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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시농부 안철환의 땅 이야기 7] 윤작과 혼작 더 넓게 보기
    [도시농부 안철환의 땅 이야기 7] 윤작과 혼작 더 넓게 보기 월동작물과 다년생, 땅 살리는 지혜 안철환(전통농업연구소 대표) 월동작물과의 윤작 우리의 주식 작물은 대부분 여름을 나죠. 대표적으로 벼와 곡식류가 그렇고 고추와 열매 맺는 과채류가 그렇습니다. 여름 나는 작물이 주연배우라면 겨울을 나는 작물은 조연배우쯤 될 겁니다. 밀, 보리가 그렇고 마늘, 양파가 그렇지요. 그렇지만 조연 없이 주연 있을 수 없듯이 월동 작물 없으면 여름 작물도 없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월동 작물도 예전엔 주연 배우나 다름 없었어요. 대표적으로 보리밥은 쌀밥에 버금가는 주식이었습니다. 마늘도 우리에겐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 양념 작물이죠. 특히 우리는 세계에서 마늘을 제일 많이 먹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월동작물의 의미는 주식이든 부식이든 그것을 떠나 우리의 토양을 지켜주는 아주 고마운 작물이라는 겁니다. 일단 여름 작물 수확 후 월동 작물을 심는 것을 윤작이라 하죠. 월동 작물을 심지 않고 겨울에 땅을 방치해두면 땅이 좋아질까요? 휴경(休耕)한다고 해서 땅이 좋아질까요? 토양은 방치해두면 무조건 좋아질까요? 사실 서양의 생태주의 사상은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우리는 좀 다릅니다. 우리는 방치하는 게 능사가 아니고 사람이 적당히 개입하는 게 최선이라 봤습니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로 보았던 거지요. 그래서 서양의 토양 관리법엔 휴경이 매우 중요한 반면 우리는 윤작 혼작을 잘 활용하기에 그만큼 중요하지 않습니다. 서양의 농업은 기본적으로 단작과 연작이 발달해 휴경이 필수입니다. 밀 농사와 방목이 더 그걸 부추깁니다. 농법 자체가 토양 수탈 농사라 토양을 정기적으로 쉬게 해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휴경할 만큼 땅이 넓지도 않거니와 윤작 혼작법으로 충분히 토양의 지력을 지켜왔지요. 그 중에 핵심이 바로 겨울 농사입니다. 여름 농사만 짓고 겨울엔 사막처럼 방치해 두면 연작 효과가 생겨 토양은 좋아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토양은 여름 폭염과 폭우로 제일 망가지고 그 다음으로 토양을 망가뜨리는 것은 겨울의 혹한과 가뭄입니다. 기후 온난화로 요즘은 혹한보다 겨울 가뭄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이 겨울 가뭄으로부터 토양을 보호하는 기술이 발달했는데 바로 월동작물 농사가 대표적입니다. 물론 토양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겨울 농사만 있지 않았어요. 겨울 작물을 심기 힘들 경우 제일 일반적인 것은 겨울 길목인 동지 즈음해서 땅을 깊게 가는 것입니다. 대략 20센티 정도로 깊게 갈아 엎었지요. 그럼 그렇게 갈린 표토층이 심토층을 춥고 가문 겨울 날씨로부터 보호해주는 겁니다. 일종의 말하자면 흙으로 흙을 덮어 보호해주니 저는 그걸 흙 멀칭mulching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다음으로 벼 수확 후 보리를 심지 못하는 중부지방과 그 이북 지역에선 논을 깊게 갈고 물을 담았습니다. 물로 땅을 보호하는 겁니다. 저는 이걸 물 멀칭이라 했지요. 그럼 월동작물로 땅을 보호하는 건 당연히 작물 멀칭이겠죠. 물론 조상들이 땅을 보호할 목적으로 작물을 심은 건 아니겠죠. 당연히 먹기 위해 심었을 겁니다. 토양 보호는 부수효과였겠죠. 월동 작물은 의외로 많습니다. 앞의 밀, 보리, 마늘, 양파 외에도 대파, 쪽파, 시금치도 있고요, 배추와 무도 보온만 해주면 겨울을 넘겨 봄에 새싹을 올리지요. 봄동 배추가 바로 겨울을 나고 새싹을 올린 배추에요. 우리 도시농업에서 제일 아쉬운 점은 바로 이 월동농사를 못한다는 사실이에요. 대부분의 도시텃밭이 봄에 개장해 가을에 폐장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겨울을 사막처럼 보냅니다. 그러니 도시농부의 먹거리는 반쪽짜리에 불과하고 토양을 살리는 환경보호 효과도 반감됩니다. 게다가 봄 되면 새로운 사람에게 땅을 분양해주니 공동체 함양도 남 얘기에 불과합니다. 매번 사람이 바뀌니까요. 저는 그래서 지속적인 경작권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으로 힘을 합쳐 땅을 매입하던가, 농촌의 방치되어 있는 땅을 도시농부들이 안정적으로 경작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던가 해야 합니다. 다년생과의 혼작 농작물은 일년생 식물이 대부분이죠. 그 다음으로는 위에서 말한 월동(越冬) 작물, 다른 말로 하면 한 해를 넘긴다 해서 월년생(越年生) 작물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많은 게 이른바 다년생 식물입니다. 재밌는 것은 이 다년생 식물은 야생 식물이 대부분이라는 점입니다. 야생 식물이기에 이 식물들은 또한 자생식물입니다. 말하자면 사람의 재배 과정이 없이 오랜동안 우리 땅에서 스스로 살아 온 식물입니다. 이 풀들은 오랜 세월 자연의 풍파 속에서 적응해 왔기에 우리 땅과 기후에 맞춰 왔습니다. 다르게 보면 야생 식물은 그 지역의 흙과 날씨를 가장 많이 닮았죠. 그런 식물을 먹고 살아 온 사람도 결국 마찬가지일겁니다. 반면 일년생 작물들은 대부분 귀화식물이 많습니다. 만주와 한반도가 원산지인 메주콩만 빼고는 말이죠. 특히 일년생 작물 중 임진왜란 전후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들이 많아요. 고추, 옥수수, 고구마, 감자 등이 대표적이죠. 그보다 들어온 지 더 짧은 것으로는 토마토가 있지요. 이런 작물들은 병이 많아요. 농약도 많이 치고, 물도 많이 주고, 비료도 많이 주는데다 비닐하우스 재배를 많이 합니다. 반면 야생 식물인 냉이나 쑥이나 각종 산나물 들나물은 병에 강하죠. 냉이가 고추처럼 탄저병에 걸렸다는 얘길 들은 적은 없잖아요? 이건 아마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자생식물보다는 훨씬 짧아 아직 우리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 환경에 오래동안 적응해 건강하고 우리 몸과 입맛에도 맞는 야생 식물보다 사람들은 왜 병에도 약한 재배 식물을 더 좋아할까요? 아마도 우리의 야생 식물엔 과채류가 별로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그렇더라도 엽채류는 우리의 야생 식물이 훨씬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요즘엔 그조차 귀화식물인 재배채소가 많은 건 좀 아쉽기는 합니다. 우리 나라는 야생식물, 곧 자연산 들나물 산나물이 매우 풍부한 지역입니다. 한반도는 빙하기가 짧아 그만큼 식물의 역사가 깁니다. 또 그만큼 먹을 수 있는 나물들이 많았습니다. 구석기 채집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인 고인돌이 세계에서 한반도에 제일 많이 분포하는 것은 먹을 게 많았다는 반증이고 저는 그걸 풍부한 자연산 나물 때문이라고 보거든요, 특히 서해안에 많이 분포하는 건 조개 등 단백질 섭취원이 펼쳐진 갯벌도 큰 역할을 했겠으나 산과 숲이 많은 강원도에도 고인돌이 발견되는 걸 보면 어디에나 자생한 야생 식물, 곧 나물들이 큰 기여를 했을 거라는 거죠. 이런 들나물 산나물은 실로 없는 데가 없을 정도로 어디에나 펼쳐져 있기에 따로 밭을 만들 필요가 없었습니다. 숲이나 밭이나 자투리 공간, 길가나 논둑 밭둑, 도랑, 집 마당과 울타리 주변 어디에나 씨 뿌리지 않았는데도 절로 자랐습니다. 우리 산천의 토양을 지켜 온 파수꾼이라 해도 손색이 없지요. 이런 풀들을 잡초라 여기고 제초제 뿌리고 비닐을 덮고 기계로 갈아버리면 우리의 토양은 근본이 약해지고 말 겁니다. 저는 그래서 이런 자연산 나물들과 재배 채소들이 공존하는 농지 경관을 강조합니다. 말하자면 재배 채소가 자라는 두둑은 신석기 농경문화가, 고랑이나 경계지 또는 길섭에는 구석기 채집문화가 공존하는 경관이 참으로 생태적인 모습이라 생각하지요. 말하자면 야생과 재배가 공생하는 윤작혼작의 확장이자 토양을 보호하는 생물다양성의 보고라 역설합니다. 제가 이른바 사계절 내내 먹거리 생명이 살아 숲을 이루는 먹거리숲을 제안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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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28
  • [송만규화백의 섬진팔경사계] 광양 무동산에서 봄
    -광양 무동산에서 봄 2016. 110x210. 장지에 수묵채색 무동산 1 새벽 서너 시 쯤 스케치하러 나선다. 그래야 해 뜨기 전에 정상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무동산(275m)은 높지 않지만 마치 삼각뿔 모양새로서 약간 가파른 산길을 따라 20~30분 소요된다. 오르막길에 들어서면 조그만 암자가 자리하고 있다. 여러 번 지나쳤던 요사(寮舍)에 인연이 되어 며칠 동안 머문 적이 있다. 창문을 열면 저 멀리 강물에 담긴 지리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새벽녘 낮고 장엄하게 들려오는 종소리가 계곡마다 전하는 여음이 진하게 파고 든다. 쌍계사인 듯하다. 이 곳 무등암에도 어느 중생을 위한 염불인지 목탁소리와 함께 낙낙한 주지승의 음성이 되돌아온다. 계단을 덮은 대숲을 조용히 지나자 새벽바람에 댓잎 스치는 소리가 스산함을 더하고 어둠이 적막함으로 다가온다. 강 건너 어스름한 하동 읍내의 아련한 불빛은 하나, 둘 꺼져가고 지리산과 백운산을 끼고 내려오는 강줄기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러한 분위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그간에 나는 새벽공기를 마시며 강변을 서성였나보다. 영감이 가장 몰입되는 순간이고 오롯이 혼자로써 사유하며 주변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산 정상 바위위에 가부좌 틀고 앉아 있으니 발아래 강물에서부터 맞은편 저 너머 어슴푸레하게 능선을 드러내는 지리산까지를 모두 섭렵하는 듯하다. 강가의 아침이란, 어느 강이든 그러하지만 특히 산을 휘감고 흐르는 섬진강은 잔뜩 설레이며 기대하게 한다. 시간과 기후에 따라 변화무쌍함을 연출하기에 기대치를 한껏 높이고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본다. 드디어 여명이 떠오르면 이 산, 저 산 골짜기, 강줄기마다 환희의 운해가 펼쳐진다. 주위는 순식간에 강한 입체감을 주며 집체무용이라도 연상케 하는 대단한 파노라마를 만들어 낸다. 어느새 남해 금산에서 힘찬 해가 솟아오르면 운해는 슬그머니 어디론가 퇴장하고 새 세상이 펼쳐진다. 무동산, 낮고 작은 산이지만 가장 가까이에서도 넓고 긴 섬진강을 보여주는 옹골찬 곳이다. 하류에 자리하고 있어 넓어진 강폭의 규모가 남해바다를 향해서 구불거리며 흐르는 곡선의 끝에는 광양제철의 굴뚝이 우뚝 서있다. 괜한 망상을 떠올릴 때가 있다. 기상변화로 인해 사계절이 없어진다면? 2 섬진강 물길은 600리 이다. 우리나라에서 아홉 번 째로 긴 강이다. 참 먼데서부터 흘러와준 것이 장하다! 조그마한 옹달샘, 전북 진안의 데미샘에 모인 물방울들이 흩어지지 않고 하나 되어 작은 도랑, 하천을 이루며 주변과 함께 어우러진다. 메마른 논밭에, 강가 언덕의 억새를 적셔주고 밭 메는 어머니의 갈증을 달래준다. 날 저물어 집에 돌아가는 아버지의 삽을 씻어주고 흘러간다. 높은 곳에 고여 있지 않고 필요한 곳을 찾아 아래로, 이 땅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간다. 또 다른 지천들과 함께 더 많은 곳을 더트면서 땅을 적시고 강을 이룬다. 그렇게 목마른 곳을 적시며 협곡이나 들녘을 돌아 돌아 서두르지 않고 이르른 곳 여기, 광양 무동산 아래에서 폭넓은 강, 강다운 강을 만든다. 섬진(蟾津)이란 이름은 우리민족의 역사와 사회의식을 담아내고 있다. 왜구가 강 하구에 침입했을 때 광양 땅 섬거에 살던 수십만 마리 두꺼비가 떼 지어 몰려와 울부짖자 왜구들이 피해갔다는 전설에 따라 불리어졌다는 고마운 두꺼비의 공덕을 광양군 다압면에 ‘섬진강유래비’는 전한다. 이렇듯 이 물길은 평온할 수만은 없었다. 선비들이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도포 깃을 휘날리고, 민중들이 시퍼런 죽창을 치켜세웠음에도 섬진강은 끊임없이 왜구들의 침탈로가 되었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과 관군의 치열한 싸움이었던 방아치전투(1894) 이후에도 동족상잔으로 강물을 물들게 했던 아픔을 안고 흐른다. 여인들이 잡은 재첩을 실어 나르는 동력선이 물길을 가르며 분주하게 다닌다. 저 앞에 지리산 능선의 부드러운 선율과 그 틈새에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조용히 숨어있는 강변마을이 주는 아련함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준다. 여기 강가의 사람들이 흘린 서러움과 눈물, 절망까지 모두 받아 안고 바다가 보이는 광양만으로 간다. 이제 600리 섬진강은 버려라. 그리고 바다의 시원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자기를 버린 물방울은 강이 되어 바다의 시원으로 거듭나 강들의 유토피아, 대동세상일 바다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릴 것이다. 경전선인 섬진철교에 화물열차가 지나갔다. 대 여섯 량을 단 여객열차도 평온하게 지나간다. 섬진교 위로 하동과 광양을 오가는 버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달린다. 두 다리를 품어주는 섬진강도 하나의 물줄기로 흘러간다. 목포에서 탔다는 아주머니가 집에서 삶아 온 달걀이라고, 경상도 아지매는 목을 축이라며 두유팩이 서로 오간다. 누가 강사이로 깊은 간극을 만들었나. 사람만이 나뉘어 가고 있다. 마음에 평화를 가져본다. -송만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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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9
  • [도시농부 안철환의 땅 이야기 6] 단작과 윤작&혼작
    [도시농부 안철환의 땅 이야기 6] 단작과 윤작&혼작 안철환(전통농업연구소 대표) 흙을 죽이는 단작 농경의 시작은 아마도 곡식 농사였을 거라 추측합니다. 곡식 농사로 비로서 잉여식량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상추 배추 같은 채소 농사로 농경이 시작되었다고 보기에는 적절치 않잖아요? 과일도 그렇고 가축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가령 채소와 과일은 채집으로도 충분히 얻을 수 있었을 것이고 고기도 수렵으로 얻을 수 있었겠지요. 그리고 이런 먹을거리는 잉여식량이 생기기 쉽지 않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겁니다. 그럼 왜 곡식농사가 농경의 시작이라는 걸까요? 처음 야생 곡식을 발견한 사람은 저는 남자일 거라 추측합니다. 왜 그럴까요? 곡식류는 벼과식물이 많고 벼과는 자가수분 식물들이어서 군락하는 특성이 있어요. 군락하려면 아무래도 들녘이 유리합니다. 자가수분 식물은 남의 꽃가루가 아닌 자기 꽃가루를 받기 때문에 벌이나 나비 같은 벌레에 의존해 수분하지 않고 바람 불어 꽃가루가 떨어지면 밑에 있는 암꽃이 받아 수정하는 것이죠. 그래서 충매화가 아닌 풍매화라고 하지요. 벌이나 나비 같은 동물에 의해 수정하면 씨가 여기저기 골고루 퍼질텐데 바람에 의해 번식하다보니 멀리 퍼지질 못해 군락하게 된 걸겁니다. 야생 곡식이 군락하기 좋은 들녘은 아무래도 강가에 가깝기도 했어요. 말하자면 숲과 가까운 언덕 움막 주거지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남자들이 강가 들녘으로 사냥이나 천렵 나갔을 때 발견한 게 야생곡식이었을 거라는 거지요. 게다가 채소는 매일매일 돌보며 수확해야 하기에 주거지 근처에서 재배했을 것이고 그래서 여성에게 적합했을 겁니다. 반면 곡식은 한꺼번에 특정 시점에 수확해야 하기에 매일 가보지 않아도 되었을 거니 수렵 나갈 때 돌보거나 날 잡아 한꺼번에 수확하러 가도 되니 남자들에게 적합했을 거라 보는 거죠. 그렇게 시작된 곡식에 의한 농경 혁명으로 잉여식량이 생기기 시작하자 여러 사회적 변화들이 동반되었습니다.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생겼고 그들 중심으로 권력이 만들어졌겠지요. 거기에서 가부장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회적인 얘길 하려는 건 아니에요. 이 곡식 농사는 자연스럽게 단작 농사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바로 군락 특성 때문일겁니다. 또 들녘을 좋아하는 특성도 영향을 주었겠지요. 그럼 단작을 얘기하려는 거는 왜일까요? 단작이 바로 토양을 망가뜨리는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작물은 한 땅에서 한 종류만 심게 되면 그 종류만 좋아하는 생물들이 모여듭니다. 미생물도 벌레도 기타 생명들도 단순해져요. 뿐입니까? 한 종류만 심으면 땅 속으로 뻗어가는 뿌리도 단순해지지요. 길이도 비슷할 거고요, 뿌리를 통해 내뱉는 작물의 대사물질도 단순해지고, 작물의 생산활동으로 뿌리에 축적되는 양분도 단순해집니다. 다양성을 잃어버린 토양은 점차 토양의 남은 유기물을 고갈시켜 갑니다. 유기물이 없어진 토양은 바람과 폭우 등으로 쉽게 침식, 유실됩니다. 그러면 토양의 보수력도 말라가고 결국 사막화의 길로 가는 거지요. 물론 단작을 하면서 화학비료도 주고 퇴비도 주면서 임시방편으로 당분간은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그게 얼마나 오래 갈까요. 임시방편일 뿐 아닐까요? 기후위기 시대에 이 문제는 머지않아 더욱 가속화될 우려가 큽니다. 단작은 연작, 광작으로 이어진다 했지요. 연작, 곧 같은 종류의 작물을 계속 이어서 심게 되니 위의 문제는 더 심각해지지요. 게다가 광작, 곧 같은 류의 작물을 드넓은 땅에서 재배하게 되면 한 지역이 사막이나 다름없게 됩니다. 한번은 스페인의 올리브 최대 단지가 있는 안달루시아 지방을 가보았는데 온 세상이 올리브만으로 덮여있는 곳을 몇 시간이나 달리는 겁니다. 경관이 너무 지루해 잠밖에 잘 일이 없는데 저는 자못 긴장하고 최대한 눈과 카메라에 경관을 담느라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곰곰 보니 두 가지가 안보이대요. 바로 새와 사람이 보이질 않는 거에요. 아~ 저건 올리브가 만든 사막이구나 했지요. 사람이 만든 거겠지만요. 이런 삶은 결국 지구를 사막의 별로 만들고 말 거라는 경고를 준 영화가 있지요. 바로 인터스텔라라는 에스에프 영화입니다. 끝없는 옥수수 밭 넘어로 엄청나게 밀려오는 흙먼지 폭풍이 결국 지구를 살 수 없는 별로 만든다는 암시를 준 영화지요. 이 거대한 흙먼지 폭풍은 1930년대에 실제로 있었던 미국 서부의 얘기에요. 서부에서 발생한 흙먼지 폭풍이 뉴욕이 있는 동부까지 날아갔다 하지요.* 근데 단작은 흙만 망가뜨린 건 아니에요. 단작은 나를 위해 농사짓는 게 아닌 남을 위해 농사짓는 문화를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남에게 팔기 위해 농사짓기 시작했다는 거죠. 잉여식량이 부로 축적되기 시작했고 거기에서 빈부격차와 계급, 계층 갈등,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아마도 단작은 만악의 시작일지 모릅니다. 게다가 단작은 붙박이 정주 사회를 고착시켰을 겁니다. 단작을 유지하려면 안정된 노동력을 유지해야 했을테니요. 사실 사람도 철새처럼 더울 때는 높은 곳이나 북쪽으로, 추울 때는 낮은 곳이나 남쪽으로 이동하며 사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기후 변화가 오면 자기들 체질에 맞는 기후 환경으로 옮겨 가며 살면 기후 위기도 별 문제는 아닐텐데요. 먹을거리도 때에 따라 곳에 따라 먹게 되면 기후위기로 인한 식량위기도 큰 문제는 아닐 것 같고요. 땅도 망가뜨리지 않으니 사실 환경파괴도 없을 겁니다. 그럼 왜 단작은 땅을 망가뜨릴까요? 앞의 글을 읽으신 분들은 벌써 아실 겁니다. 단작하는 인삼은 땅을 망가뜨리지만 야생에서 다른 생명과 공생하는 산삼은 땅을 망가뜨리지 않는다 한 거 기억나시죠? 그렇다고 산삼처럼 키울 수 없으니 우리는 인삼과 산삼 사이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한 겁니다. 저는 그게 전통적으로 이어온 윤작, 혼작 방식이라고 봅니다. 또 서두가 길어졌네요. 죄송합니다. 흙을 살리는 윤작, 혼작 드디어 본론입니다. 그럼 어떻게 윤작, 혼작을 할 수 있을까요? 우선 윤작, 혼작하는 농부는 소농이라는 점을 짚고자 합니다. 대농이 윤작, 혼작을 하기가 쉽지 않아요. 대농은 늘 단작에 유혹을 받지요. 그렇지만 아주 드물게 윤작, 혼작을 나름의 방법으로 실천하는 대농도 있긴 합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그런 분들을 소개할까 합니다만...... 윤작, 혼작하는 방식은 어떤 형태로든 서로 다른 성격의 작물을 이어심거나 섞어심어 그를 통해 토양을 건강하게 유지시켜주는 일입니다. 그 중 윤작은 한 작물을 재배해 수확하고 나면 다른 작물을 심어 재배하는 걸 말합니다. 벼 수확하고 나서 보리를 심는 이모작 방식이 대표적이죠. 벼와 보리는 같은 벼과 식물이라 비슷할 수 있지만 벼는 여름을 나고 보리는 겨울을 나는 점에서 다르죠. 생육 시기가 다르니 서로 경쟁할 일이 없어요. 또한 보리는 한 겨울 토양을 한파와 건조로부터 보호해줍니다. 당연히 겨울의 매서운 북풍도 막아주지요. 저는 이를 작물멀칭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작물을 심어 토양을 보호하는 거죠. 또 대표적인 윤작으로 마늘과 들깨를 이모작 하는 재배입니다. 마늘엔 고자리파리라는 해충이 골칫거리입니다. 그런데 이 놈이 들깨 향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들깨를 수확하고 그 자리에 마늘을 심으면 고자리파리를 못 오게 할 수 있는 거지요. 윤작 중에 재밌는 이름으로 그루갈이라는 게 있습니다. 한자로는 후작(後作)이라고 합니다. 한자를 보면 뒤에 심는다는 뜻을 쉽게 알 수 있죠. 말하자면 앞의 작물(전작前作)을 수확하고 나서 심는다는 것입니다. 근데 순 우리말인 그루갈이가 이해하기 좀 난해하죠. 말 자체를 보면 그루는 식물을 베고 남은 밑동입니다. 갈이는 그 밑동을 갈아 엎는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앞 작물의 수확 후 남은 밑동을 갈아엎어 후작물을 심는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혼작은 토양을 망가뜨리는 작물을 토양을 보호해주는 작물과 함께 심는 방식이 대표적입니다. 옥수수나 목화처럼 거름을 많이 먹는 작물은 토양에 거름을 만들어주는 콩과 함께 심는 겁니다. 옥수수는 식량이 아니고 한여름 장마철 한 때 먹는 군것질 먹거리라 많이 심지 않으니 콩 밭 둘레로 심었어요. 목화는 옷이나 이불을 해 입어야 하는 필수 작물이어서 군것질 용 옥수수처럼 조금 심을 수 없었으니 콩 한 줄 심으면 목화 한 줄 심는 식으로 좀 더 많이 재배했지요. 대표적인 혼작 방식으로 인디언 세 자매 농법이 있어요. 옥수수 콩 호박을 혼작하는 건데요, 콩은 질소를 고정해 비료를 많이 먹는 옥수수와 호박에 도움을 주고, 호박은 넓은 잎으로 그늘을 드리워 풀 발생을 억제하고, 옥수수는 지주 역할을 합니다. 그 말고도 시간 차를 이용한 의미도 있지요. 짧고 빨리 자라는 옥수수를 먼저 심어 여름 중에 수확을 하고, 두번째 심은 콩은 옥수수와 함께 집중적으로 자란 뒤 옥수수 수확하고 난 후엔 꽃 피워 콩 코투리를 맺고 영글어 갑니다. 호박은 자칫하면 콩을 덮어 그늘을 드리울 수 있기 때문에 콩을 먼저 심고 콩이 본격적으로 성장할 때 호박을 심습니다. 심는 위치도 콩 바로 옆이 아닌 옥수수 옆에다 심어 옥수수 대를 타고 올라가게 하여 콩을 보호합니다. 그래서 혼작 방식엔 시간 차를 이용하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세 자매 농법엔 우리식도 있습니다. 고추를 주 작물로 심고 부작물로 들깨와 수수를 심는 거에요. 고추를 줄 지어 심은 후 들깨를 2미터 간격으로 드물게 심고 수수는 3미터 간격으로 더 드물게 심는 겁니다. 들깨의 향은 고추 열매를 구멍 뚫고 들어가 속을 파먹는 담배나방 애벌레 예방할 수 있습니다. 수수는 키가 크지만 잎은 그리 넓지 않아 고추에 그늘을 드리우진 않으면서 뿌리의 길이도 다르고 좋아하는 양분도 달라 고추와 경쟁하지 않아요. 오히려 서로 궁합이 맞아 좋은 작용을 한다네요. 그런 식물간의 작용을 아레로파시(Allelopathy), 곧 타감(他感) 작용이라 합니다. 물론 경쟁적인 타감작용도 있습니다. 식물은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화학물질을 발사하여 자기를 방어하기도 하고 서로 협력하기도 합니다. 요즘엔 토마토를 바질과 함께 심는 게 많더라구요. 혼작도 유행이 있는가 봅니다. 토마토는 대파와도 좋습니다. 그래서 혼작을 하려면 경쟁하지 않고 협력하는 작물 관계를 파악하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윤작, 혼작 말고 재밌는 작부체계가 있는데 바로 간작, 곧 사이짓기입니다. 사이짓기로 재밌는 사례로는 봉동생강 재배법이 있습니다. 전북 완주의 봉동은 최초의 생강 시배지로 유명하죠. 재밌는 것은 생강을 보리밭 사이에다 심는다는 겁니다. 보리를 심을 때 생강 심을 자리를 대비해 줄 간격을 미리 좀 넓게 심습니다. 그리고 보리를 수확하기 한 달 전쯤 보리 줄 사이에 생강을 심습니다. 보리를 이삭만 수확하고 남은 보릿대를 생강에 덮어줍니다. 생강은 습기를 잘 유지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보리를 수확하고 나서 심으면 때가 늦고, 보릿대를 덮어주기도 힘들죠. 간작은 이런 식으로 시간 차를 이용하는 방식입니다. 벼와 보리를 이모작하는데 남부지방은 벼 수확 후 보리 심는 게 자연스러운데 중부지방은 좀 추워 벼 수확 후 심으면 늦을 수가 있어요. 그럴 때 벼 수확 전 사이에다 보리를 심는 거지요. 다음 글에선 다년생 나물과 유실수 및 특용수와 혼작하는 법과 채집에 대한 얘길 들려드리겠습니다.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이 글은 전국도시농업시민협의회 홈페이지에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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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28
  • [송만규화백의 섬진팔경사계] 왕시루봉 봄
    [송만규화백의 섬진팔경사계] - 蟾津 5景 - 왕시루봉의 봄 -왕시루봉 봄, 2016. 140*200, 장지에 수묵채색 왕시루(상) 섬진강은 혼자가 아니다. 높고 낮은 산들과 더불어 흐르고 있다. 그 중 지리산이 품고 있는 남원, 구례, 하동을 싸안고 흐른다. 고준광대(高峻廣大)하면서 중후인자(重厚仁慈)하여 아버지 같기도 하고 어머니 같기도 한 웅대함을 지닌 영산(靈山), 지리산! 그런 만큼 1967년 국립공원 제 1호로 지정되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45킬로미터가 넘는 주능선에 반야봉, 토끼봉 등 고산 준봉이 20여개가 있으며 85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산속의 산’을 안고 있고 15개의 지능선과 계곡들이 있는 그야말로 산괴(山塊)이다. 어느 산악인의 고백처럼 지리산은 찾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 노고단에서 구례군 토지면을 향하여 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에 왕시루봉이 있다. 정상부분이 펑퍼짐하고 두루뭉술하고 커다란 시루를 엎어 놓은 것 같다 하여 왕시루봉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곳과의 인연은 토지면 파도리 부터 이다. 1990년대 초, 왕시루봉 별장의 산사람 함태식 선생을 찾아서 문학인들과 함께한 산행이 시작이다. 그날 낯선 경험을 했다. 화장실에서 용변 후에 재를 뿌린다. 그러면 냄새가 제거 된다고 하던데 그런가보다. 습기 찬 여름인데도 개운하다. 선생은 주변 환경으로 안내 한다. 그 이후 나는 밤낮 구분 없이 몇 번을 오르내렸던가! 두 세 시경 구례구역에 도착하는 열차를 탄다. 택시로 갈아타고 토지면 왕시루봉 입구까지 간다. 그야말로 칠흑 같은 밤, 쏟아지는 별빛과 헤드랜턴에 의존하고 더듬거리며 산길을 오른다. 이곳에는 반달곰, 멧돼지가 서식하기 때문에 주의를 해야 한다. 서로 피해의식이 있다. 배낭에 놋쇠로 만든 종을 매달아 소리를 내고 가끔 헛기침으로 경계하면서 오른다. 섬진강을 가장 높은 위치에서 멀고 길게 볼 수 있는 곳이기에 여러번 찾은 곳이다. 어둠이 걷히면서 청아한 새벽 공기에 은빛의 물길이 그려진다. 지리산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깊숙함 속에 환희가 있다. 겹겹이 쌓여진 산과 하나 되어 유유자적한 강물까지도 의연함을 자아내는 신새벽을 맞이한다. -송만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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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27
  • [송만규화백의 섬진팔경사계] 붕어섬의 봄
    蟾津 1景 - 붕어섬의 봄 붕어섬 (상) 글쎄, 듣고 보니 금붕어 모양새다. 꼬리를 살짝 틀어 재치고 힘 있게 돌진하는 기세가 있어 보인다. 이 붕어섬이 있는 본래의 지명은 외앗날이다. 그런데 유유히 흐르던 섬진강이 아픈 시련을 맞게 되었다. 1928년, 이 강이 갖고 있는 수자원을 유용하겠다는 것이다. 그 해 호남지역에 극심한 가뭄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와 임실군 강진면 옥정리를 마주하는 협곡에 높이 40m의 댐을 만들었다. 남류하던 섬진강물중 일부는 땅속에 파이프라인을 뚫어 숭어가 노는 서해안으로 흐른다. 그 물은 동진강을 따라 가보면 광활한 호남평야, 개화도의 메마른 논바닥을 적셔줄 농업용수로 사용되었다. 이후 수력발전 등 다목적댐으로 만들어졌다. 거기, 댐 아래로 처음 낙하하는 곳에 정읍 칠보 수력발전소가 있다. 그러면서 삶의 근거지인 논과 밭, 다니던 길과 집들이 고스란히 물에 잠기고 이곳은 졸지에 섬이 되어버렸다. ‘산 바깥 능선의 날등’이란 뜻으로 ‘외앗날’이라 부르는데 오가는 이들이 금붕어를 닮았다하여 붕어섬으로 불리어져 함께 쓰인다. 댐으로 만들어진 이 저수지 이름을 지을 때 이 지역에서는 ‘구름과 바위의 전설을 많이 지니고 있는 곳이니 운암호’라 불리워지기를 원했으나 중앙정부에서 옥정호로 결정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이 근처에 옥정리(玉井里)라는 마을은, 조선 중기에 이 마을을 지나던 스님이 ‘이 곳은 머지않아 맑은 호수, 즉 옥정(玉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여 마을이름을 옥정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옥정호 때문에 임실군 운암, 강진, 신평, 신덕면과 정읍시 산내면 등 2군 5개면이 물에 잠겼고 2만 명 가량이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그중에 상당수는 부안군 계화도 간척지 등 낯선 땅으로 옮겨졌다. 붕어섬 (하) 붕어섬은 아리고 아린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은 실향민들의 양보와 배려의 결실물이다. 그러나 자연은 붕어섬을 외로이 물에 가둬 놓지만은 안했다. 관심 있는 수많은 이들의 끊임없는 발길이 함께한다. 구절양장(九折羊腸)의 도로를 즐기며 드라이브하기 좋은 곳, 옥정호이다. 또한 옥정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담아갈 수 있도록 13km 이르는 물안개길이 있다. 옥정호가 손에 닿을 듯 말 듯, 호수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오솔길이 만들어 낸 트래킹 코스다. 화려하거나 웅장하게 꾸며지지 않아서 그야말로 마음 편안히 맡길 수 있는 쉴만한 공간이다. 옥정호는 뒤편으로 오봉산이 병풍처럼 싸안고 있어서 더욱 포근함을 안겨준다. 그 산에 15분가량 올라가면 국사봉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호수 가운데 붕어섬이다. 그 곳에는 사람 냄새가 물씬 난다. 함께 지내던 이웃들은 떠났을지언정 이른 봄이면 새 희망의 기운이 솟는다. 갈아엎어 붉은 색조를 띠는 밭두렁에서는 뭔가를 이뤄낼 듯이, 새 생명을 암시하듯이 아침 햇살에 따뜻한 훈김을 뭉실뭉실 피어 올린다. 작은 섬이지만 시간의 변화를 읽게 해주는 공간이다. 그야말로 변화무쌍함을 만들어내는 설치작품 같은 곳이다. 여명이 동터오를 새벽녘에는 그야말로 승경이다. 가을 날 기온차가 생길 때면 전망대에는 발 디딜 틈이 없다. 사방에 둘러쌓인 산과 그 안에 안겨있는 호수가 어우러져 펼쳐지는 혼미한 기상 쇼를 보기 위해서이다. 동녘의 햇살은 섬진강 발원지인 저 멀리 진안 마이산의 두 귀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호수에 비춰온다. 지자체에서 관광개발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외앗날에, 붕어섬의 지느러미 하나도 소실되지 않고 소중하게 간직해야 한다. 장자(莊子)의 조탁복박(彫琢復朴)이란 말이 호수위에 어른거리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꾸미거나 수식(修飾)하지 말고 본래의 내 모습을 소중히 여기며 참 나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던가. -송만규 화백의 '강의 사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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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15
  • ① 기획연재 《기억 속 사찰》을 시작하며
    ① 기획연재 《기억 속 사찰》를 시작하며 윤주옥 2023년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 지리산사람들’과 화엄사성보박물관, 지리산국립공원 전남사무소는 ‘지리산 사찰 문화유산 기록사업단(기록사업단)’을 구성하고 문헌조사와 현지답사, 면담을 통한 채록 등을 진행하여 『기록과 기억 1 지리산 구례지역 사찰』을 발간하였습니다. 사찰과 사찰, 사찰과 암자, 암자와 암자를 이어주던 옛길은 수행자의 순례길이기도 하고, 궁박한 산골 주민들의 생활길이기도 하며, 한국전쟁 당시 산사람들의 생사 갈림길이기도 합니다. 이제 이 길들은 끊어져 산에 사는 동물 발자국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그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암자터와 함께 옛길에 대한 답사와 기록이 필요하고, 사찰과 암자에서 수행 중인 스님들, 사찰과 관계 맺고 살아온 지역민의 면담을 통해 잊힌 암자와 옛길, 현존하는 암자와 길들에 대한 기억을 채록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더불어 사찰과 암자, 옛길 주변의 식생(植生)을 조사하고, 지리산 숲과의 차이점을 확인하는 작업도 필요했습니다. .『기록과 기억 1 지리산 구례지역 사찰』은 산길을 오르고, 기와와 자기 파편을 한 조각이라도 더 찾으려는 기록사업단 활동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스님과 주민을 만나기 위해 암자를 오르고 마을회관을 찾아가고, 사진과 영상 작업을 마다하지 않은 마음이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기록사업단은 산동에서 천은사, 천은사에서 화엄사, 화엄사에서 문수암, 문수암에서 연곡사 등으로 가는 옛길을 답사하고 기록했으며, 화엄사, 천은사, 연곡사 영역 등 구례지역 암자터 26곳을 답사하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화엄사 등에서 수행하는 스님 7명, 사찰 거주인 1명, 구례 주민 3명 등 11명으로부터 지리산 구례지역 사찰 모습, 화엄사와 천은사 산내 암자, 암자터 등에 대해 들었습니다. 기획연재를 시작하는 《기억 속 사찰》은 『기록과 기억 1 지리산 구례지역 사찰』 중 일부입니다. 《기억 속 사찰》은 켜켜이 쌓아둔 기억들, 장엄한 역사문화유산, 크고 작은 절에서 보고 들은 바, 큰 절과 아랫마을 사람들 등으로 나눠 연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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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10
  • [이호신화백의 지리산그림순례] 산청 남사예담촌의 봄
    산청 남사예담촌의 봄 이호신 작 (한지에 수묵과 채색, 69x275cm, 2025년) 1-2산청 남사예담촌의 봄(부분도1) 1-2산청 남사예담촌의 봄(부분도2) 나와 남사예담촌의 인연은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국문화유산답사회원으로 마을을 만났고 하씨 고가의 700살 ‘원정매(元正梅)’를 알게 되었으며 산청 3매(원정매, 정당매, 남명매)를 그리러 자주 마을을 찾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08년 마을 전경을 그려 발표하였고 그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산청 니구산 남사마을> 200호, 167x270cm) 남사예담촌과의 인연이 성숙되어 2010년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귀촌한 이듬해에 남사마을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제1호’로 선정(2011년)되었다. 이에 마을 홍보를 위한 화문집 『남사예담촌』의 마을 전경을 새로운 각도(마을 벌판에서 니구산을 바라보는 시선)로 그린 것이 <남사예담촌의 가을> 200호, 170x271cm, 2011년)이다. 이어 3년 후 <남사마을의 겨울 밤>(60x94cm, 2014년)도 그리게 되었다. 이러구러 시간이 흘러 마을은 많은 변화가 생겼다. 어느덧 귀촌한 지 만 15년 차로 그동안 염두에 두었던 마을 신작에 골몰했다. 마침 산청군에서 금년 (2025년)을 ‘산청 방문의 해’로 선정하였기에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의 면모를 화폭에 담아 선양하고 싶어졌다, 새로운 마을 전경을 위해 이번에는 두루마리 형식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수차례 현장을 답사하고 밑그림을 그리며 마을 주민들의 조언을 들었다. 사계절 중 봄의 생태로 남사 8매와 문화유산인 고택을 중시하며 함께 사는 마을로 그리려 했다. 현대문명 생활로 자동차, 농기계와 주민, 그리고 관광객들도 넣어 생활산수가 되게 하였다. 마을 전경 화면은 지리산 웅석봉의 산맥을 뻗어 내린 니구산 정상에서 본 마을을 중심으로 설정했다. 원경의 산 물결인 망해봉, 집현산, 광제산 위로 떠 오른 해를 넣어 마을의 생동감과 새날의 희망을 염원한 것이다. 그리고 마을을 가로지르는 남사천은 마치 정지용의 시 「향수」에서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의 풍광을 보여 주는 듯하다. 이 그림을 통해 마을의 홍보는 물론 앞으로 새로 건축하거나 정비할 사항은 심사숙고하여 마을의 원형을 유지하면서도 미래 지향적 개발을 바라는 마음이다. 관계 당국과 마을 주민의 숙의를 통해 아름다운 마을의 명예를 유지해 주기 바란다. 따라서 현재(2025년) 마을의 현황을 남사천을 중심으로 <남사지역> <상사지역>으로 나뉘어 기록해 둔다. <남사지역> 남사마을 옛 담장 (국가등록문화재 제281호), 이씨고가, 정씨고가(사양정사), 최씨고가, 하씨고가, 영모재, 사효재, 경화당(마을회관), 남학재(사무실), 노인회관 정자: 남사정, 남학정, 여사정, 포구정 숙소: 예담한옥, 예다움, 옛향토집, 사양정사, 스테이예담, 다온한옥, 식당: 예담원, 예담촌참살이, 예담촌흑돼지, 왕콩나물요리집, 남사별곡 카페: 지금이꽃자리, 순이진이갤러리, 예담방아로빈, 소락방커피숍, 커피엔더블 주요식물: 이씨고가 부부회화나무, 삼신할머니회화나무, 최씨고가 회화나무, 원정매, 정씨매, 최씨매, 이씨매, 경무매, 경무송, 사효재 향나무와 은행나무, 하씨고가 감나무, 정씨고가의 단풍나무 기타: 제1주차장, 제2주차장, 제3주차장, 당산과 제례석, 마을연혁비, 물레방아, 효자정려비각, 삼백헌과 북바위, 이제개국공신교서비, 오늘화실, 예담족욕, 원정공유허비, 남사방앗간, 남사교회, 봉양사(진주강씨 재실) <상사지역> 니구산, 니구산성, 니구산전망대, 장수황씨 묘, 사상정, 망추정, 마을회관, 기산재, 기산국악당, 그네와 정자, 니사재(박씨재실), 채남정, 내현재, 소리재, 남사재와 예담재(한옥펜션), 면우 곽종석 생가와 파리장서탑, 초포정사, 이동서당, 유림독립운동기념관, 주요식물: 기산매, 면우매, 박씨매, 기산송, 니사재 목백일홍, 채남정 팽나무 세 그루, 초포정사 골목의 산수유 고목과 감나무, 내현재 길목 멀구슬나무, 상사마을회관 앞 자목련 남사천 주변: 남사와 상사마을을 잇는 두 다리, 강변 데크둘레길, 강을 건너는 징검돌 두 곳, 용소바위, 자라바위, 남사천 주변의 조류: 제비, 참새, 까치, 산까치, 물까치, 후투티, 백로, 흰뺨검둥오리, 비오리, 원앙, 왜가리, 가마우지 등 1-산청 남사마을전경 스케치 1-1 산청 남사마을전경 스케치(부분도1) 1-2 산청 남사마을전경 스케치(부분도2) 2-. 산청 니구산 남사마을 2005 3-남사예담촌의 가을 4-남사예담촌의 밤 60x94cm 2014년-9782-1
    • 기획
    • 지리산그림순례
    2025-03-09
  • [도시농부 안철환의 땅 이야기 5] 윤작과 혼작
    윤작과 혼작 안철환 (전통농업연구소 대표) 흙에서 살며 흙을 살리고 내가 사는 제일 중요한 방법은 흙에서 먹을거리를 얻는 일이라 봅니다. 그게 흙과 소통하는 일이에요. 먹을거리를 얻기 위해 흙과 소통하는 방법으로는 경작과 채집이 있어요, 이 둘 다를 농사라 할 수도 있고 경작만 농사라 할 수도 있습니다. 이론적으론 경작만 농사일 수 있지만 우리 전통 문화에선 채집도 농사의 한 부분이었지요. 아무튼 이번 글에선 흙에서 살며 흙과 소통하는 것으로 경작과 채집을 얘기하려 하구요, 경작에선 먼저 윤작과 혼작을 살펴봅니다. 얘기에 앞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우리나라의 미개한 농법을 계몽한다는 미명으로 권업모범장이라는 기관을 만들어 자기들 농학자들을 파견했습니다. 권업모범장은 지금의 농촌진흥청 전신입니다. 그래서 농진청의 태생적 한계를 지적하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농진청이 원래 있던 자리는 정조대왕이 천도 목적으로 수원 화성을 지으며 관개용수로 서호라는 저수지를 만든 주변 농경지 일대에요. 그러니까 농진청의 역사를 거슬러올라가면 정조대왕이 나오니 권업모범장만 떠올릴 일은 아니죠. 아무튼 권업모범장을 통해 일본의 실력있는 농학자들이 조선에 들어와 조선의 농업을 식민정책에 맞게 식량 공출기지로 바꿔 나가려 했을 때 들어온 사람 중에 다카하시 노보루(高橋 昇)라는 농학박사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좀 남달랐습니다. 조선 농법을 살펴보니 들은 바와 달리 미개한 농법이 아니라 일본 이상 가는 지혜로운 농법이라는 걸 간파한 겁니다. 그 중에 이 사람이 크게 평가한 것은 2년3작이라는 윤작법이었습니다. 조선 농부들은 2년에 두 번 농사짓는 게 아니라 세 번 지었다는 얘깁니다. 두 번 해 먹을 걸 세 번 지어먹는다고 토양이 고갈되는 것도 아니었어요. 오히려 반만년 같은 자리에서 농사지어도 지력이 고갈되기는커녕 보존을 넘어 더 증진되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그런데 이른바 녹색혁명, 백색혁명으로 농업을 현대화한다면서 우리 농경지 지력은 반토막이 났습니다. 보리고개를 극복했다지만 땅심은 반토막이 났으니 그게 농업 현대화일까요? * 아무튼 다카하시 노보루 박사는 사비를 들여 함경북도에서 제주도까지 샅샅이 돌며 조선의 농법과 농민들의 삶을 살펴 본 책을 썼습니다.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이란 책이 그것입니다. 1천여쪽에 달하는 방대한 책인데 사비를 들여 썼으니 바로 출간을 못하고 죽은 뒤 아들이 유고를 갖고 있다 1983년도에야 민간출판사에서 낼 수 있었습니다. 그 책이 2000년대 들어와 우리에게도 소문이 나면서 복사판 책이 돌았습니다. 해적판이라고 하지요. 그 소식을 들은 다카하시 아들이 꽤나 화가 났던 모양입니다. 농진청의 직원 한 분이 그 아들을 찾아가 선친의 유고를 우리 농진청에 기증해달라는 부탁을 했을 때 무조건 거절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을 겁니다. 자세한 경위는 못 들었지만 결국엔 우리 농진청에 기증하기로 결정했어요. 그걸 끝까지 설득한 농진청 직원이나 결국엔 기증하기로 결정한 아드님이나 모두 대단한 분들이다 했어요. 기증식에 저도 가 보고 유고도 살펴보고 그 아드님과도 인사 나누고 기념촬영도 했는데, 점잖고 온화한 인상을 가지신 분이다 싶었습니다. 다카하시 노보루 박사에게 영향 끼친 미국의 유명한 농학박사가 있었습니다. 프랭클린 히람 킹(Franklin Hiram King)이란 분으로 1909년 한 중 일 3국을 1년에 걸쳐 돌면서 이 지역의 농업을 소개한 책을 썼지요. 휴경하지 않고도 같은 땅에서 4천여년 농사지어 왔지만 지력을 고갈시키지 않고 농사지어 온 동양 농부들의 지혜를 현장을 돌며 파악한 책으로 그 중 앞의 다카하시 박사가 본 윤작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어요. 윤작 중에도 콩을 중심으로 한 작부체계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지요. 거름도 만들어주면서 토양의 물리성도 좋게 해주는 콩을 중심으로 지력을 고갈시키는 작물을 혼작 또는 윤작을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지력을 아주 많이 빼먹는 옥수수는 콩 밭 둘레로 심고, 물과 땅심을 엄청 빼먹는 목화는 반드시 옆에 콩을 심는 식입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없던 시절, 배로 몇 달이나 걸리는 태평양 반대편의 지역을 미국의 농학자는 왜 왔을까요? 거름도 주지않고 목화 담배 같은 지력 수탈작물의 거대한 광작(廣作)으로 토양을 망가뜨리고도 그걸 살리려 노력하기보다 서부의 미지의 땅을 개척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는 미국의 농업문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였죠. 킹 박사는 윤작 말고도 똥을 비롯한 모든 부산물을 퇴비화하여 땅으로 되돌리는 순환농사, 인위적인 관개시설 없이 천수답 논의 지혜로운 물관리도 소개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이미 하버, 보쉬라는 과학자들이 공기 중의 질소를 인위적으로 고정시켜 질소비료를 만드는 기술을 발명하는 바람에 이들의 아이디어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질소비료 생산은 농 기계화와 함께 단작(單作), 광작(廣作), 연작(連作)을 통한 대량 생산체제를 뒷받침하며 농업의 현대화를 더욱 가속화시켰습니다. 그렇다면 농업의 현대화는 토양의 지력도 함께 증진시켰을까요? 아니죠, 농업의 현대화는 토양의 고갈을 속으론 심화시키면서 그걸 임시로 가렸을뿐입니다. 조상들이 물려 준 지력이 뒷받침되었기에 질소비료가 효과를 본 것인데 그걸 애써 외면하다 지력의 고갈이 한계점에 도달하면 질소비료도 아무 소용 없는 때가 올 것이거든요. 땅심을 지켜주는 윤작, 혼작 인삼과 산삼의 차이를 아시죠? 인삼의 원종이 산삼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게 산에서 야생으로 자라면 산삼이고 밭에서 인간에 의해 재배되면 인삼인 것이죠. 그런데 둘 사이엔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인삼은 같은 자리에서 잘 해야 5~6년 자라고 산삼은 같은 자리에서 몇 십년을 살고 더 오래 살면 가치가 더 높아지죠. 말하자면 인삼은 지력 수탈로 연작피해가 생겨 5~6년밖에 키우지 못하지만 산삼은 그런 게 전혀 없는 거에요, 그래서 그런지 인삼은 6년간 80g 자라는데 산삼이 그만큼 자라려면 60년 정도 걸린다네요. 이 둘의 차이는 다르게 보면 자연산(야생)과 재배(양식)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연산은 크게 자라지 않지만 오래 살 수 있고 재배한 것은 크게 자라지만 오래 살 수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크게 자란다는 것은 수확량이 많다는 것이고 오래 산다는 것은 같은 토양에서 옮기지 않고 연작이 가능하다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좀 더 따져볼까요. 사실 수확량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토양을 수탈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토양 수탈이 일정 기간 지속되면 당연히 토양이 망가집니다. 토양이 작물 재배에 의해 수탈된다는 의미는 특정 작물에 맞는 토양의 양분이 편중되게 고갈된다는 것입니다. 특정 작물을 재배하여 많은 수확량을 얻으려면 단작(單作)은 필수입니다. 그에 따라 넓은 면적의 재배, 곧 광작(廣作)으로도 이어지고 계속 한 작물을 심는 연작(連作)도 불가피한 선택이 됩니다. 그리고 과도한 비료 투입과 화학자재 및 에너지도 많이 투입되기 마련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장기간 재배하게 되면 토양은 산성화되기 쉽고 고투입으로 인한 염류집적도 피할 수 없죠. 더 오래되면 농사가 불가능해지는 지경까지 갈 수도 있고 이미 그 전에 자연 재난에 의한 토양 유실, 침식으로 더 빠르게 망가질 수도 있어요. 반면 산삼이 크기와 수확량은 적더라도 같은 자리에서 몇 십년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전혀 토양을 망가뜨리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수확량이 적다는 것은 토양을 별로 수탈하지 않는다는 얘기와 통합니다. 또 산삼은 군락하지 않죠. 한쪽 구석에 숨어서 몇 포기만 자생하니 찾기 힘든 걸겁니다. 작물로 비유하면 단작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거에요. 주변 여러 풀들과 공생하고 있는 거지요. 작물로 치면 혼작인 셈이에요. 이러니 토양이 수탈되지 않아 앉은 자리에서 오래 살 수 있는 것이죠. 그렇지만 먹고살아야 할 식량을 구해야 한다는 점에선 산삼 같이 구하기도 힘들고 양도 적은 것을 토양을 수탈하지 않는다는 근거로 무조건 환영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많은 식량을 얻기 위해선 단작, 광작, 연작 방식이 불가피할 수 있습니다만 그 재배방식을 오래 지속하다 토양이 고갈되 결국 아무 식량도 얻을 수 없게 된다면 다수확 방식이라고 무조건 환영할 수 있을까요? 기후위기 시대에 이런 단작 방식은 특히 취약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먹을 식량도 지속가능하게 얻으면서 토양도 고갈시키지 않는 방식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바로 인삼과 산삼 사이에서 찾으면 됩니다. 넘쳐나도록 잉여식량이 많지는 않지만 굶지는 않을 정도의 식량을 얻으면서 토양은 망가뜨리지 않는 방식이죠. 그게 뭐냐고 물어보면 저는 과감히 윤작과 혼작, 그리고 채집이라고 말합니다. 말이 길어져 이의 자세한 방법에 대해선 다음 글로 미루어야 겠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 통계자료를 보면 1922년경에는 우리 농토의 논토양유기물함량이 4.4%(밭토양3.4%)까지 올라간 때도 있었는데 점점 낮아져 2000년대에 들어와서 2.2%대로 낮아졌다. “친환경농업과 토양유기물 함량”(흙살림연구소: http://www.heuk.or.kr/info/sub1_3.asp?seq=636&boardId=info01_3&page=12&searchField=2&searchValue=&sCategory=&mode=read) ** 2014년에 같은 이름으로 국내 민속원이란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하였습니다.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이 글은 전국도시농업시민협의회 홈페이지에도 연재되고 있다.
    • 기획
    • 땅이야기
    2025-03-05
  • [도시농부 안철환의 땅 이야기 4] 오행론으로 본 땅과 흙
    오행론으로 보는 땅과 흙 이야기 안철환 (전통농업연구소 대표) 토양학을 어깨 넘어로 공부해보니 대부분 서양의 학문이라는 걸 알고 은근히 아쉬웠어요. 서양의 지질학, 미생물학, 화학, 생물학 등에 기반한 것이죠. 동양의 토양학, 아니 우리의 토양학을 찾고 싶었지만 언감생심이었죠. 풍월을 읊는 3년 넘은 서당개 수준도 못 되어 본격적인 논지는 풀지 못하고 몇 가지 문제제기와 시사 정도에서 그치는 게 이번 글이 될겁니다. 일단 간단하게 짚고 싶은 문제제기는, 서양에서 들어온 기존 토양학엔 미시적인 과학 얘긴 탁월하지만 거시적인 얘긴 부족해 보인다는 겁니다. 그 중 흙 얘기하는데 하늘 얘기가 없고 사람 얘기가 없다는 겁니다. 이게 아마도 서양의 학문은 나누는 데 기반한 곧 분류학에 기반한 한계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통합과 연계학이 빠진 거죠. 그런 얘길 이번 글에서 조금 얘길 해볼까 합니다. 오행론으로 본 땅 이야기 오행론(목, 화 토, 금, 수)은 하늘을 5가지로 나눈 얘기애요. 하늘의 주인공은 태양이죠. 동(木) 서(金) 남(火) 북(水)을 가르는 태양의 운행에 맞춘 것입니다. 중앙에 바로 흙(土)이 있고 그 위에 사람이 있는 꼴입니다. 나(사람) 있는 곳이 중심(土)이고 그 중심으로 네 개의 하늘이 펼쳐져 있고 그 하늘에 따라 대지도 네 개로 나눠지는 것입니다. 전형적인 예가 4 대문으로 둘러싼 서울입니다. 동대문은 해가 뜨는 동쪽에 있어 오행의 목에 해당하고 그것은 씨앗의 발아 기운이고 파종의 힘입니다. 그래서 동대문의 다른 이름인 흥인지문(興仁之門)의 인(仁)이 바로 씨앗을 뜻하는 것입니다. 과일의 씨를 행인(杏仁)이라 하잖아요. 인(仁)이란 글자는 아이를 밴 임신부의 모습을 상형한 것으로 씨앗이라 하기에 적당하죠. 그래서 인은 씨앗, 파종 등을 뜻하고 큰 의미로는 사랑(love)에 해당하기에 널리 사랑의 기운을 흥하게 하는 문, 또는 그런 대지의 입구라는 뜻이 되는 겁니다. 이런 기운이 흥한 땅은 바로 동향이거나 동남향의 땅입니다. 제가 처음 농사지은 땅이 바로 동남향이었습니다. 위치가 그러하다보니 일출 장면이 장관이었습니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동트기 전 밭에 해뜨는 걸 보려고 달려갔지요. 새 해 보러 동해안으로 가는 건 의미없는 일이라는 걸 바로 알았어요. 밭에서 일출이 장관인 것은 해 자체보다도 해 뜨기 전부터 일출을 알려주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그에 맞춰 흙에서 꼼지락거리는 벌레와 풀들의 몸짓들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아침의 기운이 강한 곳이 동향, 동남향의 땅이라는 거지요. 그런 땅은 아침과 오전, 계절로는 봄에 강하죠. 이런 곳의 해는 자외선이 강하고 오방색 중 파란색 부분이 강해 햇빛 파장이 짧습니다. 파장이 짧다보니 깊숙이 파고들진 못하고 잎사귀 표면에 영향을 많이 주어 줄기와 잎 생육에 좋습니다. 이런 곳에선 잎사귀 먹는 채소류와 나물류가 잘 됩니다. 봄부터 절로 올라오는 냉이에서부터 쑥까지 야생 나물류가 좋지요. 상추나 시금치 배추도 좋습니다. 제가 태어난 왕십리는 성동구에 있어 서울에서 보면 동쪽 땅입니다. 그래서인지 옛날 이곳은 4대문안 사람들 먹을 채소농사를 많이 했어요. 남대문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남쪽에 있어 오행으로는 화(火)에 해당합니다. 계절로는 뜨거운 더위의 여름에 해당합니다. 근데 이름이 왜 숭례문(崇禮門)일까요? 더운데 뜬금없이 예를 숭상할까요? 근데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덥다고 아무 데서나 옷을 확확 제껴 던지면 곤란하잖아요. 더울수록 예를 갖춰야 한다는 거죠. 또 우리의 여름은 습하면서 더워 만물이 극 성장을 합니다. 이른바 몬순기후의 특징입니다. 건조하면서 더운 유럽이나 중동지방 같은 경우는 뜨겁기만 한 태양의 화 기운 때문에 다 죽지요. 모든 게 극성장하는 우리 여름은 농번기인 것과 달리 그 지역은 여름이 농한기입니다. 암튼 이렇게 모든 게 왕성하게 성장할 때에는 마찬가지로 예의 덕목이 필요합니다. 무조건 성장만 할 게 아니라 완급을 조절하며 성장하라는 거죠. 무조건 성장만 하면 웃자라기만 합니다. 내실을 다지면서 성장해야 하는데 그럴 때 예가 필요합니다. 이런 남향의 땅에선 열매나 이삭을 맺는 작물이 잘 됩니다. 고추나 오이 호박 같은 과채류나 벼나 옥수수 수수 조 기장 같은 곡식이 잘 되지요. 일조량이 풍부해 생육에도 좋지만 잘 자란 잎과 줄기의 광합성 활동으로 뿌리의 양분 축적이 활발해 그 힘으로 열매와 이삭을 많이 다는 거죠. 서대문은 독립문이 아니고, 돈의문(敦義門)이라고 있었어요. 경향신문 앞 정동사거리에 있었죠. 말 그대로 의(義)를 돈독히 하는 문입니다. 서쪽의 기운은 오행으로 금(金)에 해당합니다. 서쪽의 기운은 저녁의 기운이고 계절로는 가을의 기운입니다. 농사의 입장에선 수확의 시기입니다. 금(金)은 쇠라 차갑죠. 벼를 베어 거두는 낫의 기운입니다. 차가우면서도 햇살은 따갑습니다. 곡식을 바짝 말려 겨우 내 곳간에서 저장이 잘 되도록 합니다. 의(義) 글자는 양(羊)을 내 손(手)으로 죽여(戈) 신에게 바치는 모습을 상형한 것으로 양을 죽이든 벼를 수확하든 그 기운은 냉정해야 할 것입니다. 서향의 땅에선 과일이 잘 됩니다. 서향의 햇빛엔 붉은 빛과 원적외선이 많지요. 파장이 길어 과일이 잘 익습니다. 서향에선 아침 동트는 햇빛보다 노을이 멋있죠. 늙어서는 서향의 땅에서 사는 게 좋답니다. 아마 파장이 길고 따뜻한 붉은 기운이 차가워진 늙은 몸에 좋기 때문일거에요. 반면 젊을 때는 동향, 동남향의 왕성한 기운이 좋답니다. 역동적인 젊은 기운과 맞기 때문일 겁니다. 북쪽의 땅에는 추운 겨울의 북풍 기운이 강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기려면 지혜가 필요하다 했습니다. 그래서 북대문엔 홍지문(弘智門)을 두었지요. 원래 북대문은 숙정문인데 나중에 별도로 홍지문을 세웠어요. 북향의 땅은 선호하질 않았어요. 아무래도 춥죠. 그렇다고 무조건 남향을 추구하진 않았습니다. 남향에 산이 가로막고 있고 북향 쪽이 열려 있는데 남향이 좋다고 해서 산을 향하진 않았어요. 말하자면 우리는 산을 등지고(배산背山) 살아야지 산을 마주하고 살진 않았다는 겁니다. 한번은 토종씨앗 수집하러 시골 구석을 돌다 북향을 하고 있는 집을 가 보았습니다. 남쪽에 산이 가로막고 있고 북쪽에 밭이 있으니 배산북향을 하고 있는 집이었죠. 그런데 재밌는 것은 뒤뜰이 좀 이상하다 싶게 넓었다는 겁니다. 주인장께 여쭤보니 뒤뜰이 남향을 하고 있어 그랬다는 거였어요. 원칙에 얽매이지 않는 지혜로움을 엿볼 수 있었지요. 북향의 땅엔 아무래도 산채나 약초가 잘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식물은 음지나 반음지를 좋아하니까요. 이런 사방 중심의 오행론 세계관은 특히 우리나라처럼 산악이 발달한 환경에 잘 맞았을 것 같습니다. 이런 환경에선 향에 따라 토양의 성격도 분명하게 드러나 그에 맞는 작물과 재배법이 발달했겠지요. 오행론으로 살펴본 흙 이야기 앞에선 오행론으로 땅의 공간을 나눠봤습니다. 이번엔 좀 더 미시적으로 들어가 토양 속에 들어간 오행론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흙 속엔 크게 네 가지 있는데 하나는 물이고 둘은 공기이고 셋은 흙 알갱이이고 넷은 유기물입니다. 여기에서 흙알갱이는 오행론의 토(土)이고 물은 수(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어요. 그럼 나머지 목(木), 화(火), 금(金)은 어떻게 존재할까요? 일단 금은 조금만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미네랄이라는 무기질 양분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게 철(Fe)입니다. 철은 지구 어디에나 있는 보편적인 토양 금속입니다. 사람이 흙에서 났다고 할 때 가장 확실한 증거가 바로 철입니다. 사람 몸 속 피에는 바로 철로 된 헤모글로빈이 있기 때문이죠. 하늘의 화(火)는 햇빛과 그로 데워진 따뜻한 대기입니다. 따뜻한 대기가 흙 속에 들어가 공기층을 형성하죠. 빛은 어떨까요? 빛도 흙 속으로 들어갑니다, 물론 깊게는 못 들어가요. 표토에 닿죠. 별 영향이 없을 것 같지만 이 한 줌 빛이 광합성세균 같은 미생물에겐 아주 중요합니다. 이산화탄소를 먹고 산소를 내주거든요. 또한 햇빛은 토양 속 지열을 높여줍니다. 그래서 비닐 같은 것으로 무조건 흙을 덮어주는 건 신중해야 합니다. 많은 면적일 경우 불가피할 수 있지만 도시농부처럼 소농일 경우는 소탐대실할 우려가 있지요. 비닐 덮으면 지열은 올라가요. 그러나 햇빛은 차단되죠. 미생물이 산소를 만들기도 힘들고 대기의 산소가 토양 속으로 들어가기도 힘듭니다. 목(木)은 흙 속에서 올라오는 싹의 모습이에요. 토양학에선 흙의 구성으로 공기, 물, 흙알갱이 그리고 유기물만 얘길 해요. 흙 속만 얘길하는 거죠. 흙에 뿌리내리고 흙 위로 싹을 내미는 식물을 얘기 안 하면 반쪼가리 토양학이 되는 겁니다. 표토에 닿는 햇빛 얘길 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목(木)을 얘기할 때 빠져서는 안 되는 게 바람입니다. 발아를 촉진해주는 바람은 생명의 바람이자 사랑의 바람입니다. 봄에 표토에서 살살 부는 봄 바람은 땅 속의 습기를 하늘로 끌어올립니다. 이게 씨앗의 뿌리 발육을 촉진하고 새싹과 새움의 발아를 자극하죠. 바람은 발아뿐만 아니라 작물의 생육도 촉진합니다. 작물을 심을 때 오와 열을 맞추는 것은 통풍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지요. 바람은 작물 성장에만 좋은 게 아닙니다. 토양 속 공기의 소통도 좋게 해주어 호기성 미생물 증진에도 좋습니다. 이렇게 오행론으로 토양을 보면 우리의 시야를 넓혀줍니다. 토양학은 토양 속만 보는 게 아니라 표토를 경계로 대기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열린 체계로 확대됩니다. 또한 오행론은 대지의 공간학(지리학)으로도 확장되니 비로소 토양학은 하늘과 사람과도 연결된 통합체계로 확장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입니다.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이 글은 전국도시농업시민협의회 홈페이지에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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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20
  • [송만규화백의 섬진팔경사계] 구담마을
    구담(상) 구담은 임실 지역을 스미는 섬진강 중에서 가장 하류에 있는 마을이다. 산 중턱 비탈진 곳에 오목하게 올려놓았다. 그다지 넓지 않은 터를 깎고 다듬어서 집들을 세워 마을 자체가 경사졌다. 저 아래 강변에 이르기까지 정갈하게 축대를 쌓아 이룬 논다랑이와 밭들을 보면 이 마을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의지를 짐작케 한다. 한참을 내려가 징검다리를 건너가면 순창인데 11시 방향으로 하얀 바위를 내밀며 기세당당하게 우뚝 솟은 산이 버티고 있다. 이름으로만 보아도 범상치 않은 용골산이다. 그 산자락 싸리재에 대여섯 집이 강물을 바라보며 모여 있다. 구담(九潭)이란 마을의 본래 이름은 안담울이었다.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 이가 있다. 앞강에 자라가 많이 살고 있다고 해서 구담(龜潭)이라 하기도 했고, 또한 강줄기에 아홉 개의 소(沼)가 있다고 해서 구담(九潭)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680년경 숙종 때 해주 오씨(吳氏)가 정착하여 마을을 가꾸어 왔다고 한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때는 1992년으로 기억된다. 정월 보름 다음 날이었다. 어수선한 심경으로 무작정 섬진강변 길에 발을 내디뎠다. 아침 일찍부터 강물에 눈을 맞추며 얼마를 걸었는지 구담마을에 이르니 점심때가 지났다. 산과 산 사이 강변길에 불어닥치는 칼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하고 시장하기조차 하니 더욱 오들오들했다. 어느 집인가 불쑥 들어갔다. 낯가림이 있는 나로서는 의외의 행동이었다. 그 집 사람들은 이미 끼니를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노부부는 장작불을 지펴 데워진 구들장 아랫목에 앉기를 권하며 귀한 손님인 양 나를 극진히 대하였다. 그리고 따끈하게 데운 술을 몇 순배 나누면서 주인장은 조용조용한 음성으로 동네 소개를 자상하게 해 주었다. 좀 더 머물고 싶은 정겹고 훈훈한 자리였다. 그날, 강물이 검어질 때까지 걸었다. 그 후, 구담에 다시 갔을 때 동네 사람들은 그 집을 ‘수남이네’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아들 이름이다. 섬진강을 가슴에 적시고 얼굴을 비추며 붓을 담그게 한 마을이다. 그러니까 나의 발길을 붙잡고 시선을 잡아준 그곳은 구담이다. - 송만규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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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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