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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구일기] 골프장 잔디를 먹고 살지 않는 존재들
    괜히 이름을 ‘칩코’로 지었다. 칩코로 불린지 어언 5년차인데, 사실 1년차부터 후회를 반복해왔다. 정확히는 내 이름의 뜻을 물어볼 적마다 후회했다. 인도의 에코페미니즘 운동인 ‘칩코운동’이 있다. 숲에 댐이 건설되려 하자, 숲에 의존하며 살던 마을의 여성들이 나무를 끌어안고 지켜낸 운동이다. 칩코는 ‘끌어안는다’는 뜻의 힌두어라고 한다. 인터넷에 ‘칩코운동’을 검색하면 심금을 울리는 장면이 나온다. 당산나무에 정성껏 금줄을 매단 양, 여성들이 손을 잡고 나이든 나무를 둘러싼 사진들. 이 장면에 반해 분수를 모르고 이름을 덜컥 정해버렸다. 아무래도 이름이 너무 크다 싶다. 내 생각에 난 크게 될 인물은 아닌 것 같다. 하도 운동을 하러다니니, 한때 엄마는 내가 정치판에 뛰어들까 걱정하셨다. 그때 큰언니는 “쟤는 멘탈이 약해서 안돼”라고 툭 뱉었다. 순간 욱해서 반박하고 싶었으나, 속으로는 나와 그다지 대화도 많지 않은 큰언니의 예리한 통찰력에 눈이 휘둥그레 했다. 맞는 말이었다. ‘존경받는 큰 인물이 되기’란 줘도 마다할 만큼 싫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차라리 산에 사는 꾀죄죄한 은둔자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지리산사람들’ 운영위원 회의가 늦어진 저녁, 사포마을 주민 두 분이 사무실을 찾아오셨다. 사포마을은 지리산 골프장 예정지 바로 앞에 놓인, 고작 60여명의 주민이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골프장 이슈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근래 구례 곳곳엔 수상한 현수막이 우후죽순 걸렸다. ‘온천골프장 협약을 축하한다’는 내용이었다. 문구도 디자인도 똑같지만, 어디 마을 발전협의회, 어디 골프장협회, 어디 마을청년회 등등 현수막을 설치한 단체만 달랐다. 무려 400개의 단체가 동시다발적으로 쌍수를 들고 골프장을 환영한 기이한 일이었다. 군에서 현수막은 이미 만들어놓고, 각 단체에서 돈 내고 찾아가라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주민 두 분은 서로 모르는 분이라고 하셨다. 환경운동을 하던 분들도 아니셨다. 주민께서는 눈물을 지으시며 마을 뒤편의 나무들이 너무도 비참하게 잘려나가고 있다고 전했다. 다른 주민께서는 그곳이 매일 자신의 반려견과 다니던 산책길이었는데, 원시림과 같다고 느낄 정도로 자연스러운 숲이었다고 했다. 공사하시는 인부에게 나무를 왜 이렇게 베느냐고 여쭈니 ‘재선충 방제’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병에 걸렸다는 소나무만 베는 게 아니라 모든 풀과 나무를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그들은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다른 주민을 찾다가 서로를 알게 되셨다고 했다. 회의를 마친 그 주말에 나도 벌목지를 방문했다. 벌목지엔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만 벤 것이 아니고, 풀도 밀어버렸는데 완전히 운동장처럼 흙만 남은 꼴이었다. 벌목된 구간은 한 장소에서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넓었다. 허허벌판이 된 벌목지는 아찔하게 깎아지른 절벽을 지나 산 능선 반대쪽까지, 그리고 그 반대쪽의 반대쪽까지 이어졌다. 풀뿌리가 없어 밟으면 발이 푹푹 꺼지는 벌목지를, 너무 넓어서 다 걸어서 갈 수도 없는 땅을 허우적대다보니 속이 메스꺼웠다. 벌목지와 벌목을 겨우 면한 숲의 경계에 서면, 그 경계를 따라 새소리의 침묵과 소란이 교차했다. 그 경계의 나무들은 포크레인에 스쳤는지 팔이 하나씩 부러졌고, 풀잎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심장이 몹시 빨리 뛰었다. 발표하기 직전처럼 불안하기도 하고, 계곡에서 발이 닿지 않을 때처럼 몸이 경직되기도 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심장이 쪼그라들어서 주름이 자글자글해진 느낌이었다. 집에 도착해서는 엉엉 울었다. 방금 보고 온 걸 잘 돌아보고 싶었는데 어려웠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죄책감이 밀려왔다. 내가 현장에 갔을 때도 여전히 인부들은 일을 하고 계셨다. 나도 인도의 그 여성들처럼 그 앞을 가로막고 나무를 지켜야하지 않았을까? 왜 넋이 나간 표정으로 메스꺼운 배만 주무르다 왔는지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다. ‘뭐라도 했어야 했는데...’하던 마음과 달리 그날 이후 이틀 동안 집안에만 처박혔다. 집밖이 무서웠다. 사실 구례는 골프장만 문제는 아니었다. 지초봉엔 짚라인과 모노레일이 들어섰고, 산동 골프장 예정지는 지리산 케이블카 마지막 정거장이라고도 했다. 섬진강과 모든 지천엔 수해를 막겠다고 제방 공사를 했다. 멸종위기 야생생물이 목격된 지천이나 수해피해가 심하지 않던 지천도 어김없이 제방공사를 피하지 못했다. 봉덕정의 활 쏘는 사로를 넓히겠다고 불법으로 산을 도려냈던 봉성산은, 사로 확장공사가 거의 마무리되는 중이었다. ‘지리산사람들’에서는 ‘난장판 구례답사’를 열어 이 현장들을 방문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많이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자보를 만들고 홍보도 했지만, 지리산사람들 운영위원이 아닌 참여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정말 400개 단체만큼의 주민들이 골프장을 환영하는 것처럼도 느껴졌다. ‘난장판 구례답사’ 당일에 한 번 더 벌목지를 방문했다. 처음 방문 때보단 넋이 덜 빠진 채로 숲을 돌아봤다. 죽은 나무들은 값이 나가는 굵은 것들과 돈이 안 되는 가느다란 것들로 분류된 상태였다. 소나무, 편백나무, 덜꿩나무, 때죽나무, 회나무... 아는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면서 애도해보았지만, 죽은 나무들은 포크레인에 잎과 수피가 모두 벗겨져 누구신지 식별하기 어렵기도 했다. 이날도 벌목지에선 인부들이 한창 일을 하고 계셨다. 등산객인 척하며 여기 길이 모두 사라졌느냐고 물었는데, 한 인부께 돌아온 답이 기억에 남았다. “산 좋아하는 분들한테 저 같은 놈들 하는 일이 참 면목이 없어요.” 면목이 없기는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그 인부께서는 내가 전에 살던 옆마을에 사신다고 했다. 사포마을 주민들은 곧 누가 찬성이고 누가 반대이냐에 따라 편가르기를 하게 될 터였다. 20년 전 똑같은 골프장 사업이 발표된 후 숲을 지키겠다고 나선 주민들에겐 업주 측의 폭행과 민형사 손해배상, 재산 가압류가 돌아왔다고 했다. 벌목지 인근의 계곡엔 원인 모를 흰 거품이 일었다. 인부들이 먹은 배달음식 스티로폼 용기가 바람에 날려 숲 곳곳에 흩어졌다. 박새들이 서로 소통하기 위해 포크레인 소음보다 더 크게 목이 터져라 지저귀고 있었다. 숲에서 땔감과 풀과 열매를 얻던, 그래서 숲이 사라진다는 말에 기꺼이 달려가서 숲을 끌어안았던 그 옛날의 인도 여인들이 느꼈던 숲과의 연결감을 이제 우린 느낄 수 없게 된 걸까? 골프장이 지어지면 푸른 잔디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 제초제를 뿌린다던데. 그럼 골프장 아래 사는, 산의 계곡물과 지하수를 먹고사는 주민들은 어떻게 되려나? 멸종을 앞둔 담비와 수달의 똥이 인근 숲에서 발견됐다던데 이들은 어디로 가야할까? 하지만 찬성하는 이든, 반대하는 이든, 인간들 결정에 관심 없지만 함께 불행해질 다른 존재이든, 골프장 잔디를 먹고 살지 않기는 그 옛날과 달라진 게 없었다. 골프장 예정지 벌목지 사진들 난장판 구례답사 중인 사람들
    • 사는 이야기
    • 방구일기
    2023-04-18
  • [방구일기] 벚꽃이 져야만 하는 이유
    * [방구일기]는 지리산방랑단이 구례에서 하는 일을 기록합니다. 방랑단 활동 외에 구례에서 참여하는 다양한 활동을 소개해드리려해요. 참 의미있고 재미난 활동이 많이 벌어져서 알려드리고 싶어요. 가까이 계신다면 함께하셔도 좋고, 멀리서 응원을 보내주셔도 좋고, 소개드리는 단체들에 후원하셔도 좋습니다! 벚꽃이 져야만 하는 이유 글.칩코 조만간 버스타기는 글렀다. 내가 사는 마을엔 하루에 버스가 고작 여섯 번 오는데, 지금 시기가 되면 그마저도 불투명하다. 구례는 바야흐로 벚꽃의 세상이다. 상춘객들로 도로는 주차장과 다름없는 형국이니, 나 같은 뚜벅이가 아니더라도 사정은 같을 것이다.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마음은 설렌다. 들뜬 관광객들에 덩달아 신이 나고, 꼭 내 앞마당에 사람들이 구경오는 듯이 흐뭇하기도 한다. 지난 겨울부터 나무 공부를 시작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아진 것도 딱 지난 겨울부터다. 정류장 옆에는 나무가 많다. 숲이 아닌 마을이나 읍내에서도 나무는 적지 않다. 나무의 수피와 겨울눈과 수영을 이리저리 노려보다보면 오히려 버스를 놓칠 뻔도 한다. 겨울이 지나고서는 그 빨갛던 겨울눈이 연두빛으로 차오르더니 마침내 피워낸 꽃을 구경하는 참이다. 버스 안에서 눈부신 벚나무 행렬을 지나치며, ‘사람들은 나무를 참 좋아하는구나…’하고 생각한다. 그리곤 문득 이상했다. 보통이라면 ‘사람들은 꽃을 참 좋아하는구나…’하고 생각했을 텐데. 나무공부한지 고작 몇개월이라고 이제 꽃이 아니라 나무가 보인다. 사람들은 나무를 좋아한다. 봄이면 어김없이 꽃을 피워내는 나무를. 터질듯이 부푼 꽃망울을, 바람에 흩어지는 꽃비를, 그 보드랍고 가볍고 연약한 아름다움을. 꽃이 마사지를 해준 것도 아닌데 목욕탕에서 나온 사람들처럼 말갛고 해사한 얼굴들이다. 물론 꽃이 지고 나면 그게 벚나무인지도 모를 사람이 태반일 테다. 나무공부를 하기 전의 나처럼. 나무공부는 ‘지리산사람들’ 단체에서 하는 ‘겨울나무 특강’을 들으며 시작했다. 나무 전문가 못난이쌤과 나무 학도들 열 몇 명이 구례의 숲을 쏘다니며 나무를 보는 수업이다. 교재는 딱히 없다. 그저 못난이쌤은 죽은 나무를 정성스레 깎아서 만든 삼나무 지팡이만 지휘봉처럼 들고는, “쩌어기 누리끼리 뽕나무 보이시죠?”, “초리 끝이 라면처럼 꼬부라진 나무는 뭐라고 했죠?”하며 질문과 정답을 쏟아낼 뿐이셨다. 처음엔 다소 충격이었다. 내 눈은 일단 뽕나무를 식별할 줄 몰랐고, ‘쩌어기’있는 나무를 자세히 보려한 적도 없었다. 누리끼리한 건 뽕나무고, 푸르딩딩한 건 팽나무라는데 내 눈엔 그냥 다 갈색 나무기둥이었다. 초리 끝이 라면처럼 꼬부라지면 자귀나무인데, 자귀나무는 대체로 키가 나를 8명쯤 세워둔 정도의 높이다. 그렇게 높은 곳에 달린 가지 끝을 가리키는 못난이 쌤을 보자면, 마치 하루살이보다 작게 보이는 시력검사용 숫자들을 읽어보라는 안경사를 보는 기분이었다. 아, 초리는 가느다란 가지를 뜻한다. 이 말을 못알아들은 것도 당신만은 아니다. 겨울에 나무공부는 쉽지 않았다. 못난이쌤이야 교재도 없이 머릿속에 든 것을 읊으면 되지만 난 우수수 쏟아지는 나무 지식들을 머리에 넣으려면 손가락이 꽁꽁 얼도록 필기해야했다. 또 점점 몸이 데워지는 등산이 아니고, 한두 시간에 고작 1키로를 걷는 정도로 천천히 나무를 보며 숲을 걷다보니 몸도 오들오들 떨렸다. 그런데도 겨울에 나무공부를 하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바로… 겨울에도 나무만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겨울 숲엔 동물도 풀도 곤충도 숨어버리지만 나무만은 그 자리 그대로 있다. 나무는 겨울이면 나 같은 초보학도에게 더욱 매정해진다. 잎과 꽃이 사라져 누가 누구신지 알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반대로 겨울에 나무를 동정할 줄 알게되면, 다른 계절에 나무보기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다. 겨울나무는 수피를 보고 주로 식별한다. 수피는 모든 계절 모습이 같다. 모든 계절 ‘수피가 누리끼리한 건 뽕이고 푸르딩딩한 건 팽’이라는 게다. 또 겨울눈도 좋은 힌트가 된다. 겨울눈은 가지마다 쌀알보다 작은 크기로 붙어있는데, 이 쌀알 안에 나무의 꽃과 잎과 씨앗이 모두 들어있다. 그 겨울눈이 움이 터서 봄에 새순이나 꽃이 된다. 나무는 혹독한 추위동안 그 조그만 겨울눈 주머니에 소중한 것들을 보관해둔다. 우리는 겨울 동안 같은 숲을 세 차례나 걸었다. 계속 반복학습을 해야 ‘그 나무가 그 나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 역시, 같은 나무가 틀림없어 보이는 세 명의 나무를 보고 못난이쌤이 “완전히 다르게 생겼다”고 말씀하실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계속 같은 숲을 반복해서 걷다보면, 똑같이 하얗지만 쭉뻗은 느티나무와 구불구불 자라는 사람주나무의 차이를, 똑같이 누리끼리하지만 절대 같은 노란색이 아닌 노린재나무와 개암나무의 빛깔 차이를 구분하게 된다. 그리곤 나무수업을 처음 들은 한 친구가 “윤노리나무랑 대팻집나무랑 똑같이 생겼어”할 때, 나도 모르게 “엥! 전혀 달라!”라고 외치는 건방도 떨게 되었다. 겨울특강이 끝이 아니다. 나무 학도와 못난이쌤은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의 나무까지, 나무의 한 해 모습을 다달이 본다. 수피보단 겨울눈으로 나무를 알아보기가 조금 더 쉬운 편인데, 겨우 외웠던 겨울눈의 모습은 새순이 트면서 다 달라져버렸다. “그래서 수피로 외우라고 한 거예요”라고 못난이쌤은 말씀하시지만, 수피로 동정하는 건 내 수준에선 거의 석사과정이라 어쩔 수 없다. 나무의 봄새순, 여름잎, 가을열매를 몽땅 외워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느냐 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수피로 식별할만큼 나무를 들여다보면 결국 사계절 얼굴들을 안 외울래야 안 외울수가 없을 테다. 나무공부는 나무를 보는 내 시선을 완전히 뒤바꿨다. 나무는 결코 다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다. 어떤 나무는 수피가 나비날개 같기도, 다 까진 발뒤꿈치 같기도, 또 단단히 바느질한 모직코트나 바짝 마른 말의 허벅지 같기도 하다. 어떤 나무는 열매자국이 항아리 같기도, 반바지 같기도, 쥐똥이나 빗자루 같기도 하다. 별 볼일 없는 생선가시 같던 겨울의 골담초나무가 샛노랗고 통통한 꽃을 피운 것을 봤을 때는, 꼭 오랜만에 만나 몰라보게 변한 동창에게 반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또 겨울눈이 꼭 머리 위로 합장한 손 같은 작살나무는 봄에 새순이 나도 그 합장한 손이 그대로 남아있어, 꼭 조카에게 “예전 애기 때 얼굴 그대로네”하는 이모 같은 말을 뱉게 만든다. 난 나무공부가 아니었다면, 나무가 이리 다정한 줄도 몰랐을 게다. 나무가 벌레에게 집을 지어준다는 사실을 아셨는지? 나무는 벌레 때문에 죽기도 하는데,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셈이다. 심지어 꽃눈이랑 구별이 안 갈만큼 근사하고 우아하게 지어준다. 나무 딴에는 집을 지어줄 테니, 더 퍼지지 말고 그 안에만 있으란 의미라고 한다. 아니 그래도 이렇게 지혜롭고 다정한 방식으로 벌레와 공존하다니! 나무에 벌레집만 있는게 아니다. 나무는 거의 다가구 주택이다. 소쩍새는 나무 속에 집을 짓고, 지빠귀는 가지에 집을 짓고, 버섯과 이끼도 수피에 집을 짓고, 곰은 나무 뿌리 쪽에 커다란 굴을 파기도 하고, 딱따구리가 나무 껍질 속에 벌레를 파먹은 자리 안에 거미가 집을 쳐놓은 것도 봤다. 나무는 겁이 많기도 하다. 정원사가 마구 가지치기를 해서 자신이 많이 먹혀버렸다고 생각이 들 때는 몸통에서 마구잡이로 가지를 뽑아내는데 이런 걸 ‘맹아’라고 한다. 그러나 맹아를 키우기엔 너무 에너지가 많이 들어서 결국 그 맹아는 스스로 다시 죽일 수 밖에 없는데, 그 맹아를 치료한 자리는 두툼한 딱지가 지거나 사람 눈동자 같은 흔적이 남는다. 나무는 어쩔 때는 과감해지기도 한다. 자신을 옥죄는 덩굴과 싸울 때는 그 쪽으로 모든 병력을 쏟아부어 풍선같은 혹부리를 만들기도 하고, 키 큰 주변 나무와 햇빛 경쟁을 할 때는 냅다 드러눕기도 한다. 못난이쌤의 나무수업은 나무 외형과 이름을 달달 외우는 암기 테스트가 아니다. 나는 나무와 대화하는 법을 배웠다. 나무가 아프다는 신호는 어떤 모양인지, 나무가 누구랑 싸우다 다쳤는지, 나무가 매연과 소음 가득한 도시가 아니라 건강한 숲에서는 어떤 표정으로 웃는지를 배웠다. 나무껍질의 헤진 자국만 보고도, 고양이가 발톱을 정리하고 갔는지, 다람쥐가 집을 지으려고 껍질을 긁어갔는지, 멧돼지가 가려운 몸을 비비고 갔는지를 살피면서, 나무의 하루를 상상해보는 수업이었다. 못난이쌤의 수업에 기필코 등장하지 않는 내용은 나무의 ‘효능’이었다. 이 나무는 암치료에 좋고, 이 나무는 집 지을 때 좋고… 못난이쌤은 나무의 효능을 읊는 건, ‘꼭 돼지를 세워놓고 이 돼지는 앞다리랑 뱃살이 맛있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셨다. 나무를 친구처럼 알아가고 싶다던 못난이쌤의 꿈 속에는 정말로 나무들이 찾아가기도 한다. 못난이 쌤처럼 꿈조차도 나무꿈을 꿀 정도로 나무에 미치려면 나무를 얼마나 들여다 보아야할까? 그래서 ‘사람들은 나무를 참 좋아하는구나…’라는 생각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벚나무는 꽃으로 인간을 황홀하게 만들지만, 꽃이 벚나무의 전부는 아니다. 그 벚나무의 전부가 없다면 오히려 봄에 우린 꽃을 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 못난이쌤은 “꽃은 져야만 한다”고 하신다. 꽃은 벌과 새를 초대하기 위해, 나무가 그들이 좋아하는 향과 색으로 꾸며놓은 사랑스러운 방이다. 벌과 새와 바람 덕분에 씨앗이 만들어졌다면, 이제 나무는 씨앗을 지키는 게 가장 중요해진다. 꽃을 피워 계속 손님을 받다간 기껏 만든 씨앗까지 홀랑 먹힐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무는 필시 꽃을 지게 한다. 손님치레를 멈추고, 아기를 돌보는 방을 고요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꽃을 좋아한다. 요즘은 꽃이 더 오래 필 수 있게 나무를 개량하기도 한단다. 하지만 꽃을 오래보고 싶은 인간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나무는 자신의 할 일을 해야한다. 나무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많고도 건강한 열매를 만들어서, 동물과 새와 벌레를 배불리고도 남아, 다람쥐가 씨앗마저 먹어버리고도 남아, 새싹을 틔웠지만 사람 발길에 밟혀서 몇은 죽고도 남아, 다시 당신만한 아름드리 나무로 씩씩하게 성장할 자식을 키워내야 한다. 그래서 나무는 저를 도와달라고 이웃들에게 친절을 먼저 베푸는 지도 모른다. 벌레에게 집을 내주고, 새와 벌에게 꽃과 열매를, 지렁이에게 낙엽을, 사람에게 그늘을 선물하면서. 나 역시 이 아름다운 벚꽃이 질 때면 아쉬움이 든다. 그러나 꽃은 져야만 한다는 못난이쌤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젠 나무를 축하해주고 싶다. ‘네 할 일을 한 차례 해냈구나. 이제 열매를 살찌우는 일을 응원할게. 꽃이 진 후의 너는 어떤 얼굴로 변할지 또 보러올게.’하는 마음이다. 이 많은 상춘객들이 모두 나무를 축하하는 마음도 한 움큼씩 남기고 간다면 어떨까? 꽃이 졌다는 소식을 들으면 발길을 싹둑 끊어버릴 게 아니라, ‘아무렴, 꽃은 져야지’하는 마음으로 나무의 다음 모습을 기대한다면. 다람쥐는 겨우내 먹기 위해 나무씨앗을 열심히 땅에 묻어 저장한다. 그리곤 땅 위에 떨어진 씨앗을 다 먹고나면 전에 묻어둔 곳을 기억했다가 꺼내먹는다. 그런데 다람쥐는 기억력이 썩 좋지 않아서 저장해놓은 걸 까먹기 일쑤라고 한다. 결국 다람쥐는 씨앗을 심는 나무의 일을 도와주는 셈이다. 나무가 겨울눈과 씨앗을 홀랑 먹히고도 다람쥐를 자꾸 초대하는 이유를 알겠다. 나도 다람쥐 같은 이웃이 되고 싶다. 어린 나무를 밟아 부러뜨리고, 잎과 열매를 왕창 뺏어먹는 무겁고 덩치 큰 동물이지만, 나무 곁에 계속 있고 싶으니까. 내 나름대로 나무에게 필요한 이웃이 되고 싶다. 다람쥐처럼 큰 포부없이도 담백하게 나무에게 필요한 이웃이 되는 건 어딘가 쿨해보이긴 하지만, 난 아무래도 좀 더 질척여야겠다. 나무수업 필기노트의 손때가 벌써 자글자글하다. *’목요일은 나무동무‘ 줄여서 ‘목동반’이 매달 마지막주 목요일마다 여러 숲을 다니며 나무공부를 합니다. 참여를 원하시면 ‘지리산사람들’에 문의하실 수 있습니다! 나무에 제대로 미치신 못난이쌤이 환영해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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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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