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고단이 그리워
-San Francisco에서 온 편지
겨울이면 유난히 극성을 부리는 산프란시스코(San Francisco)의 짙은 밤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운 창밖을 내다보면서, 조금 전에 태평양을 건너와 미국 서쪽 해안까지 실어온 텔레비전 뉴스를 따라 멀리 눈 덮힌 지리산 노고단을 향하여 눈을 감고 그리움에 시름겨워하다가 컴퓨터를 켜고 이렇게 앉았다. 기후에 대한 기록이 있어 온 이래 가장 많은 11월의 폭설이 한국을 덮쳤고, 수많은 피해를 냈다는 고국의 뉴스를 들으면서 나는 눈 덮인 노고단의 아름다운 모습이나 떠올리며, 한가한 그리움에 젖어 이 글을 시작하니, 처지가 달라지면 느낌도 달라지는 한심한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20년을 살았던 지리산파크 아파트 701호에선 아름답게 눈 덮인 겨울의 노고단을 바라보기가 가장 좋은 위치였다. 여름이면 비가 내린 뒤에 지리산의 웅장한 산허리를 감고 피어오르는 안개가 마치 백룡(白龍)이 춤추며 하늘로 오르는 모습이라고 매번 감탄하기도 했지. 초여름 신록이 피어나기 시작하면 연두색 새 잎새들이 무리지어 솟구쳐 온 사방에 신선한 생기를 뿜어대던 그 찬란한 향연을 나만이 독점한 듯이 이기적인 기쁨을 만끽하기도 했지.
아아 그리운 구례,....
지리산 노고단, 섬진강 물여울, 백운산의 먼 병풍, 밤재를 넘어 달려 내려오던 구례 평야의 시원한 바람, 나의 한국 생활 20년 동안 가장 많은 발자국을 찍었던 서시천 언덕의 다정하고도 유연한 구비들, 구례는 사시사철 향기에 젖은 그야말로 금환낙지(金環落地)의 땅이 아니더냐!
그런데 사실 그리움의 초점은 아름다운 산하를 지닌 구례의 자연환경이란 공간만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함께 웃고, 떠들고, 마시고, 노래했던 사람들과 더불어 지냈던 세월이란 시간이 더욱 아프게 내 가슴에 가라앉아 있다. 하나 하나 이름과 얼굴을 그리면서, 차마 잊지 못하는 사연들도 떠올리며, 내가 한국에서 살았던 삶의 자취를 아직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내 나이가 80을 넘었고, 주변에서 하나씩 사라져간 사람들이 마지막에 치매를 앓다가 가신 분들이 꽤 많으니, 나 자신도 절대 장담 못 하는 연령에 도달했기에, 한시적인 기억에라도 아직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지난 5월 6일에 구례의 젊은이들이 모여 시간과 정성을 드려 미국으로 떠나는 나를 위해 송별연을 베풀어주며, 현수막에 여러분들이 한마디씩 남겨준 글씨를 나는 지금 내 방 벽에 걸어두고 수시로 콧잔등 시큰거리며 바라본다. 나 자신도 그토록 떠나기 싫었던 구례를 기어코 떠나와야만 했던 자신의 운명에 대해 지금도 솔직히 슬퍼하고 있다. 나 죽거든 시신을 화장해서 화엄 계곡 어디엔가 나무 밑에 한 삽 푹 뜨고 뼈가루를 파묻어달라고 유언을 써서 벽에 걸어두기도 했었는데, 그게 불법이라서 실현이 안 되었는가, 이제는 먼 나라 미국 땅 산프란시스코 바다에 유골을 뿌려달라고 유언서를 벽에 걸어 둘 작정이다. 태평양 넓은 바다를 떠돌다가 뼈가루 한 알갱이라도 조국의 해변에 다을 수 있을지...(그럼 뭘해, 공연히 한 번 말이나 해 보는 것이지...)
내 말투가 잡탕으로 이루어진 터라, 구례에 사는 동안 사람들이 몇 차례 나의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고, 그때마다 언제나 구례는 나의 타향이었다. 그래서 충청북도 제천에 있던 호적을 구례로 옮겨놓고 나도 전라남도 구례 사람이 되기로 작정했었다. (전라남도? 남자들이 홀딱 벗고 나체로 사는 동네란 뜻인가?) 이제는 그것마저 쓸데없는 짓이 되고 말았다. 나의 두 아들 녀석들도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 유학생으로 온 아비를 따라 왔다가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미국에서 교육받고 자란 미국 시민권자들이 된 50대의 사내들이니, 한국에 돌아갈 희망은 절망일 뿐이다. 호적이고 주민등록이고 다 쓸데없는 장소에서 그들도 죽어갈 것이고, 가계를 기록한 족보도 소용없는 나라에서 영어를 쓰면서 살아가는데, 그들이 비록 한국말을 곧잘 하기는 하지만, 정작 진지한 의사표시는 영어로 하는 녀석들이다.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과도 영어로 대화하기기 불편한, 간단히 말해서 나는 실향민(失鄕民)이다. 괜히 멋을 부려 영원한 에뜨랑제라고 프랑스말로 자조한다. 제천의 심심산골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6년, 한문 서당 3년, 중학교 3년을 지냈고, 고등학교는 부산에서, 대학교는 서울에서, 대학원은 미국에서, 그래서 학교 따라 떠돌며 보낸 세월 동안에 내 말투는 온갖 사투리가 범벅처럼 뒤엉킨 부대찌개가 되어버렸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산프란시스코에서 전동차로 한 40분 거리에 있는 이른바 East Bay (東彎) 지역의 Hayward 란 동네다. 도산 안창호 선생께서 한국인들을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한 지역도 East Bay에 소속된 오클랜드(Oakland)였다. 여기 Hayward에 2차 대전 후 영어가 불편한 일본인 1세 노인들을 위해 2세들이 40 가구 3층 목조건물을 지어, 일본식 정원에 비단잉어들이 유영하는 연못에 일본식 도리이까지 곁들인 시설을 만들었다. 1세들이 나이 들어 점차로 사라지게 되자 일본인 후예들이 이 건물을 캘리포니아 주 정부에 헌납했고, 주 정부 당국은 이들의 아름다운 뜻을 살리고자 60가구를 더 지어 붙여 Y 자 모양의 100가구 아름다운 3층 목조건물을 완성하여 이름을 에덴 이쎄이 테라스(Eden Issei Terrace)라고 부른다. 그러니 나는 지금 에덴 동산에 살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이 건물에 한국인 노인들이 한 25가구 입주해 있어서 제일 수가 많고, 일본인은 단 한 가정이 남아 있을 뿐이다. 도서실에는 아직도 일본 서적들이 상당히 많이 있고, 방 한칸은 특히 일본식으로 단장된 곳을 보존하고 있다. 현재로는 여기 있는 일본 책들을 즐겨 읽는 사람이 아마도 바로 나 하나뿐일 것이다. 그리고 유일한 일본 할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장 정중한 예의를 갖추고 대해주는 사람도 나 하나뿐일 것이다. 내 아내는 한국인 할머니들을 부추겨서 노래 동아리를 만들고, 매주일 한 차례씩 가라오케 시간을 즐기며, 영어가 불편한 한국 할머니들의 유일한 통역관 노릇도 하는, 이른바 한국 할머니부대의 소대장 노릇을 잘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상대할 할아버지들도 없으니, 그저 혼자 책도 읽고, TV로 Youtube를 통해 하염없는 시간들을 때우고, 종종 10마일쯤 떨어진 해안 골프장에 혼자 나가서 서툰 골프채를 휘두르고 오기도 한다. 행여 외로운 신선놀음이라고 부르지 말라! 나의 눈물은 가슴 속으로 흘러내리고 있으니까. 그 좋아하는 테낄라(Tequila) 술도 누구 더불어 마실 상대도 없으니, Tequila가 그만 The Killer(살인자)로 변한다. 아아 구례에서 더불어 술도 마시고 책도 읽던 친구들, 내가 주책(酒冊)바가지들로 이름을 붙였던 그 늙은이들도 사무치게 그립다. 나의 노년을 지탱해주는 경제적 도움은 미국에서 살아온 30여년 동안에 내었던 사회보장제도 세금과 연금을 합해 에덴 이쎄이테라스에 입주 가능한 자격 때문이다. 소득이 너무 많으면 들어올 수 없는 저소득 노인 아파트라서, 일부 영리한 한국 할머니들은 재산을 전부 자녀들에게 양도하고, 자기 은행 잔고는 최소한으로 줄여서, 가짜로 가난해진 노인 신세로 10년을 기다려 이곳에 들어온다. 산프란시스코 지역 주택값은 미국 전역에서도 뉴욕과 더불어 최고 수준이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12평 아파트면 대략 월 3000달러 정도인데, 이곳 저소득층 노인아파트에선 그것의 10분의 1정도 월세를 내고 산다. 나로서는 죽을 때까지 미국 정부에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이제는 정말 마음이 안 가는 곳이다. 산프란시스코는 미국 전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낭만의 도시로 한때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인 곳이기도 했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1953년 한국전쟁 직후,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으로, 처음에는 장세정이 노래 불렀으나, 나중에는 백설희의 꾀꼬리 같은 절묘한 목소리로 부른 노래로 널리 알려진 산프란시스코란 트로트 노래가 있다:
1.비너스 동상을 얼싸안고 소근대는 별 그림자, 금문교 푸른 물에 찰랑대며 춤춘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나는야 꿈을 꾸는 나는야 꿈을 꾸는 아메리칸 아가씨.
2.네온의 불빛도 물결따라 넘실대는 꽃 그림자. 빌딩에 날아드는 비둘기를 부른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내일은 뉴욕으로 내일은 뉴욕으로 떠나가실 님이여.
3.메트로포리탄 오페라에 꿈을 꾸는 님 그림자. 달콤한 그 키스에 쌍고동이 울린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나이트 여객기가 나이트 여객기가 유성같이 날은다
나는 이 노래를 지금도 3절까지 외워서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산프란시스코는 Homeless (노숙자)들의 난장판으로 변해서, 거리 곳곳에 일인용 천막들을 치고, 주변을 쓰레기더미로 만들며, 대낮에도 길거리에 팔을 늘어뜨리고 허리를 굽힌 채로 몇 시간이고 서 있는 좀비들 같은 마약에 취한 인간들이 점령한 더러운 거리로 변했다. 심하게 말하면 뉴욕, 쉬카고, 로스안젤레스, 휴스톤, 아틀란타 등등 미국의 대도시들이 거의 같은 모습들이다. 나는 산프란시시코로 자동차를 몰고 나가 주차할 생각이 없다. 숱한 자동차들이 파괴되고 물건들은 도둑맞고, 밤이면 절대로 혼자 다닐 생각조차 못하는 위험지역들이 미국의 도시들이다. 미국은 총기, 마약, 홈리스 때문에 망해가고 있는 중이다
.
한국은 이에 비하면 지상 천국이다. 그러니 미국, 유럽, 전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이 한번 한국에 오면, 그냥 거기에 눌러앉아 살고 싶어 하는 나라가 되었지. 도처에 WiFi 인터네트가 깔렸고, 밤중에 홀로 거리를 산책해도 위험하지 않고, 언제라도 택배가 가능하고, 병원 가기가 이웃집 가기처럼 편한 나라는 아마도 전 세계에서 한국이 유일? (물론 요즈음 응급실 뺑뺑이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이상한 놈이 용와대에 앉아있기 때문이고). 여기 미국에선 내가 병원 갈 일이 있어서 의사 예약을 잡는데, 자그만치 1달 뒤로 예약일을 잡아야 하는 미국의 병원 현실에 그만 질렸다. 사실 나는 이민 1세 한국인들 가운데서는 그래도 영어를 잘하는 편이리라. 미국인 교회에서 영어로 목회를 한 것만도 6년이나 했으니. 그래도 집 밖에만 나가면 영어에 영어(囹圄)된 신세가 괴롭다. 한국말은 잘할 자신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지리산의 넓은 품속에 안긴 구례, 5일 시장이 서는 날이면 나는 참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그곳에 나가 어슬렁거리다 아는 사람 만나면 막걸리도 마시며 이야기도 나누고, 구례 향교에 나가 뒤늦게 고전 공부도 하면서 사람들도 사귀고, 3, 4월이면 환장하게 피어나는 꽃들 속에 파묻혀 몽환적인 감상에 젖어 살기도 했지. 더구나 나 같은 늙은이를 친절하고도 정중하게 상대해 주는 구례의 젋은이들이 왜 이다지 그리운가? 아아 돌아가고 싶어라,
내 고향 구례로!
아아 그리워라 지리산인이여!
- 2024년 12월 1일 언재 한성수 (焉哉 韓盛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