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면 바래봉이죠. 여름에도 좋았다.
양을 키워서 황폐해지기는 했지만, 양을 키워서 철쭉으로 유명한 산이 된 것을 뭐라고 해야 할까?
산을 꽤 오래 좋아했다. 내가 태어난 곳은 김제 평야라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지평선으로 뻗어나간 들뿐이었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때 지리산을 올랐다.그후 꽤 오랫동안 지리산을 다녔다. 매일 출근하는 길도 같은 길로 가지 않고 가끔 다른 길을 선택하고, 학교에 다닐 때도 매번 가는 길이 아니라 딴길로 가곤 했다.
[바래봉으로 가는 길 등산로가 꽤 거칠다]
지리산도 매번 같은 길을 선택하지 않고 다른 길을 선택하다 보니 웬만한 지리산의 등산로는 다 가봤다. 그런데 내가 꽤 오랫동안 가보지 않은 곳이 철쭉으로 유명한 바래봉이다.
"눈이 오면 바래봉이죠." 운봉이나 산내, 남원 사람들은 눈이 오면 바래봉에 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꽤 오래전이다. 구례 사람들은 눈이 온다고 노고단에 가지는 않는다. 눈이 오면 노고단으로 가는 도로는 폐쇄되고 눈 내린 노고단을 화엄사에서 오르는 것은 쉽지 않다.
[오는 사람이 많은지 정성은 모두 덮혀 있었다.]
바래봉은 높이가 1,165m라 지리산에서는 매력적인 높이도 아니고, 구례에서 바래봉에 가려고 운봉까지 가기도 그렇고, 매력적인 노고단이 있는데 굳이 운봉까지... 그러다 보니 미루고 미루어 아직까지도 바래봉에 가지 못했는데, 함께 가자는 분들이 있어 바래봉에 다녀왔다.바래봉 등산은 운봉의 허브밸리에서 보통 시작하는데 우리는 전북학생수련원에서 시작했다. 거리는 대략 12km 정도 되는 길이다.
[바래봉은 정령치에서 시작하기도 하고 전북학생수련원에서 찾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운봉 허브벨리에서 시작한다]
전북학생수련원에 주차를 하고 산길을 찾는데 진입로를 찾기가 조금 어려웠다. 이 길로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다.
한참을 올라 능선길에 접어들었다. 등산로는 일부 구간은 풀이 우거진 구간이 많았다. 여름이라 반바지를 입은 상태라 등산로로 뻗어 나온 딸기 덩굴이 맨살에 상처를 내기도 했다. 혹시라도 여름에 이 구간을 찾는다면 긴바지가 필수다.
팔랑치를 넘어가니 곳곳에 '바래봉 생태계보전지역'이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1995년까지 바래봉에서 양을 키웠다고 되어 있고, 사진엔 수많은 양들이 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혹시 바래봉이 철쭉으로 유명해진 것이 양들이 독성이 있는 철쭉을 먹지 않고 다른 풀만 먹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찾아보니 맞았다. 양들이 없어서 그런지 생태보전지역에는 다양한 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바래봉은 오래전엔 양들의 차지였다.]
양을 키워서 황폐해지기는 했지만, 양을 키워서 철쭉으로 유명한 산이 된 것을 뭐라고 해야 할까?
바래봉에서 유명한 것은 구상나무와 주목나무 군락이다. 바래봉으로 가는 길 양쪽으로 펼쳐진 구상나무 군락은 지리산 어디에서보다 밀집되어 있고 관리가 잘 되어 있다. 겨울에 눈이 내려 구상나무에 흰 눈송이가 가득하다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천연 트리가 될 것 같다. 실제로 구상나무는 외국으로 퍼져 나가 가장 예쁜 트리 나무가 되기도 했다.
[바래봉 가는길 양옆으로 구상나무숲이 산책로처럼 펼쳐진다]
1900년대 초 프랑스 신부이자 식물학자인 포리(Faurie)와 타케(Taquet), 그리고 미국 어놀드 수목원의 윌슨(Wilson) 교수에 의해 제주도 등지에서 채집되어 미국과 유럽으로 건너간 뒤, 품종 개량을 거쳐 대표적인 고급 크리스마스트리 품종으로 자리 잡았다. 유럽이나 북미의 나무 농장에서는 'Korean Fir'라는 이름으로 활발히 재배·판매되고 있다.
바래봉으로 향하는 길은 차가 다닐 수 있는 넓은 길이라 걷기에도 편하고 좋았다. 위로 올라가니 주목이 많이 보였는데 붉은 열매들이 보석처럼 달려 있었다. 잘 익은 주목나무 열매는 단맛이 있어 몇 개 정도는 먹어도 된다. 하지만 많이 먹으면 복통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몇 개 먹어보니 달달했다.
[멀리 보이는 운봉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산지역이다]
바래봉에 올라가 보니 바래봉 전체에 데크를 깔아 놓아서 여느 산의 정상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도 이 주변에서는 높은 봉우리라 사방이 탁 트여 경치가 좋았다. 하지만 나무 한 그루 없는 정상으로 쏟아지는 8월의 태양에 우리는 서둘러 내려가야 했다. 오는 길과 다르게 자동차 도로처럼 뻥 뚫린 곳이라 내려가는 길은 순탄했다.
[주목나무 열매다. 먹어보면 달달하다]
바래봉의 등산 난이도는 하 수준으로 올라갈 정도로 평이해서 누구나 가볼 만하다. 봄에는 철쭉이, 여름과 가을엔 구상나무 숲을, 겨울에는 그 어디보다 아름다운 구상나무 트리를 감상할 수 있다.
[1971년 시작: 한국과 호주의 시범목장 협정 체결로 국립종축장 운봉지장이 설립되면서 바래봉 일대에 면양 방목이 시작되었다. 면양 2,500여 마리를 도입해 바래봉 일대 약 200만 평 규모의 목초지에 방목하면서 사육했다. 1990년대 중반 양모(모직물)와 양고기의 수입 자유화로 인해 경제성이 떨어지고 생태계 훼손 지적이 이어지면서, 1990년대 중반(1995년경)을 기점으로 산상 방목이 사실상 전면 중단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