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이런저런 지리산 이야기 1

 

 

 

그 옛날,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이 깊은 문수골에 들어왔을 것이다. 나물만 먹고 살 순 없으니 손바닥만한 논배미라도 얻기 위해 함박꽃 지고 단풍잎이 붉게 물들 때까지 축대를 쌓고 계단처럼 논을 올렸을 것이다. 초승달 같은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아슬아슬한 계절을 건넜을 것이다.

 

 

쌍계사 등 뒤로 사람들의 발길이 없는 내원골을 한참 오르다 보면 서너 채의 빈집이 있다. 처사는 수년째 마당의 감꽃을 피우며 한 소식 기다리더니 어느 겨울머리에 나섰나 사립문조차 무너져 있다. 부엌문을 열면 낡은 찬장에 아직도 가지런히 놓여있는 숟가락과 젓가락이 슬프다. 먼지 수북한 망태기며 녹슨 호미도 그렇지만 방구들에 까지 올라온 잡초들의 인정머리가 또한 그러하다.

 

 

지리산 종주등반을 하다보면 전남, 경남, 전북이 만난다는 삼도봉을 지나 화개재를 만나게 된다. ‘화개는 저 아래 섬진강 가에 있는데 왜 이곳을 화개재라고 부르는지가 늘 궁금했었다. 하지만 오로지 두 다리만이 민초들의 교통수단이던 시절, 남원 쪽 마을의 장꾼들에게는 뱀사골을 올라 지리산 주능선을 넘어 목통골로 내려가는 길이 화개장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등짐 하나 들쳐 매고 꼭두새벽부터 뱀사골을 올라 주능선을 넘어야 화개를 가니 이 주능선의 화개재는 뱀사골에서 올라오는 남원 쪽 사람들이 불렀던 이름일 것이다. 이 재에 이르면 쉴 참에 담배 한대 말아 피고 화개장 까지 한달음에 내달았을 것이다. 걸쭉한 탁배기 한잔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장국밥이 생각났을 것이다.

 

산을 가다보면 가끔 등산로 아님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이것은 지정된 등산로 외에는 모두 사람이 다녀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져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다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다. 나무하러 다니고, 장 보러 다니고, 능선 너머 이웃동네를 넘나들던 길이고 삶의 일상 속에 있었던 길이다. 지금은 멧돼지 가족들이 다니고 노루가 가다말고 서서 잠깐 뒤돌아보는 길이 되었지만 아직도 다 살아있는 길이다. 다만 우리 스스로가 잃어버린 길이고 스스로 차단한 길이 되었을 뿐이다.

 

왕시루봉에 가면 외국인 산장이 있다. 80년대 후반 즈음이었을까. 그때만 해도 칠십이 넘은 산장지기 노인 한분이 있었다. 젊은 시절 외국인 부인을 지게에 지고 이 정상까지 올라왔다는 노인. 그 산장의 옆에는 물줄기를 막아 만든 풀장이 있다. 물줄기가 얼어버린 겨울이면 도끼로 얼음을 깨고 풀장의 물을 길어 저녁밥을 지었다고 한다. 멀리 노을이 지는 섬진강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직도 왕시루봉 정상에는 제국의 그늘이 가득하고 나는 그 그늘 아래서 점심으로 가져온 주먹밥을 베어 물었다.

 

 

한국전쟁 전에는 외국인 산장이 노고단에 있었다. 풍토병 치료를 위해서 라고는 하지만 수십 채의 산장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그들이 올라와 쉴 때는 구례의 아낙네들이 보따리 짐을 싸들고 올라와 장이 섰다고 한다. 어린 함태식은 노고단에 올라 비키니 차림으로 햇볕을 쬐는 서양인들을 보았다고 했다. 한반도가 통째로 신음하던 그 일제식민지 시절의 한 풍경이다.

 

장터목은 장이 서던 곳이었다. 지리산 전체가 삼도를 잇는 길이었던 시절, 잠시 쉬던 장꾼들이 모여 서로의 물건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지금은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높은 산이 되어 하루를 쉬어가라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장터목은 장터목일 뿐이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다리가 굳어졌을 뿐 장터목은 지금도 장이 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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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야봉 일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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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야봉 철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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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에서 보는 섬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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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고단에서 본 구례

 <사진 :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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