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김석봉 자문위원

 

밀레니엄의 종소리가 귓가에 생생한데 벌써 스무 해가 지났다.

도시의 거리에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던 그날이 새삼 떠오른다. 무엇인가 커다란 변화가 있을 거라는 설렘과 기대에 부풀었던 날들이었다. 세상이 확 바뀔 것 같은 예감이 가득 찬 시절이었다.

그리고 한 해 두해 새해를 맞이하면서 어느새 스무 해를 꽉 채웠다. 그렇게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무엇이 얼마만큼 달라졌나를 확인하곤 했다. 해마다 그랬듯 결과는 절망이었다. 우리네 삶의 문명은 언제나 더 높은 곳을 지향했고, 더 많은 것을 탐해 왔다.

지리산도 내내 몸살을 앓았다.

곳곳에서 케이블카를 놓겠다며 덤벼드는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한 물 간 양수발전소 건설계획이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하더니 성삼재까지 고속버스가 운행하는 상상할 수조차 없던 일이 현실이 됐다.

태풍과 폭우로 섬진강이 범람하여 주민들 삶의 터전을 할퀴는 사이 정부는 산등성을 파헤치는 산악열차 관광사업 프로젝트를 툭 던져놓았다. 주민들이 갈라서고 공동체가 너덜너덜해질 지경에 이르러서야 언제 그랬냐는 듯 그들은 발을 뺐고, 끝내 주민들만 멍든 상처를 안고 견뎌야 했다.

우리네 삶의 문명이 대개 이랬다.

 

이런 문명의 한복판을 코로나 바이러스가 휘젓고 있다.

벌써 한 해가 다 되었다. 점포는 문을 닫았고 사람들은 집으로 숨어들었다. 직장동료라는 이유로 한 번 만나보지도 않은 그이의 어버이 문상을 한답시고 밤 새워 달려갔고, 친척이라는 이유로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몇 촌 조카 결혼식장 찾아 다녔다.

그렇게 경조사 챙기고 상부상조하는 것을 미덕이라 여겼다. 그렇게 만나 축하하고 달래는 것이 사람 사는 정이라고 여겼다. 그런 일에 빠지면 눈 밖에 났고, 외톨이로 지낼 수밖에 없어 어떻게든 눈도장을 찍어야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여기 지리산 구석구석도 많이 달라졌다.

명절마다 자동차로 가득 찼던 마을공터엔 추석인데도 썰렁했다. 일가친척들 다 모이던 선산벌초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음력 시월 묘사를 지내는 곳도 보이지 않았다. 도시 사는 아들딸들 김치 통 들고 줄줄이 모여들던 김장철 풍경도 사라졌다. 자식들은 그저 오붓하게 온 듯 만 듯 다녀갔다.

도시의 삶에 지친 이들이 하나 둘 귀향의 보따리를 싸들고 동구 밖을 기웃거린다. 늙은 부모를 봉양하며 대대로 내려온 다랑이논에 삽질하는 낯선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필경 음식점을 하다 망했거나 실직한 아들에게 자신의 삶터를 물려주고 낙향한 중늙은이들일 것이다.

 

어렵고 힘든 시절이다.

인류에 기생하며 함께 진화해온 이 바이러스를 어쩌겠는가. 피해 갈 수 없으면 받아들여야하고 아픈 만큼 새로운 무엇을 창출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이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많은 변화를 강요했다. 그동안 우리가 향유해온 소비중심적인 우리네 삶의 양식에 경종을 울렸다. 마천루로 상징되는 21세기 삶의 문명, 삼천 포인트를 향해 질주하는 주가지수와 황새가랑이도 찢어놓을 듯 치솟는 집값에 매달려온 허접한 삶의 문명을 내려놓으라고 윽박질렀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그동안 만나고 모이는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 왔다. 올해는 그 많던 동창회도 송년회도 열리지 않았다.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그동안 경조사를 온라인으로 챙기다보니 굳이 만나야하냐는 생각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에게 친숙해진 많은 것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그 빈자리를 새로운 것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앞만 보며 빠른 속도로 짓쳐가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며 천천히 걸어가는 발걸음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였다.

 

가까이에 있는 것들에 온정을 쏟고 정성의 손길을 보낼 줄 아는 삶. 저 덤불 속 작은 새와 풀숲의 꽃들과 돌담 위에 오두마니 자리 잡은 길고양이와 그 담 너머 늙은 이웃들이 다 나와 같다고 여기면서 살아야 한다고 일러주고 있다. 그런 세상으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

올해는 바이러스를 넘어 그 길을 나서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전체댓글 0

  • 43244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다시 새해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