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지리산에서 온 편지 4

 

문수골 문수 이야기

 

 

 그 옛날,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지리산 이 깊은 문수골에도 들어왔을 것이다. 문수보살님의 공덕 한 조각이라도 얻으려는 생각으로 왔겠나, 그저 저버린 목숨 하나 의지할 구석 찾으러 허위허위 들어왔겠지. 이 골짝에 겨우 몸은 숨겼으나 나물만 먹고 살 순 없으니, 손바닥만 한 논배미라도 얻기 위해 함박꽃 지고 단풍잎이 붉게 물들 때까지, 축대를 쌓고 그 계단 위에 삿갓배미 논두렁을 올렸을 것이다. 그러구러 초승달 같은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아슬아슬한 계절을 건넜을 것이다. 그러고도 또 한 세월이 지나 인공人共 때 지리산에는 오갈 데 없는 한 무리들이 들어오는데, 아래 이야기 시 한편은 그때 이후로 이야기이니, 세월은 덧없이 흘러간다 하나 사실은 숱한 사연들에 떠밀려 가는 세월이 아닌가 싶다.

 

문수골에 사는 문수어매는 문수암에 밥하러 다니는 공양보살인데, 인공 때 그 불그스름허던 단풍들 죄다 꼬실라지던 무렵, 구례군당이 문수골로 숨어들어오던 이첨저첨에 부모 잃고 거천헐 데가 마땅찮았다. 그러다 문수암 늦은목재 너머 피아골 평도리 아재집에 오가다가 심심찮게 얻어먹던 절밥이 인연되어, 엔간히 철들 무렵에 아예 문수암 공양보살로 들어서게 되었더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부처님 고봉밥 올리며 이삼십 년 세월이 봄 한철 산벚꽃처럼 훌쩍 넘어가고, 소쩍새 청승맞은 울음소리에 밤은 그토록 깊어만 갔는데, 싸락눈 가물가물 내리던 어느 겨울 초입에 중년의 사내 하나가 문수암에 굴러 들어왔단다. 그는 하루에 두서너 마디 하는 말없는 불목하니가 되어 절마당에 널부러진 계곡 물소리도 쓸어내고, 남향받이 툇마루 밑에 잘 마른 장작개비 부처님들 가지런히 쌓아놓기도 하더니, 주지스님 세상구경 나가신 날이면 법당에 들어가 독경소리도 한 짐씩 져 나르는 것이었다. 한참 세월이 그렇게 또 가더니 어느 날, 공양보살이 사십구재 지내는 손님들 맞아 부산을 떨다가, 달빛도 없는 밤에 집에 가려고 지난 초파일날 쓸던 연등 하나 꺼내어 불을 밝히는데, 비가 오려나 바람이 불고 날은 심난한데 마침 그 말수적은 불목하니가 앞장을 서드란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중얼거리며 뒤를 따르는데, 그날따라 웬 미친바람이 그렇게 불어 나무 자빠지는 소리가 우지끈 계곡을 진동하고, 가물거리던 불빛마저 꺼지고 마니 허투루 사는 인생일망정 어찌 사연 하나가 없을 소냐. 물가에 풀 뜯는 흰 소 몰고 집에 들어와 애가 들어섰으니, 석씨 가문의 부처님 씨가 분명하고 문수골 문수암에서 태어났으니 애 이름은 석문수가 되어, 문수암 공양보살은 늙으막에서야 문수어매가 되었던 것인데, 문수는 계곡 날망 기슭에 비집고 자리잡은 집구석에서 뒹굴뒹굴할 때나, 애기나뭇짐 매고 문수골을 내려올 때도 말 한마디 붙여볼 놈이 없어, 저 혼자서 마당에서 푸덕이는 씨암탉이나 옷깃을 스치는 산죽, 자꾸만 다가오는 산그늘에게 무어라 중얼거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문수는 그 뒤로도 무어라 중얼거리기만 할 뿐, 세상 뭇놈들이 내는 소리는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 문수란 놈 문수암 절마당에서 장작 패며 코밑수염 꺼칠꺼칠해진지가 벌써 오래건만, 이적지 문수골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나무 자빠지는 소리만 들으며, 한 번도 이 골짜기 떠날 생각을 안 하고 중얼거리기만 하니, 누가 있어 어찌 그 속내를 알 수 있을 것인가. (졸시 문수골 문수 이야기전문)

 

* *

 

 문수골은 구례의 유명한 아흔 아홉 칸 집 운조루가 있는 오미리 뒷고랑 물길을 따라 지리산을 올라가면서 시작되는 깊은 골짜기이다. 한참을 오르다 보면 문수암으로 오르는 길에서 물길이 나눠진다. 문수암 뒤편 능선이 왕실봉 능선인데 이 능선을 가로질러 늦은목재를 넘으면 바로 피아골이 나온다. 나는 언젠가 친구하고 이 늦은목재를 넘으며 왜 이 고개 이름이 늦은목재일까 생각했었다. 그 친구의 생각이 그럴 듯 했는데, 그것은 그 옛날 이 피아골 평도리 사람들이 구례에서 장보고 화엄사 뒷산 넘어 밤재마을로 와서 문수골을 건너 이 재를 오르면 해가 떨어지는 늦은 시간에 이를 것이니 늦은목재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랬다. 지금은 사라지거나 묻힌 길이 되었지만 능선을 가로지르는 길들은 당시 민초들에게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일상의 길이었다.

 지리산 뿐 아니라 모든 산은 옛사람들에게는 삶터였고 생활의 현장이었고 일상의 길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산의 품성을 배우며 자랐다. 조급하지 않으며 숱한 생명들이 조화를 이루고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스스로도 모르게 얻은 그 자비의 품성으로 서로 나누며 모든 생명을 모시고 함께 살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산에서 내려오기 시작했고 자동차와 함께 속도문화가 일반화되면서 산은 사람들의 일상에서 멀어졌다. 속도의 걸림돌이 되어 파괴되었고 구경거리가 되어 짓밟혔으며 오히려 산을 내려와야만 삶이 풍요로워지는 세상이 되면서 사람들은 산에서 얻은 본래의 품성을 잃어갔다. 그리고 사람들의 삶은 공격적으로 변하였으며 불신과 분노와 증오가 증폭된 일상을 스스로 살게 되었다.

 또한 지리산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애달프고 서러운 목숨들의 역사를 안게 되었다. 지금도 수많은 백골들이 녹슬은 총열들과 함께 묻혀있고 아녀자와 어린아이들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묻혀있는 산이 지리산이다. 역사를 바르게 사는 일이 현실 속에서는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는 일이며, 뭇 생명들의 삶과 평화를 헌납해야 하는 일인지를 지리산을 오르내리며 비로소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지리산은 그동안 잃어온 산의 품성을 되찾게 해주는 산이기도 하다. 지리산은 모성의 산으로 잃어버린 사람들의 착한 마음, 착한 품성에 대한 기억을 되찾게 해주는 산이기도 하다. 우리 본연의 품성과 근원에 대한 그리움을 짐작하게 해주는 산이다. 우리가 이 그리움의 마음, 그 자비의 품성을 일상 속에서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지리산을 이야기해야 한다. 지리산은 이러한 새로운 우리의 삶의 가치를 내장한 소중한 산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이런 생각과 함께 지리산의 길을 열어준 친구가 있었다. 서둘러 이승의 길을 떠났지만 내 마음 속 오랜 벗, 지리산을 떠올릴 때면 어김없이 그가 함께 생각난다. 그 굳고 정하다는 갈매나무 같은 녀석, 윤동주의 시처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늘 괴로워했던 녀석,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사는 일의 전부라는 것을 깨우쳐준 나의 스승, 젊은 시절 쉼 없이 지리산을 함께 올랐던 그녀석이 오늘 따라 무척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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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봉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능선(사진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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