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6-05(월)
 

  

구례군 지역의 빨치산 활동사


 

남조선 노동당 구례군당은 5. 10단선 반대투쟁에서 수배된 인물 25명으로 1948. 6월초에 지리산 인민유격대를 피아골 계곡에서 조직하여 당사상 교육과 유격전술에 의한 강도 높은 훈련이 시작되었고 훈련중에도 투쟁실습에서 유격대조직 1개월만에 엽총 2정 칼빈총 5정 일제의 九九식 소총 3정과 일본도 등으로 완전무장하여 지리산 인민 유격대가 활동을 개시하였다.

지리산 인민유격대가 조직되어 활동을 시작함으로서 친일파 민족반역자 및 우익 인사들은 자유로운 생활이 어려워 졌고 밤으로는 경찰지서로 가서 잠을 자야했다. 또한 경찰도 산간벽지를 함부로 출입할수 없었을 뿐아니라 단신으로는 행동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일반 주민들도 좌익인사들을 욕하거나 비판도 못하게 되었고 좌도 우도 반대 하지 못하고 밤으로 찾아오는 빨치산들에게 식량과 물품을 은밀히 제공하게 되었다. 지리산 인민유격대는 성장을 거듭하며 1948. 10. 19일 여수 14연대의 반란을 맞아 그들에게 지리산과 백운산의 익숙해진 지리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하여 14연대는 국군보다 지리적 잇점을 얻게 되었다.

1948. 10. 25일 미명에 김지회가 인솔한 14연대 병력 400여명은 지리산 유격대를 앞세워 구례경찰서를 점령함으로서 혈투는 시작되었다.

 

1948. 11. 19일 밤1214연대 후속부대 지창수가 지휘하는 200여명과 김지회 병력 400 구례유격대 50여명등 650여명은 구례읍 2차 점령작전을 감행 했으나 성과 없이 작전개시 10시간여만에 퇴각함으로서 그들의 사기에 큰 타격을 받았는데 그후 1948. 12월 초순 김지회와 박종하는 200여 병력으로 산동면 쐬약재에서 12연대장 백인기가 인솔한 12연대 1개중대를 매복작전으로 섬멸시켜 군용트럭 6대 짚차 1, 스리쿼터 1대등을 노획하여 소각시켰고 기관총 소총등 150여정의 무기와 수만발의 실탄을 빼앗았다. 이 작전이 끝나자 이현상은 구례군 유격대의 절반인원을 14연대에 편입시켜 피아골에서 뱀사골로 거점을 옮겼고 구례유격대는 지리산 인민 유격대라는 본래의 명칭을 14연대에 빼앗기고 단순히 구례유격대로 격하 되면서 전투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당시 14연대의 지휘체계는 정치위원에 이현상 사령관에 부사령관에 김지회 중위였고 구례유격대장은 박종하(구례 간전 논실출신)였다.

 

박종하는 여수, 광양, 구례의 유격대를 규합하여 백운지구사령부 유격대를 조직했는데 총인원 50명 무장 13정이었다.박종하는 능란한 유격전술인 편의대 활동 매복작전등으로 부대창설 1개월만에 완전무장부대 50명을 만들었고 1949. 6월 하순 박종하는 50명의 병력으로 광양군 진상면 신항리에 주둔중인 15연대 중화기 중대를 기습하여 박격포 2문 기관총 5정 소총 70여정 실탄 수만발을 노획하여 대부대로 약진하였다. 1949. 9. 16일 박종하는 전남 동부지구 유격대 100여명의 지원을 받아 순천방면의 국군지원 병력 지원로를 막게하고 자신의 부대 50명으로 하여금 하동 방면에서의 지원군을 막게하고 박종하 자신은 150명 병력으로 광양읍 서국민학교에 주둔한 15연대 1개 대대 병력을 공격하여 포로 600명 소총 700여정등 대대병력 보급품 전부를 노획하는 유격투쟁 사상 초유의 대전과를 올렸다. 이리하여 박종하 백운산 부대는 지리산 14연대 병력을 능가했다.

 

이때 지리산 병력은 1949. 3월말 남원군 산내면 금풍정이라는 마을에서 국방군의 기습을 받아 홍순석 김지회가 사살되고 300여 병력을 잃어 잔존세력은 환자까지하여 150명 내외로 줄었고 실탄도 떨어져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이현상은 9. 16광양작전후 박종하부대를 지리산으로 불러 14연대 잔존세력과 합쳐 부대를 재편하며 박종하를 총참모장으로 기용하여 지리산 빨치산 투쟁의 지휘권을 박종하에게 맡겼다. 1949 겨울 국군과 경찰은 지리산과 백운산에 고지마다 주둔하면서 빨치산 토벌작전을 지속적으로 전개함으로서 빨치산 투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현상은 1950. 6월초 잔여 병력 150여명을 인솔하고 월북을 결심하고 지리산을 떠나 북상중 무주에서 6. 25 소식을 듣고 부대는 덕유산에 두고 대전에 가서 인민군전선사령관 김책을 만나 낙동강을 도강하여 낙동강 방위군 후방에 가서 유격투쟁을 전개하라는 지령을 받고 귀대하여 즉시 행동을 개시 고령군의 모처에서 낙동강을 도강하며 9. 28까지 구를 중심으로 유격투쟁을 전개하다가 9. 28을 만나 으로 후퇴를 개시하며 강원도 후평에서 인민군 전선사령관을 만나 다시 남하하여 적 후방에서 유격투쟁하라는 명령을 받고 195012월 말경 850여명으로 남부군(南部軍)을 편성하여 다시 남하를 시작 청주를 점령하고 속리산과 추풍령을 지나 덕유산에서 태백산 전투경찰대 207부대를 완전섬멸하고 다시 남하 산청군 가회지서를 습격 점령하였으나 이 전투에서 박종하가 전사하여 1948. 6월 피아골에서 조직한 지리산 인민유격대의 종말을 고했다 

(자료제공, 빨치산 출신 정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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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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