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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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칩코

 

<우수의 편지돌에게>

 

그간 잘 지냈냐고 편지를 시작하고 싶었는데밤낮이 바뀐 채 지냈다니 안쓰러운 마음으로 돌의 안부를 묻고 싶네요.(빨개진 허벅지는 다행히 금방 가라앉았어요!저는 돌의 편지를 기다리면서 지치지도실망하지도 않았어요당연히 돌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고그걸 편지에 담아줄 거라고 믿고 있었거든요그러니 편지가 조금 늦은 걸로 너무 염려마세요헐레벌떡인 일상을 살아가는 돌에게 이 펜팔마저 부담이 되게 하고 싶지 않아요그렇지만 이렇게 말하는 저도 펜팔에 적지 않은 부담을 느낀답니다물론 좋은 쪽으로요~! 돌의 편지가 도착했다는 알람이 뜨면 설레고편지를 읽으며 마음이 포근해지지만 이제 내가 글을 쓸 차례라고 생각하면 긴장되고떨려요내가 가진 이야기와 문장들이 돌에게 들려주기엔 너무 초라하고볼품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편지쓰기를 미루고미루다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겨우 키보드 앞에 앉았어요너무 솔직한가요? 하하. 저부터가 이런 사람이라 때로는 너무 무거워서 느려질 때가 있다는 걸 알아요.

 

활동을 자신의 일상보다 우선하면서 지낸다는 얘기에 가슴이 철렁했어요활동과 일상의 경계는 무엇일까요. 활동을 통해 지키고자 하는 건 무엇이고일상에서 지키고 싶은 건 무엇일까요돌의 말처럼 나와 서로를 분리하고 싶지 않으니 너의 고통이 곧장 나의 것으로 느껴져요일상과 활동 속에서 피어오른 감정들이 사라지지 않고뒤섞이고요어디부터가 시작이고끝인지뭐가 맞고틀린지 잘 모르겠는 와중에 그 무엇도 놓치지 않고꼿꼿이 중심을 잡으려면 얼마나 많은 힘이 필요한가요그러니 반듯한 선으로 만들어진 경계가 안전하게 느껴지는 것도 십분 이해가 되어요.

 

저는 서울에서 활동가로 살면서 한 번 무너진 적이 있어요사실 여러 번 무너졌었겠지만그걸 인정한 건 처음이었죠소용돌이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오히려 그래 지금이 기회야.’라고 생각하며 내 안에서 무너지는 것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었어요열정을 다했던 일들과 진심이었던 관계들을 다 내려놓고채우고채워도 부족하게만 느껴졌던 나와 일상을 이번엔 반대로 완전히 비워보았어요 그런 다음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났어요아마 저도 그 때 스스로 서는 법을 찾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것이 돌의 깨달음이자 다짐이었다는 말이 정말 와 닿아요.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는 말이 있잖아요별로라고 생각했던 문구였는데 갈대에 숨겨진 비밀을 친구가 알려주었어요바람 불면 사정없이 휘날리고흔들리는 갈대들은 사실 땅 밑에서 뿌리로 서로를 붙잡아주고 있대요사람들 눈엔 그저 쉽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잘 모르는 소리죠우리에게도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있을까요똑바로 서기위해서는 힘이넘어지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하겠어요저는 계절이 바뀌는 건 제가 지연할 수 있는 약속이 아니니까요.’라는 돌의 말에서 올 것은 오고떠날 것은 떠나리라는 받아들임의 용기를 얻었어요홀로 온전히 서는 법을 같이 흔들리며 찾아가 봐요.

 

돌은 우아한 당신을 만나본 적이 있나요저는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단어라 그런지 처음에는 화면 속 인물들만 떠올랐어요혹시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을 보셨나요저는 그 드라마에서 김태리 배우가 연기한 고애신’ 캐릭터의 대사들을 너무 사랑해요사람들이 고애신을 곱게 자란 양반집 딸내지 보호해야 하는 연약한 여인으로 대할 때그래서 그가 가려는 길을 가로막고소중히 여기는 것을 짓밟을 때 그는 기품 있는 말과 당당한 움직임으로 그들이 무엇을 오해하고착각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해주거든요누군가 나를 침범해 올 때큰 소리로 화내지도 않고억울해하지도 않고숨어버리지도 않는 모습이 우아해요.

 

또 이와 비슷한 화면 속 인물이 있는데요바로 김혜수 배우에요. 어느 날 우연히 김혜수 배우가 17살 때 한 인터뷰 영상을 보았는데요그 때 리포터가 어떤 면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다고 생각하세요김혜수 양의 외모 중에요.’라는 질문을 해요여성 배우들은 본인들이 펼친 연기에 대한 질문보다 외모에 대한 질문을 더 먼저더 많이 받는다는 게 참 환장할 노릇이죠거기서 김혜수 배우가 이렇게 답해요. “글쎄요저는 외모 중에 특출한데가 없기 때문에요연기할 적에 그 연기에 푹 빠져서 진실 되게 연기하려고 많이 노력하거든요근데 다른 분들이 저를 보실 때 친근감이 드신대요그게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이게 바로 우문현답이지 않겠어요저는 여전히 주변의 시선을 살피느라 때로는 남들이 보고 싶어 하는 제 모습을 애써 연기해 보이기도 하는데요그렇게 억지로 친절한 척을 하고 나면 반작용으로 안에선 화가 끓어오르죠그래서 진심을 말할 수 있는 타이밍이 되었을 때 썩 우아하지 못해요목소리부터 파르르 떨리거든요우아함은 정직하지 않고서는 흉내 낼 수 없는 부드러움 같아요.

 

초등학생 때 마을에서 가끔 마주치던 할머니가 계셨는데요몸도 왜소하시고옷도 평범하게 입으시고나이도 지긋해서 등도 굽은 그 할머니 얼굴 주름이 잊히지 않아요사람의 주름살은 나무의 나이테 같은 거라는데 정말 나이테마냥 온 얼굴 가득히 둥그런 주름이 길고 깊게 패였는데 안녕하세요.’ 인사하면 안녕하세요.’하고 받아주실 때 그 주름 모양이 더 둥글게 휘어졌어요그 때 아 저 모양대로 주름이 진거구나.’ 알게 되었죠저런 얼굴로 늙어갈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정직해지려면 자꾸 목소리가 떨리고부드러워지려면 입꼬리에 경련이 나는 저는 아직 한참 멀었어요.

 

부드럽고단단해지는 두 가지를 다 얻으려다 또 몇 차례 무너지기를 반복할 각오를 하며 우수의 편지는 여기서 이만 마칠게요돌이 일상이 보다 안녕해졌기를 바라며 짹짹!

 

 

<우수, 참새에게>

 

참새, 돌이에요. 어제는 잘 돌아갔나요? 서울 회동에서 만났지요, 우리! 여러 펜팔 짝꿍들 사이에서 참새는 누굴까 궁금한 마음에 눈을 도록도록 굴렸어요ㅎㅎ 참새는 저를 찾으셨나요? 다른 짝꿍들이 그동안 주고 받은 이야기도 들었고요. 같이 모인 이들과 주고 받은 웃음과 친절 속에서, 누가 내 짝꿍이어도 좋겠다 했어요. 누구더라도 펜팔을 주고 받으며 참새에게 받은 힘, 저에 대해 털어놓은 이야기들은 사라지지 않고 달라지지 않으니까요. 겨울이 되면 행복하게 포동포동해지는 참새를 만나 반가웠어요:)

 

속상한 소식일까 싶지만, 아직 다 지나보내지는 못했어요. 매듭짓고자 했던 ‘우리’의 일들요. 사실 지나보내고 싶은 건 아녜요. 매듭을 지어도 이어지는 줄처럼, 끝보다는 쉼표가 필요한 마음 같아요. 줄이 이어지는 와중에 저를 세우는 연습을 천천히 시도하고 있어요. 마음이 조금 더 차분해요! 그래서 많이 속상하지 않아요.

 

그런데 참새의 이야기는 또 새로워요. 내 안에서 무너지는 것들을 지켜보다니.. 가만히 내버려둘 그 용기가 가늠이 안 되어요. 비우고 출발한 여행길에서 새롭게 나를 채우게 될 것들이 다시 두렵지는 않았을까, 비어있는 마음이 허전하지는 않았을까, 중력 없이 붕 떠버릴까 무섭지는 않았을까. 그래도 다 비우고 또 채운 참새에게 저의 말이 와닿았다니 위안이 되어요.이번 겨울 내내 묵혀온 저의 깨달음과 고민이 부질없지 않다고 응답받은 기분이에요. 조금 미뤄지긴 했어도, 곧 마주할 매듭짓기의 순간을 긴장보다는 기대로 기다려볼게요. 참새가 찾은 스스로 서는 법을 저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어볼게요.

 

‘우리에게도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있을까요?’ 참새의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뭔가 쿵 하고 속에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어요. 날짜를 두고 여러 번 읽어도 그렇더라고요. 왜 그랬을까, 하고 잠시 글자들을 응시했어요. 그러니, 물음표가 달린 참새의 질문 가장 아래에, 우리에게도 뿌리가 있다는 강한 믿음이 느껴져요. 우리 존재의 본질이 생명임을 천명하는 저 덤덤한 문장이요. 쓰러져도 다시 일어날 뿌리와 곁이 있음을 가끔은 잊고 사는, 그래서 혼자 두려워하는 일이 익숙한 저를 깨달으며 한 번 철렁. 용기를 내라고 등을 밀어주는 듯한 그 힘에 또 철렁. 그런 이유에서 ‘쿵’ 소리가 났나봐요.

 

사실은 알고 있었겠죠. 흔들리지 않고는 나에게 뿌리가 있는지도 알 수 없고, 튼튼한 뿌리를 갖기 위한 연습도 없다는 걸요. 옆 친구에게 살짝 기대어볼 일도 없다는 걸요. 새 계절이 두렵지 않은 이유는 구르는 돌 옆에, 날다가 걷다가 하는 참새가 있기 때문일 거예요!

 

목소리가 떨리고 입꼬리에 경련이 나도, 결국 ‘큰 소리로 화 내지 않고 억울해하지도 않고 숨어버리지도 않고 말을 이어가는 참새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우아함이 뭔지 느껴요. 친절을 거짓으로 지어내고 난 후 차오르는 화는, 참새가 스스로를 지키고자 기른 강한 생명력 같아요. 존재한다는 건 바람과 비와 눈, 강한 햇빛, 가끔은 커다란 지진과 해일 속에서도 수없이 흔들리며 나를 유지하는 일이잖아요. 먹고 소화하고 내보내고, 힘을 쓰고 다시 자는 일, 사랑하고 상처받고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지요. 아무 것도 하지 않고는 살아있을 수 없어요. 떨림과 경련은 내가 살아있다는 걸, 호흡하고 있다는 걸, 애쓰고 있다는 걸, 말하고 있다는 걸 수없이 반복해 알려주어요.

 

말하는 일이, 호흡하는 일이, 존재하는 일이 능숙해지면 여유가 생기겠지요? 그 여유 속에서 온화해지고 이해의 그릇이 커질 때 조금 더 우아해질 것 같아요. 그렇지만 능숙하지 않아도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손이 떨리더라도 온화함을 잃지 않고자 하는 눈을 마주하면 저는 편안해졌던 것 같아요. 이완의 순간이지요! 긴장만큼 이완할 수 있는 장소가, 관계가, 이야기가, 시간이 있다면 우리는 우아해질 수 있을까요? 진심을 말할 수 있는 순간이 많다면, 사랑과 환대와 위안을 주고 받는 순간이 쌓여 관계가 되면 우리 모두는 우아해질 수 있을까요?

 

다음 편지는 조금 더 일찍 시작해야 겠어요. 두번이나 늦은 답장을 보낸 미안한 마음이기도 하지만,, 제 일상 속 펜팔의 시간을 더 길게 늘이고 싶어서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쉬며 천천히 흐르는 펜팔의 시간도 우아함을 연습하는 시간일 거라 생각해요.

 

어제 봤는데 벌써 보고 싶어요 참새! 우수의 편지도 고마웠어요. 고마움, 반가움, 기쁨, 설렘, 위안을 잔뜩 담아 답장을 보내고 싶었어요. 날씨가 풀리고 봄기운이 돋는 우수의 시간이, 지리산에서는 어떻게 마무리되어가고 있을지 궁금해요. 새 절기에 만나요! 저도 따라 굴러갈게요, 데구르르~!

 

돌이, 우수의 끝자락 2023년 2월 26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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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편지 : 참새와 돌] 우리에게도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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