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박 4일의 긍정 에너지
한때 온 세상 사람들이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위리안치의 벌을 받게 되었다. 누군가 그랬지. 인간의 행복감은 자기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사회적 관계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나는 이런저런 사회적 활동이 줄어들면서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조금 따분해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두 후배의 연락을 받았다. 제주도에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앞뒤 잴 필요도 없이 숨통을 트일 수 있는 이 제안을 덥석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자전거 라이딩이라는 거였다. 3박 4일 동안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를 한 바퀴 돌자는 것인데 그 보기 민망한 복장에 헬멧을 쓰고 서툰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을 상상하니 아찔했다. 그래도 그나마 위안이 된 것은 ‘여순 10.19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몸자보를 하고 제주 4.3과 어울려 보자는 말이었다. 이런 명분과 작금에 처한 내 심정을 생각하면 이런저런 걸 따질 이유가 없었다.
제주 4.3이나 여순항쟁은 사실 그 뿌리가 같은 사건이니 어쩌면 ‘여순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한 제주일주는 생각보다 큰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제주 4.3으로 여순항쟁이 비롯되었다고는 하나 모두 분단을 거부하고 통일조국을 위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봉기였으니 그 역사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역사인 것이다. 좋다! 코로나19로 인해 막혀버린 숨통을 제주에 가서 시원하게 뚫고 오자. 그렇게 여행은 시작되었다.
첫날 제주는 내 들뜬 마음을 비바람으로 잠재워 주었다. 여수공항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괜찮던 날씨였는데 제주에 도착하여 자전거를 대여할 때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비옷을 준비하기는 했으나 점심 먹고 시작한 자전거 타기는 오후 내내 맞은 비바람으로 속옷과 운동화까지 쫄딱 젖어 페달을 열심히 밟는데도 손이 저려오고 추워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 당일 목표한 곳에 미치지 못하고 애월읍에서 하룻밤을 청해야 했다.
이튿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날씨가 쾌청했다. 비가 내린 뒷날이어서 그런지 제주의 바다가 보여주는 청량감은 어제의 힘들었던 시간을 고스란히 보상받고도 남았다.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의 수평으로부터 오는 평온함과 안정감으로 그동안 흐트러진 정신의 무게중심이 제자리를 찾는 것 같았다. 서툰 자전거 타기도 잘 적응해서 페달 밟을 때 허벅지 근육의 수축과 이완에서 오는 기분 좋은 탄력을 느낄 수 있었다.
자전거 타는 일이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바다를 바라보며 달리는 즐거움이 더 크게 와서 모든 것이 기쁨으로 왔다. 오늘 하루라는 시간의 기쁨이 극대화되어 과거나 미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온몸에 긍정 에너지가 가득 차오르는 느낌을 오랜만에 맛보니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이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과 먼 수평선, 현무암에 부딪히는 하얀 파도 소리 그리고 같이 달리는 두 후배까지 나를 감싸고 있는 현재의 시간과 상황 모든 것이 너무 고맙고 소중하게 다가왔다.
마지막 날 처음 출발지였던 제주시의 용두암으로 돌아와 제주 일주 인증 센터에서 인증 수첩을 받았다. 펼쳐보니 234km를 달렸고 내가 4,083,491번째 제주도 자전거 일주를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구체적인 기록이 주는 묘한 느낌, 무엇으론가 명확하게 분류되고 소속되어지는 느낌, 이것은 평소에 그다지 좋게 생각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스스로가 어떤 부류로 특정하게 규정되는 것이 싫었던 것인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단순히 어떤 숫자의 기록이 아니라 그 속에는 제주라는 아름다운 공간이 내준 너무나 고맙고 소중했던 시간과 상황 모든 것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3박 4일로 자전거를 탔을 뿐이지만 삶의 긍정 에너지를 몸소 체험한 한 생의 귀한 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