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지리산 산청 소식을 전하는 포네입니다.
6월 29일에는 궁금해, 산청 산들강에서 고운동천-등잔봉 구간을 걸었습니다.
고운동천은 산청 양수발전소 상부댐 근처 민박집이에요. 주소는 산청군 시천면이지만, 차편으로 접근을 하려면 산청에서도 삼신봉 터널을 통해 하동군 청암면을 거쳐야 갈 수 있습니다. 고운동은 옛날에는 시천면 반천마을로 난 산길로 걸어 올라갔다고 합니다. 반천마을의 고운동 계곡 초입에는 유명한 배바위와 500년된 참나무가 있어요.
고운동 이름은 최치원의 호를 딴 것으로, 지리산 골짝골짝 최치원과 관련한 전설이 많이 있지만, 그의 이름을 딴 마을은 이곳뿐이라고 해요. 옛사람들이 신선이 사는 이상향, 유토피아로 생각했던 ‘청학동’의 모습을 가장 닮아 있었던 마을이 고운동입니다. 깊은 산속 계곡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돌연 툭 트인 개활지가 나타나고, 그 풍경이 무릉도원과 같았다고 하네요. 가수 한돌이 노래한 지리산의 이상향 고운동은 지금은 물속에 잠겨 있습니다.
오랫동안 가물었는데, 드디어 장마가 시작되었습니다. 비가 오면 지리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는 숲샘의 말씀에 따라 비옷을 챙겨입고 고운동천 아래에 모였습니다.
고운동천 주인장인 이도정님은 고운동에서 태어나 살다가 9살 무렵에 부모님이 산 아래의 외공리로 집을 통째로 옮겨서 이사했다고 합니다(산들강 1에서는 외공에서 열린 민간인 학살사건 위령제에 참여했습니다). 옛날에는 고운동에서 누군가 이사를 가면, 동네 사람들이 다 같이 집을 해체하여 뼈대를 아랫동네까지 짊어지고 가서 다시 지어다고 하네요. 이도정님이 어릴 때만 해도 고운동에는 30여 가구가 살면서 논밭을 일구며 자급자족을 했습니다. 이도정님은 아름다운 계곡을 오르내리며 학교에 다녔던 유년을 그림같은 추억으로 간직하며 부산에서 살다가, 고향인 고운동에 남은 땅을 상속받게 되어 노후에 들어올 생각으로 민박집을 짓게 되었습니다.
먼저 양수발전소 상부댐을 보러 도로를 따라 10분 정도 걸어갔습니다. 비가 와서 짙은 안개에 가려 저수지와 반대편 산, 산아래는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숲샘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고운동은 반천리(反川)에 속하는데, 반천은 냇물이 거꾸로 흐른다는 뜻입니다. 하부댐의 물을 거꾸로 퍼올려 상부댐에 저장하는 양수발전소가 생길지 천년 전에 어떻게 알고 이런 의미심장한 이름이 붙었던 걸까요? 등잔봉이라는 이름도 그렇습니다. 천년 후에 등잔처럼 저수지 옆 발전소에 불이 켜질지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름을 잘 지은 건지 못 지은 건지, 천년 동안 불렀던 그대로 된 모양입니다.
양수발전소의 가동률은 10%라고 하는데, 총 시간의 10%가 가동되고 있다는 뜻이래요. 양수발전소는 전기가 풍부할 때 상부댐으로 물을 퍼올려 위치에너지로 저장했다가, 전기가 부족할 때 밑으로 흘려보내서 퍼올렸을 때 소모한 전기의 70% 정도를 생산합니다. 이렇게 아름답게 포장해서 이야기 하지만, 본질적으로 양수발전소는 핵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전기를 소모하기 위한 시설입니다. 원전은 수요에 따라 조절이 불가능하고, 일정하게 생산되는 전기를 소모하지 않으면 위험하기 때문이죠. 요즘엔 심야전기를 많이 사용해서 양수발전소의 가동률이 낮은가 봅니다. 이게 잘 이해가 안 될 수 있어요. 양수발전소란 이름이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기 때문이에요. 양수발전소가 아니라, 핵전력소비소라고 부르면 양수댐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 곳인지, 왜 존재하는지 초딩도 바로 알 수 있을 텐데요. 아무튼 양수댐은 핵발전소의 부대시설이고, 지리산의 이상향인 고운동은 그로 인해 아틀란티스가 되었다는 걸 알려드리고 싶네요. 아, 옛날이여.
이쯤 돼서 ‘고운동 달빛’을 듣고 가야 될 거 같아요. 우리는 등잔봉에 올라서 들었지만, 글과 노래는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들 수 있는 수단이니까요.
<고운동 달빛/한돌>
마음의 옷을 벗고 달빛으로 몸 씻으니
설익은 외로움이 예쁜 꽃이 되는구나
해맑은 꽃내음을 한 사발 마시고 나니
물 젖은 눈가에 달빛이 내려앉는구나
고운동 계곡이 잠긴다네
고운동 달빛이 사라진다네
꽃들의 희망도 잠기겠지
새들도 말없이 떠나가겠지
사랑이 사랑이 아님을 알게 되리라
아프게 사라지지만 산은 울지 않는다
외로운 구름아 어디로 떠나려는가
꽃과 새들의 눈물 속에 산도 지쳐 돌아눕는구나
고운동 계곡이 잠긴다네
고운동 달빛이 사라진다네
꽃들의 희망도 잠기겠지
새들도 말없이 떠나가겠지
지리산 지리산아
사랑하는 지리산아
지리산 지리산아
나의 사랑 지리산아
고운동 계곡이 잠긴다네 (지리산 지리산아)
고운동 달빛이 사라진다네 (사랑하는 지리산아)
꽃들의 희망도 잠기겠지 (지리산 지리산아)
새들도 말없이 떠나가겠지 (나의 사랑 지리산아)
옛 고운동의 모습은 몇몇 사람들의 기억속에 아직도 꿈결처럼 남아 있겠죠? 아프게 사라져도 남은 생명은 살아가야죠. 꽃들의 희망이 잠기고, 새들이 떠나간 고운동의 수면 위에 다시 꽃을 심고 새들을 불러오려는 고운동천. 등잔봉 올라가는 길이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돌다리를 지나 조금 올라가니 너른 터와 숙소가 나옵니다. 숙소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궁이에 불 지피고 촛불을 키고 묵어야 하겠네요. 손님은 별로 없다고 합니다. 고요한 숲속의 소박한 쉼터는 잘 알려지지 않아야 좋은 곳으로 남게 되지만, 주인장이 심심치 않을 만큼은 손님이 있었으면 하네요. 고운동천 민박은 명상 수행과 자연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손님에게 알맞을 듯 합니다.
숲샘의 나무 해설을 들으며 산길을 올라갑니다. 숲은 참나무가 주종으로, 하부층은 조릿대가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낙엽이 비에 젖는 냄새가 났어요. 비오는 날에는 산의 초록빛이 마르지 않은 수채화처럼 더욱 선명하고 촉촉해집니다. 오랫동안 가물었다가 비가 내리면 애벌레가 허물을 벗듯 식물이 통통해지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거칠어졌던 입사귀와 수피들이 물을 머금어 보드라워집니다. 비옷을 입고 산을 오르니 우산에 수관이 가리지 않아 좋았어요. 수피가 두꺼운 코르크층을 이루고 있어 굴피의 재료가 되는 굴참나무, 잎사귀가 넓어 떡을 싸는 데 썼다는 떡갈나무. 짚신 바닥에 깔았다는 신갈나무.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외제 선생님은 슬리퍼를 벗고 맨발로 산을 오르셨어요.
조그만 나무비로 표시된 등잔봉. 참여자들의 사진을 한 장씩 다 찍어주신 숲샘.
정상에 올라 잠시 숨을 돌리며 햇살이 가져온 따뜻한 정상차를 마셨어요. 비속에서 호두, 오이 등 소박한 간식을 먹으며 마음을 나누었어요. 숲샘이 고운동 달빛 음원을 찾는 동안 조외제 선생님이 부르는 그리운 금강산을 들었어요.
이어서 고운동 달빛 감상. 수많은 생명들이 왔다간 그 자리에 꽃은 다시 피고 집니다. 굳이 묻지도 말하지도 않는 우리들의 설움과 아픔이 다 녹아서 사라지면 얼마나 좋을까요. 안치환이 부르는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도 들었습니다. 지리십경을 만나는 마음의 자세를 그리는 가사가 의미심장해요.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라니’ 감당하기 어려운 대자연의 마음과 만나게 될 테니, 섣불리 오지 말라는군요. 그러게 괜히 와서 울고 가면 어쩌죠. 다행히 오늘은 비가 와서 눈가에 고인 눈물을 웃음으로 감출 수 있네요.
이게 끝이 아니었어요. 숲샘이 필사한 시 두 편을 들려주셨어요.
빗물에 젖은 나무줄기에 손을 얹어 봅니다. 고개를 들어 초록으로 안구를 채워봅니다. 아낌없는 사랑에 색깔이 있다면, 초록일거라고 믿어요. 나도 한 그루 나무이고, 내가 사랑하는 당신도 한 그루 나무라서, 어느 바람이 있어 우리들의 향기가 살며시 서로에게 닿기를 바래요. 베어져도 꺾여도 아파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나를 내어주는 나무의 사랑을 사람이 흉내내긴 어렵지요. 그런 사랑이 없는 대신 우리는 너나 없는 나무가 아무리 아낌없이 준대도 내 몸처럼 나무와 숲을 아끼고 소중히 지켜주어야 할 거예요.
산에서 내려와 고운동천에서 준비한 시원한 오미자차와 맛좋은 도토리떡, 숲샘이 준비한 삶은 계란을 먹으며 쉬었어요. 지리산 케이블카 현황에 대한 브리핑이 있었습니다. 최근 경남도에서 케이블카 노선이 산청으로 단일화되었습니다. 숲샘이 며칠 전 MBC경남에서 지리산케이블카산청주민대책위 민영권 집행위원장을 인터뷰한 녹음 파일을 블루투스 스피커로 틀어주셔서 낙숫물 떨어지는 정자의 돌 테이블에 둘러앉아 시일지난 라디오 방송을 들었습니다. 마치 과거로 여행한 분위기였어요.
양수발전소, 케이블카, 골프장... 지리산에 왜 이런 일들이 끝없이 일어나는 걸까요? 인간의 영역은 이미 충분하데, 인구감소와 지역소멸 시대라면서 점유면적을 넓히려는 움직임은 무엇인지. 남아나는 전기를 양수댐에 물을 퍼올리는데 쓰고, 정유공장에서 나오는 아스팔트를 버릴 곳이 없어 자꾸 도로를 닦고, 중장비를 놀릴 수 없어 산을 파헤치겠다니.
여분의 에너지와 물질의 열기로 사람이 못 살 정도로 지구가 뜨거워지기 전에 지나친 생산을 멈추었으면 좋겠습니다. 비행기, 자동차 타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관광지 가서 케이블카 타고, 골프 치면서 바쁘게 살다가 아흔 살 쯤 되어 죽어도 그만이지만, 비오는 날 뒷산에서 그 비를 맞으며 하루를 그냥 보내본다면, 괜히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고도 놀 수 있는 방법이 많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사람이 사는데 그렇게 많은 물질이 필요하지 않고, 친구가 씌워준 우산과 반찬통에 담아온 오이 한 조각에도 사랑은 있답니다.
누군가 산청에 놀러갈만한 곳이 어디 있냐고 묻는다면, 며칠 시간을 내어 고운동에 들러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인류가 자연과의 조화와 지속가능성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위기에 처하다면, 결국엔 늙어죽을 운명일지언정 나 혼자라도 자연과의 조화를 터득해야 하지 않겠어요. 전기 없는 민박집에서 군불을 때고 산나물로 밥을 해먹다 보면 마고 여신이 꿈에 나와 살짝 힌트를 줄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