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0(토)
 

지리산에서 온 편지 3

 

지리산, 비트 산행

  

 어린아이는 엄마에게 많은 질문을 한다. “엄마, 코끼리는 왜 코가 길어?” 또는 엄마, 바다는 왜 푸르데?” 이런 질문을 받으면 참 난감하다.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니 애가 못 알아들을 것이고 아니 그런 지식도 별로 없다. 그런데 아이들은 왜 그런 질문을 할까? 그건 당연히 그것이 이상하고 또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제 세상에 눈 뜬지 갓 4,5년 된 생명들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이상하고 신기하고 새로운 것들뿐이다. 그러니 외출하거나 여행을 할 때면 끊임없이 질문을 해대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낯선 이 세상은 얼마나 신기하고 즐거울까? 매일매일 주변에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면서 아직은 낯선 세상을 사니 그 세상이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울까? 하지만 많은 어른들에게는 늘 똑같은 풍경에 반복되는 세상이고 그래서 지겨운 세상일뿐이다. 다시 말하면 새롭지 않다. 그래서 어른들은 여행을 하게 된다. 어린아이들처럼 새로운 세상, 낯선 세상을 보며 세상을 새롭게 보고 싶은 것이다.

 사실, 똑같은 세상을 늘 새롭게 볼 수 있고 새롭게 살 수만 있다면 그건 이미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옛 시에 깨달음이란 선시가 있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나무를 하고 물을 길었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다.

 

 이 시를 보면 깨달음을 얻기 전이나 얻은 후에나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다. 그래서 깨달음은 물을 긷고 나무를 하는 일상의 현실에 있다는 것과 그 일상을 새롭게 보고 또 새롭게 사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지겨운 일상(현실)을 새롭게 볼 수만 있다면 세상은 신기롭고 즐거울 것이고 그렇게 늘 새롭게 현재의 일상을 살아낸다면 그런 행복이 어디 있으며 그것이 깨달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고 보면 우리 같은 범인들에게 여행이라는 것은 낯선 곳에서 삶의 새로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니 깨달음의 대리만족 쯤이나 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사실 여행을 많이 하지 못했다. 싫어하는 것은 결코 아니고, 돌아다니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편인데도 국내나 해외여행을 별로 하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 마음의 변화나 위로나 생활의 어떤 새로움이 필요할 때면 혼자서 훌쩍 산으로 간다. 가까운 산이 지리산이니 늘 지리산을 다닌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한때 한 몇 년은 작고한 박배엽 시인과 함께 지리산의 비등산로를 주로 다녔다.(그때만 해도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들어서기 전후여서 단속이나 벌금이 없었다) 그 길들은 한국전쟁 전후의 빨치산들이 주로 다녔던 길들이기도 하고 그 이전에는 나무꾼이나 장꾼들이 다녔던 길이고 현재는 고로쇠꾼들이 자주 이용하는 길들이다. 그 지리산의 낯선 지능선이나 지계곡을 혼자서 자주 탔던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따지고 보면 다 내 안의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였다. 지리산은 전북, 경남, 전남, 3개도에 걸쳐있는 넓은 산이어서 한번 헤매기 시작하면 요샛말로 장난이 아니다. 지금이야 GPS가 있지만 그때는 나침반과 지도 한 장 믿고 그냥 갔다. 그리고 사라진 길의 흔적을 더듬어 산을 타는 동안은 모든 걸 다 잊을 만큼의 긴장과 두려움이 함께 했다. 그것은 어쩌면 내면의 깊은 어디에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생명력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일상에서 데리고 사는 크고 작은 두려움들을 말끔하게 지워주는 역할을 했다.

 나중에 지리산을 오르며 즐겨 찾아간 곳은 산사람(빨치산)들의 비트(비밀아지트)였다. 물론 처음에는 빨치산 출신 장기수 어른들이나 관련자들의 도움을 얻어서 찾아 다녔다. 비트라고는 하나 무슨 문화유산처럼 특정의 흔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현상 비트나 박영발 비트, 구례군당 비트는 그래도 그 흔적과 생활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으나 그 외의 환자트나 무기, 식량 등을 숨겼다는 비트들은 그저 이 근처였다는 것만을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들은 빨치산이라고 불렸지만 나는 그들이야말로 하나의 통일조국을 꿈꾸고 진정한 인간해방을 꿈꾸었던 한국전쟁 전후 당대의 역사를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사회가 그렇듯 모든 빨치산들이 그렇게 살았던 것은 아니겠지만 역사라는 큰 흐름에서 조망한다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나는 열심히 산을 찾던 8,90년대만 해도 시대적 상황 탓도 있었지만, 산을 오르며 비극적인 역사와 이데올로기보다는 빨치산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 그 사람들의 삶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를 사는 시인의 몫이기도 하고 지리산을 오르는 나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리산 연작시를 썼고 그리움이라는 단어에 모든 걸 담고자 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죽은 동지들에 대한 그리움, 조국 해방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존재의 고독에서 오는 근원적 그리움까지 지리산은 그 모든 그리움을 내장하고 있는 산으로 그려지기를 바랐다.

 

산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 오랜 마음 속 벗처럼 / 부르지 않아도 항상 / 푸른 대답을 보내오고 / 그리움이 깊을 대로 깊어 / 산빛 너울이 아프다. // 미친 눈보라, 갈 곳 없는 어둠에 묻혀 / 사십 년 징역을 곱게도 사는구나. / 물빛 하늘 얼굴들 / 살아서는 부둥킬 수 없었던 / 그리움 곁으로 가고 / 홀로 남아 / 상처 깊은 짐승처럼 / 우우우 웅크린 / . // 그대는 / 눈부신 억새꽃 바람결로 스미고 / 깊은 숲 그늘 돌 틈 / 철쭉으로 피어나 / 우리들 일상의 /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 다하도록 / 스스로가 다하도록 내려올 수 없어 / 산이 되었던 그대. // 우리 곁을 떠나간 벗들은 / 저 산 되었지. / 헐벗어 눈 덮인 저 산. / 그래, 바라던 조국을 만나 / 풀씨는 맺었나, / 슬픔은 없더나. // 저 산처럼 서야지. / 산이 거느리는 핏빛 그리움으로 / 살아남아야지. / 밤마다 이빨 빠지는 꿈을 꾸며 / 가버린 벗을 생각는 일은 / 이제 그만 두어야지. / 깊은 숲 그늘 바람, 숨 죽여 울면 / 아직도 너의 목소리가 들린다.// <졸시지리산1-전문>

 

 지리산 비트 산행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의 현장을 가는 것이기도 해서 어떤 묘한 비장감을 느끼게 해준다. 나는 그것이 매우 좋았다. 그리고 혼자서 하는 그 비등산로의 산행은 삶의 근원적 두려움과 외로움의 맨얼굴을 직접 만나게 해주었고 시종일관 긴장감과 어떤 설렘을 주는 신선한 것이어서 참으로 각별한 여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국립공원법이 정비되어 비등산로 산행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연구 목적이나 특별한 사유가 있다면 신고를 하고 허락을 받아 갈 순 있지만 쉽지 않다. 그래서 요즘은 정해진 탐방로만을 다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지리산을 오르는 일은 새롭다. 나무며 벌레며 새, 동물들, 그 모든 생명을 품은 산은 그 생명들이 뿜어내는 생명력으로 인해 하루하루가 모두 새롭고 신선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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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군 비트터

 

사본 -C39A6947.jpg

-남부군 학습장

 

사본 -C39A7007.jpg

 -남부군 이현상 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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