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에서 농촌기본소득이 시작된다. 구례군은 농어촌 기본소득 시범 지역으로 선정되어 모든 주민에게 매월 20만 원을 지역화폐로 지급한다. 첫발은 잘 내디뎠다. 그러나 사업에 선정되고 돈을 지급한다고 해서 저절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진짜 성공은 그 돈이 구례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바꾸고, 지역 안에서 얼마나 따뜻하게 순환하느냐에 달려 있다.
기본소득을 단순히 주민들에게 돈을 나누어주는 정책으로만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주민이 지역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최소한의 생활 기반을 보장하고, 동네 가게와 시장, 농민과 돌봄 제공자가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마중물이어야 한다. 그래서 구례 농촌기본소득의 성과를 인구가 얼마나 늘었는지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주민의 식탁이 좋아졌는지, 동네 가게에 손님이 늘었는지, 혼자 지내는 어르신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이 생겼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그동안 농촌의 발전 전략은 주로 외부의 사람과 돈을 끌어오는 데 집중되어 왔다. 산업단지를 만들고 관광시설이나 케이블카를 세우면 관광객이 몰려오고 젊은 사람도 들어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만큼 사람이 오지 않으면 큰 시설과 유지관리비만 남는다. 건물은 번듯한데 정작 주민의 삶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 일도 많았다.
구례의 미래를 토건 사업과 청년 유입에만 걸어서는 안 된다. 일자리와 생활 기반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건물과 관광시설을 늘린다고 청년이 저절로 찾아오거나 오래 머무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구례는 65세 이상 주민이 전체 인구의 40%를 훨씬 넘는 초고령 지역이다. 이제 정책의 중심을 ‘언젠가 들어올 사람’에서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옮겨야 한다.
그렇다면 발상을 바꿔보자. 고령화를 극복해야 할 약점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초고령사회에 가장 잘 대응하는 지역을 만들 수 있는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르신들이 살던 마을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 대한민국에서 가장 앞선 고령 친화 지역을 만들어보자. 구례의 미래 비전을 “노인들의 천국”으로 삼아보자는 이야기다.
물론 노인들만 모여 사는 거대한 복지시설을 만들자는 뜻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도 살던 집과 마을에서 건강하게 지내고, 밥을 먹고 병원에 가고 이웃을 만나는 데 불편함이 없는 지역을 만들자는 것이다. 노인이 행복한 동네는 아이와 장애인, 청년과 여성에게도 살기 좋은 동네다. 언젠가는 누구나 노인이 된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결국 모든 주민을 위한 구례를 만들자는 제안이다.
이를 위해서는 농촌기본소득과 통합돌봄을 단단하게 연결해야 한다. 기본소득을 받아도 마을에 쓸 곳이 없다면 돈은 금세 구례 밖으로 빠져나간다. 반대로 그 돈을 지역 먹거리와 반찬 배달, 병원 이동, 집수리, 문화와 여가 활동에 사용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주민의 생활이 편안해지고, 지역 안에는 새로운 일자리도 생긴다. 기본소득의 액수만큼 중요한 것이 “그 돈이 구례 안에서 몇 번이나 돌고 도는가”이다.
먼저 경로당부터 달라질 수 있다. 담소를 나누고 점심을 함께 먹는 공간을 넘어, 마을의 작은 생활돌봄 거점으로 만드는 것이다. 건강을 살피는 돌봄 반장, 식사와 반찬을 챙기는 먹거리 돌봄, 병원과 시장에 갈 수 있는 이동 지원, 간단한 집수리를 연결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어르신들은 낯선 시설로 떠나지 않고 자신이 살아온 마을에서 노후를 보낼 수 있다.
지역 먹거리도 빼놓을 수 없다. 구례 농민이 생산한 농산물로 어르신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학교와 복지시설, 공공기관이 지역 농산물을 우선 구매하면 어떨까. 마을부엌과 반찬가게, 공동급식과 식사배달을 지역의 사회적경제 조직이 맡을 수도 있다. 그러면 농민에게는 안정적인 판로가 생기고, 청년에게는 일자리가 생기며, 어르신의 식탁은 더 건강해진다. 이렇게 기본소득은 농민과 청년, 노인을 하나로 이어주는 셈이다.
어르신을 돌봄의 대상으로만 보아서도 안 된다. 지리산의 산나물과 약초, 섬진강의 생태, 마을의 역사와 음식에는 오랫동안 살아온 어르신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이들이 농산물 가공과 마을식당, 생태해설과 전통음식 교육에 참여하도록 해보자. 도움만 받는 노인이 아니라 일하고 가르치고 지역의 미래를 결정하는 당당한 주민으로 서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지리산과 섬진강이라는 구례만의 보물을 더할 수 있다. 자연을 깎고 파헤치는 대규모 관광개발보다 치유와 장수, 생태와 돌봄을 중심으로 한 체류형 관광이 구례에 더 잘 어울린다. 어르신과 가족이 함께 걷는 무장애 숲길, 섬진강 치유 프로그램, 지역 농산물로 만든 건강식, 농촌마을 체류를 연결하는 것이다. 지리산과 섬진강은 개발의 대상이 아니라 구례 사람들의 건강과 삶을 지켜주는 공동의 자산이어야 한다.
이런 변화는 행정에만 맡겨놓는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역 활동가와 귀촌인, 농민과 상인, 의료기관과 사회적경제 조직이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한다. 읍·면 기본소득위원회도 지급 대상자를 심사하는 데 머물지 말고, 기본소득과 돌봄, 먹거리와 지역경제를 함께 설계하는 주민자치 조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성과를 평가하는 방법도 달라져야 한다. 전입 인구가 몇 명 늘었는지만 계산할 것이 아니라 “할머니의 식탁이 좋아졌는가?”, “병원에 가지 못하는 어르신이 줄었는가?”, “혼자 밥 먹는 사람이 이웃과 함께 먹게 되었는가?”, “동네 가게와 농민의 소득이 늘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런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을 때 구례 농촌기본소득은 비로소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구례는 더 큰 건물을 가진 지역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도 떠나지 않아도 되는 지역이 되어야 한다. 관광객이 잠시 보고 떠나는 곳을 넘어, 지금 사는 주민이 가장 존중받고 행복한 생활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지리산과 섬진강, 농촌기본소득, 초고령사회라는 세 가지 조건을 잘 엮는다면 구례는 대한민국 농촌의 미래를 가장 모범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
“노인들의 천국, 구례”는 고령화에 체념하자는 구호가 아니다. 오히려 고령화의 현실을 당당히 받아들이고, 이를 돌봄과 순환경제, 생태와 공동체를 중심으로 지역을 새롭게 설계하는 힘으로 바꾸자는 제안이다. 농촌기본소득에서 출발한 구례의 실험이 성공한다면, 구례는 사라져가는 농촌이 아니라 새로운 기본사회를 가장 먼저 만들어낸 지역으로 기억될 것이다.
글쓴이 : 김흥주
_현재 원광대학교 라이프케어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 교육부 인문사회융합인재양성 사회구조사업단장(2025~현재), 전북특별자치도 먹거리위원회 공동위원장(2026~현재), 한국농촌사회학회 회장(2021~2023), 한국사회과학연구지원사업(SSK) 먹거리지속가능성연구단장(2010~2021), 한국사회복지학회 운영이사(2011~2012), 서울시 친환경무상급식심의위원회 부위원장(2012~2015), 사회복지시설 사회복지관 현장평가위원(제5기, 제6기, 제7기), 기초 푸드뱅크사업 현장평가위원(2012년), 전북사회복지공동모금회 배분위원(2015~2019). 저서 <지역사회복지론>, <사회적경제와 공공성>,<사회복지조사방법론>(공저) 등.
[뒤웅박 씻나락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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