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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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칩코

 

<돌에게>


돌, 끈덕진 마음을 조금은 떠나보내었다고 하니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우리는 어떻게든 내게 찾아온 고통의 의미와 또 그 만큼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하고, 작은 발견과 작은 의지만으로도 힘껏 나아가려고 애쓰는 존재같아요.


올라간 기온 때문에 꽃이 빨리 피어 사람들은 일찍이 꽃구경을 한다고 마냥 좋아했지만 정작 꽃들과 벌들에게는 생존이 달린 큰 시련이었겠어요. 그럼 결국 사람들도 그렇게나 좋아하는 꽃구경이 더 어려워지겠네요. 지구가 자꾸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아요. 작년에는 조경수로 잔뜩 심어놓은 철쭉 꽃들이 떨어지지 못하고, 매달린채 마르는 모습을 보았어요. 그것도 벌이 사라져 수분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들었는데 그러고 보니 더더욱 처참했던 것 같아요.


사실 지금 이 순간도 저는 기후위기의 신호를 찐-하게 겪고 있어요. 저에겐 공포영화, 악몽 급이었던 상황을 편지에 한번 풀어보아도 될까요..? 혹시 벌레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싫으시다면 이 문단은 건너뛰셔요..ㅎㅎ 


때는 바야흐로.. 414기후정의파업을 가기 전날 밤이었어요. 아침 일찍 파업 버스를 타고 세종으로 이동한 다음, 행진에 맞춰 걷고, 무언가를 외치게 될 긴 하루를 준비하며 매우 잘 자야겠다고 다짐했던 밤이었는데요. 새벽에 아주 가까이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거에요. 처음엔 비가 내리나 싶었어요. 근데 집 밖이 아닌 집 안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길래,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기울이다 안되겠다 싶어 불을 키고 방안을 확인해보니 모기장도 구멍은 우습다는 듯이 통과하는 가볍게 날벌레가, 날벌레 천 마리(마음의 눈으로는 거의 오 억마리였어요)가 방을 뒤덮어가고 있지 않겠어요?

 

그날 밤 푹 자기는 커녕 한 시간동안 그 날벌레들을 쓸어내다가 끝이 없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모기향 두개를 피워 화생방을 만들어놓고, 옆 집으로 건너가 잤어요. ‘왜 하필 우리집에, 왜 하필 오늘’ 이런 생각을 하며 걱정, 불안에 날벌레가 없는 방 안에서도 잠을 설쳤어요. 저와 같이 사는 짝꿍은 다음날 기후정의파업에서 많이 외쳤던 ‘생태학살’을 우리가 저지르고 왔다고 말하는데 참 싱숭생숭하더라고요.

 

알고보니 그 벌레는 흰개미 날벌레들이었는데 나무를 갉아먹고 산대요. 나무를 먹고 산다니… 사실 인간보다 깨끗할지도 몰라요. 이슬만 먹고 사는 요정이랑 비슷하잖아요? 물론 제가 목격한 비주얼은 좀비떼 같았어요.. 목조주택의 목구조 안쪽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도 사람들은 잘 모르고 살다가 부화기인 4-5월달에 갑자기 엄청난 양의 유충들이 깨어나면서 놀래키기로 유명하다 그러더라고요.

 

죽은 날벌레들을 쓸어내며 이제 끝인가 싶었는데 오늘은 점심을 먹다가 집 바깥으로 엄청난 양의 날벌레들이 또 단체로 날아가는 걸 목격했어요. 그걸 보니.. 왠지 쎄한 느낌에 급히 이불들을 옆집으로 옮기는데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처음보다 더 많은 날벌레들이 방안으로 쏟아져 나오더라고요.


이 편지를 받고 돌 기분이 너무 상하면 어떡하나 다 쓰고나니 걱정되어요. 내가 받은 충격을 돌도 받으라고 쓴 글은 절대 아닌데요. 이상적인줄 알았던 귀촌의 현실을 보여주기 위함도 아니고요..ㅋㅋㅋ 지구의 신호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이렇게 되었어요. 왜 하필 414기후행동 전 날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그리고 오늘은 구례의 초등학생들이 함께하는 지구의날 행사 전 날이거든요. 해야할 일도 많은데 벌레와의 전쟁을 하고 있으려니 짜증과 원망이 훅 올라오는데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이 상황이 내게 주는 메시지가 분명 있다고 생각했어요.


흰개미는 더운 지역에서 산대요. 우리나라의 기후가 갑자기 흰개미들에게 유리하게 바뀌니까 생태계가 균형을 잃고, 흰개미 번식량이 늘면서 이런 상황이 생긴 것 같아요. 아무것도 모르고 낡은 목조주택을 꿈에 그리던 집이라고 신나서 선택했던 과거의 나를 탓하다가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기후재난이 나의 작은 집에서 조용히 일어난 건 아닐까? 급하게 이불과 옷가지를 챙기면서 난민의 기분을 잠시 상상했어요. 겨우 옆집으로 피신하면서도 내 ‘집’에서 누리던 일상이 전부 뒤틀리니 몸도 마음도 폭삭 내려앉은 것 같더라고요. 산불피해주민들이나 해안침식피해주민들은 얼마나 막막하고, 억울했을까요. 많은 일본사람들이 후쿠시마 폭발사고를 계기로 삶의 방식이 전환되었다는 얘기도 떠올랐고요. 아직은 흰개미 정도라 정신 바짝 붙들고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지만 정말 이 작은 신호들을 앞으로도 무시했다간 더 큰 재난과 그에 따르는 혼돈의 크기가 어마어마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요. 지구가 제게 그 시대를 연습하라고, 집에 흰개미들을 등장시켰을지도 몰라요.


오늘도 치열하게 개미들과 생존경쟁을 벌였어요. 내 생존을 위해 진짜 싸워야할 대상은 사실 인간들일텐데 말이에요. 기후를, 산을, 바다를 그대로 두는 게 왜 중요한지 더 뼈저리게 느꼈어요. 오래된 자연림인 지리산이 산불을 이겨내는 지혜가 있듯이 우리에게도 여전히 선조들의 지혜가 쓸모있기를 바라요. 기후가 바뀌면 우리가 기존에 적응해서 살아가던 삶의 방식이 전부 다 뒤집힐테니까요.


돌에게 제 벌레썰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지금 제 머릿속이 온통 흰개미로 가득차서 다른 말을 쓸 수가 없었어요.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줘요. 그래도 돌에게 쓰는 편지라서, 정말 돌 덕분에 편지를 쓰며 비운의 사건 정도로 생각했던 경험이 지구의 변화이자 지혜로 이해되어요. 끔찍한 일에도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데, 돌의 가치는 의심할 필요도 없어요. 저도 다시 삶의 의지를 다져볼게요. 부디 안녕히 지내길 바라요. 그럼이만. 짹짹


2023.4.19 

돌에게

 

 

<참새에게>

 

갑자기 싸늘해진 날씨에 돌아온 지각자 돌입니다. 참새, 오래 기다리게 해 미안해요. 활동하는 단체의 중요한 행사가 끝이 났고, 중간고사도 무사히 마쳤어요. 이제는 두 발 뻗고 잠들 수 있어요. 참새는 그간 어떤 날들을 지나왔을지 궁금해요!

 

참새, 정말 큰 충격을 받았겠어요. 편지에서 당황스러움, 걱정, 혼란이 느껴졌어요. 정말 실존적으로 ‘내 일상의 터전을 어떻게 지키지?’라는, 또는 ‘어떻게 공존하는 방향으로 다시 꾸려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갖게 된 것 같아 보여요. 집이 전혀 다른 장소가 되었겠어요. 내 집이고 내 방인줄 알았는데, 손 쓸 수 없이 통제할 수 없는 장소가 되어버렸으니까요. 정말 머릿속이 온통 흰개미로 가득찰 만 해요.

 

방을 화생방으로 만들어 놓으며 싱숭생숭한 마음도 너무 알겠어요. 저는 집에 바퀴벌레가 나올 때 그래요. 너무 놀라고, 가까이 다가갈 때도 궁금증보다 겁이 더 많이 나요. 그러면서도 ‘왜 나는 이 곤충을 이렇게까지 싫어하지’라는 질문이, 무서워하는 마음 옆에 딱 눌러붙어 있어요. 그래서 불편했거든요. 혐오의 상징이 되어버린 바퀴벌레가 아니더라도, 어떤 곤충이 내 몸 위로 걸어가는 상상을 하면 피부가 부르르 떨리는 것 같아요. 몸의 경계를 침해받는 기분 같기도 하고요. 음, 저는 친밀한 사람과의 스킨십은 항상 환영하는 편이에요. 길고양이는 알레르기 때문에 조심히 쓰다듬고요, 길거리의 지렁이는 기꺼이 나뭇가지로 들어 옮기는 편이고요. 저의 이런 상이한 감각들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왜 누구는 편하고 좋고 가까운데, 누구는 보기만 해도 놀라고 가까이 가기도 싫고 어려워졌을까요?

 

참새는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 지났는데, 여전히 벌레와의 전쟁을 하고 있어요? 사건의 시간이 길어지며 참새의 마음은 어떻게 변했어요?

 

이상적인 줄 알았던 귀촌의 현실…ㅋㅋㅋ 사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에요. 저 지리산에서의 삶에 대해 기쁘고 밝은 면만 기대하며 편지를 썼던 것 같아요. 삶은 그런 모습이 아닌데요..ㅎㅎ 물론 참새가 얘기해주었듯 단지 ‘불쾌하고 짜증나는’ 경험이라고 평하는 건 아니어요. 환영받는 감각이 아니라는 의미에서요. 지구, 숲, 땅의 주기에 더 가깝게 지내는 삶은 더 크고 깊게 숨 쉴 수 있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위기의 신호를 가장 가까이에서 듣는 일이기도 하겠구나 싶어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주제가 되게 어려워요. 누군가 날 싫어할 수 있다는 사실은, 항상 떠올리면서 또 걱정하면서 지냈기 때문에 익숙한 감각인데요. 막상 구체적으로 누구였는지를 생각하면 잘 생각나지 않아요. 음, 아주 오래 전으로 돌아가면 선명한 기억이 있어요.

 

중학생 때, 초등학교 때부터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이 갑자기 저를 따돌린 적이 있어요. 정확한 이유는 몰랐어요. 사실 없었을 수도 있고요.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그때의 저는,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만 생각했어요. 어떻게 해야 있어보이고, 흥미로워 보이고, 괜찮아보이고, 말 걸고 싶을까? 가치의 위계를 포착해내는 것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고, 문제인 것도 바뀌어야 할 것도 이 모든 상황의 원인도 저에게 돌렸어요. 저의 모든 행동과 태도를 같은 반 친구들에 맞추던 그 습관이 오래 몸에 남아서, 관계에서 자주 불안을 느끼게 되었어요. 그 친구들과는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관계를 맺고 있어요. 지금도 그 시절에 제가 어땠는지 속시원히 말하지는 못하지만, 언젠가 미안했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해요.

 

이렇게 돌아보고 인식하게 되기 전에도, 저는 계속 관계에 신경을 쓰며 살아왔어요. 가까운 이들을 챙기고, 듣고, 지지하면서요. 저는 그런 저의 태도가 더 많은 이들과 상호적인 관계를 만들어 오는데에 큰 역할을 했다고 느껴요. 한편 최근에는 그런 타인에게 열린 태도가, 제가 제 존재를 스스로를 주장하고 선명히 만드는 걸 방해하고 있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성과를 향해 달리는 메이트가 아니라, 삶을 나누는 동지가 되기 위해서는 제가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말하고 응답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사실도요.

 

제가 활동하고 있는 단체에서는, 우리 시대의 운동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가고자 시도하고 있어요. 특정 의제에 한정해 집중하며, 특정한 계급 또는 정체성 집단을 당사자로 기초하여, 요구하고 주장하는 방식의 운동은 더 이상 맞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에요. 더 많은 이들이 기후생태위기의 시대에서 거대한 전환의 필요성을 느끼며, 다른 무엇보다 스스로가 다르게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어요. 

 

불평등과 소외, 착취의 구조에 기반한 우리 사회의 다양한 규범은 숱한 폭력을 만들었어요. 아직 ‘의제’로 충분히 이야기되지 않는 문제들도 너무 많지요. 그 폭력을 경험한 이들이 증언하는 일, 그 삶들을 엮어 우리 사회의 현재를 정의하는 일, 그렇게 자신과 지구의 위기를 동시에 느끼고 경험하는 이들이, 곧 바라는 세상을 직접 살아내는 이들이 되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세상을 바꾸는 운동의 주체에 누구든 자신의 이름으로 올 수 있다는 선언이지요. 

 

이런 고민과 시도 속에서 저도, 제가 살아온 시간을 자연스레 다시 돌아봤던 것 같아요. 이유 모를 무시가 어떻게 제 안에 들어와, 스스로 대상화하고 폭력의 위계 구조에 익숙해지게 만들었는지를요. 덕분에 제가 왜 이 어색하고 불분명한 이름인 ‘활동가’로서 살아가고 있는지 조금씩 알아가고 있어요.

 

나를 살게 하는 존재들을 살리고 지키기 위해, 이제는 정말 아닌 것 같다는 신호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정치적이고 생태적인 삶으로 흘러들어온 이들이 많을 것 같아요. 참새의 시작은 어땠는지, 어떤 일들과 감각과 관계가 연결되어 있는지 궁금해요. 편지의 답장이 아니더라도, 다음에 만나면 들려주셔요. 5월과 함께 다시 따뜻한 봄날이 되기를, 봄이라는 계절도, 참새의 방도, 생태계의 곳곳이, 각자의 구역을 안전히 보장받으며 공존할 수 있기를 바라며 편지를 닫습니다. 오늘도 굴러갑니다 데구르르-

돌이

20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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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우 편지 : 참새와 돌] 힘껏 나아가려고 애쓰는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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