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10-08(목)
 


 

3.미곡수탈162.2X130.3 아크릴 물감,캔버스 2020.JPG
Ⓒ 박금만

 

 

미곡 수탈

/ 162.2X130.3 / 아크릴 물감, 캔버스 / 2020

 

 

여순항쟁이 일어나기 전 여수나 순천 또는 전국적으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미곡 수집령으로 쌀 가격이 폭락하고 정부의 관리들은 착취한 쌀을 창고에 넣어두고 비싸 질 때까지 풀지 않았다. 농민들의 그 피 같은 쌀로 자신들의 배만 불릴 기회를 엿보았고 실제로 두 배 이상 폭등 할 때 팔아서 부를 축적하였다. 이런 부류를 당시는 모리관상배라 하였다.

 

관리들은 경찰이 비호하는 가운데 농민에게서 쌀을 무자비하게 착취해 갔다. 여수농민들은 자신이 농사 진 쌀을 두 배 값을 주고 사먹어야 할 상황이었다.

 

당시 여순지역에 태풍까지 와서 그야 말로 삶은 피폐해져 있었다. 신문기사 한 토막에 순천에 사는 딸이 너무 굶주려 감춰둔 쌀을 자루에 넣고 몰래 기차를 타던 아버지가 철도 경찰에 걸려 쌀을 압수당하고 몽둥이로 머리를 맞아 부상당했다는 기사도 있다.

 

여수토박이인 86세의 한 할머니는 자산공원 밑이 자신의 집이었다고 한다. 집 아래 종화동 식량영단창고(정부의 창고)에서 여순항쟁 때 활짝 열린 식량영단창고에 쌀이 썩어나고 쥐가 들끓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말해 주셨다. 이렇게 많은 쌀이 썩어나고 있는데도 쌀을 풀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에게 굶주린 민중이란 무엇이었을까?

 

작품 속에서 한줌의 쌀이라도 빼앗기지 않으려는 농부의 저항!

우리민족에게는 쌀이란 목숨이었다. 14연대의 봉기로 촉발된 여순항쟁은 여수 민중의 분노였다.

    

작품을 위해 나는 내가 직접 모델이 되어 그림 속에 등장한다. 이 작품은 순천낙안읍성 민속마을에서 촬영한 것이다. 내가 한복을 입고 스스로 사진 찍을 수 없어서 배경이 된 집의 주인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집주인은 자기 집을 위주로 사진을 찍는 바람에 집은 크게 나오고 나는 아주 작게 사진에 나왔다. 거의 모든 사진이 그랬다. 아마 집주인이 자기 집을 잘 그려 달라는 무언의 압력이었을 것이다. 작업하기 참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박금만 작가는, 여수에서 나고 자라 세종대학교 미술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과 고흥, 부산과 여수 등의 개인전 및 초대전에 참여했고, 아트페어를 비롯한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작품 소장처로는 전남도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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