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10-08(목)
 

기차가 멈추었다. 

나경은 기차가 출발하고 도착하는 세 시간 내내 수현을 생각했다. 

얼마나 변했을까? 

결혼은 했을까?

 내가 다시 수현을 만나도 되는 것일까? 고

등학생이었던 수현을 만나던 날, 그리고 수현이 학생운동에 빠지고 교도소까지 가고 

난 이후에 도망치듯 떠난 자신이 다시 수현을 만나는 것이 옳은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수현을 만나도 될까? 다시 수현을 망치는 것은 아닐까?  

나경은 자신이 아픈 아이가 있고, 이혼을 했고, 나이가 많고, 수현을 다시 만나면 

수현을 사랑해 버릴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경은 역안에서 서성이는 수현을 봤다. 

검은색 롱코트에 잘 다려진 바지, 어디에 있어도 큰 키 때문에 한 눈에 찾을 수 있는 수현이 역 안에 있었다.

나경은 잠시 일어 섰다가 주저 앉았다. 


수현은 기차가 떠나고 한 참을 역앞에서 기다렸다. 

나경은 결국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수현은 역을 빠져 나왔다. 

겨울 해는 짧게 머물다 서편으로 떠났다. 


수현은 나경이 기차에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경이 일어섰다가 다시 주저 앉는 것을 봤다.


수현은 나경이 탄 기차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나경을 만나면 나경을 사랑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혼한 나경을 사랑 할 수는 없었다. 


수현은 왔던 길을 다시 걸었다. 

옷가게 앞을 지날 때 현주가 나왔다.


수현아..

어.. 현주야..

잘 차려입고 어디 선이라도 보러 가나 했는데 왜 이렇게 빨리와?

어. 그냥,..


다음에 보자… 현주야


야.. 이 수 현… 잠깐만 ….


“눈도 오고 오늘은 손님도 없을 것 같은데 나랑 밥이나 함께 먹자.”


야. 기다려..

네가 오늘 매상도 올려주고 

내가 초등 동창에게 옷 판 기념으로다 밥한끼 사줄께.

너 집에 가야 함께 밥 먹을 사람도 없잖아…

어… 그 그래....

눈도 오는데.


현주는 수현을 잡아 끌고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읍에 가장 번화가 이층에 자리잡은 바나나숲이라는 경향식 집이었다. 

수현은 여기서 나경과 만난 적이 있었다. 


오래전 수현이 겨울에 아파트 잡부일을 하고 있을 때 

나경과 함께 차를 마시러 왔던 곳이었다.

현주는 창문이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나경과 함께 앉았던 곳이었다. 


현주는 오래전 자신이 수현을 짝사랑하던 때가 생각났다. 

초등학교때 시작한 짝사랑은 수현이 교도소에 갔다는 소문이 났을 때도 여전해었다.  

수현이 학생운동을 하다가 교도소에 갔다면 그럴만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현주는 생각했다. 


현주는 음식과  술을 주문했다. 둘은 초등학교 친구들을 하나씩 이야기 하며 이야기 했다. 

수현은 이런 이야기를 처음 해봤다. 기억나는 친구들이 있었다. 수현은 모두 잊고 살았다. 

지난 10년간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농사를 짓고 수확하고 노무사 시험에 떨어졌고 그것이 다였다. 

지숙을 만났지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못했고 나경을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고향에 친구들이 있었지만 찾지 않았고 찾아와도 인사만 했을 뿐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현주를 만났고 오래전 친구들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수현은 오랜만에 취했다. 현주는 취한 수현을 모텔에 데려갔다. 

현주는 수현과 함께 잤다. 


수현이 일어 났을 때 현주가 속옷만 입은 채 옆에 누워 있었다. 

수현은 코트에서 담배를 꺼냈다. 


“수현아 일어 났어?’

“어"

“어제 무슨일이… 

수현은 더 말을 하려다가 참았다.

무슨일이 있었냐고 묻는 것은 현주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현주는 어색하게 수현을 바라보면 웃었다. 


“어제 아무일도 없었어. 수현아”

너랑나랑 취해서 여기서 잤을 뿐이야. 

그러니까 부담갖지마….


현주는 그렇게 서둘러 옷을 입고 모텔을 빠져 나갔다.


수현은 모텔방에서 두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오래전 나경이 떠나던 밤이 생각 났다. 

그 때 수현은 나경을 붙잡지 못했다.

나경이 수현의 손을 잡아 가슴에 올렸을 때 수현은 모르는 척 몸을 돌렸고 그 날 나경은 떠났다. 

그때는 잠든 척했고 어제는 잠들었다.  

술에 취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젯밤 일을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수현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경은 기차를 타고 여수까지 갔다. 

도착하니 밤이었다. 여수의 밤은 도쿄의 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경은 도쿄에서 지치고 힘들때 오다이바에 해변을 걸었다. 

이국적인 건물들이 즐비한 오다이바의 해변에서 나경은 오래전 수현과 걸었던 부산의 바다를 생각했다. 

수현과 함께 걸었던 부산의 바다도 이 바다와 연결 되어 있으므로 수현과 자신이 아직은 연결 되어 있다고 

나경은 스스로 만족했다.


나경이 역에서 나왔을 때 여수의 바다는 평화로웠다. 


“혼자 여행을 떠난 것이 언제였을까”라는 생각이들었다.


나경이 혼자 여행을 떠난 것은 아이를 낳고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온 집에는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있었고 나경의 아이는 한국에 돌아온 후 그전에 비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스스로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갔다. 

나경은 이만큼만 해도 아이가 다른 아이와 비슷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일들을 하나씩 해결 하는 것이 발달장애를 가진 나경의 아이가 해야하는 유일한 공부였다. 


다른 아이들이 달릴때 걸었고 다른 아이들이 말을 할 때 무무 윽 윽 소리만 냈던 아이였다. 

이제 엄마…무.. 라고 이야기 했던 아이는 이제 엄마 물 이라고 말했다.

한 음절이 한 단어가 되었고 두 단어가 뭉쳐 말이 되었다. 


주어와 목적어 서술어가 정확하지 않았지만, 아이는 이제 주어와 목적어를 정확히 알았다. 

이제 자신의 욕구를 손가락이 아니라 말로 설명 할 수 있었다. 

나경은 자신의 아이가 세상 살이의 기본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가장 큰 도전이 되는 아이를 키우는 나경은 수현이 싸우려 했고 얻고자 했던 것들,  

억압과 폭력, 독재, 민주주의, 평화, 인권같은 것들이 발달장애아를 키우는 것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를 해결 하면 다른 문제가 있었고 또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튀어 나온다. 

 

나경의 아이도  화장실에 가면 다음은 스스로 변을 해결해야 하고 변을 해결하면 스스로 목욕을, 

목욕을 해결하면 스스로 또 무언가를 해야 할 때 마다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끝이 없는 싸움이었다. 끝이 없는 것은 해결 할 수 없다. 오직 타협하거나 모른척 하는 길 뿐이다. 

나경은 여수의 밤바다에서 자신의 아이와 수현을 생각했다. 


나경은 천천히 오동도를 향해 걷다 지숙이 생각났다. 


“지숙이 고향이 여수라고 했었지"


나경은 지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오랜만

나… 나경이야.

아. 선배 잘사셨어요?

그래

나.. 여수에 있어.

잠깐 볼래?

아. 잠시만요.

오늘은 힘들고 내일 만나면 좋을 것 같은데요?

내일은 …

내가 안 될 것 같아..

다시 돌아가야 하거든

어디로요

서울

서울에 사세요?

어..

돌아왔어…

얼마 전에…


그래요. 그럼 잠시만요.

선배 지금 어디에요

여기 오동도..

그럼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나갈게요.


지숙은 오동도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경 선배는 왜 다시 한국으로 돌아 왔을까? 수현 선배가 생각나서 돌아왔을까? 

지숙은 나경이 수현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사랑했던 수현이 나경을 사랑했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나경은 일본에 있었고 그것은 충분히 안전한 거리였다. 하지만 다시 서울로 나경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자 지숙은  

나경이 신경쓰였다.  지숙은 왜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웃었다. 

수현과 자신이 지금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것이 생각 났기 때문이다. 


자신이 몇해전 수현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더 이상 수현을 만나지 않겠다는 말을 했다.


“ 그래 이제 수현 선배와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미련은 없어… 아니 없어야 한다고 지숙은 생각했다. 


나경은 지숙을 기다리며 수현 생각을 했다. 

자신이 떠난 후 지숙과 만나는 수현을 생각 할 때 나경은 질투를 느꼈다. 자

신이 수현을 떠나왔지만 그녀는 결국 수현을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카페에 앉아 있는 나경을 본 지숙은 나경이 예전의 모습 그대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경 선배는 여전히 예쁘구나”


선배 오랜만이에요.

그래 지숙아… 잘살지

네.

공무원 생활은 어때?

뭐 그냥 매일 똑같죠.

출근하고 퇴근하고

각종 민원에….

그냥 그래요.

요즘은 여수 엑스포를 한다고 해서 엄청 바빠요.


네가 공무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한 번 도 못했다.

갑자기 공무원은 왜 된거야?

나름 열혈투사께서..

선배 저 놀리는 거죠.

전 열혈 투사인적 없었어요.

그냥 열심히들 투쟁 하니까 옆에서 도와준 거죠.


너.. 강진이 있던 써클에 있었잖아?

그러면서 수현이랑 사귀고..


그러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저도 참 웃기죠.

수현선배 입장에서 보면 제가 웃겼을 것 같아요.

수현 선배는 강진 선배랑 방향이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너도 참.. ..

그러니까요.

하하….


지나고 나니 별 것도 아니지만요.

나경 선배 그거 알아요.

뭘

강진 선배 아직도 학교에 있어요.

아직도..네.

뭐 학교에서 뭘 하시는지.. 

수현은 뭐해?


수현 선배요.

모르세요.

수현 선배 고향에서 농사짓잖아요.

꽤 되었을걸요.

그래


나경은 어제 수현의 모습을 생각했다. 

전혀 농부와 어울리지 않았다. 검은색 롱코트에 흰색 셔츠에 날선 바지까지….  

농부의 모습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경은 수현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준비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분이 좋아졌다. 수현이 아직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수현이 농사를 짓는다고?

그래….


너는 수현하고는?

진작에 헤어 졌어요.

수현 선배 교도소 갔을 때 이제 더는 기다리지 못하겠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어요.

그리고 공무원 준비해서 시험보고 바로 여수에 내려왔어요.


고향이 편하고 좋아요. 

혼자 계신 어머니도 좋아하시구요.

저는 선배처럼 부자가 아니어서요. 

전 안정적인 직장이 꼭 필요해요.


연애는 안 해?

연애요.


연애는 하고 싶은데 잘 안 되네요. 

그냥 수현선배하고 자꾸 비교하게 되고 뭐 그래요.

너무 잘난 남자를 만났나봐요. 

지숙은 나경을 보며 웃었다. 


몇 해전에 수현 선배가 저를 찾아왔었어요.

예전 모습은 아니더라구요.

많이 변했어요.

자신도 없어 보이고, 열정도 없고

맥이 빠진 사람처럼 보이더라구요. 

농사가 편해서 그런지 아니면 더 이상 투쟁할 목표가 없어서 그런지.. 

아무튼 그랬어요. 

오래전에 그 모습은 아니더라구요. 

생긴 것 빼고요.


지숙은 나경을 보며 여전히 수현에게 관심이 많은 나경이 안쓰러워 보였다. 

여전히 나경이 수현을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다고 하던데….. 


“여전하구나 선배는”

어. 뭐가

여전히 수현 선배를 좋아하죠?

네가… 

무슨. 아니야..

너랑 나랑 만나서 누굴 이야기 하겠니…

수현이 밖에 더있어…


나경은 지숙이 여전히 수현을 좋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숙도 역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숙은 더이상 수현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의 자신이 그랬을지 몰라도 현재는 그렇지 않다. 


수현을 사랑했던 과거의 자신보다 지금의 자신이 더 좋았다. 

수현을 사랑할 때 지숙은 힘들었고 늘 불안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현이 가장 편안한 길을 선택했고 

자신을 찾아 왔을 때 그런 수현에게 지숙은 맘이 가지 않았다. 


지숙은 수현의 불안한 삶 때문에 떠났지만 수현이 안전한 길을 선택하자 수현에게 미련이 사라졌다. 

지숙은 자신이 사랑했던 것은 수현이 아닌 학창시절의 투사 같던 수현을 사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숙은 자신이 사랑한 이수현의 본질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것은 수현이 본질이 아닌 자신에 눈에 비친 또다른 이수현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더 이상 자신이 수현을 사랑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경은 지숙에게 수현의 소식을 들은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적어도 수현이 이제는 더이상 처음 자신과 만났던 그 길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로써 나경은 한 사람의 인생에 자신이 끼친 부채에서 벗어난 기분이 들었다. 

한 편으로 이제는 정말 수현을 사랑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은 이미 결혼했고 아이가 있으며 그것도 아픈 아이가 있으며… 나이가 많고.. 

나경은 자신의 마음과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수현을 향한 마을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지숙과 나경은 밤 바다를 뒤로 하고 헤어졌다. 

지숙은  다시 택시를 타고 자신의 삶이 기다리고 있는 엄마의 집으로 향했다. 

나경은 밤 바다를 뒤로 하고 밤 기차를 타고 아이가 있는 엄마의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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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 키즈의 생애 15편 "겨울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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