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0-05(수)

지리산정보
Home >  지리산정보

실시간뉴스
  • 구례 성삼재 버스 운행 재개
    5월27일 부터 구례 성삼재구간 버스 운행이 다시 시작 되었다. 운행 중지 되었던 성삼재행 버스가 다시 운행 하기 시작했다. 구례 터미널 첫 버스는 2시40분 성삼재발 마지막 버스는 5시30 분이다. 운행이 중지되어 불편을 격던 등산객들의 불편을 해소 할 수 있게 되었다. 운행시작일 2022.5.27 부터 공영버스터미널 061-780-2730 구례여객운수사 061-782-5151
    • 지리산정보
    • 숙박 교통
    2022-05-31
  • 하동군 소유 땅과 조계종의 나대지를 바꾼다고?
    하동군 소유 땅과 조계종의 나대지를 바꾼다고? 하동군이 소유하고 있는 화개면 탑리 742번지에는 한 켠에는 조영남갤러리가 있고 한 켠에는 통일신라삼층석탑이 있다. 이 땅을대한불교 조계종이 소유하고 있는 하동읍 알프스복지회관 옆 나대지와 맞교환하려는 움직임이 확인되었다. 최근 해당 토지와 건물에 대해 감정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조영남 갤러리 옆의 삼층석탑 하동군에서는 알프스복지관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주차장이 필요하고, 쌍계사에서는 신라시대 삼층석탑이 있는 조영남갤러리 부지를 여러모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맞교환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화재와 공공건물을 민간에 넘겨주는 것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일인지, 공유재산의 관리 원칙에 부합하는 일인지 신중히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 지리산정보
    2022-05-03
  • 지리산 성삼재 버스 시간표
    • 지리산정보
    2021-08-20

실시간 지리산정보 기사

  • 2000년대 초 지리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연대를 위해 애쓰신 분들
    그 당시는 카메라로 인물을 찍을 때는 거부하는 사례가 참 많았습니다. 그 나마 열린 사고를 가진 분들이 여서 편히 지리산생명연대 회의 하는 모습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대략 20여년간 컴 속에서 잠자다가 지리산인을 통해 공개 합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우리마을
    • 남원
    2022-09-18
  •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나는 옛이야기3-견벽청야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나는 옛이야기4-견벽청야 견벽청야 堅壁淸野 굳은 견, 바람 벽, 맑을 청, 들 야 말 그대로 하면, 성벽을 굳게 하고 곡식을 모조리 걷어 들인다는 뜻이다.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해온 방어전술의 하나이다. 해자(垓子)를 깊이 파고 성벽의 수비를 견고히 하는 한편, 들에 있는 모든 곡식을 성내로 걷어 들여 공격해 오는 적의 군량미 조달에 타격을 입히는 전법으로, 우세한 적에 대한 수단으로 흔히 약자가 사용한다. 삼국지의 조조와 여포가 싸울 때 조조가 사용한 전법이기도 하고, 청태조 누루하치와 원숭환의 전투에서, 나폴레옹과 러시아의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대패 당한 전법이기도, 그리고 한국전쟁 때 11사단장 최덕신 준장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펼친 작전이기도 하다. 이번 이야기는 지리산둘레길 동강-수철 구간을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에 얽힌 이야기이다. 또한 이 이야기는 이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거창군 신원면에 있는 ‘거창사건 추모공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즉, 두 사건은 같은 사건이다.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기구의 폭력성은 국가의 본질적 요소이다. 그게 인민(people의 한국말은 인민이다. 이 말을 좌익들이 사용했기에 80년대엔 민중이란 말을 대체용어로 사용했다)을 법과 제도에 종속시키는 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런 국가의 폭력성이 깔끔하게 드러날 때가 전쟁 혹은 내란의 시기이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53년 남북전쟁이 휴전되는 9년 동안 한반도의 남과 북에선 새로운 국가를 성립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폭력이 일어난다. 그 정점이 전체 인구 10%인 300만명이 사망한 남북전쟁이다. 지리산둘레길에서 문득 스쳐 지나가는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은 지금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국가의 맨 얼굴을 직시할 수 있는, 아직, 살아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진하게 된 유엔군은 후방 안정을 목적으로 11사단을 창설한다. 11사단의 주 임무는 지리산 등 산악지대에 잔존해 있는 인민군과 빨치산 토벌이었다 이를 작전 명령 형태로 공식화시킨 것이 '적의 손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는 작명5호였다. 이는 거창·함양·산청 민간인 학살이 일개 하급 지휘관의 자의적인 판단이 아니라 사단장, 국방부장관,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지휘명령체계를 갖는 국가으이 공식 행위라는 것을 말한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당시 국가의 시선은 매우 경악스럽다. (지리산 일대) 약 7할 이상이 공비에게 협조하여 식량보급 및 정보를 제공하는 고로 이적행위로 인하야 아군작전에 지장을 초래케 하며 현재 소각당한 각 부락은 주간에는 대한민국이며 야간에는 인민공화국이라 아니할 수 없는데, 대한민국정부에 납세 혹은 국민된 의무는 전혀 없음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라 간주할 수 없음으로 지리산토벌작전에 적의 이용당하는 인원 및 가옥을 파괴하지 않으면 작전수행을 도저히 기할 수 없는 고로 불가분의 조치라고 생각함. - 헌병대 보고서, "지리산 토벌작전으로 인한 민심동요에 대한 조사복명지건" 거창군 신원면 관내는 완전한 인민공화국이며 공비에게 일시적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협조 충성을 다하고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특히 신원면 5개리 주민은 공비화되어 있었음으로 이적행위자로 칭할 바 아니라 완전한 적으로 간주할 수 있는 바. 차를 사살하였음은 작전상 당연한 조치로 인정됨. 숙청당한 지대의 거주민은 추호도 개전의 여지 전무한 자이며 금후 공비의 완전한 소탕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해당지대의 가옥 및 거주민을 처분하지 않는 한 금후 공비세력이 강화될 것이므로 당연한 처사로 인정됨 -거창경찰서 보고서(1951. 3. 8) 국민당 중앙군 출신의 11사단장 최덕신이 중국의 전통전술인 ‘견벽청야’라는 이름을 언급했지만, 실제로 연대장, 대대장 등 일본군·만주군 출신의 산하부대 지휘관들은 일본군의 삼광작전이나 초토화작전이 훨씬 더 익숙한 개념이었다. 이들은 이미 해방 후에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 그리고 지리산에서의 반란군 토벌작전에서 초토화 작전을 편 바 있다. 11사단은 빨치산 토벌작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산청·함양·거창에서 일본의 삼광작전을 그대로 진행하였다. 1951년 2월 2일 11사단 9연대는 경남 진주에서 함양으로 이동하였다. 9연대 3대대는 작전회의 지침에 따라 주어진 작전지역으로 이동하여 토벌작전을 시작하였다. 한동석 3대대장은 대대병력과 경찰, 청년의용대 병력 1개중대를 이끌고 2월 7일 10시경 신원면에 도착하였다. 애초 정보로는 신원면에 약 400~500명의 공비가 잠복하고 있다고 했으나 3대대가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단 한 명의 공비도 없었다. 단지 부녀자와 아이들, 노인들밖에 없었다. 이에 3대대는 신원면에 경찰과 청년대 병력 약 200명을 주둔시킨 다음, 산청 쪽으로 진격해갔다. 이때부터 지리산 주변의 산청·함양·거창 20여개 산골마을에서 1,400여명이 학살되는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1951년 2월 8일부터 11일까지 나흘 동안 9연대 3대대는 산청군 금서면, 함양군 유림면, 거창군 신원면에서 대규모 학살 사건을 자행했다. 2월 8일 아침, 지리산 줄기에 자리 잡은 산청군 금서면과 함양군 유림면 관내 10여개 자연부락의 날씨는 푸근했다고 전해진다. 아침 7시쯤 9연대 3대대 1중대 병력이 가현부락에 들이쳤고, 그들은 집집마다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40여 가구가 사는 마을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1중대는 놀라서 뛰쳐나온 마을사람들을 마을 앞 속칭 산제당 골짜기로 끌고 가서 집중사격을 가해 사살했다. 학살을 마친 부대는 가현부락의 소와 돼지들을 몰고 바로 아래 부락인 방곡마을로 향했다. 방곡에는 이미 2중대가 학살을 벌이고 있었다. 3대대 1중대는 2중대의 학살장면을 구경하면서 아래 점촌마을로 향했다. 당시 점촌마을에는 21가구 60명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 모두 부락 앞 논에서 총살당했다. 학살은 계속되었는데 그들은 학살 방식을 바꾸었다. 마을을 하나씩 초토화시키는데 시간이 너무 걸린다고 판단한 3대대는 아예 여러 마을주민들 한 장소에 집합시켜 학살한 것이다. 함양군 유림면 손곡리의 손곡·지곡마을, 산청군 금서면 자혜리의 상촌·하촌마을, 화계리의 화계·화산·주상마을 등 7개 마을 주민들은 군인들의 총부리에 떠밀려 9시부터 유림면 서주리 동천강변에 모였다. 3대대 군인들은 장정 9명을 동원해 동천강변에 교실 넓이만한 구덩이를 두 군데 파게 했다. 주민들의 무덤이 될 곳이었다. 오후 4시쯤 300여명의 주민들을 두 개의 구덩이 속으로 몰아넣고 수류탄을 까넣은 뒤 기관총을 난사해 학살했다. 공비토벌 전공을 올리듯 박격포까지 쏘았다. 이렇게 해서 2월 8일 10시간만에 이 일대 주민 705명이 학살되었다. 2월 9일 아침 3대대는 산청군 생초국민학교를 출발해 거창 방면으로 향했다. 부대는 2월 9일 밤을 산속에서 숙영한 다음, 2월 10일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 청연마을에 도착했다. 70여명의 마을주민들이 뒷산으로 끌려가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전원 살해되었다. 이날 오후 3대대 병력은 인근 와룡리와 대현리에서 주민들을 마을 앞 탄량 골짜기로 끌고가 학살했다. 탄량골에서 주민들을 학살한 3대대는 와룡리·과정리 일대의 주민들을 면소재의 신원국민학교로 모았다. 군은 12개 교실에 꽉 들어찬 주민 1,000여명 가운데서 현지 형사인 조용호, 박세복과 박대성 지서주임, 박영보 면장 등을 시켜 군·경 가족을 골라내게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나머지 주민들을 근처의 박산 골짜기로 끌고가 총살하였다. 이 박산골 학살 현장에서 500여명 가운데 3명이 살아남았다. 산청과 함양에서 학살된 주민의 경우 705명 가운데 10세 미만의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가 600여명에 달했다. 거창에서 학살된 719명 중 14세 미만의 어린이가 359명, 60세 이상의 노인이 59명으로 희생자의 75%가 어린이와 노약자였다. 민간인 학살사건이 알려지고, 정부와 군은 조직적인 은폐작전에 돌입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현지를 방문하는 한편, 비밀회의를 통해 경남 계엄민사부장 김종원과 특무대원 계종운, 거창경찰서 사찰계 유봉순 등에게 사건의 조작과 은폐, 왜곡을 지시하였다. 게다가 이승만 대통령은 거창사건이 외신에 대서특필되는 등 문제가 되자 “치마 속 부끄러운 곳은 외국에 내보이지 말라고 했지 않아”라며 은폐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신성모 또한 이승만의 의중을 받아들여 사건의 책임자인 최덕신에게 ‘걱정하지 말고 토벌작전을 계속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심지어 100만원의 격려금까지 내렸다. 이후 9연대는 유아사체의 처리, 경남도경과 거창경찰서는 여론단속과 반증수집, 국회의원 무마, 유족과 주민 협박 등의 역할 분담을 하며 조직적으로 은폐 활동을 벌였다. 인명피해 뿐만 아니라 가옥소각, 농우탈취, 교실방화 등 물적 피해에 대해서도 철저히 은폐했다. 그러나 이미 사건이 정치권과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더 이상 덮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3월 30일 국회는 본회의 의결을 통해 거창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국회와 내무, 법무, 국방부의 합동조사단 파견을 결정하였다. 국회조사단은 4월 3일 거창에 도착하여 신원면 현장을 향해 출발했다. 계엄사령부 민사부장 김종원은 조사단이 지나갈 길목에 공비로 위장한 군병력을 매복, 배치해 총격을 가했다. 그러나 이미 알려지기 시작한 거창사건은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5월 하순부터 거창사건에 대한 헌병사령부의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대구 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부(재판장 강영훈 준장)는 김종원 징역 3년, 오익경 무기, 한동석 징역 10년을 선고하였다. 김종대는 무죄였다. 이 재판은 결국 사건을 축소·은폐하기 위한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던 셈이다. 재판 과정에서 거창 사건의 학살 진상을 밝히는 작업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유죄를 선고받은 피고인들도 1년 후 줄줄이 특사로 풀려나 다시 군에 복귀하였다.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9연대장 오익경은 출소 후 군에 복귀해 1956년 대령으로 예편했고, 1970년대 초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0년형을 선고받은 3대대장 한동석 역시 군에 복귀하여 9사단 부관, 수도사단 군수참모, 27사단 부연대장, 육군 첩보부대 교육대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5.16 후에는 강릉·원주 시장을 거쳐 보사부 행정서기관으로 영전하는 등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살았다. 김종원의 승승장구는 더욱 놀랍다. 김종원은 군에 복귀했다가 경찰로 옮겨가 자유당 정권 시절 경찰 총수까지 거치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였다. 학살의 책임자 최덕신 준장은 제1군단장을 지낸 뒤 육군 중장으로 전역하였으며, 박정희 정권 하에서 외무부장관을 거쳐 1963년 주 서독 대사를 역임했다. 동백림 사건 당시 서독 대사로서 서독 정부의 반발을 무마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결국 실패하여 외교 문제로 비화된다. 이 때문에 한국 정부는 국제적인 항의에 직면하게 되었고, 사태 수습을 위해서 박정희는 최덕신을 해임해 버렸다. 정권에서 내쳐진 최덕신은 1976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수시로 북한을 방문하고 공개적으로 6.25 전쟁 북침설을 주장하는 등 친북 활동을 벌이다가 1986년 아예 북한으로 망명하였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고 용서받지 못할 인간이다. 세월이 많이 지났다.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의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반쪽짜리 특별법이다. 산청함양거창사건에 대한 특별법도 1996년 ‘거창사건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란 이름으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산청함양거창사건 관련자에 대한 피해보상 등에 대한 법률 개정 혹은 특별법 제정은 20여년이 넘도록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지리산둘레길을 걷다 보면, 크고 작은 뭇생명들에게서, 수억년 세월을 지내 온 돌들과 물들에게서, 천년을 버팅겨 온 절집에서, 따뜻한 위안을 받는다. 그런데, 가끔 지리산에 묻혀 있는 아픔들을 바라볼 때가 있다. 그 또한 지리산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마치며... 1951년 국가는 민간인 1424명을 학살하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는가? “읍에서부터 우리를 참 깔보는 거에요. 거창사건을 잘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논께네 아까도 내가 이야기 했지만 오죽했으면 국민투표 할 때 우리가 100%했어요. 99%가 아니라 100%라. 박정희 시대 국민투표를 몇 번 했거든요. 그걸 열람해보면 우리가 100%에요. 글을 몰라서 그렇지 절대로 우리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고” 국가는 폭력을 통해 인민에게서 ‘국민됨’의 입증을 얻어 내었다.
    • 지리산문화
    2022-09-08
  • 지리산 노고단 데크 보수작업과 정상에서 맛보는 풍경맛
    이제는 가을로 접어든 느낌입니다. 지리산 노고단은 현재 10월말경까지 노고단입구~정상 구간의 데크 보수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탐방객을 위해서 한쪽 데크씩 나눠서 작업중이라 작업이 예상보다 오래 걸리고 있는데 늦어도 10월말경까지는 완료될 듯 하다고 현장관계자분이 말씀 하셨습니다. (공사기간 : 2022년 3월 ~ 2022년 11월) 아직까지 다양한 야생화가 탐방객을 반겨주고 있고, 눈 앞에 닿을듯이 가까이 있는 반야봉부터 지리산 주능선과 무등산, 덕유산 그리고 섬진강자락의 풍경이 몇번을 빙글빙글 돌면서 보게 되는 장관입니다. 날씨도 선선해서 트래킹하기 딱 좋은 이때, 노고단으로 바람쐬러 오시길 추천드립니다. ^^
    • 지리산-인 방송국
    2022-08-30
  •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나는 옛이야기2-대전리 공양인물상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나는 옛이야기2-대전리 공양인물상 지리산둘레길 방광-산동 구간을 걷다가 만나게 되는 ‘대전리 비로자나불’ 옆에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계시는 ‘한 분’을 우리는 종종 그냥 지나치게 된다. 크기도 작고 또 얼굴부분이 깨어져 있고, 안내판에 이분에 대한 설명이 한 줄, 한 글자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무심결에 지나치는 순례객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관리하는 지자체나 문화재청에서 이분에 대해 이리도 무심할 수 있나? 오직, 마을주민들만 대전리 비로자나불과 이분에 대한 경배심을 간직하고 있다. 가면 늘 음료수와 공양간식이 가득가득하다. 예전부터 비로자나불을 미륵불이라 ‘오인’하면서 불심과 사심 가득히 공양해 온 까닭에 부처님은 코가 좀 닳아 없어지는 공덕을 배풀었지만, 이분은 옆에 계시다는 이유만으로 공양물을 아쉬움 없이 받아 오셨다. 그럼, 이분은 누구인가? 앞서 말했듯이, 남아있는 사료나 기록이 없기에, 직접 확인할 방법은 없다. 다만, 앉아 계시는 자세와 형태가 비슷한 인물상을 통해 추론해 볼 수 밖에 없다. 앉아 계시는 자세는 오른무릎을 땅에 꿇고 왼무릎은 세우고 있고, 오른손은 공손히 무릎 위에 사뿐히 올려놓고, 왼손은 무언가를 들고 계시다(물론 훼손되어있다) 어려운 말로 우슬착지(右膝着地)이다. 공경의 뜻을 표하는 인도의 예법으로 어른 앞에 물건을 놓거나 주고 받을 때, 공양할 때 하는 자세이며, 야외나 오체투지의 예를 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존경하는 자세로도 사용된다. 단서는, 우슬착지이다. 우슬착지한 공양인물상을 한번 다 모아보면, 그 안에 실마리가 있을 것이다. 그림이나 조각상(부조)으로 계시는 분을 제외하고, 독립된 환조(한 덩어리의 재료에서 물체의 모양 전부를 조각해 내는 작품)로 조성된 공양인물상은 우리나라에 모두 8분이 남아계시는데, 그중 한 분은 금강산에 계시는 관계로 실물을 확인할 수 없다 ㅠㅠ 8분의 공양인물상은 승려상과 보살상으로 구분된다. 한번 알현해보자! 우선, 시대순으로 앞선다고 판단되는 공양승려상(공양석등) 화엄사 공양석등은 그 앞에 있는 4사자 삼층석탑만 국보로 지정되었고, 논곡리 공양상도 앞의 삼층석탑만 보물로 지정되었다. 대전리 공양상도 비로자나불입상만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물론 모두 석탑과 불상과 함께 세트로 이해되어지는 유물이기에 같은 국보와 보물로 봐야 하겠다. 금강산 금장암지 공양석등 역시 앞의 석탑과 함께 북한의 국보급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었다가 국보 문화유물 제100호로 변경 지정되었다. 그리고, 공양보살상 논산 개태사의 공양보살상은 머리부분이 손실된 것을 근래에 새로 조성하면서 웬지 원래의 분위기가 좀 사라진듯하며, 극락보전에 모셔진 삼존불입상은 보물로 지정되었지만, 공양보살상은 아무런 훈장이 없다. 신복사지 공양보살상은 그 앞의 삼층석탑과 ‘따로’ 보물로 지정되어있다. 법천사지 공양보살상은 사진으로 보는 것처럼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가, 최근 조사결과 공양보살상으로 판명되었다 월정사 공양보살상은 그 앞의 팔각석탑은 국보, 공양보살상은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따로 지정된 것이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어 국보48-2호로 격상되었다. 공양보살상은 우슬착지한 자세에서 두 손을 모아 무언가를 들고 있는 형상이며,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있어, 승려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주로 고려전기에 조성되었으며, 대전리 공양상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그래서 이 분들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넘기고자 한다. 공양인물상의 시초는 화엄사 4사자 삼층석탑 앞에 있는 공양석등이라는 데는 전문가들의 이견이 없다. 다만, 조성년대와 조성이유, 인물의 성격에 대해선 여전히 논란이 가득하다. 대전리 공양상을 이해하기 위해선, 지리산둘레길을 걸어서 두어시간만 가면 볼 수 있는 화엄사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앉아 계시는 자리도 그렇고, 석탑의 양식과 아우라, 그 앞의 독특한 공양인물상이 받들고 있는 석등....누구라도 그 앞에 서면, 가슴 설레이는 감동을 받게 된다. 효대(孝臺)라고 안내판에 설명되어 있고, 화엄사의 홈페이지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화엄사 창건설화에 나오는 연기조사가 그 어머니에게 차를 공양하는, 효와 불(佛)이 만나는 전래없는 스토리와 조각품이라는 게, 현재 정설로 여겨진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효대라는 명칭은 고려 대각국사 의천의 시에 처음(남아있는 기록) 등장한다. 그때가 고려초 11세기말경이다. 그러나, 연기조사의 화엄사 창건설화는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없었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유교의 효사상이 강조되어지면서, ‘추강집’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을 통해 재해석된 것이다. 화엄사의 4사자 삼층석탑과 공양석등은 조성될 당시인 통일신라말에는 ‘효’를 중점에 두고 만들어지지 않았으며, 연기조사의 창건설화와도 관련이 없었다. 이는 화엄사의 삼층석탑과 공양석등이 인근의 논곡리 공양상과 대전리 공양상, 그리고 멀리 금강산으로 그 조형양식이 퍼져나간 것을 보면 납득할 수 있다. 탑과 공양상을 조성하는 것이 당시 국가적(혹은 지방권력)인 사업인데, 불교적 교리와 부처에 대한 공경이 우선인 시대에 ‘효’를 모티브로 하는 조성사업이 많은 곳에서 진행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혹여 그렇다면, 논곡리와 대전리, 금강산 금장사에서도 연기조사 설화와 같은 ‘효’관련 이야기가 있어야 하는데, 전혀 전해지는 바가 없다. 그렇다면, 이런 독특한 양식의 석탑과 공양석등이 만들어진 연유는 무엇일까? 화엄사 4사자 석탑과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석탑에서 출발해 보자. 유구한 역사를 가진 4사자 석탑은 초기에는 사자가 기단석에 배치되거나 탑신부에 있다가, 점차로 탑신부를 머리로 받드는 모양으로 변해간다. 남아있는 4사자 석탑 중에서 가장 명확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사자빈신사지(獅子頻迅寺址)’ 석탑에서 실마리를 찾아보자. 절도 사라지고, 문헌기록도 없는 절터에 탑만이 하나 덩그라니 남아있고, 그런데 다행히 탑 기단부에 명문(조탑 연기문)이 새겨져 있어, 탑을 세운 년도와 이유, 그리고 절의 이름을 알게해준다. 고려 현종 13년(1022년)이라는 정확한 조성년도와 ‘사자빈신사’라는 절 이름이 표기되어있다. 이름도 생소한 ‘사자빈신사’라는 절 이름에 주목해 보자. 사자빈신(獅子頻迅)이라는 말은 화엄경 입법계품에 ‘세존이 모든 보살들을 여래의 사자빈신삼매에 들어가게 하려고 미간백호(부처님의 미간에 있는 흰털)로부터 큰 광명을 놓는다’라는 구절에서 나온다. ‘빈신’이라는 말은 인도어 ‘비실름다’에서 온 말이며, ‘하품을 한 상태’를 의미한다. 사자가 하품하는 것을 포효하는 것으로 해석해 ‘신음소리’라는 뜻의 ‘빈신’으로 쓴 것이다. 사자를 탑 사면에 내세운 것도 사자빈신의 경지를 시각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삼매(三昧)는 어떠한 생각이나 감정도 마음의 평온을 깨뜨리지 않는 집중 상태, 곧 선정에 든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사자빈신삼매’란 사자의 포효처럼, 어떠한 두려움도 없고 걸림이 없는 선정의 상태를 말하며, 부처께서 이러한 삼매의 경지를 모든 보살들과 중생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이끄시는 것을 말한다. 아마도, 절 이름답게 구층탑도 빈신삼매에 드신 부처님과 화엄경의 한 구절을 조형물로 옮겨놓은 게 분명할게다. 석탑에 사자가 등장할 때, 처음엔 기단부 옆에, 혹은 탑신부 옆에 배치되다가, 점차 사자가 탑신을 떠받드는 형상으로 변모했을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흔히, 사자가 떠받드는 형상으로 인해 생성된 공간과 그 안에 놓여진 인물상에 주목한다. 물론, 그 공간과 인물상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지점은 그렇게 공경스럽게 떠받드는 ‘탑신’에 있다. 화엄경 세계의 주불, 사자빈신삼매에 들어가신 ‘비로자나불’이 바로 그 탑신이다. 그렇다면 탑 안에 있는 인물은 누구인가? 사자빈신삼매가 등장하는 화엄경 입법계품을 보면 답이 나온다. 입법계품은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을 찾아 해탈에 이르는 진리의 길을 찾아가는 구도의 행각을 기록한 내용이며, 이 중에 25번째로 찾아가는 선지식이 빈신비구니이다. 그렇다, 탑 안에 있는 인물은 ‘빈신비구니’이다. 그래서 탑 안의 인물상이 ‘여인’의 형상을 띄게 되었고, 연기조사의 어머니라는 오해를 낳게 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탑 앞에 우슬착지하고 공양하는 모습을 띤 인물은 ‘선재동자’이다. 뜬금없이 ‘천지창조’와 ‘수태고지’를 등장시켜 보았다. 서양의 성당이나 궁전, 귀족들의 애장품 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성경의 내용들이다. 성경의 내용 중 주요한 장면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이유는, 종교적 신념을 나타내고 또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 믿음의 표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백성’들이 글을 모르기에 성경의 내용을 쉬운 그림과 조각으로 설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상과 불화, 그리고 절집의 많은 문화재도 불경의 한 대목을 말하고 있다. 참, ‘수태고지(受胎告知)‘는 말이 너무 어렵다. 성처녀인 마리아가 예수를 임신했다는 것을 천사 가브리엘이 하늘에서 내려와 알려주는 성경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이다. 즉, 임신사실(수태)을 알려주는(고지) 장면인데, 한문이 너무 어려워 제목을 보고 그 뜻을 알기는 쉽지 않다. 그렇게 보면 성경이나 불경이나 어려운 한문을 한글로 풀어 해석해 주면 좋으련만..... 흔히 효대라 잘못 알려진 화엄사의 4사자 삼층석탑과 공양석등은, 신라말 불교의 핵심교리인 ‘화엄경’의 한 구절을, 빈신삼매에 든 비로자나불과 선지식을 찾는 선재동자와 빈신비구니를 표현한 것이다. “세존께서 혼자만 사지빈신삼매에 드는 것이 아니라 법회에 모인 보살들도 사자빈신삼매에 들도록 미간의 흰 털로부터 ‘삼세의 법계를 두루 비추는 문(普照三世法界門)’이라는 큰 광명을 비춘다. 이 큰 광명을 통해 보살들도 삼매에 들게 되거니와 이를 통해 모든 중생의 교화도 쉬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 화엄경의 화엄사상을 대표하는 화엄사라는 절집에, 그것도 그 절의 가장 높고 핵심적인 자리에, ‘효’를 모티브한 효대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화엄세계의 주불과 그 부처님의 진심가득한 중생사랑을 표현할 것인가? 당신이라면, 어떤 것을 표현하겠는가...... 대전리 공양상 이야기를 하다가 너무 많이 삼천포로 빠졌다. 너무 많이 훼손된 대전리 공양상의 원형은 어떤 모습일까? 가까이에 있는 화엄사 공양석등이 쉽게 유추해 볼 수 있는 원형일게다. 공양인물상이 받들고 있는 석등을 세 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다. 그런데, 해체 수리를 하면서 머리 위의 옥개석과 기둥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옥개석의 홈과 기둥이 맞지 않기도 하고, 세 개의 기둥 굵기가 다르다는 점에서, 공양석등 조성 이후 추가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금장암지 4사자 삼층석탑과 공양석등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공양상의 머리로만 석등을 받치고 있는 사진이고, 두 번째는 공양상의 몸통과 머리와 석등이 분리된 사진이다. 무거운 석등을 머리로만 받치게 만든 조형물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균형이 흐트러지고, 세월의 힘에 못 이겨 석등이 무너진 것이다. 화엄사 공양석등도 이런 현상이 발생했을 것이며, 다시 세우기를 반복하다, 급기야 옥개석과 기둥을 세워서 석등을 받치도록 한 것이다. 공양상의 머리 위에 상대석과 석등만 있었던 원형에서,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해 머리와 상대석 사이에 옥개석을 새로 만들고 기둥을 세운 것이다. 입면도를 보면, 금장암지 석등과 화엄사 석등의 차이점, 원형에서 추가한 부분이 무엇인지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대전리 공양상의 주변에도 석등을 받쳤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둥 2개가 남아있다. 기둥의 크기와 생김새가 화엄사 공양석등과 얼추 비슷하다. 아마도, 대전리 공양상은 화엄사 공양석등 이후에 세워졌으며, 화엄사의 고충(석등이 무너짐)을 가까이서 보아왔고, 또 화엄사 공양석등에 기둥을 세우는 추후 작업도 지켜 본 이후, 조성할 때부터 기둥을 세우지 않았을까 유추해본다. 그렇다면, 대전리 공양상도 머리 위에는 석등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다만, 주변에서도, 발굴조사 과정에서도 삼층석탑과 관련된 유물들이 발견되지 않아서 공양상이 석탑을 향해 있었는지 아니면 비로자나불을 바로 보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화엄사 공양석등도, 또 지척에 있는 구례 논곡리 공양상도, 금강산의 금장암지 공양석등도 다 삼층석탑을 향해 공양하고 있는 모습이기에, 대전리 공양상도 필시 삼층석탑을 향해 우슬착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니 그럴게다. 다소 장황하게, 한국 불교의 가장 문제적인 인물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감히 화엄사의 효대를 효대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기에, 조금 난망하기도 하다. 그러나, 나말려초의 혼란한 시기에, 법신 비로자나불의 공덕을 빌어오고, 선지식을 찾아 구도의 길을 나선 선재동자에 빗대어, 조금이나마 삶의 위안을 받고자 했던, 지리산 자락의 보살들과 중생들의 마음이 읽혀지는 대전리 석불과 공양상을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보살행이라고 헤아려 주시면 고맙겠다. 다음엔, 날도 더운데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시원한 물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해 보려 한다. 어디로 갈까? 바로가기 ---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나는 옛이야기1-대전리 석불 – 지리산인 (jirisan-in.net)
    • 지리산문화
    2022-08-02
  • 7월의 노고단 풍경(드론촬영)
    하늘에서 본 7월의 노고단. 천상의 화원 노고단은 지금 야생화로 가득합니다. 시원한 드론 영상으로 무더위를 잊어보세요.
    • 지리산정보
    • 산행정보
    2022-07-20
  •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나는 옛이야기1-대전리 석불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나는 옛이야기-대전리 석불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면 산과 계곡, 마을과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걸으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두리번거리면, ‘지나간 시간들’을 만날 수 있다. 거창하게 국보니 보물이니 지정된 문화재만이 아니라, 옛사람들의 손길이 묻어 있는 소중한 것들을, 거기에 담겨있는 앳된 옛이야기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지리산둘레길 오미-방광 구간을 걷다 보면, 한 칸 보호각에 갇혀 계시는 부처님 한분을 만나게 된다. ‘구례 대전리 석조비로자나불입상’이 그분의 공식 이름이다. 보호각에 세워지기 전에는 가로 6m, 세로 6m, 높이 1.1∼0,6m의 방형 돌담속에 계셨다. 1992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남악사지 지표조사’때 공식적(?)으로 이 불상이 알려지게 되었고, 1994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6호로 지정되었는데, 아마도 그 이후 지자체에서 보호각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보호각을 세우면서, 세심한 마음이 없었나 보다, 부처님의 발목이 시멘트 구덩이에 푹 빠져 버렸다. 쯧. 아쉽게도 이 부처님에 대한 문헌자료나 역사기록은 아직까지 없다. 그래서 주변 마을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와 부처님의 생김새만으로 그 내력을 엿볼 수밖에 없다. 마을사람들은 이 부처님에 계신 곳을 ‘미륵골’이라 부른다. 1992년 조사 때 주변에서 건물의 주초석과 기와조각, 벽돌조각 등이 발견되어 아마도 절집이 있었을 거라는 추정만 할 뿐이다. 조사 당시 절단된 부처님의 목 부분을 누군가 시멘트로 붙여 놓은 것을 조사팀이 시멘트를 제거하고 다시 접착제로 붙였다고 한다. 나무아미타불! 우리나라 문화재 앞에 붙어 있는 안내판이다. 읽고 또 읽어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게 적혀있다. 아마도, 문화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저하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것 같다. 첫째, 왜? 비로자나불이라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다 둘째, 머리카락이 나발이고 정수리가 육계라는데 이게 뭔뜻인지? 셋째, 법의는 통견이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넷째, 나발, 육계, 법의로 고려초 제작이라고 하는데....그 이유도 모르겠다. 양쪽 볼이 풍만하고 소박하면 통일신라 양식이라니...그건 또 뭔지? 첫째, 왜? 비로자나불이라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다. 부처님의 이름부터 알아봐야 한다. 아무런 기록도 없고, 사찰과 관련된 정보도 없을 때, 불상의 명칭을 확인하는 방법은 보통 수인(손의 모양, 손이나 손가락으로 맺는 모양)을 통해서이다. 보살상의 경우 머리에 쓰는 보관(寶冠)의 모양으로, 앉아 있는 자리의 모양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보관에 화불(化佛)이 있으면 관음보살, 보관에 보병(寶甁)이 있으면 대세지보살, 민머리이거나 두건을 쓰고 있으면 지장보살로 구분한다. 또 사자좌에 앉아 있으면 문수보살, 코끼리좌에 앉아 있으면 보현보살로 구분한다. 부처님이 혼자 계시지 않고 좌우에 다른 불보살과 계시다면, 좌우협시보살을 통해서 부처님의 명칭을 확인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계시다면 아미타불로, 좌우에 문수와 보현보살이 계시다면 비로자나불로 파악한다. 물론, 삼존불일 때 이런 전형을 벗어나는 예도 많기에, 절대적인 구분이라고 봐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대전리 불상은 보살상은 아니고, 좌우에 다른 불보상이 있지도 않기에, 오롯이 수인을 가지고만 판단해야 할 것이다. 대전리 석불의 수인을 명확하게 파악하기엔 너무 많이 손상되었다. 수인의 대략적인 모양은 왼손으로 오른손의 손가락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은 왼손이 오른손 위에 있으면서 깍지를 끼고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렇듯 가슴 앞에서 양손을 모아 주먹을 쥐는 수인을 지권인이라 하고, 이런 수인을 하는 부처는 비로자나불이다. “형상은 두 손을 모두 금강권(金剛拳 : 엄지손가락을 손바닥에 넣고 다른 네 손으로 싸 쥐는 것)으로 만들고 가슴까지 들어올린 후, 왼손 집게손가락을 펴 세워서 위쪽 오른손 주먹 속에 넣는다. 그 주먹 속에서 오른손 엄지와 왼손 집게손가락이 서로 맞닿는다. 이때 오른손은 법계를 뜻하고 왼손은 중생을 뜻하여, 이 수인은 법으로써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가 있다. 또 일체의 무명 번뇌를 없애고 부처의 지혜를 얻는다는 뜻이기도 하며, 이(理)와 지(智)는 둘이 아니고 부처와 중생은 같은 것이며, 미혹과 깨달음도 본래는 하나라는 뜻이기도 하다. 대일여래(大日如來) 즉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결하는 수인이다.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만 이 수인을 하므로 이 수인을 한 불상은 곧 비로자나불이다.” 지권인에 대한 불경의 설명에서는 왼손 엄지를 오른손이 잡는다고 나와 있지만, 대전리 석불은 반대로 오른손을 왼손으로 잡고 있다.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은 통일신라 8세기 중엽에 들어와서 9세기에 성행한 것으로 본다. 더불어 조성 초기부터 비로자나불의 지권인 수인이 뒤바뀌는 변형이 종종 나타나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변형된 지권인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대전리 석불의 수인이 좌우가 바뀐 지권인 혹은 깍지낀 지권인이라 하더라도, 비로자나불임은 명확하다. 둘째, 머리카락이 나발이고 정수리가 육계라는데 이게 뭔뜻인지? 부처님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부처님의 모습을 불상으로 또는 그림으로 그리려다 보니, 무언가 법칙이랄까 원리가 필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불교가 발생한 이후 약 500년간 인도에서는 불상을 만들지 않았다. 서기전 1세기 무렵부터 인간의 형상으로 불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인간과는 다른 특징을 가진 부처의 외형을 삼십이상 팔십종호(三十二相 八十種好)로 규정하게 되었다. 이미 열반에 들어 존재하는 자로서의 의미가 없는 부처를 인간의 몸으로 만드는 것은 이전에 없었던 부처의 형상을 창안해야 한다는 점에서 고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생물과도 다른 부처라는 존재의 철학적 의미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오랜 수행의 과정을 거쳐 깨달음을 얻은 여래임을 중생들에게 확신시킬 수 있어야 했다.거듭되는 윤회의 시간 동안 선업(善業)을 쌓고, 수행을 통해 다시없는 깨달음을 얻은 몸은 삼십이상 팔십종호를 갖춘다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삼십이상 팔십종호는 인간이 갖출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진리가 구현(具現)된 상태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같은 모습처럼 보이지만 인간과는 다른 특징인 삼십이상 팔십종호를 온전히 갖춘 모습으로 부처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삼십이상 팔십종호는 부처의 형상에 대한 규정이자 약속이다.” 〈중아함경〉에는 27번째 특징으로 머리카락을 들고 있다. “정수리에 육계가 있어 둥글고 가지런하며 머리칼은 소라처럼 오른쪽으로 돌아 오른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방광대장엄경〉에는 “정수리에 육계가 있다, 소라 같은 머리칼이 오른쪽으로 돌아 오르고 그 빛은 검푸르다” “머리칼이 아름답고 검다, 머리칼이 가늘고 부드럽다, 머리칼이 어지럽지 않다, 머리칼이 향기롭고 깨끗하다, 머리칼에 다섯 개의 만(卍)자가 있다, 머리칼이 빛나고 소라처럼 돌아 오른다”고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간송미술관 최완수 실장에 따르면, 원래 인도문화권의 남자들은 머리카락을 위로 거둬 모아 상투를 틀고, 그것을 그루터기로 삼아 터번을 둘렀다. 더위나 모래바람으로부터 머리카락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인도는 계급사회, 자연히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려고 높은 신분일수록 상투와 터번에 많은 금은보배를 장식했고, 이러다 보니 상투가 더 높아졌다. 초기 불상조각가들은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 머리카락을 정수리 부근에서 묶어 상투를(후일 육계란 명칭으로 확정) 만든 형태의 불상을 조성했다. 처음에는 상투 끈으로 머리카락을 묶었으나, 불상 양식이 점차 진전되면서 끈은 사라지고 상투만 표현됐다. 요약하자면, 나발(螺髮)은 소라 나(螺)와 머리털 발(髮)이다.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아 올려진 머리카락 모양을 말하며, 육계는 그런 나발들을 정수리에서 묶어 세운 상투를 의미한다. 대전리 석불의 머리 부분도 많이 손상되어 눈으로 명확하게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우선, 나발의 형상은 연주문(連珠文, 작은 원을 구슬을 꿰맨 듯 연결시켜 만든 문양)형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에서 유행하던 나선형과는 조금 다르다. 정수리에 있는 육계는 제법 큰 편이다. 삼도(三道)는 부처님 목 주위에 표현된 3개의 주름인데, 이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또는 생사 윤회하는 삼계(三界) 등을 뜻한다고도 한다. 대전리 석불의 목부분에 있는 삼도는 예전에 절단되어 시멘트로 붙이고 다시 수리하는 과정에서 눈으로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셋째, 법의는 통견이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삼의일발(三衣一鉢)이란 말이 있다. 세가지 옷과 발우 하나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이나 수행자들의 검소한 삶을 표현하는 말이다. 스님들의 옷을 인도에서는 가사(袈裟 Kasaya)라 하고, 삼의(三衣)란 상의(上衣-승가리). 중의(中衣-울다라승). 하의(下衣-안타회) 세 가지인데, 그 중에서 상의인 승가리를 법의(法衣)라하여 가사의 대표로 삼는다. 부처님이 이 상의인 승가리(법의)을 입으시는 방식이 있다.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뉘는데, 하나가 통견이고 또 하나가 우견편단이다. 통견(通肩)은 통양견법(通兩肩法)의 약칭으로, 불교에서 가사(袈裟)를 입는 한 방법으로, 양어깨를 모두 덮는 방법을 말한다. 대개, 승려가 사찰 밖으로 외출하거나 속인의 집에 들어갈 때의 착의법이며, 불상의 경우는 법의를 이 방법으로 입고, 옷자락을 왼쪽 겨드랑 밑으로 당겨서 왼손으로 잡는다. 우견편단(右肩偏袒)은 오른쪽 어깨는 가사를 벗어서 노출하고 왼쪽 어깨만 걸쳐 있는 형식이다. 인도 풍습에는 왼쪽보단 오른쪽이 더 귀하게 여기고, 화장실 등 천한 일은 왼손을 사용했다. 사실 고대인도의 많은 신(神)들의 모습을 보면 더운 날씨 때문에 대부분 웃옷을 입지 않거나 혹은 왼쪽 어깨만 걸친 우견편단 복장이다. 따라서 우견편단(右肩扁袒)은 부처님 만의 고유한 복장이 아니고 인도인들의 복장풍습에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통견의 양식도 두 가지 갈래로 나뉜다. 옷주름의 모양으로 구분하는데, 흔히 아육왕식과 우전왕식으로 구분 짓는다. 아육왕식(阿育王式 Ashoka) 옷 주름은 목에서부터 가슴, 다리를 거쳐 발목에 이르기까지 U자형의 주름이 연속적으로 늘어져 있는 형식이며, 우전왕식(優塡王式 Udayana)은 가슴 위에서 내려온 옷 주름이 허리 부분에서 양쪽으로 나뉘어 두 다리 위에 따로 U자형이 표현된 형식이다. 그럼, 대전리 석불의 법의를 살펴보자. 착의법은 양어깨에 옷이 걸쳐져 있는 통견이고, 상체의 옷주름은 U자형으로 가슴 가운데에서 양어깨와 팔목까지 주름이 반복적으로 겹쳐져 있다. 하체의 옷주름은 상체에서 내려온 U자형 주름이 허리에서 Y자로 나뉘어 지며, 양다리에서 각각 U자를 그리며 발까지 내려온다. 그래서 대전리 석불의 법의 양식은 우전왕식 통견이 된다. 넷째, 나발, 육계, 법의로 고려초 제작이라고 하는데....그 이유도 모르겠다. 양쪽 볼이 풍만하고 소박하면 통일신라 양식이라니...그건 또 뭔지? 문헌과 자료로 고증하기 불가능한 불상은, 위에서 언급된 나발과 육계, 법의 양식, 불상의 전체적인 모양, 부처님의 이름 등으로 제작 연대를 유추해 내는 게 통상적인 방식이다. 우선 법의의 양식에서 대전리 석불의 제작 연대를 유추해 보자.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머니 마야부인에게 법을 전하기 위해 도리천에 올라가 있는 동안, 코삼비국의 우전왕(Udayana)이 세존을 너무도 그리워하여 전단나무로 5척 높이의 부처님 형상을 만들게 하였다. 이 상서로운 최초의 불상은 각지에 널리 유행하였다. 당나라의 현장은 우전왕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전단상을 직접 목격하였는데,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 불상을 모사하였고, 이때 “진(眞)을 얻은 것”으로 여겼다고 전한다. 이것은 우전왕이 만든 불상이 석가모니 입멸 전에 만들어진 불상이므로 세존의 본래 모습을 담고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불상의 전파과정에서 이러한 복제는 단순한 형상의 복제에 그치지 않고 ‘신성의 복제’로 이어졌다. 이후 이 불상과 같은 가사형식을 한 불상을 학계에서는 편의상 우전왕식 불상이라 부르게 된다. 이러한 우전왕식은 한반도에 719년 감산사 미륵보살입상에서 처음 나타나며, 8세기 이후 신라 불상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더욱 도식화되어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에서는 무릎 부분의 옷주름이 몇 번 반복되는 양식화로 이어진다. 이에 비해 대전리 석불의 가사 옷주름은 신라 불상의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려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또한, 비로자나불 조성으로 연대를 유추해 볼 수도 있다. 한반도에서는 8세기 중엽부터 비로자나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해 남북국시대 신라 후기에 크게 유행해 그 흐름이 조선까지 이어졌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보관을 쓴 보살형의 비로자나불을 조성했으나 우리나라는 주로 지권인을 한 불상이 대다수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독존상이 주로 조성됐는데 조성시기가 명확한 불상 중에 석남사 비로자나불상이 766년으로 가장 빠르고 장흥 보림사 비로자나불상이 859년, 철원 도피안사 불상이 865년으로 뒤를 잇는다. 비로자나불은 석불이나 철불로 조성되면서, 초기에는 거의 좌상으로 만들어 지다가 고려시대에 좌상에서 입상으로 변화를 나타낸다. 하지만 대형 석조 비로자나불입상은 현재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며, 관촉리 비로자나불입상과 대전리 불상이 대표적이다. 대전리 석불이 관촉리 석불 보다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대형 비로자나불 입상으로는 가장 초기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1992년 조사 당시, 주변에서 발견된 塼(벽돌)과 瓦片(기와조각) 등이 고려초의 것으로 파악되어, 대전리 석불은 대략 9세기말에서 10세기초에 조성된 불상으로 파악된다. 고려초에 이렇게 큰 석불을 조성한 이유는, 신라하대인 9세기 불상의 양식을 이은 온화한 부처의 이미지로는 통일 고려의 강력함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웠기에 웅대하고 강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불상의 이미지가 필요했을 것이고, 또한 불상을 좌상이 아닌 입상으로 제작해 부처님의 보다 적극적인 중생구제의 모습을 표현했을 것이다. 대전리 비로자나불의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 하고, 다음에는 대전리에서, 아니 한국 불교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에 대해 이야기 해보기로 한다. 석불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이 인물은 누구인가? 바로가기---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나는 옛이야기2-대전리 공양인물상 – 지리산인 (jirisan-in.net)
    • 지리산정보
    • 산행정보
    2022-07-19
  • 구례 성삼재 버스 운행 재개
    5월27일 부터 구례 성삼재구간 버스 운행이 다시 시작 되었다. 운행 중지 되었던 성삼재행 버스가 다시 운행 하기 시작했다. 구례 터미널 첫 버스는 2시40분 성삼재발 마지막 버스는 5시30 분이다. 운행이 중지되어 불편을 격던 등산객들의 불편을 해소 할 수 있게 되었다. 운행시작일 2022.5.27 부터 공영버스터미널 061-780-2730 구례여객운수사 061-782-5151
    • 지리산정보
    • 숙박 교통
    2022-05-31
  • 천은사 계곡을 흐르는 때죽나무꽃
    때죽나무꽃이 떨어지는 요즘. 천은사 계곡에는 때죽나무꽃이 흐르고 있습니다. 잔잔히 흐르는 때죽나무꽃의 움직임을 보시고 계곡의 소리를 들으시며 편안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 때죽나무라는 이름은 가을에 열리는 열매의 모습이 반질반질해서 마치 스님이 떼로 몰려있는 것 같아 처음에 ‘떼중나무’로 부르다가 때죽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또 열매를 찧어 물에 담그면 물고기가 떼로 죽는다고 하여 이름이 생겼다는 설, 줄기에 때가 많아 검게 보이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다른 이야기로는 열매와 과피를 물에 불린 다음 그 물로 빨래를 하면 계면활성제가 들어있어 때를 쭉 뺀다는 뜻에서 때쭉나무로 불렸다는 설도 있다. 비 오는 날 나무의 수피는 코팅을 해놓은듯 아름다움을 뽐낸다. 꽃항기 또한 일품이다.
    • 지리산정보
    2022-05-25
  • 바래봉 구상나무 군락과 기후변화
    크리스마스 트리로 불리는 구상나무. 우리나라에 사는 고유의 식물입니다. 바래봉 구상나무 군락의 드론 영상. 구상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 지리산정보
    2022-05-20
  •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승탑! 지리산 연곡사 동 승탑을 만나보세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승탑! 지리산 연곡사 동 승탑을 만나보세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승탑! 지리산 자락 구례 연곡사의 동 승탑입니다. 연곡사에는 아름다운 승탑과 승탑비가 여러개 있습니다. 연곡사의 여러 승탑과 탑비들을 차례대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지리산 연곡사의 승탑과 탐비들 제 1부. 국보 53호 구례 연곡사 동 승탑입니다.
    • 지리산정보
    2022-05-18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