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분 지나면 낮보다 밤이 길어져 바야흐로 음의 시대로 접어듭니다. 성장은 멈추고 2세를 준비하고 열매와 이삭이 영글어 갑니다. 일찍 익는 조생종들은 수확해 가을의 기쁨을 미리 즐기기도 하죠.
추분은 음력 8월(酉월)의 정점이자 가을의 정점입니다. 추분 지나면 비와 더위로 성장의 에너지를 돕던 용도 내려와 이젠 가뭄과 찬 기운으로 열매와 이삭을 익게 해 긴긴 겨울을 대비 하는 거지요.
그렇지만 이번 가을엔 가뭄이 일찍 와서 마음을 불안케 합니다. 백로 전인 9월1일 비 오곤 한방울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지 전 늦봄에도 가물어 감자 마늘이 흉작이었는데 지금 가뭄은 배추 무 등 김장 작물의 흉년을 예고하네요. 뿐이겠습니까? 벼에도 좋진 않죠. 그런데 저희 논의 벼는 아주 좋습니다. 여태까지 보면 최곱니다. 일반 벼보다 가뭄에 강한 토종벼라 그런지 모르겠어요. 가을 태풍 올지 모르니 좀더 두고 봐야겠지만요
가뭄엔 직파가 최고라는 걸 가지가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종 가지를 직파한 것보다 일찍 심었는데도 직파 가지가 훨씬 좋습니다. 물도 직파 가지엔 거의 주지 않은 반면 모종 가지는 자주 주었는데도 크기나 수량이 형편이 없습니다. 직파한 고추도 이 가뭄을 너끈이 버티고 있네요. 고추는 직파만 해서 비교가 안되는 게 아쉽기는 합니다.
올해처럼 고라니가 극성인 것도 가뭄과 관계있지 않나 싶습니다. 비가 오질 않으니 산에 먹을 풀도 적을테니요. 요즘 산엔 나무가 너무 우거져 빛이 들어가지 않아 새순도 별로 나지 않을거구, 가을엔 그나마 나무 새순도 없어 더욱 민가로 내려옵니다. 추분되면 밭의 무 배추 콩잎 고구마줄기 등 채소 잎이 한입에 딱 먹기 좋게 자라 더 피해가 크네요. 낮에도 산에서 쾌~액, 쾌~액 하고 우는 소리가 매일 듵릴 정도로 저희 밭을 맴돌고 있습니다.
불쌍하기도 하지만 어쩌겠어요. 배추 200포기 넘게 당하고 점차 다른 작물들 피해도 늘고 있어 참다 못해 오늘 드디어 그물망으로 울타리를 세웠습니다. 저도 먹고 살아야 하니요.
추분은 추석과 함께 봐야 재밌습니다. 추분은 양력이고 추석은 음력입니다. 우리는 음력만 써온 걸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아닙니다. 양력과 함께 써 왔죠. 그걸 태음태양력이라 합니다.
계절의 변화는 태양이 주관하기에 태양의 달력인 절기력으로 따집니다. 태양은 불(火)이니 절기의 변화는 불의 변화입니다. 불의 변화는 태양의 각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태양의 각도가 제일 높은 하지에 화 기운이 최고에 이르고 각도가 제일 낮은 동지에 화 기운이 최저에 이르는 것처럼요.
그런데 양력만 갖고는 문제가 있습니다. 해 각도가 제일 높은 하지에 최고로 더워야 하는데 정작 더위는 하지 지나 소서 대서 쯤 최고에 이릅니다. 겨울 추위도 해가 제일 낮은 동지에 최고여야 하는데 동지 지나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소한 대한에 최고에 이르죠.
이상하죠? 해가 짧았다가 길어지면 난로 볼륨을 킨 건데 본격적인 추위가 들이닥치고 해가 길었다가 짧아지면 볼륨을 줄인 건데 복 더위가 들이닥치니 말이죠.
이 현상은 복사열 때문입니다. 햇빛으로 화기운을 느끼는 것보다 햇빛이 달군 공기입자로 화기운을 느끼는 겁니다. 그런 간접적인 화기운이 복사열이거든요. 아궁이의 불이 한참 뒤에 구들돌을 달궈야 따뜻한 걸 느끼는 것처럼요.
그래서 해의 화기운을 느끼는 거는 해 각도보다 좀 늦게 나타납니다. 조상들은 그 간격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바로 달입니다.
갑자기 웬 달? 하실텐데요. 달은 바닷물을 밀고 당기며 물(水) 기운을 통제합니다. 밀물과 썰물은 어부가 사는 바닷가에만 영향을 주는 게 아닙니다. 내륙에도 영향을 주지요. 어떻게 줄까요? 답은 강물에 있습니다. 바닷물이 밀고 들어올 때 강물 수위가 올라가고 썰물일 때 내려가지요. 강물 수위가 오르면 땅속 지하수 수위도 오를 것이고 그에 따라 내 밭의 수기운도 오를 것입니다. 밀물일 때 장마비가 쏟아지면 바닷물이 막고 있어 강물이 범람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씨를 음력 보름 전에 심으라 했습니다. 달이 보름 망월로 갈수록 밀물이 쎄져서 내 밭에 수기운이 올라 씨 심으면 뿌리가 잘 내리는 거거든요.
한강이 준설공사 하기 전엔 바닷물이 밀물 따라 흘러 들어왔습니다. 제일 깊게 들어올 땐 동호대교까지 가고 제일 낮게 들어오면 서강대교까진 왔습니다. 그래서 옛날엔 동호대교 상류를 동호라 했고 서강대교 하류를 서호라 해서 다리 이름도 그에 근거해 붙인 것입니다.
청년 시절 마포대교 근처 살았는데 바닷가도 아닌 동네에 갈매기가 많았던 걸 신기해했던 이유를 그제서야 알게 되었죠. 말하자면 강 주변사람들도 늘상 밀물 썰물을 보며 바닷물의 움직임을 알고 살았던 겁니다. 그리고 그게 농사에 영향을 준다는 것도 당연히 알게 되었죠.
양력으론 동지가 겨울의 정점이지만 추위로 볼 땐 소한 대한이 정점이라, 그걸 알 수 있게 동지 드는 달을 음력 11월로 했습니다. 해는 다시 길어지지만 맹추위가 찾아오는 소한 대한이 있는 달은 섣달 12월로 했지요.
그러니까 양력은 빛과 화기운의 변화를 알려준다면 음력은 더위와 추위, 곧 수기운의 변화를 알려주는 겁니다. 태음태양력을 쓴 조상님들의 지혜가 아닐 수 없는 거지요.
음력 12월 섣달이 서양 달력으로는 1월입니다. 1월이란 봄이란 뜻인데 제일 추운 때가 어찌 봄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달력을 사용하니 사람들이 철의 변화를 잊은 겁니다.
추분이 음력 8월에 들어 가을의 정점인 것도 달의 영향입니다. 사실 해 입장에선 하지 지나면 가을이 시작된 겁니다. 그런데 하지 전에 달궈진 복사열이 뒤늦게 나타나 하지 지나서 기승을 부리고 폭염까지 나타납니다. 그러다 입추 처서 지나 복사열이 식어 가을이 시작되고 추분에 정점에 이르는 거죠.
폭염과 복사열을 식혀주는 게 장마이고 태풍인데요, 바로 비이고 수기운이죠. 이건 바다에서 옵니다. 특히 우리에겐 달궈진 북태평양 고기압이 히말리야와 대륙 북쪽에서 내려온 찬기운과 만나 장마전선이 만들어져 비를 뿌려줍니다.
지난 백로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히말리야 빙하가 사라지면 장맛비도 사라져 폭염과 가뭄이 심각해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달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달이 주는 수기운도 사라지진 않을 겁니다. 다만 수기운을 가져다주는 방식이 바뀌는 것인데 그게 기후 변화이지요. 문제는 바뀌는 과도기를 잘못 대처하면 돌이킬 수 없는 사막화와 종의 멸종, 식량위기가 들이닥칠 수 있다는 겁니다.
음력을 알면 계절 변화의 다이나믹을 알 수 있고 나아가 기후의 변화도 어느정도 알 수 있습니다. 어느정도라고 한 건 이번 기후변화는 도시가 주도하여 그 변화의 양상이 아주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명절은 음력인 반면 절기는 양력입니다. 명절을 음력으로 쇤 건 계절 변화의 전환점을 명확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음력 설날은 동지 지나 두번째로 오는 그믐날이니 눈으로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했죠.
음력 8월 15일 추석 보름달도 한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7월 15일 백중 보름달과 헷갈릴 수 있는데요, 여름 장마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고 2차 장마가 오기도 하는 때이기도 한데다 작물의 이삭과 열매가 이제 맺혀 익기 시작하는 때라 가을의 정점이 아닌 거는 쉽게 알 수 있었어요. 게다가 종종 백중 사리라 해서 바닷물 간만의 차가 커 비 오는 경우도 많고요.
그외 명절이었던 음력은 3월3일 삼짓날, 5월5일 단오날 7월7일 칠석날 9월9일 중양절인데요, 이게 다 양의 수인 홀수가 겹쳐 씨 심기 좋은 날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음력 보름전에 씨 심지만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거죠.
지금은 대부분의 명절은 사라지고 설날과 추석만 남았는데요, 이조차 얼마나 이어질지 모릅니다.
우리의 명절이 서양의 축제와 다른 건 제사와 차례가 있는 걸겁니다. 원래 서양 축제에도 제사 지내는 게 있긴 했습니다. 페스티발festival이라고 해서 양이나 가축을 잡아 피를 올려 신에게 바친다든가, 성인의 기일을 기리며 축제를 열기도 했죠. 아무튼 명절은 공동체 문화의 꽃인데요, 제사로 조상을 기리는 공동체 안에는 살아있는 사람들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죽은 조상도 함께하는 공동체라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죽은 귀신이 어디 있다고 함께 한다는 걸까요? 조상은 핑계일거고요. 더 중요한 건 현재의 우리들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미래의 후손들일 겁니다. 조상을 빙자해 우리의 공동체를 다지고 그 힘으로 후손이 살아갈 터전을 닦는 겁니다.
한 조상 아래 후손들이 모이면 같은 촌수 안에도 나이로는 3대만큼 차이나는 경우도 있고, 나이는 비슷한데 촌수로는 3대만큼 차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재와 미래가 함께하는 현장인 겁니다.
옛날엔 4대조상, 고조부모까지 제사를 지냈는데요, 그러면 8촌 형제까지 모입니다. 4대조상을 기리면서 현재의 인생들은 4대 후손까지 염두에 두는 삶을 삽니다. 1세대를 30년으로 잡으면 240년에 걸친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인 셈입니다. 뿌리가 깊을수록 미래가 울창할 수 있는 겁니다.
이 터전과 나를 있게 해 준 조상께 감사하고 이 터전과 나는 후손을 위해 존재하는, 그래서 우리 공동체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함께하는 공동체라 보는 이유입니다. 이 터전은 부동산이라 해서 재산 축적의 수단도 아니고, 나는 그저 나만 편하게 잘 살면 되는 존재가 아닌 겁니다.
작년 글에 결론으로, 절기를 알면 철이 들고, 철이 들면 몸이 반듯해진다고 했는데요, 설명이 부족해 좀 아쉬웠습니다. 철이 들면 왜 몸이 반듯해지지? 할 거거든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절기를 알려면 하늘을 자주 쳐다봐야 하고, 그 중에 해와 달과 별을 수시로 관찰해야 합니다. 몸이 반듯해지지 않을 수 없지요. 몸이 반듯해지면 마음이 둥글둥글해진다고도 했어요. 마음은 하늘을 닮고 싶어한다고 하면서요. 몸이 반듯해져 하늘을 자꾸 쳐다보면 하늘도 그렇고 해나 달이나 사실 별도 다 둥글둥글하잖아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으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추석 되시길......
* 대문사진 : 토종 않은뱅이벼. 토종벼는 이삭이 머리처럼 올라오다 익으면서 고개 숙이는 걸 확실히 볼 수 있습니다. 반면 개량벼는 잎사귀 어깨 쯤에서 이삭이 맺혀 고개 숙이는 게 좀 가려지지요. 조금이라도 잎사귀가 광합성을 더 하도록,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도록 개량한 것인데요, 수량은 많을지 모르나 멋은 별로에요. ㅎㅎ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
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