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안철환의 '곡우 편지'
부활의 봉화, 봄비
지난 4월20일 곡우가 지나갔습니다. 이 난의 필자인 안철환 선생이 곡우에 대한 글을 보내왔습니다. 절기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어 뒤늦지만 여기에 올립니다.
곡우 편지
안철환(전통농업연구소 소장)
예수님이 우리나라 사람이었으면 춘분이 아닌 곡우에 부활하셨을 거라 우기곤 합니다. 춘분보다 훨씬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거든요.
올해는 곡우비가 일주일 일찍 내렸어요. 음력으로 보름이었지요. 보름엔 비 잘 안오는데 그날은 아침부터 찌뿌리다 오후가 되자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농장에 오기로 한 손님들 맞이하느라 정신없이 비를 흠뻑 맞았지만 그게 곡우비라는 걸 밤이 되어서야 알았네요. 봄비 잘못 맞으면 감기 걸리기 십상인데 그 비는 그러지 않았거든요. 온화한 기운을 담고 있는 비였지요.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아침에 산을 보니 일제히 나무들에 새순이 돋은 겁니다. 그 기운이 얼마나 신선하고 상큼한지 꽃이 아무리 예쁜들 새순만 할까 했습니다. 화려한 꽃이라 해도 이내 지고 말 운명이지만 새순은 앞날이 창창한 희망을 품고 있으니 그 기운에 어찌 마음이 설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곡우비의 그 기운은 춘분의 기운보다 훨씬 더 극적이고 역동적이라 한 겁니다. 낮과 밤이 같고 낮이 밤을 이기기 시작하는 춘분의 기운이야말로 부활의 힘이란 건 분명하나 춘분 뒤 반갑지 않은 불청객 꽃샘추위가 들이닥치는 게 춘분의 뒤통수라 할까요. 우리 조상들은 이런 걸 보고 액이 빠져나갈 때 꼬리로 뒤통수를 후려 갈기며 나간다 했어요. 액이 나간다고 방심하지 말라는 뜻일겝니다.
곡우비가 가져다 주는 생명의 기운은 매번 감동적이지만 처음 곡우비의 신비를 보았을 때의 감동은 20여년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저희 밭은 군포에서 안산 넘어 오는 영동고속도로 밑 토끼굴 지나 산 밑에 있는데 곡우비 그친 다음날 어두운 그 굴을 지나자마자 내 눈앞에 펼쳐진 온 산 나무들의 새순은 생명들의 팡파레이자 세레모니였어요. 입과 눈을 닫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걸 예수님 못지않은 생명들의 부활이라 느꼈지요.
우리나라의 봄의 부활이 감동적인 것은 모든 게 죽는 추운 겨울 때문일 겁니다. 겨울이 별로 춥지 않아 변함없는 녹색을 자랑하는 호주의 겨울을 보았을 때 부럽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런 나라의 봄은 별로 부활의 감동이 없을 거라는 걸 알았지요. 너무 추워 모든 게 죽는 우리의 겨울이 역설적으로 축복이라는 걸 느낀 것도 한 참 나이 들고 나서였죠.
춘분에서부터 부활하기 시작한 기운이 곡우에 와서야 완성되는 셈입니다. 춘분을 기점으로 부활하는 생명들은 아직 뒤통수를 노리고 있는 꽃샘추위를 조심해야 합니다. 때문에 여전히 움추리고 있는 생명들이 적지 않아요. 그러나 곡우 때 따스한 봄비로 이젠 모든 추위가 물러가니 만물이 마지막 기지개를 켜 약동의 계절을 준비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올해 곡우는 만만하지가 않네요. 윤6월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윤달이 든 해는 날이 고르지 않습니다. 양력과 음력의 편차를 억지로 맞추다보니 과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윤달이 들었다는 것은 음력으로 일년이 13달이라는 건데 그러다보니 계절이 3달보다 긴 3달 열흘 정도 되는 셈입니다. 그럼 봄은 음력 4월초까지로 양력으론 5월 초순까지 봄이 되는 겁니다. 초순이면 여름이 시작하는 입하이지만 음력으론 아직 봄이라 냉해를 조심해야 합니다. 보통은 곡우 지나면 냉해가 가시는데 올해는 그렇지 않아요. 한 낮에도 날이 쌀쌀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예년에는 춘분 지나면 한낮엔 여름처럼 더웠던 것과 많이 다르죠.
올 여름은 음력 윤6월 중순까지로 절기로 입추 근방이에요 윤6월이지만 가을의 시작이 여름 끝 무렵에 드는 거지요. 그래서 가을이 빨리 오지만 아직 여름에서 빠저 나오지 못해 입추가 가을답지 못할 겁니다.
곡우는 12지지 중 진(辰)에 해당하니 음력으로 3월에 듭니다. 인(寅) 묘(卯)와 함께 진은 봄에 드는 지지로 여름으로 넘어가는 봄 끝에 들지요. 여름에 드는 사(巳) 오(午) 미(未) 중 여름 끝인 미, 가을에 드는 신(申) 유(酉) 술(戌) 중 가을 끝인 술, 겨울에 드는 해(亥) 자(子) 축(丑) 중 겨울에 드는 축과 함께 환절기 성격이 강한 절기거든요. 그러니까 절기로 미는 대서, 술은 상강, 축은 대한으로 환절기답게 비와 눈이 자주 내려 다음 절기를 준비합니다.
올해 2025년 곡우는 음력으로 3월 23일이었고 일진은 기미(己未) 였습니다. 음력으로 불 때 곡우가 늦게 왔습니다. 그러면 곡우 이후엔 날이 따뜻하고 온화해야 할텐데 그렇지가 않지요. 입춘이 설 지나 와서 이래저래 봄도 늦은데다 윤6월 들어 늦봄이 천천히 가는 것 같습니다.
곡우(穀雨) 지나면 여름 나는 작물들은 대부분 파종할 수 있습니다. 곡식 심기에 좋은 비가 내린다는 말 그대로이죠. 벼를 비롯해, 옥수수, 수수, 콩 등 곡식에서부터 고추, 오이, 수박, 호박, 참외, 토마토 등 과채류까지 심을 수 있으나 들깨, 조, 고구마, 메주콩, 팥 등은 장마 근방에 심는 게 좋습니다. 일찍 심으면 웃자라 오히려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늦게 심는 이런 작물들은 감자나 마늘, 양파, 밀, 보리 등을 6월 중에 수확해 그 자리에 이어심는거지요. 이를 그루작물이라 하는데 앞 작물 수확 후 남는 그루(밑둥)들을 갈아엎어 심는다 해서 그렇게 부릅니다. 앞 그루 갈아엎는 거는 그루갈이라 하지요.
고추나 가지 토마토 등 과채류 모종들은 보통 곡우 지나 심지만 올해는 입하 지나 심는 게 안전합니다. 최저 기온이 10도 이하로 내려가면 냉해를 조심해야 합니다.
곡우 근방에 논을 잘 갈아둡니다, 밭은 경칩부터 갈지만 그렇게는 못해도 곡우부터는 갈아둡니다. 보리나 밀과 이모작 하는 논은 갈 수 없겠지요. 곡우 즈음 보리가 이삭 패고 곡우 조금 지나 보리보다 일주일 늦게 이삭 패는 밀을 위해 이삭거름을 주어야 합니다. 이젠 풀들도 억세집니다. 냉이는 벌써 꽃 피고 져서 씨를 맺고 있어요. 날은 아직 춥지만 풀들은 추위를 무릅쓰고 제 날에 올라와 기세를 부리니, 이래저래 풀을 인간이 이기기는 힘들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