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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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칩코 

 

 

<돌에게>

 

 돌, 추운 겨울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지난 주만해도 벌써 봄같은 날씨에 소한이 이렇게 따뜻해도 되나 걱정했는데 이번주는 이불밖으로 나오기가 무서울정도로 춥네요. 돌의 편지를 받고 몇번이고 읽어보았어요. 가만히 멈춰있는 돌이 아니라 데구르르 구르는 돌을 상상하니 묵직한 에너지가 느껴져요.


돌의 습관은 일기군요. 저도 제 이야기에 귀기울여줄 누군가가 너무 필요하다고 느꼈을 때부터 그림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누군가의 필요와 요청에 ‘반응’하며 살아온, 별명마저 누구나 부르기 쉽게 정했다는 돌의 존재가 참 귀하게 느껴집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나타났다면 너무 큰 행운이었겠죠. 홀로있는 외로움을 자신과의 대화로 채워온 시간만큼 다른 이에게 기대거나, 신세지는 일이 어색하고, 부담스러웠어요. 


지금은 조금 달라진 것 같아요. 일기쓰는 시간보다 수신자가 있는 편지를 쓸 때 더 설레고 기뻐하는 저를 보니, 혼자 견고히 살아가는 법보다 더불어 신세지며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수밖에 없겠어요. 그래서 나의 펜팔 짝꿍인 돌이 “더 적극적으로 서로 기대는 삶의 방식을 바래요.”라고 말해주어서 참 반가웠어요. 제가 돌의 이야기에 응답할 수 있는 수신인이 되어서 정말 기뻐요.


마침 이번 펜팔 주제가 나의 반려생물이네요. ‘반려’라는 단어를 사전에 찾아보니 ‘짝이 되는 동무’라고 합니다. 짝이 된다는 건 평생 서로에게 신세를 지고, 기댈 곳이 되는 걸까요? 반려자, 반려동물을 넘어 반려식물, 반려돌멩이까지도 들어봤어요. 반려돌멩이.. 무척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 반려머시기들 중에 저는 저의 6년차 반려고양이를 소개해주고 싶어요. 


처음 고양이를 데려왔을 때 저는 주중에 서빙알바를 하고, 주말에는 집회나 세미나 등을 쏘다니며 서울의 원룸에 살고 있었어요. 덜컥 고양이를 데려오기엔 너무 불안정한 삶이었는데요. 같이 서빙알바를 하던 언니가 매일같이 안타까운 유기묘 사연과 그보다 더 안타까운 고양이 학대사건을 말해줬어요. 그러면서 너는 비건이니까 고양이를 입양하면 그 누구보다 잘 키울거라며.. 지금생각해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논리입니다. 어찌되었든 저는 제대로 바람이 들어서 이 친구를 데려와버렸어요.


한 달 벌어서 겨우 다음 한 달을 버티며 살던 때였는데 각종 고양이 용품에 사료에 병원비 등등 감당하기가 벅찼던 것 같아요. 근데 또 내 새끼 좋은 거 해주고 싶다고 나도 안 쓰는 원목 용품과 유기농사료로 싹 구비했었죠. 언젠가 나갔다 들어오니 애가 뭘 잘못 주워먹었는지 눈이 띵띵 부은채로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거에요. 심장이 덜컹해서 바로 케이지에 넣어 병원까지 울면서 뛰어갔어요. 동물병원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흥분한 목소리로 “선생님! 애기 눈이 왜 이러죠! 어떡하죠?”하고, 케이지를 번쩍 들어 선생님 코 끝에 닿을 정도로 들이밀었어요. 그런데 “음..알레르기 같네요? 잠시 앉아계세요.”하는 차분한 목소리가 돌아왔고, “아..네.”하고 머쓱해진 기억도 있습니다. 


잠든 고양이의 뒤통수를 가만히 바라보다 돌연 ‘돈 많이 벌어서 아주 호화로운 고양이로 만들어줄게.’하는 이상하리만치 낯선 열의가 타오른 적도 있습니다. 오래 집을 비워야해서 부모님께 잠시 맡기거나, 어디가 아프거나, 어쩐지 무료해 보일 때면 ‘내가 부족해서 미안해.’라는 생각에 괴로웠어요. 속이 타는 것 같은 고통이 진짜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철이 들었다며 좋아했어요. 


쉽지 않았어요 고양이의 반려인이 되는 거요. 지금도 여전히 도전중인 것 같아요. 저는 여전히 가진 게 없는데 한 생명을 책임져야 하니까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죠.알바를 하면서 살 때 노동자에게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달라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돈을 달라고,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외치며 살았어요. 현실에 맞설 힘은 점점 줄어드는데 세상의 반응은 잘 돌아오지 않고, 돈은 점점 더 커보이고, ‘가난한 삶은 참 불행구나’하고 단정지을 참이었어요. 


나 하나 먹고 살기도 바쁘고 힘든 재정 상태를 이제 반려고양이에게도 나눠야 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이상하게 일상은 더 좋아지더라고요. 제 반려고양이가 돈 버는 것보다 중요한 게 뭔지 잃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준 것 같아요. 내가 누군가를 돌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고양이를 사랑하는 또 다른 반려인들과 그 시간을 함께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았고, 고양이를 가만히 바라볼 때, 같이 놀 때는 금세 초집중 상태가 되어서 어떤 걱정과 불안도 끼어들 틈이 없어요. 작은 몸짓만으로도, 제가 사랑스러움을 느끼고 웃음짓게 만들어요. 돈을 줄지만 일상은 즐거워지는 무언가 자본주의의 논리에 맞지 않는 이상한 인과성을 발견하게 해준 게 제 반려고양이입니다. 어쩌면 그게 반려의 힘인지도 모르겠어요.


역시 내 새끼 자랑은 시간이 모자라요. 너무 편지가 길어진 것 같아 걱정입니다.

 

돌의 반려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럼 이만 짹짹!

 

 

 

<참새에게>

 

참새, 돌이에요. 두 번째 인사네요! 겨울의 큰 추위 ‘대한’다운 날씨예요. 사실 참새의 편지가 도착하기 직전 즈음부터 말도 안되게 춥다며 호들갑 떨었는데, ‘대한’이라고 말하고 나니 그럴만 하달까, 괜찮은 것도 같아요. 별명을 지을 때의 태도랑 닮았는데요. 저는 나를 믿기보다는, ‘나를 믿는 너’를 믿어요. 그래서 ‘돌’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을 때보다, “데구르르 구르는 돌을 상상하니 묵직한 에너지가 느껴져요”라고 답해주는 참새의 말을 들으며, 정말 제가 돌이 되었다고 느껴요. 고마워요.

 

별명을 지을 때도 나를 정의할 때도, 누군가 저에게 기대어주기를, 그것으로 저의 가치와 의미를 인정해준 시간이었어요. 혼자 있는 게 익숙한 참새가 다른 이에게 기대고 신세지는 게 어색하고 부담스러웠다는 것처럼 저도 그랬어요. ‘기대는 나’는 민폐 이상의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지? 몰랐거든요.

 

살면서 좋은 관계 속에서 주로 지내왔다고 생각해요. 공동체를 의식적으로 구성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익숙하고요.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삶과 그 의미에 대해 자주 말해왔어요. 우리의 관계로서 나라는 존재가 가능하다고요. 그런데 사실 아주 최근에서야 저는 이 말의 무게를 실감하는 것 같아요. 희망차고 이상적이고 뿜어나는 기운을 만드는 순간도 ‘관계로서 함께 하는 삶’이지만, 내가 무너지고 다시 태어나도록 요청하는 그런 ‘관계로서 함께 하는 삶’도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거든요.

 

근래 저는 제가 속한 어떤 관계가, “원래의 방식대로 살면 참 편한데 그렇게 살면 같이 살 수 없을 것 같아”라고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누군가의 용기로 또는 예민하게 받아낸 다른 친구의 감수성으로 감각되었죠. 이전의 관계들이 이상하다는 걸 알았고 이 불편함을 가지고 잘 살 수 있으려면 바뀌어야만 하는 거예요. 저한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저에게, 지난 모든 관계와 기대온 방식과 익숙해지고 무감해지던 불평등-폭력의 모습들을 직면하기를 요청하고 있어요.

 

기후운동도 그런 모습인 것 같아요. 아픈 만큼 바뀔 수 있는 것 같아요. 아프지 않고 살아왔다면 아픈 이의 옆에 함께 서봐야겠죠. 아픔의 모습을 조금 보고나면, 아픈 건줄 몰랐던 나와 우리의 어떤 생김새가 또 보일 거예요. 그런 용기는 손잡고 있는 이가 있을 때나 가능한 것 같아요. 손을 잡고 있으면, 무서워서 내빼고 싶을 때 잡아주고, 앞으로 달려나가고 싶을 때 속도를 낮추며 따라갈 수 있게 되니까요. 저는 요즘 그런 용기를 내보며, 비로소 ‘기대어 있는 나’를 상상하고 그 의미를 감각해요.

 

이런 시기에 ‘반려생물’이라는 주제는 또 한 번 질문하게 해요. 제가 반려식물이라 불렀던 이는 있는데요, 이런 무게와 책임을 나누며 ‘반려(짝이 되는 동무)’가 되었나? 생각해보면 자신이 없어서요.

 

식목일 행사에서 나눔 받은 것이 첫 만남이었어요. 다육식물이고요, 작은 화분이에요. 농사는 지어봤는데, 작물이 아닌 화분은 처음이었어요. 물을 많이 주어 뿌리가 썩는 바람에 죽는 경우가 많다는 말에, 잎이 바짝 마를 때까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기다리며 챙겼어요. 쪼글쪼글 얇게 줄어든 잎이, 물을 준 다음 날이면 아주 팽팽하게 단단하게 커져 기세를 보이는 게 신기했어요. 줄기의 힘보다, 늘어난 잎의 무게가 커지면서 끈으로 묶어도 줬고요.

 

그렇게 늦봄부터 여름, 가을을 잘 지나 이번 겨울이 왔어요. 날이 건조한데도 물을 자주 필요로 하지 않길래 또 쪼글쪼글해지는 날을 기다렸죠. 그러다 때가 되어 물을 듬뿍 줬고, 물이 잘 빠지도록 바깥에 내놨어요. 그런데 생각이 짧았어요. 저는 외투도 입고 난방되는 실내에서 지내니 기온이 5도인지 0도인지 크게 상관 없는 사람이지만, 물을 잔뜩 먹은 식물 입장에서 0도는 어는 점이었던 거예요. 얼어서 까맣게 된 줄기와 잎을 보면서 너무 속상했어요. 샤워 후에 수건으로 닦지도 않고 바깥에 내놓은 거구나. 얼었던 잎도 금방 녹이면 회복되는 경우도 있다길래 뜨끈한 바닥에 두고 담요도 둘러줬어요. 얼어서 힘이 빠진 줄기가 다시 살아날 때 도움이 되라고, 흙에 연필을 꽂아 지지대도 마련했고요. 하지만 며칠 뒤 연필을 빼는데 아무 힘도 없이 줄기가 제 손 위로 툭, 떨궈졌어요.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났어요. 아 정말 힘을 다 잃었구나. 세심치 못해, 몇 달 간 함께 한 이가 한 순간에 이렇게 된 게 미안했어요. 슬픈만큼 그래도 애정했던 스스로를 도닥이며 인사했어요.

 

다육식물의 위치에서 세상을 보고 한 달을 세어보기도 했지만, 다육식물처럼 흡수하고 바람 맞는 법은 몰랐어요. ‘반려’하는 존재가 있다는 건, 그 존재가 되어보는 일인가보다 어렴풋이 배웠어요. 덕분에 당위적으로 ‘생태적 존재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생명으로 연결되어 기대어 산다’는 것의 의미를 조금은 느끼고 있어요.

 

저의 반려생물 이야기는 이렇게 일단락해보아요.

 

두서없이 펼쳐놓은 이야기를 담아, 약속한 날의 마지막 순간에야 편지를 부쳐요. 참 급하죠. 그렇지만 너무 바쁘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잠을 쪼개 답하고 싶은, 그런 손내밀기를 해줘서 꼬옥 충분하게 풀어내고 싶었어요.

 

다음 편지를 받을 때는 변화의 기점에 있는 제 상황이 어느 정도 정돈되어 있을 예정이에요. 그때는 조급함보다 제 일상의 여유를 담을 수 있기를, 그런 마음과 힘을 전할 수 있기를 바라며 닫을게요. 따뜻한 밤이길요, 참새! 데구르르

 

202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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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편지 : 참새와 돌] 신세지며 살아가는 법을 익히는 수밖에 없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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