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꿘투

 

 

관장님께 권투는

권투가 아니라 꿘투다

20년 전과 바뀐 것 하나 없는 도장처럼

발음도 80년대 그대로다

가르침에도 변함이 없다

꿘투는 훅도 어퍼컷도 아니라 쨉이란다

관중의 함성을 한데 모으는 KO도 쨉 때문이란다

훅이나 어퍼컷을 맞고 쓰러진 것 같으냐

그 전에 이미 무수한 쨉을 맞고 허물어진 상태다

쨉을 무시하고 큰 것 한 방만 노리면

큰 선수가 되지 못한다며 왼손을 쭉쭉 뻗는다

월세 내기에도 어려운 형편이지만

20년 넘게 아침마다 도장 문을 여는 것도

그가 생에 던지는 쨉이다

멋없고 시시하게 툭툭 생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도장 벽을 삥 둘러싼 챔피언 사진들

그의 손을 거쳐 간 큰 선수들의 포즈도

하나같이 쨉 던지기에 좋은 자세다

 

(이장근의 시꿘투전문)

 

 

요즘 TV중계 속에서 공공연하게 돈벌이 혈투를 벌이는 종합격투기에 밀려 사양길에 오른 꿘투는 묘한 향수를 불러온다. 당시 헝그리 복서들은 그래도 뭐랄까 일정부분 순정적인 면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제 강점기의 깡패와 요즘 조폭의 차이라고나 할까. 폭력의 상품화라는 관점으로 보면 20년 전의 복싱이나 요즘 격투기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만 그래도 영혼들까지 자본에 팔아넘기는 요즘 세태와 비교해보면 꿘투에는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서러운 살림살이의 애환이라는 스토리를 함유하고 있기도 해서 왠지 조금은 다르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 시 속의 권투 도장 관장님도 20여 년 동안 돈벌이도 되지 않는 도장을 고집스럽게 운영하면서 권투를 버리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는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꿘투 철학은 꿘투는 훅도 어퍼컷도 아니라 쨉이다.’ 라는 것이다. 권투의 핵심은 쨉이라는 그의 생각은 일상성의 철학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우리가 사는 하루의 삶을 생각해보자.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화장실 가고 누구를 만나 수다도 떨고 직장에서 늘 하는 업무도 보고 집에 와서 텔레비전도 보고 잔다. 특별한 사건 없이 보내는 하루 일상은 대개가 이렇다. 이게 이다. 사는 동안 어떤 특별한 큰 사건들을 만나는 것이 훅이나 어퍼컷일 것이다. 물리적 시간으로 봐도 일생의 팔구십 프로가 쨉이다. 다시 말하면 허접한 일상의 시간들이 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상의 시간들이 바로 삶의 과정이다.

 

많은 식자들은 삶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말한다. 목표를 중시하는 삶은 결과주의적 삶을 사는 것이고 그것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무엇이 되었다거나 무엇을 이루었다는 것 자체보다는 어떻게 그것을 이루었느냐가 중요하다. 우리의 삶은 어떻게라는 그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목표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길을 걸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간다는 것은 방황이다. 그래서 목표는 필요하지만 결과주의적 삶을 살지는 말자는 것이다.

 

지리산의 어느 깊은 숲에서 홀로 피고 진 꽃은 실패한 꽃이고, 화려한 도심의 전시장에서 많은 사람이 아름답다고 칭찬받으며 전시되어 있는 꽃은 성공한 꽃일까. 날아가는 나비들에도 성공한 나비가 있고 실패한 나비가 있을 것인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본질에서 보면 생명들의 삶에는 실패나 성공은 없는 것이다. 다만 치열하게 그 생명을 발화하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일상성의 철학은 이러한 일상적 삶의 의미성을 중심에 놓은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늘 하게 되는 삶의 자질구레한 행위들을 자질구레하다고 말하지 말자는 것이다. 링 위에서 수없이 날리는 쨉이 결국은 경기 자체를 결정하듯 허접한 우리 일상이 결국에 가서는 우리의 인생 삶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문제는 매일 세끼 밥 먹는 일 같은 그 허접한(?) 일상을 어떻게 치열하게 살아내느냐는 이야기다. 우리가 무수히 을 날리며 사는 일상에서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은 그냥 시도 때도 없이 생각 없이 날려 보내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을 깨어있으려는 치열함에 닿아있는 평범함이지 않겠는가.  

 

사본 -C39A8335.jpg

-빗점골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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