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의 미학
언젠가 어떤 프로그램에서 자기가 생각하는 죽음과 죽음의 세계를 한 문장으로 써보는 시간이 있었다. 참으로 다양한 생각과 표현들이 있었지만 정리해보니 단순했다. 죽음은 현실에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는 것이며 스스로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며 어둡고 컴컴한 어느 밤길을 홀로 걷는 것처럼 외롭고 두려운 것이었다. 그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상상력의 한계였다.
죽은 뒤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여기의 현실에 집중하며 사는 것도 버거운 일인데 죽은 뒤를 생각해서 무엇 하랴. 이름을 남기는 것?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 남은 사람들이 나를 오래도록 기억해주는 것? 도대체 그게 죽어버린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살아있는 사람들은 자기 현실의 삶을 도모하기 위해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이겠지만 죽은 자에게는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서 죽음은 현실적으로는 내 삶의 끝자락에 위치한 삶의 한 부분으로써만 의미가 있다. 나를 위하여, 내 삶의 완성을 위하여, 스스로에게 주어진 이승의 시간을 아름답게 맺는 것으로 죽음은 그렇게 현실의 삶으로만 존재한다. 죽음에 대한 진실은 오로지 이것 하나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죽음 이후는 현실이 아니니까, 생각으로만 존재하는 공포니까, 그러니 끊어라 잊어라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벗지 못하고 산다. 오랜 수행과 성찰을 해온 현자들은 이 두려움에서 벗어났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이 공포를 가지고 산다. 그런데 사실 이 공포는 죽음에 대한 공포라기보다는 현재를 잃을 것에 대한 공포다. 사람들은 이 현실의 삶을 그만 둔다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이 현실을 살며 늘 괴롭네, 슬프네, 죽고 싶네, 하면서도 이 현실을 떠나기는 싫은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것이다. 사실 자신의‘현재’를 사랑하고 열심히 살아내는 것은 진리의 영역이고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이것과는 좀 다르다고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의 본질에는 소유욕 같은 것들이 끼어있기 때문이다. 지금 누리고 있는 것, 가지고 있는 것, 알고 있는 것, 세상에 태어나 지금껏 소유하게 된 모두를 한꺼번에 잃는다고 하니 두렵지 않겠는가. 거기에다 한 번인 이 세상에, 하나인 목숨까지 가져간다니, 내 존재를 깡그리 가져간다니 어찌 슬프지 않고 두렵지 않을 것인가.
이 죽음을 극복하지 않는 한 궁극적으로 사람들은 현실 속에 진정한 희망을 세울 수 없을 것이다. 열매의 미학은 이 어디쯤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죽음의 극복을 위한 것이 열매의 미학이라는 생각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든 생명들의 세상이고 모든 생명들의 삶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궁극적으로는 열매를 맺는 일로 귀결된다. 뿌리를 내리는 일도 싹을 틔우는 일도 잎을 올리는 일도 꽃을 피우는 일도 열매를 맺는 일도 그리고 죽는 일도 모두가 생의 절대적 과정이요 순간순간이 온 생명이다. 꽃을 피우는 것만이, 열매를 맺는 것만이 삶의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삶에 무슨 목적이나, 다다라야 할 결론이 따로 있을 것인가. 그저 연기(緣起)의 과정일 따름이 아닌가. 다만 이 우주의 순환질서에 종속된 한 생명으로서 생명의 순환에는‘열매’가 그 질서의 고리로써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열매는‘씨앗’이다. 그리고 그 씨앗은 나의 생명을 함축한 것이고 나의 일생을 갈무리 한 것이고 나의 부활을 꿈꾸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은 이러한‘열매’를 생산하는 존재다. 아무리 척박한 땅에서도 열매는 맺는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소나무가 많은 솔방울을 서둘러 맺듯이, 그리고 산란을 위해 모천으로 돌아오는 연어들처럼 모든 생명은 궁극으로는‘열매’라는 새로운 생명을 생산하는 일에 복무하며 한 생을 보낸다. 생명의 한 사이클이 이루어지는 끝에, 사람들이 죽음이라고 말하는 그 끝자락에 새로운 생명이 열리며 또 다른 시작을 예비하는 것이다. 그것이 열매이고 씨앗이다. 이 열매에 의한 생명의 순환을 생각하면 생명이라는 우주적 담론 속에서는 죽음이란 애초부터 하나의 관념인지도 모른다. 죽음이란 없으며 오로지 생명의 순환질서가 존재할 뿐이다. 그 순환의 고리가 열매요 씨앗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생명의 순환질서를 하나의 원으로 생각한다면 죽음이라는 우리 일상의 종말적 의미의 공포 개념은 어디에도 끼어들 틈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 죽음은‘나’라는 ‘에고’에 스스로 매몰될 때 오는 것이지 거대한 생명의 순환질서 속에서는 죽음이라는 좌표점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죽음의 지점이라고 할 만한 곳에는 어김없이 ‘열매’가 열리고 씨앗이 되어 새로운 생명을 세우니 죽음의 자리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나의 존재를 한시적이고 독립된 하나의 생명으로 보지 말고 통시적이고 연기적(緣起的)인 존재로 인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죽음을 극복하는 단초요 그것을 도와주고 풀어주는 열쇠가 바로‘열매’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나’라는 개체적 존재는 세상의 모든 생명들과 그물망처럼 얽혀져 있으며 서로가 서로의 의지처가 되어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붓다가 말한 바와 같다. 그것은 자신을 연기적 존재로 인식하는 일이며 세상의 모든 생명들은 개체적 존재로는 단 한 시간도 살 수 없다는 말이다. 태양이 있기에, 비가 내리기에, 밤과 낮이 있기에, 날아다니는 생명들과 지상의 생명들과 물속의 생명들이 있기에,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기에‘나’라는 한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나를 연기적 존재로 인식했을 때 하나의 단독적 개체가 가지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고 나눔과 섬김의 정신을 회복할 수 있다. 이미 우리와 모든 생명은 존재 자체가 자신의 생명을 나누고 섬기는 성결한 의식을 치르며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나’라는 열매를 맺는 일이 그것이다. 내 스스로 하나의 생명을 잉태시키고 기르는 행위야말로 나누고 섬기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것이‘나’라는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닌가. 생명을 잉태시키는 일은 내 생명을 나누는 일이고 그 생명을 기르는 일은 섬기는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것이 열매의 미학이 갖는 바탕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위대하고 신비로운 생명이나 그 아름다운 자신을 모르고 살아갈 뿐이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변명의 여지도 없이 분명 나의 잘못이다. (박두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