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10-08(목)

고을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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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 고을이야기 기사

  • 노고단의 아침
    「섬진강 편지」 -노고단의 아침 천왕봉에서 반야봉으로 만복대 너머 덕유가야까지 왕시루봉 내려 섬진강 남해까지 구례읍 너머 백아무등으로 사방팔방 번지는 아침빛 어리석은 이도 머물면 지혜로워진다는 지리산 저 구름과 빛이 그려내는 아침 풍경을 모시러 새벽길 걷는 구도자의 길 허락하는 동안 이 길을 묵묵히 걸으리라 -섬진강 / 김인호
    • 문화예술
    • 섬진강 편지
    2024-08-16
  • [설문] '지리산사람들'이 책을 낸다면?
    '지리산사람들'이 책을 낸다면?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지리산사람들'은 2007년 7월 14일 "현대문명이 만들어 낸 반생명, 반평화, 비인간의 인위적 질서를 거부하고 화해와 상생과 순환을 바탕에 둔 자연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또 "나아가 지리산 자락의 사람들과 함께 생태적 생활공동체를 복원"하고자 만들어진 단체입니다. 지리산사람들이 책을 낸다면, 어떤 책이 나와야 할까요? 아니 왜 우리는 책을 내야 할까요? 회원님들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편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아래 링크를 누르면 됩니다. https://forms.gle/fDmxz87Jc7LVZY5X6
    • 고을이야기
    • 구례
    2024-08-07
  • 궁금해, 산청 산들강 4- 중산리 계곡 두류생태탐방로를 걷다
    안녕하세요. 지리산 산청 소식을 전하는 포네입니다. 지난 주 토요일(7월 27일)에는 궁금해, 산청 산들강 4가 있었어요. 지리산케이블카 예정지인 중산리 계곡을 답사했습니다. 이날은 일정이 빠듯했습니다. 산청 신안면 중심지인 원지에서 오전에 어린이 아크릴 수업이 있어 아이들을 데려다주고, 그림도 같이 그렸어요. 수업이 끝나서는 인근 LH 아파트에 사는 친구에게 문학회 동인지 한 박스를 전달해준 후, 김밥과 샌드위치를 사서 차 안에서 먹으며 중산리로 향했습니다. 비 소식이 있어 우비를 준비해 오라고 했지만, 그래도 날씨가 맑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나 봅니다. 자꾸만 날씨를 살피게 되더군요. 원지에서 햇빛이 쨍하니 나서 비가 안 오려나, 했는데, 중산리에 도착하자 하늘이 꾸물꾸물. 중산리에는 ‘빨치산토벌전시관’이 있어요. “얘들아, 좀 시간이 남았는데 전시관 구경 갈까?” “아 싫어~. 저기 가면 이*만 따까리 되는 거야.” 단호한 박달군(초6). “어떻게 해놨는지 보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 “안 볼래.” 갑자기 장대 같은 빗줄기가 쏟아졌어요. 우산을 쓰고 버스 정류소로 걸어가니 숲샘과 참가자 몇 분이 벌써 와 계셨어요. “비가 와도 일정대로 출발합니다.”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 굵은 빗줄기에도 집합시간에 맞게 도착한 참가자들. 간단한 자기소개와 일정설명 후 출발. 오늘의 기수 강병해 님이 지리산 깃발을 들고 당당히 걸어갑니다. 계곡에서의 물놀이로 꼬드겨서 데리고 왔는데 비가 쏟아져서 아이들이 불평불만을 쏟아내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단야(초3)는 우산을 썼다 벗었다 비를 맞으며 신나게 걸어갔어요. 나중에는 젖은 운동화를 벗고 맨발로 걸었답니다. 박달 소년은 ‘샤워하며 노래 부르기’가 여름방학 숙제라는데, 비를 맞으며 속으로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방학숙제를 했대요. 방학 숙제가 참 훌륭하죠? 가족과 같이 활동하기, 직접 요리하기 같은 숙제도 있어요. 30여 년 전 초등학교에서 야영수련원 가서 비 내리는 날 목청 터져라 ‘호연지기’를 외치며 지리산을 오르던 ‘지옥훈련’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 오늘의 코스는 중산리 버스정류소에서 시작되는 두류생태탐방로를 쭉 걸어 올라갔다가, 등산로가 시작되는 곳에서 아스팔트 도로로 탐방안내소 쪽으로 내려와 카페 중산리에 들렀다가 다시 두류생태탐방로로 내려가는 거예요. 두류생태탐방로는 중산리 계곡을 따라 조성된 데크 길인데, 군데군데 야자매트가 깔린 부분도 있어요. 비가 와서 불어난 중산리 계곡의 야성적인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비가 많이 오면 집 옆의 조그만 냇물도 불어나 계곡이 되고 폭포가 되어 흐르는데, 중산리 아낙네들의 대중목욕탕이었다는 구시소 폭포는 호우주의보에는 들어가면 뼈도 못 추릴 나이야-가라 폭포가 됩니다. 무시무시. 잠시 과거로의 여행. 글쓴이가 단야와 같은 나이인 10살 때 부모님과 함께 제천 덕동에서 열린 ‘자연학교’ 모임에 갔었어요. 덕동계곡 상류 상학동에 흙집이 두어 채 있고 주민은 한 명 뿐인 곳에 수십 명이 텐트를 치고 4박 5일을 했는데, 3분만 걸어가면 운치 있는 계곡과 소가 있어서 어른들이 남탕, 여탕 나눠놓고 신선 놀이를 했었죠. 숲속에서 선녀와 나무꾼의 야외 결혼식도 있었고, 그 결혼식에 꽃동자 역할을 했었답니다. 모임 막바지에 태풍으로 폭우가 쏟아지고, 계곡이 넘쳐 내려가는 길 위에도 물이 15센티 정도 깊이로 흘렀답니다. 밤중에 번개가 번쩍이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조그만 흙집은 이럴 때면 무너지지 않을까, 떠내려가지 않을까 조마조마하지요. 다행히 목숨을 부지했기에 신나는 추억으로 남아있네요. 당시 덕동은 그리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었어요. 인근 주민들만 알고 있는 원시 계곡이었는데, 그로부터 몇 년 후 입장료를 받는 관광지가 되었죠. 그때 4박 5일 캠핑을 했던 심심산골 상학동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넓은 주차장과 도로, 두류생태탐방로가 없던 시절의 중산리 모습도 궁금해요. 꿈처럼 안개처럼, 어느 순간 산골에서도 희미해져버린 은하수처럼 아름다웠겠지요. 오늘날의 중산리의 모습은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여전히 아름답지요? 케이블카가 생겨도 지리산은 아마 여전히 아름다울 거예요. 그러나 예전의 모습을 아는 사람은 ‘예전이 더 아름다웠어’ 라고 하겠죠. 성형미인이 자연미인이었던 시절을 안다면 누구나 그런 안타까움을 느낄 거예요. 시간 관계상 케이블카 하부 정류장 예정지는 올라가지 않고 바로 아래의 거북이산장에서 상황 설명 후 카페 중산리로 갔어요. 하부 정류장 예정지는 교통 혼잡을 유발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곳입니다. 그러나 산청군에서 현재 케이블카 노선 변경 용역을 진행 중이기 때문에 정류장 위치는 바뀔 가능성이 높아요. 카페에서 쉬면서 음료를 마셨는데 아이들이 청포도 에이드와 레몬차가 너무 달대요. 물을 두 배로 타도 달아서 마시기가 힘들었어요. 우리 가족처럼 원시적인 입맛을 가지고는 생존하기 어려운 세상인가 봅니다. 참가자 중 한 분이 ‘중산리에서 이러고 있지 말고 유럽으로 투쟁의 선진지 견학을 가자, 아이들을 우물 안 개구리로 둬서 되겠냐’는 농담을 하셨어요. 박달 소년은 3살부터 전 세계에 궁금한 장소를 구글맵으로 다 찾아보았으며, 구글맵에서는 에베레스트 꼭대기 풍경도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진다고 대답해 드렸어요. 요즘에는 우물 안 개구리도 우물에 앉아 하늘에서 찍힌 세상을 봐요. 세상 어디든 빠른 속도로 지나치는 피상적인 풍경을 보는 것은 매우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오감 중 시각과 청각에 있어서 인간은 이미 유비쿼터스죠. 시각과 청각 신호가 제한된 프레임과 필터를 통해 들어온다는 게 아쉽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좀 이상한 동물이라, 프레임을 통해 산출된 결과물을 실재보다 더 아름답고 재미있고 가치 있다고 느끼기도 해요.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우리는 스마트폰, 컴퓨터 스크린, TV, 창문, 안경, 자동차 유리를 통해 세상을 보는 걸까요? 케이블카를 타는 몇 분 동안은 또 케이블카의 창문을 통해 하늘을 보고 나무를 보고, 계곡을 보겠죠. 우리 눈에 비치는 세상은 이제 거의 항상 렌즈와 프레임을 통해 필터링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렌즈와 프레임을 벗고, 있는 그대로의 하늘과 나무와 햇살과 빗물과 계곡과 흙을 만나는 게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경험 아닐까요? 경제적 강박에서 벗어나 자연과 하나 되는 평화로운 시간, 소중한 이웃들과 웃고 식사하는 즐거운 시간을 늘려가는 게 우리가 원하는 방향이고요. 글쓴이는 지금 이 순간 노트북을 내동댕이치고 에어컨을 끄고 계곡물에 몸을 담그고 싶습니다. 남아나는 예산을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겠다면,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자연을 성형수술 하는데 쓰지 말고, 주민에게 직접 지역화폐로 전달하면 어떨까요? 월요일 아침에 ‘케이블카 반대’ 피켓을 들고 읍의 거리에 서 있었더니, 지나가는 어느 주민이 그러셨어요. “케이블카가 될 거 같아요?” “군에서 추진하고 있고, 환경부에서 안 된다는 말을 확실하게 안하니까 될 수도 있죠. 지금 환경영향평가와 설계 용역에 5억 4천 쓰고 있고요.” “케이블카 만들 만큼 군에 돈이 많아요?” “매년 돈이 남고요. 작년에는 800억 이상 남았어요.” “아니, 그러면 헌 집이나 좀 고쳐주지. 돈 없다고 하던데?” “그러게 말입니다. 매년 돈 남는데 예산 짤 때는 돈 없다고 그래요. 군내버스 한 대 증차하는 것도 2억 든다고, 돈 없어서 안 된다고 하고요.” 매년 난개발에 쓰는 예산을 유효기간이 있는 지역화폐로 주민에게 나누면 관광 케이블카보다 더 절실한 곳에 저절로 돈이 돌아가지 않을까요? 세수 증대와 주민 복지, 자립도 향상에 도움이 되겠죠. 우물 안 개구리와 중산리 계곡의 맹꽁이 들은 목청 높여 노래합니다. 케이블카 말고 기본소득을. 개굴개굴. 난개발 말고 탈성장을. 꽥꽥.
    • 고을이야기
    • 산청
    2024-08-01
  • 간디학교 "팔레스타인의 눈물과 저항, 그리고 연대" 특강...팔레스타인 난민 살레흐 씨, 이정구 교수 참여
    안녕하세요. 지리산 산청 소식을 전하는 포네입니다. 7월 11일에는 산청 간디고등학교에서 ‘팔레스타인의 눈물과 저항, 그리고 연대’ 라는 제목의 특강이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난민 살레흐(28)씨와 부산대 개원연구원 이정구 박사를 초대하여 1부, 2부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특강이 진행되는 간디학교 강당에는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응원하는 스티커, 엽서 등 굿즈가 마련되어 있었고, 팔레스타인 국기와 간디 학생들이 그린 한반도와 팔레스타인 형상들, 아나키즘 기호가 걸려 있었어요. 강당에는 간디학교 학생과 교사들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분쟁에 관심 있는 지역의 이웃들도 모여 있었습니다. 아는 분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강연이 시작되기 전에, 간디학교 학생들의 여는 마당이 있었어요. 젊은 기운이 느껴지는 춤 공연이었습니다. 이어서 살레흐씨의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살레흐 씨는 대학시절 영어로 경영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강연은 영어로 진행이 되었어요. 통역은 간디 학생들이 맡아 주었답니다. 살레흐 씨는 1997년에 가자지구에서 태어나 2022년에 전쟁을 피해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살레흐 씨는 “가자가 팔레스타인 도시인데, 어째서 내가 가자에서 난민이었을까요?” 라는 질문으로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살레흐 씨 집안은 본래 가자 바깥에 집이 있었는데, 분쟁으로 인해 가자로 피난을 가서 살게 되었기 때문이래요. 살레흐 씨는 방학이 되면 할아버지 집으로 놀러 가 삼촌과 놀곤 했는데, 작년 10월에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할아버지 집이 파괴되고, 할아버지와 삼촌이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지금 9개월 째 일어나고 있는 집단학살로 35,000명 가량이 사망했고, 1만 명이 실종되었습니다. 실종된 대부분이 아이들과 여성입니다. 78,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고, 11,000여 명의 부상자들은 치료를 위해 이동해야 했습니다.” “영상은 끔찍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보고 싶지 않으면 눈을 감으셔도 됩니다.” 살레흐 씨는 제노사이드의 실상이 담긴 사진과 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8개월 전 처참하게 파괴된 가자의 거리와 아이들이 무너진 건물에 깔린 영상, 파괴된 거리를 걷는 세 명의 사람들이 저격당해 죽는 영상, 구급차를 공격하는 영상, 전기가 없어 핸드폰 불빛으로 수술하는 사진. 이스라엘은 병원을 공격해서 의료시스템을 파괴했습니다. 이런 공격 뿐 아니라, 물과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55명의 아이들이 먹을 게 없어 죽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보여드린 건 일부에 불과합니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나고 있을까요? 팔레스타인인들은 75년 이상을 고통 받고 있습니다.” 영국이 1917년에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나라를 만들 것이라고 한 후, 1948년부터 시오니스트들의 이동이 시작되었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을 점령했습니다. 살레흐 씨는 점령지의 확장을 ppt로 보여주고, 가자 지구의 상황을 설명했어요. “국경과 해안을 봉쇄하여 주민들이 자유롭게 여행하거나 이동하는 것을 막았고, 하루에 몇 시간만 전기 사용이 가능했습니다. 주민들은 물 같은 기본적인 자원을 제공받지 못하였고, 식수 부족으로 많은 질병이 생겼으며, 요리용 가스 공급 중단으로 사람들이 원시적인 방식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살레흐 씨 가족은 매우 운이 좋은 편이라, 전쟁이 시작되고 40일 가량 가자에 있었지만 이집트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한번 이상 죽을 위기를 겪었고, 알 시파 병원에 가면서 미사일 파편에 맞는 등 위험한 상황을 겪었다고 합니다. 이모와 조카는 아직도 가자에서 텐트 생활을 하고 있으며, 조카는 전쟁 중에도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며 사진을 보여 주었어요. 살레흐 씨는 대학 시절 학교 사진과 처참한 폐허가 된 현재의 대학교 사진을 보여주며, 최고 우등생이었던 친구가 연락이 두절되었으며, 아마도 죽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 소원은 팔레스타인이 자유로워지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서 세상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일상을 사는 것입니다.” 살레흐 씨의 소원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1부가 끝나고 포스트잇에 질문을 적는 시간이 있었고, 2부는 부산대 객원연구원 이정구 박사가 자료를 통해 중동의 역사적·지리적 배경과 이스라엘 국가 탄생의 배경과 과정, 시온주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해결책을 이야기했습니다. 유대인은 아주 오래전부터 디아스포라였기 때문에, 19세기~20세기 초 유럽에서는 경기가 좋지 않으면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으며, 러시아에서는 유대인 집단 학살이 있었습니다. 드레퓌스에게 프랑스 정부가 간첩 협의를 씌운 일명 ‘드레퓌스 사건’ 이후, 테오도르 헤르츨이라는 유대계 헝가리 언론인은 유대인만의 국가가 필요하다며 ‘세계 시온주의운동’을 제창했다고 합니다. 이정구 교수는 시온주의가 두 가지 의미에서 사악하다고 했습니다. 1. 힘 있는 강대국에 빌붙어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오스만 튀르크 술탄한테 가서 도와달라고 했는데 안 되니까, 영국에 가서 “우리에게 나라를 세워주면 인도 가는 길을 조용하게 해주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당시의 제국주의에 의존해서 나라를 만들려고 했다. 2. 유대인들‘만’의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다른 민족과 공존을 거부하였다.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민족주의. 이교수는 19세기 말~20세기 초 인도, 중국, 미국에 살던 유대인의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나라의 옷을 입고 동화된 모습이었는데요. 지금도 1,300백만 유대인 중 600명이 미국에 살고 있으며, 이들이 팔레스타인에 가지 않는 이유는 시온주의에 동의하지 않고, 이미 정착한 곳을 떠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미국의 유대인들이 시온주의와 이스라엘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을 유대인은 ‘알리아(상승을 뜻하는 히브리어)’라고 부르며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데, 시온주의자들이 영국을 등에 업고 이스라엘을 만들 때 아무도 살지 않는 황폐한 땅에 가서 사는 거라고 했지만, 그 지역에는 팔레스타인인이 계속해서 살고 있었지요.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만행을 비판하면, 국제 홀로코스트 추모위원회에서는 ‘반유대주의’라고 하는데요. 미 대학생들이 팔레스타인 학살을 비판하자, 바이든도 이것을 ‘반유대주의’라고 했습니다. ‘반유대주의’는 홀로코스트와 동의어로 쓰이는 무서운 말입니다. 유대인이 과거 제노사이드를 당했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미국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정통파 유대인은 ‘메시아가 올 때 까지 국가를 세우면 안 된다’는 신앙이 있기 때문에 시온주의에 반대한다고 합니다.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유대인이 이집트를 탈출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왔을 때, 거기에는 블레셋 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블레셋의 땅이라는 뜻이죠. 유대인은 블레셋을 정복했습니다.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의 골리앗은 블레셋의 장수입니다. 유대인의 역사책인 구약에 이 정복은 성전으로 묘사되지만, 블레셋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봉변도 그런 봉변이 없죠. 평화롭게 잘 살고 있는데, 어디서 떠돌이 민족이 들어와 여자와 아이들을 살해하고 땅을 빼앗다니. 고대의 역사가 근대에 와서 반복되고 있는 거지요. 이후 ‘가나안’은 신바빌로니아에 정복되어 유대인은 근대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디아스포라를 겪게 됩니다. 세계사는 정복과 패망, 이주의 역사죠. 디아스포라 상태 유대인들이 근대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을 때(알리아), 팔레스타인인들은 처음에 그들이 정착하도록 도와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배타적 민족주의를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것이죠. 이정구 교수는 이스라엘 비판을 홀로코스트(제노사이드)라고 부를 수는 없다며, 배타적 민족주의 국가인 이스라엘과 시온주의가 사라져야 하며, 먼저 이스라엘에 어마어마한 무기를 공급하는 미국이 손을 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1948년 이후로 쫓겨난 팔레스타인인들의 귀환권을 인정하고, 가자와 서안 지구의 점령과 정착지 확장을 종식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국가를 해체하고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 지역에 하나의 비종교적인 민주주의 국가를 세워서 모든 주민에게 동등한 시민권을 보장해야 합니다. 오스만 제국이 무너졌다고 해서 그 국민들이 다 죽은 것도 아니고,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가 무너지면서 백인이 다 죽은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사라지고, 비종교적, 비민족적 국가가 건설되어야 합니다.” 이 교수는 팔레스타인 지지 운동과 국제적 연대를 강조하며, “국제적 연대라고 하는 것은 국제기구들의 활동이 아니라 전 세계 민중들이 이스라엘과 미국을 규탄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지지하는 거리 시위, 행진, 집회 등의 활동을 말합니다. 집회‧시위 등이 전 세계에서 벌어져서 이스라엘과 미국의 지도자들에게 압력이 되도록 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살레흐 씨가 보여준 참담하고 절망적인 가자의 사진들을 보면, 멀리 떨어진 우리가 시위, 행진, 집회를 한다고 해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미사일을 막을 수 있을까 의심스럽지만,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다 낫겠지요. 무력武力을 더 강력한 무력武力으로 해결해야 할까요, 무력無力으로 무력화無力化 가 가능할까요? 눈물과 저항, 연대를 통해 다양한 민족을 포용하는 비종교적 국가가 어렵사리 탄생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종류의 계층구조와 차별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입니다. 배타적 민족주의도 처음에는 이민족의 공격과 침탈로부터 부족을 보호하고 부강해지기 위한 수단이었을 테지만, 민족주의의 주체가 더 이상 약자가 아닐 때는 타민족에게는 악랄한 배척자로, 내부의 약자에게는 지독한 파시즘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배타적 민족주의가 사라지고 나면, 유대인이나 팔레스타인인이나 다른 어떤 민족이나 가지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의 진짜 문제가 드러나지 않을까요? ‘안 죽으려면 죽여야 한다’, ‘내 유전자를 남기려면 경쟁자를 죽여야 한다’, ‘타자는 다 경쟁자고, 나를 죽일 수 있다’는 일차원적인 두려움에 근거한 폭력성이 인간의 DNA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세상의 전쟁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질의응답> Q. 유엔은 어떤 활동을 하나요? A. (이정구) 유엔은 있으나 마나 한 기구입니다. 살고 있는 사람을 내쫓으며 UN의 이름으로 이스라엘을 세웠어요. 난민구호기구를 만들고 할 일을 다 했다는 식이죠. UN은 약소국에 좋지 않은 일을 합니다. Q. 가자에서 있었던 트라우마를 어떻게 극복하고 계시는지요? A. (살레흐) 트라우마 극복은 어렵지만, 트라우마 때문에 무너진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극복해야 상황을 더 알릴 수 있고, 팔레스타인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습니다. Q. 가자에 사는 가족은 안전한지? 연락은 어떻게 하고 계시는지? A. (살레흐) 가자지구 안에 있기 때문에 안전하지 않지요. 물과 음식부족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통신이 자주 끊기기 때문에 일주일에 메시지 한 번 정도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Q. 이스라엘에 왜 직접적인 제지가 이루어지지 않나요? A. (이정구) 이스라엘이 ICC에 제소당해 네타냐후가 전범으로 판정을 받았으나, 네타냐후의 행동을 제지할 수 없습니다. 국제기구를 통해 문제해결을 하는 것은 요원합니다. 미국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무기를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네타냐후에게 하지 말라고 하는 중이지만, 이것은 자신들이 전쟁을 너무 많이 벌리고 있기 때문에 말리는 것입니다. 국제기구와 상관없이 팔레스타인지지 운동이 필요합니다. Q.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합니다. 살육과 전쟁은 멈추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식민지를 경험했고, 유대인도 홀로코스트로 고통을 당한 적이 있는데, 시온주의가 없어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이정구) 정통파 유대인은 시온주의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메시아가 올 때 까지 국가를 세우면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지요. 또한 홀로코스트는 유대인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닙니다. 게르만족의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고자, 유대인을 포함한 소수민족 모두를 말살하고자 한 것입니다. 조금 전에 강연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배타적인지 않은 비종교적이고 민주적인 국가가 건설되어야 합니다.
    • 고을이야기
    • 산청
    2024-07-15
  • 궁금해 산청 산들강3- 잃어버린 이상향 고운동을 찾아서
    안녕하세요. 지리산 산청 소식을 전하는 포네입니다. 6월 29일에는 궁금해, 산청 산들강에서 고운동천-등잔봉 구간을 걸었습니다. 고운동천은 산청 양수발전소 상부댐 근처 민박집이에요. 주소는 산청군 시천면이지만, 차편으로 접근을 하려면 산청에서도 삼신봉 터널을 통해 하동군 청암면을 거쳐야 갈 수 있습니다. 고운동은 옛날에는 시천면 반천마을로 난 산길로 걸어 올라갔다고 합니다. 반천마을의 고운동 계곡 초입에는 유명한 배바위와 500년된 참나무가 있어요. 고운동 이름은 최치원의 호를 딴 것으로, 지리산 골짝골짝 최치원과 관련한 전설이 많이 있지만, 그의 이름을 딴 마을은 이곳뿐이라고 해요. 옛사람들이 신선이 사는 이상향, 유토피아로 생각했던 ‘청학동’의 모습을 가장 닮아 있었던 마을이 고운동입니다. 깊은 산속 계곡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돌연 툭 트인 개활지가 나타나고, 그 풍경이 무릉도원과 같았다고 하네요. 가수 한돌이 노래한 지리산의 이상향 고운동은 지금은 물속에 잠겨 있습니다. 오랫동안 가물었는데, 드디어 장마가 시작되었습니다. 비가 오면 지리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는 숲샘의 말씀에 따라 비옷을 챙겨입고 고운동천 아래에 모였습니다. 고운동천 주인장인 이도정님은 고운동에서 태어나 살다가 9살 무렵에 부모님이 산 아래의 외공리로 집을 통째로 옮겨서 이사했다고 합니다(산들강 1에서는 외공에서 열린 민간인 학살사건 위령제에 참여했습니다). 옛날에는 고운동에서 누군가 이사를 가면, 동네 사람들이 다 같이 집을 해체하여 뼈대를 아랫동네까지 짊어지고 가서 다시 지어다고 하네요. 이도정님이 어릴 때만 해도 고운동에는 30여 가구가 살면서 논밭을 일구며 자급자족을 했습니다. 이도정님은 아름다운 계곡을 오르내리며 학교에 다녔던 유년을 그림같은 추억으로 간직하며 부산에서 살다가, 고향인 고운동에 남은 땅을 상속받게 되어 노후에 들어올 생각으로 민박집을 짓게 되었습니다. 먼저 양수발전소 상부댐을 보러 도로를 따라 10분 정도 걸어갔습니다. 비가 와서 짙은 안개에 가려 저수지와 반대편 산, 산아래는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숲샘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고운동은 반천리(反川)에 속하는데, 반천은 냇물이 거꾸로 흐른다는 뜻입니다. 하부댐의 물을 거꾸로 퍼올려 상부댐에 저장하는 양수발전소가 생길지 천년 전에 어떻게 알고 이런 의미심장한 이름이 붙었던 걸까요? 등잔봉이라는 이름도 그렇습니다. 천년 후에 등잔처럼 저수지 옆 발전소에 불이 켜질지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름을 잘 지은 건지 못 지은 건지, 천년 동안 불렀던 그대로 된 모양입니다. 양수발전소의 가동률은 10%라고 하는데, 총 시간의 10%가 가동되고 있다는 뜻이래요. 양수발전소는 전기가 풍부할 때 상부댐으로 물을 퍼올려 위치에너지로 저장했다가, 전기가 부족할 때 밑으로 흘려보내서 퍼올렸을 때 소모한 전기의 70% 정도를 생산합니다. 이렇게 아름답게 포장해서 이야기 하지만, 본질적으로 양수발전소는 핵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전기를 소모하기 위한 시설입니다. 원전은 수요에 따라 조절이 불가능하고, 일정하게 생산되는 전기를 소모하지 않으면 위험하기 때문이죠. 요즘엔 심야전기를 많이 사용해서 양수발전소의 가동률이 낮은가 봅니다. 이게 잘 이해가 안 될 수 있어요. 양수발전소란 이름이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기 때문이에요. 양수발전소가 아니라, 핵전력소비소라고 부르면 양수댐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 곳인지, 왜 존재하는지 초딩도 바로 알 수 있을 텐데요. 아무튼 양수댐은 핵발전소의 부대시설이고, 지리산의 이상향인 고운동은 그로 인해 아틀란티스가 되었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네요. 아, 옛날이여. 이쯤 돼서 ‘고운동 달빛’을 듣고 가야 될 거 같아요. 우리는 등잔봉에 올라서 들었지만, 글과 노래는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들 수 있는 수단이니까요. <고운동 달빛/한돌> 마음의 옷을 벗고 달빛으로 몸 씻으니 설익은 외로움이 예쁜 꽃이 되는구나 해맑은 꽃내음을 한 사발 마시고 나니 물 젖은 눈가에 달빛이 내려앉는구나 고운동 계곡이 잠긴다네 고운동 달빛이 사라진다네 꽃들의 희망도 잠기겠지 새들도 말없이 떠나가겠지 사랑이 사랑이 아님을 알게 되리라 아프게 사라지지만 산은 울지 않는다 외로운 구름아 어디로 떠나려는가 꽃과 새들의 눈물 속에 산도 지쳐 돌아눕는구나 고운동 계곡이 잠긴다네 고운동 달빛이 사라진다네 꽃들의 희망도 잠기겠지 새들도 말없이 떠나가겠지 지리산 지리산아 사랑하는 지리산아 지리산 지리산아 나의 사랑 지리산아 고운동 계곡이 잠긴다네 (지리산 지리산아) 고운동 달빛이 사라진다네 (사랑하는 지리산아) 꽃들의 희망도 잠기겠지 (지리산 지리산아) 새들도 말없이 떠나가겠지 (나의 사랑 지리산아) 옛 고운동의 모습은 몇몇 사람들의 기억속에 아직도 꿈결처럼 남아 있겠죠? 아프게 사라져도 남은 생명은 살아가야죠. 꽃들의 희망이 잠기고, 새들이 떠나간 고운동의 수면 위에 다시 꽃을 심고 새들을 불러오려는 고운동천. 등잔봉 올라가는 길이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돌다리를 지나 조금 올라가니 너른 터와 숙소가 나옵니다. 숙소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궁이에 불 지피고 촛불을 키고 묵어야 하겠네요. 손님은 별로 없다고 합니다. 고요한 숲속의 소박한 쉼터는 잘 알려지지 않아야 좋은 곳으로 남게 되지만, 주인장이 심심치 않을 만큼은 손님이 있었으면 하네요. 고운동천 민박은 명상 수행과 자연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손님에게 알맞을 듯 합니다. 숲샘의 나무 해설을 들으며 산길을 올라갑니다. 숲은 참나무가 주종으로, 하부층은 조릿대가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낙엽이 비에 젖는 냄새가 났어요. 비오는 날에는 산의 초록빛이 마르지 않은 수채화처럼 더욱 선명하고 촉촉해집니다. 오랫동안 가물었다가 비가 내리면 애벌레가 허물을 벗듯 식물이 통통해지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거칠어졌던 입사귀와 수피들이 물을 머금어 보드라워집니다. 비옷을 입고 산을 오르니 우산에 수관이 가리지 않아 좋았어요. 수피가 두꺼운 코르크층을 이루고 있어 굴피의 재료가 되는 굴참나무, 잎사귀가 넓어 떡을 싸는 데 썼다는 떡갈나무. 짚신 바닥에 깔았다는 신갈나무.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외제 선생님은 슬리퍼를 벗고 맨발로 산을 오르셨어요. 조그만 나무비로 표시된 등잔봉. 참여자들의 사진을 한 장씩 다 찍어주신 숲샘. 정상에 올라 잠시 숨을 돌리며 햇살이 가져온 따뜻한 정상차를 마셨어요. 비속에서 호두, 오이 등 소박한 간식을 먹으며 마음을 나누었어요. 숲샘이 고운동 달빛 음원을 찾는 동안 조외제 선생님이 부르는 그리운 금강산을 들었어요. 이어서 고운동 달빛 감상. 수많은 생명들이 왔다간 그 자리에 꽃은 다시 피고 집니다. 굳이 묻지도 말하지도 않는 우리들의 설움과 아픔이 다 녹아서 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안치환이 부르는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도 들었습니다. 지리십경을 만나는 마음의 자세를 그리는 가사가 의미심장해요.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라니’ 감당하기 어려운 대자연의 마음과 만나게 될 테니, 섣불리 오지 말라는군요. 그러게 괜히 와서 울고 가면 어쩌죠. 다행히 오늘은 비가 와서 눈가에 고인 눈물을 웃음으로 감출 수 있네요. 이게 끝이 아니었어요. 숲샘이 필사한 시 두 편을 들려주셨어요. 빗물에 젖은 나무줄기에 손을 얹어 봅니다. 고개를 들어 초록으로 안구를 채워봅니다. 아낌없는 사랑에 색깔이 있다면, 초록일거라고 믿어요. 나도 한 그루 나무이고, 내가 사랑하는 당신도 한 그루 나무라서, 어느 바람이 있어 우리들의 향기가 살며시 서로에게 닿기를 바래요. 베어져도 꺾여도 아파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나를 내어주는 나무의 사랑을 사람이 흉내내긴 어렵지요. 그런 사랑이 없는 대신 우리는 너나 없는 나무가 아무리 아낌없이 준대도 내 몸처럼 나무와 숲을 아끼고 소중히 지켜주어야 할 거예요. 산에서 내려와 고운동천에서 준비한 시원한 오미자차와 맛좋은 도토리떡, 숲샘이 준비한 삶은 계란을 먹으며 쉬었어요. 지리산 케이블카 현황에 대한 브리핑이 있었습니다. 최근 경남도에서 케이블카 노선이 산청으로 단일화되었습니다. 숲샘이 며칠 전 MBC경남에서 지리산케이블카산청주민대책위 민영권 집행위원장을 인터뷰한 녹음 파일을 블루투스 스피커로 틀어주셔서 낙숫물 떨어지는 정자의 돌 테이블에 둘러앉아 시일지난 라디오 방송을 들었습니다. 마치 과거로 여행한 분위기였어요. 양수발전소, 케이블카, 골프장... 지리산에 왜 이런 일들이 끝없이 일어나는 걸까요? 인간의 영역은 이미 충분하데, 인구감소와 지역소멸 시대라면서 점유면적을 넓히려는 움직임은 무엇인지. 남아나는 전기를 양수댐에 물을 퍼올리는데 쓰고, 정유공장에서 나오는 아스팔트를 버릴 곳이 없어 자꾸 도로를 닦고, 중장비를 놀릴 수 없어 산을 파헤치겠다니. 여분의 에너지와 물질의 열기로 사람이 못 살 정도로 지구가 뜨거워지기 전에 지나친 생산을 멈추었으면 좋겠습니다. 비행기, 자동차 타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관광지 가서 케이블카 타고, 골프 치면서 바쁘게 살다가 아흔 살 쯤 되어 죽어도 그만이지만, 비오는 날 뒷산에서 그 비를 맞으며 하루를 그냥 보내본다면, 괜히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고도 놀 수 있는 방법이 많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사람이 사는데 그렇게 많은 물질이 필요하지 않고, 친구가 씌워준 우산과 반찬통에 담아온 오이 한 조각에도 사랑은 있답니다. 누군가 산청에 놀러갈만한 곳이 어디 있냐고 묻는다면, 며칠 시간을 내어 고운동에 들러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인류가 자연과의 조화와 지속가능성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위기에 처하다면, 결국엔 늙어죽을 운명일지언정 나 혼자라도 자연과의 조화를 터득해야 하지 않겠어요. 전기 없는 민박집에서 군불을 때고 산나물로 밥을 해먹다 보면 마고 여신이 꿈에 나와 살짝 힌트를 줄지도요.
    • 고을이야기
    • 산청
    2024-06-30
  • 궁금해, 지리산? 함양- 김종직의 유두류록 길을 따라 걷다
    안녕하세요~ 지리산 산청 소식을 전하는 포네입니다. 지난 6월 20일(목)에는 지리산사람들과 지리산이음, 다시지리산에서 주최하는 답사 프로그램 ‘궁금해, 지리산- 함양편’이 있었어요.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구(2020. 삼우반)> 저자인 류정자 선생님이 550년 전 김종직이 지리산을 탐방하며 걸었던 길의 일부를 안내해 주셨습니다. 김종직(金宗直, 1431년 6월 ~ 1492년 8월 19일)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성리학자이며, 1470~1475년까지 함양군수를 역임했습니다. 함양군수 재임 시절 1472년 음력 8월 14~18일까지 5일간 지리산을 탐방하고 유두류록(遊頭流錄)이란 산행기를 남겼는데 류정자 선생님이 여러 차례의 탐방을 통해 코스를 확인했다고 합니다. 적조암 주차장에서 모여 인사를 나누고 출발합니다. 적조암까지 가는 길이 구불하고 좁았는데 암자가 너무 커서 놀랐어요. 김종직이 걸었을 당시에는 지리산 구석구석에 암자가 350여 개나 되었다고 해요. 김종직의 유람도 어느 스님이 안내를 했습니다. 유두류록을 읽어보면 고열암에서 하루 자게 되는데 오늘은 거기까지 가보자고 하십니다. 김종직인 언급한 절이 4개인데 이곳들을 찾아내는데 15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적조암 위 마지막 민가를 지나 산길로 들어서자 새소리가 들려왔어요. 김종직이 지리산을 유람했을 때는 국립공원이 시작되는 돌배나무가 있는 지점까지 조랑말을 타고 올라갔다고 합니다. 중간에 출입금지 팻말이 있는데, 류정자 선생님의 건의로 올해 초 탐방로로 허가를 받았다고 해요. 노장대(독바위)까지 2m 넓이의 야자매트를 깔 예정이라고 합니다. 산속에는 군데군데 돌로 쌓은 축대가 있어서 과거에 민가와 경작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중간에 금낭화 군락지가 있었는데, 옛날 운암마을 터로 경남인민유격대 대원들이 한참 머물렀던 곳이라고 합니다. 유격대는 법화사에서 결성되어 1947년에 이곳으로 1,200명이 옮겨와 머물렀다는 설명이었습니다. 빨치산이 숨어 살았던 곳. 조릿대 숲을 헤치고 산을 더 올라갑니다. 중간에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류정자 선생님이 빨치산 이야기를 한 번 더 해주셨어요. 이 근방에 빨치산 식량저장소였던 삼각바위와 굴이 있다고 합니다. 발견되었을 당시 박쥐가 날아다니고 곡식이 삭아서 먼지에 발이 빠질 지경이었대요. 조릿대를 헤치고 더 올라가니 500년 된 돌배나무가 나왔어요. 돌배나무가 이렇게 오래 사는 나무였군요. 돌배나무는 이 개체 말고도 오다가 두 그루를 더 보았어요. 수고가 워낙 높아서 열매가 날렸는지 어떤지는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돌배가 떨어질 무렵 배낭을 메고 주우러 오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배꽃이 필 때 오면 환상적일 거 같은데 시기를 맞추기는 어렵겠지요. 김종직은 이 지점까지 조랑말을 타고 왔대요. 가다가 큰 바위 옆에서 잠깐 휴식.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지장사 터가 있는데, 빨간 얼룩이 군데군데 묻은 바위가 있대요. 무엇인가 하면 빈대의 핏자국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암자가 많이 사라진 건 숭유억불 정책 때문이기도 하지만, 빈대가 너무 많아서 그랬다는 재미난 이야기. 절이 없어진 후 무시무시한 빈대도 없어졌겠지만, 우리는 지장사 터엔 들리지 않고 오른쪽으로 나아갔습니다. 조릿대숲을 벗어나자 산이 점점 가팔라졌습니다. 올라가는 길에는 작은 동굴도 있고, 올라가니 산내가 내려다 보이는 큰 바위(환희대?) 도 있었습니다. 이 다음에 나오는 절터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암자 이름은 잊어버렸네요. 큰 바위 아래 낮은 동굴에 샘이 있어서 그 옆에 암자를 짓고 수도를 했던 모양입니다. 동굴을 들여다보니 흙바닥에 물이 조금 고여 있긴 한데, 가물어서 그런지 마실 만한 양은 되지 않아 보였습니다. 옛날에는 1~2인 정도 마시고 살 만한 물이 나왔을까요? 돗자리를 깔고 점심을 먹으려 류정자 선생님에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큰 바위 위에 흙이 있고 중이 채소밭을 가꾸고 살더라는 기록을 보고 이곳을 찾았다고 합니다. 기왓장과 자기 조각이 많이 발견되고, 이 높은 곳에 있는 암자들도 다 기와로 지붕을 이었대요. 절을 짓기 위해 산속에 기와를 굽는 가마터부터 만들었다는. 식사 후 류정자 선생님과 일행의 3분의 2는 하산했습니다. 수달아빠가 안내를 맡아 6명이서 독바위(노장대)를 목표로 산행을 이어갔습니다. 수달아빠가 발견한 수정란. 원래는 투명한데, 날이 가물어 흰색을 띄는 거랍니다. 수정처럼 투명하다고 수정란인데, 잎도 없고 뿌리도 없고 꽃만 있는 신기한 식물이에요. 엽록소로 광합성을 하지 않고, 뿌리곰팡이가 제공하는 영양분으로 꽃을 피우고 종자를 맺는답니다. 수정난을 기생식물이라고 하는데, 그건 적당하지 않은 분류인것 같아요. 광합성을 하는 평범한 식물도 그런 식으로 따지면 태양에 기생하는 거잖아요? '균종속영양식물'이라는 분류가 그나마 나은 것 같습니다. 종속이라는 단어 빼고 그냥 뿌리곰팡이영양식물이라고 했으면 더 나았을 텐데요. 수정란은 지하세계의 생명의 네트워크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려주는 지표 같아요. 숲속의 요정 같은 식물. 팅커벨이 마법의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키고 있는 걸까요? 수정란을 뒤로 하고 가파른 길을 한참 올라가니 신열암이 있었어요. 신열암 입구에는 뽕나무가 가지를 드리우고 있어서 잠시 멈추고 향이 진하고 달콤한 오디를 따먹었어요. 산의 낮은 곳에서는 오디철이 지나 바위 위에 시든 열매가 떨어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여기는 한창이네요. 오디는 담비나 오소리의 식량이 되는지, 바위 위나 굴에 싸 놓은 똥을 보면 오디씨앗이 많았어요. 이곳에 암자를 짓고 불도를 닦았다니 어마어마합니다. 바위벽에 몇 군데 홈이 파인 걸로 보아 나무를 박아 넣었던 거 같아요. 여기도 바위 밑에서 물이 나와 암자를 지었나 봅니다. 날씨가 가물어서 샘에는 물이 한 방울도 없었고, 깊숙한 곳에 축축한 흙이 있는 정도였어요. 조선시대에는 여기서 꾸준히 물이 나왔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암자가 지어지지 않았을 테니. 샘에서 물 떠서 나뭇가지로 불을 지펴 산나물·나무열매 따위로 밥해먹고,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들었을 선승들의 생활을 상상해봅니다. 신열암 앞 함박꽃나무에는 꽃이 딱 한 송이 피어 있었어요. 독바위는 이 위에 있다고 해서 수달아빠를 따라 다시 산을 올라갔어요. 여기가 어딘고? 산등성이까지 올라가서 걷는데 암만 봐도 독바위는 없고, 너무 멀리 가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가다가다 보니 와불산 꼭대기. 이 산꼭대기 밑에 독바위가 있다고 하여 가파른 비탈을 내려갔는데, 참여자 1인의 지도 앱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중. 아.. 여기가 아닌가. 다시 비탈을 올라 와불산 정상에 오른 다음, 능선을 따라 온 길을 되짚어서 돌아갔어요.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터덜터덜 한참을 돌아가서야 제대로 된 길을 찾아 내려갔습니다. 여기는 신열암 바로 위 같은데, 신열암이랑 매우 가까이 있는 독바위를 못 보고 그냥 지나쳐 온 거였네요. 흑흑. 독바위로 가는 통로라는 안락문. 와~ 다른 세상으로 가는 문 같아요. 편안하고 즐거운 세상으로 가는 문이라니, 이 문을 관통하면 이제까지의 고생은 끝? 치솟은 바위벽 사이에 틈이 있습니다. 어떤 지질학적 작용으로 바위가 둘로 쪼개져 이런 길이 생겨난 걸까요. 참 신기해요. 바위로 된 산도를 통과하여 다시 태어났습니다. 조금 더 내려가니 엄청나게 큰 바위산이 있었습니다. 저것이 독바위, 독녀암이로군요. 하늘을 찌르는 거대한 바위가 몇 갈래로 쪼개져 있습니다. 김종직의 유두류록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신열암(新涅菴)을 찾아가 보니 중은 없었고, 그 암자 역시 높은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가 있어 다섯 가닥이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척(尺)이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 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잣나무가 바위 중턱에 나 있는데, 그 바위를 오르려는 자는 나무를 건너질러 타고 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 잡고 바위 틈을 돌면서 등과 배가 위아래로 마찰한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을 내놓을 수 없는 사람은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란히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는데, 지금에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毛骨)이 송연하여 정신이 멍해져서 내가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어느 여인이 홀로 기거하며 도를 닦아 승천했다는 독바위. 우리들은 잣나무가 아니라 어느 친절한 이가 매어놓은 나일론 밧줄을 잡고 바위 위로 올라갔어요. 부처머리에 두 번이나 올라가느라 힘이 빠져서 정상에 올라갈 수 있을지? 밧줄이 삭아서 좀 불안했지만 다들 낑낑거리며 중턱까지 올라가는데 성공했어요. 김종직 일행이 잣나무를 타고 올라간 바위는 이 지점 위에 있는 한층 더 높은 바위 같은데 거기까지는 도전하지 못했습니다. 여기까지만 올라와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풍광. 저 아래 출발 지점이었던 적조암이 내려다보였어요. 와불산을 헤메고 부처머리에 두 번이나 올라갔다 내려온 시간이 다 용서되었습니다. 안락문과 독려암을 보았으니, 높은 산을 헤맨 보람이 있지요. 하늘을 나는 새가 된 기분. 여기서 속세의 때를 벗고 다른 차원으로 승천하면 좋겠지만, 아직 속세에서 할 일이 남은 관계로 하강해야. 이렇게 높은 곳에서 산아래를 내려다보며 구름이 아련한 먼 지평을 내다보기 위해 케이블카를 타는 거겠죠? 단돈 2만 2천 원을 내면 5분 만에 승천한 기분이 느껴지는 곳까지 갈수 있죠. 아무런 힘을 들이지 않고 케이블카로 이곳까지 왔다면 어땠을까요? 빨치산의 루트와 금낭화 군락지가 된 옛 마을터, 환희대, 신열암도 못보고, 수정난도 만나지 못하고, 부처머리로 가는 길에 있는 다래의 군락도 못보고, 오소리의 화장실도 마주치지 못하고, 이름 모를 풀과 나무들의 향기도 맡지 못하고, 깊은 산속의 새소리도 못 들었겠지요. 독녀가 했다는 승천은 무엇일까요? 위치상으로 높은 지형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건 아닐 거 같아요. 지리산의 깊은 산속에서 동식물과 바위의 영과 공생하면서 이들의 노래와 침묵을 해치지 않으며 고독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세속의 소음 속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특별한 신체의 감각이 열리고, 시공을 초월하는 영안이 뜨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게 승천 아닐까 하네요. 케이블카를 타고 산에 올라 피상적으로 시야를 넒히는 건 사진을 남기는 것 외에는 별 의미가 없답니다. 뭇생명과 그들의 모태인 지구의 영을 우리의 신체로 직접 만나고, 육체를 넘어선 미묘한 신체로 공생, 공감하는 정신적 지평이 넓혀져야 하는 것이지요. 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중력을 주체하지 못해 침착하게 한발 한발 내딛으려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고 비틀거리며 떨어지듯 빠르게 내려왔어요. 승천은 느리지만 하강은 빠른 속도로 일어나는군요. 먼저 하산해서 적조암 주차장에서 독녀지망생을 기다리며 담배를 태우고 있을 가께목 선사가 심심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어요. 차 안에서 <20세기 소년>이라도 꺼내보게 키를 드리고 독바위에 올라갈 것을, 아차 싶었죠. 무면허 음주운전을 하실까봐 키를 안 드렸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 산을 헤맬 줄은.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돌배나무 근처에서 팔색조의 노랫소리를 들었어요. 수달아빠가 폰을 켜고 휘파람으로 새소리를 흉내 내기 시작했어요. 서투르나마 나도 흉내를 내 보았어요. 이렇게 5분정도 소리를 내고 있으며 새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2분쯤 지나 푸른색 날개가 우리들 옆을 휙 하니 지나갔어요. 와~ 나뭇잎에 가려 보이지 않는 곳에 앉았길래, 조금 더 불러보았는데, 어쩐지 짜증이 섞인 듯한 울음소리로 대답하는 걸 들었어요. 결국 촬영은 하지 못한 수달아빠. 그래도 산에서 내려오면서 팔색조를 보아서 너무 기뻤어요. 이젠 산속에만 가면 5분 동안 휘파람 불면서 팔색조를 기다려 볼 것 같아요. 하루를 꼬박 투자하여 지리산의 숨은 비경과 역사, 생태를 만난 시간이었습니다. 김종직이 걸었던 오래된 길과 빨치산 루트, 암자터를 안내·해설 해주신 류정자 선생님, 지리산의 동식물들을 만나게 해준 수달아빠, 앞서거니뒷서거니 함께 걸으며 서로 낙오되지 않게끔 지켜준 여러 선생님들 고맙습니다. 지리산에서 또 만나요. #궁금해지리산 #궁금해함양산 #류정자 #김종직 #유두류록 #독바위 #독려암 #지리산을_그대로 #지리산_케이블카 #승천
    • 고을이야기
    • 함양
    2024-06-24
  • [6월 20일 궁금해 지리산 –함양편] 참고자료
    6월 20일, [궁금해 지리산-함양편]을 이끄는 류정자 선생님이 보내준 글입니다. 읽고 오면 선생님의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옛산행기」 1472년 <김종직>선생의 [유두류록] 가객 | 2004.05.28 15:34 5910 ◆요점정리 산행일자 : 1472년(성종3년) 8월14일~18일 산행코스 : 함양관아→엄천→화암→지장사→선열암→신열암→고열암(1박) 청이당→영랑재→해유령→중봉→천왕봉→성모사(2박) 성모사→통천문→향적사(3박) 향적사→통천문→천왕봉→제석봉→세석→창불대-영신사(4박) 영신사→영신봉→직지봉→실덕리→등구재→함양관아(산행종료) 출 처 : 민족문화추진회 간 <점필재집> ◆감상과 이해 선생의 <유두류록>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지리산산행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리하여 그들의 수친서가 된 작품이다. 선생은 지리산을 "어머니의 산", "고향의 산"으로 인식하여, 천왕봉에 올라 마음을 펴고자 하였다. 천왕봉 성모석상에 대해서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으로 보는 설을 부정하고, 고역사서 <제왕운기>를 인용하여 고려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로 본다. 유람 도중 현실적 갈등과 모순이 없는 무릉도원을 희구하였으며, 선생은 사림파 지식인과 목민관으로서의 자세를 가지고 산행 도중 만나는 매를 잡는 사람들의 응막을 보고 민생의 어려움을 걱정하였고, 당시의 숭유억불 정책과도 상통하는 승려들의 혹세무민적 행적도 비판을 한다. 한편 천왕봉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며 주위의 명산들을 열거하여 설명하는 지리적인 혜안에서는 선생의 국토산하에 대한 애정과 지식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선생의 단촐한 유람단 구성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여느 지리산 행적과 비교가 되어 존경심까지 불러 일으키며, 선생의 등로는 지금의 의식으로 볼 때에 하나의 개척산행으로 탐구 가치가 있는 지리산 기행록이다. <본문> "아,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하기로 약속하고 이 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 -본문 중 구롱을 지나며- + 출발 나는 영남(嶺南)에서 생장하였으니, 두류산은 바로 내 고향의 산이다. 그러나 남북으로 떠돌며 벼슬하면서 세속 일에 골몰하여 나이 이미 40이 되도록 아직껏 한번도 유람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신묘년(1471, 성종2) 봄에 함양군수(咸陽郡守)가 되어 내려와 보니, 두류산이 바로 그 봉내(封內)에 있어 푸르게 우뚝 솟은 것을 눈만 쳐들면 바라볼 수가 있었으나, 흉년의 민사(民事)와 부서(簿書) 처리에 바빠서 거의 2년이 되도록 또 한번도 유람하지 못했다. 그리고 매양 유극기(兪克己), 임정숙(林貞叔)과 함께 이 일을 이야기하면서 마음 속에 항상 걸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금년 여름에 조태허(曺太虛)가 관동(關東)으로부터 나 있는 데로 와서 《예기(禮記)》를 읽고, 가을에는 장차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이 산에 유람하기를 요구하였다. 그러자 나 또한 생각건대, 파리해짐이 날로 더함에 따라 다리의 힘도 더욱 쇠해가는 터이니, 금년에 유람하지 못하면 명년을 기약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더구나 때는 중추(仲秋)라서 토우(土雨)가 이미 말끔하게 개었으니, 보름날 밤에 천왕봉(天王峯)에서 달을 완상하고, 닭이 울면 해돋는 모습을 구경하며, 다음날 아침에는 사방을 두루 관람한다면 일거에 여러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가 있으므로, 마침내 유람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는 극기를 초청하여 태허와 함께 《수친서(壽親書)》에 이른바 유산구(遊山具)를 상고하여, 그 휴대할 것을 거기에서 약간 증감(增減)하였다. + 화암에서 쉬고 지장사, 환희대까지 그리고 14일에 덕봉사(德峯寺)의 중 해공(解空)이 와서 그에게 향도(鄕導)를 하게 하였고, 또 한백원(韓百源)이 따라가기를 요청하였다. 마침내 그들과 함께 엄천(嚴川)을 지나 화암(花巖)에서 쉬는데, 중 법종(法宗)이 뒤따라오므로, 그 열력한 곳을 물어보니 험준함과 꼬불꼬불한 형세를 자못 자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또한 길을 인도하게 하여 지장사(地藏寺)에 이르니 갈림길이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말[馬]에서 내려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오르는데, 숲과 구렁이 깊고 그윽하여 벌써 경치가 뛰어남을 깨닫게 되었다. 이로부터 1리쯤 가서 환희대(歡喜臺)란 바위가 있는데, 태허와 백원이 그 꼭대기에 올라갔다. 그 아래는 천 길이나 되는데, 금대사(金臺寺), 홍련사(紅蓮寺), 백련사(白蓮寺) 등 여러 사찰을 내려다보았다. + 선열암과 신열암을 보고 고열암에서 자다 선열암(先涅菴)을 찾아가 보니, 암자가 높은 절벽을 등진 채 지어져 있는데, 두 샘이 절벽 밑에 있어 물이 매우 차가웠다. 담장 밖에는 물이 반암(半巖)의 부서진 돌 틈에서 방울져 떨어지는데, 반석(盤石)이 이를 받아서 약간 움푹 패인 곳에 맑게 고여 있었다. 그 틈에는 적양(赤楊)과 용수초(龍須草)가 났는데, 모두 두어 치[寸]쯤이나 되었다. 그 곁에 돌이 많은 비탈길이 있어, 등넝쿨[藤蔓] 한 가닥을 나무에 매어 놓고 그것을 부여잡고 오르내려서 묘정암(妙貞菴)과 지장사(地藏寺)를 왕래하였다. 중 법종이 말하기를, “한 비구승(比丘僧)이 있어 결하(結夏)1)와 우란(盂蘭)2)을 파하고 나서는 구름처럼 자유로이 돌아다녀서 간 곳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그런데 돌 위에는 소과(小瓜) 및 무우[蘿葍]를 심어놓았고, 조그마한 다듬잇방망이와 등겨가루[糠籺] 두어 되쯤이 있을 뿐이었다. 신열암(新涅菴)을 찾아가 보니 중은 없었고, 그 암자 역시 높은 절벽을 등지고 있었다. 암자의 동북쪽에는 독녀(獨女)라는 바위가 있어 다섯 가닥이 나란히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천여 척(尺)이나 되었다. 법종이 말하기를, “들으니, 한 부인(婦人)이 바위 사이에 돌을 쌓아 놓고 홀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도(道)를 연마하여 하늘로 날아올라갔으므로 독녀라 호칭한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그 쌓아놓은 돌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잣나무가 바위 중턱에 나 있는데, 그 바위를 오르려는 자는 나무를 건너질러 타고 가서 그 잣나무를 끌어잡고 바위 틈을 돌면서 등과 배가 위아래로 마찰한 다음에야 그 꼭대기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을 내놓을 수 없는 사람은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종리(從吏) 옥곤(玉崑)과 용산(聳山)은 능란히 올라가 발로 뛰면서 손을 휘저었다. 내가 일찍이 산음(山陰)을 왕래하면서 이 바위를 바라보니, 여러 봉우리들과 다투어 나와서 마치 하늘을 괴고 있는 듯했는데, 지금에 내 몸이 직접 이 땅을 밟아보니, 모골(毛骨)이 송연하여 정신이 멍해져서 내가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여기서 조금 서쪽으로 가서 고열암(古涅菴)에 다다르니, 날이 이미 땅거미가 졌다. 의론대(議論臺)는 그 서쪽 등성이에 있었다. 극기(克己) 등은 뒤떨어졌고, 나 혼자 삼반석(三盤石)에 올라 지팡이에 기대 섰노라니, 향로봉(香爐峯), 미타봉(彌陀峯)이 모두 다리 밑에 있었다. 해공(解空)이 말하기를, “절벽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는데, 노숙(老宿) 우타(優陀)가 그 곳에 거처하면서 일찍이 선열암, 신열암, 고열암 세 암자의 중들과 함께 이 돌에 앉아 대승(大乘), 소승(小乘)을 논하다가 갑자기 깨달았으므로, 인하여 이렇게 호칭한 것입니다.” 하였다. 잠시 뒤에 요주승(寮主僧)이 납의(衲衣)를 입고 와서 합장(合掌)하고 말하기를, “들으니 사군(使君)이 와서 노닌다고 하는데, 어디 있는가?” 하니, 해공이 그 요주승에게 말하지 말라고 눈짓을 하자, 요주승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래서 내가 장자(莊子)의 말을 사용하여 위로해서 말하기를, “나는 불을 쬐는 사람이 부뚜막을 서로 다투고, 동숙자(同宿者)들이 좌석을 서로 다투게 하고 싶다.3) 지금 요주승은 한 야옹(野翁)을 보았을 뿐이니, 어찌 내가 사군인 줄을 알았겠는가.” 하니, 해공 등이 모두 웃었다. 이 날에 나는 처음으로 산행(山行)을 시험하여 20리 가까이 걸은 결과, 극도로 피로하여 잠을 푹 자고 한밤중에 깨어서 보니, 달빛이 나왔다 들어갔다 하고, 여러 산봉우리에서는 운기(雲氣)가 솟아오르고 있으므로, 나는 마음 속으로 기도를 하였다. 기묘일(15일) 새벽에는 날이 더욱 흐려졌는데, 요주가 말하기를, “빈도(貧道)가 오랫동안 이 산에 거주하면서 구름의 형태로써 점을 쳐본 결과, 오늘은 반드시 비가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 구롱을 지나 청이당에서 쉬고 영랑대까지 그래서 나는 기뻐하며 담부(擔夫)를 감하여 돌려보내고 절에서 나와 곧바로 푸른 등라(藤蘿)가 깊이 우거진 숲속을 가노라니, 저절로 말라 죽은 큰 나무가 좁은 길에 넘어져서 그대로 외나무다리가 되었는데, 그 반쯤 썩은 것은 가지가 아직도 땅을 버티고 있어 마치 행마(行馬)처럼 생겼으므로, 머리를 숙이고 그 밑으로 지나갔다. 그리하여 한 언덕을 지나니, 해공이 말하기를, “이것이 구롱(九隴) 가운데 첫째입니다.” 하였다. 연하여 셋째, 넷째 언덕을 지나서 한 동부(洞府)를 만났는데, 지경이 넓고 조용하고 깊고 그윽하며, 수목(樹木)들이 태양을 가리고 덩굴풀[薜蘿]들이 덮이고 얽힌 가운데 계곡 물이 돌에 부딪혀 굽이굽이에 소리가 들리었다. 그 동쪽은 산등성이인데 그리 험준하지 않았고, 그 서쪽으로는 지세(地勢)가 점점 내려가는데 여기서 20리를 더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일 계견(鷄犬)과 우독(牛犢)을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벼, 삼,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 도원(武陵桃源)에도 그리 손색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지팡이로 계곡의 돌을 두드리면서 극기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아,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隱遁)하기를 약속하고 이 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 하고, 그로 하여금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의 한가운데에 이름을 쓰게 하였다. 구룡을 다 지나서는 문득 산등성이를 타고 가는데, 가는 구름이 나직하게 삿갓을 스치고, 초목들은 비를 맞지 않았는데도 축축이 젖어 있으므로, 그제야 비로소 하늘과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로부터 수리(數里)를 다 못 가서 등성이를 돌아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의 땅이다. 그런데 안개가 잔뜩 끼어서 먼 데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계석(溪石)을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이로부터 영랑재(永郞岾)에 이르기까지는 길이 극도로 가팔라서, 정히 봉선의기(封禪儀記)에 이른바 “뒷사람은 앞사람의 발 밑을 보고, 앞사람은 뒷사람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는 것과 같았으므로, 나무 뿌리를 부여잡아야만 비로소 오르내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해가 이미 한낮이 지나서야 비로소 영랑재를 올라갔다. 함양(咸陽)에서 바라보면 이 봉우리가 가장 높아 보이는데, 여기에 와서 보니, 다시 천왕봉(天王峯)을 쳐다보게 되었다. 영랑은 신라(新羅) 때 화랑(花郞)의 우두머리였는데, 3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수(山水) 속에 노닐다가 일찍이 이 봉우리에 올랐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소년대(少年臺)는 봉우리 곁에 있어 푸른 절벽이 만 길이나 되었는데, 이른바 소년이란 혹 영랑의 무리가 아니었는가 싶다. 내가 돌의 모서리를 안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곧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종자(從者)들에게 절벽 난간에 가까이 가지 말도록 주의를 시켰다. 이때 구름과 안개가 다 사라지고 햇살이 내리비추자, 동서의 계곡들이 모두 환히 트이었으므로, 여기저기를 바라보니, 잡수(雜樹)는 없고 모두가 삼나무[杉], 노송나무[檜], 소나무[松], 녹나무[枏]였는데, 말라 죽어서 뼈만 앙상하게 서 있는 것이 3분의 1이나 되었고, 간간이 단풍나무가 섞이어 마치 그림과 같았다. 그리고 등성이에 있는 나무들은 바람과 안개에 시달리어 가지와 줄기가 모두 왼쪽으로 쏠려 주먹처럼 굽은데다 잎이 거세게 나부끼었다. 중이 말하기를, “여기에는 잣나무[海松]가 더욱 많으므로, 이 고장 사람들이 가을철마다 잣을 채취하여 공액(貢額)에 충당하는데, 금년에는 잣이 달린 나무가 하나도 없으니, 만일 정한 액수대로 다 징수하려 한다면 우리 백성들은 어찌 하겠습니까. 수령(守令)께서 마침 보았으니, 이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서대초(書帶草)와 같은 풀이 있어 부드럽고 질기면서 매끄러워, 이것을 깔고 앉고 눕고 할 만하였는데, 곳곳이 다 그러하였다. 청이당 이하로는 오미자(五味子)나무 숲이 많았는데, 여기에 와서는 오미자나무가 없고, 다만 독활(獨活), 당귀(當歸)만이 있을 뿐이었다. + 혜유령(하봉), 중봉을 지나 천왕봉까지 해유령(蟹踰嶺)을 지나면서 보니 곁에 선암(船巖)이 있었는데, 법종(法宗)이 말하기를, “상고 시대에 바닷물이 산릉(山陵)을 넘쳐 흐를 때 이 바위에 배[船]를 매어두었는데, 방해(螃蟹)가 여기를 지나갔으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때의 생물(生物)들은 모두 하늘을 부여잡고 살았단 말인가.” 하였다. 또 등성이의 곁을 따라 남쪽으로 중봉(中峯)을 올라가 보니, 산중에 모든 융기하여 봉우리가 된 것들은 전부가 돌로 되었는데, 유독 이 봉우리만이 위에 흙을 이고서 단중(端重)하게 자리하고 있으므로, 발걸음을 자유로이 뗄 수가 있었다. 여기에서 약간 내려와 마암(馬巖)에서 쉬는데, 샘물이 맑고 차서 마실 만하였다. 가문 때를 만났을 경우, 사람을 시켜 이 바위에 올라가서 마구 뛰며 배회하게 하면 반드시 뇌우(雷雨)를 얻게 되는데, 내가 지난해와 금년 여름에 사람을 보내서 시험해 본 결과, 자못 효험이 있었다. + 천왕봉에서 신시(申時)에야 천왕봉을 올라가 보니, 구름과 안개가 성하게 일어나 산천이 모두 어두워져서 중봉(中峯) 또한 보이지 않았다. 해공과 법종이 먼저 성모묘(聖母廟)에 들어가서 소불(小佛)을 손에 들고 개게[晴] 해달라고 외치며 희롱하였다. 나는 처음에 이를 장난으로 여겼는데, 물어보니 말하기를, “세속에서 이렇게 하면 날이 갠다고 합니다.” 하였다. 그래서 나는 손발을 씻고 관대(冠帶)를 정제한 다음 석등(石磴)을 잡고 올라가 사당에 들어가서 주과(酒果)를 올리고 성모(聖母)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저는 일찍이 선니(宣尼)가 태산(泰山)에 올라 구경했던 일4)과 한자(韓子)가 형산(衡山)에 유람했던 뜻5)을 사모해 왔으나, 직사(職事)에 얽매여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중추(仲秋)에 남쪽 지경에 농사를 살피다가, 높은 봉우리를 쳐다보니 그 정성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사(進士) 한인효(韓仁孝), 유호인(兪好仁), 조위(曺偉) 등과 함께 운제(雲梯)를 타고 올라가 사당의 밑에 당도했는데, 비, 구름의 귀신이 빌미가 되어 운물(雲物)이 뭉게뭉게 일어나므로, 황급하고 답답한 나머지 좋은 때를 헛되이 저버리게 될까 염려하여, 삼가 성모께 비나니, 이 술잔을 흠향하시고 신통한 공효로써 보답하여 주소서.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하늘이 말끔해져서 달빛이 낮과 같이 밝고, 명일 아침에는 만리 경내가 환히 트이어 산해(山海)가 절로 구분되게 해 주신다면 저희들은 장관(壯觀)을 이루게 되리니, 감히 그 큰 은혜를 잊겠습니까.” 제사를 마치고는 함께 신위(神位) 앞에 앉아서 술을 두어 잔씩 나누고 파하였다. 그 사옥(祠屋)은 다만 3칸으로 되었는데, 엄천리(嚴川里) 사람이 고쳐 지은 것으로, 이 또한 판자 지붕에다 못을 박아놓아서 매우 튼튼하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바람에 날릴 수밖에 없었다. 두 중이 그 벽(壁)에 그림을 그려 놓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성모(聖母)의 옛 석상(石像)이란 것이었다. 그런데 미목(眉目)과 쪽머리[髻鬟]에는 모두 분대(粉黛)를 발라놓았고 목에는 결획(缺劃)이 있으므로 그 사실을 물어보니 말하기를, “태조(太祖)가 인월역(引月驛)에서 왜구(倭寇)와 싸워 승첩을 거두었던 해에 왜구가 이 봉우리에 올라와 그 곳을 찍고 갔으므로, 후인이 풀을 발라서 다시 붙여놓은 것입니다.” 하였다. 그 동편으로 움푹 들어간 석루(石壘)에는 해공 등이 희롱하던 소불(小佛)이 있는데, 이를 국사(國師)라 호칭하며, 세속에서는 성모의 음부(淫夫)라고 전해오고 있었다. 그래서 또 묻기를, “성모는 세속에서 무슨 신(神)이라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석가(釋迦)의 어머니인 마야부인(摩耶夫人)입니다.” 하였다. 아, 이런 일이 있다니. 서축(西竺)과 우리 동방은 천백(千百)의 세계(世界)로 막혀 있는데, 가유국(迦維國)의 부인이 어떻게 이 땅의 귀신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읽어보니, ‘성모가 선사를 명했다[聖母命詵師]’는 주석에 이르기를, “지금 지리산의 천왕(天王)이니, 바로 고려 태조(高麗太祖)의 비(妣)인 위숙왕후(威肅王后)를 가리킨다.” 하였다. 이는 곧 고려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에 관한 말을 익히 듣고서 자기 임금의 계통을 신격화시키기 위하여 이런 말을 만들어낸 것인데, 이승휴는 그 말을 믿고 《제왕운기》에 기록해 놓았으니, 이 또한 고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더구나 승려들의 세상을 현혹시키는 황당무계한 말임에랴. 또 이미 마야부인이라 하고서 국사(國師)로써 더럽혔으니, 그 설만(褻慢)하고 불경(不敬)스럽기가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이것을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날이 또 어두워지자 음랭한 바람이 매우 거세게 동서쪽에서 마구 불어와, 그 기세가 마치 집을 뽑고 산악을 진동시킬 듯하였고, 안개가 모여들어서 의관(衣冠)이 모두 축축해졌다. 네 사람이 사내(祠內)에서 서로 베개삼아 누웠노라니, 한기(寒氣)가 뼈에 사무치므로 다시 중면(重綿)을 껴입었다. 종자(從者)들은 모두 덜덜 떨며 어쩔 줄을 몰랐으므로, 큰 나무 서너 개를 태워서 불을 쬐게 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달빛이 어슴푸레하게 보이므로, 기뻐서 일어나 보니 이내 검은 구름에 가려져 버렸다. 누(壘)에 기대서 사방을 내려다보니, 천지(天地)와 사방(四方)이 서로 한데 연하여, 마치 큰 바다 가운데서 하나의 작은 배를 타고 올라갔다 기울었다 하면서 곧 파도 속으로 빠져들어갈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서 세 사람에게 웃으며 이르기를, “비록 한퇴지(韓退之)의 정성과 기미(幾微)를 미리 살펴 아는 도술(道術)은 없을지라도 다행히 군(君)들과 함께 기모(氣母 우주의 원기를 이름)를 타고 혼돈(混沌)의 근원에 떠서 노닐게 되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 통천문과 향적사 경진일(16일)에도 비바람이 아직 거세므로, 먼저 향적사(香積寺)에 종자들을 보내어 밥을 준비해 놓고 지름길을 헤치고 와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정오(正午)가 지나서는 비가 약간 그쳤는데 돌다리가 몹시 미끄러우므로, 사람을 시켜 붙들게 하여 내려왔다. 수 리(數里)쯤 가서는 철쇄로(鐵鎖路)가 있었는데 매우 위험하므로, 문득 석혈(石穴, 현 통천문)을 꿰어 나와서 힘껏 걸어 향적사(香積寺)에 들어갔다. 향적사에는 중이 없은 지가 벌써 2년이나 되었는데, 계곡 물은 아직도 쪼개진 나무에 의지하여 졸졸 흘러서 물통으로 떨어졌다. 창유(窓牖)의 관쇄(關鎖) 및 향반(香槃)의 불유(佛油)가 완연히 모두 있었으므로, 명하여 깨끗이 소제하고 분향(焚香)하게 한 다음 들어가 거처하였다. 저물녘에는 운애(雲靄)가 천왕봉으로부터 거꾸로 불려 내려오는데, 그 빠르기가 일순간도 채 안 되었다. 그리하여 먼 하늘에는 간혹 석양이 반사된 데도 있으므로, 나는 손을 들어 매우 기뻐하면서, 문 앞의 반석(盤石)으로 나가서 바라보니, 살천(薩川)이 길게 연해져 있고, 여러 산(山)과 해도(海島)는 혹은 완전히 드러나고 혹은 반쯤만 드러나기도 하며 혹은 꼭대기만 드러나기도 하여, 마치 장막(帳幕) 안에 있는 사람의 상투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절정(絶頂)을 쳐다보니, 겹겹의 봉우리가 둘러싸여서 어제 어느 길로 내려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당 곁에 서 있는 흰 깃발은 남쪽을 가리키며 펄럭이고 있었는데, 대체로 회화승(繪畵僧)이 나에게 그 곳을 알 수 있도록 알려준 것이다. 여기에서 남북의 두 바위를 마음껏 구경하고, 또 달이 뜨기를 기다렸는데, 이 때는 동방(東方)이 완전히 맑지 못하였다. 다시 추위를 견딜 수가 없어 등걸불을 태워서 집을 훈훈하게 한 다음에야 잠자리에 들어갔다. 한밤중에는 별빛과 달빛이 모두 환하였다. 신사일 (17일) 새벽에는 태양이 양곡(暘谷)에서 올라오는데, 노을빛 같은 채색이 반짝반짝 빛났다. 좌우에서는 모두 내가 몹시 피곤하여 반드시 재차 천왕봉을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나는 생각건대, 수일 동안 짙게 흐리던 날이 갑자기 개었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대단히 도와준 것인데, 지금 지척에 있으면서 힘써 다시 올라보지 못하고 만다면 평생 동안 가슴 속에 쌓아온 것을 끝내 씻어내지 못하고 말 것이라고 여겨졌다. + 재차 천왕봉에 올라 그래서 마침내 새벽밥을 재촉하여 먹고는 아랫도리를 걷어올리고 지레 석문(石門)을 통하여 올라가는데, 신에 밟힌 초목들은 모두 고드름이 붙어 있었다. 성모묘에 들어가서 다시 술잔을 올리고 사례하기를, “오늘은 천지가 맑게 개고 산천이 환하게 트였으니, 이는 실로 신의 도움을 힘입은 것이라, 참으로 깊이 기뻐하며 감사드립니다.” 하고, 이에 극기, 해공과 함께 북루(北壘)를 올라가니, 태허는 벌써 판옥(板屋)에 올라가 있었다. 아무리 높이 날으는 홍곡(鴻鵠)일지라도 우리보다 더 높이는 날 수 없었다. 이 때 날이 막 개서 사방에는 구름 한 점도 없고, 다만 대단히 아득하여 끝을 볼 수가 없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대체로 먼 데를 구경하면서 그 요령을 얻지 못하면 나무꾼의 소견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니 어찌 먼저 북쪽을 바라본 다음, 동쪽, 남쪽, 서쪽을 차례로 바라보고 또 가까운 데로부터 시작하여 먼 데에 이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니, 해공이 그 방도를 썩 잘 지시해 주었다. 이 산은 북으로부터 달려서 남원(南原)에 이르러 으뜸으로 일어난 것이 반야봉(般若峯)이 되었는데, 동쪽에서는 거의 이백 리를 뻗어와서 이 봉우리에 이르러 다시 우뚝하게 솟아서 북쪽으로 서리어 다하였다. 그 사면(四面)의 빼어남을 다투고 흐름을 겨루는 자잘한 봉우리와 계곡들에 대해서는 아무리 계산(計算)에 능한 사람일지라도 그 숫자를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보건대, 그 성첩(城堞)을 마치 죽 끌어서 둘러놓은 것처럼 생긴 것은 함양(咸陽)의 성(城)일 것이고, 청황색이 혼란하게 섞인 가운데 마치 흰 무지개가 가로로 관통한 것처럼 생긴 것은 진주(晉州)의 강물일 것이고, 푸른 산봉우리들이 한점 한점 얽히어 사방으로 가로질러서 곧게 선 것들은 남해(南海)와 거제(巨濟)의 군도(群島)일 것이다. 그리고 산음(山陰), 단계(丹谿), 운봉(雲峯), 구례(求禮), 하동(河東) 등의 현(縣)들은 모두 겹겹의 산골짜기에 숨어 있어서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북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바로 황석(黃石)(안음(安陰)에 있다)과 취암(鷲巖)(함양(咸陽)에 있다)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덕유(德裕)(함음(咸陰)에 있다), 계룡(鷄龍)(공주(公州)에 있다), 주우(走牛)(금산(錦山)에 있다), 수도(修道)(지례(知禮)에 있다), 가야(伽耶)(성주(星州)에 있다))이다. 또 동북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황산(皇山)(산음(山陰)에 있다))과 감악(紺嶽)(삼가(三嘉)에 있다)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팔공(八公)(대구(大丘)에 있다), 청량(淸凉)(안동(安東)에 있다)이다. 동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도굴(闍崛)(의령(宜寧)에 있다)과 집현(集賢)(진주(晉州)에 있다)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비슬(毗瑟)(현풍(玄風)에 있다), 운문(雲門)(청도(淸道)에 있다), 원적(圓寂)(양산(梁山)에 있다)이다. 동남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은 와룡(臥龍)(사천(泗川)에 있다)이고, 남쪽에 있는 산으로 가까이 있는 것들은 병요(甁要)(하동(河東)에 있다)와 백운(白雲)(광양(光陽)에 있다)이고, 서남쪽에 있는 산으로 멀리 있는 것은 팔전(八顚)(흥양(興陽)에 있다)이다. 서쪽에 있는 산으로 멀리 있는 것은 황산(荒山)(운봉(雲峯)에 있다)이고, 멀리 있는 것들은 무등(無等)(광주(光州)에 있다), 변산(邊山)(부안(扶安)에 있다), 금성(錦城)(나주(羅州)에 있다), 위봉(威鳳)(고산(高山)에 있다), 모악(母岳)(전주(全州)에 있다), 월출(月出)(영암(靈巖)에 있다)이고, 서북쪽에 멀리 있는 산은 성수(聖壽)(장수(長水)에 있다)이다. 이상의 산들이 혹은 조그마한 언덕 같기도 하고, 혹은 용호(龍虎) 같기도 하며, 혹은 음식 접시들을 늘어놓은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칼끝 같기도 한데, 그 중에 유독 동쪽의 팔공산과 서쪽의 무등산만이 여러 산들보다 약간 높게 보인다. 그리고 계립령(鷄立嶺) 이북으로는 푸른 산 기운이 창공에 널리 퍼져 있고, 대마도(對馬島) 이남으로는 신기루(蜃氣樓)가 하늘에 닿아 있어, 안계(眼界)가 이미 다하여 더 이상은 분명하게 볼 수가 없었다. 극기로 하여금 알 만한 것을 기록하게 한 것이 이상과 같다. 마침내 서로 돌아보고 자축하여 말하기를, “예로부터 이 봉우리를 오른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어찌 오늘날 우리들만큼 유쾌한 구경이야 했겠는가.” 하고는, 누(壘)를 내려와 돌에 걸터앉아서 술 두어 잔을 마시고 나니, 해가 이미 정오(亭午)였다. 여기에서 영신사(靈神寺), 좌고대(坐高臺)를 바라보니, 아직도 멀리 보였다. 속히 석문(石門)을 꿰어 내려와 중산(中山 현 제석봉)을 올라가 보니 이 또한 토봉(土峯)이었다. 군인(郡人)들이 엄천(嚴川)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은 북쪽에 있는 제이봉(第二峯 현 중봉)을 중산이라 하는데, 마천(馬川)을 경유하여 오르는 자들은 증봉(甑峯 현 시루봉)을 제일봉으로 삼고 이 봉우리를 제이봉으로 삼기 때문에 그들 또한 이것을 중산이라 일컫는다. 여기서부터는 모두 산등성이를 따라서 가는데, 그 중간에 기이한 봉우리가 10여 개나 있어 모두 올라서 사방 경치를 바라볼 만하기는 상봉(上峯)과 서로 비슷했으나 아무런 명칭이 없었다. 그러자 극기가 말하기를, “선생께서 이름을 지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고증할 수 없는 일은 믿어주지 않음에야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이 곳 숲에는 마가목(馬價木)이 많은데, 지팡이를 만들 만하므로, 종자(從者)를 시켜 매끄럽고 곧은 것을 골라서 취하게 하였더니, 잠깐 사이에 한 다발을 취하였다. + 시루봉과 세석을 지나며 증봉(甑峯 현 시루봉)을 거쳐 진펄의 평원에(세석고원) 다다르니, 좁은 길에 서 있는 단풍나무가 마치 문설주와 문지방의 형상으로 굽어 있었으므로, 그 곳으로 나가는 사람은 모두 등을 구부리지 않고 갈 수 있었다. 이 평원은 산의 등성이에 있는데, 5, 6리쯤 넓게 탁 트인 데에 숲이 무성하고 샘물이 돌아 흐르므로, 사람이 농사지어 먹고 살 만하였다. 시냇가에는 두어 칸 되는 초막[草廠]이 있는데, 빙 둘러 섶으로 울짱을 쳤고 온돌[土坑]도 놓아져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내상군(內廂軍)이 매[鷹]를 포획하는 막사였다. 내가 영랑재(永郞岾)로부터 이 곳에 이르는 동안, 강만(岡巒)의 곳곳에 매 포획하는 도구 설치해 놓은 것을 본 것이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다. 아직은 가을 기운이 그리 높지 않아서 현재 매를 포획하는 사람은 없었다. 매의 무리는 운한(雲漢) 사이를 날아가는 동물이니, 그것이 어떻게 이 준절(峻絶)한 곳에 큼직한 덫을 설치해 놓고 엿보는 자가 있는 줄을 알겠는가. 그래서 미끼를 보고 그것을 탐하다가 갑자기 그물에 걸려 잡혀서 노끈에 매이게 되는 것이니, 이것으로 또한 사람을 경계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나라에 진헌(進獻)하는 것은 고작 1, 2련(連)에 불과한데, 희완(戱玩)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가난한 백성들로 하여금 밤낮으로 눈보라를 견뎌가면서 천 길 산봉우리의 꼭대기에 엎드려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인심(仁心)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다.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깎아지른 절벽이 하도 높아서 그 아래로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躑躅] 두어 떨기와 영양(羚羊)의 똥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두원곶(荳原串), 여수곶(麗水串)·섬진강(蟾津江)의 굽이굽이를 내려다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더 기관(奇觀)이었다. 해공이 여러 구렁[壑]이 모인 곳을 가리키면서 신흥사동(新興寺洞)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절도사(節度使) 이극균(李克均)이 호남(湖南)의 도적 장영기(張永己)와 여기에서 싸웠는데, 영기는 구서(狗鼠) 같은 자라서 험준한 곳을 이용했기 때문에 이공(李公) 같은 지용(智勇)으로도 그가 달아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끝내 장흥 부사(長興府使)에게로 공(功)이 돌아갔으니,6) 탄식할 일이다. 해공이 또 악양현(岳陽縣)의 북쪽을 가리키면서 청학사동(靑鶴寺洞)이라고 하였다. 아, 이것이 옛날에 이른바 신선(神仙)이 산다는 곳인가 보다. 인간의 세계와 그리 서로 멀지도 않은데, 이미수(李眉叟)는 어찌하여 이 곳을 찾다가 못 찾았던가?7) 그렇다면 호사자(好事者)가 그 이름을 사모하여 절을 짓고서 그 이름을 기록한 것인가. 해공이 또 그 동쪽을 가리키면서 쌍계사동(雙溪寺洞)이라고 하였다. 최고운(崔孤雲)이 일찍이 이 곳에서 노닐었으므로 각석(刻石)이 남아 있다. 고운은 세속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기개(氣槪)를 지닌데다 난세(亂世)를 만났으므로, 중국(中國)에서 불우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동토(東土)에서도 용납되지 않아서, 마침내 정의롭게 속세 밖에 은둔함으로써 깊고 그윽한 계산(溪山)의 지경은 모두 그가 유력(遊歷)한 곳이었으니, 세상에서 그를 신선이라 칭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겠다. + 영신대에서 영신사(靈神寺)에서 자는데 여기는 중이 한 사람뿐이었고, 절의 북쪽 비탈에는 석가섭(石迦葉) 일구(一軀)가 있었다. 세조 대왕(世祖大王) 때에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香)을 내렸다. 그 석가섭의 목[項]에도 이지러진 곳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倭寇)가 찍은 자국이라고 했다. 아, 왜인은 참으로 구적(寇賊)이로다. 산 사람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는데, 성모와 가섭의 머리까지 또 단참(斷斬)의 화를 입었으니, 어찌 비록 아무런 감각이 없는 돌일지라도 인형(人形)을 닮은 때문에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오른쪽 팔뚝에는 마치 불에 탄 듯한 흉터가 있는데, 이 또한 “겁화(劫火)에 불탄 것인데 조금만 더 타면 미륵(彌勒)의 세대가 된다.”고 한다.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황괴(荒怪)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내세(來世)의 이익(利益)을 추구하는 자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어 전포(錢布)를 보시(布施)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가섭전(迦葉殿)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坐高臺)라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었고 위는 뾰족한 데다 꼭대기에 방석(方石)이 얹혀져서 그 넓이가 겨우 한 자[尺] 정도였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禮佛)을 하는 자가 있으면 증과(證果)8)를 얻는다고 한다. 이 때 종자(從者)인 옥곤(玉崑)과 염정(廉丁)은 능란히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이 무리들은 매우 어리석어서 거의 숙맥(菽麥)도 구분하지 못하는데도 능히 스스로 이와 같이 목숨을 내거니, 부도(浮屠)가 백성을 잘 속일 수 있음을 여기에서 알 수 있겠다. 법당(法堂)에는 몽산화상(蒙山和尙)의 그림 족자가 있는데, 그 위에 쓴 찬(贊)에, 두타 제일이 頭陀第一 이것이 바로 두수인데 是爲 抖擻 밖으론 이미 속세를 멀리하였고 外已遠塵 안으론 이미 마음의 때를 벗었네 內已離垢 앞서 도를 깨치었고 得道居先 뒤에는 적멸에 들었으니 入滅於後 설의와 계산이 雪衣鷄山 천추에 썩지 않고 전하리라 千秋不朽 하였고, 그 곁의 인장(印章)은 청지(淸之)라는 소전(小篆)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비해당(匪懈堂)의 삼절(三絶)9)이었다. 그 동쪽 섬돌 아래에는 영계(靈溪)가 있고, 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玉泉)이 있는데, 물맛이 매우 좋아서 이것으로 차를 달인다면 중령(中泠), 혜산(惠山)10)도 아마 이보다 낫지는 못할 듯하였다. 샘의 서쪽에는 무너진 절이 우뚝하게 서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옛 영신사이다. 그 서북쪽으로 높은 봉우리에는 조그마한 탑(塔)이 있는데, 그 돌의 결이 아주 섬세하고 매끄러웠다. 이 또한 왜구에 의해 넘어졌던 것을 뒤에 다시 쌓고 그 중심에 철(鐵)을 꿰어놓았는데, 두어 층[數層]은 유실되었다. + 직지를 거쳐 실덕리로 하산. 그리고 등구재를 넘어 관아로 돌아옴 임오일(18일)에는 일찍 일어나서 문을 열고 보니, 섬진강(蟾津江)에 조수(潮水)가 창일하였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바로 남기(嵐氣)가 편평하게 펼쳐 있는 것이었다. 밥을 먹고 나서는 절의 서북쪽을 따라 내려와 고개 위에서 쉬면서 반야봉을 바라보니, 대략 60여 리쯤 되었다. 이제는 두 발이 다 부르트고 근력이 이미 다하여, 아무리 가서 구경하고 싶어도 강행(强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름길로 직지봉(直旨峯)을 경유하여 내려오는데, 길이 갈수록 가팔라지므로, 나무 뿌리를 부여잡고 돌 모서리를 디디며 가는데 수십 리의 길이 모두 이와 같았다. 여기서 동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우러러보니, 천왕봉이 바로 지척에 있는 것 같았다. 여기에는 대나무 끝에 간혹 열매가 있었는데 모두 사람들이 채취하여 갔다. 소나무가 큰 것은 백 아름[百圍]도 될 만한데, 깊은 골짜기에 즐비하게 서 있었으니, 이것은 모두 평소에 보지 못한 것들이다. 이미 높은 기슭을 내려와서 보니, 두 구렁의 물이 합한 곳에 그 물소리가 대단히 뿜어 나와서 임록(林麓)을 진동시키고, 백 척(百尺)이나 깊은 맑은 못에는 고기들이 자유로이 헤엄쳐 놀았다. 우리 네 사람은 여기서 손에 물을 움켜 양치질을 하고 나서 비탈길을 따라 지팡이를 끌고 가니, 매우 즐거웠다. 골짜기 어귀에는 야묘(野廟)가 있었는데, 복부(僕夫)가 말[馬]을 데리고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옷을 갈아입고 말에 올라 실택리(實宅里 현 실덕부락)에 당도하니, 부로(父老) 두어 사람이 길 아래서 맞이하여 절하면서 말하기를, “사군(使君)께서 산을 유람하시는 동안 아무 탈도 없었으니, 감히 하례 드립니다.” 하므로, 나는 비로소 백성들이 내가 유람하느라 일을 폐했다 하여 나를 허물하지 않은 것을 보고 마음이 기뻤다. 해공은 군자사(君子寺)로 가고, 법종은 묘정사(妙貞寺)로 가고, 태허, 극기, 백원은 용유담(龍游潭)으로 놀러 가고, 나는 등귀재(登龜岾 현 오도재)를 넘어서 곧장 군재(郡齋)로 돌아왔는데, 나가 노닌 지 겨우 5일 만에 가슴 속과 용모가 확 트이고 조용해짐을 갑자기 깨닫게 되어, 비록 처자(妻子)나 이서(吏胥)들이 나를 볼 적에도 역시 전일과 다르게 보일 것 같았다. 아, 두류산처럼 높고 웅장하고 뛰어난 산이 중원(中原)의 땅에 있었더라면 반드시 숭산(嵩山), 태산(泰山)보다 앞서 천자(天子)가 올라가 금니(金泥)를 입힌 옥첩 옥검(玉牒玉檢)11)을 봉(封)하여 상제(上帝)에게 승중(升中)12)하였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의당 무이산(武夷山), 형악(衡嶽)에 비유되어서, 저 박아(博雅)하기로는 한창려(韓昌黎), 주회암(朱晦庵), 채서산(蔡西山) 같은 이나, 수련(修煉)을 한 이로는 손흥공(孫興公), 여동빈(呂洞賓), 백옥섬(白玉蟾)13) 같은 이들이 서로 연달아 이 산 속에서 배회하며 서식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유독 군적(軍籍)을 도피하여 부처[佛]를 배운다는 용렬한 사내나 도망간 천인들의 소굴이 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 무리가 비록 한 차례나마 등람(登覽)하여 겨우 평소의 소원에 보답하기는 했으나, 세속의 직무에 급급하여 감히 청학동을 찾고 오대(五臺)를 유람하여 그윽하고 기괴함을 두루 탐토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어찌 이 산의 불우함이겠는가. 자미(子美)의 방장삼한(方丈三韓)의 시구14)를 길이 읊조리니, 나도 모르게 정신이 날아오른다. 임진년 중추(仲秋) 5일 후에 쓰노라. [註 01] 불교(佛敎)에서 인도(印度)의 우기(雨期)에 해당하는 음력 4월 15일부터 90일 동안 승려가 한 곳에 조용히 있으면서 불도(佛道)를 닦는 것을 말한다. [註 02] 불제자(佛弟子)가 음력 7월 보름날에 선조(先祖) 및 현세(現世) 부모(父母)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음식을 그릇에 담아 시방(十方)의 불승(佛僧)들에게 베푸는 불사(佛事)를 말한다. [註 03] 춘추 시대에 양자거(陽子居)라는 사람이 노자(老子)로부터 “거만해서는 안 되고 항상 남의 눈에 부족한 것처럼 보이는 훌륭한 덕을 지녀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거만한 태도를 고친 결과, 처음에는 그가 여관에서 묵을 적에 동숙자들이 좌석을 피해 달아나고, 불쬐는 자들이 부뚜막을 피해 달아났었는데, 그가 태도를 바꾼 뒤에는 동숙자들이 그에게 아무 어려움 없이 서로 좌석을 다툴 정도로 친숙해졌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莊子 寓言》 [註 04] 선니는 공자(孔子)를 이른 말인데, 공자가 일찍이 동산(東山)에 올라서는 노(魯)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泰山)에 올라서는 천하(天下)를 작게 여겼다는 데서 온 말이다.《孟子 盡心上》 [註 05] 한자는 한유(韓愈)를 이른 말인데, 그가 일찍이 형산(衡山)에 올라 형악묘(衡嶽廟)에 배알하고 지은 시에 “내가 온 것이 정히 가을비의 절기를 만났는지라, 흐린 기운 깜깜하고 맑은 바람 불지 않아서, 묵묵히 기도하매 마치 응험이 있는 듯하니 어찌 정직함이 신명을 감동시킨 게 아니리오. 잠깐 뒤에 흐린 기운 걷히어 뭇 봉우리 나오자, 푸른 하늘 떠받치는 우뚝한 봉우릴 쳐다보노라.” 한 데서 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三》 [註 06]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의하면, 장영기(張永奇)란 도적이 전라도에서 일어나 그 무리들이 날로 퍼져가고 있으므로, 조정에서 허종(許琮)을 절도사(節度使)로 삼아 그를 체포하게 하자, 도적들은 바다 가운데 섬으로 도망쳐 있으면서 틈을 타서 가끔 노략질을 하였는데, 그들이 뒤에 장흥(長興)으로 들어갔다는 정보를 듣고는 허종이 장흥 부사 김순신(金舜臣)에게 격문(檄文)을 보내어 그를 잡도록 하였으나, 그 도적이 오히려 김순신을 쏘아 넘어뜨리고 도망치므로, 허종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서 그 도적을 사로잡아 참수(斬首)했다는 사실이 있으니, 같은 사건인 듯하나 절도사의 이름 등 서로 다른 점이 있어 자세하지 않다. [註 07] 이미수는 바로 고려 때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이인로(李仁老)를 가리킴. 미수는 그의 호이다. 이인로가 일찍이 속세(俗世)를 떠날 뜻이 있어 지리산(智異山)에 들어가 신선이 산다는 청학동(靑鶴洞)이란 곳을 찾으려고 했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한 바위에다가 시(詩)를 써서 남겼는데, 그 시에 “두류산 먼 곳에 저녁 구름 나지막한데, 일만 구렁 일천 바위가 회계산과 같구나. 지팡이 끌고 와서 청학동을 찾으려는데, 숲 너머서 원숭이 울음 소리만 들리네. 누대는 머나먼 삼신산에 아득하고, 이끼 끼어 네 글자 쓰인 것도 희미하여라. 묻노니 신선이 사는 곳이 그 어디런가. 떨어지는 꽃 흐르는 물이 아득하기만 하네.” 한 데서 온 말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三十》 [註 08] 불교(佛敎)의 용어로서, 즉 수행(修行)하여 온갖 번뇌(煩惱)를 끊고 불생 불멸(不生不滅)의 진리를 깨치는 것을 말한다. [註 09] 비해당은 세종(世宗)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호임. 삼절은 곧 안평대군이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뛰어났으므로 일컬은 말인데, 여기서는 특히 몽산(夢山)의 그림 족자에 대하여 그 그림과 찬(贊)과 글씨가 모두 안평대군의 작품임을 의미한 말이다. [註 10] 중령은 강소성(江蘇省) 진강현(鎭江縣)에 있는 천명(泉名)인데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고, 혜산은 강소성 무석현(無錫縣)에 있는 산명인데 역시 이 곳의 샘물 또한 맛 좋기로 유명하였다. [註 11] 옥첩은 천자가 하늘에 제사 지낼 때의 제문(祭文)을 기록한 서찰(書札)을 말하고, 옥검은 옥(玉)으로 제조한 서함(書函) 위에 제서(題書)한 것을 말한다. [註 12] 하늘에 제사하여 일의 성공(成功)을 고(告)하는 것을 말한다. [註 13] 손흥공은 진(晉) 나라 때의 은사(隱士) 손작(孫綽)을 가리킴. 흥공은 그의 자이다. 여동빈(呂洞賓)은 당(唐) 나라 때의 도사(道士)인데, 세속에서는 그를 팔선(八仙)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컫는다. 백옥섬은 송(宋) 나라 때 무이산(武夷山)에 은거한 도사로서, 그의 본명은 갈장경(葛長庚)이었는데, 뒤에 백씨(白氏)의 양자(養子)가 되면서 이름까지 옥섬(玉蟾)으로 바꾸었다. [註 14] 자미는 두보(杜甫)의 자임. 두보의 봉증태상장경기시(奉贈太常張卿垍詩)에 “방장산은 삼한의 밖에 있고 곤륜산은 만국의 서쪽에 있도다.[方丈三韓外 崑崙萬國西]” 한 데서 온 말인데, 여기서 방장산이란 곧 조선의 지리산(智異山)에 해당하므로 이른 말이다.《杜少陵集》
    • 고을이야기
    • 함양
    2024-06-18
  • 현윤애 작가와의 대화 (구례, 제주도의 다른 풍경, 비슷한 삶을 그리다)
    구례와 제주도에서 만난 사람과 자연을 그리는 현윤애 작가와 대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구례 화양마을 '갤러리 척'에서는 현윤애 작가의 여행 그림 노트 '다정히 엿보다' 전시회가 다음과 같이 열립니다. 2024.6.14 ~ 6.27 / 10:00~18:00 주최/주관 갤러리 척 전시기획 로컬리티 00:00 인트로 01:41 작가소개 - 구례 생활 11년차 '갤러리 척'운영 - 갤러리 척 12번째 전시회 03:15 전시회의 주제 '길' - 제주도 올레길, 구례의 길에서 걸으며 만난 사람과 자연 04:18 작품 이야기 - 구례에서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 - 생활 주변이 그릴 것 천지 05:58 갤러리를 열면서 꿈꾸었던 것 - 오늘 같은 자리를 희망 - 주변 사람들이 그림을 가깝게 느끼게 해주는 자리 06:41 구례를 그리다 - 그릴 소재가 많은 구례 - 구례 오일장 이야기 - 구례의 가게들, 가야식당 이야기 18:51 구례와 제주도를 그림으로 담다 - 2024년 1월에 제주에서 올레길 그림 전시회 개최 - 다정히 엿보다 다른 길, 닮은 삶 - 제주의 길과 구례의 길은 어떻게 닮았고 다른지 23:07 왜 올레길인가 - 1년에 걸쳐 제주 올레길 완주 27:30 작품 소개 - 올레길 - 가장 추천하고 싶은 올레길 코스 31:31 작품 소개 - 구례의 길 - 구례의 아름다운 골목길, 돌담길 - 추천하고 싶은 구례의 길 35:20 작품소개 -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 - 최순호 선생님 이야기 - 수고로움을 자처한 0.03mm 점묘화 40:43 작품 활동을 계속 하는 동력 43:17 다정히 엿보다 44:10 책 소개 - 저 너머엔 다른 꽃이 필까 49:12 버킷리스트 - 우쿨렐레 배우기 - 전 국민이 악기 하나씩 다룰 수 있는 복지국가 - 노회찬 53:30 소통의 공간 우리 마을 갤러리 56:07 작품 가격은 어떻게 정해지나요 +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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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례
    2024-06-15
  • [6월 20일] 궁금해 지리산- 함양 편
    6월 20일, 지리산을 걷고 배우고 이야기하는 '궁금해? 지리산' 두번째 프로그램, 함양 편이 진행된다. 이번 '궁금해 지리산, 함양 편'은 <김종직의 유두류록 탐구>의 저자, 류정자님과 함께 김종직 선생의 지리산 탐방로를 걷는다. 류정자 님은 600여년 전 함양 군수였던 김종직 선생이 두류산(지리산)을 유람하고 돌아와 남긴 <유두류록(游頭流錄)>을 십수년간 문헌고증과 산길 답사를 통해 선생의 지리산 탐방로를 복원하고 탐구해왔다. 지리산의 알려진 탐방로가 아닌 옛 선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지리산의 옛 산길과 지명을 배우고 옛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사랑을 만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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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양
    2024-06-11
  • [6월 29일] 궁금해, 산청 산들강 3 - 고운동에서 나를 내려놓다
    궁금해, 산청 산들강 3 고운동에서 나를 내려놓다 일정: 2024년 6월 29일 (토) 13:00~17:00 모이는곳: 고운동천 (산청군 시천면 반천리 639-3) 걷는 길 : 고운동~등잔봉 길안내, 숲해설 : 최세현 준비물 : 물과 새참, 참가비 5000원+@ 신청 : 이해성 010-9117-4285 케이블카 없는 지리산 실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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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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