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0(토)
 

 

옥황님, 나는 못 가오

 

박 두 규(시인)

 

나는 지금도 가끔 혼자서 이 노래를 청승맞게 부르곤 한다. 아무도 없으니 마음이 풀어져 눈물이 촉촉해질 때도 있다. 몸이라는 것이 참 신비하기도 해서 생각만으로도 반응을 한다. 이 노래를 돌아가신 이광웅 시인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에 그렇다. 술이 몇 순배 돌면 시인은 축 처진 어깨에 고개가 기웃해져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시키지도 않은 노래를 부르곤 했다. 멀리 개울 물소리가 들려오듯 저절로 노래가 흘러나왔다. 군부독재 시절에 오송회 사건으로 억울하게 7년 옥살이를 하고 남은 것이 있다면 그곳에서 배운 이 노래뿐이라고 했다.

그는 옥살이를 비전향장기수 어른들과 함께 했는데 운동 시간에 늘 자신이 부축해서 함께 다니던 분이 있었다. 그분의 두 눈은 전투 중에 총알이 스쳐가 멀게 되었다는데 운동하러 나갈 때는 곁에 누군가가 있어야 했고 그 일을 이광웅 형이 했다고 한다. 그 분의 손을 잡고 운동장을 오갈 때면 그분이 중얼중얼 노래를 하곤 해서 북쪽의 노래들을 배우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작고한 박배엽 시인이랑 늘 어울려 다니며 술을 했는데, 어느 날 배엽이네 집에서 그 아내가 술상을 마련해놓고 이광웅 시인의 노래가 귀하니 녹음을 해놓자고 해서 우리는 함께 술을 마시며 테이프 녹음을 했다. 그 후 이광웅 시인이 죽고 그의 노래가 그리워질 때 그 테이프가 생각났다. 그래서 당시 전주MBC 라디오 피디로 있던 소설 쓰는 이병천에게 부탁해서 가지고 있는 테이프를 더 좋은 음질로 다시 여러 개를 만들었다. 그래서 주변의 지인들과 당시 활동가들이 나눠 가졌다. 그때만 해도 그 테이프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국가보안법에 해당되는 거여서 나는 당시 끌고 다니던 차의 바닥 시트 밑에 숨겨 놓고 차 속에서만 그 노래들을 들었다. 그렇게 그 노래들을 혼자서 차속에서 부를 때면 저절로 눈물이 나곤 했다. 그때 녹음한 노래가 한 열 곡정도 될 터인데 모두 이광웅 형이 부른 노래다. 그때 부른 노래들을 소개한 시를 훗날 첫 시집에 실었다.

 

월미도의 하얀 사과꽃 향기나/ 날개옷을 잃어버린 금강산녀/ 원수를 찾아 눈 덮힌 영을 내리던 반짝이던 눈빛의 헐벗은 전사들/ 그리고 얼어붙은 하늘을 휘날리던 모스크바의 붉은 깃발과/ 흰점꽃이 인정스레 웃는 고향의 하늘/ 당신은 이런 노래를 불렀지요/...중략...// 나는 산에 올라/ 원추리가 무리지어 피어나는 평전에 누워 쉴 때면/ 당신의 나직한 노래를 만나곤 합니다/ 가장 우울했던 시절에/ 가장 아름다운 꿈을 품고 있었다는 죄목으로/ 세상을 버리신 당신/ 당신의 노래가 이 산을 흐르며 떠나지 않으니/ 이제 저 산봉우리 어느 하나에 당신이 머무르셨군요/,,,하략... (지리산10 -이광웅부분)

 

이광웅 시인을 만나 술 마시고 노래 부르던 때가 선생이 옥살이 마치고 나와 전주에서 학원선생으로 밥벌이를 하던 때였다. 이광웅 시인이 군산에서 나와 덕진 쪽에서 살던 때였는데 나는 늘 박배엽 시인과 함께 광웅이 형을 만나 술 마시며 그의 노래를 들었다. 우리는 덕진 왕릉 근처 숲이나 광웅이 형 집 등에서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배엽이는 검은 산만 떠가네 하는 밤뱃놀이라는 김민기의 노래를 쥐어짜듯 불렀고 광웅이 형은 지리산녀나 북한영화 월미도에 나오는 나는 알았네를 주로 불렀다. 그리고 나는 고 유희태 형의 집에서 복사해서 배웠던 내 정성 부족함이 아니오하는 김종률의 노래를 부르곤 했다. 광웅이 형이 금강산녀라는 노래를 부르면 꼭 당시 그의 심정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1) 내 옷은 어디로 갔나. 그 누가 가져갔나./ 오늘 꼭 올라가야 내일부터 베를 짜는데/

(2) 날개옷 잃고 서야 저 하늘 어이 날으리./ 날 두고 가는 선녀 말이나 전해다오./

(후렴) 직녀는 옷을 잃고 울면서 보낸다오./ 이 일을 어이하랴 옥황님 나는 못 가오.

 

천상의 사람 이광웅이 어쩌다 이 모진 세상에 내려와 부러진 날개를 붙잡고 옥황님, 나는 날 수 없다오 하며 하늘에 대고 하소연 하는 것만 같았다. 작은 어깨가 흐느끼듯 들썩이며 가늘게 새어나오는 한숨 같은 그의 노래를 들으면 슬픔이 목까지 차올랐다. 이광웅은 당시 폭압적이고 살인적인 군부독재가 앗아간 자유와 민주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그 상황 속에 자신이 처한 심정을 담아 이 노래를 불렀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의 나 또한 이광웅과 그때의 그리움에다 지금 내 문학과 세상살이의 상황에 처한 심정을 담아 이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노래라는 것이 늘 부르는 이의 심정을 말해주는 것이지만 그것과는 다르게 이 노래 자체가 본원적으로 담고 있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노래를 30년 가까이 부르다 보니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인데 아마도 이 노래는 인간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가진 본연의 슬픔과 그리움을 그리고 인간 존재의 절대 자유를 갈망하는 노래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 노래는 북한노래라는데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인데 어찌 이런 노래가 있을까? 하면서 내 사고의 편협함과 무지를 탓하곤 한다.

 

나는 이광웅 시인이 죽은 후 첫 시집을 냈는데 그 제목이 사과꽃 편지. 이광웅 시인이 주로 불렀던 또 다른 노래 나는 알았네의 첫 구절 봄이면 사과꽃이 하얗게 피어나고에서 따온 제목이다. 첫 시집에는 이광웅에 대한 시를 두 편 실었다. 하나는 위에 소개한 지리산 10 -이광웅이고 다른 하나는 첫 시집 제목으로 붙인 이 시다.

 

선생님, 사과꽃이 피었어요./ 은은한 갯바람 따라/ 새 한마리 날아와 앉았고요./ 눈부셔 하면서도 애써/ 하늘을 올려보던 모습이 생각나네요./ 사람들은 모두 잘 있어요./ 작은 어깨들 맞대고/ 오손도손 징역살이 잘 하지요.// 어제는 볕이 하도 좋아/ 그곳에 갔어요/ 선생님이 좋아하던/ 향그러운 술 하나 들고./ 햇볕으로 종일/ 몸 씻었어요./ 선생님 흉내내어/ 노래도 나직이 불러 보았지요./ 세상이 참으로/ 새털처럼 가볍게 느껴졌어요./ 서러운 사람들/ 무거운 세상이/ 금강산녀 날개옷처럼/ 가볍고/ 또 가벼웠어요. //선생님. 올해도 사과꽃은 피었어요./ 그 향내음/ 햇살 하나 휘감아/ 눈부셔/ 눈부셔/ 하늘도 볼 수 없네요./ 선생님의 하늘/ 올려다 볼 수 없네요. (사과꽃 편지전문)

 

그가 옥살이 후유증과 함께 위암으로 죽고 1년 후 군산교도소 근처 어디에 있던 그의 무덤을 찾아가 소주 한잔 음복하던 그때의 풍경을 담은 시다.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술자리에서 이광웅의 노래를 불러왔다. 당시는 작고한 이광웅을 생각하며 부르던 노래였건만 세월이 흐르고 흘러 생전의 그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된 언제부터는 나의 노래가 되었고 나의 슬픔이 되었다. 사람들도 술자리에서 나에게 이 노래를 청하며 박두규의 노래는 그 노래야하니 얼추 나의 노래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광웅 시인도 그랬을 것이다. 옥에서 나와 쓸쓸해진 세상의 술자리를 전전하며 이 노래를 부를 때는 이미 장기수들의 슬픔이 아니라 자신의 슬픔을 노래했을 것이다. 가사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긴박한 상황의 월미도에서 고향과 조국을 생각하던 인민병사의 심정이 담긴 것이다. 가사를 첨부하며 글을 맺는다.

 

(1) 봄이면 사과꽃이 하얗게 피어나고/ 가을엔 황금이삭 물결치는 곳/

아아 내 고향 푸른들 한 줌의 흙이/ 목숨보다 귀중한 줄 나는 나는 알았네/

(2) 불타는 전호 가에 노을이 비껴오면/ 가슴에 못 잊어서 그려보는 곳/

아아 내 고향 들꽃 피는 그 언덕이/ 둘도 없는 조국인 줄 나는 나는 알았네

(3) 살아도 그 품속에 죽어도 그 품속에/ 언제나 사무치게 불러보는 곳/

아아 어머니라 부르는 나의 조국이/ 장군님의 그 품인 줄 나는 나는 알았네/

(북한영화 월미도의 삽입곡 나는 알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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