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8-08(월)

지리산문화
Home >  지리산문화  >  문장 속의 지리산

실시간뉴스

실시간 문장 속의 지리산 기사

  • 이런저런 지리산 이야기 2
    이런저런 지리산 이야기 2 ◔ 칠불암이 칠불사가 된 것은 전씨의 5공 시절 실세 중의 실세라는 쓰리 허의 작품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그 옛적 인도에서 시집 온 허황후의 일곱 왕자가 성불한 곳이 칠불암이고, 나머지 중 두 왕자가 어머니의 허씨 성을 퍼뜨렸으니 쓰리 허가 그 자손이라는 것이다. 지리산 중턱까지 관광버스가 오르내리는 길을 만들고 그 비싸다는 銅기와로 모든 지붕을 씌워 권세를 자랑했으나 오히려 그 치적으로 인해 역사 속에 두고두고 욕을 먹게 되었다. ◔ 피아골의 끝 마을은 직전마을이다. 피 직(稷)에 밭 전(田)을 쓰니 그 옛날 곡식이 귀한 시절의 이름이다. 그 피밭골이 피아골로 불려지게 되었으나 그 골짜기에서 전쟁 이후 한 트럭분의 유골이 나왔다고 하니 피아골은 피(彼)와 아(我)가 싸워 계곡이 핏빛으로 물들었던 전쟁의 상흔이 담긴 이름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이 피아골을 오르다 보면 삼홍소(三紅沼)가 나오는데 김시습이 이곳에 앉아 술 한 잔 하며 단풍이 붉고 그것을 비추는 맑은 계곡물이 붉고 제 얼굴이 붉어 삼홍이라 하였으니 이래저래 피아골은 붉은 골짜기라는 이미지를 버릴 수 없다. ◔ 여름이 끝나갈 무렵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남부능선을 내려오다 능선 끝자락의 원강재로 하산하려는데 길이 묵어 없어지는 바람에 늦은 적이 있다. 이미 어두워진 시루봉 근처에서 길이 끊겼는데 친구와 나는 지도를 보며 의견이 달랐다. 친구는 더디더라도 길을 찾아 가자는 것이었고 나는 여기서 곧바로 직선으로 길을 뚫자는 거였다. 가시덩굴이 우거진 길을 억지로 뚫어 새벽 2시가 넘어서야 힘들게 내려와 생각했다. 내 스스로 길이 되었던 고단한 하루였다고. 하지만 그것 또한 나의 오만이라는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 왕실봉의 외국인 산장을 지키는 보살님에게 점심으로 비빔밥을 얻어먹은 일이 있다. 따뜻한 보리밥에 근처에서 방금 끊어온 산나물을 넣고 참기름 한 숫갈에 여러 봄꽃들의 꽃잎들을 낱낱이 따서 얹어 주었다. 그 형형색색의 꽃잎 비빔밥은 먹기엔 너무 아름다웠다. 아름다움 자체를 먹는다는 사실에 흥분했으나 나는 결코 아름다워지지 않았다. ◔ 상선암으로 해서 차일봉을 오르다 멧돼지 네 식구를 만났다. S 곡선을 돌아 갑자기 조우했는데 나도 놀랐지만 그 가족들이 더 놀랐던 것 같다. 그들이 먼저 순간적으로 등을 돌려 왔던 길로 돌아갔는데 그 찰나에 마주친 어미 멧돼지의 눈빛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아마 그녀도 그럴 것이다. ◔ 지금 야간산행은 벌금이 50만 원이지만 예전에 밤으로 걷는 즐거움은 제법 컸었다. 지상의 모든 것들이 달빛에 젖어 조용히 스스로를 성찰하는 시간에 나는 홀로 깨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껏 고무되었던 철없는 발자국 소리였다. 달빛에 촉촉이 젖은 구상나무며 이슬 머금은 동자꽃, 숲의 어둠을 얼핏 스쳐가는 고뇌까지도 경이로웠던 밤, 그렁그렁한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밤, 불무장등의 작은 봉우리들과 피아골의 들리지 않는 물소리마저도 모두가 나를 향해 밀려오는 것만 같던 그 치기어린 감상의 밤이 그립다. ◔ 대설주의보가 해제되기를 기다려 산에 오르곤 했다. 티 없이 맑은 하늘,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누구도 밟지 않은 새로운 길에 발자국을 남기고 싶었다. 눈꽃을 가득 피운 나무 사이로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며 맨 처음 길을 열다보면 외로움도 슬픔도 세상의 고단함도 내 안의 두려움까지도 모두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까닭모를 그리움 하나가 발자국처럼 질기게 따라올 뿐이었다 -노고단 설경 / 사진 김인호
    • 지리산문화
    • 문장 속의 지리산
    2022-06-12
  • 이런저런 지리산 이야기 1
    이런저런 지리산 이야기 1 ◔ 그 옛날,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이 깊은 문수골에 들어왔을 것이다. 나물만 먹고 살 순 없으니 손바닥만한 논배미라도 얻기 위해 함박꽃 지고 단풍잎이 붉게 물들 때까지 축대를 쌓고 계단처럼 논을 올렸을 것이다. 초승달 같은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아슬아슬한 계절을 건넜을 것이다. ◔ 쌍계사 등 뒤로 사람들의 발길이 없는 내원골을 한참 오르다 보면 서너 채의 빈집이 있다. 처사는 수년째 마당의 감꽃을 피우며 한 소식 기다리더니 어느 겨울머리에 나섰나 사립문조차 무너져 있다. 부엌문을 열면 낡은 찬장에 아직도 가지런히 놓여있는 숟가락과 젓가락이 슬프다. 먼지 수북한 망태기며 녹슨 호미도 그렇지만 방구들에 까지 올라온 잡초들의 인정머리가 또한 그러하다. ◔ 지리산 종주등반을 하다보면 전남, 경남, 전북이 만난다는 삼도봉을 지나 ‘화개재’를 만나게 된다. ‘화개’는 저 아래 섬진강 가에 있는데 왜 이곳을 ‘화개재’라고 부르는지가 늘 궁금했었다. 하지만 오로지 두 다리만이 민초들의 교통수단이던 시절, 남원 쪽 마을의 장꾼들에게는 뱀사골을 올라 지리산 주능선을 넘어 목통골로 내려가는 길이 화개장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등짐 하나 들쳐 매고 꼭두새벽부터 뱀사골을 올라 주능선을 넘어야 화개를 가니 이 주능선의 ‘화개재’는 뱀사골에서 올라오는 남원 쪽 사람들이 불렀던 이름일 것이다. 이 재에 이르면 쉴 참에 담배 한대 말아 피고 화개장 까지 한달음에 내달았을 것이다. 걸쭉한 탁배기 한잔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장국밥이 생각났을 것이다. ◔ 산을 가다보면 가끔 ‘등산로 아님’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이것은 지정된 등산로 외에는 모두 사람이 다녀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강하게 담겨져 있다. 하지만 이것들은 다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다. 나무하러 다니고, 장 보러 다니고, 능선 너머 이웃동네를 넘나들던 길이고 삶의 일상 속에 있었던 길이다. 지금은 멧돼지 가족들이 다니고 노루가 가다말고 서서 잠깐 뒤돌아보는 길이 되었지만 아직도 다 살아있는 길이다. 다만 우리 스스로가 잃어버린 길이고 스스로 차단한 길이 되었을 뿐이다. ◔ 왕시루봉에 가면 외국인 산장이 있다. 80년대 후반 즈음이었을까. 그때만 해도 칠십이 넘은 산장지기 노인 한분이 있었다. 젊은 시절 외국인 부인을 지게에 지고 이 정상까지 올라왔다는 노인. 그 산장의 옆에는 물줄기를 막아 만든 풀장이 있다. 물줄기가 얼어버린 겨울이면 도끼로 얼음을 깨고 풀장의 물을 길어 저녁밥을 지었다고 한다. 멀리 노을이 지는 섬진강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직도 왕시루봉 정상에는 제국의 그늘이 가득하고 나는 그 그늘 아래서 점심으로 가져온 주먹밥을 베어 물었다. ◔ 한국전쟁 전에는 외국인 산장이 노고단에 있었다. 풍토병 치료를 위해서 라고는 하지만 수십 채의 산장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그들이 올라와 쉴 때는 구례의 아낙네들이 보따리 짐을 싸들고 올라와 장이 섰다고 한다. 어린 함태식은 노고단에 올라 비키니 차림으로 햇볕을 쬐는 서양인들을 보았다고 했다. 한반도가 통째로 신음하던 그 일제식민지 시절의 한 풍경이다. ◔ 장터목은 장이 서던 곳이었다. 지리산 전체가 삼도를 잇는 길이었던 시절, 잠시 쉬던 장꾼들이 모여 서로의 물건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지금은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높은 산이 되어 하루를 쉬어가라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장터목은 장터목일 뿐이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다리가 굳어졌을 뿐 장터목은 지금도 장이 서고 싶다. -반야봉 일출 -반야봉 철쭉 -지리산에서 보는 섬진강 -노고단에서 본 구례 <사진 : 김인호>
    • 지리산문화
    • 문장 속의 지리산
    2022-05-10
  • 지리산 빨치산 태동의 배경과 몰락
    지리산 빨치산 태동의 배경과 몰락 지리산 파르티잔 이야기는 한반도 해방 국면의 정치적 상황과 민족사적 흐름, 그리고 국민적 정서를 정확히 인식하는 배경에서 다뤄져야 한다. 당시의 모든 항쟁적 사건들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진행된 것들이다. 해방 직전 일본의 패망이 짙어지던 1944년에 미국은 당시 막 시작되던 세계적 냉전체제 국면에서 한반도를 미국의 전초 기지화 하려는 계획을 진행하였다. 그래서 여론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 해방이 되면 어떤 체제의 국가가 건설되기를 희망하느냐는 질문에 자유민주주의국가 14%, 사회주의 국가 70%, 공산주의 국가 7%, 기타 9% 였다. 이에 미국은 해방 후 승전국의 입장에서 38도 선 남쪽으로 들어와 미군정을 시작했다. 북쪽은 소련이 직접 국가운영을 하지 않고 조력자의 입장에 있었던 반면 미국은 여론을 토대로 사회주의 국가 건립을 우려하여 군정으로 직접 남한을 통솔 운영했다. 그러면서 토지개혁과 일제 잔재 청산, 공평한 사회를 꿈꾸던 민족의 흐름을 역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시 조선공산당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46년에 대구철도노조가 깃발을 들고 대구 10월 항쟁이 일어난다. 10월 항쟁은 미군정 반대가 가장 큰 이유였다. 이후 10월 항쟁 수배자들은 산으로 들어가 야산대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파르티잔의 시작이라고 본다. 이후 미군정이 끝날 무렵 1948년 5.10 단선 단정에 반대하는 2.7 구국투쟁이 일어난다. 전국 총파업으로 진행되며 이때도 수배자들이 산으로 들어가며 야산대가 더욱 강화된다. 지역사령부를 두며 체계화 된다. 그리고 이어서 제주 4.3항쟁과 10.19 여순 항쟁이 일어난다. -1948년 10월 여순항쟁 이후 김지회, 홍순석, 지창수 등이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 문수골로 들어옴. 48년 11월 이현상 지리산으로 투입 -1949년 야산대를 인민유격대로 재편성하여 토벌대와 전투. -1950년 한국전쟁으로 8월에 인민유격대는 북한 정규군과 합세하여 작전을 펼침 -1951년 남부군 활동 전성기로 열차습격, 은행습격 등, 하지만 12월 들어 본격적인 토벌로 -1952년 토끼몰이식으로 대성골로 유인하여 박격포, 공군기 투입으로 빨치산 궤멸. 사살 300명, 포로 250명, 혹은 800여명이 죽었다고도 하는 등, 자료의 부정확 -1953년 7월 휴전협정 시 지리산 잔여 빨치산 언급 없음. 이현상 9월 사망 (이현상은 북으로 갈 수도 있었으나 스스로 지리산에 남음. 북에서 김일성의 권력투쟁으로 남노당 출신의 박헌영, 이승엽 등이 모두 처형 당함. 박현영은 여순때 병력노출 혐의 미군스파이로 몰려 죽음) -1954년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 전남도당 박영발 사망으로 토벌 종료. 5월 정식 토벌대는 해산하고 지역에서 토벌 계속 -1955년 지리산 입산통제 해제 -1956년 43명 빨치산 생존 떠돌이 -1963년 11월 정순덕 총상 입고 체포 -지리산의 여명 / 사진 김인호
    • 지리산문화
    • 문장 속의 지리산
    2022-04-13
  • 『지리산 운동』에 대한 작은 생각
    『지리산 운동』에 대한 작은 생각 ‘지리산 운동’이라는 용어는 아직은 좀 낯설지만 지리산 권에 있는 많은 단체나 소모임, 그리고 개인의 다양한 영역의 사회 변혁적 활동과 삶들을 하나의 큰 지향으로 엮어낼 수 있는 ‘지리산 공동체’적인 용어로 자리 잡았으면 하는 바램에서 몇 마디 거들까 한다. 21세기에 들어서기 전까지 우리 사회 변혁운동은 크게는 군부독재라는 반정부 투쟁 속에서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을 통합한 전국 단위의 조직력을 가지고 명확한 하나의 전선에 복무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현실사회주의가 실패하면서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되고 동구권이 몰락하는 국면 속에서 변혁운동의 중심주체들이 흔들리면서 운동의 내용과 형식에도 많은 변화가 왔다. 이전(반정부 투쟁 당시)의 운동은 당장 눈앞의 위중한 현실(열사들과 동지들의 죽음 등) 속에서 오로지 현실을 타개해야 하는 절박함으로 스스로의 내면을 성찰할 여유도 없이 비민주, 반인권 반통일을 대상으로 한 투쟁의 현실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전국적 상황을 보면 집단적, 지역적, 인적 구성에 따라 전선이 형성되고 그 내용이 매우 다양해지면서 운동의 폭이 좁아지고 조직 이기주의적인 성향이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지리산권의 많은 단체와 소모임 또는 개인적 활동까지 포함해서 ‘지리산 운동’이라고 명명해본다면 그것은 지금까지의 여타운동과 크게 두 가지의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하나는 넓게 보면 ‘대안적 삶 운동’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리산 권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제 단체나 모임의 구성원들은 지역 주민들도 있지만 귀농, 귀촌인들이 상당수에 이른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자본주의 문화에 염증을 느끼고 대안적인 새로운 삶을 찾아 도시에서 지리산 자락으로 삶터를 옮겨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이 관심을 갖는 운동영역은 환경, 생태, 생명, 평화, 공동체, 등의 문제의식을 바탕에 둔 대안문화, 대안문명 찾기라는 운동적 성격을 갖는다. 이것은 크게 보아 인간 소외나 인간성 상실이라는 자본 중심적 삶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이것이 ‘지리산 운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다양한 사업과 활동의 바탕에 자리 잡고 있는 문제의식의 공통분모라고 할 것이다. 근대 500년은 모든 삶이 자본으로 집중되는 과정으로 산업혁명과 과학기술의 발전, 그리고 자본주의의 확장과 함께 진행되었다. 근대의 과정 속에서 추구해온 물질의 풍요와 생활의 편리 뒤에 숨어 있던 인간의 탐욕이 근대화라는 명제 속에서 자연의 순환 질서를 깨기 시작했고 그런 과정 속에서 자본주의는 인간의 ‘탐욕’이라는 것을 구체적 일상 속에서 일정부분 정당화시켜 주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인간의 심성이 피폐되고 사회적 가치관과 개인 삶의 목표는 선과 진실로부터 멀어졌으며 현대인들의 삶의 중심에는 물질이 자리 잡게 되고 사회생활은 보다 많은 물질을 얻기 위한 시스템으로 구조화되어 갔다. 이렇게 물질만능주의 사고가 사회에 만연되면서 생명경시와 함께 개인의 평화 또한 심하게 위협받게 되었다. ‘지리산 운동’은 이러한 사회적 문제의식 속에서 태동하였기 때문에 자본가치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인본가치 중심의 삶으로 돌아가자는 근본 운동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새로운 삶의 문화, 문명을 꿈꾸는 대안 운동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지리산 운동’의 또 다른 특징은 사회의 구조를 바르게 변혁하려면 ‘인간의 본래 심성을 되찾는 운동’과 함께 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조직이나 단체 모임들이 이 부분을 직접적으로 표출하고 있지는 않지만 본래 심성을 되찾는 노력을 통해 개인의식과 사회의식의 확장을 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사회의 변혁은 어렵다는 생각들이 많은 사업 속에 녹아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간디가 식민지 상황에서 벌인 사탸그라하(진리파지眞理把持) 운동이 그러했다. 간디는 자신이 바라는 진정한 해방은 영국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보다도 자신으로부터 해방(절대자유)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한 사회의 변혁은 식민지에서 벗어나고 제도가 바뀌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회와 사람들의 의식이 함께 확장되어야 진정한 변혁이라고 했다. 그리고 간디는 종교를 통해 확장된 개인과 사회의 의식을 토대로 비폭력 투쟁이라는 전대미문의 운동방식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이는 성찰과 수행을 통해 개인의 의식을 확장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의 단군시절에도 그러했다. 그 시절의 사회적 삶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로 성통공완性通功完이라는 말이 있다. 본성을 꿰뚫어 공덕을 완성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본래 심성을 되찾는 수행을 통해 개인의 의식을 확장시키고 사회적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뜻으로 해독이 가능하다. 성통공완이나 샤타그라하 모두가 개인의 자기완성과 사회적 실천을 하나로 인식하고 진행시킨 높은 의식의 사회적 삶이라고 생각한다. 자기완성의 노력과 사회적 실천이 병행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사회적 제도를 바르게 고치고 바르게 운용하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이 그만한 역량과 수준을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지리산 운동’은 지금껏 우리 변혁운동사에서 특별히 거론된 적이 없는 ‘개인의 자기완성’이라는 측면을 사회적 실천운동과 동등한 무게로 병행시키는 운동이어야 하고 그래야만 ‘지리산 운동’다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개인의 의식을 확장시키는 것과 사회적 실천이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는 기존의 우리 사회운동 방식보다는 한 단계 진화된 운동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본의 문제를 자본의 관점과 방식으로 풀지 않고 모든 생명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며 순환할 때 진정한 평화가 있다는 자연 중심의 사유와 철학을 바탕에 두고 풀려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 현실에서 민주적 제도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리산 자체가 모든 생명의 집합체인 것처럼 그래야만 개인과 전체의식의 확장을 기대할 수 있고 그러한 토대에서의 사회적 실천이 올바른 사회변혁을 가져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박 두 규 시인)
    • 지리산문화
    • 문장 속의 지리산
    2022-03-09
  • 지리산 빨치산의 시작과 끝 연대
    지리산 빨치산의 시작과 끝 지리산 파르티잔 이야기는 한반도 해방 국면의 정치적 상황과 민족사적 흐름, 그리고 국민적 정서를 정확히 인식하는 배경에서 다뤄져야 한다. 당시의 모든 항쟁적 사건들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진행된 것들이다. 해방 직전 일본의 패망이 짙어지던 1944년에 미국은 당시 막 시작되던 세계적 냉전체제 국면에서 한반도를 미국의 전초 기지화 하려는 계획을 진행하였다. 그래서 여론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 해방이 되면 어떤 체제의 국가가 건설되기를 희망하느냐는 질문에 자유민주주의국가 14%, 사회주의 국가 70%, 공산주의 국가 7%, 기타 9% 였다. 이에 미국은 해방 후 승전국의 입장에서 38도 선 남쪽으로 들어와 미군정을 시작했다. 북쪽은 소련이 직접 국가운영을 하지 않고 조력자의 입장에 있었던 반면 미국은 여론을 토대로 사회주의 국가 건립을 우려하여 군정으로 직접 남한을 통솔 운영했다. 그러면서 토지개혁과 일제 잔재 청산, 공평한 사회를 꿈꾸던 민족의 흐름을 역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시 조선공산당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46년에 대구철도노조가 깃발을 들고 대구 10월 항쟁이 일어난다. 10월 항쟁은 미군정 반대가 가장 큰 이유였다. 이후 10월 항쟁 수배자들은 산으로 들어가 야산대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파르티잔의 시작이라고 본다. 이후 미군정이 끝날 무렵 1948년 5.10 단선 단정에 반대하는 2.7 구국투쟁이 일어난다. 전국 총파업으로 진행되며 이때도 수배자들이 산으로 들어가며 야산대가 더욱 강화된다. 지역사령부를 두며 체계화 된다. 그리고 이어서 제주 4.3항쟁과 10.19 여순 항쟁이 일어난다. ▶1948년 10월 여순항쟁 이후 김지회, 홍순석, 지창수 등이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 문수골로 들어옴. 48년 11월 이현상 지리산으로 투입 ▶1949년 야산대를 인민유격대로 재편성하여 토벌대와 전투. ▶1950년 한국전쟁으로 8월에 인민유격대는 북한 정규군과 합세하여 작전을 펼침 ▶1951년 남부군 활동 전성기로 열차습격, 은행습격 등, 하지만 12월 들어 본격적인 토벌로 ▶1952년 토끼몰이식으로 대성골로 유인하여 박격포, 공군기 투입으로 빨치산 궤멸. 사살 300명, 포로 250명, 혹은 800여명이 죽었다고도 하는 등, 자료의 부정확 ▶1953년 7월 휴전협정 시 지리산 잔여 빨치산 언급 없음. 이현상 9월 사망 (이현상은 북으로 갈 수도 있었으나 스스로 지리산에 남음. 북에서 김일성의 권력투쟁으로 남노당 출신의 박헌영, 이승엽 등이 모두 처형 당함. 박현영은 여순때 병력노출 혐의 미군스파이로 몰려 죽음) ▶1954년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 전남도당 박영발 사망으로 토벌 종료. 5월 정식 토벌대는 해산하고 지역에서 토벌 계속 ▶1955년 지리산 입산통제 해제 ▶1956년 43명 빨치산 생존 떠돌이 ▶1963년 11월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 총상 입고 체포 -천왕봉 설경(사진 김인호)
    • 지리산문화
    • 문장 속의 지리산
    2022-02-07
  • 오랜 마음 속 어머니, 지리산
    오랜 마음 속 어머니, 지리산 산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스스로 고립된 만큼의 세월이 산의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해마다 수수꽃다리며 때죽나무 같은 꽃으로 무리지어 피어났다 그리하여 지리산 어느 산길에서 동자꽃 한 송이를 만나도 우리는 그 아름다움의 탄식 뒤에 숨어있는 오랜 그리움을 읽어내야 한다 -지리산 동자꽃 / 사진 김인호 지리산은 오랜 역사 속에서 우리를 품어온 산이다. 그 옛날 더 이상 산 아래 세상에서 버틸 수 없었던 사람들이 지리산으로 왔다. 절망의 끝에서 차마 버릴 수 없는 목숨 하나 이끌고 이 산에 들어왔다. 그들은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들어 스스로의 어둠을 풀었고 산은 그들의 어둠을 품어 주었다. 지금도 세상살이에 지치고 힘든 자들이 지리산에 온다. 세상사람 모두가 등을 돌려도 산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오랜 마음 속 어머니처럼 부르지 않아도 항상 먼저 따뜻한 말을 건네주고 품에 안아준다. 그 사무치는 그리움이 깊을 대로 깊어 산 빛 너울이 아프다. * 그래서 우리는 지리산을 어머니의 산이라 부른다. 실제로 그 품이 넓어 3개 도에 걸쳐 있으며 14억 5천 6백만 평이라고 한다. 이 산 속에 나무며 짐승이며 꽃이며 벌레들 그 무수한 생명들이 하나로 어울려 있는 생명공동체가 지리산이다. 그리고 이 지리산 자락 골짜기마다 그곳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과 자본의 폭력과 병든 도시를 외면하고 귀촌한 사람들까지 하나의 지리산이 되어 잘 어울려 살고 있다. 그들은 산이 거느린 어머니의 품성을 배우고 숲의 모든 생명들과 하나로 어울려 산다. 인간의 이기적 산물인 자본의 풍요와 편리함에 묻히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있는 이런 이들이야말로‘지혜智慧로운 이인異人’이며 지이산智異山의 사람들이 아닌가. 지리산은 한자로는 지이산智異山으로 쓰고 지리산으로 읽는다. 지리산의‘지리’한자 표기는 智異, 智利, 知異, 地理, 地利, 地而 등 다양하지만 현재 쓰고 있는 지리산(智異山)이라는 이름은 쌍계사에 있는 국보 제47호 진감선사 대공탑에 보인다. 이 탑의 비문은 신라 정강왕 2년(887)에 최치원이 썼는데 '지리산(智異山)'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리고 고려시대의『삼국사기』나『삼국유사』, 조선시대에 편찬한『고려사』에도 다른 한자 표기와 함께‘지리산(智異山)’표기가 나온다고 하니‘智異山’표기가 그래도 오랫동안 일관되게 쓰인 듯하다. 그리고 특히 불교에서는 지리산을 문수도장으로 부르며 지혜의 문수대성이 이산에 머물며 불법을 지키고 중생을 깨우치는 도량으로 삼았다 하여 지리산의‘지리’는 ‘大智文殊舍利菩薩’에서 智와 利를 빌려 智利山이라 하나 이는 후대에 불가적 입장에서 불린 것이라 보인다. 이처럼 지리산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 어느 상황에서 누가 부르느냐에 따라 다양한 이름들을 가지게 되었다. 지리산은‘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불렸는데『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백두산에서 흘러나온 산맥이 지리산에서 멈추었다 해서 두류(頭流)로 한다고 했다. 또 도교적 입장에서는 봉래산(蓬萊山)으로 불린 금강산과 영주산(瀛州山)으로 불린 한라산과 함께 지리산을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불렀는데 신선들이 산다는 신령한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여겼던 것이다. 이외에도 오행사상과 함께 오악(五嶽)의 개념이 생겼는데 동서남북과 중앙지역을 대표하는 산으로 그 오악 중 지리산은 남악(南嶽)이어서 남악산이라고도 불렀으며, 불복산(不伏山)이나 반역산(反逆山)이라는 이름은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큰 뜻을 품고 명산을 찾아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만 거부하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지리산은 여순사건과 6.25전쟁을 거치며 빨치산의 활동 근거지가 되면서 토벌작전이 벌어지던 시기에는 좌익과 우익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적구산(赤拘山)이라고도 불렀으니 지리산은 세파에 흔들리며 많은 이름들을 남기게 되었다. * 그 옛적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나 고승대덕의 길을 가려는 이들, 그리고 도망쳐 숨어들어온 노비, 살인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저자거리의 사람들, 혹은 동학 이후 성을 바꾸고 숨어든 자들, 이런저런 사람들이 제각기 사연 하나씩 가지고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온 곳이 지리산이었다. 그리고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 좌우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빨치산이 되었고 하나의 조국을 꿈꾸며 목숨을 의탁한 곳이 지리산이었다. 지리산은 그렇게 어느 자식 하나 버리지 않고 모두를 품는 어머니였다. 해방 이후 지리산에는 빨치산의 역사가 강하게 새겨졌다. 그 시절, 빨갱이 가족이라는 것 때문에 시달리다가 더는 견딜 수 없어 산으로 올라온 노인도, 어린 조카도, 남편을 찾아 올라온 아내도, 아내 등에 업힌 간난아이도, 산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모두가 빨치산이 되었다. 그리고 빨치산의 역사는 아직도 살아있는 역사다. 만델라가 27년 옥살이 하고 대통령이 되었을 때 대한민국 교도소에는 30년 넘게 옥살이를 하고 있는 빨치산들이 수두룩했었다. 살을 도려내듯 추웠던 그 겨울 지리산, 토벌대가 올라오면 ‘나무 하나 군인 하나’라고 할 정도로 엄청난 병력이 올라왔다고 한다. 토벌대와 총격전이 벌어지고 도주로를 따라 이동하다 보면 돌고 돌아 그곳으로 다시 돌아오기도 해서 널브러져 있는 토벌대와 동지들의 시신을 만나기도 했다. 꽁꽁 얼어붙은 죽은 동지의 입 속에 남아있던 밥덩이를 꺼내 먹으며 달려야 했던 절망의 시절이었다. 한 달이면 보름도 넘게 굶으며 배고픔과 추위 속에 쫓겨야했고 잠깐 쉬며 앉아 있다 출발하면 움직이지 않는 동지들이 있었다. 어깨를 흔들면 앉은 채로 쓰러지던 벗들, 숨을 멈추는 마지막 순간 산 아래 늙으신 어머니 얼굴이라도 한번 떠올렸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빨치산들은 철저하게 고립되었다. 북으로 올라갈 수도 산을 내려갈 수도 없었다.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그들은 희망도 절망도 모두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지리산만이 그들을 품어주었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남과 북 누구 하나 그들의 생환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그들을 버렸을 때에도 지리산은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 하나 된 조국을 꿈꾸는 일이 그토록 서럽고 사무치는 일이었다. 그런 그들을 끝까지 품어준 것은 지리산뿐이었다. 그들에게 눈보라 몰아치는 지리산은 환한 미소를 짓는 늙은 어머니의 따뜻한 품이었다. * 산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늘 그곳에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역사 속의 시간과 그리움을 데리고 산은 늘 그곳에 혼자 있다. 하지만 언제나 외로운 건 우리다. 우리가 세파에 흔들리며 외로울 때면 산은 늘 푸른 대답을 먼저 보내온다. 다만 우리가 그 오랜 침묵의 답변을 읽어내지 못할 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산처럼 스스로 침묵해보지 못했고 갈등과 대립, 경쟁의 일상 속에서 산의 너그럽고 따뜻한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지리산은 우리 민족의 수천 년 역사 동안 그곳에 있으면서 우리의 모든 아픔과 절망을 안아주고 품어준 산이다. 지리산에 가서 하루라도 그 숲의 숨소리에 자신을 맡기면 번잡한 현실의 고민들을 잊게 하여 스스로의 깊은 고요 속으로 침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리산 순례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존재의 근원적 질문에 대한 현실살이의 바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지리산은 우리가 어리석은 생각으로 현실 속에서 헤맬 때 스스로의 지혜롭고 선한 마음을 깨닫게 해주는 스승 같은 산이다. 피폐해진 몸을 살려내고 잃어버린 자애로운 마음을 회복시켜주는 산이며 현실사회의 바른 역사와 삶에 대한 지향을 잃지 않게 해주는 산이다. 이 모든 것이 지리산이 가진 어머니의 사랑과 자비의 품성으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지리산의 이러한 품성은 모든 것을 품어내고 삭여내어 새살을 만드는, 그렇게 끝없는 생명력을 분출하는데서 생겼으며 그것은 산을 이루고 있는 모든 생명들의‘어울림 삶’에 다름 아니다. 크고 작은 능선과 계곡들의 어울림, 그 속의 작은 숲길과 고라니와 딱따구리와 구상나무나 얼레지 같은 꽃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사람들까지 인드라망처럼 촘촘하게 엮긴 생명공동체가 만들어내는 사랑과 자비의 힘인 것이다. 동과 서가 어울리고 남과 북이 어울리며 온 누리가 하나 되는 세상은 이 모든 생명들의‘어울림 삶’으로부터 비롯되며 그 속에서 진주처럼 만들어진 결정체, 바로 사랑과 자비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지리산은 그런 상징이 되어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끝> 『불광』(2022.1) -지리산 주능선 / 사진 김인호
    • 지리산문화
    • 문장 속의 지리산
    2022-01-06
  • 지리산 둘레길
    성찰을 위한 숲길-지리산 둘레길 온 세상이 초록으로 물드는 봄날, 문득 산과 들 또는 한적한 강둑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한번쯤은 누구나 할 것이다. 도심의 번다한 일상을 빠져나오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의식의 세계 너머에 있는 생명의 본질적 요구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나’라는 생명이 봄이라는 순환적 시간에 순응하려는 몸짓 같은 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만큼 억지를 부리며 사는 생명들도 없다. 막히면 돌아가고 높은 곳으로 역행하지 않고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강물처럼 지구상의 자연과 모든 생명들은 순리대로 살아가지만 유독 인간만이 자연을 거스르고 순리에 역행하며 산다. 어쨌든 우리는 이 화사한 봄날, 주체할 수 없는 생명력의 발현에 순응하기 위해서라도 한번쯤은 자연의 착한 자식이 되어 걸어야 한다. 지리산 둘레길은 태생부터가 좀 다른 데가 있다. 2004년 도법스님이 생명평화탁발순례를 시작하면서 지리산 전체를 한 바퀴 돌았다. 그때 스님은 자본주의 물질문명 속에서 영성을 잃어가는 현대인들이 이 지리산 숲길을 걸으며 참된 자신을 회복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셨다. 그래서 지리산 주변의 사회단체들과 힘을 모아 ‘지리산 숲길’이라는 사단법인을 만들고 산림청과 지자체를 설득하여 둘레길이 만들어졌다. 다시 말하면 지리산 둘레길은 단순히 건강을 위한 산책길이나 관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명상과 성찰을 위한 숲길이며, 이익과 탐욕으로 점철된 자본문명을 벗어나, 자신을 치유하고 정화하며 서로가 존중하고 섬기는 모두가 하나의 생명공동체라는 새로운 문명에 대한 기획에 속한다고 보아야 한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보면 이러한 요구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된다. 둘레길은 지리산 자락 깊이 숨겨져 있는 마을과 마을이 서로 오가던 길이고, 수령 300~600년의 당산 나무들이 곳곳에 있는 길이고, 원촌 총각이 숲속으로 나무하러 가서 탑동 처녀 만나고 오던 숲길이고, 파장 술 한 잔에 취해 넘던 고갯길이고, 삽 들고 물꼬 보러 가던 농로이고, 강바람에 천렵하던 강변길이다. 순박한 산골 사람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퇴적되어 있는 길이고, 삶의 순정성이 풍경으로 박제되어 있는 곳이다. 이렇게 둘레길은 전남, 전북, 경남에 3개 도에 걸쳐 5개 군을 아우르고 있으며 얼추 300km에 이른다. 2012년 3월 현재 16개 구간으로 되어 있으며 앞으로 3개 구간이 완성되면 지리산 둘레 전체가 하나의 길로 연결되는 것이다. (박두규 시인) -지리산 둘레길의 당몰샘
    • 지리산문화
    • 문장 속의 지리산
    2021-12-20
  • 지금은 사라진 하늘 아래 첫 동네
    ☐ 지리산에서 온 편지 지금은 사라진 하늘 아래 첫 동네 박 두 규(본지 편집인) 지리산 북서면 노고단 뒷자락에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심원마을이 있었다. 지금은 뱀사골 초입인 반선마을에서 노고단 성삼재로 해서 구례로 넘어가는 도로로 갈 수 있지만 오래 전에는 이 반선마을에서 계곡을 따라 노고단 쪽으로 한참을 올라가야 심원마을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참으로 궁벽한 곳이어서 집이 서너 채밖에 없었다. 하룻밤을 청하면 자연스럽게 민박이 되었는데 돈 받는 걸 어색해 하며 미안해 할 정도였다. 사람들의 출입이 거의 없는 골짜기였다. 처음에는 약초꾼들이 약초를 채취하며 임시로 거처하다가 겨울이 되면 철수하곤 하던 곳이었는데 차츰 나름의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와 자리 잡게 된 곳이었다. 나는 겨울 등반을 할 때는 피아골로 해서 반야봉에 올라 심원으로 내려가곤 했는데 그 쪽이 지리산 북사면이어서 눈이 녹지 않고 많이 쌓여 있기 때문에 그나마 구례에서는 겨울 지리산의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등산로였기 때문이다(지금은 폐쇄되어 갈 수 없다). 그 때 심원에 가면 묵는 곳이 민선생 댁이었다(그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그 삶을 존중하는 의미로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당시 민선생님은 60대 초로의 나이였는데 본디 강원도 출신이라고 했다. 젊은 시절에는 김대중씨가 강원도에서 활동할 때 그 밑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도 군사정권의 엄혹한 시절을 보내며 이런저런 세파에 휘둘리다가 어찌어찌하여 이곳까지 들어와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창식이라는 이름의 나와 동갑인 아들이 하나 있었다. 당시 우리는 30대 중후반 무렵이었는데 그는 정신지체가 있어서 초등학생 수준의 나이에 머물러 있었다. 작은 키에 볼살이 붙어 있어 어려 보였으나 수염이 까칠까칠하게 돋아 나이를 숨길 수는 없었다. 나는 참으로 순진무구한 그와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심원마을을 갈 때면 반드시 챙기는 것이 있었다. 창식이에게 줄 두툼한 사탕 봉지를 맨 먼저 챙기고 민선생님에게 드릴 미역이며 말린 홍합, 새우 등을 바리바리 싸서 가져가곤 했다. 창식이는 내가 가면 반가움의 첫인사가 ‘사탕 줘!’였다. 그리고 심원은 산중인데다 당시는 차도 없어서 저자거리에 나오기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민선생님에게는 바다에서 나는 건어물 같은 것이 최고의 선물이었다. 창식이와 나는 아궁이에 같이 앉아 불을 때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주로 그가 궁금해 하는 것은 바깥 세상에 대한 이야기였다. 도시의 목욕탕 이야기며 백화점 이야기 등을 하면 귀가 쫑긋해져 들었고, 창식이를 놀리려고 도시의 아가씨들 이야기를 하면 그저 평범한 이야기인데도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하곤 했다. 창식이는 군불을 듬뿍 땐 후 꼭 내 방에 와서 같이 잤는데 사람이 그리웠는지 수염이 거친 얼굴을 내 볼에 비비며 잠들곤 했다. 창식이의 꿈은 부산에 한번 가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부산을 다녀온 듯 했는데 그 기억 하나가 지금껏 바깥세상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끈이었던 것이다. 참으로 내가 본 가장 순수한 영혼 하나가 그 깊은 심원마을에 있었다. 그리고 그 맑은 영혼이 그 나이토록 꿈꾸어 온 것이 부산에 한번 다녀오는 것이라니. 그래, 어쩌면 그것이 인생인 지도 모른다. 평생 부산에 한번 다녀오는 그것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그 간절함이 너무 감동적이고 아름다웠다. 사는 일이 저리도 단순한 것인데, 저리도 소박한 것인데 우리는 욕망에 휘둘려 온갖 걱정과 두려움을 이고지고 살며 좌절하고 절망하며 슬퍼하는지, 그러구러 나이를 먹다 문득 돌아보면 찰나의 한 생인 것을. 인생을 걸만한 간절함도 없이 이런저런 손익계산이나 하며 늙어가는 것인가. 내 머릿속에는 지금도 창식이네 집이 있던 심원의 사계절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나무들이 일제히 연초록 새 잎을 올려 만드는 젊고 푸른 세상, 무성한 녹음의 그늘을 끊임없이 흐르는 힘찬 물소리의 벅찬 생명력, 붉게 물든 환희의 시간들, 순백의 고요에 묻혀 끝없이 깊어가는 구도자의 풍모, 그렇게 지능선의 봉우리들이 첩첩이 이어져 주능선으로 벋어 있는 심원의 지리산은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구례에서 천은사를 지나 성삼재에 이르고, 재를 넘어 심원을 거쳐 뱀사골에 이르는, 지리산을 남북으로 횡단하는 도로가 생기면서 심원은 관광지가 되어 갔다. 번듯한 숙박시설이 생기고 산천어 횟집에 노래방까지 들어서는 어느 즈음 심원을 찾았을 때 창식이네는 이미 어디론가 떠나고 없었다. 어디로 갔을까. 창식이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부산으로 갔을까. 아니면 또 다른 하늘아래 첫 동네를 찾아 갔을까. 마을에 관광객과 피서객들이 붐비기 시작하면서 심원의 수려한 경관은 훼손되어 갔고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자 국립공원 관리공단과 ‘국립공원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이나 ‘지리산 사람들’ 같은 환경단체들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사실 심원마을은 지리산 국립공원 지역의 깊은 곳에 있어서 현행법상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마을이었다. 하지만 약초꾼들의 임시 거처로 사용될 때만 해도 큰 문제가 없었으나 지금에 와서 지리산 깊은 곳에 관광지와 같은 마을이 형성되고 갈수록 도시형으로 발전한다면 심각한 문제임에 틀림없었다. 해가 바뀔수록 문제는 더 심각해질 것이니 지금이라도 어떤 조치가 필요해진 것이다. 그래서 국립공원 관리공단과 시민단체들의 오랜 노력 끝에 정착한 주민들을 설득하고 보상하며 이주시키기에 이르렀고 현재는 마을이 완전히 폐쇄되고 다시 자연으로 복구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끝없는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 거대한 바위나 산과 바다 또한 끊임없이 그 안과 밖에서 변화의 흐름을 타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행성들과 우주 자체도 쉼 없이 변화하고 있으니 변화하는 질서 속에서 예외인 것이 어디 있으랴. 작은 씨앗 하나가 집채만한 느티나무로 변하고 또 언젠가는 소멸하는 것이니 사람의 나고 죽음 또한 그렇지 않은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인생이 무상하다는 말이 오히려 무색하다. 이러한 진리를 나의 현실로 조금만 당겨보면 찰나의 시간 속에서 나는 지금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질투하고 분노하고 평생 돈을 쫒아 다니며 마감하는 인생이 삶의 정답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리산의 심원이라는 공간은 나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남기고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다. 조금 더 세월이 흐르면 언제 이 곳에 마을이 있었으며 순진무구한 노총각 창식이가 군불을 때던 곳이라고 하겠는가. 우리네 삶도 그러할 것이다. 지금 현재야말로 아름다운 추억인 것이지 먼 훗날 누가 있어 나를 호명하며 기억할 것인가. 이 아름다운 세상, 기적 같은 삶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 지리산문화
    • 문장 속의 지리산
    2021-06-0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