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9-09(수)
 

배추1.png

좌:제주도 재래종인 토종 구억배추, 우:잡종 결구배추_둘 다 직접 키운 거지만 지금은 토종만 심는다. 결구배추가 키우기 힘든 것도 있고 토종의 깊고 구수한 맛도 없어 심지 않게 되었다. 가끔 불량식품도 먹고 싶을 때가 있듯 결구배추의 고소한 속맛이 당길 때도 있긴 하지만.......

 

처서는 처서였습니다. 열대야가  조금 누그러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벼가 이삭을 패기 시작했거든요. 
낮엔 여전히 34도 웃도는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혹시나 논엔 가을이 찾아와 있지 않았을까 싶어 두눈 크게 뜨고 살폈지만 이삭을 보진 못했어요. 실망한 마음에 당근밭 풀이나 매야지 하고 갔다가 아직 뜨거운 더위가 힘들어 딴 일 찾아 창고로 갔습니다. 길가 그늘쪽 풀이나 제초할 요량에 새로 구입한 예초기 날 교체하려고요. 날을 고정할 볼트가 안 보여 핑계김에 잘 됐다는 심보로 연장통 정리나 하고 있는데 아내가 물 먹으러 왔다가 반가운 목소리로 벼 이삭을 보았다고 전해주네요.
"어디 어디? 난 못봤는데."
"논 끝에 있어 못 봤구나, 근데 아직 두그루뿐이야."
"그게  어딘대? 그렇게 시작하는 거지."
그러고는 이삭 잘 패라고 그새 콩 심어놓은 논 둑 풀매고 왔다지 뭡니까. 바람 잘 통하라구요. 극성은 극성입디다. 더위가 아직 한창인데 말이죠. 
"아냐, 바람이 약간 있어 할만 했어." 
이마에 땀방울 흠뻑 맺힌채 찬물 들이키며 그딴 소리나 하니 걱정은 되지만 놓친 가을 소식에 기분은 좋더이다. 바로 논으로 달려갔지요.

처서는 가을 첫달인 음력 7월의 정점임에도 음력이 조금 늦은 올해는 처서가 보름 전에 들었네요. 그렇지만 7월 11일이라 그리 늦은 편은 아니고요, 곧 7월15일 백중이 찾아오니 가을은 하루하루 다르게 익어갈겁니다. 
작년엔 윤6월14일에 든 입추에 벼 이삭이 팼습니다. 윤달이 아니었으면 7월14일에 이삭이 올라온 것이니 7월12일에 이삭 올라 온 올해랑 음력 기준으로 보면 엇비슷 해보입니다. 그런데 양력  기준으로 보면 작년엔 입추에 팼는데 올해는 처서에 팼으니 보름가량 늦은 건데요, 제가 볼 땐 입추에 팬 작년이 이상한겁니다. 올해가 정상이죠.
처서가 되면 가을은 점차 가속도가 붙어 익어 갈겁니다. 입추에 맥아리 없던 귀뚜라미 소리가 처서가 되었다고 한결 청아해진 걸 봐도 알 수 있지요. 다만 소서에 피던 무궁화꽃이 올해는 일주일 이상 늦게 피다 이제서야 절정이니 서리가 늦게 올 것 같아 걱정이긴 합니다. 서리 내릴 때를 알려주는 똑똑한 꽃 무궁화가 늦게 피어 서리도 늦으면 서리 맞아 맛이 드는 무, 배추가 제대로 서리를 맞지 못 할 수 있거든요.

처서  즈음해 드는 음력 7월15일 백중은 단오 다음으로 큰 마을 축제였습니다. 먹을 게 별로 없어 배고픈 축제가 단오라면 백중은 비로소 먹을 게 많은 배부른 축제였어요. 이 때쯤 되면 풀에서 나는 과채류 과일, 곧 수박 참외 오이 호박 가지 고추가 한창이고 나무에서 나는 포도 자두 복숭아 파란 햇사과도 한창이지요. 요즘은 일찍 먹을 욕심에 뭐든지 일찍 익게 종자 개량들을 해서 제철 맛이 사라진 게 진짜 아쉽지요. 백중절도 사라진 게 그래서일까요?
그건 아니구요. 일제강점기 때 단오와 함께 없어졌습니다.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핑계였지만 마을공동체 문화에 기대 언제 다시 필지 모를 독립운동의 싹마저 말살하려 했던 거죠.
암튼 또 다르게, 단오는 벼 모내는 축제인 반면 백중은 말복으로 논 피사리 끝내고 쉬는 축제였습니다. 호미를 씻어 걸어둔다 해서 호미씻이, 피사리 머슴 쉰다 해서 머슴생일이라고도 했지요.

그렇지만 마냥 축제만 즐길 한가한 것만은 아닌 건 김장농사 준비 때문입니다. 무, 배추, 알타리, 쪽파 등 김장 작물은 벼와 곡식 다음으로 중요한 우리네 주식이지요. 여름 풀 거두고 거름 넣어 땅을 갈아둡니다. 저는 배추 육묘용 씨를 입추에 심지만 시중의 배추 모종은 대서 직후 파종한다고 하니 가을 농사가 엄청 빨라졌어요. 
김장의 꽃은 역시 배추입니다. 그런데 배추 농사가 만만하지 않아 문제입니다. 아마 제일 키우기 어려운 게 배추일겁니다. 특히 가을 배추가 어렵지요. 한여름 동안 밭에 각종 벌레들이 번식한 상태에서 심어야 하니 힘들 수밖에요. 가을배추를 괴롭히는 놈들은 한 십여 가지 될겁니다. 청벌레 잎벌레 톡톡이 민달팽이 집달팽이에서부터 메뚜기 귀뚜리도 달려들고 관문을 다 통과했다 싶으면 진딧물이 나타나 배춧잎을 도포해버려 도저히 먹을 수 없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나 진짜 무서운 적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무사마귀병. 뿌리혹병이라는 전염병입니다. 밤엔 멀쩡한데 낮엔 잎들이 데쳐놓은 것 마냥 풀썩 주저앉길 반복하다 결국 죽고 말지요. 왜 배추농사는 이렇게 힘들까요?
원래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인간이 크고 맛있게 먹으려 배추 본성에 거슬려가며 심기 때문입니다.
배추는 영상 30도 이상의 온도가 되면 아주 힘들어 합니다. 봄 가을의 서늘한 환경을 좋아하죠. 그런데 아직 영상 30도를 웃도는 한여름에 심으니 문제인겁니다. 일찍 심어 크게 키워먹으려 하는 건대요, 그 욕심을 부추긴 건 바로 결구배추입니다. 양배추처럼 알이 꽉꽉 차는 배추로 크기도 무게도 상당합니다. 그렇게 키우려면 일찍 심어야 하는데 그때가 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은 날씨라는 게 문제인거지요.
결구배추는 1970년대 이후에  일반화되었는데 호배추라 해서 조선배추와 별도로 김장 담갔어요. 결구배추는 맛있고 일찍 익지만 무르기도 해 빨리 먹을 김치로 담그고 조선배추는 억셔 늦게 익고 깊은 맛 때문에 늦게 먹을 김치로 담갔어요. 그러다 냉장고가 발달해 결구배추만 자리잡은 거지요.
지금의 결구배추는 기존의 다양한 토종배추들을 교배해 맛도 좋고 결구도 잘되는 걸 선발 육종한 겁니다. 우장춘 박사가 만들었다는 오해가 있지만 그건 아니고 배추 육종 교배이론과 기술을 닦은 것이라해야 맞습니다. 그덕에 결구배추가 만들어진 거겠지요.
다만 문제는 결구배추는 잡종이라 씨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씨 받아 키우면 결구배추가 아닌 엉똥한 애들이 나옵니다. 숨어있던 열성인자들이 나오는 거지요. 매번 씨를 사다 심어야 합니다.
자가채종하는 이른바 농부권Farmer's right이 배제된 씨로 저는 이걸 불임씨앗이라고 합니다. 맛은 있을진 모르나 달고 고소한 쪽으로 육종 해 벌레도 잘 달겨듭니다. 농부가 계속 씨를 받아 온 토종배추는 맛도 맛이지만 병해충에도 강한 씨를 계속 선발해 받아왔기에 환경적응력이 뛰어나지요. 가임종자의 매력입니다.
앞에서 얘기했듯 배추는 야생순무에서 온 거라 순무처럼 쌉싸르하면서 개운한 뒷맛이 진짜입니다. 할머니들이 그랬어요. 맛있는 배추는 갓 맛이 난다고요. 순무 같은 맛이지요. 그 맛은 배추 겉잎에 많지 속잎에는 적습니다. 속이 꽉 찬 결구에는 달고 고소하긴 하나 참 배추 맛이 아닌 겁니다. 배추 수확할 때 보면 겉잎은 다 버리고 속만 가져가는 게 안쓰럽기만 한 까닭입니다. 진짜는 버리고 쭉정이만 가져가는 꼴이거든요.

저는 이런 토종배추만 키워 먹지만 그래도 결구배추를 보면 우리의 김치문화가 만든 육종 기술의 쾌거란 생각도 지울 수는 없습니다.
다만 육종하다보면 잡종교배는 필수 방법이겠으나 그 잡종 종자도 씨를 받아 재배할 수 있는 순종 종자로 만들어 누구나 씨 받아 농사지을 수 있게끔 했으면 좋겠습니다. 불임종자로 종자를 독점하면 언젠가 종자가 사라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종자의 지적재산권과 자가채종하는 농부권이 배치되지 않는 방향으로 나라의 종자정책도 선회하길 기대합니다. 그동안 지적재산권 보호에만 신경쓰다 농부들의 토종보전에도 관심갖기 시작해 늦었지만 다행입니다. 곡식종자는 식량종자라 나라에서 육종 보급하는데, 씨값이 저렴해 좋긴 하지만 그보다는 사지 않고 씨 받아 심을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농부권이 보장되어 누구나 받아심을 수 있어야 종자가 지켜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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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환의 절기 이야기] 이삭 패는 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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