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통합검색

검색형태 :
기간 :
직접입력 :
~

지리산문화 검색결과

  • 마음과 나
    마음과 나 “인간을 속박하는 것도, 해방시키는 것도 마음(Mind)이다. 왜 마음이 속박과 해방을 일으키는가? 왜냐하면 인간보다 덜 발달된 존재들은 독립적인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은 타고난 본능에 의해 이끌린다. 그러나 인간은 독립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속박이나 해방으로 향하는 길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근본적인 차이다. 마음은 언제나 어떤 대상을 가지고 있다. 여러 경전에서, 대상을 “아보거(ábhoga)”라고 한다. 아보거는 마음에 음식을 주는 대상, 즉 정신적 양식을 의미한다. 만약 이 양식이 제한적이라면 마음 또한 제한된다. 만약 이 양식이 무한하다면, 그 무한한 양식을 얻기 위해 애씀으로써 마음도 무한해진다. 제한적이든 무한하든 어떤 양식을 마음의 대상으로 삼을지는 오로지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다. 인간이 위대해질지 평범해질지는 온전히 그가 무엇를 바라는가에 달려있다.” 슈리슈리 아난다무르띠의 『아난다 바차나므리땀』에서 위는 인도의 ‘아난다 마르가 요가 명상 수행공동체’의 창시자 아난다무르띠(P.R. 사카르)의 말씀이다. 위 내용이 실려있는 『아난다 바차나므리땀』이라는 책은 아난다무르띠가 매일 방문하는 대중들을 친견할 때 했던 짧은 말들을 책으로 묶은 것으로 30여 권 출간되었으며 그중 제1권에 실려있는 내용이다. 위에서 말한 인간을 속박하는 것도 해방 시키는 것도 마음이라고 하는 그 마음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독립적인 마음이라고 한다. 이 독립적인 마음은 동물에게는 없으며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에고(ego)’에 다름 아니다. 동물에게는 에고가 없다. 그래서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의지’라는 것도 없고 ‘자존심’ 따위도 없다. 그저 본능만이 있어서 먹고 자며 생명을 지키고 번식시키는 것만이 삶의 전부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독립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개체의식이라고나 할 수 있는 이 ‘에고’는 ‘나’라는 존재 의식을 갖게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사람은 존재의 한계를 갖게 되기도 한다. 그것이 속박이고 개체가 존재적 사고를 하는 범주이고 한계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 에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만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그 속박 속에서 살다가 그것이 속박인지도 모른 채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렇다고 에고를 버려야 하는 것으로만 인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에고는 우리를 ‘나’라는 감옥에 갇히게 하는 속박의 주범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에고로부터 개체의 의식을 확장 시키는 수행을 통해 해방, 대자유의 길을 찾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내 안의 신성을 발견하고 지고의 의식과 합일에 이르기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반드시 어떤 대상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이 돈이든 이성이든 어떤 다양한 대상으로부터 마음이 나온다. 그 대상을 “아보거(ábhoga)”라고 하는데 다시 말하면 그 마음의 대상, 마음이 취하는 먹이, 정신적 음식이 아보거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내 생각을 이 순간 물들이고 있는 대상인 것이다. 우리 육체가 음식이 필요하듯 우리 마음도 늘 음식이 필요하고 그 음식을 끊임없이 취하고 있는데 그것이 곧 생각의 대상이고 마음의 대상이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 방금 사라지거나 때론 길게 머물기도 하는 그 모든 마음의 대상, 그것이 바로 아보거인 것이다. 그런데 이 아보거는 인간의 의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이 마음의 양식이 제한적이라면 마음 또한 제한되며 이 양식이 무한하다면 그 무한한 양식을 얻기 위해 애씀으로써 마음도 무한해진다. 제한적이든 무한하든 어떤 양식을 마음의 대상으로 삼을지는 오로지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많은 사람은 대부분 물질적인 대상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것은 유한한 것이기 때문에 궁극의 기쁨을 주지 못하고 순간적인 즐거움만을 줄 뿐이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행복을 추구하는데 이처럼 유한한 대상에 집중하면 그것을 얻을 수 없다. 영원한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을 영원한 대상에 집중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명상의 원리이기도 한 것이다. 많은 사람은 궁극의 기쁨을 원하면서도 무한한 지고의식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대상에 집중하는 모순에 빠져 살고 있다. (박두규. 시인)
    • 지리산문화
    • 지리산 편지
    2024-03-11
  • 황홀 4
    황홀 4 이 민 숙 민들레 씨앗은 어디로 날아갈까 알려하지 말아라 멀어서 황홀한 그대 살빛 너머에는 45억 년을 기어와 지금도 기어가고 있는 달팽이의 설움이 있다 흙빛 설움, 바람 부는 허공을 바라보며 가슴을 털어 비우고 있다 텅빈 산정에 흐르는 구름 한 잎, 허공이 황홀이다 염려하지 말아라 민들레 씨앗도 너무 멀리 날아가서 기진할까 봐 피아노 건반을 건너뛰지 않는다 베토벤의 한 손가락도 놓치지 않는다 음표 하나가 영원인, 민들레 깃털 되어 날아가는 고흐의 귀! 아무 것도 들을 수 없는, 절벽이 황홀이다 꿈꾸지 말아라 꿈이 아니다 사랑은, 민들레 씨앗보다 꿈보다 더 멀리 날아가는 그리움의 수액을 받아마셔라 대지의 몸이 척박해질 때 노랗게 기진하는 그리움을 뿌려라 차마고도의 끝에서 걸어온 낙타가 짐을 부리고 잠이 드는, 사막이 황홀이다 ------------------------------------------------------------------------------- 이 시는 ‘민들레’를 소재로 해서 시인 내면의 어떤 사유를 ‘황홀’이라는 시어로 집약해낸 것으로 보인다. 자유로운 생명을 상징하는 민들레 씨앗이 날아가는 곳이 어디일까. 그 생각은 45억년의 우주적 시간 속 존재의 설움까지 나아가고 가슴 속 그 설움을 허공을 바라보며 비워내다가 허공처럼 그렇게 모두 비워내는 것이 삶의 극치에 이르는 ‘황홀’ 아니겠냐고 말한다. 불가에서 ‘공空’이르는 깨달음의 황홀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다시 허공으로 사라지는 민들레 씨앗을 보며 저 생명이 (건반을)건너뛰지도 않고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 삶의 과정 속에 있는 엄혹한 현실, 절벽 같은 그 현실 자체에서 다시 꽃을 피우는, 차라리 ‘황홀’이라고 말한다. 생명을 가진 존재는 생명이 붙어있는 지금의 현실만이 전부이며 그것이 아무리 힘들고 절벽 같은 절망 속에 있다 해도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황홀’이며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은 결코 꿈이 아니며 현실 속의 사랑 또한 꿈이 아니니 그것들에 대한 현실적 갈망, 근원적 그리움을 따라 걷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 갈망과 그리움의 짐을 싣고 걸어와 잠이 드는 그 사막 또한 ‘황홀’이라고 말한다. (박두규. 시인)
    • 지리산문화
    • 시를 찾아서
    2024-03-1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