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지리산둘레길에서 만나는 옛이야기4-견벽청야

견벽청야

堅壁淸野 굳은 견, 바람 벽, 맑을 청, 들 야

말 그대로 하면, 성벽을 굳게 하고 곡식을 모조리 걷어 들인다는 뜻이다.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해온 방어전술의 하나이다. 해자(垓子)를 깊이 파고 성벽의 수비를 견고히 하는 한편, 들에 있는 모든 곡식을 성내로 걷어 들여 공격해 오는 적의 군량미 조달에 타격을 입히는 전법으로, 우세한 적에 대한 수단으로 흔히 약자가 사용한다.

삼국지의 조조와 여포가 싸울 때 조조가 사용한 전법이기도 하고, 청태조 누루하치와 원숭환의 전투에서, 나폴레옹과 러시아의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대패 당한 전법이기도, 그리고 한국전쟁 때 11사단장 최덕신 준장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펼친 작전이기도 하다.

이번 이야기는 지리산둘레길 동강-수철 구간을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에 얽힌 이야기이다. 또한 이 이야기는 이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거창군 신원면에 있는 ‘거창사건 추모공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즉, 두 사건은 같은 사건이다.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기구의 폭력성은 국가의 본질적 요소이다. 그게 인민(people의 한국말은 인민이다. 이 말을 좌익들이 사용했기에 80년대엔 민중이란 말을 대체용어로 사용했다)을 법과 제도에 종속시키는 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런 국가의 폭력성이 깔끔하게 드러날 때가 전쟁 혹은 내란의 시기이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53년 남북전쟁이 휴전되는 9년 동안 한반도의 남과 북에선 새로운 국가를 성립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폭력이 일어난다. 그 정점이 전체 인구 10%인 300만명이 사망한 남북전쟁이다.

지리산둘레길에서 문득 스쳐 지나가는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은 지금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국가의 맨 얼굴을 직시할 수 있는, 아직, 살아있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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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진하게 된 유엔군은 후방 안정을 목적으로 11사단을 창설한다. 11사단의 주 임무는 지리산 등 산악지대에 잔존해 있는 인민군과 빨치산 토벌이었다

이를 작전 명령 형태로 공식화시킨 것이 '적의 손에 있는 사람은 전원 총살하라'는 작명5호였다. 이는 거창·함양·산청 민간인 학살이 일개 하급 지휘관의 자의적인 판단이 아니라 사단장, 국방부장관,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지휘명령체계를 갖는 국가으이 공식 행위라는 것을 말한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당시 국가의 시선은 매우 경악스럽다.

(지리산 일대) 약 7할 이상이 공비에게 협조하여 식량보급 및 정보를 제공하는 고로 이적행위로 인하야 아군작전에 지장을 초래케 하며 현재 소각당한 각 부락은 주간에는 대한민국이며 야간에는 인민공화국이라 아니할 수 없는데, 대한민국정부에 납세 혹은 국민된 의무는 전혀 없음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라 간주할 수 없음으로 지리산토벌작전에 적의 이용당하는 인원 및 가옥을 파괴하지 않으면 작전수행을 도저히 기할 수 없는 고로 불가분의 조치라고 생각함.

- 헌병대 보고서, "지리산 토벌작전으로 인한 민심동요에 대한 조사복명지건"

거창군 신원면 관내는 완전한 인민공화국이며 공비에게 일시적이 아니고 정신적으로 협조 충성을 다하고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특히 신원면 5개리 주민은 공비화되어 있었음으로 이적행위자로 칭할 바 아니라 완전한 적으로 간주할 수 있는 바. 차를 사살하였음은 작전상 당연한 조치로 인정됨. 숙청당한 지대의 거주민은 추호도 개전의 여지 전무한 자이며 금후 공비의 완전한 소탕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는 해당지대의 가옥 및 거주민을 처분하지 않는 한 금후 공비세력이 강화될 것이므로 당연한 처사로 인정됨

-거창경찰서 보고서(1951.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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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 중앙군 출신의 11사단장 최덕신이 중국의 전통전술인 ‘견벽청야’라는 이름을 언급했지만, 실제로 연대장, 대대장 등 일본군·만주군 출신의 산하부대 지휘관들은 일본군의 삼광작전이나 초토화작전이 훨씬 더 익숙한 개념이었다. 이들은 이미 해방 후에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 그리고 지리산에서의 반란군 토벌작전에서 초토화 작전을 편 바 있다. 11사단은 빨치산 토벌작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산청·함양·거창에서 일본의 삼광작전을 그대로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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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월 2일 11사단 9연대는 경남 진주에서 함양으로 이동하였다. 9연대 3대대는 작전회의 지침에 따라 주어진 작전지역으로 이동하여 토벌작전을 시작하였다.

한동석 3대대장은 대대병력과 경찰, 청년의용대 병력 1개중대를 이끌고 2월 7일 10시경 신원면에 도착하였다. 애초 정보로는 신원면에 약 400~500명의 공비가 잠복하고 있다고 했으나 3대대가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단 한 명의 공비도 없었다. 단지 부녀자와 아이들, 노인들밖에 없었다. 이에 3대대는 신원면에 경찰과 청년대 병력 약 200명을 주둔시킨 다음, 산청 쪽으로 진격해갔다.

이때부터 지리산 주변의 산청·함양·거창 20여개 산골마을에서 1,400여명이 학살되는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1951년 2월 8일부터 11일까지 나흘 동안 9연대 3대대는 산청군 금서면, 함양군 유림면, 거창군 신원면에서 대규모 학살 사건을 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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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아침, 지리산 줄기에 자리 잡은 산청군 금서면과 함양군 유림면 관내 10여개 자연부락의 날씨는 푸근했다고 전해진다. 아침 7시쯤 9연대 3대대 1중대 병력이 가현부락에 들이쳤고, 그들은 집집마다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40여 가구가 사는 마을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1중대는 놀라서 뛰쳐나온 마을사람들을 마을 앞 속칭 산제당 골짜기로 끌고 가서 집중사격을 가해 사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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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을 마친 부대는 가현부락의 소와 돼지들을 몰고 바로 아래 부락인 방곡마을로 향했다. 방곡에는 이미 2중대가 학살을 벌이고 있었다. 3대대 1중대는 2중대의 학살장면을 구경하면서 아래 점촌마을로 향했다. 당시 점촌마을에는 21가구 60명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 모두 부락 앞 논에서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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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은 계속되었는데 그들은 학살 방식을 바꾸었다. 마을을 하나씩 초토화시키는데 시간이 너무 걸린다고 판단한 3대대는 아예 여러 마을주민들 한 장소에 집합시켜 학살한 것이다. 함양군 유림면 손곡리의 손곡·지곡마을, 산청군 금서면 자혜리의 상촌·하촌마을, 화계리의 화계·화산·주상마을 등 7개 마을 주민들은 군인들의 총부리에 떠밀려 9시부터 유림면 서주리 동천강변에 모였다.

3대대 군인들은 장정 9명을 동원해 동천강변에 교실 넓이만한 구덩이를 두 군데 파게 했다. 주민들의 무덤이 될 곳이었다. 오후 4시쯤 300여명의 주민들을 두 개의 구덩이 속으로 몰아넣고 수류탄을 까넣은 뒤 기관총을 난사해 학살했다. 공비토벌 전공을 올리듯 박격포까지 쏘았다. 이렇게 해서 2월 8일 10시간만에 이 일대 주민 705명이 학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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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9일 아침 3대대는 산청군 생초국민학교를 출발해 거창 방면으로 향했다. 부대는 2월 9일 밤을 산속에서 숙영한 다음, 2월 10일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 청연마을에 도착했다. 70여명의 마을주민들이 뒷산으로 끌려가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전원 살해되었다. 이날 오후 3대대 병력은 인근 와룡리와 대현리에서 주민들을 마을 앞 탄량 골짜기로 끌고가 학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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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량골에서 주민들을 학살한 3대대는 와룡리·과정리 일대의 주민들을 면소재의 신원국민학교로 모았다. 군은 12개 교실에 꽉 들어찬 주민 1,000여명 가운데서 현지 형사인 조용호, 박세복과 박대성 지서주임, 박영보 면장 등을 시켜 군·경 가족을 골라내게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나머지 주민들을 근처의 박산 골짜기로 끌고가 총살하였다. 이 박산골 학살 현장에서 500여명 가운데 3명이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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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과 함양에서 학살된 주민의 경우 705명 가운데 10세 미만의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가 600여명에 달했다.

거창에서 학살된 719명 중 14세 미만의 어린이가 359명, 60세 이상의 노인이 59명으로 희생자의 75%가 어린이와 노약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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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학살사건이 알려지고, 정부와 군은 조직적인 은폐작전에 돌입했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현지를 방문하는 한편, 비밀회의를 통해 경남 계엄민사부장 김종원과 특무대원 계종운, 거창경찰서 사찰계 유봉순 등에게 사건의 조작과 은폐, 왜곡을 지시하였다. 게다가 이승만 대통령은 거창사건이 외신에 대서특필되는 등 문제가 되자 “치마 속 부끄러운 곳은 외국에 내보이지 말라고 했지 않아”라며 은폐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신성모 또한 이승만의 의중을 받아들여 사건의 책임자인 최덕신에게 ‘걱정하지 말고 토벌작전을 계속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심지어 100만원의 격려금까지 내렸다. 이후 9연대는 유아사체의 처리, 경남도경과 거창경찰서는 여론단속과 반증수집, 국회의원 무마, 유족과 주민 협박 등의 역할 분담을 하며 조직적으로 은폐 활동을 벌였다. 인명피해 뿐만 아니라 가옥소각, 농우탈취, 교실방화 등 물적 피해에 대해서도 철저히 은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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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미 사건이 정치권과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더 이상 덮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3월 30일 국회는 본회의 의결을 통해 거창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국회와 내무, 법무, 국방부의 합동조사단 파견을 결정하였다.

국회조사단은 4월 3일 거창에 도착하여 신원면 현장을 향해 출발했다. 계엄사령부 민사부장 김종원은 조사단이 지나갈 길목에 공비로 위장한 군병력을 매복, 배치해 총격을 가했다. 그러나 이미 알려지기 시작한 거창사건은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5월 하순부터 거창사건에 대한 헌병사령부의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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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부(재판장 강영훈 준장)는 김종원 징역 3년, 오익경 무기, 한동석 징역 10년을 선고하였다. 김종대는 무죄였다. 이 재판은 결국 사건을 축소·은폐하기 위한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던 셈이다. 재판 과정에서 거창 사건의 학살 진상을 밝히는 작업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고, 유죄를 선고받은 피고인들도 1년 후 줄줄이 특사로 풀려나 다시 군에 복귀하였다.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9연대장 오익경은 출소 후 군에 복귀해 1956년 대령으로 예편했고, 1970년대 초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0년형을 선고받은 3대대장 한동석 역시 군에 복귀하여 9사단 부관, 수도사단 군수참모, 27사단 부연대장, 육군 첩보부대 교육대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5.16 후에는 강릉·원주 시장을 거쳐 보사부 행정서기관으로 영전하는 등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살았다. 김종원의 승승장구는 더욱 놀랍다. 김종원은 군에 복귀했다가 경찰로 옮겨가 자유당 정권 시절 경찰 총수까지 거치며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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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책임자 최덕신 준장은 제1군단장을 지낸 뒤 육군 중장으로 전역하였으며, 박정희 정권 하에서 외무부장관을 거쳐 1963년 주 서독 대사를 역임했다. 동백림 사건 당시 서독 대사로서 서독 정부의 반발을 무마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결국 실패하여 외교 문제로 비화된다. 이 때문에 한국 정부는 국제적인 항의에 직면하게 되었고, 사태 수습을 위해서 박정희는 최덕신을 해임해 버렸다.

정권에서 내쳐진 최덕신은 1976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수시로 북한을 방문하고 공개적으로 6.25 전쟁 북침설을 주장하는 등 친북 활동을 벌이다가 1986년 아예 북한으로 망명하였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고 용서받지 못할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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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많이 지났다.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의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반쪽짜리 특별법이다.

산청함양거창사건에 대한 특별법도 1996년 ‘거창사건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란 이름으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산청함양거창사건 관련자에 대한 피해보상 등에 대한 법률 개정 혹은 특별법 제정은 20여년이 넘도록 국회에서 계류 중이다.

지리산둘레길을 걷다 보면, 크고 작은 뭇생명들에게서, 수억년 세월을 지내 온 돌들과 물들에게서, 천년을 버팅겨 온 절집에서, 따뜻한 위안을 받는다. 그런데, 가끔 지리산에 묻혀 있는 아픔들을 바라볼 때가 있다. 그 또한 지리산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마치며...

1951년 국가는 민간인 1424명을 학살하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는가?

“읍에서부터 우리를 참 깔보는 거에요. 거창사건을 잘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논께네 아까도 내가 이야기 했지만 오죽했으면 국민투표 할 때 우리가 100%했어요. 99%가 아니라 100%라. 박정희 시대 국민투표를 몇 번 했거든요. 그걸 열람해보면 우리가 100%에요. 글을 몰라서 그렇지 절대로 우리가 빨갱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고”

국가는 폭력을 통해 인민에게서 ‘국민됨’의 입증을 얻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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