 낮은 동굴에 샘이 있어서 그 옆에 암자를 짓고 수도를 했던 모양입니다. 동굴을 들여다보니 흙바닥에 물이 조금 고여 있긴 한데, 가물어서 그런지 마실 만한 양은 되지 않아 보였습니다. 옛날에는 1~2인 정도 마시고 살 만한 물이 나왔을까요? 돗자리를 깔고 점심을 먹으려 류정자 선생님에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큰 바위 위에 흙이 있고 중이 채소밭을 가꾸고 살더라는 기록을 보고 이곳을 찾았다고 합니다. 기왓장과 자기 조각이 많이 발견되고, 이 높은 곳에 있는 암자들도 다 기와로 지붕을 이었대요. 절을 짓기 위해 산속에 기와를 굽는 가마터부터 만들었다는. 식사 후 류정자 선생님과 일행의 3분의 2는 하산했습니다. 수달아빠가 안내를 맡아 6명이서 독바위(노장대)를 목표로 산행을 이어갔습니다. 수달아빠가 발견한 수정란. 원래는 투명한데, 날이 가물어 흰색을 띄는 거랍니다. 수정처럼 투명하다고 수정란인데, 잎도 없고 뿌리도 없고 꽃만 있는 신기한 식물이에요. 엽록소로 광합성을 하지 않고, 뿌리곰팡이가 제공하는 영양분으로 꽃을 피우고 종자를 맺는답니다. 수정난을 기생식물이라고 하는데, 그건 적당하지 않은 분류인것 같아요. 광합성을 하는 평범한 식물도 그런 식으로 따지면 태양에 기생하는 거잖아요? '균종속영양식물'이라는 분류가 그나마 나은 것 같습니다. 종속이라는 단어 빼고 그냥 뿌리곰팡이영양식물이라고 했으면 더 나았을 텐데요. 수정란은 지하세계의 생명의 네트워크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려주는 지표 같아요. 숲속의 요정 같은 식물. 팅커벨이 마법의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고 있는 걸까요? 수정란을 뒤로 하고 가파른 길을 한참 올라가니 신열암이 있었어요. 신열암 입구에는 뽕나무가 가지를 드리우고 있어서 잠시 멈추고 향이 진하고 달콤한 오디를 따먹었어요. 산의 낮은 곳에서는 오디철이 지나 바위 위에 시든 열매가 떨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여기는 한창이네요. 오디는 담비나 오소리의 식량이 되는지, 바위 위나 굴에 싸 놓은 똥을 보면 오디씨앗이 많았어요. 이곳에 암자를 짓고 불도를 닦았다니 어마어마합니다. 바위벽에 몇 군데 홈이 파인 걸로 보아 나무를 박아 넣었던 거 같아요. 여기도 바위 밑에서 물이 나와 암자를 지었나 봅니다. 날씨가 가물어서 샘에는 물이 한 방울도 없었고, 깊숙한 곳에 축축한 흙이 있는 정도였어요. 조선시대에는 여기서 꾸준히 물이 나왔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암자가 지어지지 않았을 테니. 샘에서 물 떠서 나뭇가지로 불을 지펴 산나물·나무열매 따위로 밥해먹고,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들었을 선승들의 생활을 상상해봅니다. 신열암 앞 함박꽃나무에는 꽃이 딱 한 송이 피어 있었어요. 독바위는 이 위에 있다고 해서 수달아빠를 따라 다시 산을 올라갔어요. 여기가 어딘고? 산등성이까지 올라가서 걷는데 암만 봐도 독바위는 없고, 너무 멀리 가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가다가다 보니 와불산 꼭대기. 이 산꼭대기 밑에 독바위가 있다고 하여 가파른 비탈을 내려갔는데, 참여자 1인의 지도 앱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중. 아.. 여기가 아닌가. 다시 비탈을 올라 와불산 정상에 오른 다음, 능선을 따라 온 길을 되짚어서 돌아갔어요.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터덜터덜 한참을 돌아가서야 제대로 된 길을 찾아 내려갔습니다. 여기는 신열암 바로 위 같은데, 신열암이랑 매우 가까이 있는 독바위를 못 보고 그냥 지나쳐 온 거였네요. 흑흑. 독바위로 가는 통로라는 안락문. 와~ 다른 세상으로 가는 문 같아요. 편안하고 즐거운 세상으로 가는 문이라니, 이 문을 관통하면 이제까지의 고생은 끝? 치솟은 바위벽 사이에 틈이 있습니다. 어떤 지질학적 작용으로 바위가 둘로 쪼개져 이런 길이 생겨난 걸까요. 참 신기해요. 바위로 된 산도를 통과하여 다시 태어났습니다. 조금 더 내려가니 엄청나게 큰 바위산이 있었습니다. 저것이 독바위, 독녀암이로군요. 하늘을 찌르는 거대한 바위가 몇 갈래로 쪼개져 있습니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신열암(新涅菴)을 찾아가 보니 중은 없었고, 그 암자 역시 높은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가 있어 다섯 가닥이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척(尺)이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 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잣나무가 바위 중턱에 나 있는데, 그 바위를 오르려는 자는 나무를 건너질러 타고 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 잡고 바위 틈을 돌면서 등과 배가 위아래로 마찰한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을 내놓을 수 없는 사람은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란히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는데, 지금에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毛骨)이 송연하여 정신이 멍해져서 내가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어느 여인이 홀로 기거하며 도를 닦아 승천했다는 독바위. 우리들은 잣나무가 아니라 어느 친절한 이가 매어놓은 나일론 밧줄을 잡고 바위 위로 올라갔어요. 부처머리에 두 번이나 올라가느라 힘이 빠져서 정상에 올라갈 수 있을지? 밧줄이 삭아서 좀 불안했지만 다들 낑낑거리며 중턱까지 올라가는데 성공했어요. 김종직 일행이 잣나무를 타고 올라간 바위는 이 지점 위에 있는 한층 더 높은 바위 같은데 거기까지는 도전하지 못했습니다. 여기까지만 올라와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풍광. 저 아래 출발 지점이었던 적조암이 내려다보였어요. 와불산을 헤메고 부처머리에 두 번이나 올라갔다 내려온 시간이 다 용서되었습니다. 안락문과 독려암을 보았으니, 높은 산을 헤맨 보람이 있지요. 하늘을 나는 새가 된 기분. 여기서 속세의 때를 벗고 다른 차원으로 승천하면 좋겠지만, 아직 속세에서 할 일이 남은 관계로 하강해야. 이렇게 높은 곳에서 산아래를 내려다보며 구름이 아련한 먼 지평을 내다보기 위해 케이블카를 타는 거겠죠? 단돈 2만 2천 원을 내면 5분 만에 승천한 기분이 느껴지는 곳까지 갈수 있죠. 아무런 힘을 들이지 않고 케이블카로 이곳까지 왔다면 어땠을까요? 빨치산의 루트와 금낭화 군락지가 된 옛 마을터, 환희대, 신열암도 못보고, 수정난도 만나지 못하고, 부처머리로 가는 길에 있는 다래의 군락도 못보고, 오소리의 화장실도 마주치지 못하고, 이름 모를 풀과 나무들의 향기도 맡지 못하고, 깊은 산속의 새소리도 못 들었겠지요. 독녀가 했다는 승천은 무엇일까요? 위치상으로 높은 지형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건 아닐 거 같아요. 지리산의 깊은 산속에서 동식물과 바위의 영과 공생하면서 이들의 노래와 침묵을 해치지 않으며 고독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세속의 소음 속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특별한 신체의 감각이 열리고, 시공을 초월하는 영안이 뜨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게 승천 아닐까 하네요. 케이블카를 타고 산에 올라 피상적으로 시야를 넒히는 건 사진을 남기는 것 외에는 별 의미가 없답니다. 뭇생명과 그들의 모태인 지구의 영을 우리의 신체로 직접 만나고, 육체를 넘어선 미묘한 신체로 공생, 공감하는 정신적 지평이 넓혀져야 하는 것이지요. 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중력을 주체하지 못해 침착하게 한발 한발 내딛으려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고 비틀거리며 떨어지듯 빠르게 내려왔어요. 승천은 느리지만 하강은 빠른 속도로 일어나는군요. 먼저 하산해서 적조암 주차장에서 독녀지망생을 기다리며 담배를 태우고 있을 가께목 선사가 심심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어요. 차 안에서 <20세기 소년>이라도 꺼내보게 키를 드리고 독바위에 올라갈 것을, 아차 싶었죠. 무면허 음주운전을 하실까봐 키를 안 드렸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 산을 헤맬 줄은.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돌배나무 근처에서 팔색조의 노랫소리를 들었어요. 수달아빠가 폰을 켜고 휘파람으로 새소리를 흉내 내기 시작했어요. 서투르나마 나도 흉내를 내 보았어요. 이렇게 5분정도 소리를 내고 있으며 새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2분쯤 지나 푸른색 날개가 우리들 옆을 휙 하니 지나갔어요. 와~ 나뭇잎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곳에 앉았길래, 조금 더 불러보았는데, 어쩐지 짜증이 섞인 듯한 울음소리로 대답하는 걸 들었어요. 결국 촬영은 하지 못한 수달아빠. 그래도 산에서 내려오면서 팔색조를 보아서 너무 기뻤어요. 이젠 산속에만 가면 5분 동안 휘파람 불면서 팔색조를 기다려 볼 것 같아요. 하루를 꼬박 투자하여 지리산의 숨은 비경과 역사, 생태를 만난 시간이었습니다. 김종직이 걸었던 오래된 길과 빨치산 루트, 암자터를 안내·해설 해주신 류정자 선생님, 지리산의 동식물들을 만나게 해준 수달아빠, 앞서거니뒷서거니 함께 걸으며 서로 낙오되지 않게끔 지켜준 여러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지리산에서 또 만나요. #궁금해지리산 #궁금해함양산 #류정자 #김종직 #유두류록 #독바위 #독려암 #지리산을_그대로 #지리산_케이블카 #승천
    • 지리산 오늘
    • 다시지리산
    2024-06-24
  • 온누리에 빛나라 대광 하지축제 - 함양 대광마을 난개발사업으로 위기
    함양 대광마을에는 대규모 토목사업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사업이 계획중인 1년동안 대상 지역인 대광마을 주민들과는 전혀 협의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주민들은 사업대상지의 경사로 인한 위험성, 농지를 대규모 꽃밭으로 바꾸는데서 오는 생계문제, 환경문제를 제기하며 이 사업을 철회할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리산 권역에서 난개발을 반대하는 시민단체가 모여 하지축제를 대광마을에서 열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참고해 주세요. 아래에 대략적인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00:00 인트로 마을주민 신종권 인터뷰 00:26 하지에 축제를 여는 의미 00:57 하지축제가 대광마을에서 열리는 의미 02:03 기후위기 시대에 맞지 않는 개발 사업 02:42 대광마을 이장님과 마을 한 바퀴 대광마을 이장님 인터뷰 03:03 함양사계4U 사업의 문제점 03:46 함양사계4U 사업은 세금낭비 사업 04:26 하지축제 장터 마을주민 신종권님 인사말 04:39 지방소멸 대응기금으로 진행되는 난개발 04:54 이주민 주거단지, 꽃밭 조성 - 원주민은 어떻게 06:28 마을 주민과 전혀 협의 없이 사업을 진행한 함양군 06:53 이대로 당할 수 없습니다. 힘을 모아주세요 하지축제 07:19 시 낭독 07:50 하지 다례 올리기 07:58 고유문 낭독 08:09 비나리 공연 08:35 최상우 할머니의 육자배기 09:02 쾌지나칭칭 나네 09:51 노래 공연 10:38 마무리
    • 지리산사람들
    • 지리산사람들 활동이야기
    2024-06-22
  • [6월 20일 궁금해 지리산 –함양편] 참고자료
    6월 20일, [궁금해 지리산-함양편]을 이끄는 류정자 선생님이 보내준 글입니다. 읽고 오면 선생님의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옛산행기」 1472년 <김종직>선생의 [유두류록] 가객 | 2004.05.28 15:34 5910 ◆요점정리 산행일자 : 1472년(성종3년) 8월14일~18일 산행코스 : 함양관아→엄천→화암→지장사→선열암→신열암→고열암(1박) 청이당→영랑재→해유령→중봉→천왕봉→성모사(2박) 성모사→통천문→향적사(3박) 향적사→통천문→천왕봉→제석봉→세석→창불대-영신사(4박) 영신사→영신봉→직지봉→실덕리→등구재→함양관아(산행종료) 출 처 : 민족문화추진회 간 <점필재집> ◆감상과 이해 선생의 <유두류록>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지리산산행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리하여 그들의 수친서가 된 작품이다. 선생은 지리산을 "어머니의 산", "고향의 산"으로 인식하여, 천왕봉에 올라 마음을 펴고자 하였다. 천왕봉 성모석상에 대해서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으로 보는 설을 부정하고, 고역사서 <제왕운기>를 인용하여 고려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로 본다. 유람 도중 현실적 갈등과 모순이 없는 무릉도원을 희구하였으며, 선생은 사림파 지식인과 목민관으로서의 자세를 가지고 산행 도중 만나는 매를 잡는 사람들의 응막을 보고 민생의 어려움을 걱정하였고, 당시의 숭유억불 정책과도 상통하는 승려들의 혹세무민적 행적도 비판을 한다. 한편 천왕봉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며 주위의 명산들을 열거하여 설명하는 지리적인 혜안에서는 선생의 국토산하에 대한 애정과 지식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선생의 단촐한 유람단 구성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여느 지리산 행적과 비교가 되어 존경심까지 불러 일으키며, 선생의 등로는 지금의 의식으로 볼 때에 하나의 개척산행으로 탐구 가치가 있는 지리산 기행록이다. <본문> "아,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하기로 약속하고 이 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 -본문 중 구롱을 지나며- + 출발 나는 영남(嶺南)에서 생장하였으니, 두류산은 바로 내 고향의 산이다. 그러나 남북으로 떠돌며 벼슬하면서 세속 일에 골몰하여 나이 이미 40이 되도록 아직껏 한번도 유람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신묘년(1471, 성종2) 봄에 함양군수(咸陽郡守)가 되어 내려와 보니, 두류산이 바로 그 봉내(封內)에 있어 푸르게 우뚝 솟은 것을 눈만 쳐들면 바라볼 수가 있었으나, 흉년의 민사(民事)와 부서(簿書) 처리에 바빠서 거의 2년이 되도록 또 한번도 유람하지 못했다. 그리고 매양 유극기(兪克己), 임정숙(林貞叔)과 함께 이 일을 이야기하면서 마음 속에 항상 걸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금년 여름에 조태허(曺太虛)가 관동(關東)으로부터 나 있는 데로 와서 《예기(禮記)》를 읽고, 가을에는 장차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이 산에 유람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나 또한 생각건대, 파리해짐이 날로 더함에 따라 다리의 힘도 더욱 쇠해가는 터이니, 금년에 유람하지 못하면 명년을 기약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더구나 때는 중추(仲秋)라서 토우(土雨)가 이미 말끔하게 개었으니, 보름날 밤에 천왕봉(天王峯)에서 달을 완상하고, 닭이 울면 해돋는 모습을 구경하며, 다음날 아침에는 사방을 두루 관람한다면 일거에 여러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가 있으므로, 마침내 유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는 극기를 초청하여 태허와 함께 《수친서(壽親書)》에 이른바 유산구(遊山具)를 상고하여, 그 휴대할 것을 거기에서 약간 증감(增減)하였다. + 화암에서 쉬고 지장사, 환희대까지 그리고 14일에 덕봉사(德峯寺)의 중 해공(解空)이 와서 그에게 향도(鄕導)를 하게 하였고, 또 한백원(韓百源)이 따라가기를 요청하였다. 마침내 그들과 함께 엄천(嚴川)을 지나 화암(花巖)에서 쉬는데, 중 법종(法宗)이 뒤따라오므로, 그 열력한 곳을 물어보니 험준함과 꼬불꼬불한 형세를 자못 자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地藏寺)에 이르니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말[馬]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벌써 경치가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이로부터 1리쯤 가서 환희대(歡喜臺)란 바위가 있는데, 태허와 백원이 그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 아래는 천 길이나 되는데, 금대사(金臺寺), 홍련사(紅蓮寺), 백련사(白蓮寺) 등 여러 사찰을 내려다보았다. + 선열암과 신열암을 보고 고열암에서 자다 선열암(先涅菴)을 찾아가 보니, 암자가 높은 절벽을 등진 채 지어져 있는데, 두 샘이 절벽 밑에 있어 물이 매우 차가웠다. 담장 밖에는 물이 반암(半巖)의 부서진 돌 틈에서 방울져 떨어지는데, 반석(盤石)이 이를 받아서 약간 움푹 패인 곳에 맑게 고여 있었다. 그 틈에는 적양(赤楊)과 용수초(龍須草)가 났는데, 모두 두어 치[寸]쯤이나 되었다. 그 곁에 돌이 많은 비탈길이 있어, 등넝쿨[藤蔓] 한 가닥을 나무에 매어 놓고 그것을 부여잡고 오르내려서 묘정암(妙貞菴)과 지장사(地藏寺)를 왕래하였다. 중 법종이 말하기를, “한 비구승(比丘僧)이 있어 결하(結夏)1)와 우란(盂蘭)2)을 파하고 나서는 구름처럼 자유로이 돌아다녀서 간 곳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그런데 돌 위에는 소과(小瓜) 및 무우[蘿葍]를 심어놓았고, 조그마한 다듬잇방망이와 등겨가루[糠籺] 두어 되쯤이 있을 뿐이었다. 신열암(新涅菴)을 찾아가 보니 중은 없었고, 그 암자 역시 높은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가 있어 다섯 가닥이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척(尺)이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잣나무가 바위 중턱에 나 있는데, 그 바위를 오르려는 자는 나무를 건너질러 타고 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잡고 바위 틈을 돌면서 등과 배가 위아래로 마찰한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을 내놓을 수 없는 사람은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란히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는데, 지금에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毛骨)이 송연하여 정신이 멍해져서 내가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여기서 조금 서쪽으로 가서 고열암(古涅菴)에 다다르니, 날이 이미 땅거미가 졌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다. 극기(克己) 등은 뒤떨어졌고,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중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인하여 이렇게 호칭한 것입니다.” 하였다. 잠시 뒤에 요주승(寮主僧)이 납의(衲衣)를 입고 와서 합장(合掌)하고 말하기를, “들으니 사군(使君)이 와서 노닌다고 하는데, 어디 있는가?” 하니, 해공이 그 요주승에게 말하지 말라고 눈짓을 하자, 요주승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래서 내가 장자(莊子)의 말을 사용하여 위로해서 말하기를, “나는 불을 쬐는 사람이 부뚜막을 서로 다투고, 동숙자(同宿者)들이 좌석을 서로 다투게 하고 싶다.3) 지금 요주승은 한 야옹(野翁)을 보았을 뿐이니, 어찌 내가 사군인 줄을 알았겠는가.” 하니, 해공 등이 모두 웃었다. 이 날에 나는 처음으로 산행(山行)을 시험하여 20리 가까이 걸은 결과, 극도로 피로하여 잠을 푹 자고 한밤중에 깨어서 보니, 달빛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고, 여러 산봉우리에서는 운기(雲氣)가 솟아오르고 있으므로, 나는 마음 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기묘일(15일) 새벽에는 날이 더욱 흐려졌는데, 요주가 말하기를, “빈도(貧道)가 오랫동안 이 산에 거주하면서 구름의 형태로써 점을 쳐본 결과, 오늘은 반드시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 구롱을 지나 청이당에서 쉬고 영랑대까지 그래서 나는 기뻐하며 담부(擔夫)를 감하여 돌려보내고 절에서 나와 곧바로 푸른 등라(藤蘿)가 깊이 우거진 숲속을 가노라니, 저절로 말라 죽은 큰 나무가 좁은 길에 넘어져서 그대로 외나무다리가 되었는데, 그 반쯤 썩은 것은 가지가 아직도 땅을 버티고 있어 마치 행마(行馬)처럼 생겼으므로, 머리를 숙이고 그 밑으로 지나갔다. 그리하여 한 언덕을 지나니, 해공이 말하기를, “이것이 구롱(九隴) 가운데 첫째입니다.” 하였다. 연하여 셋째, 넷째 언덕을 지나서 한 동부(洞府)를 만났는데, 지경이 넓고 조용하고 깊고 그윽하며, 수목(樹木)들이 태양을 가리고 덩굴풀[薜蘿]들이 덮이고 얽힌 가운데 계곡 물이 돌에 부딪혀 굽이굽이에 소리가 들리었다. 그 동쪽은 산등성이인데 그리 험준하지 않았고, 그 서쪽으로는 지세(地勢)가 점점 내려가는데 여기서 20리를 더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일 계견(鷄犬)과 우독(牛犢)을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벼, 삼,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 도원(武陵桃源)에도 그리 손색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지팡이로 계곡의 돌을 두드리면서 극기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아,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隱遁)하기를 약속하고 이 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 하고, 그로 하여금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의 한가운데에 이름을 쓰게 하였다. 구룡을 다 지나서는 문득 산등성이를 타고 가는데, 가는 구름이 나직하게 삿갓을 스치고, 초목들은 비를 맞지 않았는데도 축축이 젖어 있으므로, 그제야 비로소 하늘과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로부터 수리(數里)를 다 못 가서 등성이를 돌아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의 땅이다. 그런데 안개가 잔뜩 끼어서 먼 데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계석(溪石)을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이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극도로 가팔라서, 정히 봉선의기(封禪儀記)에 이른바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 밑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는 것과 같았으므로, 나무 뿌리를 부여잡아야만 비로소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해가 이미 한낮이 지나서야 비로소 영랑재를 올라갔다. 함양(咸陽)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아 보이는데, 여기에 와서 보니, 다시 천왕봉(天王峯)을 쳐다보게 되었다. 영랑은 신라(新羅) 때 화랑(花郞)의 우두머리였는데,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수(山水) 속에 노닐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소년대(少年臺)는 봉우리 곁에 있어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었는데, 이른바 소년이란 혹 영랑의 무리가 아니었는가 싶다. 내가 돌의 모서리를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종자(從者)들에게 절벽 난간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주의를 시켰다. 이때 구름과 안개가 다 사라지고 햇살이 내리비추자, 동서의 계곡들이 모두 환히 트이었으므로, 여기저기를 바라보니, 잡수(雜樹)는 없고 모두가 삼나무[杉], 노송나무[檜], 소나무[松], 녹나무[枏]였는데, 말라 죽어서 뼈만 앙상하게 서 있는 것이 3분의 1이나 되었고, 간간이 단풍나무가 섞이어 마치 그림과 같았다. 그리고 등성이에 있는 나무들은 바람과 안개에 시달리어 가지와 줄기가 모두 왼쪽으로 쏠려 주먹처럼 굽은데다 잎이 거세게 나부끼었다. 중이 말하기를, “여기에는 잣나무[海松]가 더욱 많으므로, 이 고장 사람들이 가을철마다 잣을 채취하여 공액(貢額)에 충당하는데, 금년에는 잣이 달린 나무가 하나도 없으니, 만일 정한 액수대로 다 징수하려 한다면 우리 백성들은 어찌 하겠습니까. 수령(守令)께서 마침 보았으니, 이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서대초(書帶草)와 같은 풀이 있어 부드럽고 질기면서 매끄러워, 이것을 깔고 앉고 눕고 할 만하였는데, 곳곳이 다 그러하였다. 청이당 이하로는 오미자(五味子)나무 숲이 많았는데, 여기에 와서는 오미자나무가 없고, 다만 독활(獨活), 당귀(當歸)만이 있을 뿐이었다. + 혜유령(하봉), 중봉을 지나 천왕봉까지 해유령(蟹踰嶺)을 지나면서 보니 곁에 선암(船巖)이 있었는데, 법종(法宗)이 말하기를, “상고 시대에 바닷물이 산릉(山陵)을 넘쳐 흐를 때 이 바위에 배[船]를 매어두었는데, 방해(螃蟹)가 여기를 지나갔으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때의 생물(生物)들은 모두 하늘을 부여잡고 살았단 말인가.” 하였다. 또 등성이의 곁을 따라 남쪽으로 중봉(中峯)을 올라가 보니, 산중에 모든 융기하여 봉우리가 된 것들은 전부가 돌로 되었는데, 유독 이 봉우리만이 위에 흙을 이고서 단중(端重)하게 자리하고 있으므로, 발걸음을 자유로이 뗄 수가 있었다. 여기에서 약간 내려와 마암(馬巖)에서 쉬는데, 샘물이 맑고 차서 마실 만하였다. 가문 때를 만났을 경우, 사람을 시켜 이 바위에 올라가서 마구 뛰며 배회하게 하면 반드시 뇌우(雷雨)를 얻게 되는데, 내가 지난해와 금년 여름에 사람을 보내서 시험해 본 결과, 자못 효험이 있었다. + 천왕봉에서 신시(申時)에야 천왕봉을 올라가 보니, 구름과 안개가 성하게 일어나 산천이 모두 어두워져서 중봉(中峯) 또한 보이지 않았다. 해공과 법종이 먼저 성모묘(聖母廟)에 들어가서 소불(小佛)을 손에 들고 개게[晴] 해달라고 외치며 희롱하였다. 나는 처음에 이를 장난으로 여겼는데, 물어보니 말하기를, “세속에서 이렇게 하면 날이 갠다고 합니다.” 하였다. 그래서 나는 손발을 씻고 관대(冠帶)를 정제한 다음 석등(石磴)을 잡고 올라가 사당에 들어가서 주과(酒果)를 올리고 성모(聖母)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저는 일찍이 선니(宣尼)가 태산(泰山)에 올라 구경했던 일4)과 한자(韓子)가 형산(衡山)에 유람했던 뜻5)을 사모해 왔으나, 직사(職事)에 얽매여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중추(仲秋)에 남쪽 지경에 농사를 살피다가, 높은 봉우리를 쳐다보니 그 정성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사(進士) 한인효(韓仁孝), 유호인(兪好仁), 조위(曺偉) 등과 함께 운제(雲梯)를 타고 올라가 사당의 밑에 당도했는데, 비, 구름의 귀신이 빌미가 되어 운물(雲物)이 뭉게뭉게 일어나므로, 황급하고 답답한 나머지 좋은 때를 헛되이 저버리게 될까 염려하여, 삼가 성모께 비나니, 이 술잔을 흠향하시고 신통한 공효로써 보답하여 주소서.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하늘이 말끔해져서 달빛이 낮과 같이 밝고, 명일 아침에는 만리 경내가 환히 트이어 산해(山海)가 절로 구분되게 해 주신다면 저희들은 장관(壯觀)을 이루게 되리니, 감히 그 큰 은혜를 잊겠습니까.” 제사를 마치고는 함께 신위(神位) 앞에 앉아서 술을 두어 잔씩 나누고 파하였다. 그 사옥(祠屋)은 다만 3칸으로 되었는데, 엄천리(嚴川里) 사람이 고쳐 지은 것으로, 이 또한 판자 지붕에다 못을 박아놓아서 매우 튼튼하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바람에 날릴 수밖에 없었다. 두 중이 그 벽(壁)에 그림을 그려 놓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성모(聖母)의 옛 석상(石像)이란 것이었다. 그런데 미목(眉目)과 쪽머리[髻鬟]에는 모두 분대(粉黛)를 발라놓았고 목에는 결획(缺劃)이 있으므로 그 사실을 물어보니 말하기를, “태조(太祖)가 인월역(引月驛)에서 왜구(倭寇)와 싸워 승첩을 거두었던 해에 왜구가 이 봉우리에 올라와 그 곳을 찍고 갔으므로, 후인이 풀을 발라서 다시 붙여놓은 것입니다.” 하였다. 그 동편으로 움푹 들어간 석루(石壘)에는 해공 등이 희롱하던 소불(小佛)이 있는데, 이를 국사(國師)라 호칭하며, 세속에서는 성모의 음부(淫夫)라고 전해오고 있었다. 그래서 또 묻기를, “성모는 세속에서 무슨 신(神)이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석가(釋迦)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입니다.” 하였다. 아, 이런 일이 있다니. 서축(西竺)과 우리 동방은 천백(千百)의 세계(世界)로 막혀 있는데, 가유국(迦維國)의 부인이 어떻게 이 땅의 귀신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읽어보니, ‘성모가 선사를 명했다[聖母命詵師]’는 주석에 이르기를, “지금 지리산의 천왕(天王)이니, 바로 고려 태조(高麗太祖)의 비(妣)인 위숙왕후(威肅王后)를 가리킨다.” 하였다. 이는 곧 고려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에 관한 말을 익히 듣고서 자기 임금의 계통을 신격화시키기 위하여 이런 말을 만들어낸 것인데, 이승휴는 그 말을 믿고 《제왕운기》에 기록해 놓았으니, 이 또한 고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더구나 승려들의 세상을 현혹시키는 황당무계한 말임에랴. 또 이미 마야부인이라 하고서 국사(國師)로써 더럽혔으니, 그 설만(褻慢)하고 불경(不敬)스럽기가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이것을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날이 또 어두워지자 음랭한 바람이 매우 거세게 동서쪽에서 마구 불어와, 그 기세가 마치 집을 뽑고 산악을 진동시킬 듯하였고, 안개가 모여들어서 의관(衣冠)이 모두 축축해졌다. 네 사람이 사내(祠內)에서 서로 베개삼아 누웠노라니, 한기(寒氣)가 뼈에 사무치므로 다시 중면(重綿)을 껴입었다. 종자(從者)들은 모두 덜덜 떨며 어쩔 줄을 몰랐으므로, 큰 나무 서너 개를 태워서 불을 쬐게 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달빛이 어슴푸레하게 보이므로, 기뻐서 일어나 보니 이내 검은 구름에 가려져 버렸다. 누(壘)에 기대서 사방을 내려다보니, 천지(天地)와 사방(四方)이 서로 한데 연하여, 마치 큰 바다 가운데서 하나의 작은 배를 타고 올라갔다 기울었다 하면서 곧 파도 속으로 빠져들어갈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세 사람에게 웃으며 이르기를, “비록 한퇴지(韓退之)의 정성과 기미(幾微)를 미리 살펴 아는 도술(道術)은 없을지라도 다행히 군(君)들과 함께 기모(氣母 우주의 원기를 이름)를 타고 혼돈(混沌)의 근원에 떠서 노닐게 되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 통천문과 향적사 경진일(16일)에도 비바람이 아직 거세므로, 먼저 향적사(香積寺)에 종자들을 보내어 밥을 준비해 놓고 지름길을 헤치고 와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정오(正午)가 지나서는 비가 약간 그쳤는데 돌다리가 몹시 미끄러우므로, 사람을 시켜 붙들게 하여 내려왔다. 수 리(數里)쯤 가서는 철쇄로(鐵鎖路)가 있었는데 매우 위험하므로, 문득 석혈(石穴, 현 통천문)을 꿰어 나와서 힘껏 걸어 향적사(香積寺)에 들어갔다. 향적사에는 중이 없은 지가 벌써 2년이나 되었는데, 계곡 물은 아직도 쪼개진 나무에 의지하여 졸졸 흘러서 물통으로 떨어졌다. 창유(窓牖)의 관쇄(關鎖) 및 향반(香槃)의 불유(佛油)가 완연히 모두 있었으므로, 명하여 깨끗이 소제하고 분향(焚香)하게 한 다음 들어가 거처하였다. 저물녘에는 운애(雲靄)가 천왕봉으로부터 거꾸로 불려 내려오는데, 그 빠르기가 일순간도 채 안 되었다. 그리하여 먼 하늘에는 간혹 석양이 반사된 데도 있으므로, 나는 손을 들어 매우 기뻐하면서, 문 앞의 반석(盤石)으로 나가서 바라보니, 살천(薩川)이 길게 연해져 있고, 여러 산(山)과 해도(海島)는 혹은 완전히 드러나고 혹은 반쯤만 드러나기도 하며 혹은 꼭대기만 드러나기도 하여, 마치 장막(帳幕) 안에 있는 사람의 상투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절정(絶頂)을 쳐다보니, 겹겹의 봉우리가 둘러싸여서 어제 어느 길로 내려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당 곁에 서 있는 흰 깃발은 남쪽을 가리키며 펄럭이고 있었는데, 대체로 회화승(繪畵僧)이 나에게 그 곳을 알 수 있도록 알려준 것이다. 여기에서 남북의 두 바위를 마음껏 구경하고, 또 달이 뜨기를 기다렸는데, 이 때는 동방(東方)이 완전히 맑지 못하였다. 다시 추위를 견딜 수가 없어 등걸불을 태워서 집을 훈훈하게 한 다음에야 잠자리에 들어갔다. 한밤중에는 별빛과 달빛이 모두 환하였다. 신사일 (17일) 새벽에는 태양이 양곡(暘谷)에서 올라오는데, 노을빛 같은 채색이 반짝반짝 빛났다. 좌우에서는 모두 내가 몹시 피곤하여 반드시 재차 천왕봉을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나는 생각건대, 수일 동안 짙게 흐리던 날이 갑자기 개었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대단히 도와준 것인데, 지금 지척에 있으면서 힘써 다시 올라보지 못하고 만다면 평생 동안 가슴 속에 쌓아온 것을 끝내 씻어내지 못하고 말 것이라고 여겨졌다. + 재차 천왕봉에 올라 그래서 마침내 새벽밥을 재촉하여 먹고는 아랫도리를 걷어올리고 지레 석문(石門)을 통하여 올라가는데, 신에 밟힌 초목들은 모두 고드름이 붙어 있었다. 성모묘에 들어가서 다시 술잔을 올리고 사례하기를, “오늘은 천지가 맑게 개고 산천이 환하게 트였으니, 이는 실로 신의 도움을 힘입은 것이라, 참으로 깊이 기뻐하며 감사드립니다.” 하고, 이에 극기, 해공과 함께 북루(北壘)를 올라가니, 태허는 벌써 판옥(板屋)에 올라가 있었다. 아무리 높이 날으는 홍곡(鴻鵠)일지라도 우리보다 더 높이는 날 수 없었다. 이 때 날이 막 개서 사방에는 구름 한 점도 없고, 다만 대단히 아득하여 끝을 볼 수가 없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대체로 먼 데를 구경하면서 그 요령을 얻지 못하면 나무꾼의 소견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니 어찌 먼저 북쪽을 바라본 다음, 동쪽, 남쪽, 서쪽을 차례로 바라보고 또 가까운 데로부터 시작하여 먼 데에 이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니, 해공이 그 방도를 썩 잘 지시해 주었다. 이 산은 북으로부터 달려서 남원(南原)에 이르러 으뜸으로 일어난 것이 반야봉(般若峯)이 되었는데, 동쪽에서는 거의 이백 리를 뻗어와서 이 봉우리에 이르러 다시 우뚝하게 솟아서 북쪽으로 서리어 다하였다. 그 사면(四面)의 빼어남을 다투고 흐름을 겨루는 자잘한 봉우리와 계곡들에 대해서는 아무리 계산(計算)에 능한 사람일지라도 그 숫자를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보건대, 그 성첩(城堞)을 마치 죽 끌어서 둘러놓은 것처럼 생긴 것은 함양(咸陽)의 성(城)일 것이고, 청황색이 혼란하게 섞인 가운데 마치 흰 무지개가 가로로 관통한 것처럼 생긴 것은 진주(晉州)의 강물일 것이고, 푸른 산봉우리들이 한점 한점 얽히어 사방으로 가로질러서 곧게 선 것들은 남해(南海)와 거제(巨濟)의 군도(群島)일 것이다. 그리고 산음(山陰), 단계(丹谿), 운봉(雲峯), 구례(求禮), 하동(河東) 등의 현(縣)들은 모두 겹겹의 산골짜기에 숨어 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북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바로 황석(黃石)(안음(安陰)에 있다)과 취암(鷲巖)(함양(咸陽)에 있다)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덕유(德裕)(함음(咸陰)에 있다), 계룡(鷄龍)(공주(公州)에 있다), 주우(走牛)(금산(錦山)에 있다), 수도(修道)(지례(知禮)에 있다), 가야(伽耶)(성주(星州)에 있다))이다. 또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황산(皇山)(산음(山陰)에 있다))과 감악(紺嶽)(삼가(三嘉)에 있다)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팔공(八公)(대구(大丘)에 있다), 청량(淸凉)(안동(安東)에 있다)이다. 동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도굴(闍崛)(의령(宜寧)에 있다)과 집현(集賢)(진주(晉州)에 있다)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비슬(毗瑟)(현풍(玄風)에 있다), 운문(雲門)(청도(淸道)에 있다), 원적(圓寂)(양산(梁山)에 있다)이다.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은 와룡(臥龍)(사천(泗川)에 있다)이고, 남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병요(甁要)(하동(河東)에 있다)와 백운(白雲)(광양(光陽)에 있다)이고,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멀리 있는 것은 팔전(八顚)(흥양(興陽)에 있다)이다. 서쪽에 있는 산으로 멀리 있는 것은 황산(荒山)(운봉(雲峯)에 있다)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무등(無等)(광주(光州)에 있다), 변산(邊山)(부안(扶安)에 있다), 금성(錦城)(나주(羅州)에 있다), 위봉(威鳳)(고산(高山)에 있다), 모악(母岳)(전주(全州)에 있다), 월출(月出)(영암(靈巖)에 있다)이고, 서북쪽에 멀리 있는 산은 성수(聖壽)(장수(長水)에 있다)이다. 이상의 산들이 혹은 조그마한 언덕 같기도 하고, 혹은 용호(龍虎) 같기도 하며, 혹은 음식 접시들을 늘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칼끝 같기도 한데, 그 중에 유독 동쪽의 팔공산과 서쪽의 무등산만이 여러 산들보다 약간 높게 보인다. 그리고 계립령(鷄立嶺) 이북으로는 푸른 산 기운이 창공에 널리 퍼져 있고, 대마도(對馬島) 이남으로는 신기루(蜃氣樓)가 하늘에 닿아 있어, 안계(眼界)가 이미 다하여 더 이상은 분명하게 볼 수가 없었다. 극기로 하여금 알 만한 것을 기록하게 한 것이 이상과 같다. 마침내 서로 돌아보고 자축하여 말하기를, “예로부터 이 봉우리를 오른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어찌 오늘날 우리들만큼 유쾌한 구경이야 했겠는가.” 하고는, 누(壘)를 내려와 돌에 걸터앉아서 술 두어 잔을 마시고 나니, 해가 이미 정오(亭午)였다. 여기에서 영신사(靈神寺), 좌고대(坐高臺)를 바라보니, 아직도 멀리 보였다. 속히 석문(石門)을 꿰어 내려와 중산(中山 현 제석봉)을 올라가 보니 이 또한 토봉(土峯)이었다. 군인(郡人)들이 엄천(嚴川)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은 북쪽에 있는 제이봉(第二峯 현 중봉)을 중산이라 하는데, 마천(馬川)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은 증봉(甑峯 현 시루봉)을 제일봉으로 삼고 이 봉우리를 제이봉으로 삼기 때문에 그들 또한 이것을 중산이라 일컫는다. 여기서부터는 모두 산등성이를 따라서 가는데, 그 중간에 기이한 봉우리가 10여 개나 있어 모두 올라서 사방 경치를 바라볼 만하기는 상봉(上峯)과 서로 비슷했으나 아무런 명칭이 없었다. 그러자 극기가 말하기를, “선생께서 이름을 지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고증할 수 없는 일은 믿어주지 않음에야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이 곳 숲에는 마가목(馬價木)이 많은데, 지팡이를 만들 만하므로, 종자(從者)를 시켜 매끄럽고 곧은 것을 골라서 취하게 하였더니, 잠깐 사이에 한 다발을 취하였다. + 시루봉과 세석을 지나며 증봉(甑峯 현 시루봉)을 거쳐 진펄의 평원에(세석고원) 다다르니, 좁은 길에 서 있는 단풍나무가 마치 문설주와 문지방의 형상으로 굽어 있었으므로, 그 곳으로 나가는 사람은 모두 등을 구부리지 않고 갈 수 있었다. 이 평원은 산의 등성이에 있는데, 5, 6리쯤 넓게 탁 트인 데에 숲이 무성하고 샘물이 돌아 흐르므로, 사람이 농사지어 먹고 살 만하였다. 시냇가에는 두어 칸 되는 초막[草廠]이 있는데, 빙 둘러 섶으로 울짱을 쳤고 온돌[土坑]도 놓아져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내상군(內廂軍)이 매[鷹]를 포획하는 막사였다. 내가 영랑재(永郞岾)로부터 이 곳에 이르는 동안, 강만(岡巒)의 곳곳에 매 포획하는 도구 설치해 놓은 것을 본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다. 아직은 가을 기운이 그리 높지 않아서 현재 매를 포획하는 사람은 없었다. 매의 무리는 운한(雲漢) 사이를 날아가는 동물이니, 그것이 어떻게 이 준절(峻絶)한 곳에 큼직한 덫을 설치해 놓고 엿보는 자가 있는 줄을 알겠는가. 그래서 미끼를 보고 그것을 탐하다가 갑자기 그물에 걸려 잡혀서 노끈에 매이게 되는 것이니, 이것으로 또한 사람을 경계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라에 진헌(進獻)하는 것은 고작 1, 2련(連)에 불과한데, 희완(戱玩)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가난한 백성들로 하여금 밤낮으로 눈보라를 견뎌가면서 천 길 산봉우리의 꼭대기에 엎드려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인심(仁心)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다.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하도 높아서 그 아래로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躑躅] 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두원곶(荳原串), 여수곶(麗水串)·섬진강(蟾津江)의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관(奇觀)이었다. 해공이 여러 구렁[壑]이 모인 곳을 가리키면서 신흥사동(新興寺洞)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절도사(節度使) 이극균(李克均)이 호남(湖南)의 도적 장영기(張永己)와 여기에서 싸웠는데, 영기는 구서(狗鼠) 같은 자라서 험준한 곳을 이용했기 때문에 이공(李公) 같은 지용(智勇)으로도 그가 달아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끝내 장흥 부사(長興府使)에게로 공(功)이 돌아갔으니,6) 탄식할 일이다. 해공이 또 악양현(岳陽縣)의 북쪽을 가리키면서 청학사동(靑鶴寺洞)이라고 하였다. 아, 이것이 옛날에 이른바 신선(神仙)이 산다는 곳인가 보다. 인간의 세계와 그리 서로 멀지도 않은데, 이미수(李眉叟)는 어찌하여 이 곳을 찾다가 못 찾았던가?7) 그렇다면 호사자(好事者)가 그 이름을 사모하여 절을 짓고서 그 이름을 기록한 것인가. 해공이 또 그 동쪽을 가리키면서 쌍계사동(雙溪寺洞)이라고 하였다. 최고운(崔孤雲)이 일찍이 이 곳에서 노닐었으므로 각석(刻石)이 남아 있다. 고운은 세속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기개(氣槪)를 지닌데다 난세(亂世)를 만났으므로, 중국(中國)에서 불우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동토(東土)에서도 용납되지 않아서, 마침내 정의롭게 속세 밖에 은둔함으로써 깊고 그윽한 계산(溪山)의 지경은 모두 그가 유력(遊歷)한 곳이었으니, 세상에서 그를 신선이라 칭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겠다. + 영신대에서 영신사(靈神寺)에서 자는데 여기는 중이 한 사람뿐이었고, 절의 북쪽 비탈에는 석가섭(石迦葉) 일구(一軀)가 있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 때에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香)을 내렸다. 그 석가섭의 목[項]에도 이지러진 곳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倭寇)가 찍은 자국이라고 했다. 아, 왜인은 참으로 구적(寇賊)이로다. 산 사람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는데, 성모와 가섭의 머리까지 또 단참(斷斬)의 화를 입었으니, 어찌 비록 아무런 감각이 없는 돌일지라도 인형(人形)을 닮은 때문에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오른쪽 팔뚝에는 마치 불에 탄 듯한 흉터가 있는데, 이 또한 “겁화(劫火)에 불탄 것인데 조금만 더 타면 미륵(彌勒)의 세대가 된다.”고 한다.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황괴(荒怪)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내세(來世)의 이익(利益)을 추구하는 자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어 전포(錢布)를 보시(布施)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坐高臺)라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방석(方石)이 얹혀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尺] 정도였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8)를 얻는다고 한다. 이 때 종자(從者)인 옥곤(玉崑)과 염정(廉丁)은 능란히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이 무리들은 매우 어리석어서 거의 숙맥(菽麥)도 구분하지 못하는데도 능히 스스로 이와 같이 목숨을 내거니, 부도(浮屠)가 백성을 잘 속일 수 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겠다. 법당(法堂)에는 몽산화상(蒙山和尙)의 그림 족자가 있는데, 그 위에 쓴 찬(贊)에, 두타 제일이 頭陀第一 이것이 바로 두수인데 是爲 抖擻 밖으론 이미 속세를 멀리하였고 外已遠塵 안으론 이미 마음의 때를 벗었네 內已離垢 앞서 도를 깨치었고 得道居先 뒤에는 적멸에 들었으니 入滅於後 설의와 계산이 雪衣鷄山 천추에 썩지 않고 전하리라 千秋不朽 하였고, 그 곁의 인장(印章)은 청지(淸之)라는 소전(小篆)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비해당(匪懈堂)의 삼절(三絶)9)이었다. 그 동쪽 섬돌 아래에는 영계(靈溪)가 있고, 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玉泉)이 있는데, 물맛이 매우 좋아서 이것으로 차를 달인다면 중령(中泠), 혜산(惠山)10)도 아마 이보다 낫지는 못할 듯하였다. 샘의 서쪽에는 무너진 절이 우뚝하게 서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옛 영신사이다. 그 서북쪽으로 높은 봉우리에는 조그마한 탑(塔)이 있는데, 그 돌의 결이 아주 섬세하고 매끄러웠다. 이 또한 왜구에 의해 넘어졌던 것을 뒤에 다시 쌓고 그 중심에 철(鐵)을 꿰어놓았는데, 두어 층[數層]은 유실되었다. + 직지를 거쳐 실덕리로 하산. 그리고 등구재를 넘어 관아로 돌아옴 임오일(18일)에는 일찍 일어나서 문을 열고 보니, 섬진강(蟾津江)에 조수(潮水)가 창일하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바로 남기(嵐氣)가 편평하게 펼쳐 있는 것이었다. 밥을 먹고 나서는 절의 서북쪽을 따라 내려와 고개 위에서 쉬면서 반야봉을 바라보니, 대략 60여 리쯤 되었다. 이제는 두 발이 다 부르트고 근력이 이미 다하여, 아무리 가서 구경하고 싶어도 강행(强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름길로 직지봉(直旨峯)을 경유하여 내려오는데, 길이 갈수록 가팔라지므로, 나무 뿌리를 부여잡고 돌 모서리를 디디며 가는데 수십 리의 길이 모두 이와 같았다. 여기서 동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우러러보니, 천왕봉이 바로 지척에 있는 것 같았다. 여기에는 대나무 끝에 간혹 열매가 있었는데 모두 사람들이 채취하여 갔다. 소나무가 큰 것은 백 아름[百圍]도 될 만한데, 깊은 골짜기에 즐비하게 서 있었으니, 이것은 모두 평소에 보지 못한 것들이다. 이미 높은 기슭을 내려와서 보니, 두 구렁의 물이 합한 곳에 그 물소리가 대단히 뿜어 나와서 임록(林麓)을 진동시키고, 백 척(百尺)이나 깊은 맑은 못에는 고기들이 자유로이 헤엄쳐 놀았다. 우리 네 사람은 여기서 손에 물을 움켜 양치질을 하고 나서 비탈길을 따라 지팡이를 끌고 가니, 매우 즐거웠다. 골짜기 어귀에는 야묘(野廟)가 있었는데, 복부(僕夫)가 말[馬]을 데리고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옷을 갈아입고 말에 올라 실택리(實宅里 현 실덕부락)에 당도하니, 부로(父老) 두어 사람이 길 아래서 맞이하여 절하면서 말하기를, “사군(使君)께서 산을 유람하시는 동안 아무 탈도 없었으니, 감히 하례 드립니다.” 하므로, 나는 비로소 백성들이 내가 유람하느라 일을 폐했다 하여 나를 허물하지 않은 것을 보고 마음이 기뻤다. 해공은 군자사(君子寺)로 가고, 법종은 묘정사(妙貞寺)로 가고, 태허, 극기, 백원은 용유담(龍游潭)으로 놀러 가고, 나는 등귀재(登龜岾 현 오도재)를 넘어서 곧장 군재(郡齋)로 돌아왔는데, 나가 노닌 지 겨우 5일 만에 가슴 속과 용모가 확 트이고 조용해짐을 갑자기 깨닫게 되어, 비록 처자(妻子)나 이서(吏胥)들이 나를 볼 적에도 역시 전일과 다르게 보일 것 같았다. 아, 두류산처럼 높고 웅장하고 뛰어난 산이 중원(中原)의 땅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숭산(嵩山), 태산(泰山)보다 앞서 천자(天子)가 올라가 금니(金泥)를 입힌 옥첩 옥검(玉牒玉檢)11)을 봉(封)하여 상제(上帝)에게 승중(升中)12)하였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의당 무이산(武夷山), 형악(衡嶽)에 비유되어서, 저 박아(博雅)하기로는 한창려(韓昌黎), 주회암(朱晦庵), 채서산(蔡西山) 같은 이나, 수련(修煉)을 한 이로는 손흥공(孫興公), 여동빈(呂洞賓), 백옥섬(白玉蟾)13) 같은 이들이 서로 연달아 이 산 속에서 배회하며 서식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유독 군적(軍籍)을 도피하여 부처[佛]를 배운다는 용렬한 사내나 도망간 천인들의 소굴이 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 무리가 비록 한 차례나마 등람(登覽)하여 겨우 평소의 소원에 보답하기는 했으나, 세속의 직무에 급급하여 감히 청학동을 찾고 오대(五臺)를 유람하여 그윽하고 기괴함을 두루 탐토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어찌 이 산의 불우함이겠는가. 자미(子美)의 방장삼한(方丈三韓)의 시구14)를 길이 읊조리니, 나도 모르게 정신이 날아오른다. 임진년 중추(仲秋) 5일 후에 쓰노라. [註 01] 불교(佛敎)에서 인도(印度)의 우기(雨期)에 해당하는 음력 4월 15일부터 90일 동안 승려가 한 곳에 조용히 있으면서 불도(佛道)를 닦는 것을 말한다. [註 02] 불제자(佛弟子)가 음력 7월 보름날에 선조(先祖) 및 현세(現世) 부모(父母)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음식을 그릇에 담아 시방(十方)의 불승(佛僧)들에게 베푸는 불사(佛事)를 말한다. [註 03] 춘추 시대에 양자거(陽子居)라는 사람이 노자(老子)로부터 “거만해서는 안 되고 항상 남의 눈에 부족한 것처럼 보이는 훌륭한 덕을 지녀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거만한 태도를 고친 결과, 처음에는 그가 여관에서 묵을 적에 동숙자들이 좌석을 피해 달아나고, 불쬐는 자들이 부뚜막을 피해 달아났었는데, 그가 태도를 바꾼 뒤에는 동숙자들이 그에게 아무 어려움 없이 서로 좌석을 다툴 정도로 친숙해졌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莊子 寓言》 [註 04] 선니는 공자(孔子)를 이른 말인데, 공자가 일찍이 동산(東山)에 올라서는 노(魯)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泰山)에 올라서는 천하(天下)를 작게 여겼다는 데서 온 말이다.《孟子 盡心上》 [註 05] 한자는 한유(韓愈)를 이른 말인데, 그가 일찍이 형산(衡山)에 올라 형악묘(衡嶽廟)에 배알하고 지은 시에 “내가 온 것이 정히 가을비의 절기를 만났는지라, 흐린 기운 깜깜하고 맑은 바람 불지 않아서, 묵묵히 기도하매 마치 응험이 있는 듯하니 어찌 정직함이 신명을 감동시킨 게 아니리오. 잠깐 뒤에 흐린 기운 걷히어 뭇 봉우리 나오자, 푸른 하늘 떠받치는 우뚝한 봉우릴 쳐다보노라.” 한 데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三》 [註 06]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의하면, 장영기(張永奇)란 도적이 전라도에서 일어나 그 무리들이 날로 퍼져가고 있으므로, 조정에서 허종(許琮)을 절도사(節度使)로 삼아 그를 체포하게 하자, 도적들은 바다 가운데 섬으로 도망쳐 있으면서 틈을 타서 가끔 노략질을 하였는데, 그들이 뒤에 장흥(長興)으로 들어갔다는 정보를 듣고는 허종이 장흥 부사 김순신(金舜臣)에게 격문(檄文)을 보내어 그를 잡도록 하였으나, 그 도적이 오히려 김순신을 쏘아 넘어뜨리고 도망치므로, 허종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서 그 도적을 사로잡아 참수(斬首)했다는 사실이 있으니, 같은 사건인 듯하나 절도사의 이름 등 서로 다른 점이 있어 자세하지 않다. [註 07] 이미수는 바로 고려 때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이인로(李仁老)를 가리킴. 미수는 그의 호이다. 이인로가 일찍이 속세(俗世)를 떠날 뜻이 있어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신선이 산다는 청학동(靑鶴洞)이란 곳을 찾으려고 했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한 바위에다가 시(詩)를 써서 남겼는데, 그 시에 “두류산 먼 곳에 저녁 구름 나지막한데, 일만 구렁 일천 바위가 회계산과 같구나. 지팡이 끌고 와서 청학동을 찾으려는데, 숲 너머서 원숭이 울음 소리만 들리네. 누대는 머나먼 삼신산에 아득하고, 이끼 끼어 네 글자 쓰인 것도 희미하여라. 묻노니 신선이 사는 곳이 그 어디런가. 떨어지는 꽃 흐르는 물이 아득하기만 하네.” 한 데서 온 말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三十》 [註 08] 불교(佛敎)의 용어로서, 즉 수행(修行)하여 온갖 번뇌(煩惱)를 끊고 불생 불멸(不生不滅)의 진리를 깨치는 것을 말한다. [註 09] 비해당은 세종(世宗)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호임. 삼절은 곧 안평대군이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뛰어났으므로 일컬은 말인데, 여기서는 특히 몽산(夢山)의 그림 족자에 대하여 그 그림과 찬(贊)과 글씨가 모두 안평대군의 작품임을 의미한 말이다. [註 10] 중령은 강소성(江蘇省) 진강현(鎭江縣)에 있는 천명(泉名)인데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고, 혜산은 강소성 무석현(無錫縣)에 있는 산명인데 역시 이 곳의 샘물 또한 맛 좋기로 유명하였다. [註 11] 옥첩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 지낼 때의 제문(祭文)을 기록한 서찰(書札)을 말하고, 옥검은 옥(玉)으로 제조한 서함(書函) 위에 제서(題書)한 것을 말한다. [註 12] 하늘에 제사하여 일의 성공(成功)을 고(告)하는 것을 말한다. [註 13] 손흥공은 진(晉) 나라 때의 은사(隱士) 손작(孫綽)을 가리킴. 흥공은 그의 자이다. 여동빈(呂洞賓)은 당(唐) 나라 때의 도사(道士)인데, 세속에서는 그를 팔선(八仙)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컫는다. 백옥섬은 송(宋) 나라 때 무이산(武夷山)에 은거한 도사로서, 그의 본명은 갈장경(葛長庚)이었는데, 뒤에 백씨(白氏)의 양자(養子)가 되면서 이름까지 옥섬(玉蟾)으로 바꾸었다. [註 14] 자미는 두보(杜甫)의 자임. 두보의 봉증태상장경기시(奉贈太常張卿垍詩)에 “방장산은 삼한의 밖에 있고 곤륜산은 만국의 서쪽에 있도다.[方丈三韓外 崑崙萬國西]” 한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 방장산이란 곧 조선의 지리산(智異山)에 해당하므로 이른 말이다.《杜少陵集》
    • 지리산 오늘
    • 다시지리산
    2024-06-18
  • 현윤애 작가와의 대화 (구례, 제주도의 다른 풍경, 비슷한 삶을 그리다)
    구례와 제주도에서 만난 사람과 자연을 그리는 현윤애 작가와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구례 화양마을 '갤러리 척'에서는 현윤애 작가의 여행 그림 노트 '다정히 엿보다' 전시회가 다음과 같이 열립니다. 2024.6.14 ~ 6.27 / 10:00~18:00 주최/주관 갤러리 척 전시기획 로컬리티 00:00 인트로 01:41 작가소개 - 구례 생활 11년차 '갤러리 척'운영 - 갤러리 척 12번째 전시회 03:15 전시회의 주제 '길' - 제주도 올레길, 구례의 길에서 걸으며 만난 사람과 자연 04:18 작품 이야기 - 구례에서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 - 생활 주변이 그릴 것 천지 05:58 갤러리를 열면서 꿈꾸었던 것 - 오늘 같은 자리를 희망 - 주변 사람들이 그림을 가깝게 느끼게 해주는 자리 06:41 구례를 그리다 - 그릴 소재가 많은 구례 - 구례 오일장 이야기 - 구례의 가게들, 가야식당 이야기 18:51 구례와 제주도를 그림으로 담다 - 2024년 1월에 제주에서 올레길 그림 전시회 개최 - 다정히 엿보다 다른 길, 닮은 삶 - 제주의 길과 구례의 길은 어떻게 닮았고 다른지 23:07 왜 올레길인가 - 1년에 걸쳐 제주 올레길 완주 27:30 작품 소개 - 올레길 - 가장 추천하고 싶은 올레길 코스 31:31 작품 소개 - 구례의 길 - 구례의 아름다운 골목길, 돌담길 - 추천하고 싶은 구례의 길 35:20 작품소개 -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 - 최순호 선생님 이야기 - 수고로움을 자처한 0.03mm 점묘화 40:43 작품 활동을 계속 하는 동력 43:17 다정히 엿보다 44:10 책 소개 - 저 너머엔 다른 꽃이 필까 49:12 버킷리스트 - 우쿨렐레 배우기 - 전 국민이 악기 하나씩 다룰 수 있는 복지국가 - 노회찬 53:30 소통의 공간 우리 마을 갤러리 56:07 작품 가격은 어떻게 정해지나요 + 마무리
    • 우리마을
    • 구례
    2024-06-15
  • 수달아빠를 만나다
    수달 사진과 영상을 찍은지 10년. 수달아빠 최상두님을 만났습니다. 00:00 인트로 00:26 수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 01:36 꿈에 수달이 나오면 강 무슨 일이 생긴다 02:40 수달을 만나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03:14 수달이 로드킬을 많이 당하는 시기 04:16 수달은 집단생활? 개인생활? 04:50 생식기를 물어뜯는 살벌한 수달의 싸움 05:46 수달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사람들의 개발행위 06:53 수달 개체수 감소 07:31 수달아빠라 불린 사나이 08:08 오염된 하천들 수달아빠의 사진과 영상을 만나시려면 유튜브 채널 ‘수달아빠’ https://www.youtube.com/@otterpapas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otterpapa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otterpapa_jiri/
    • 이야기
    • 지리산자락 사람들
    2024-06-11
  • [6월21일] 온누리에 빛나라, 대광하지축제
    온누리에 빛나라 “대광 하지축제” 하지는 1년 중 낮이 가장 긴 날입니다. 지리산사람들은 2009년부터 하지에는 함께 모여 하지 감자를 삶아 먹으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하지모임’을 진행했습니다. 코로나19 때는 노고단에 올라 하지다례를 하였고요. 작년(2023년) 하지모임은 <하지축제>라는 이름으로 지리산 골프장 벌목지와 사포제(사포마을)에서 진행했는데, 지리산을 지키고, 사포마을을 사랑하는 구례와 지리산권의 여러 분들이 참여하여 마을 분들에게는 위로와 힘이 되었고, 지리산권은 기자회견, 집회만이 아니라 문화행사에서도 연대하고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올해는 골프장을 포함한 개발사업으로 아파하는 함양 대광마을에서 하지축제를 진행합니다. 이번 하지축제는 대광마을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대광마을을 포함하여 개발사업로 아파하는 전국 여러 마을의 안전과 평화를 기원하고, 연대를 통해 힘과 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일시 : 2024년 6월 21일 (금) 15:00~17:00 장소 : 함양 대광마을 돌탑 앞 (경남 함양군 병곡면 광평리 61-3) 주최 : 함양 대광마을회. 함양난개발대책위원회. 지리산사람들
    • 우리마을
    • 함양
    2024-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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