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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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칩코

 

<ㄱㅏ로에게>


오늘따라 책상에 앉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해야할 일이 있으면 적당한 때를 꽤나 오래도록 기다리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누군가는 이걸 ‘미룬다’라고 말하기도하죠 ^^;ㅎㅎ) 오늘 편지는 최대한 늦게까지 때를 기다린 편이에요. 오후엔 뒷산으로 산책하러 다녀왔어요. 돌아와서 보니 13km를 걸었더라구요. 몇 시간의 산책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늦은 아침을 먹고 쌓인 설거지도 들여다봤다가 마당에 늘어진 물건들을 정리하고 괜히 거실 바닥 청소도 하고, 영 진도가 잘 안나가는 소설책도 몇 십분째 붙잡고 앉아있었어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손과 발은 무언가를 계속 하고 있었지만 아마도 머릿속은 가로에게 무어라고 편지를 적을까!! 하는 생각들로 영감을 찾고 있었던 듯해요. 굽이굽이 꼬불꼬불 길을 돌고 돌아 드디어 책상에 앉았습니다. 


벌써 네번째 편지를 적고 있네요. 오늘은 우수의 촉촉한 기운을 담아 편지를 적어보아요. 어떤 마음으로 편지를 쓰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새로운 절기를 맞이할 때 항상 펼쳐드는 책이 있어요. 지난 한 해 동안 이 책의 저자를 계절별로 만나면서 네번의 수업을 들었어요. 아름답다고만 감탄만하고 지나쳤던 자연의 모습들에서 의미를 배우게 되니 햇빛, 바람, 비, 나무, 꽃, 열매, 풀과 내가 더 연결되고 대화하는 것 같아 매 시간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달콤한 느낌으로 수업을 들었어요. 책 제목은 ‘때를 알다 해를 살다'에요! 계절과 절기의 현상을 들여다보면서 자연을 관찰하고 리듬에 맞춰 사는 삶의 흐름을 배우는 공부였어요. 우수를 맞이하여 ‘우수절기의 의미는?'이란 부분을 딱 펼쳐봤어요. 우수는 ‘겨우내 꽁꽁 굳어있던 몸과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내는 시기’라고 적혀있네요. 뭉치고 닫혀 있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무엇으로 풀어낼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는 부분이 있는데, 저자는 “사랑하는 마음, 분별과 차별 없이 다양성과 개성을 존중하고 인정해주는 넉넉한 마음, 네가 있으니 내가 있다는 하나 된 마음, 모든 생명에게 빚지고 산다는 감사의 마음"이 가장 큰 힘이라고 말해주어요. 


날씨가 추워지면서 밖에 나갈 일이 많이 줄었었어요. 자연스레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도 줄었고요.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았는데 3월이 다가오니 봄을 준비해야할 일들이 생기더라구요. 겨울눈을 뿅 터뜨리고 나오는 꽃봉오리의 이름을 배우는 것, 잠자는 씨앗을 깨우고 이웃과 나누는 것, 올 한해 함께 농사지을 동지들을 만나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것 모두 혼자서 하기엔 너무 외로운 일이기에 요즘은 이불 밖으로 나와 사람들을 자주 만날 일이 생겨요. 오랜만에 사람과 나누는 인사가 반갑기도 하지만 쭈뼛쭈뼛 왜 이렇게 어색할까요. 우수의 의미에 적힌 문장들을 곱씹으며 굳어있던 안면 근육을 풀기위해 입꼬리를 씰룩씰룩 움직여보았어요. 새 봄을 맞이하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요. 


마지막 편지에는 이사소식을 알려주었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무슨 일이 있는건 아닌지 소식이 없는 한 주동안 걱정이 됐어요. 그 사이 지난 편지들을 다시 꺼내 읽어보며 어딘가에 혹시 힌트가 있지는 않을까? 하며 문장들 사이로 가로의 일상을 상상해보기도 했어요. 지난 편지에서 자연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함께 살아가는 반려자로서 생각하는 가로의 문장들이 좋아서 여러번 읽어보게 됐어요. 편지는 다시 곱씹을때마다  문장들이 새롭게 다가와서 좋더라구요.. 우리가 흔하게 지나치는 무심한 것들에도 관심을 가지는 가로는 우수의 의미를 더 공감하며 읽어줄 것 같기도 해요. 쓰레기더미가 말을 걸어오는 것까지 알아채는 가로의 무한한 상상력을 더 알아가고 싶다는 궁금증이 생기더라구요. 요즘의 당신의 괄호() 안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있나요? 가로의 소식을 기다리는 마음을 전해요. 


오늘의 주제는 ‘우아한 당신'이에요. 빙빙 돌고 돌아 책상 앞에 앉기까지 ‘우아한' 것을 찾으려고 눈을 계속 똥그랗게 뜨고 있었던 것 같아요. 같이 사는 옆지기는 양말 한 켤레도 구김없이 가지런히 접어 서랍 속에 발뒤꿈치 귀퉁이를 맞혀놓은 듯이 꺼내기 쉽게 나란히 정리를 해요. 서랍 속의 우아함을 탄생시켜주는 사람이에요. 그에 반해 저는 길이도 색깔도 서로 다른 양말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짝짝이로 신고 후다닥 나가곤 해요. 둔감하고 털털한 편이라서 섬세한 손끝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주저없이 감동하는 편이죠. 

 

제가 느끼는 우아한 손길에는 다정함이 묻어있는 것 같아요. 공중목욕탕에서 할머니와 손녀가 탈의를 마치고 할머니가 다정하게 손녀가 옷부터 속옷까지 가지런히 접어 옷장에 정리하는 것을 바라보며 기다려주시는 모습을 본적이 있었어요. 할머니에게 배워서 알고 있다는 듯이 익숙하게 뿌듯한 표정으로 옷장에 가지런히 개어진 옷을 차곡차곡 집어넣는 모습이 귀여워서 눈길이 갔어요. 여섯살정도로 보이는 작은 어린이가 서투른 손길이지만 옷을 곱게 개는 과정을 묵묵히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시는 할머니의 마음과 몸짓이 참 다정하고 우아하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목욕을 마친 할머니가 주름진 손가락으로 손녀의 머리를 다정스럽게 쓰다듬으면서 젖은 머리카락을 정성껏 말려주시는 모습도 참 따뜻했어요.


우아한 것들에는 조급함이 없어요.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나 싶을 정도로 양말 귀퉁이 하나를 접는 일도 미지근한 온도로 온 마음을 담아 느긋하게, 머리카락 한올을 만지는 일에도 살랑 살랑 봄바람이 귓가에 다가와 속삭이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어요. 손끝에 마치 섬세하지만 솜털같이 보드랍고 포근한 감각이 살아있는 것 같아요.. 맛과 효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밀키트가 아니라 뭉근하게 오래 끓이는 수프처럼 건강한 재료들로 정성을 담아낸 가정식 요리를 누군가에게 대접하는 것처럼요. 

 

저도 나이가 들면 우아한 손끝을 가진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요? 가방에서 물건 하나를 꺼내는 일도, 가까운 친구와 대화를 하는 순간에도, 작년에 떨어진 씨앗이 새싹이 되어 뾰록 하고 튀어나온 것을 보았을 때도 그 순간에 여유를 가지고 차분히 감사한 마음을 짓는 것을 연습해야겠지요. 우아한 몸짓을 지금부터 연습하다보면 할머니가 될 즈음엔 마침내 익숙해질 수 있을까요? 


자연의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들의 흔적들을 보며 위로를 받았던 지난 시간들에서 가로는 어떤 우아한 존재들과의 만남이 있었을지 궁금해져요.. 다음 편지에서 다시 만나요. 


p.s. 서울회동에 다른 일정이 겹쳐 참여가 어려울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알아보게될까! 하는 궁금증과 설레는 마음에 기대를 갖고 있었던지라 그만큼 아쉬움도 커요. 서울에 도착하면 눈을 감고 천천히 깊은 호흡을 해야겠어요! 서울 하늘 아래 어딘가에서 내 숨이 가로의 숨과 맞닿길 바라면서! 그 순간 가로에게 평안한 마음이 깃들었으면 좋겠어요. 바쁜 일상 속에서 건강챙기는 것 잊지 말아요-


-우수에 젖은 토토로부터  _()_

 

 

<토토에게>

 

ㅌㅌ..

ㅗㅗ 저 ㄱ ㅏ로에요!

가로가 ㄱ ㅏ로가 되었네요. 가로에 왠지 틈이 생기니까 이상하게 그 사이로 따듯한 봄바람이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상상을 하게 되네요. 고맙습니다, 토토.

 

오늘은 지리산 방랑단에게 솔직하게 제 상황과 상태를 전했어요. 제가 먼저 상황을 솔직하게 소통할 수 있었더라면 같은 시간을 기다리더라도 토토와 모두가 마음이 편안했을텐데, 그렇지 못했는데도 그런 저를 인내하고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사실은 그런 시간들이 너무 길어지면 지레 겁이 나서 도망가고 싶어 지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이해해준 모두와 다정한 토토 덕분에 다시 이렇게 편지를 쓸 힘이 생겼네요.

 

펜팔 모꼬지 초대장 속 지리산방랑단 친구들을 보면서 다들 너무 보고싶고 많이 아쉬웠어요. 누가 토토일까? 한 명 한명 들여다보았지만 사실 누가 토토인지 전혀 모르겠더라고요,,ㅎ 다들 편안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데 누가 토토여도 좋겠다 이런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모두가 토토일까 이런 상상도 했어요 :) 토토도 제가 많이 궁금했을 텐데 혼자서 외롭진 않았을까요.. 다들 짝꿍을 만나 즐거웠을 텐데 마음 한켠이 저도 속상한 건 사실이네요.. 다음 번 지리산을 방문할 때는 꼭 기필코 다른 일정이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생각보다 제 편지가 늦어져서, 먼저 요즘의 제 근황을 찬찬히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우선 저는 벌써 이사를 한지 한 달하고 8일이 지났네요. 제가 이사한 지역은 청량리 종합시장 근처예요. 역에서 나와 시장을 지나쳐 오분정도 걸으면 제가 사는 곳이 나와요! 청량리 시장은 서울에서 두번째로 큰 재래시장이라고 해요. 정말 커요. 사실 이렇게 큰 시장을 와본 적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경동시장, 수산시장, 청과물 시장 모든게 모여져 있는데 처음에는 같은 도시에 살고 있는데도 청량리라는 지역이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지더라구요. 정말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오가는 곳인데, 지역에 특성상 거주하는 분들이나 유동인구 평균 나이대가 꽤나 높은 것 같다고 느껴지는데 그런 풍경도 처음에는 익숙치가 않았어요.


그런데 요새는 시장의 매력이 푸욱 빠진 것 같아요. 뭐랄까 정신없이 바쁘고 모든게 빠르게 흘러가는 도시와는 다른 생동감이 느껴진다고 해야하나, 잠깐을 지나치더라도 모두가 생생하게 활력이 넘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그 모습을 느끼며 걸어가는데 마음이 이상하게 즐겁더라고요. 저에게 남아있던 피로감들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기분이에요. 열정을 애써 만들어내지 않아도 기분좋은 에너지가 생겨나요.

저는 시장에서 파는 과일과 야채들이 너무 싸서 좋은 것 있죠ㅎㅎ 이제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과일을 사먹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 같아요. 정말 상상 그이상으로 싼대도 일주일을 풍족하게 먹을 수 있다니. 충분히 아끼면서 건강하게 만족스러운 요리를 해서 먹을 수 있겠다라는 기쁨이 생기더라구요:) 저는 그 전에도 배달음식이나 외식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는데 정말 간단한 수준의 찬 음식들을 먹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 공간이 생긴 이후로는 매끼니를 따듯하게 요리해서 만들어 먹고 기록하는데 시간을 제일 많이 쏟게 되었어요. 나에게 따듯하고 맛있는 식사를 정성들여 대접했을 때 내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라고 느끼는 것 같아요. 요리하는 행복을 알게 되어서 많이 기뻐요. 그래서 요새는 정말 토토같이 농부가 된 친구들이 부럽기도 해요. 도시에서도 채소를 길러서 요리를 해먹을 수 있을까 이번년도에 도전해 보고 싶기도 하고요.

3년 전부터 불쑥불쑥 갑자기 찾아오는 우울감과 무력감을 어떻게 극복해야하나 늘 불안하고 걱정이 많았는데 그 시간들을 청소와 요리로 회복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몸을 바쁘게 움직이면 빠른 시간동안 기분을 바꿀 수 있는 것 같아요. 집순이지만 집에서 굉장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어요.

그리고 진짜 반려식물들을 키우기 시작했는데 벌써 초록생명들을 벌써 다섯친구나 생겻어요. 너무 작고 소중하고 예뻐서 볼때마다 미소가 나요. 친구들 이름은요 오늘, 내일, 마음, 호야, 박쥐예요! 이 친구들이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매일 저녁부터 잠들기 전까지 다정하게 말을 건네와요. 참 신기하게도 식물들에게 많이 위로받는 것 같아요. 이렇게 조금씩 나를 돌보고 다른 무언가를 돌보면서 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지 조금 알 수 있는 시간들을 맞이하고 있어요.


저번에 너무 추운 날 토토가 가꾸던 야채들을 걱정했던 마음이 무엇인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엇어요! 집의 온도뿐만 아니라 습도, 햇빛의 양, 바람의 정도, 물을 주는 주기, 정도 이 모든게 조금만 지나치거나 부족해도 식물들이 아픈게 보이니까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그리고 식물마다 또 성향이 달라서 다른 성향에 맞춰서 돌봐주어야 하는데, 나는 너무도 당연히 같은 방법으로 식물들을 생각하고 있었구나 반성하면서 나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을까, 하고 생각이 연장되었어요.

 

늘 내가 주고 싶은 사랑의 방법으로, 그것이 정답인 것 처럼 모든 사람들을 대하고 기대하고 혼자서 상처받고 관계를 망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하구요. 이제는 모든 관계에서 실수하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애쓰고 긴장하고 참거나 버티는 게 아니라 정말 자연스럽고 건강하게 저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싶어요. 지리산에서 토토와 친구들을 만날 때는 제가 모든 걸 툴툴 털고 정말 멋진 모습으로 마주하길 바래요!

입춘편지와 우수편지의 주제가 나의 전투복과 우아한 당신이였네요.

 

토토의 글을 보면서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또 저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싶은게 많은데 왠지 글을 쓰는데,, 또 한참 걸릴 것 같아서 저의 편지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을 토토에게 먼저 근황소식 먼저 보낼게요!

 

우아한 당신에게, 가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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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편지 : 토토와 가로] 우아한 손끝을 가진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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