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10-0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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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홍현경

 

 

 

 

바라는 바가 없는 발걸음

 

 



어제는 날이 맑았다.

오랜만에 아는 얼굴들을 마주했다.

처음 보는 이들이어도 좋았다.

기후정의행진에 온 이들은 모두 날씨처럼 맑았다.

물론 그 얼굴 한쪽에는 먹구름을 조금씩들 갖고 있었다.

그들은 알고 있을까.

우리가 맑은 날씨에도 먹구름을 간직한 하늘 같다는 것을.

 

 

우리는 깃발을 들었다. 피켓을 보였다. 소리를 질렀다.

아무 소리도 없이 산길을 올랐다. 그리고 이야기도 했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파랑과 하양이 하늘에 가득한 날이었다.

세상은 불 타고 있다. 우리도 안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오늘 깃발을, 피켓을, 목소리를 높이 쳐든다고 해서

세상의 불을 끌 수는 없다. 그럴 수 있다면 그건 웃기는 일이다.

하루아침에 타오른 불길이 아니다.

세상은 계속 불 탈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걷는다.

나는 소리를 낸다.

나는 바라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불을 끌 생각이 없다.

그 불이 꺼지든 꺼지지 않든 나는 이 불길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그저 소리를 낸다.

내가 불을 끌 수 없다는 사실이 내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의미하진 않는다.

나는 악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나는 악을 따르지 않을 뿐이다.

내가 악을 무너뜨린다거나 불을 끈다거나 무슨 세상을 더 좋게 만든다는 환상적인 희망은 내게 필요하지 않다.

그건 나를 더욱 밑으로 끌어내리는 엿 같은 것이다.

나는 이 종말의 길에서 내가 갈 길을 가는 것뿐이다.

 

 

내 발걸음에는 바라는 바가 없다.

나는 바라지 않는다.

희망이 나를 유혹해도 나는 희망을 품지 않을 것이다.

희망의 등에는 늘 절망이 업혀 있으니까.

나는 바라는 바 없이 갈 길을 가겠다.

그게 내 남은 언어. 나의 유일한 언어가 될 것이다.

나는 아무에게도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무엇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얼굴에 남은 먹구름. 여전히 내가 어리석기 때문이다.

이 먹구름을,

슬픔을 거두어 그 슬픔마저도 내가 길을 가는 데 필요한 연료로 써야 할 날이 올 것이다.

머지 않아.

나는 어쩌면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희망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먹구름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울고 싶다는 걸.

 

 

잘 가,

얘들아. 안녕.

우리는 헤어진다. 또 헤어진다. 또 헤어질 것이다. 그리고 또 헤어지겠지.

안녕.

안녕.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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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홍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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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는 바가 없는 발걸음을 누가 막을 것인가 _919 기후정의행진 지리산행동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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