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세석고원을 넘으며

고 정 희

 

아름다워라

세석고원 구릉에 파도치는 철쭉꽃

선혈이 반짝이듯 흘러가는

분홍강물 어지러워라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고

발아래 산맥들을 굽어보노라면

역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산머리에 어리는 기다림이 푸르러

천벌처럼 적막한 고사목 숲에서

무진벌 들바람이 목메어 울고 있다

나는 다시 구불거리고 힘겨운 길을 따라

저 능선을 넘어야 한다

고요하게 엎드린 죽음의 산맥들을

온몸으로 밟으며 넘어가야 한다

이 세상으로부터 칼을 품고

그러나 서천을 물들이는 그리움으로

저 절망의 능선들을 넘어가야 한다

막막한 생애를 넘어

용솟는 사랑을 넘어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저 빙산에

쩍쩍 금가는 소리 들으며

자운영꽃 가득한 고향의 들판에 당도해야 한다

눈물겨워라

세석고원 구릉에 파도치는 철쭉꽃

선혈이 반짝이듯 흘러가는

분홍강물 어지러워라

 

고정희 시인(1948~1991)

 본명 성애, 전남 해남 출신, 5남 3녀의 장녀로서 거의 독립적으로 성장.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75년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다. 광주 YMCA 대학생부 간사, 크리스찬 아카데미 출판부 책임간사를 거치는 동안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문제의식과 함께 "그 이상의 어떤 본질 문제를 환기시키는,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김주연 평) 시들을 써왔다.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평민사, 1979), {실락원}(인문당, 1981 절판), {초혼제}(창작과 비평사, 1983), {이 시대의 아벨}(문학과 지성사, 1983), {눈물꽃}(실천문학사, 1986), {지리산의 봄}(문학과 지성사, 1987),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창작과 비평사, 1989), {Sister's We Are the Path and the Light}(둥지, 1989), {광주의 눈물비}(동아, 1990), {여성해방출사표}(동광출판사, 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들꽃세상, 1990), {뱀사골에서 쓴 편지}(미래사, 1991),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창작과 비평사, 1992) 등을 통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쉽게 절망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함께 생명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노래했다. 그는 5.18 광주 항쟁을 계기로 전통적인 남도 가락과 씻김굿 형식을 빌어 민중의 아픔을 드러내고 위무하는 장시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으로 일하면서 여성 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 1984년 대안 문화 운동 단체인 [또 하나의 문화] 창립에 참여, 이후 적극적인 동인 활동과 함께 한국 여성 해방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데 큰 몫을 담당했다. 1989년에는 여성 해방을 지향하는 여성들의 자발적인 출연으로 창간된 여성 정론지 {여성신문}의 초대 주간을 맡아 1년간 그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하였으며,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1990)에서는 여성의 삶과 수난을 통하여 인류 해방의 비전을 제시하는 등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1991년 6월 8일, 한국 여성 해방 문학의 정립을 위한 작업의 하나로서, [또 하나의 문화] 월례 논단에서 "여성주의 리얼리즘과 문체 혁명"을  주제로 발표를 마치자마자 평소 그의 시의 모태가 되어 온 지리산 등반을 감행, 이튿날 뱀사골에서 실족, 43세를 일기로 불타던 삶을 마감하였다. ( 또 하나의 문화 자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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