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공감본성

 

 

요즘 도시의 현대인들은 스스로의 각박한 현실 속에서 간혹 숨통이 막힐 것 같으면 휴머니티를 이야기하며 시골 인심이니 시골 밥상이니 하며 시골을 이야기 한다. 절대로 시골에 내려와 살 마음도 없으면서 왜 가만히 있는 시골을 들먹일까? 시골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나를 방어하지 않아도 되는 편한 곳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왠지 나만의 사정을 이해해 줄 것 같고 고단한 심신을 어머니처럼 품어줄 것 같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시골은 아직도 공감 본성이 그대로 일상의 삶 속에 녹아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인식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괴테는 인간은 함께할 경우에만 진정한 인간이며 유일한 개인이라도 자신을 전체의 일부로 느낄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만 즐겁고 행복할 수 있다라고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의미를 정리해서 말했다. 이것은 괴테의 말이지만 표현만 다를 뿐이지 과거 깨달음에 이른 성현들은 모두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해왔다. 하나만 예를 들면 맹자는우물에 빠지는 아이를 보게 되면 예외 없이 소스라치며 다급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이건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도 칭찬받으려는 것도 아니고 무정하다는 비난이 두려워서도 아니다. 인간은 본래 동정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것들이공감본성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이다. 오늘날에는 제러미 리프킨이 이런 이야기를 현대의 상황에 맞춰 공감이라는 개념으로 새롭게 그리고 설득력 있게 변주해내고 있다. 제러미 리프킨은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들도 공감본성이 있다고 말한다. 다윈도 고등동물들 중에 사회성이 있고 감정이 풍부하고 동료의 곤경을 걱정할 줄 아는 종이 많다고 이야기 한다.

오늘날 공감본성이 크게 회자되는 것은 그 공감본성이 인간 스스로가 가진 본래성품이라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 절실해진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가 자본주의 물결에 휩쓸리면서 물질의 소유가 삶의 절대가치로 올라오고 이것과 함께 경쟁주의, 속도주의, 물량주의, 이기주의 등의 많은 자본주의 문화가 형성되면서 인류는 끊임없이 공감본성을 잃어왔다. 내가 내 것을 소유하지 않고 지키지 않으면 이 험한 세상을 처자식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불안과 걱정에 몰두하며 살다보니 어떻게 공감본성이 발현될 수 있겠는가?

공감의식의 발현은 일상에서 나눔과 섬김이라는 행위로 나와야 할 텐데 그것은 가치관의 전환이라는 자기 인생의 전향적 사고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사회가 되었으니, 말이 쉽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하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주는 섬김 의식과 빵과 포도주를 나눠 먹으며 자신의 피와 살(목숨)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나눔 의식은, 기독교의 본질인 사랑이 섬김과 나눔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잘 말해준다. 우리 한국 사회만 해도 예수의 제자들이 한 집 걸러 두 집에 살고 있는 실정인데 예수가 깨달은 이 진리의 삶의 방식을 얼마나 실천하며 사는지 모르겠다.

이렇듯 공감본성을 현실사회에서 일깨우고 실천하며 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세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공감본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만이라도 계속 일깨워야 할 필요가 있다. 언젠가는 본래의 나(공감본성)’를 되찾게 될 거라는 생각도 없이 산다면 얼마나 슬프고 불행한 인생인가.

인디언 일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인디언이 높은 산정에서 큰 독수리 알을 하나 발견하여 가져왔다. 마을의 닭 울타리 안에 놓았는데 암탉이 이 알을 품어 부화했다. 어미닭보다 큰 새끼독수리는 그렇게 태어나 흙에서 지렁이나 잡아먹고 그 큰 날개로 날지도 못하고 파닥거리기만 하며 어미 닭의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며 덩치 큰 평범한 닭으로 살았다. 어느 날 거대한 새 한 마리가 높은 하늘을 날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날갯짓도 파닥거리지 않고 늠름하게 편 채로 높은 하늘을 빙 날고 있는 것이다. 너무 멋있고 아름다워서 어미닭에게 물었다. 어미닭은 그 새는 황금독수리라는 새이며 하늘의 제왕이고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존재라고 말하며 어서 지렁이나 잡아먹으라고 말한다. 그 독수리닭은 바쁘게 땅을 후비며 지렁이나 잡아먹고 살다가 마침내 닭이라는 이름으로 죽었다.

우리는 누구나 황금독수리 같은(공감본성을 가진 본래의 나’) 존재인데 닭처럼 살다가 인생을 마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자신이 차원이 다른 아름다운 본성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라는 걸 모르고 닭으로 살다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많이 억울하지 않은가. 닭이라면 닭처럼 살다가 가도 괜찮겠지만 황금독수리가 닭처럼 살다 간다면 이처럼 슬픈 일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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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변의 남바람꽃  / 사진 김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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