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나는 옛이야기-대전리 석불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면 산과 계곡, 마을과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걸으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두리번거리면, ‘지나간 시간들’을 만날 수 있다. 거창하게 국보니 보물이니 지정된 문화재만이 아니라, 옛사람들의 손길이 묻어 있는 소중한 것들을, 거기에 담겨있는 앳된 옛이야기들을 만나 볼 수 있다.

지리산둘레길 오미-방광 구간을 걷다 보면, 한 칸 보호각에 갇혀 계시는 부처님 한분을 만나게 된다. ‘구례 대전리 석조비로자나불입상’이 그분의 공식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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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각에 세워지기 전에는 가로 6m, 세로 6m, 높이 1.1∼0,6m의 방형 돌담속에 계셨다. 1992년 목포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남악사지 지표조사’때 공식적(?)으로 이 불상이 알려지게 되었고, 1994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6호로 지정되었는데, 아마도 그 이후 지자체에서 보호각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보호각을 세우면서, 세심한 마음이 없었나 보다, 부처님의 발목이 시멘트 구덩이에 푹 빠져 버렸다.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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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이 부처님에 대한 문헌자료나 역사기록은 아직까지 없다. 그래서 주변 마을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와 부처님의 생김새만으로 그 내력을 엿볼 수밖에 없다. 마을사람들은 이 부처님에 계신 곳을 ‘미륵골’이라 부른다. 1992년 조사 때 주변에서 건물의 주초석과 기와조각, 벽돌조각 등이 발견되어 아마도 절집이 있었을 거라는 추정만 할 뿐이다. 조사 당시 절단된 부처님의 목 부분을 누군가 시멘트로 붙여 놓은 것을 조사팀이 시멘트를 제거하고 다시 접착제로 붙였다고 한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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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문화재 앞에 붙어 있는 안내판이다. 읽고 또 읽어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게 적혀있다. 아마도, 문화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저하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것 같다.

첫째, 왜? 비로자나불이라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다

둘째, 머리카락이 나발이고 정수리가 육계라는데 이게 뭔뜻인지?

셋째, 법의는 통견이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넷째, 나발, 육계, 법의로 고려초 제작이라고 하는데....그 이유도 모르겠다. 양쪽 볼이 풍만하고 소박하면 통일신라 양식이라니...그건 또 뭔지?

첫째, 왜? 비로자나불이라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다.

부처님의 이름부터 알아봐야 한다.

아무런 기록도 없고, 사찰과 관련된 정보도 없을 때, 불상의 명칭을 확인하는 방법은 보통 수인(손의 모양, 손이나 손가락으로 맺는 모양)을 통해서이다.

보살상의 경우 머리에 쓰는 보관(寶冠)의 모양으로, 앉아 있는 자리의 모양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보관에 화불(化佛)이 있으면 관음보살, 보관에 보병(寶甁)이 있으면 대세지보살, 민머리이거나 두건을 쓰고 있으면 지장보살로 구분한다. 또 사자좌에 앉아 있으면 문수보살, 코끼리좌에 앉아 있으면 보현보살로 구분한다.

부처님이 혼자 계시지 않고 좌우에 다른 불보살과 계시다면, 좌우협시보살을 통해서 부처님의 명칭을 확인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좌우에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계시다면 아미타불로, 좌우에 문수와 보현보살이 계시다면 비로자나불로 파악한다. 물론, 삼존불일 때 이런 전형을 벗어나는 예도 많기에, 절대적인 구분이라고 봐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대전리 불상은 보살상은 아니고, 좌우에 다른 불보상이 있지도 않기에, 오롯이 수인을 가지고만 판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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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리 석불의 수인을 명확하게 파악하기엔 너무 많이 손상되었다.

수인의 대략적인 모양은 왼손으로 오른손의 손가락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은 왼손이 오른손 위에 있으면서 깍지를 끼고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렇듯 가슴 앞에서 양손을 모아 주먹을 쥐는 수인을 지권인이라 하고, 이런 수인을 하는 부처는 비로자나불이다.

“형상은 두 손을 모두 금강권(金剛拳 : 엄지손가락을 손바닥에 넣고 다른 네 손으로 싸 쥐는 것)으로 만들고 가슴까지 들어올린 후, 왼손 집게손가락을 펴 세워서 위쪽 오른손 주먹 속에 넣는다. 그 주먹 속에서 오른손 엄지와 왼손 집게손가락이 서로 맞닿는다. 이때 오른손은 법계를 뜻하고 왼손은 중생을 뜻하여, 이 수인은 법으로써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가 있다. 또 일체의 무명 번뇌를 없애고 부처의 지혜를 얻는다는 뜻이기도 하며, 이(理)와 지(智)는 둘이 아니고 부처와 중생은 같은 것이며, 미혹과 깨달음도 본래는 하나라는 뜻이기도 하다.

대일여래(大日如來) 즉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 결하는 수인이다. 법신(法身)인 비로자나불만 이 수인을 하므로 이 수인을 한 불상은 곧 비로자나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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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권인에 대한 불경의 설명에서는 왼손 엄지를 오른손이 잡는다고 나와 있지만, 대전리 석불은 반대로 오른손을 왼손으로 잡고 있다.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은 통일신라 8세기 중엽에 들어와서 9세기에 성행한 것으로 본다. 더불어 조성 초기부터 비로자나불의 지권인 수인이 뒤바뀌는 변형이 종종 나타나고,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변형된 지권인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대전리 석불의 수인이 좌우가 바뀐 지권인 혹은 깍지낀 지권인이라 하더라도, 비로자나불임은 명확하다.

둘째, 머리카락이 나발이고 정수리가 육계라는데 이게 뭔뜻인지?

부처님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부처님의 모습을 불상으로 또는 그림으로 그리려다 보니, 무언가 법칙이랄까 원리가 필요하게 되었을 것이다.

“불교가 발생한 이후 약 500년간 인도에서는 불상을 만들지 않았다. 서기전 1세기 무렵부터 인간의 형상으로 불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인간과는 다른 특징을 가진 부처의 외형을 삼십이상 팔십종호(三十二相 八十種好)로 규정하게 되었다. 이미 열반에 들어 존재하는 자로서의 의미가 없는 부처를 인간의 몸으로 만드는 것은 이전에 없었던 부처의 형상을 창안해야 한다는 점에서 고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생물과도 다른 부처라는 존재의 철학적 의미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오랜 수행의 과정을 거쳐 깨달음을 얻은 여래임을 중생들에게 확신시킬 수 있어야 했다.거듭되는 윤회의 시간 동안 선업(善業)을 쌓고, 수행을 통해 다시없는 깨달음을 얻은 몸은 삼십이상 팔십종호를 갖춘다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삼십이상 팔십종호는 인간이 갖출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진리가 구현(具現)된 상태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같은 모습처럼 보이지만 인간과는 다른 특징인 삼십이상 팔십종호를 온전히 갖춘 모습으로 부처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삼십이상 팔십종호는 부처의 형상에 대한 규정이자 약속이다.”

〈중아함경〉에는 27번째 특징으로 머리카락을 들고 있다. “정수리에 육계가 있어 둥글고 가지런하며 머리칼은 소라처럼 오른쪽으로 돌아 오른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방광대장엄경〉에는 “정수리에 육계가 있다, 소라 같은 머리칼이 오른쪽으로 돌아 오르고 그 빛은 검푸르다” “머리칼이 아름답고 검다, 머리칼이 가늘고 부드럽다, 머리칼이 어지럽지 않다, 머리칼이 향기롭고 깨끗하다, 머리칼에 다섯 개의 만(卍)자가 있다, 머리칼이 빛나고 소라처럼 돌아 오른다”고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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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 최완수 실장에 따르면,

원래 인도문화권의 남자들은 머리카락을 위로 거둬 모아 상투를 틀고, 그것을 그루터기로 삼아 터번을 둘렀다. 더위나 모래바람으로부터 머리카락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인도는 계급사회, 자연히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려고 높은 신분일수록 상투와 터번에 많은 금은보배를 장식했고, 이러다 보니 상투가 더 높아졌다. 초기 불상조각가들은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 머리카락을 정수리 부근에서 묶어 상투를(후일 육계란 명칭으로 확정) 만든 형태의 불상을 조성했다. 처음에는 상투 끈으로 머리카락을 묶었으나, 불상 양식이 점차 진전되면서 끈은 사라지고 상투만 표현됐다.

요약하자면, 나발(螺髮)은 소라 나(螺)와 머리털 발(髮)이다.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말아 올려진 머리카락 모양을 말하며, 육계는 그런 나발들을 정수리에서 묶어 세운 상투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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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리 석불의 머리 부분도 많이 손상되어 눈으로 명확하게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우선, 나발의 형상은 연주문(連珠文, 작은 원을 구슬을 꿰맨 듯 연결시켜 만든 문양)형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에서 유행하던 나선형과는 조금 다르다. 정수리에 있는 육계는 제법 큰 편이다.

삼도(三道)는 부처님 목 주위에 표현된 3개의 주름인데, 이는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 또는 생사 윤회하는 삼계(三界) 등을 뜻한다고도 한다. 대전리 석불의 목부분에 있는 삼도는 예전에 절단되어 시멘트로 붙이고 다시 수리하는 과정에서 눈으로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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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법의는 통견이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삼의일발(三衣一鉢)이란 말이 있다. 세가지 옷과 발우 하나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이나 수행자들의 검소한 삶을 표현하는 말이다. 스님들의 옷을 인도에서는 가사(袈裟 Kasaya)라 하고, 삼의(三衣)란 상의(上衣-승가리). 중의(中衣-울다라승). 하의(下衣-안타회) 세 가지인데, 그 중에서 상의인 승가리를 법의(法衣)라하여 가사의 대표로 삼는다.

부처님이 이 상의인 승가리(법의)을 입으시는 방식이 있다.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뉘는데, 하나가 통견이고 또 하나가 우견편단이다.

통견(通肩)은 통양견법(通兩肩法)의 약칭으로, 불교에서 가사(袈裟)를 입는 한 방법으로, 양어깨를 모두 덮는 방법을 말한다. 대개, 승려가 사찰 밖으로 외출하거나 속인의 집에 들어갈 때의 착의법이며, 불상의 경우는 법의를 이 방법으로 입고, 옷자락을 왼쪽 겨드랑 밑으로 당겨서 왼손으로 잡는다.

우견편단(右肩偏袒)은 오른쪽 어깨는 가사를 벗어서 노출하고 왼쪽 어깨만 걸쳐 있는 형식이다.

인도 풍습에는 왼쪽보단 오른쪽이 더 귀하게 여기고, 화장실 등 천한 일은 왼손을 사용했다. 사실 고대인도의 많은 신(神)들의 모습을 보면 더운 날씨 때문에 대부분 웃옷을 입지 않거나 혹은 왼쪽 어깨만 걸친 우견편단 복장이다. 따라서 우견편단(右肩扁袒)은 부처님 만의 고유한 복장이 아니고 인도인들의 복장풍습에서 유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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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통견의 양식도 두 가지 갈래로 나뉜다. 옷주름의 모양으로 구분하는데, 흔히 아육왕식과 우전왕식으로 구분 짓는다.

아육왕식(阿育王式 Ashoka) 옷 주름은 목에서부터 가슴, 다리를 거쳐 발목에 이르기까지 U자형의 주름이 연속적으로 늘어져 있는 형식이며, 우전왕식(優塡王式 Udayana)은 가슴 위에서 내려온 옷 주름이 허리 부분에서 양쪽으로 나뉘어 두 다리 위에 따로 U자형이 표현된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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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대전리 석불의 법의를 살펴보자. 착의법은 양어깨에 옷이 걸쳐져 있는 통견이고, 상체의 옷주름은 U자형으로 가슴 가운데에서 양어깨와 팔목까지 주름이 반복적으로 겹쳐져 있다. 하체의 옷주름은 상체에서 내려온 U자형 주름이 허리에서 Y자로 나뉘어 지며, 양다리에서 각각 U자를 그리며 발까지 내려온다.

그래서 대전리 석불의 법의 양식은 우전왕식 통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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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나발, 육계, 법의로 고려초 제작이라고 하는데....그 이유도 모르겠다. 양쪽 볼이 풍만하고 소박하면 통일신라 양식이라니...그건 또 뭔지?

문헌과 자료로 고증하기 불가능한 불상은, 위에서 언급된 나발과 육계, 법의 양식, 불상의 전체적인 모양, 부처님의 이름 등으로 제작 연대를 유추해 내는 게 통상적인 방식이다.

우선 법의의 양식에서 대전리 석불의 제작 연대를 유추해 보자.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머니 마야부인에게 법을 전하기 위해 도리천에 올라가 있는 동안, 코삼비국의 우전왕(Udayana)이 세존을 너무도 그리워하여 전단나무로 5척 높이의 부처님 형상을 만들게 하였다. 이 상서로운 최초의 불상은 각지에 널리 유행하였다. 당나라의 현장은 우전왕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전단상을 직접 목격하였는데,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 불상을 모사하였고, 이때 “진(眞)을 얻은 것”으로 여겼다고 전한다. 이것은 우전왕이 만든 불상이 석가모니 입멸 전에 만들어진 불상이므로 세존의 본래 모습을 담고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불상의 전파과정에서 이러한 복제는 단순한 형상의 복제에 그치지 않고 ‘신성의 복제’로 이어졌다.

이후 이 불상과 같은 가사형식을 한 불상을 학계에서는 편의상 우전왕식 불상이라 부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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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우전왕식은 한반도에 719년 감산사 미륵보살입상에서 처음 나타나며, 8세기 이후 신라 불상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더욱 도식화되어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에서는 무릎 부분의 옷주름이 몇 번 반복되는 양식화로 이어진다.

이에 비해 대전리 석불의 가사 옷주름은 신라 불상의 양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려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또한, 비로자나불 조성으로 연대를 유추해 볼 수도 있다.

한반도에서는 8세기 중엽부터 비로자나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해 남북국시대 신라 후기에 크게 유행해 그 흐름이 조선까지 이어졌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보관을 쓴 보살형의 비로자나불을 조성했으나 우리나라는 주로 지권인을 한 불상이 대다수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독존상이 주로 조성됐는데 조성시기가 명확한 불상 중에 석남사 비로자나불상이 766년으로 가장 빠르고 장흥 보림사 비로자나불상이 859년, 철원 도피안사 불상이 865년으로 뒤를 잇는다.

비로자나불은 석불이나 철불로 조성되면서, 초기에는 거의 좌상으로 만들어 지다가 고려시대에 좌상에서 입상으로 변화를 나타낸다. 하지만 대형 석조 비로자나불입상은 현재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며, 관촉리 비로자나불입상과 대전리 불상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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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리 석불이 관촉리 석불 보다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대형 비로자나불 입상으로는 가장 초기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1992년 조사 당시, 주변에서 발견된 塼(벽돌)과 瓦片(기와조각) 등이 고려초의 것으로 파악되어, 대전리 석불은 대략 9세기말에서 10세기초에 조성된 불상으로 파악된다.

고려초에 이렇게 큰 석불을 조성한 이유는, 신라하대인 9세기 불상의 양식을 이은 온화한 부처의 이미지로는 통일 고려의 강력함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웠기에 웅대하고 강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불상의 이미지가 필요했을 것이고, 또한 불상을 좌상이 아닌 입상으로 제작해 부처님의 보다 적극적인 중생구제의 모습을 표현했을 것이다.

대전리 비로자나불의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 하고, 다음에는 대전리에서, 아니 한국 불교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에 대해 이야기 해보기로 한다. 석불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이 인물은 누구인가?

바로가기---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나는 옛이야기2-대전리 공양인물상 – 지리산인 (jirisan-i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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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2

  • 62581
이태건

와. 논문을 쓰셨네요. 잘 봤습니다. 제가 보기엔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과 비슷한 모습이 있었어요. 마주보고 있지 않았을까? 주위에 옛날 기둥처럼 보이는 것들도 있고... 다음 글도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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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숙

절에 다니면서도 목에 주름이 세줄인것도 이제 알 게되었네요.
석불옆 앉은사람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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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나는 옛이야기1-대전리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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