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12(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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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칩코

 

<천재만재 이야기꾼 산달에게>


산달, 지난 편지를 읽고 얼마나 들떴는지 몰라요! 똥개시절 이야기의 보답이 이렇게 근사하다니, 이번 편지엔 똥오줌 못가리던 시절 이야기까지 줄줄 불어댈 뻔 했습니다. 저는 아홉시만 되면 퓨즈가 나가듯 잠이 든다고 했는데, 누군가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해준다면 잠을 순식간에 쫓아낼 수도 있어요. 산달의 이야기는 꼭 목련만큼이나 향기롭고 우아했어요. 정말 고마워요. 저도 까만 밤의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전등에 반짝 빛나는 목련에게 홀딱 반하던 순간을 기억한답니다. 여섯 꽃잎을 한 장 한 장 떼며 문법을 알려주셨다니, 꽃잎이 곱절은 많은 국화여도 즐겁게 배웠을 거예요. 


봄의 새소리가 참으로 다채로워요. 산달이 사는 곳도 그렇겠지요? 새도감을 뒤적거리다가 후투티라는 이름의 새를 봤어요. 머리도 꼭 락커처럼 모히칸 스타일을 했길래, ‘와 이 새는 한국에서 보기 힘들겠지?’싶을만큼 이색적이었거든요. 그런데 새벽요가를 마치고 동이 틀 시간이 되면 꼭 바깥에서 누가 ‘구구구’하고 노래하는 거예요. 작은 드럼을 두드리는 듯이 편안하고도 차분한 목소리였어요. 누군지 알아내려고 새소리를 모아놓은 유튜브를 마구잡이로 보았는데,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후투티였던 거죠! 이렇게나 가까이 모히칸 드러머가 살고있었다니. 아직 얼굴은 만나보지 못했지만 집 근처에서 이웃들을 잘 살펴야겠어요.


전 학창시절에도 음악에 두말할 것없이 가장 재능이 없었는데, 요즘 새공부를 하자니 음악공부처럼 고역이에요. 영상으로 새소리를 달달 외우고도, 실제로 들으면 다 똑같은 소리처럼 들려요. 그런 제가 올해는 우쿨렐레를 배우기 시작했답니다. 제 옆지기가 우쿨렐레를 잘 친다는 소문을 듣고 마을 이웃 두 분이 떡과 반찬을 잔뜩 갖다주시며 스승으로 모시니 결국 얼렁뚱땅 강좌를 열게 됐어요. 그렇게 네 명이 모여 일주일에 한번 우쿨렐레를 쳐요. 햇살이 차르르 쏟아지는 이웃집댁에서 우쿨렐레를 연주하다보면 바깥에 딱새들이 꼬리를 팔랑 떨면서 창가에 앉는 게 보여요. 전 요즘 그 시간이 참 좋아요. 


물론 딱새나 후투티는 제 형편없는 연주를 듣기 거북해할지 모르겠어요. 작년부턴 장구를 열심히 치고 있는데, 장구는 사실 인간이 아닌 동물들은 다들 듣기 무서워하는 것 같아요. (집회할 때는 더없이 흥이 나는 악기지만요.) 그래서 숲에서도 연주하기 미안하지 않은 우쿨렐레를 배우기 시작한 건데 여전히 조금 미안할 수밖에 없는 실력이랍니다. 산달은 어떤가요? 제가 예상한 대로라면 음악을 좋아할 것 같아요! 산달은 새공부를 해도 저보다 일취월장이겠어요. 


사실 음악 얘기를 꺼낸 이유가 있어요! 저는 제가 너무 진지한 게 싫어요. 친구를 새로 사귀거나 사람이 많은 곳에 어울리기도 별로 안좋아하고요. 누군가를 만나면 시시콜콜한 이야기 나누기가 제일 숙제에요. 반드시 모든 것에 심오한 의미가 있어야하는 양 굴어요. 전 잡담이랍시고 자꾸 일 얘기를 꺼내서 친구들을 질려버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답니다. 글을 쓸 때도 지나치게 거창해지곤 하는데요. 그렇게 종이 위에 우주의 진리나 세계평화를 쏟아내고 나면, 새벽에 쓴 글도 아닌데 느끼하고 부끄러워서 두번은 못읽겠어요. 전 밤 아홉시에 머리만 땅에 닿으면 즉시 잠에 드는 사람으로서 ’이불킥’을 해본 적은 없지만, 만약 한다면 이불보다 제 무릎관절을 더 걱정해야 할 거예요.


이번 주제가 ‘나를 바꾼 꿈’인데요. 평소엔 꿈을 꾸더라도 물에 그은 선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거든요. 제가 기억하는 몇 안되는 꿈들은 다들 음침하고 징그럽고 어두워요. 그런 꿈들만이 돌에 새긴 선처럼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요. 이번 편지에도 제 꿈 이야기를 쓰자니 호러 영화를 한 편 쓰게 생겼더라고요. 심지어 그런 호러씬들 안엔 제 깊은 죄책감이 숨어있어요. ‘이렇게 사는 게 옳은 거야!‘하던 제 경직된 윤리관이 만든 꿈이죠. 로드킬 당한 고양이를 구조해 살려놨는데 목만 겨우 남아서 물을 마셔도 목 아래로 줄줄 새던 이야기, 소의 위장을 뒤집은 것으로 만든 샤워볼로 제 몸에 피칠을 하며 목욕하는 이야기 등이에요. 참고로 전 말싸움조차 없이 평화롭고 싱겁게 끝나는 영화나 드라마만 즐겨본답니다.


음악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야겠어요. 악보에서 도레미를 찾기도 헤매는 제가 노래를 만들기 시작한 때가 있어요. 제 옆지기가 우쿨렐레로 코드를 몇개 연주하면서 저에게 아무 말이나 뱉으면서 아무 멜로디나 붙이라고 한 거죠. 모든 말에 의미 부여를 하는 저에게 ‘아무 말이나 뱉으라’고 하는 건, 한 시간짜리 연설을 하라는 말보다 어렵게 들렸어요. 도대체 아무 말이 뭔지도 모르겠고, 그 아무 말에 멜로디를 붙이라니 영 쑥쓰러워서 한 마디도 못 뱉겠더라고요. 헛소리를 하거나 우스꽝스러운 멜로디를 만들어도 누구도 평가하거나 비웃지 않다는 건 천천히 깨달았어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나마 아무 말이나 흥얼거릴 수 있게 됐죠. 그래서 성다양성 축제에서 들레네교향악단이 해마다 엉망진창 합창을 선보일 수 있었는지도 몰라요. 직접 만든 어설픈 노랫말과 멜로디로요. 


음악이 내내 어려우면서도, 올해 열심히 악기를 배우거나 새소리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건 이런 까닭일 거예요. 음악은 저에게 힘을 빼는 방법을 알려주거든요. 덜 진지하게 사는 방법을요. 산달이 지난편지에서 한빛이 애증의 공간이었다고 했잖아요. 사실 좋기만한 것들은 별로 없어요. 가족이든 연인이든 어떤 공간이나 기억이든, 사랑과 미움과 애틋함과 서운함이 마구 섞이는 듯해요. 그래서 저라도 산달같은 결론을 내렸을 거예요. 세상을 바꾸겠다면서 나를 미워하기보다, 그 미운 세상과 내가 서로를 만들었다고 믿어버리자고요. 모든 숨들이 섞여서 결국 다 하나라고도 믿고요. 


그런데도 전 저의 진지한 모습들이 여전히 예뻐보이지 않아요. 내 꿈은 왜 다 저런 모양일까, 왜 그렇게 고리타분한 글을 쓰고야 말았을까, 제 자신이 시시해보일 때가 많아요. 이런 모습들도 제 공동창조자일텐데 말이에요. 덜 진지해지려고 하지만, 사실 정말 필요한 건 ‘진지한 그대로도 충분한’ 마음일 것 같아요.


산달, ‘명금류’라는 말 들어봤어요? 명금류는 ‘소리가 고운 새’라는 뜻인데, 참새같이 조그마한 새들을 가리킨대요. 큰 새들은 성대가 굵어서 섬휘파람새나 방울새 같이 고운 소리가 나지 않고, 거칠고 위협적인 소리를 낼 수 있죠. 이 말을 들은 제 친구가 ‘와 그것 참 좋다!’하며 감탄하는 거예요. 자신은 키가 크다고 늘 부러움을 받는데, 실은 키가 작든 크든 각자 매력이 있을 뿐 큰 게 더 멋진 건 아니라고요. 그런데 명금류는 작기 때문에 오히려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다니까 좋았다는 거죠. 아마 키가 작은 제게 해주고 싶었던 말 같더라고요. 참 다정한 친구죠? 


저도 제 진지한 모습들을, 도리어 진지하다는 이유로 좋아하게 될 수 있을까요? 산달의 지난 편지를 곱씹으며 노력해봐야겠어요.


산달! 전 친구가 냉이를 잔뜩 나눠준 덕에 냉이를 안캤어요. 그런데 산달의 편지를 보니 냉이 캐는 즐거움을 제가 놓칠 뻔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냉이 꽃대가 모조리 올라오기 전에 납작 엎드려 냉이를 찾았답니다. 냉이를 보면서도, 목련과 연꽃, 산과 달, 메리올리버의 시를 보면서도 떠올릴 이가 있다는 건 참 풍요로워요. 제가 산달을 떠올리는 순간마다 산달에게 봄볕이 닿기를 바랄게요. 구례는 벌써 목련이 옷을 갈아입는 청명입니다!


P.s. 감자님은 제가 자나깨나 물을 너무 열심히 갖다바치는 바람에 운명을 달리하셨습니다. 물이 많으면 씨감자가 썩으니 제발 그만 주라고 이웃분이 와서 저를 말리셨을 땐 이미 너무 늦은 뒤였어요. 감자님께 심심한 위로를… 


냉이주먹밥 해먹은 덕복희가

 

 

 

<진지함이 사랑스러운 복희에게>

 

복희야말로 천재만재 이야기꾼인 것 같아요!! 새 공부 이야기도, 꿈 이야기도, 음악 이야기도 너무너무 재밌어요. 어쩜 그렇게 감질나게 풀어놓을 수가 있죠? 늘 복희의 편지를 보면서 감탄해요. 그 솜씨를 닮고 싶어요. 이제 복희의 편지를 받을 때면 다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할머니의 손맛 듬뿍 담긴 코스 요리를 대접받는 것 같아요. 약간은 쓴가 싶더니 끝에 가서는 결국 단 맛이 입천장을 달래주는 것만 같아요. 어떤 기분인지 짐작이 가시려나요!

 

그런데 음악 이야기라니. 복희, 조심하셔야 해요. 저는 음악 이야기라면 10통의 편지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이나 떠들어 볼 수 있답니다. 소싯적엔 그랬어요. 지금은 그만큼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요. 그것도 한때 이야기랍니다.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쳤거든요. 엄마는 저를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부터 남들 다 가는 피아노 학원과 태권도 도장에 보냈어요. 다른 아이들은 피아노 학원 가기를 싫어하기도 하고 그러던데 저는 싫고 좋고를 떠나서 당연히 가야하는 곳이라 생각했나봐요. 한 7년차 되는 해부터 재미가 들려서 열심히 연습하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혼자 클래식 곡들도 파고, 밴드도 시작했어요.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에는 예배당이 있었어요. 그곳에는 위엄있는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놓여져 있었는데, 사람들이 거의 집에 돌아간 주말에는 그 피아노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답니다. 특히 해가 기지개를 펴는 새벽이나 어스름이 찾아오는 저녁, 옅은 빛에 취해 드뷔시를 연주할 때면 마치 온 세상에 저 혼자만 있는 것만 같았어요. 그런데 서울에서는 더 이상 이런 순간들을 누리기가 어려워요. 그곳을 떠난지 시간이 꽤 흐르고 나니 저는 이따금 고요한 숲 속에서 혼자 피아노를 연주하는 제 모습을 상상하고는 해요.

 

아! 복희의 우쿨렐레 수업 시간을 상상하니 저도 모르게 입이 귀에 걸려요. 제 안에 그런 순간에 대한 갈망이 있음을 느껴요. 우쿨렐레를 배우는 건 즐겁나요? 우쿨렐레를 연주할 때면 호흡이 줄의 진동 소리와 어우러지는 걸 느끼나요? 어려운 것은 없는지, 짜증나는 순간들은 없는지도 궁금해요. 제가 좀 들떠 보이죠? 그만큼 악기를 배우는 건 설레는 일이니까요! 사실 설레는 순간보다 답답하고 속이 터지는 순간들이 많이 있기도 하다는 걸 알아요.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종종 드는게 다반사이니까요.

 

음악을 한다는 건 조급함과 싸우는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씨앗이 싹을 틔우기를 재촉할 수 없듯이, 고양이가 내 품을 편하게 여기지 못하는 걸 저어하는 일이 쓸모없듯이요.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했던 말이 옳아요."참을성이 있어야 해." 여우가 대답했다. "우선 내게서 좀 멀어져서 이렇게 풀숲에 앉아 있어. 난 너를 곁눈질해 볼 꺼야. 넌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말은 오해의 근원이지. 날마다 넌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앉을 수 있게 될 거야......”날마다 조금씩 편해지는 것, 꾸준함을 연습하는 것, 피아노가 저를 변화시키려는 힘을 환대하는 것, 저는 그러면서 세상을 배웠던 것 같아요.

 

사실 복희의 ‘진지한’ 이야기에 손으로 입을 막을 정도로 공감하며 읽었답니다. ‘스몰 토크’라고 하죠. 최근에 새로 만난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내가 스몰 토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구나 생각했어요. 막 ‘활동가’들의 네트워크 속에 들어온 신입으로서 받아들여야 할게 너무나도 많았던 저는 어쩌면 스몰토크를 사치처럼 여겼던 것 같기도 해요. 제게도 힘을 빼는게 정말 큰 숙제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최근에는 바쁜 동료와 잠시 차를 마실 기회가 있었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저는 단체 이야기, 운동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 친구와 그런 방식으로만 소통하는 저를 미워하며 다음부터는 다른 이야기들을 좀 해보겠다고 다짐했어요.

 

간혹 그런 꿈을 꾸기도 해요. 꿈 속에서 저는 친구들이나 동료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막 떠드는데 제 친구들은 제 이야기를 듣는 것에 피로해하는 낌새에요. 그럴 때면 나는 왜 그들과 마음이 공명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에 날마다 실패할까 고민하게 돼요. “나의 언어가 저들에게 닿고 있지 않구나.” 복희의 표현대로 제 대화의 방해꾼 또한 ‘경직된 윤리관’인 것 같아요. 머리로는 내 윤리관을 내세우는 것보다 저들과 대화를 통해 깊은 관계를 맺는게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이렇게 깊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야”라고 자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해요.

 

저도 음악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볼까 해요. 복희는 좋아하는 음악가가 있나요? 전 여러 뮤지션들을 좋아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이들의 일관적인 공통점을 생각해보면 삶이 곧 음악이 되고 음악이 곧 삶이 된 사람들이더라구요. 최근에 사카모토 류이치라는 음악가를 다룬 다큐멘터리인 ‘코다’를 봤어요. 아직 다 보진 않았지만, 인상깊었던 장면이 있었어요. 사카모토는 원전 참사가 있었던 후쿠시마에 가서 쓰나미에 잠겼던 피아노를 하나 발견해요. 그 피아노를 연주하고 나서는 송장을 어루만지는 느낌이었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그러면서 하셨던 말씀이 마음에 남아 오래 생각해 볼 문장이 되었어요.

 

"일반적인 피아노 소리는 인간이 억지로 조율한 부자연스러운 상태인거지. 그런 억지스러움에 대한 혐오감이 내 안에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자연이 조율해 준 그 쓰나미 피아노 소리가 굉장히 좋게 느껴져요.”

 

피아노는 보통 주파수를 나타내는 단위인 440헤르츠로 조율되고는 해요. 간혹 432헤르츠로 조율되는 경우도 있고 피아노 연주자들마다 마음대로 할 수 있기는 하지만, 각 음계의 간격이 일정하다는 것은 모든 피아노와 서양 악기의 공통점이에요. 그런데 아시아와 중남미 등의 전통 악기들은 셀 수도 없이 다양한 음계를 채택하고 있어요. 가장 낮은 음에서부터 가장 높은 음까지의 스펙트럼은 무한하니까요. 우리의 귀는 440헤르츠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어서 다른 주파수의 소리를 잘 포착하지 못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복희가 새들의 소리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요! 아마 저도 인간의 주파수의 귀가 너무나도 적응되어 있어 그들의 노래나 비명을 듣기 위해서 많은 훈련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사카모토의 말은 사카모토가 평생 사회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큰 힘을 얻는 것 같아요. 그의 세계는 늘 소리로 가득 차 있다고 해요. 파도소리, 빗소리, 숲의 소리들을 길어내 음악으로 만들어내는 그가 저는 참 놀라웠어요. 원전을 반대하고 삼림 보호를 위한 그의 행동과 숲 속에 들어가 그들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모습이 많이 겹쳐보여요. 어쩌면, 우리가 ‘듣지 않음으로써 듣지 못하게 된’ 소리들을 들으려는 하나의 태도에서 비롯된 일관된 삶일지도 몰라요. 그를 잘 알지 못하지만, 그의 삶은 참 아름다워요.

 

새들을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해요. 나무도, 풀들도, 곤충들도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인데, 우린 종종 놓치는 풍경이죠. 그래서 우리가 듣는 소리들은 하나의 주파수가 아니라 여러 주파수들의 화음일거에요. 숲마다 어떤 공명이 발생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재밌어 보이네요! 어쩌면 복희의 진지함도 우리의 유연함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주파수일지도 몰라요. 그리고 전혀 어울리지 않은 복수의 소리들이 어우러져 간혹 협화음을 만들어내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그런 순간은 아주 가끔이어서 우리에게 희열을 주곤 해요. 궁금해요. 복희의 진지함은 어떤 순간들에 화음을 만들어내나요?

 

오늘 아침, 짬내서 책을 읽다가 발견한 문장이 맘에 들어서 그걸로 편지를 마무리해요. 복희가 제게 선물해준 문장에 대한 보답이에요. 제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저의 아름다움을 알려줘서 고마워요. 아름다운 하루 보내세요!

 

"내가 생각할 때,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 바로 그것이 된다” -미셸 셰르-

 

p.s. 씨앗 잘 받았어요! 해바라기, 목화, 분꽃, 메리골드 모두 잘 모시겠습니다. 그들이 피어날 때 생각나게 해줄 사람이 되어주어 고마워요. 

 

함께 삶을 연주하고픈 산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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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 편지 : 덕복희와 산달] 유연함을 만들어내는 주파수일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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