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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편지] 고마움은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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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움은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글의 제목은『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라는 책 제목의 패러디다. 이 책은 36년 옥살이를 한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 선생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만델라가 27년 옥살이 하고 대통령이 되었을 때 아직도 대한민국 교도소에는 30년이 넘은 장기수들이 수두룩하였고 선생은 그 중의 한 분이셨다. 하지만 나는 허영철 선생을 민족의 현대사를 정면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역사의 증인으로서보다 인간이라는 종(種)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를 보여준 한 사람으로, 또는 삶 속에서 ‘고마움’이란 진정 무엇인가를 알려준 스승으로, 내 마음 속에는 그렇게 남아 있다.
오래 전 일이다. 어느 늦겨울 전주의 젊은 친구들이 장기수 선생님들을 모시고 구례 지리산 자락으로 나들이 와서 하룻밤 같이 보낸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이틀 동안 내내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그분들의 ‘고마워하는 마음’을 보았다. 맑게 갠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다는 고마움, 이마를 스치는 신선한 바람 한 줄기의 고마움, 그 표정이며 몸짓 자체에 깊게 배어 있는 그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다. 선생의 말투 하나 행동 하나가 티끌만큼의 가식도 없이 너무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고마움이라는 것을 누구라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하기야 36년을 오로지 수행으로만 보낸 세월인데 오죽하랴. 사과 하나를 건네받으며 사과 꽃을 피우게 한 햇볕과 뿌리를 적시게 한 비와 흙과 사과를 건넨 사람의 고마움까지, 사과 하나를 얻기까지에 기여한 세상의 모든 존재에 대한 고마움을 뼛속 깊이 새긴 자의 마음을 보았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겸허한 마음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마워하는 마음은 내 안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자아의 영역에 타자의 영역을 내어준 것이고, 겸허한 마음은 내 안에 타자의 영역이 자아의 영역보다 더 넓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삶 자체가 경쟁이고 살기 위해 경쟁력을 갖추려다 보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기적으로 살게 되고, 내 스스로 경쟁력을 갖춰 이만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의 자만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상대방을 고마워하기 보다는 내가 그만큼 노력해서 경쟁력을 갖춰 얻은 것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타자는 경쟁의 상대요 대립적 존재이지 내 안에서 품어야 할 상대가 아닌 것이다. 우리가 고마워하는 마음과 겸허한 마음을 꾸준히 잃어온 것은 이러한 변화된 일상의 탓이 크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부를 창출하는 것만이 미덕이 되어버린 자본 중심으로 인간의 질서가 재편되면서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마음은 바닥을 치는 상태에 이르렀다. 사실 이 시대에 스스로 겸손해져서 상대를 진정으로 고마워할 줄 알고 낮은 자세를 취하며 사는 이가 얼마나 될까. 나를 내어주고 타자를 섬기는 겸허함은 현대의 일상에서 얼마나 유효한 덕목으로 남아 있을까.
나는 자아의 감옥을 벗어나 타자를 섬기는 선생의 그 텅 빈 마음의 ‘겸허함’을 보며 그것은 분명 36년의 옥살이 명상이 가져다준 깨달음일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게 사는 것이 진리의 삶이요, 나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는 절박함을 우리는 언제나 스스로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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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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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편지] 단 한 명을 위한 간이역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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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명을 위한 간이역 콘서트
‘율촌역’이라는 곳이 있었다. 지금은 폐쇄된 율촌역은 전국의 12개 역사(驛舍)와 함께 문화재청에 의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다. 1930년 전라선이 개통되면서 만들어졌고 폐쇄되기 직전에는 열차가 하루에 2번 쉬었던 곳, 하루 열차 이용자가 다섯 손가락을 넘지 못했다는 초라한 간이역, 폐쇄일이 통보된 그날 그곳 역 마당에서 시노래 콘서트가 있었다. 그것은 지역의 이름 없는 가수와 시인 그리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하는 하나의 기도 같은 거였다. 작고 초라하고 소멸되어가는 것들을 위한 기도를 시와 노래로 하는 콘서트였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사가 아니었기에 우리는 노을이 지는 주위의 편안한 시골 풍경과 잘 어우러질 수 있었다.
이 콘서트는 근대가 형성되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소멸되어 온 것들에 대한 레퀴엠에 다름 아니었다. 과학의 축적과 함께 근대가 진행되면서, 사과가 떨어지거나 강물이 흐르는 모든 자연현상을 수학적으로 계산해내고, 그 계산을 통해 자연을 착취하는 가운데 꾸준히 도태되어온 것들, 작고 힘없고 화폐가치로 환산이 안 되는 것들, 첨성산의 도롱뇽 같은 것들, 이 간이역처럼 끝내는 사라져야 할 것들, 그리고 또 그것들과 똑같은 처지의 사람들까지, 이 소외되고 소멸되는 것들을 위한 콘서트는 간이역 너머의 노을빛만큼이나 아름답고 슬펐다. 나는 이 콘서트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가 삶 속에서 꾸준히 잃어온 ‘가여워하는 마음’을 생각했다. 누군가, 무엇인가 그 대상과의 관계라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상대방의 ‘가여움’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 몸의 어느 구석에 힘겹게 숨 쉬며 남아있을 사랑의 마음, 자비의 마음이 바로 그 ‘가여워하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나는 내게서 버려진 안쓰러운 나를 가까스로 돌아볼 수 있었다.
콘서트의 막바지에 붉은 노을이 지고 막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율촌역에 드디어 하루에 두 번 쉰다는 그 두 번째 기차가 잠깐 멈추고 떠났다. 그리고 그 열차에서 단 한 명의 손님인 작고 꼬부라진 할머니가 내리더니 작은 보따리 하나를 들고 느릿느릿 역사(驛舍)를 빠져 나왔다. 우리는 그 단 한 명의 소중한 관객을 위해 시를 읽고 노래를 불렀다. 할머니 한 명을 위해서 존재할 수 있는 열차, 할머니 한 명을 위해서 열차가 멈추는 간이역, 그리고 할머니 한 명을 위해서 노래할 수 있는 콘서트를 위해서, 근대 이후 줄곧 잃어온 그 ‘가여워하는 마음’을 위하여, 우리는 혼신을 다해 노래했다.
......세상의 작고 가여운 것들의 어머니/ 서로 욕하고 싸우며 스스로 절망하는 것들의 어머니/ 어머니, 따뜻한 저녁밥을 지어놓고 애타게 우리를 찾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노을 속으로 흩어집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그 따뜻한 목소리에 화답할 수 없습니다./ 아직은 어머니의 품으로 달려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나는 강남의 아파트가 부러워 보이고/ 누군가가 앞서 나가면 질투를 하고/ 내 자식만큼은 서울대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그러한 마음 때문입니다./ 세상의 불의와 폭력에는 분노하면서도/ 나의 불의와 나의 폭력에는 한없이 너그럽기 때문입니다......(졸시「어머니, 때죽나무꽃이 피었습니다」부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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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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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 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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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탄잘리의 『요가 수트라』에 대하여
『요가 수트라』는 고대 인도에 난무하던 다양한 요가 철학을 통합하여 총 4장 195절의 수트라로 구성한 짧고 함축적인 요가 경전이다.
‘요가’라는 말은 ‘합일’이라는 뜻으로 제한된 에고 의식(개체의식)을 높은 영적 의식 수준(지고 의식인 전체의식)으로 끌어올려 합일을 이루는, 그래서 궁극의 자유로움(해탈,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수행의 한 방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요가 수행을 통해 몸과 마음과 영혼을 하나로 묶어주는 삼위일체의 조화와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몸의 자세나 호흡법 등의 바디 요가(하타요가)는 이 궁극의 합일을 위해 몸을 만드는 수단이며 마인드 요가와는 다르다. 전통적으로 요가는 의식의 자기 변형을 이루어 깨달음, 자유, 해탈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이라고 보면 된다.
요가 지식은 전통적으로 밀교의 형태로 스승이 제자에게 직접 가르치는 방법으로 전수되었다. 그러다 보니 혼란이 없지 않았는데 약 2500년 전에 파탄잘리(붓다 이후 2~3백년 사람으로 봄)가 『요가 수트라』를 지어 요가를 집대성하면서 요가의 마스터, 요가의 대부라고 불리게 되었다. 파탄잘리는 『요가 수트라』에서, 요가란 늘 움직이고 있는 마음을 고요 속으로 가라앉히는 것이며 그 고요는 유체 이탈이나 황홀경 같은 무의식적 상태가 아니라 완전하게 깨어 있는 의식의 상태라고 말한다. 완벽한 고요함과 완전한 의식으로 현재의 순간에 깨어 있는 그러한 의식 상태가 요가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요가는 우리가 현실에서 깨어 있으면서 보다 큰 의식적 단계에서 작용할 수 있도록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요가 수트라』2장 2~8
►크리야 요가의 목적은 집중하는 힘을 기르고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번뇌의 원인을 제거하는 데 있다.
►번뇌의 원인, 곧 깨달음을 방해하는 다섯 가지 장애물은 무지, 에고의식, 집착, 증오, 그리고 목숨에 대한 애착이다.
►무지는 번뇌의 밭이다. 다른 번뇌가 잠자고 있든지, 요가 수행으로 미약하게 되든지, 억눌려서 중단되든지, 혹은 활동하든지 간에 항상 그의 밭으로써 존재한다.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한 것으로, 깨끗하지 않은 것을 깨끗한 것으로,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참 자기가 아닌 것을 참 자기로 잘못 생각하는 것이 곧 무지이다.
►의식 자체(아트만, 참 자아의 순수의식)와 의식을 반영하는 마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동일시하는 것이 곧 에고 의식이다.
►집착은 쾌락에 머물려고 하는 마음에서 생긴다.
►증오는 괴로움에 따라서 일어나는 마음이다.
위의 말씀은 『요가 수트라』의 2장에 실린 것인데 2장의 전체 구성은 요가의 수행에 대한 장으로 먼저 요가 수행의 첫걸음인 행위의 요가(크리야 요가)에 대해 말한다. 이어서 과거의 생각과 행동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카르마의 잠재적 경향(업, 삼스카라)에 대해 말하며 다음으로 제거되어야 할 괴로움의 원인인 '에고 의식'과 함께 아트만(진아)에 대해서 말한다. 마지막으로는 구체적인 수행법인 아스탕카 요가 8가지를 자세히 설명한다.
이 글에서는 인용한 구절에 대한 생각과 함께 요가 수행의 핵심인 아스탕카 요가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위에 인용한 제2장 2절에서 8절까지에는 요가 수행을 방해하는 번뇌의 원인 5가지를 제시한다. 깨달음을 방해하는 이 다섯 가지 장애물은 무지, 에고의식, 집착, 증오, 그리고 목숨에 대한 애착 등이다. 여기서 무지는 우리의 본성(순수의식)에 대한 무지를 의미하며, 에고를 중심에 두고 에고 의식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무지를 의미한다. 이것은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 나와 참나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의 엄청난 세상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며, ‘나’가 나의 전부라고 알며 살 뿐 ‘참나’에 대한 의식의 확장 자체를 아예 모르고 사는 것이 무지이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번뇌의 근원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생존본능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이미 우리의 의식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그것이다. 이 강력한 두려움의 본능이 사는 동안 끊임없이 번뇌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는 살고자 하는 강한 집착의 본능적인 힘이 아주 집요해서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압도적이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자동적인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자신의 생존과 안위를 가장 먼저 중요하게 생각하는 본능적이고 자동적인 감각이기 때문에 번뇌와 고통의 원인이 된다. 이렇게 파탄잘리는 요가의 수행에서 깨달음을 방해하는 번뇌의 원인으로 불가에서 말하는 탐, 진, 치, 3독(三毒)과 에고와 죽음, 다섯 가지를 말하고 있다.
파탄잘리는 이러한 요가를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번뇌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8가지의 탁월한 처방을 내놓는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을 얻게 해준다는 아쉬탕카 요가이다. 이 요가를 수행하면 몸과 신경계에 누적된 불순함이 깨끗이 정화되고 순수의식(푸르샤)과 현상세계(프라크르티)를 식별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긴다고 한다. 그리고 3단계로 의식의 변형이 오며, 이처럼 물질계(5원소)와 감각기관들도 같은 단계로 변형이 이루어져 완벽한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다만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마음이 관여하지 않으면 아무런 감각적 반응이나 충동 작용도 일으킬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이 이들과 연결되어 작용하지 않는다면 감각기관들이 일으키는 감각적 충동들이 의식에 전달되지 않아 깨달음에 이르기 어렵다.
그 아스탕카 요가는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 부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금지하는 계율인 금계(야마), 행해야 하는 계율인 권계(니야마), 앉는 자세인 좌법(아사나), 호흡을 통해 프라나를 조절하는 조식(프라나야마), 감각에 끌리는 마음을 제어하는 제감(프라티야하라), 마음을 집중하는 응념(다라니), 깊은 명상인 선정(디엔), 아트만에 녹아드는 삼매(사마디) 등이 그것이다. 이 아스탕카 요가 8가지 중 처음부터 5번째까지는 외부적 파트이고 나머지 세 파트는 내부적 파트이다. 좀더 부연하면 첫 번째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사회적 도덕률인 5가지 계율이고(야마), 두 번째는 자신의 완성된 삶을 위해 필요한 5가지 계율이다(니야마). 그리고 세 번째는 명상 수행을 돕기 위한 다양한 몸의 자세를 계발하는 것이다(아사나). 네 번째는 마음의 활동을 잘 컨트롤 할 수 있는 바른 호흡법이며(프라나야마) 다섯 번째는 마음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흩어지게 만드는 감각기관의 활동을 컨트롤하여 의식이 한 방향으로 바르게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프라티야하라). 그리고 여섯 번째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각을 하나로 집중시키는 것이며(다라니), 일곱 번째는 마음이 가라앉아 고요해진 상태에서 바른 의식을 유지하는 것이고(디엔), 여덟 번째는 고요히 가라앉은 마음이 그대로 순수의식으로 머물러 있는 상태(사마디)를 말한다.
이것이 7천 년 전 고대 인도의 시바로부터 시작된 그리고 이후 개인으로 전수되어 오던 탄트라 요가를 파탄잘리가 대중을 위해 8가지로 정리한 아스탕카 요가다. 이러한 수행이 깊어지고 사마디(삼매)의 경험을 조금씩 쌓게 되면, 삶에서 고통을 초래하는 원인들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음을 점차적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의식에 주의를 기울이면 척추를 통해 흐르는 차크라 에너지들(쿤달리니 파워)이 서서히 깨어나고 의식의 가장 깊은 상태에 이르러 몸과 마음이 순수의식 자체를 경험하고 영혼과 하나가 되는 합치(요가)가 마침내 이루어질 것이다. 이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일상의 자신을 섬세하게 들여다 봄으로써 내면의 지혜가 점점 깊어지고 삶의 번뇌를 모두 극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그렇게 일상의 삶 속에서 육체와 호흡을 정화하고 에고의 무지를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순간순간 깨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마음으로 몸과 마음과 영혼의 조화를 이루는 수련을 하며 흔들림 없이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박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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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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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라는 껍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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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라는 껍질
사람들은 대부분 죽을 때까지 두려움이라는 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한 생을 보낸다. 많은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으니, 두렵지 않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런 사람도 잃을 게 하나 더 있다. 그게 바로 목숨이다. 목숨, 태어나는 순간부터 목에 숨이 붙으면서 인생이 시작되고 그 목의 숨을 부지하려고 한 생을 바둥거리다 그 숨이 떨어지는 순간 생이 끝난다. 다시 말하면 숨을 붙이는 순간 두려움이 시작되고 그 두려움은 숨이 떨어져야만 끝난다. 그렇게 두려움은 죽음의 다른 이름이다. 너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살아있는 내내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데리고 살아야 하는 운명이. 그리고 이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포장하고 있는 두려움의 껍질 중 하나가 ‘늙음’이다.
하지만 늙기 때문에 죽음에 이른다는 생각은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의사이며 명상가인 디펙초프라는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은 그렇지 않은데 인간만이 노화현상을 인식하는 유일한 신경계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늘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천 년 된 은행나무는 스스로 늙는다거나 그래서 죽게 된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며 살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두려움이라는 정신적 작용이 없는 상태에서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의 공포 없이 죽음에 이를 수 있다면 인간은 지금보다 훨씬 행복한 존재가 될 것이다. 여행하는 동안 내내 웃으며 즐겁게 보내다 집으로 돌아가듯이, 말하자면 아무런 두려움 없이 소풍을 끝내고 즐거웠다며 하늘로 가는 어떤 시인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인생이라면 정말 행복하지 않겠는가.
늙는다는, 죽음이라는 두려움의 정신적 작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명상이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그것은 주변의 모든 것에 끌려다니는 사고에서 벗어나 역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이끄는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각과 느낌으로 자신의 신체 상태를 바꿀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생명체라고 한다. 노화현상을 인식하는 유일한 신경계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 정신적 상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데 명상은 바로 이런 것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어떤 계기로 아난다마르가 수행공동체를 접하게 되어 십여 년 명상을 해오고 있는데 명상은 고도의 정신적 집중이 필요한 것이어서 그것만으로도 의식이 고양되어 삶의 강한 자신감과 활력을 얻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명상을 통해 마음을 집중하면 몸속에 있는 각각의 세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몸의 세포들은 우리의 생각들을 낱낱이 엿듣고 있어서 그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내 몸이 시간과 함께 쇠퇴해 간다는 생각 대신 시시각각 새로워진다는 신념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인체는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지는데 피부는 한 달에 한 번씩 새롭게 교체되고 위벽은 5일마다, 간은 일주일마다, 골격은 3개월마다 새롭게 바뀐다고 한다. 그러니 몸은 매일 새로워진다는 것을 생각하며 삶은 현재에 고도로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지금 여기’를 산다는 말에 근접한 것이기도 하다. 존재의 근본을 덮고 있는 두려움이라는 껍질을 벗을 수 있는 것은 부귀영화를 뒷받침하는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정신, 마음 하나에 달린 것이다. 불가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박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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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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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의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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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의 겸손
한세상 살면서 훌륭한 참스승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런 면에서 보면 억세게 운이 좋은 편이다. 아직도 살아계시는 세 분의 스승이 계시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일방적인 외사랑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를 내치지는 않으니 고마울 뿐이다. 이 세 분은 살아오며 인연을 맺은 후 마음속으로 늘 본받고 배우고자 애썼던 분들이고 지금도 그러하다. 교사로 지내던 때에 만났던 정해숙 선생님, 자기완성을 위한 수행 과정에서 만났던 칫따란잔아난다 다다지, 그리고 자기 수행과 사회적 실천이라는 삶의 균형감을 가르쳐주신 도법스님이 그분들이다.
이 세 분의 스승 모두 겉으로 보여주는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겸손이다. 그분들의 겸손은 사람들을 만나 그저 자신을 낮추는 그런 겸손이 아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는 그런 겸손도 아니다. 내 말을 아끼고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그런 겸손도 아니며 위선과 가식이 먼지처럼 내려앉아 있는 겸손과는 다르다. 그분들의 겸손은 상대방이 없어도 스스로에게 하는 겸손이다. 자기 자신을 모시는 겸손이고 생명이 있는 것들과 없는 것들까지도 모두 모시는 겸손이다. 세상을 살며 누구에게나 삶의 상처처럼 얻게 되는 작은 가식과 위선까지도 벗어나 본래 모습 그대로 숨 쉬는 겸손이다. 평생을 수행자로 사시면서 저절로 그러하듯 생겨난 겸손이다.
청화스님이라고 계셨다. 불가 쪽에서는 살아계실 때 많은 사부대중이 따랐던 큰스님인데 정해숙 선생님은 이분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 청화스님이 살아계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수행자가 겸손 빼놓으면 뭐 남는 게 있겠나’라고. 생각해 보니 그렇다. 정말 오랜 수행으로 내공이 깊어진 자의 겉모습에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다만 누가 보아도 그냥 평범하면서 겸손하게만 보일 것이다. 길가 어느 구석에 놓여 있는 돌멩이 같은 그런 평범과 겸손 말이다. 내가 마음속으로 모시는 세 분의 스승님들이 그렇다. 그분들은 삶 자체가 수행이기도 하신 분들이고 각자의 분야에서 높은 수행과 함께 세상일을 거침없이 해오신 분들이다. 그런 그분들의 겸손은 오랜 수행 속에서 얻은 ‘탈 에고(脫 ego)’의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풀잎처럼 겸손하라’(Ánanda Vacanámrtam Part 9)는 말이 있다. 아난다마르가의 경전에 나오는 말인데 설명이 없어도 느낌이 강하게 오는 아포리즘 구절이다. 나는 여기서 풀잎을 땅이라는 근원(본성, 진리)에 뿌리내리고 지상의 모든 것을 받아내는 존재로 읽었다. ‘풀잎처럼 겸손하라’는 그런 겸손을 말하며 그것은 결국 모든 수행자가 목표로 하는 탈 에고(脫 ego)의 그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안에서 에고를 지워내고 ‘참나’(true self)에 이르게 된다면 저절로 ‘풀잎처럼 겸손’해질 것이다. 청화스님은 아마도 이 ‘풀잎의 겸손’에 닿은 수행을 이루셨을 것이다.
처음 명상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비속(非俗)이나 비범(非凡)의 무엇을, 어떤 성취를 꿈꾸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니 잘못되어도 많이 잘못된 생각이다. 그것은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끝없이 생겨나는 집착과 그 에고(ego)를 지우는 일이고, 한 생을 살며 매일 군살처럼 달라붙는 위선의 껍질을 벗겨내는 일이며 풀잎처럼 근본에 뿌리내리는 일이다. 바로 스승들의 그 겸손에 이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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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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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m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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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m의 세상
바야흐로 텃밭을 일구는 계절이 왔다. 손바닥만 한 밭이니 괭이로 파고 호미로 골라서 파종하거나 모종을 심는다. 그리고 농약과 비료를 쓰지 않고 퇴비만 뿌려 밭을 일구다 보니 지렁이를 자주 보게 된다. 괭이를 쓰다 보면 나도 모르게 땅속에 있는 지렁이를 놀라게 하거나 상처를 입히게 되는 경우가 있다. 지렁이 편에서 보면 날벼락을 맞은 셈인데 어느 때는 땀도 좀 식힐 겸 지렁이가 다시 땅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몸을 감출 때까지 앉아 쉬며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지렁이나 나나 별반 다를 바 없는 한 목숨이라는 생각에 이르기도 한다. 지렁이가 하루 종일 꿈틀거리며 생명 활동을 하는 땅속 반경이 1m라고 해도 내가 하루 종일 이곳에서 밭을 일구며 보내는 삶의 반경과 무슨 차이가 있을 것인가. 저는 부지런히 저의 세계를 살았다 해도 겨우 1m의 땅속 반경을 기어다닌 것이고, 나 또한 열심히 나의 세상을 살았다 하지만 우주의 한 점인 지구별의 어느 귀퉁이에서 평생을 맴돌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 저는 저대로 나는 나대로 스스로의 하루를 살다가는 객(客)일 뿐이다.
참으로 이런 허접하고 싱거운 생각을 하다 보면 그래도 마음은 충분히 여려져서 조금은 자유로워지기도 한다. 우리는 그야말로 아등바등 죽네 사네 하며 한 생을 살고 있지만 조금만 물러서서 보면 우주의 지구별에 잠깐 손님처럼 왔다가 하룻밤 머물고 가는 것이다. 지렁이처럼 평생 1m의 어두운 땅속 세상을 꿈틀거리다 가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마음도 어느 정도 편해지고 정말 복잡하고 힘든 세상살이가 조금 가벼워지면서 주변의 풍광 또한 아름답고 신비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나는 아무런 뜻도 없고 잡아도 잡히지 않는 물이나 공기와도 같은 처지가 되어, 그 뜬구름 같은 생각만으로도 존재 자체가 벅차올라 눈앞에 펼쳐진 이 구체적으로 눈부신 봄날이 그렇게 경이로울 수 없다. 마른 가지를 비집고 올라오는 초록빛 새잎의 현실에 눈물이 나고, 온 세상을 초록 바다로 만들어 출렁이는 봄 산을 보면 이 비루한 몸뚱어리가 숨 쉬고 있는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고 고마울 수 없는 것이다. 감정이 이 정도 차오르면 푸르릉 날아오르는 감나무의 새 한 마리만 봐도 괜히 서럽고 아무에게나 무엇에게나 손과 발이 다 닳도록 수없이 절을 하고 싶은 심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고마움도 어쩌다 제 감정에 겨워 세상이 만만해지니 그러는 것이리라. 일상 속 또 다른 일상을 보는 일이 항상 그런 것이다. 그래도 사실 나는 늘 그 일상으로 건너가고 싶다. 텃밭의 지렁이가 되어 아무런 뜻 없이 종일토록 1m의 세상을 기어가고 싶은 것이다. 살아야 이승이고 죽으면 저승일 뿐이라는 말이나, 개똥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좋다는 말은 이런 심정에서 나오지 않았나 싶다. 찰나의 한 生인데 권력과 부와 명예를 좇으며 불안하고 분노하며 고통스럽게 보내는 것보다 눈앞의 눈부신 봄날, 존재의 경이로움을 느끼며 설레는 마음으로 살기에도 부족한 세월이 아니겠나.
글을 보내는 오늘, 그렇게 기다리던 윤가의 파면 소식이 왔다. 별의별 추측과 가짜 뉴스들이 난무하는 불신의 사회, 억지와 비상식의 나라가 되어 대혼란에 빠진 대한민국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모두가 지혜롭고 용기 있는 국민 덕분이다. (박두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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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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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독三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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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독三毒
한세상을 살며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감옥을 살다 간다. 어쩌면 죽어야만 그 감옥을 벗어날 수 있다. 한 生을 살며 오직 ‘나’라는 자신만을 살다 가는 것이다. 붓다는 모든 중생은 삼독三毒을 벗어나야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했는데 그 삼독이야말로 나의 감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아니 그것이 바로 내가 만든 그리고 스스로 갇혀 있는 나의 감옥이라고 할 수 있다.
탐貪, 진嗔, 치痴삼독三毒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탐이다. 잘못된 탐심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대통령직 파면을 자초한, 부족해도 너무 부족한 어떤 사람을 보면 그렇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살아야 한다는 존재 욕구를 본능적으로 갖는다. 사람만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본능적인 존재 욕구가 있다. 그 욕구는 탐이 아니다. 탐은 이것을 이탈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나무는 싹이 튼 그 자리에서 햇볕과 물과 바람만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한 생을 살다 간다. 이처럼 모든 생물은 그 한계를 넘지 않고 사는데, 인간만이 그 한계를 넘는 탐심을 가지고 있다. 작금의 자본주의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자본의 토대 속에서 과학기술문명이 진행되면서 많을수록 좋다는 물량주의, 빠를수록 좋다는 속도주의, 나와 나의 이익이 먼저라는 개인 이기주의 같은 자본 이데올로기가 형성되었고 그 속에서 우리는 탐욕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현대인들의 탐욕은 생존경쟁의 삶 속에서 오히려 필요한 것이며 부끄러워할 무엇도 아니라는 듯 당위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탐에 대한 반성과 성찰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탐욕은 물질적인 탐욕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탐욕이 오히려 삶의 균형감을 더 잃게 한다. 힌두의 수행 계율 중에 ‘샨토샤’라는 것이 있다. 자신에 주어진 삶의 조건과 상황이 어떠할지라도 그것에 ‘만족하라’는 계율이다. 우리는 한 생을 살면서 수없이 많은 어떤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고 어떤 삶의 조건에 갇히게도 된다. 멀쩡한 사람으로 살다가 갑자기 암 환자가 되기도 하고 어느날 재산을 잃고 거리에 나앉을 수도 있는 것인데, 살아 있는 이승의 어느 순간에도 ‘만족하라’는 것이다. 살면서 나이를 먹고 어느덧 노인이 되어 있는 자신을 보며 ‘무상無常의 진리’를 조금이라도 느껴본 자라면 이 말을 수긍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숨 쉬며 존재하기만 해도 고맙다고 느끼는 만족의 순간이 있기도 할 것이다. 이것은 만족이 손에 잡히는 것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부터 오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 만족을 물질적인 것에서 찾으려면 불가능하지만, 정신적으로 접근하면 얼마든지 가능하고 손쉬운 것이다. 이것은 포기하고는 다르다. 할 수 없으니까 그냥 현실에 만족한다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탐욕을 절제하는 높은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탐욕에 대한 집착을 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쉬운 일이다. 담배를 끊기가 그렇게 어려운 일이지만 또한 쉽게 한순간에 끊어버리는 사람이 있듯이 진리라는 것은 높고 어려운 것만이 아니라 단순하고 쉬운 것이기도 하다.
이 탐욕을 벗어날 수 있다면 비로소 한 생을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밖에 나와 그 넓은 새로운 세상을 살며 삶의 자유로움과 생의 기쁨과 존재의 고마움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삼독의 하나인 탐貪을 벗는 것이다. (박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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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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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래선림西來禪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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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래선림西來禪林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내소사의 진입로에 있는 전나무숲 중간쯤에 지장암이 있다. 그 암자는 해안 큰스님이 살아계실 때만 해도 ‘서래선림西來禪林’이라고 했다. 암자라기 보다는 그냥 독립된 선방禪房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대학에 낙방하여 내소사에서 재수하고 있었는데 전나무숲을 오가며 지장암의 입구에 작게 쓰여 있는 ‘西來禪林’이라는 팻말이 매우 궁금했다. 서쪽에서 온 참선 숲? 그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서래선림에 첫발을 딛게 된 것이 닭장을 나온 어린 수탁 한 마리의 일탈한 인생 시작이었음을 그때만 해도 알 지 못했다. 후에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그 영화의 선전 포스터를 볼 때마다 나는 서래선림을 떠올렸다. 달마가 동쪽으로 갔다는 것은 그가 서쪽인 인도에서 온 것이고, 붓다의 법을 전파하러 중국으로 간 것이다. 고은의 『선(禪)』이라는 소설을 보면 달마가 동쪽으로 간 이야기를 매우 구체적으로 그려내서 재미있다.
소설을 보면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처음 갈 때 해로를 통해 베트남으로 상륙해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대목이 나오는데, 뱅골만을 벗어날 즈음에 이동 중인 수많은 철새 떼가 폭풍을 피해 달마 일행의 배로 내려앉는 일이 생긴다. 달마는 그 새 떼를 쫓거나 죽이지 말라고 지시한다. 선원들이 그 말을 잘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종료된 후, 배에는 수백 마리의 새들이 죽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 달마는 “저 새들은 늙어서 기력이 다해 죽은 것이다. 다만 늙었어도 포기하지 않았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무언가가 마음을 깊게 질러와 잠깐 호흡이 멈춰지는 대목이다. 우리는 나이 때문에 어떠한 일을 타자로부터 제재 받기도 하고 스스로 포기하기도 한다. 그러는 중에 점점 무기력해지고 죽음의 그늘이 가까이 드리워진다. 이게 일반적인 ‘늙음’에 대한 인식이다. 하지만 ‘다만 늙었어도 포기하지 않았을 뿐이다’라는 말은 강한 생명력을 느끼게 하면서 늙음에 종속되지 않는 생명과 한 존재의 삶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강하게 각인시킨다. 하바드 출신 명상의학자 디팩초프라에 의하면 ‘노화’란 하나의 개념일 뿐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오로지 자신의 생명을 끝까지 발현하다가 소멸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인간이라는 영장류만이 유일하게 생각하는 힘이 있어 늙음이나 죽음 따위를 가지고 고민하고 두려워하며 살고 있는 것이지, 나무는 천년을 살아도 스스로 늙었다거나 죽을 때가 다 되었다거나 하는 생각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다 갈 뿐이다. 죽는 그날까지 생명을 발현하는 즐거움과 기쁨으로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스스로의 이상향을 향한 새들의 자유로운 날갯짓은 늙음과 무관하며 생명을 다하는 그 순간까지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감동적이다.
각설하고 나는 대학 진학을 위한 공부보다는 서래선림에 빠져 살았다. 해안 큰스님께서 우리말로 옮겨 놓은 ‘반야심경’을 끼고 살며 큰스님의 상좌인 혜산스님, 철산스님, 동명스님과도 가까이 지내며 살았다. 급기야 나는 서래선림 코 밑에 있는 민가로 거처를 옮겼는데 그러고 얼마 안 있어 큰스님이 입적하셨다. 그러자 그 많던 사부대중이 모두 떠나고 나만 남았다. 아니, 일지스님이 절을 지키기 위해 서래선림으로 돌아오셨고 그때부터 서래선림의 시절은 가고 지장암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박두규. 시인)
*내소사 설경 (구례들꽃사진반 이현숙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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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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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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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시
인디언들은 1월을, 눈이 천막 안으로 휘몰아치는 달, 호숫물이 어는 달, 등 부족에 따라 다르게 불렀나 보다. 우리 부족은 저마다의 해맞이로 시작하니 1월은 ‘새로운 해가 뜨는 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작만이 아니라 늘 새로움과 설렘으로 일상을 맞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지난해의 비상계엄 사태 이후 지축을 흔드는 엄청난 진동과 혼란이 진행 중이지만 이 또한 ‘새로움’을 창출하기 위한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인도에서는 이 ‘새로움’을 얻기 위해 시바 신을 가장 많이 찾는다고 한다. 인도는 세상의 모든 자연과 자연의 법칙까지도 신이라고 해서 많은 신들이 있는데 그중 브라마는 창조의 신이고 비슈누는 유지의 신이며 시바는 파괴와 소멸의 신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파괴의 신인 시바를 가장 많이 찾을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창조되면 그것을 유지하고 또 그것이 다 하면 파괴와 소멸을 통해 다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는 자연과 우주의 순환구조 속에 있다. 사는 동안 남녀노소, 빈부와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현실의 고난과 어려움은 찾아오기 마련인데 사람들은 이런 고통스런 현실을 파괴하고 싶고 새로운 시작을 갈망하게 된다. 시바 신으로 인해 현재의 고통과 절망을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래야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일상을 살아가는 힘은 ‘새로움’에 대한 갈망에서 나온다. 그래서 새해가 되면 백지와도 같은 깨끗한 이 한해를 어떻게 채워나갈까, 하는 새로움에 설렘까지 더해 분주해진다. 그런데 한해의 벽두에만 이 새로움과 설렘을 맞는 것은 좀 아쉽지 않은가. 똑같은 해가 매일 뜨는데 왜 새해의 벽두에만 그 맛을 봐야 하는가. 진부하기만 한 하루를 매일 새롭게 맞을 수는 없을까. 어느 선사가 쓴 ‘깨달음’이란 시가 있다.
깨닫기 전에는
나무를 하고 물을 길었다
깨달은 후에도
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다
이 시를 보면 깨달음을 얻기 전이나 얻은 후에나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그래서 깨달음은 물을 긷고 나무를 하는 일상의 현실에 있다는 것과 그 일상을 새롭게 보고 또 새롭게 사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옛날에는 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 것이 먹고살기 위한 일상이요, 삶 그 자체였다. 그런데 이 지치고 힘든 현실을 새롭게 살 수만 있다면 세상은 고통이 아니라 마냥 신기하고 즐거울 것이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바깥나들이를 하면 아이들은 쉴 틈 없이 질문을 한다. 어른들에겐 진부하고 힘든 이 세상이 아이들의 눈에는 모든 게 새롭고 궁금한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린아이의 천진함으로 늘 자연과 세상을 새롭게 보고, 매일 새롭게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깨달은 자의 일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마음의 여유도 없이 비상계엄 해제 이후 아직도 안정되지 못하고 어수선하기만 하다. 이런 정국이 얼마나 더 지나야 안정된 일상으로 돌아올지는 모르겠으나, 오래지 않아 어떻게든 진정되면 어떤 ‘새로움’이 다시 시작될 것이 분명하다. 자연의 이치가 그렇다. 국민이 원하는 새로운 대통령으로 행정부가 꾸려지고 국민을 배신하지 않은 2/3 이상의 국회의원들이 있으니 어느 정도 국민의 정서에 부응하는 많은 개혁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한다. 시바가 지금 우리의 혼란을 파괴하여 소멸시키고 있으니 머잖아 ‘새로움’의 세상은 시작될 것이다. (박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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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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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들방과 따오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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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편지」
- 구들방과 따오기 생각
동짓날 산청성심원에서 ‘2024 지리산사람들 이야기 자리’, ‘지리산사람들 운영위원회’ 1박2일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니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구들방이 얼음장처럼 싸늘하다. 웬만큼 불을 때서는 방이 뎁혀질 것 같지 않다. 장작을 좀 더 밀어 넣고 불 앞에서 생각한다.
사람의 관계도 영락없다. 영원할 것 같던 사이가 작은 오해로 소원해지고 내버려두니 그만 싸늘해지고 말았다. 다시 사이를 뎁혀보자 마음 내보지만 예전 같지 않다. 구들방이나 사람이나 온기가 식지 않도록 꾸준히 군불을 때야 쓸일이다.
지난주에는 빚을 하나 갚은 것 같아 마음이 조금 가볍다. 최근에 펴낸 ‘나를 살린 풍경들’ 책표지 추천글을 써준 복효근시인에게 어떻게든 글빚을 갚아야겠는데 시간이 맞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남원 운봉에 날아온 따오기 이야기에 마음이 맞아서 함께 운봉에 가 따오기를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까지 이어졌다. 따오기가 내 글빚을 갚아주기 위해 먼먼 시간으로부터 날아와 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어릴 적 동산 너머 학교를 함께 다녔던 금옥이, 정옥이, 병옥이 .. 산골마을 친구들 이름 옥이 같은 따오기! 날개를 펼쳐 꿈속 저편에서 날아와 꿈속 이편으로 날아가며 마법처럼 핑크빛 세상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새, 따옥따옥 따오기야! 메리크리스마스!!
#따오기 #구들방 #복효근시인 #글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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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