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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 키즈의 생애 4편 "우리는 무슨 사이"
9월이 왔다. 뜨거운 더위가 살짝 물러섰다. 신입생들의 얼굴엔 고등학생 같은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학에 돌아갔을 때 나경은 수현을 만났다. 나경이 먼저 수현을 찾아왔다. "수현아, 그동안 잘 지냈어 “너 대학생 되더니 엄청 멋있어졌다.” “너 나 찾으러 우리 과에 왔다면서. 친구들에게 들었어" "네. 수현은 짧게 대답했다.”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 선배” “어…. 나. 그냥 잠시 쉬었어.” “몸도 안 좋고....." 나경은 사귀던 남자와 헤어지고 방황했다. 같은 과 운동권 선배였던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나니 다시 그 선배와 다시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다행히 그 선배가 가을에 졸업했다. 나경은 다시 돌아왔다. 나경과 수현은 이후 자주 만났다. 연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경은 술을 마실 때 수현을 불렀다. 수현은 나경이 부르면 모든 일을 제쳐두고 나경을 만나러 갔고, 수현이 만나자고 하면 나경도 그랬다. 우리 무슨 사이죠? 라고 나경에게 수현이 물었을 때 나경은 친한 사이라고 말했다. 수현은 고백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관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경은 수현이 좋았지만, 세살이나 어린 수현에게 먼저 고백할 수는 없었다. 벚나무의 잎들이 갈색으로 물들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단풍이 점점 진하게 물들었다. 교정의 학생들은 따뜻한 햇살을 찾아 잔디밭에 앉아 있었다. 떨어진 낙엽들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풋풋했던 신입생들은 이제 어엿한 대학생처럼 보였다. 학생들이 방학으로 교정은 텅 비었다. 텅 빈 교정엔 눈이 내렸다. 그렇게 가을이 가고 다시 겨울이 왔다. 수현은 겨울 방학 내게 다시 현장에서 일했다. 더운 여름보다 겨울이 수월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일은 더 힘들었다. 컴컴한 새벽에 일어나 현장에 나가면 손발이 꽁꽁 얼었다. 그럴 때면 페인트 깡통에 버려진 나무를 태워 언 발과 손을 녹였다. 연일 영하 10도가 넘나드는 추운 날이 이어졌다. 여름보다 더 힘들었다. 겨울에 수현은 고층 아파트 현장에서 일했다. 현장은 나름대로 체계가 있었다. 수현이 맞은 일은 일명 직영 잡부였다. 여기저기 청소일을 하거나 부족한 일손을 채우는 일이었다. 겨울에 시멘트 양성을 하기 위해 석탄을 가져와 불을 지피는 일도 수현이 해야 할 일이었다. 콘크리트 작업을 한 당일엔 온종일 불을 피워야 했다. 그 날은 야간이나 철야 일도 했다. 그런 날은 기본 일당에 야근 수당에 철야 수당까지 합쳐서 하루 10만 원이 넘었다. 수현을 야간 일이 있을 때마다 지원했다. 학비도 벌어야 하고 생활비도 벌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학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나마 아침 점심 저녁을 먹는 함바집은 밥 맛이 좋았다. 마음껏 먹어도 되었고 함바집 박씨 아주머니를 수현을 아들 같다면 특별하게 달걀부침을 더 챙겨 주기도 했다. ”젊은 학생이 고생하는구먼…. 울 아들은 지금 군대 갔는데…. “강원도는 여기보다 엄청 춥겠지?“ ” 아드님이 강원도에서 있어요. 거긴 여기보다 5~6도는 더 내려갈걸요?“ ”학생은 군대 안 가나.?“”저는 졸업 하고 가려고요. "아이고. 하루라도 젊었을 때 가야 고생을 덜 하는데….” “그러게요. 세상이 저를 놓아주지를 않네요.” “근데 아주머니 아들은 몇 살이에요? “21살…. 인데…. 아, 그럼 저랑 동갑이네요.” “아…. 그려.” 그 후로 아들과 동갑이라며 아주머니는 수현을 볼 때마다 아들 생각이 난다고 했다. “학생 일 적당히 해” 직영 일은 적당히 해도 돼…. 뭐 반장이 맨날 쳐다보는 것 도 아니고… 끝내야 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네. 아주머니 고마워요.” 수현은 아주머니의 아들이 같은 또래라는 것을 알았을 때 혹시 같은 학교를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직영이 하는 일은 매일 매일 바뀌었다. 함께 일하는 분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거나 기술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같은 현장에서 일해도 철근 반이나 조적이나 목수들은 일당이 2~3배는 되었는데 직영일을 하는 사람 일당이 가장 작았다. 아무 기술도 없는 수현 같은 학생들이나 기술 없이 다른 일을 전전 하다가 현장 일을 나온 사람들이 불려 오는 일이었다. 현장에서도 가장 낮은 일자리였다. 그해 겨울 방학 내내 수현은 하루도 쉬지 못했다. 아파트 준공일이 얼마 남지 않아 현장은 쉬는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2월 중순이 넘어가자, 아파트 현장에도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수현의 길고 긴 노동일도 끝이 나고 있었다. 나경은 현장에서 일하던 수현을 찾아왔다. 일이 끝나고 수현과 나경은 밤거리를 걸었다. “수현아, 꼭 이렇게까지 일을 해야 해…” “손이 이게 뭐야….”“꽁꽁 얼고 튼 수현의 손을 잡았다.” "정 힘들면 이 누나에게 이야기해. 내가 좀 도와 줄 수도 있는데…. 수현은 별말 없이 걸었다. “선배처럼 부잣집 사람들은 우리 같은 가난한 빈민 출신들의 마음을 몰라요.” “전 빈민 프롤레타리아 출신이라고요. 가진 것도 없고요.” 둘은 함바집으로 행했다. 아주머니 여기 밥 하나 더 주실 수 있죠? 그래. 누구야? 학생 애인인가? “네” “제 여자 친구예요?” “예쁘죠?” “수현아…. 여자 친구는….” “아이고 수현 학생 여자 친구가 왔으니, 오늘은 달걀부침 네 개는 해줘야겠네” “수현이 같은 착실한 남자를 어찌 알아봤을까?” 나경은 수현이 자신을 여자 친구라고 소개했을 때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둘이 정말 사랑하는 사이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나이도 그렇고 환경도 그렇고 함께 할 수 없을 거라고 나경은 생각했다. “선배 방학 끝나고 봐요!” 나경은 수현과 커피 한잔을 하고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경은 단 한 번도 돈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경에게 돈은 흔하고 편한 것이었다. 자신이 사는 큰 집과 부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수현은 온종일 일을 하고 자신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이런 생각을 잠시 해봤지만, 더 고민하기는 싫었다. 나경과 수현은 역까지 걸었다. 찬바람이 둘 사이를 갈라놓듯이 불었다. 수현은 나경은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나경은 손을 놓지 않았다. 얼어붙은 수현의 손을 자신의 코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깍지를 끼웠다. 둘은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20분쯤 걸었을 때 역이 보였다. 역 앞에는 오래전 역 앞에 사람들이 많았을 때 이용했을 것 같은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봉봉, 박카스 같은 선물 상자들이 먼지가 쌓여 있었다. 나경은 저 안에 물건이 들어있기는 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빈 껍데기겠지…. 나경은 자신이 저 빈 상자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권도 아니고 공부를 하는 학생도 아니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자신이 먼지에 싸여 있는 빈 상자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곧 서울행 기차가 도착하겠습니다" 안내 멘트가 나오는 것을 보고 나경은 서둘러 기차를 타기 위애 달려갔다. 수현이 손짓이 보였다. 잘 있어…. 수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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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참 먹는 시간, 그녀가 만드는 한 끼
반달곰을 사랑하는 1% 가게 유람기입니다. 반달곰1%는 지리산권 가게들(현재는 구례)이 자발적으로 진행하는 공존프로그램으로 반달곰1% 가게에 가면 반달가슴곰을 자연스럽게 만나고, 특별히 계획하지 않아도 반달가슴곰 보호활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2021년 5개 가게로 시작한 반달곰1%는 2024년 현재 10개 가게로 늘어났습니다. ‘유랑인증서’를 통해 반달곰1% 가게에 들러 물품을 먹거나, 마시거나, 구입하여 모아진 1%의 기부금은 올무수거 활동, 무인센서카메라 구입 등 반달곰 보전활동을 위해 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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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루다를 사랑했던 농부, 투쟁가가 되다.
“최초의 탄환이 스페인 기타를 관통하고 거기서 음악 대신 피가 솟구쳐 나오자 내 시는 인간의 절망이 널브러진 길 한가운데서 유령처럼 서성거렸고, 시에서는 무수한 뿌리가 생겨나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그때부터 내 길은 다른 사람들의 길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고독이라는 남쪽에서 민중이라는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내 보잘것없는 시는 민중에게 칼이 되고 손수건이 되어, 무거운 고통으로 흘린 땀을 닦아 주고 빵을 위한 투쟁의 무기가 되기를 열망했다.” 사람들은 어떤 경험을 통해 그동안 생각했던 생각이 바뀌는 때가 있다. 칠레 시인 파블로네루다(1904~1973)의 시적 세계가 바뀐 시점은 스페인 내전이었다. 당시 마드리드 영사로 현장에 있었고, 직접 참여했던 스페인 내전은 네루다의 시를 바꾸어 놓았다. 그의 말처럼 ‘고독이라는 남쪽에서 민중이라는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스페인 내전의 경험은 ‘길거리의 일’ 또한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 - 파블로 네루다 자사전 중에서- 은목서 나무의 달콤한 향기가 깊은 가을 속으로 사라지던 지난 10월 28일 김창승 서시교대책위 상임대표를 만났다. 서시교 존치를 위한 전문가 토론회가 끝난 며칠후였다. [ 10월 28일 김창승 서시교대책위 상임대표를 만났다. (왼쪽 김창승 대표)사진 김인호] 2024년 구례의 여름은 뜨거웠다. 유럽 기상청 코페르니쿠스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4년 여름은 지금까지 측정된 가장 더운 여름이었다. 이는 인류가 측정한 기온 중 가장 높은 해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하지만 구례 서시교의 여름은 이 보다 더 뜨거웠다. 서시교 철거 반대운동이 이 뜨거운 다리 위에서 103일간 이어졌기 때문이다. “2024년 7월 2일부터 2024년 10월 5일까지 103일간입니다. 구례의 대동맥이라고 할 수 있는 서시교를 지키기 위하여 구례 군민들은 매일 그 자리에 서 있었어요. 그리고 저도 그 자리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함께 했습니다.” [서시교 철거 반대 집회는 2024년 7월 2일부터 2024년10월5일까지 103일간 이어졌다. ] 김창승 대표는 2020년 8월 섬진강 수해 때도 주민대표로 활동했다. 그의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서시교 철거 역시 2020년 8월 구례 대홍수로 인한 것입니다. 당시 피해자가 1,914 가구에 달했어요. 국가배상이 확정되는 2년 동안 주민들과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문척교 철거에 관한 투쟁으로 이어졌어요. 아쉽게도 문척교는 철거되었지만 대신 구례와 섬진강을 상징 할만한 문척 달빛교는 올해 12월에 착공 예정입니다.” “구례 대홍수 당시 1,914 가구의 피해액 48%, 500억 정도를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국가에서 자연재해로 국가 손해배상을 한 첫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국가가 물관리 잘못을 인정한 첫 사례가 된 것이죠. 댐 관리를 잘못했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문척교나 서시교 역시 구례 홍수로 인한 것입니다. 서시교 철거는 수해로 인해 발생한 것이니 이것 역시 첫 싸움의 연장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4년간 긴 싸움을 하셨습니다. 10년 전에 귀촌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난 4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지난 4년 동안 제 일상이 사라졌습니다. 처음 구례로 올 때는 자연인처럼 살고자 했던 목적이 사라졌죠. 가끔은 꿈에 서도 투쟁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지난 4년 동안 제 일상이 사라졌습니다. 처음 구례로 올 때는 자연인처럼 살고자 했던 목적이 사라졌죠. 가끔은 꿈에 서도 투쟁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사진 김인호] ■본인을 투쟁가라고 생각하시나요? “투쟁가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정치적인 목적은 없고요. 10년 전 아내의 고향인 구례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구례 사람이 되었어요. 그리고 6년을 평화롭게 생활했습니다. 그리고 섬진강 대홍수가 있었죠. 구례 사람으로 당연히 구례의 어려움을 보고 외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런 죄없이 집과 농지 그리고 삶이 파괴된 피해자들과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과거에도 이런 투쟁을 해본 적이 있나요? 제가 78학번입니다. 당시에 전남대를 다녔습니다. 유신 말기에 대학에 다녔고 3학년 때 5.18 광주항쟁이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광주에 살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함께 연대하고 싸웠습니다. 저 역시 역사의 한 지점에 있었고 함께 투쟁했었습니다. 저에게 5.18은 영원한 아픔이고 잊을 수 없는 역사입니다. “ 인간의 삶은 때로 역사의 한 지점과 정면으로 맞서야 할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역사를 뒤로하고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지만, 어떤 사람은 그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인식하고 민중과 함께하게 된다. ”그 후에 다시 시험을 봐서 경희대에 들어갔어요. 83학번으로요. 그리고 87년 대투쟁의 한가운데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역사는 그를 가만히 내두지 않았던 것 같다. ■구례에 내려오기 전에 무슨 일을 하셨나요? 직장인이었습니다. 주식회사 엘칸토에서 기획실장을 했고 그 이후에는 주식회사 GL인터 대표이사를 했습니다. 무크라는 신발을 만든 회사였습니다. 처음엔 노동운동가로 살아 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회사 생활이 이번 투쟁에도 도움이 되었겠네요? ”그럼요. 대홍수도 그렇고 서시교 싸움도 그렇고 눈으로 보이는 투쟁이 있는 반면 안에서 원인을 분석하는 싸움이 있습니다. 문제의 분석이나 원인을 정리하는 것에 회사 생활의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정부 기관에 대응할 수 있는 도움이 되었죠.“ ”2020년 17개 시군에서 동시에 수해 피해를 당하였습니다. 다른 지역은 변호사나 법무법인을 위임하여 진행했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 배상액의 3%를 수임료로 주는 조건으로 진행하죠. 하지만 구례는 제가 직접 진행했습니다. 구례 배상액이 500억 정도니까 변호사에 주었다면 15억 정도가 수임료로 쓰였을 것입니다. 구례는 직접 변론했기 때문에 그만큼의 돈이 피해입은 분들에게 더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공부 많이 하셨겠네요? 네, 싸움도 힘들었지만, 공부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이번 서시교 철거 문제도 그동안 축적된 경험과 공부가 있었기 때문에 대응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농사도 하시죠? 배추, 양파! 마늘도 심고 벼 농사도 하는데, 논 두 마지기 올해는 벼멸구를 먹어 수확량이 얼마인지 모르겠네요. (웃음) ■고향은 어디인가요? ”고향은 전라남도 무안군입니다. 고등학교는 목포에서 나왔고요. 좀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전남대를 다니다가 휴학을 했고 다시 시험을 봐서 경희대에서 스페인어를 전공했습니다. 당시에는 외국에 나가서 살고 싶었어요.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파블로 네루다입니다. 영화 일 포스티노를 좋아하고요. 제가 지리산에 내려온 곳도 영화에서처럼 네루다에게 편지를 전해주는 우체국 직원처럼 통신원 역할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SNS에 지리산 통신원이라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직접 시를 쓰시고도 하시나요? 네. 시도 쓰고 있고 수필도 쓰고 있습니다. 5.18에 관한 시와 수필 100편 이상을 썼어요. 곧 책으로 낼 생각입니다. ■이번에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는 5.18에 관한 것인데 그 당시 전남대를 다니셨고 함께 투쟁하기도 하셨잖아요? 소년이 온다는 고등학생 문재학을 만난 적도 있으신가요? ”고등학교 1학년 이었던 문재학을 만나보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암울하고 너무 아픈 역사죠. 그 아픔이 문학이 되고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일 자체가 저는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 금남로와 도청 앞에서 함께 싸웠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기억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소설이 많이 사람들에게 읽고 동감하게 된다면 그 시대를 살아왔던 사람들의 삶의 방향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죠. 어쩌면 광주의 자긍심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고요.“ [ 영화 일 포스티노를 좋아하고요. 제가 지리산에 내려온 곳도 영화에서처럼 네루다에게 편지를 전해주는 우체국 직원처럼 통신원 역할을 해보고 싶었어요. 사진 김인호] ■마지막으로 서시교 전망에 관해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저희의 입장은 서시교는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 이유는 2020년 서시교가 수해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어요. 서시천 물이 섬진강으로 가지 못하고 역류했던 것입니다. 서시천이 문제가 아니라 섬진강 역류가 문제죠. 섬진강에 문제가 있는데 서시천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맞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원인을 고려하지 않고 물이 들어온 것만 가지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죠. "서시천은 지류에 불과해요. 1.2km나 떨어진 섬진강 본류에 적용되는 법을 그대로 적용한 것도 문제지만, 당시의 하천기본계획을 적용한 것이 아니라 관계기관이 내부적으로 추진되고 있던 하천기본계획상의 여유고 2m를 소급 적용한 설계안을 주민에게 제시한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2023. 10월 서시교 숭상 및 철거안이 완성되었으나 관련법인 하천기본계획은 2023. 12. 14에 뒤늦게 개정ㆍ고시되었습니다. 국토부익산청은 이 사안에 대하여 영산강유역환경청에서 선행 해결을 해주면 본인들은 서시교에 대한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 하천 기본 계획을 만든 것은 영산강 유역 환경청이기 때문이죠. 구례군은 입장을 정리하여 영산강유역환경청에 보낼 예정입니다. 관련부처 회의를 통해 서시천 구간의 여유고와 계획홍수위에 대해 재심의 하기로 협의되었습니다." ■이번 서시교 철거 반대 투쟁이 남긴 것은 무엇일까요? 서시교는 구례의 대동맥이고 죄가 없어요. 더구나 구례에서 서시교 철거를 찬성하는 주민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구례군민이 모두 반대하는데 군에서 형식적인 주민 설명회를 하고 철거를 하겠다고 한 것이죠. 앞으로 이런 졸속 행정은 없어져야 합니다. 어떤 길이든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내가 한 일은 바로 이러한 선택이었으며,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비극적인 시기에 내린 결정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 파브로 네루다 자서전에서 - 인간은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 할 수밖에 없다. 힘들고 어렵고 때로는 두렵지만 약자를 외면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에 인류의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다. 구례에서 자연인으로 살고 싶던 자신의 일상을 포기하고 4년을 한결같이 구례 군민을 위해 그는 노력했다. 카페 주인도 은목서 향기도 떠나 버린 찻집에서 짧지만, 긴 이야기를 마쳤다. 그는 트럭에 시동을 걸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지난 전문과 토론회 결과를 올려 둔다. [전문가 토론회 결과] 2024.10.25(금) 구례군 의회 주관(마산면 청마관), 서시교 문제해결을 위한 전문가 토론회 결과 1. 구례군, 구례군의회, 권향엽 의원실, 서대위는 서시교 존치에 대해 뜻을 함께하며 법ㆍ행정적 절차를 조속하게 추진한다. 2. 구례군 의회는 서시교 존치를 위한 전문가 자료를 취합하여 구례군과 관계기관에 공문 발송한다. 3. 구례군은 이른 시일 안에 2023.12.14 전라남도가 개정ㆍ고시한 하천기본계획 중 서시천 구간의 여유고와 계획홍수위에 대한 ‘재심의 요구안’을 영산강유역환경청에 발송한다. 4. 영산강유역환경청은 2024.10.15일 협의에 따라 재심의하고 이를 전라남도에 전달한다. 5, 전라남도는 영산강유역청의 재심의 된 사항을 하천기본계획 변경을 위한 심의위원회를 열어 변경 고시한다 6.영산강유역환경청 및 용역처와 전문가 심층 토론회 개최를 요구하며 구례군은 전문가를 위촉하고 당일 토론회 참여한 전문가는 적극 참여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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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운봉고원의 돌장승 역사 문화 탐방
백두대간 운봉고원은 낙동강 상류이다. 운봉고원은 지리산 자락의 고원 분지이다. 이 지역에 돌장승이 밀집하여 분포한다. 운봉읍 북천리, 서천리(서림공원), 권포리와 인월면 유곡리의 10km 이내 지역에 돌장승 10기가 모여 있다. 이곳은 고남산 아래이며 황산의 둘레로서 고려말 황산대첩의 역사적인 장소이다. 돌장승의 해학성은 호랑이와 까치의 민화에 보이는 평민 정신과 상통한다. 운봉고원의 돌장승을 탐방하며 마을 어귀에 서 있는 돌장승이 외롭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샘을 중심으로 살았고 그 샘물이 흘러 마을 앞에 둠벙(연못, 방죽, 웅덩이)를 이루었다. 그 작은 둠벙은 생태계의 보고로서 수많은 작은 동식물이 살았다. 옛날에는 논이 있으면 으례 가까이에 둠벙이 있었다. 그러나 경지 정리로 논밭 두렁길이 반듯해지고 저수지가 많아져서 농업 용수를 멀리서도 풍부히 공급하여 논 가까운 둠벙이 사라져 갔다. 운봉고원의 돌장승도 옛날에는 가까이에 둠벙이 있었을 것이다. 그 둠벙에는 어리연꽃도 피었을 것이다. 돌장승과 어리연꽃은 민화의 호랑이와 까치처럼 상상력과 이야기의 보고일 수 있다. 오마이뉴스 기사 (2024.10.23) 제목: 왕방울 눈, 커다란 코... 도깨비 돌장승 찾아 떠난 여행 부제: [사진] 백성들 아낀다던 석장승... 백두대간 운봉고원 돌장승 탐방 역사 문화 여행 이 기사의 인터넷 주소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07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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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잘 되면 장가 가려고 했는데....
남원에서 무농약 블랙 사파이어 농부입니다. 인상이 참 좋고 착한 농부더라구요. 블랙 사파이어 남원에서 작목반 까지 만들어서 시도 했지만 대부분 포기하고 남은 농가는 이 농장뿐입니다. 그나마 수확이 가능한 농가는 여기 뿐이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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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의 아침
「섬진강 편지」 -노고단의 아침 천왕봉에서 반야봉으로 만복대 너머 덕유가야까지 왕시루봉 내려 섬진강 남해까지 구례읍 너머 백아무등으로 사방팔방 번지는 아침빛 어리석은 이도 머물면 지혜로워진다는 지리산 저 구름과 빛이 그려내는 아침 풍경을 모시러 새벽길 걷는 구도자의 길 허락하는 동안 이 길을 묵묵히 걸으리라 -섬진강 /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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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케이블카반대산청주민대책위원회 2025년 활동기금 모금
- 지리산케이블카반대산청주민대책위원회 후원계좌 농협 351-1285-4584-83 이경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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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오늘
- 지리산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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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케이블카반대산청주민대책위원회 2025년 활동기금 모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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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 키즈의 생애 4편 "우리는 무슨 사이"
- 9월이 왔다. 뜨거운 더위가 살짝 물러섰다. 신입생들의 얼굴엔 고등학생 같은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학에 돌아갔을 때 나경은 수현을 만났다. 나경이 먼저 수현을 찾아왔다. "수현아, 그동안 잘 지냈어 “너 대학생 되더니 엄청 멋있어졌다.” “너 나 찾으러 우리 과에 왔다면서. 친구들에게 들었어" "네. 수현은 짧게 대답했다.”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 선배” “어…. 나. 그냥 잠시 쉬었어.” “몸도 안 좋고....." 나경은 사귀던 남자와 헤어지고 방황했다. 같은 과 운동권 선배였던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나니 다시 그 선배와 다시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다행히 그 선배가 가을에 졸업했다. 나경은 다시 돌아왔다. 나경과 수현은 이후 자주 만났다. 연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경은 술을 마실 때 수현을 불렀다. 수현은 나경이 부르면 모든 일을 제쳐두고 나경을 만나러 갔고, 수현이 만나자고 하면 나경도 그랬다. 우리 무슨 사이죠? 라고 나경에게 수현이 물었을 때 나경은 친한 사이라고 말했다. 수현은 고백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관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경은 수현이 좋았지만, 세살이나 어린 수현에게 먼저 고백할 수는 없었다. 벚나무의 잎들이 갈색으로 물들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단풍이 점점 진하게 물들었다. 교정의 학생들은 따뜻한 햇살을 찾아 잔디밭에 앉아 있었다. 떨어진 낙엽들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풋풋했던 신입생들은 이제 어엿한 대학생처럼 보였다. 학생들이 방학으로 교정은 텅 비었다. 텅 빈 교정엔 눈이 내렸다. 그렇게 가을이 가고 다시 겨울이 왔다. 수현은 겨울 방학 내게 다시 현장에서 일했다. 더운 여름보다 겨울이 수월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일은 더 힘들었다. 컴컴한 새벽에 일어나 현장에 나가면 손발이 꽁꽁 얼었다. 그럴 때면 페인트 깡통에 버려진 나무를 태워 언 발과 손을 녹였다. 연일 영하 10도가 넘나드는 추운 날이 이어졌다. 여름보다 더 힘들었다. 겨울에 수현은 고층 아파트 현장에서 일했다. 현장은 나름대로 체계가 있었다. 수현이 맞은 일은 일명 직영 잡부였다. 여기저기 청소일을 하거나 부족한 일손을 채우는 일이었다. 겨울에 시멘트 양성을 하기 위해 석탄을 가져와 불을 지피는 일도 수현이 해야 할 일이었다. 콘크리트 작업을 한 당일엔 온종일 불을 피워야 했다. 그 날은 야간이나 철야 일도 했다. 그런 날은 기본 일당에 야근 수당에 철야 수당까지 합쳐서 하루 10만 원이 넘었다. 수현을 야간 일이 있을 때마다 지원했다. 학비도 벌어야 하고 생활비도 벌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학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나마 아침 점심 저녁을 먹는 함바집은 밥 맛이 좋았다. 마음껏 먹어도 되었고 함바집 박씨 아주머니를 수현을 아들 같다면 특별하게 달걀부침을 더 챙겨 주기도 했다. ”젊은 학생이 고생하는구먼…. 울 아들은 지금 군대 갔는데…. “강원도는 여기보다 엄청 춥겠지?“ ” 아드님이 강원도에서 있어요. 거긴 여기보다 5~6도는 더 내려갈걸요?“ ”학생은 군대 안 가나.?“”저는 졸업 하고 가려고요. "아이고. 하루라도 젊었을 때 가야 고생을 덜 하는데….” “그러게요. 세상이 저를 놓아주지를 않네요.” “근데 아주머니 아들은 몇 살이에요? “21살…. 인데…. 아, 그럼 저랑 동갑이네요.” “아…. 그려.” 그 후로 아들과 동갑이라며 아주머니는 수현을 볼 때마다 아들 생각이 난다고 했다. “학생 일 적당히 해” 직영 일은 적당히 해도 돼…. 뭐 반장이 맨날 쳐다보는 것 도 아니고… 끝내야 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네. 아주머니 고마워요.” 수현은 아주머니의 아들이 같은 또래라는 것을 알았을 때 혹시 같은 학교를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직영이 하는 일은 매일 매일 바뀌었다. 함께 일하는 분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거나 기술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같은 현장에서 일해도 철근 반이나 조적이나 목수들은 일당이 2~3배는 되었는데 직영일을 하는 사람 일당이 가장 작았다. 아무 기술도 없는 수현 같은 학생들이나 기술 없이 다른 일을 전전 하다가 현장 일을 나온 사람들이 불려 오는 일이었다. 현장에서도 가장 낮은 일자리였다. 그해 겨울 방학 내내 수현은 하루도 쉬지 못했다. 아파트 준공일이 얼마 남지 않아 현장은 쉬는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2월 중순이 넘어가자, 아파트 현장에도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수현의 길고 긴 노동일도 끝이 나고 있었다. 나경은 현장에서 일하던 수현을 찾아왔다. 일이 끝나고 수현과 나경은 밤거리를 걸었다. “수현아, 꼭 이렇게까지 일을 해야 해…” “손이 이게 뭐야….”“꽁꽁 얼고 튼 수현의 손을 잡았다.” "정 힘들면 이 누나에게 이야기해. 내가 좀 도와 줄 수도 있는데…. 수현은 별말 없이 걸었다. “선배처럼 부잣집 사람들은 우리 같은 가난한 빈민 출신들의 마음을 몰라요.” “전 빈민 프롤레타리아 출신이라고요. 가진 것도 없고요.” 둘은 함바집으로 행했다. 아주머니 여기 밥 하나 더 주실 수 있죠? 그래. 누구야? 학생 애인인가? “네” “제 여자 친구예요?” “예쁘죠?” “수현아…. 여자 친구는….” “아이고 수현 학생 여자 친구가 왔으니, 오늘은 달걀부침 네 개는 해줘야겠네” “수현이 같은 착실한 남자를 어찌 알아봤을까?” 나경은 수현이 자신을 여자 친구라고 소개했을 때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둘이 정말 사랑하는 사이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나이도 그렇고 환경도 그렇고 함께 할 수 없을 거라고 나경은 생각했다. “선배 방학 끝나고 봐요!” 나경은 수현과 커피 한잔을 하고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경은 단 한 번도 돈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경에게 돈은 흔하고 편한 것이었다. 자신이 사는 큰 집과 부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수현은 온종일 일을 하고 자신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이런 생각을 잠시 해봤지만, 더 고민하기는 싫었다. 나경과 수현은 역까지 걸었다. 찬바람이 둘 사이를 갈라놓듯이 불었다. 수현은 나경은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나경은 손을 놓지 않았다. 얼어붙은 수현의 손을 자신의 코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깍지를 끼웠다. 둘은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20분쯤 걸었을 때 역이 보였다. 역 앞에는 오래전 역 앞에 사람들이 많았을 때 이용했을 것 같은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봉봉, 박카스 같은 선물 상자들이 먼지가 쌓여 있었다. 나경은 저 안에 물건이 들어있기는 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빈 껍데기겠지…. 나경은 자신이 저 빈 상자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권도 아니고 공부를 하는 학생도 아니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자신이 먼지에 싸여 있는 빈 상자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곧 서울행 기차가 도착하겠습니다" 안내 멘트가 나오는 것을 보고 나경은 서둘러 기차를 타기 위애 달려갔다. 수현이 손짓이 보였다. 잘 있어…. 수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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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 키즈의 생애 4편 "우리는 무슨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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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첫눈 소식
- 「섬진강 편지」 - 지리산 첫 눈 소식 여기저기 눈소식입니다. 지리산에도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첫눈이 왔습니다. 눈은 소통의 메신저입니다. 영문자판에 한글로 '눈'을 쳐보세요. 'SNS'입니다. 소원했던 친구에게 첫눈을 핑계로 전화를 해봐야겠습니다. 눈이 오면 누나가 많이 생깁니다. 설악산 눈 와? 전화를 하면 설악산 누나가 생기고 대둔산 눈 와? 전화를 하면 대둔산 누나가 생깁니다. 새롭게 태어난 하얀 세상, 첫눈 소식을 전합시다. 아침 일찍 노고단에 올라 첫눈을 맞이했습니다. 어렵게 올랐는데 살을 에는 칼바람에 20분을 못 견디고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자연 앞에 겸손하라! 새삼 깨달으면 지리산길 설설 기어 내려온 첫눈 오는 날이었습니다. -섬진강 /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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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요청] 주민의 동의 없는 개발사업을 막아주십시오
- 주민의 동의 없는 개발사업을 막아주십시오 대광 마을을 지켜 주십시요 https://forms.gle/bbnrepi8QxV21B6Q8 누가 여러분의 집을 여러분도 모르게 팔아먹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니 그런 일이 도대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경상남도 함양군은 인구 소멸을 막는답시고, 제가 살고 있는 마을(병곡면 대광마을) 일대를 개발할 계획을 세운 뒤, 주민들 몰래 사업 계획서를 만들어 경상남도에서 시행하는 지방소멸대응기금 공모사업에 응모하여 106억 5천만 원의 기금을 타내게 되었습니다. 함양군은 여기에 군 예산을 더하고 민간 투자를 끌어들여 약 1200억이 소요되는 사업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함양군의 사업 계획에 따르면, 위 대광마을 일대에 주거단지와, 스마트 팜(첨단 농장), 야영장, 지방 정원 따위를 조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외지인을 끌어들여 인구를 늘리고 관광객을 늘리겠다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함양사계4U(포유)' 사업이 바로 그것입니다. 함양군은 주거 단지와 지방정원 따위를 만들기 위하여 마을 주변의 숲을 없애고 논밭을 없애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대광 마을 주민들은 살 수가 없습니다. 숲과 논밭은 주민들의 삶터입니다. 일터이자 쉼터입니다. 식량 창고입니다. 농부의 논밭을 갈아엎어 농사를 못 짓게 하는 것은 마을을 없애는 짓입니다.그런 일을 함양군은 마을 주민들과 한마디 의논 없이 추진하고 있습니다. 사업을 계획하는 단계에서는 물론이고 사업을 실행하는 단계에 이르러서조차 주민들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민들은 군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하여 여러 번에 걸쳐 집회와 시위를 하는 한편 군수에게 면담을 요청하였으나 군수는 받아주지 않고, 밀어붙이기식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앞서 함양군은 어려운 재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천억 공사를 벌여 '대봉산휴양밸리'라는 위락 시설을 만들었지만, 개장 3년 만에 적자를 감당할 수 없어 민간 위탁을 이야기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설 일부(집라인)가 부실공사로 무너져 제 구실을 할 수 없게 됨에 따라 손실이 더욱 커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함양군은 실패한 천억 공사 현장과 바로 이웃한 대광마을에 무려 1200억이 필요한 새로운 사업-'함양사계4U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주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함양 사계 4U 사업'은 철회되어야 합니다. 주민의 의사와 무관한 개발은 중단되어야 합니다. 막가파식 행정독재는 사라져야 합니다. 지방 소멸을 앞당기는 난개발은 막아야 합니다. 수도권으로 돈과 사람이 몰려들 수밖에 없는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지방 소멸 대응기금 같은 정책은 언 발에 오줌 누기입니다. 지자체의 무리한 개발사업을 부추겨 지방재정을 더욱 어렵게 하는 지방 소멸 대응기금 공모사업은 재고 되어야 합니다. 대광 마을 주민들은 이 모든 염원을 안고 오늘도 마을을 지키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대광 마을 주민들의 노력에 힘을 보태주십시오. 숲과 논밭을 지키기 위한 농부들의 노력에 힘을 실어 주십시오. 여러분의 서명이 필요합니다. https://forms.gle/bbnrepi8QxV21B6Q8 2024년 6월 중순 '함양 사계 포유'사업 반대 대광 마을 주민대책위 신종권(아닌) * 서명은 함양군과 경상남도에 제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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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요청] 주민의 동의 없는 개발사업을 막아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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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에 나무가 있어야지 골프장이 있냐) 음악회♬
- 작년에 구례군 산동면 사포마을 뒷산에서 21만㎡ 너비의 면적의 숲이 사라졌습니다.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부터 지리산 국립공원 경계 인근까지 최소 2만 5천 그루의 나무가 베어졌습니다. 구례군과 시행사는 이 자리에 1000억원을 들여 45만 평 너비의 대형 골프장을 지을 거라고 합니다.골프장 사업을 막아내고 무단 벌목지에 봄을 돌려주기 위해 음악회를 엽니다. 음악회에 앞서 지리산골프장 개발 예정인 벌목지 답사도 준비했습니다.다시 숲으로 돌아갈 날을 위해 음악과 이야기와 마음을 모으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2024년 4월 6일(토)▶ 오후 1시, 벌목지 답사 사포마을회관 (구례군 산동면 사포길 72)에서 시작- 지리산 난개발에 대한 소책자를 읽고나서, 주민분의 안내로 벌목지를 함께 걷습니다.▶ 오후 4시, 숲 음악회사포저수지 옆 공터 (구례군 산동면 관산리 401)♬ 공연자- 오프닝 : 캄캄밴드- 살래 재즈 트리오와 옥수수- 김목인☞ 참가비 20,000 원 이상 (카카오뱅크 3333-11-3005007 이신지원)☞ 주최 : 지리산골프장백지화연대, 지리산방랑단, 동아시아에코토피아포스터배경 사진: @phoma_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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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오늘
- 지리산 젊은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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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에 나무가 있어야지 골프장이 있냐) 음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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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을사년 푸른 뱀의 해, 구례를 생명평화의 땅으로 만들자!
- 오늘(2025년 1월 14일) 11시, 구례군청 앞에서 사포마을 지리산골프장 건설 저지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섬진강권 양수댐을 반대하는 구례사람들. 중산리반내골주민연대. 지리산골프장 개발을 반대하는 구례사람들. 지리산사람들 등은 “2025년 을사년 푸른 뱀의 해, 구례를 생명평화의 땅으로 만들자!”는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기자회견에서 지리산사람들 등은 2023년 9월 4일부터 구례 민주주의 회복과 지리산, 섬진강을 지키자는 마음으로 거리에 서 있었던 16개월의 소회를 나누고, 앞으로는 매주 화요일 아침 구례군청 앞에서 시위를 이어가겠다고 밝혔습니다. 구례의 강과 산, 땅은 구례군의 소유물이 아니며, 지금을 사는 사람들만의 것도 아닙니다. 강과 산, 땅은 아이들에게서 잠시 빌려온 것이며, 그곳이 삶터인 생명들과 공유하는 곳입니다. 지리산사람들 등은 2025년 을사년 푸른 뱀의 해, 구례가 생명평화의 땅이 되도록 더 노력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기자회견 전문 올립니다. <기자회견문> 2025년 을사년 푸른 뱀의 해, 구례를 생명평화의 땅으로 만들자! 1년 중 가장 춥다는 1월입니다. 우리가 구례 민주주의 회복과 지리산, 섬진강을 지키기 위해 구례군청 앞에 섰던 날은 여름이었습니다. 여름에서 가을과 겨울로, 해가 바뀌어 봄이 오고,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2025년 을사년 푸른 뱀의 해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지리산골프장은 못 할 거야, 지리산케이블카도 힘들다던데, 섬진강 구례양수댐은 이미 결정되었잖아.’ 그러면서 ‘날도 더운데, 날도 추운데,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으니 그만해도 된다고.’ 그럴 수도 있습니다. 지리산골프장은 물 건너갔을 수도 있습니다. 지리산케이블카는 구례만의 문제가 아니니 건설하기 힘들 것입니다. 섬진강 구례양수댐은 ㈜한국중부발전이 우선사업자로 결정되었으나 불확실성, 기후재난의 시대에 어떤 결말이 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멈춰도 괜찮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을 떠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봉성산 불법 벌목과 주민 갈등 조장, 불탈법을 통한 지리산골프장 시도, 군민 세금으로 지어야 한다는, 상부정류장에서는 노고단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 지리산케이블카, 제대로 된 검증없이 여론몰이로 추진되는 섬진강 구례양수댐 등에서 구례군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구례군은 개발사업에 반대하는 주민, 단체를 적으로 몰아세우며 공격하고 핍박했고, 김순호 구례군수는 군민들과 공동으로 서명한 합의문을 깨면서도 단 한마디의 사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분별한 벌목으로 인해 산사태가 날까 두려워 뜬눈으로 밤을 보낸 주민들의 손을 단 한 번도 잡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구례의 윤석열’이라고도 불립니다. 오늘도 구례군은 개발, 토목 위주 정책만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지리산골프장, 지리산케이블카, 섬진강 구례양수댐, 오산케이블카, 간전면 레미콘공장 추가설치, 하천 정비사업, 서시교 철거 시도 등 부수고, 파헤치고, 쫓아냅니다. 우리가 경험한 구례군의 행정에 주민은 없습니다, 미래도 없습니다. 이러다가 구례의 강과 산, 흙을 다 팔아먹어 아이들에겐 오물투성이 죽은 땅덩어리만 물려줄까 봐 걱정스럽습니다. 우리가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이유입니다. 구례의 강과 산, 땅은 구례군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지금을 사는 사람들만의 것도 아닙니다. 강과 산, 땅은 아이들에게서 잠시 빌려온 것이며, 그곳이 삶터인 생명들과 공유해야 할 곳입니다. 지금처럼 모두 파먹고 쓰레기만 넘겨준다면 그건 범죄입니다. 제발 나쁜 어른이 되지 맙시다. 우리는 2023년 9월부터 이 자리에 있었고, 구례군, 구례군의회와 만나기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구례군, 구례군의회는 대화를 시도하거나 변화를 추구하려는 의지도,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구례군, 구례군의회는 멈추고 함께 살 길을 생각하자는 우리의 제안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이후에도 아이들을 대신하여, 함께 살아야 할 생명들을 대신하여,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16개월, 모두 애쓰셨습니다. 그들이 멈추지 않으니, 우리도 멈출 수 없습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바람이 불어도 이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떨어지는 낙숫물 한 방울, 그 한 방울이 모여 바위를 뚫습니다. 2025년 을사년 푸른 뱀의 해에는 구례가 생명평화의 땅이 되도록 더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토목 위주의 행정 중단하고 주민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지리산골프장 추진 중단하라! - 우리는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다. 군민의 기본 권리 보장하고 섬진강 구례양수댐 추진 포기하라! - 지리산국립공원은 구례군의 소유물이 아니다! 지리산케이블카 재추진 즉각 중단하라! 2025년 1월 14일 사포마을 지리산골프장 건설 저지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섬진강권 양수댐을 반대하는 구례사람들. 중산리반내골주민연대. 지리산골프장 개발을 반대하는 구례사람들. 지리산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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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을사년 푸른 뱀의 해, 구례를 생명평화의 땅으로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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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케이블카반대산청주민대책위원회 2025년 활동기금 모금
- 지리산케이블카반대산청주민대책위원회 후원계좌 농협 351-1285-4584-83 이경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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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케이블카반대산청주민대책위원회 2025년 활동기금 모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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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지리산케이블카 반대 산청주민대책위원회 활동보고서"
- <2024년 지리산케이블카반대산청주민대책위원회 활동보고서> 1. 2024년 산청군 지리산케이블카 추진 현황 1) 추정예산 증가: 1177억 -> 2000억 (산청군수 이승화 발언) 2) 환경영향평가 & 국립공원계획변경안 작성 용역 진행 중 (총 5억 4천 만원) 3) 경남 도내 단일화 4) 환경부는 반려된 2016년도 신청서와 99% 동일한 2023년도 신청서를 반려하지 않고 관망중. 2. 지리산케이블카, 무엇이 문제인가? 1) 환경파괴: 환경부 가이드라인 위배, 멸종위기 동식물 서식지 훼손, '친환경적 공법'은 사실상 불가능. 2) 경제성 없음: 향후 30년간 지속적 관광객 증가와 흑자 운영이 이루어져야 투자비 회수 가능. 전국의 케이블카는 대부분 적자로 운영중. 3) 비민주적: 대한민국 1호 국립공원을 개발하려면 주민 뿐 아니라 국민에게도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하고, 민주적으로 의견을 수렴해야 합니다. 4) 공공성 없음: 난개발에 예산 투입으로 교육, 복지 예산 삭감 예상. 산청군의 인구정채과 기초인프라가 부족하기 때문에 케이블카가 우선 사업이 될 수 없습니다. 3. 정기행동 1) 매주 월요일 아침 8~9시 농협중앙회 사거리 피케팅 2) 매주 수요일 5~6시 원지 하나로마트 앞 피켓팅 3) 산청촛불행동 참가, 발언 4. 궁금해, 산청산들강 1) 4월~12월에 걸쳐 총 9회 진행 2) 산청의 산들강을 발로 걸으며 역사의 현장과 뭇생명을 만남 3) 탈것을 이용한 피상적 관광보다, 직접 발로 땅을 디디고 물에 들어가는 자연과 밀착된 만남 지행 4) 산청지역의 생태환경 알기를 통해 참가자와 활동가의 내실 다지기 5) 궁금해, 산청산들강은 인터넷신문 지리산인에서 자세한 후기를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6) 참가비는 난개발로부터 지리산을 지키기 위한 후원 계좌 '지리산을그대로'에 적립되었습니다. 5. 기자회견 1) '케이블카없는지리산실천단' 발족 기자회견 (4/22 진주 서부청사 앞, 광주 518 민주광장) 2) 남원케이블카반대기자회견 참석 (4/26) 3) 산청 케이블카 용역 관련 기자회견 (5/21 산청군청 앞) 4) 경남도내 케이블카 단일화 관련 규탄 기자회견 (6/24 경남도청) 5) 지리산케이블카 반려 촉구 기자회견 & 환경부 면담 (7/1 환경부) 6) 907 기후정의행진지리산행동 기자회견 (9/2 산청군청 앞) 7)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이곳만은 지키자' 선정 기념 기자회견 (11/20 산청군청 앞) 6. 서명운동 1) 읍장, 목화장터, 간디학교, 지역행사, 온라인에서 서명운동을 진행 2) 1~2월에 집중했으며,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합쳐 1200명 정도 서명해주셨습니다. 3) 산청군 유권자 600명 목표치를 달성하지는 못했습니다. 4) 서명링크는 열어둔 상태입니다. 5) 추가적인 홍보와 집계 필요. 7. 연구 & 분석 1)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수요 추정 자료 검토. 2) 자연공원법, 가이드라인 공부 (구례와 연대) 3) 케이블카 관련 기사 분석 4) 2023년도 산청 케이블카 신청서 분석 5) 2016년도, 2023년도 신청서 비교 분석 (99% 동일) 6) 산청군 지방예산 & 결산 분석 8. 언론 & 방송 출연 1) 6/10 속속들이 좌담회 '지리산 케이블카 재추진 무엇이 문제인가' 이해성 사무국장 출연 2) 6/24 경남 MBC 라디오 민영권 집행위위원장 인터뷰 3) 8/13 창원 KBS 최세현 대표 인터뷰 9. 지역홍보 1) 한방약초축제 중 1인 시위와 유인물 배포 10. 연대활동 1) 구례, 남원과 연대하여 '케이블카없는지리산실천단발족' 2) 지리산지키기연석회의 참여 3) 함양 4계4U 사업 대광마을 부지 선정 백지화 기자회견에 연대단체로 참여 11. 기타활동 1) 동아시아 에코토피아가 2회 산청을 방문해서 케이블카와 지리산 난개발 이야기를 듣고 갔습니다. 2) 덕유산 케이블카 (곤돌라) 현장 답사 3) 정상에 오르지 않는 등산모임 '노피클'과 케이블카 예정지인 중산리를 방문하고, 지자체 예산과 케이블카 등 난개발, 이주민의 지역살이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12.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이곳만은 지키자' 선정 산청 케이블카 예정지인 지리산 중산리 일원을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이곳만은 지키자'에 응모, 많은 시민들의 추천과 댓글로 네티즌상에 선정되었습니다. '이곳만은 지키자'는 국가나 지자체가 보전하고 있는 법적 보호지역은 응모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국립공원 1호인 지리산 중산리가 네티즌상에 선정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국립공원 보존은 이제 오로지 시민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뜻이 아닐까 합니다. 13. 쟁점과 향후 활동 방향 1) 주민에게 설득력 있는 반대 이유와 대안 제시 2) 군수, 군의회, 환경부, 국회와 대화 3) 관련법, 제도 개정 4) 기후재앙은 빠른 시일 안에 현실로 닥쳐올 것입니다. 불필요한 난개발을 지금 당장 멈추고 지역 공동체가 함께 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수립해야 합니다. 지리산케이블카반대산청주민대책위원회 후원계좌 농협 351-1285-4584-83 이경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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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지리산케이블카 반대 산청주민대책위원회 활동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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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 키즈의 생애 4편 "우리는 무슨 사이"
- 9월이 왔다. 뜨거운 더위가 살짝 물러섰다. 신입생들의 얼굴엔 고등학생 같은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대학에 돌아갔을 때 나경은 수현을 만났다. 나경이 먼저 수현을 찾아왔다. "수현아, 그동안 잘 지냈어 “너 대학생 되더니 엄청 멋있어졌다.” “너 나 찾으러 우리 과에 왔다면서. 친구들에게 들었어" "네. 수현은 짧게 대답했다.”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 선배” “어…. 나. 그냥 잠시 쉬었어.” “몸도 안 좋고....." 나경은 사귀던 남자와 헤어지고 방황했다. 같은 과 운동권 선배였던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나니 다시 그 선배와 다시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다행히 그 선배가 가을에 졸업했다. 나경은 다시 돌아왔다. 나경과 수현은 이후 자주 만났다. 연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경은 술을 마실 때 수현을 불렀다. 수현은 나경이 부르면 모든 일을 제쳐두고 나경을 만나러 갔고, 수현이 만나자고 하면 나경도 그랬다. 우리 무슨 사이죠? 라고 나경에게 수현이 물었을 때 나경은 친한 사이라고 말했다. 수현은 고백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관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경은 수현이 좋았지만, 세살이나 어린 수현에게 먼저 고백할 수는 없었다. 벚나무의 잎들이 갈색으로 물들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단풍이 점점 진하게 물들었다. 교정의 학생들은 따뜻한 햇살을 찾아 잔디밭에 앉아 있었다. 떨어진 낙엽들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풋풋했던 신입생들은 이제 어엿한 대학생처럼 보였다. 학생들이 방학으로 교정은 텅 비었다. 텅 빈 교정엔 눈이 내렸다. 그렇게 가을이 가고 다시 겨울이 왔다. 수현은 겨울 방학 내게 다시 현장에서 일했다. 더운 여름보다 겨울이 수월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일은 더 힘들었다. 컴컴한 새벽에 일어나 현장에 나가면 손발이 꽁꽁 얼었다. 그럴 때면 페인트 깡통에 버려진 나무를 태워 언 발과 손을 녹였다. 연일 영하 10도가 넘나드는 추운 날이 이어졌다. 여름보다 더 힘들었다. 겨울에 수현은 고층 아파트 현장에서 일했다. 현장은 나름대로 체계가 있었다. 수현이 맞은 일은 일명 직영 잡부였다. 여기저기 청소일을 하거나 부족한 일손을 채우는 일이었다. 겨울에 시멘트 양성을 하기 위해 석탄을 가져와 불을 지피는 일도 수현이 해야 할 일이었다. 콘크리트 작업을 한 당일엔 온종일 불을 피워야 했다. 그 날은 야간이나 철야 일도 했다. 그런 날은 기본 일당에 야근 수당에 철야 수당까지 합쳐서 하루 10만 원이 넘었다. 수현을 야간 일이 있을 때마다 지원했다. 학비도 벌어야 하고 생활비도 벌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대학을 그만두어야 한다. 그나마 아침 점심 저녁을 먹는 함바집은 밥 맛이 좋았다. 마음껏 먹어도 되었고 함바집 박씨 아주머니를 수현을 아들 같다면 특별하게 달걀부침을 더 챙겨 주기도 했다. ”젊은 학생이 고생하는구먼…. 울 아들은 지금 군대 갔는데…. “강원도는 여기보다 엄청 춥겠지?“ ” 아드님이 강원도에서 있어요. 거긴 여기보다 5~6도는 더 내려갈걸요?“ ”학생은 군대 안 가나.?“”저는 졸업 하고 가려고요. "아이고. 하루라도 젊었을 때 가야 고생을 덜 하는데….” “그러게요. 세상이 저를 놓아주지를 않네요.” “근데 아주머니 아들은 몇 살이에요? “21살…. 인데…. 아, 그럼 저랑 동갑이네요.” “아…. 그려.” 그 후로 아들과 동갑이라며 아주머니는 수현을 볼 때마다 아들 생각이 난다고 했다. “학생 일 적당히 해” 직영 일은 적당히 해도 돼…. 뭐 반장이 맨날 쳐다보는 것 도 아니고… 끝내야 하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네. 아주머니 고마워요.” 수현은 아주머니의 아들이 같은 또래라는 것을 알았을 때 혹시 같은 학교를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묻지 않았다. 직영이 하는 일은 매일 매일 바뀌었다. 함께 일하는 분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거나 기술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같은 현장에서 일해도 철근 반이나 조적이나 목수들은 일당이 2~3배는 되었는데 직영일을 하는 사람 일당이 가장 작았다. 아무 기술도 없는 수현 같은 학생들이나 기술 없이 다른 일을 전전 하다가 현장 일을 나온 사람들이 불려 오는 일이었다. 현장에서도 가장 낮은 일자리였다. 그해 겨울 방학 내내 수현은 하루도 쉬지 못했다. 아파트 준공일이 얼마 남지 않아 현장은 쉬는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2월 중순이 넘어가자, 아파트 현장에도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수현의 길고 긴 노동일도 끝이 나고 있었다. 나경은 현장에서 일하던 수현을 찾아왔다. 일이 끝나고 수현과 나경은 밤거리를 걸었다. “수현아, 꼭 이렇게까지 일을 해야 해…” “손이 이게 뭐야….”“꽁꽁 얼고 튼 수현의 손을 잡았다.” "정 힘들면 이 누나에게 이야기해. 내가 좀 도와 줄 수도 있는데…. 수현은 별말 없이 걸었다. “선배처럼 부잣집 사람들은 우리 같은 가난한 빈민 출신들의 마음을 몰라요.” “전 빈민 프롤레타리아 출신이라고요. 가진 것도 없고요.” 둘은 함바집으로 행했다. 아주머니 여기 밥 하나 더 주실 수 있죠? 그래. 누구야? 학생 애인인가? “네” “제 여자 친구예요?” “예쁘죠?” “수현아…. 여자 친구는….” “아이고 수현 학생 여자 친구가 왔으니, 오늘은 달걀부침 네 개는 해줘야겠네” “수현이 같은 착실한 남자를 어찌 알아봤을까?” 나경은 수현이 자신을 여자 친구라고 소개했을 때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둘이 정말 사랑하는 사이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나이도 그렇고 환경도 그렇고 함께 할 수 없을 거라고 나경은 생각했다. “선배 방학 끝나고 봐요!” 나경은 수현과 커피 한잔을 하고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경은 단 한 번도 돈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경에게 돈은 흔하고 편한 것이었다. 자신이 사는 큰 집과 부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수현은 온종일 일을 하고 자신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이런 생각을 잠시 해봤지만, 더 고민하기는 싫었다. 나경과 수현은 역까지 걸었다. 찬바람이 둘 사이를 갈라놓듯이 불었다. 수현은 나경은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나경은 손을 놓지 않았다. 얼어붙은 수현의 손을 자신의 코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깍지를 끼웠다. 둘은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20분쯤 걸었을 때 역이 보였다. 역 앞에는 오래전 역 앞에 사람들이 많았을 때 이용했을 것 같은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봉봉, 박카스 같은 선물 상자들이 먼지가 쌓여 있었다. 나경은 저 안에 물건이 들어있기는 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빈 껍데기겠지…. 나경은 자신이 저 빈 상자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권도 아니고 공부를 하는 학생도 아니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자신이 먼지에 싸여 있는 빈 상자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곧 서울행 기차가 도착하겠습니다" 안내 멘트가 나오는 것을 보고 나경은 서둘러 기차를 타기 위애 달려갔다. 수현이 손짓이 보였다. 잘 있어…. 수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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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 키즈의 생애 4편 "우리는 무슨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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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산 사진가 정길웅 초대전
- 청호미술관 전시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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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산 사진가 정길웅 초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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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참 먹는 시간, 그녀가 만드는 한 끼
- 반달곰을 사랑하는 1% 가게 유람기입니다. 반달곰1%는 지리산권 가게들(현재는 구례)이 자발적으로 진행하는 공존프로그램으로 반달곰1% 가게에 가면 반달가슴곰을 자연스럽게 만나고, 특별히 계획하지 않아도 반달가슴곰 보호활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2021년 5개 가게로 시작한 반달곰1%는 2024년 현재 10개 가게로 늘어났습니다. ‘유랑인증서’를 통해 반달곰1% 가게에 들러 물품을 먹거나, 마시거나, 구입하여 모아진 1%의 기부금은 올무수거 활동, 무인센서카메라 구입 등 반달곰 보전활동을 위해 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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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참 먹는 시간, 그녀가 만드는 한 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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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아래에서 새 문명을 꿈꾸네
- 김석봉 선생 댁 마당에 들어서니 귀여운 고양이들이 먼저 나를 맞이하였다. 40여 마리에 이른다니 이 집의 주인은 고양이들이 아닌가. 집안에서는 또 견공들이 활달하게 손님을 접대한다. 나중에 만났지만 밖에는 목욕을 마친 거위도 집안 곳곳을 활보하고 있었다. 대부분 일부러 들인 게 아니라 갈 곳 없는 처지의 생명들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들을 돌보는 데 들이는 시간과 정성뿐 아니라 먹이기 위해서 투입하는 경제적 부담은 내가 상상하는 수준을 몇 배는 뛰어넘었다. 선생의 마음, 살아가는 태도가 깊숙이 다가온다. 원래 선생은 지역의 청년 작가로 활동하면서 진주교도소에 재직하고 있었는데 재소자로 온 문익환 목사를 만나면서 생애의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이때부터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는데 2천년대 초반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굵직한 장면들을 이끌었다. 2009년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2012년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을 거쳐 2007년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함양의 이 집으로 들어왔다. 여기로 오셔서 한 번도 옮기지 않고 18년째 살고 계십니다. 귀농, 귀촌할 때 지역과 집을 결정하는 문제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운명 같습니다. 그게 결심해서 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처음 이 집을 보러 왔을 때 2년 동안 방치되어 있어서 보잘것없었지만 내 느낌이 참 좋았어요. 집을 보러 온 게 아니라 다른 사람 따라서 우연히 온 것인데 너무 좋아서 집사람하고 함께 다시 한번 보고 나서 바로 계약했어요. 그 전에 시골에 살아야겠다는 계획은 하고 계셨나요? 우리 나이 정도(선생은 57년생이다)면 그런 꿈은 다들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내 경우는 갑작스러운 일이었어요. 그때 진주환경운동연합 상근 의장을 하고 있었는데 이 집을 사고 나니까 가서 살고 싶더라구요. 그래서 도배, 장판만 하고 이사를 하면서 단체 일을 정리했습니다. 과연 그럴까? 10년 넘게 준비하고서야 내려온 사람으로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면 선생은 무의식 속에서 오랜 시간 자연 속에서의 삶을 이미 살고 계셨기 때문이 아닐까? 농사 규모가 적지는 않습니다. 농사일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을텐데요. 처음부터 농사를 지었던 것은 아니예요. 이명박 정부 시절 4대강 반대 싸움 등 환경운동연합 대표로 활동하고 이후 녹색당 운영위원장까지 서울을 왔다갔다 하느라고 농사는 뒷전이었지요. 2012년 중반 서울 활동을 정리하고 나서 그때부터 전업농부로 살았어요. 힘들지는 않으셨어요? 규모가 어느 정도죠? 농사일이 운동보다는 쉬웠어요. 지금 밭으로만 2,400평 정도 됩니다. 제 기준으로는 어마어마합니다. 더구나 밭농사여서 그렇습니다. 예전에 논농사도 했는데 그건 자기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모든 것을 기계가 하잖아요. 그래서 ‘이건 하나마나 한 농사다’ 생각이 들어 3년 하고 때려치웠습니다. 밭농사는 자기 의지대로 하는 거잖아요. 작은 관리기 하나하고 괭이 가지고 내 마음이 가는 대로 고랑과 두둑을 크게도 하고 작게도 하고 얼마나 자유로운지 몰라요. 한동안 선생께서는 수확물을 판매하는 데 힘을 쓰셨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마음의 불편함을 느끼신 적도 있었다. 이제는 대부분을 나눔으로 소진하고 계시다. 농사의 규모도 조금은 줄이셨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러나 나는 농사일을 결코 욕심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내 삶에 부여하는 고결한 예의라 여겼다. 그랬거나 말거나 내년부턴 이 밭을 주인께 돌려주리라 마음먹었다. 욕심이라면 도려내기로 했고 스스로에 대한 예의라 해도 채울 만큼 채웠다 싶었다.”(선생의 페이스북에서) 선생님! 펜션인가요? 운영하고 계시죠? 펜션은 무슨(웃음), 민박입니다. 이 아래채인데 1945년 해방되던 해에 지은 집이예요. 그 사이 기둥을 보강한다거나 했겠지만 원형을 최대한 살리면서 방 세 칸 짜리 민박을 하고 있어요. 생활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인 것 같습니다. 맞아요. 우리가 여기서 살게끔 하는 가장 큰 동력이기도 했고 소재이기도 했지요. 이웃들이 있지만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너무 달라서 소통이 어려워요. 농사 얘기 말고는 할 얘기가 없고. 민박 손님들과는 대화, 소통, 교류가 잘 되니까 적적하지 않았어요. 사모님께서 음식에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계신 점이 큰 힘이 되었겠어요. 그렇죠. 시설 보고 오는 사람은 없을 것 같고 음식 때문에 오는 사람은 있어요. 아들과 며느리, 이쁜 손녀딸까지 3대가 모여 사는 모습이 오늘날에는 흔치 않은 사례가 될 것 같다. 바로 곁에 며느님이 운영하는 카페가 있고 선생의 페이스북에서는 이쁜 손녀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페이스북을 훑어보면서 사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셨을 듯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마을 가운데 있는 이 집이 좋았어요. 외따로 떨어져서 사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약간은 이해가 가요. 마을기업을 했었어요. 그런데 이웃들은 내 이익 이외에 공동의 이익, 마을의 이익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 벽을 허물어보려고 함께 견학도 다니고 열심히 설득을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보조사업 지원금이 나왔는데 그걸 나눠 갖자는 거예요. 기가 막히더라니까. 내가 ‘우리 모두 쇠고랑 찹니다’라고 했죠. 결국 2~3년 후 접었어요. 그 아픈 기억이 있지만 선생은 여전히 마을의 일원으로서 음식도 나누고 마을행사에 참여한다. 불편함도 삶의 한 부분이 아니던가. 우리 모두 함께 늘 고민하고 깊이 성찰해야 할 중요한 주제가 아닐까. 선생님께서 열정을 바친 환경운동을 회고하면서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들려주십시오. 쉰 한 살 때 운동을 정리하고 완전히 내려왔어요. 한창 일할 나이이고 더 나이 든 분들도 열심히 하고 계시지만 나보다 더 진취적이고 잘할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돌아보면 우리가 했던 환경운동은 모두 옳다고 확신했어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일들이 모두 미래지향적이고 생태적이었나 안타까운 점들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대체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태양광 발전에 힘을 쏟았지요. 그런데 그 결과 논과 밭, 숲을 파헤치고 사방에 태양광 패널이 볼썽사납게 설치되고 또 그것 때문에 길을 내는 등 환경을 파괴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주차장 등 우리 삶의 유휴공간을 활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지요. 환경운동의 큰 방향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까요? 개별적인 운동들은 대부분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전개돼요. 예를 들어 군산에 골프장 들어선다고 함양 사람이 가지는 않잖아요? 물론 그런 운동이 필요하지만, 근본적인 문명의 전환을 도모하는 어젠다를 제시하는 운동을 개발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해요. 다만 그것은 민간 차원에서는 쉽지 않지요. 전환은 지방정부나 국가 차원에서 해야 하는데 자본이 최고인 이 사회에서 가능할까요?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을 목표로 정치지형을 전복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일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합니다.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러나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말씀이다. 기후위기를 향해 돌진하는 이 미친 문명을 멈춰 세우기 위해서 우리가 숙고하고 토론해야 할 무겁고도 뼈아픈 말씀이다. 선생은 땅을 일구고 사람을 만나고 고양이를 돌보는 모든 일상을 시인의 눈길로 갈무리해 왔다. 따스하고 애틋하다. 2020년 농사일 와중에 틈틈이 써온 글들을 엮어 『뽐낼 것 없는 삶 숨길 것 없는 삶』을 펴냈다. 선생의 글을 읽으면 자연과 하나 된 삶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이해된다. “볕이 쏟아지는 빈 밭에 나가 내 몸뚱이도 말려야겠다. 한 시절 흘렸던 뜨거운 눈물도 말려야겠다. 사랑도 말리고, 분노도 말리고, 그리움도 말려두면 좋겠다. 아, 눈물 나게 좋은 가을볕이다.” 내내 건강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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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 여기저기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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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아래에서 새 문명을 꿈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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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누리씨는 산내 마을 활동가가 되었나?
- 2024년 12월은 유난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시민들이 불의에 분노했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구례 밤재를 넘고, 남원 여원재를 넘어 산내로 향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누리였다. 그는 30대 초반의 반짝이는 눈을 가진 맑은 사람이었다. 자신을 “마을 활동가”라고 했다. -남원 산내 마을 활동가 김누리씨 / 사진 김인호 마을 활동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마을과 활동, 두 가지가 만나는 지점을 생각해 봤다.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마을에는 사람이 살고, 누구나 활동한다. 활동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사람 밖에 없고 죽은 사람은 이미 저승의 사람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들었다. 산내는 남원에서 30분 거리다. 2000년 초반부터 많은 도시 사람이 내려와 살았다. 각자의 이유가 있었겠지만, 산내로 찾아 들어온 사람들 대부분은 귀농귀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남원과 함양의 경계에 있다 보니 남원과 함양 양쪽을 연결하기도 하고, 지리산을 가기 위해 백무동이나 뱀사골을 찾는 사람들이 지나는 마을이고, 도시와 농촌을 연결하는 합류 지점 같은 곳이다. 토닥은 산내면 소재지 끝쯤에 있었다. 카페 안에는 책들이 있었고, 셀프로 운영한다는 표지판이 보였다. 편안한 소파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벽보도 있었다. 여는 카페와는 다르다는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토닥은 산내 사람들이 커뮤니티 공간 겸 카페로 문을 열었다고 한다. 한동안 잘 되었지만, 주변에 카페들이 많이 생기고 나서 약간 시들해졌다. 그리고 1년을 쉬었다. 올봄에 김누리 씨는 다시 토닥의 문을 열었다. 9시에 출근해서 5시에 퇴근해요. 직장인이죠! 부모님이 2000년 초반에 시골에 내려와 살기 시작했어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이었어요. 잠시 구례에 살기도 했고요. 구례 마산면 청천초등학교를 다니다 8개월 만에 산내로 이사왔어요. 부모님은 여기서 고사리 농사를 하셨어요. 저도 여기서 초등학교를 졸업했고요. 중학교 2학년까지 다니다가 홈스쿨링을 했어요. 그리고 잠시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녔고, 문화예술 관련 일을 했는데, 서울에서 살기 힘들었어요. 2017년에 다시 내려와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많은 것 같은데 어떤 일을 하고 있나요? 우선 여기 마을 카페 토닥에서 일하고 있고요. 지리산 작은 변화 지원센터 이음에서도 일하고 있고요. 성폭력근절과 성폭력 피해자 지원하는 일, 성 인지 감수성 교육을 지원하는 일, 그리고 산내 청년 공간 등등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어요. [ 산내 마을 카페 토닥] 일이 정말 많은데 많은 일을 하는 이유가 뭔가요? 우선 먹고살기 위해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어요. 살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고요. 시골에 살려면 재밌는 일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사람들과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일을 진행하는 것이 재밌어요. 맞아요. 시골에서 사는 것의 가장 힘든 부분 중의 하나가 재미가 없다는 것이라고 저도 생각해요. 구례에도 도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많은데 재미가 없어 떠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은퇴하신 분들은 느긋하고 나른하게 살아도 되지만 젊은 분들은 다르잖아요. 재미가 없으면 살기 힘들죠! 그런 면에서 누리 씨가 하는 일들은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일과 그 재미를 찾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되겠군요? 네. 시골에서 청년들이 남아 있으려면 재미가 있어야 한다고 저도 생각해요. 재미라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우선 사람들이 만나서 이야기하고 함께 하는 일만큼 재밌는 일도 없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많이 하려고 하고 있어요. 제가 하는 일들 대부분이 그런 일들이라고 봐야 할 것 같아요. 토닥은 오후 5시면 문을 닫아요. 하지만 진짜 문을 닫는 것은 아니에요. 저녁엔 지역 사람들이 필요한 공간으로 내어주는 거죠. 책 읽기 모임을 하거나 마을 모임을 하는 공간이 되는 거죠! 그동안 저는 제가 내성적이라고 오랫동안 생각했어요. 근데 이 일을 하고 나서 생각이 변했어요.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하는 일이 재밌더라고요. 그동안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사실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처럼 다양한 활동을 하며,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그 사람들을 알아가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재밌다는 생각을 들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더 다양한 일을 찾아보려고 모색하고 있어요. 토닥 판매 수익으로 카페를 운영하기 힘들 것 같은데요? 네. 그래서 일종의 후원회원을 모집해서 운영하고 있는데 아직은 많은 편은 아니에요. 100명을 모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100명 모집해도 사실 운영하기 쉽지는 않아요. 그래도 다행히 임대료가 없어서 가능하죠. [건물을 기증하신 분에 대한 감사의 책장] 이 건물은 처음 토닥을 시작할 때 매입했어요. 처음 구매했던 분들이 증여를 해주셔서 임대료 없이 운영할 수 있어요. 그래서 지금도 운영이 가능한 것이고요. 임대료가 있었다면 하지 못했을 거예요. 벽에 건물을 기증한 분의 사진이 걸려 있더라고요. 그분들이 참 고마운 일을 하셨네요. 네.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운영하기 힘들죠.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지리산이나 자연, 시골에 사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사실 제가 어려서부터 시골에 살았지만, 시골이나 자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어요.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아요. 눈앞에 항상 지리산이 보이지만 산이 보이는구나! 정도의 느낌 이상은 아니었어요. 이 동네 사람들은 눈 내리면 바래봉에 가야 한다는 일종의 국룰이 있는데 저는 눈 내릴 때 바래봉에 가야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만큼 좀 무심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여기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생각이 변했어요. 생각이 바뀌니까 지리산도 바래봉도 산내도 달라 보이더라고요. [카페 토닥의 내부 모습 커피와 음료 대부분이 2천원 정도였다.] 책장에 자본주에 관한 책들이 많이 보이는데요. 현 체제에 대한 고민이 많은 것으로 보여요. 자본주의 문제점이나 대안 같은 것을 고민하고 있나요? 음....너무 큰 주제인 것 같기는 하네요. 그러면 누리 씨가 생각하는 자본주의 가장 큰 문제점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음… 여전히 힘든 질문이에요.(웃음) 제 주변 상황에서 보면 자본주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독한 개인주의라는 생각이 들어요.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 같은 거죠. 서로를 배려하지 않고 자기 입장만 생각하다 보면 함께 하지 못하고 결국 외로워지는 점도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타인에 대한 배려나 나눔 같은 문화가 풍요한 세상은 되었으면 좋겠어요. 자신만을 생각하고 살면 좋을 것 같기도 하지만, 어려운 상황이 되면 누구나 도움 받기를 원하잖아요. 그렇게 개인주의가 너무 강화되면 아무도 도움을 주지 않을 것 같거든요. 저는 산내에서 재밌게 살기 위해서 서로서로 배려하고 지역에 대한 고민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럼, 지금 생활은 어떻게 하시나요? 작년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대장암이었는데 진단받고 두 달 만이었어요. 그동안은 농사가 주 수입원이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농사를 지속하기 힘들게 되었죠. 그래서 어머니는 인월에서 미미부엌이라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어요. 저도 여러 가지 일을 해서 생활하고 있지만 사실 큰돈을 버는 일들은 아니라서 이일 저일 많이 하고 있죠. 그래도 사는 데 큰 지장은 없고 잘살고 있답니다. 서울에 살 때 너무 밀집되고 압축된 생활을 했었는데 그곳에서 제가 살기가 쉽지 않았어요. 여기서 사는 것이 저에게 맞는 것 같아요. 숨 쉴수 있고 마음이 편안해요. 그래서 2017년부터 쭈욱 살고 있답니다. 시골에서 청년들이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제가 사는 구례에도 많은 청년들이 살고 있지만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저도 잘 몰라요. 그래서 산내의 청년들은 어떻게 생활하는지 궁금하거든요. 산내는 구례읍보다 작은 곳이다 보니 여기서 버티면서 사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가장 큰 문제가 경제적인 문제고 두 번째는 아무래도 심심할 것 같거든요? 네. 저도 이 점에 대해서 고민이 많아요. 경제적인 문제는 카페에서 일하거나 농사일을 돕거나 소소한 일들을 하거나 일을 만들어 생활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서울처럼 공연이나 행사가 많은 곳이 아니라 지루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여러 가지 재밌는 일들을 만들어 보려고 해요. 제가 하고 있는 지리산 작은 변화 지원센터도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못하고 있는 일을 지원하고 있기도 합니다. 토닥에서 책 읽기 모임도 하고 있거든요. 책을 읽는 좋아한다면 여기 나와 함께 이야기해 볼 수도 있겠죠. 청년들의 펜션 쇼 같은 것도 해보고 싶어요. 결국 재미라는 것은 사람들과 만나고 이야기하고 서로를 알아 가는 것들, 그래서 만날 사람이 있고 돈 버는 일이 아니라도 소통하면서 지내면 재미가 있을 것 같거든요. 저는 여기서 남아서 재밌는 일들을 하고 싶어요. 산내사람들과 더불어서요. {웃음} 이야기할수록 김누리 씨에게 더 궁금한 질문들이 늘어났다. 그만큼 청년이 지역에서 살아남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고 마을은 점점 소멸해 가고 있다. 가끔 시골에 내려와 1~2년 동안 무엇인가 열심히 시도하다가 어느 날 봄 눈처럼 사라지는 청년들에 대한 기억들도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힘듦, 또는 시골문화와 충돌, 또는 지루함 이것도 아니면 두고 온 도시가 그리워 버티기 힘들었기에 그들은 다시 원좀으로 회귀했을 것이다. 하지만 누리 씨는 도시에 살던 몇 년을 빼고는 시골에 남아 산내 사람들과 함께 일을 만들어 내고 그 일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청년들이 다시 지역으로 돌아온다면 마을 소멸이라는 단어는 사라졌을 것이다. 떠난 청년들이 돌아오지 않기에 지금 이 시간에도 시골 마을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누리 씨의 도전은 더욱 빛나는 것 같다. 토닥에서 인터뷰하는 동안 천왕봉을 넘어온 오전의 햇살이 자꾸자꾸 들어와 토닥과 책들을 비추고 누리 씨를 비추고 있었다. 그의 삶에도 항상 따뜻한 지지와 행복한 햇살이 비췄으면 좋겠다. [김인호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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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누리씨는 산내 마을 활동가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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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희망가 1
- 섬진강 편지」 -여의도 희망가 1. / 지리산 천은사 노랑망태버섯 ‘우리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 나부끼는 젊은이들의 깃발 아래서 젊은이들의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그놈에게’ 가사는 다 알진 못하지만 더 나은 내일의 희망가라는 건 압니다. ‘우리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젊은이들의 몸짓을 따라 어깨춤을 추었다. 그 리듬을 다 따라 하진 못하지만 평화의 춤이라는 건 압니다. ‘탄핵윤석열탄핵윤석열탄핵“ 젊은이들 구호를 따라 외칩니다 내 작은 목소리는 함성에 묻히지만 거대한 물결이 되다는 건 압니다. 추운 날씨에도 밤이 깊어 가도 흐트러지지 않는 젊음대오 여의도에 가서 젊음이 소리치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여의도에 가서 젊음이 만드는 내일을 보았습니다. 여의도에서 돌아와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이번에 펴낸 ‘나를 살린 풍경들’ 책 속의 지리산 섬진강 사진들로 <여의도 희망가> 시리즈로 연재를 시작합니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섬진강 /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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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희망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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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샘물 취수로 말라가는 지하수, 소음과 진동으로 살기 힘들어진 집. 산청군 삼장면의 피해현장을 찾아서 1부
- 산청군에는 4개의 먹는샘물 공장이 제주도 삼다수 보다 많은 양의 물을 취수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지하수 고갈과 하루에 최대 400대 까지 다니는 대형 물 운송 차량으로 인한 소음,진동 피해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먹는 샘물 업체는 취수량을 더 늘려달라고 신청을 한 상황입니다. 삼장지하수보존비상대책위원회 분들과 피해의 현장을 둘러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먼저 피해의 현장을 돌아봤습니다. 대책위 분들과 나눈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영상으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00:00 말라가는 지하수 - 산청군 삼장면 00:47 8년 전 보다 현저히 줄어든 수량 (8년차 귀농인 인터뷰) 01:47 주민의 반대의견을 듣고도 군에 전달하지 않는 이장들 03:06 삼장면의 두 먹는 샘물 공장 03:15 말라 죽은 정자 옆 고목나무 두 그루 03:39 말라버린 덕교마을 구시샘 04:57 미신고 지하수 관정은 조사에서 빼려고 하는 산청군 05:57 지하수 수위가 15m 정도 낮아진 농가 06:34 말라버린 과수원의 수도 08:49 과수원 근처의 죽은 고목 09:11 하루 400대의 물 운송 차량, 소음 진동 피해 사례 1 11:25 계속 금 가는 옥상, 소음 진동 피해 2 12:15 금이가서 위험한 담장, 소음 진동 피해 3 13:08 금간 벽, 소음 진동 피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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