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5(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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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문화 검색결과

  • 단 한 명을 위한 간이역 콘서트
    단 한 명을 위한 간이역 콘서트 ‘율촌역’이라는 곳이 있었다. 지금은 폐쇄된 율촌역은 전국의 12개 역사(驛舍)와 함께 문화재청에 의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다. 1930년 전라선이 개통되면서 만들어졌고 폐쇄되기 직전에는 열차가 하루에 2번 쉬었던 곳, 하루 열차 이용자가 다섯 손가락을 넘지 못했다는 초라한 간이역, 폐쇄일이 통보된 그날 그곳 역 마당에서 시노래 콘서트가 있었다. 그것은 지역의 이름 없는 가수와 시인 그리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하는 하나의 기도 같은 거였다. 작고 초라하고 소멸되어가는 것들을 위한 기도를 시와 노래로 하는 콘서트였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사가 아니었기에 우리는 노을이 지는 주위의 편안한 시골 풍경과 잘 어우러질 수 있었다. 이 콘서트는 근대가 형성되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소멸되어 온 것들에 대한 레퀴엠에 다름 아니었다. 과학의 축적과 함께 근대가 진행되면서, 사과가 떨어지거나 강물이 흐르는 모든 자연현상을 수학적으로 계산해내고, 그 계산을 통해 자연을 착취하는 가운데 꾸준히 도태되어온 것들, 작고 힘없고 화폐가치로 환산이 안 되는 것들, 첨성산의 도롱뇽 같은 것들, 이 간이역처럼 끝내는 사라져야 할 것들, 그리고 또 그것들과 똑같은 처지의 사람들까지, 이 소외되고 소멸되는 것들을 위한 콘서트는 간이역 너머의 노을빛만큼이나 아름답고 슬펐다. 나는 이 콘서트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가 삶 속에서 꾸준히 잃어온 ‘가여워하는 마음’을 생각했다. 누군가, 무엇인가 그 대상과의 관계라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상대방의 ‘가여움’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 몸의 어느 구석에 힘겹게 숨 쉬며 남아있을 사랑의 마음, 자비의 마음이 바로 그 ‘가여워하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나는 내게서 버려진 안쓰러운 나를 가까스로 돌아볼 수 있었다. 콘서트의 막바지에 붉은 노을이 지고 막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율촌역에 드디어 하루에 두 번 쉰다는 그 두 번째 기차가 잠깐 멈추고 떠났다. 그리고 그 열차에서 단 한 명의 손님인 작고 꼬부라진 할머니가 내리더니 작은 보따리 하나를 들고 느릿느릿 역사(驛舍)를 빠져 나왔다. 우리는 그 단 한 명의 소중한 관객을 위해 시를 읽고 노래를 불렀다. 할머니 한 명을 위해서 존재할 수 있는 열차, 할머니 한 명을 위해서 열차가 멈추는 간이역, 그리고 할머니 한 명을 위해서 노래할 수 있는 콘서트를 위해서, 근대 이후 줄곧 잃어온 그 ‘가여워하는 마음’을 위하여, 우리는 혼신을 다해 노래했다. "......세상의 작고 가여운 것들의 어머니/ 서로 욕하고 싸우며 스스로 절망하는 것들의 어머니/ 어머니, 따뜻한 저녁밥을 지어놓고 애타게 우리를 찾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노을 속으로 흩어집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그 따뜻한 목소리에 화답할 수 없습니다./ 아직은 어머니의 품으로 달려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나는 강남의 아파트가 부러워 보이고/ 누군가가 앞서 나가면 질투를 하고/ 내 자식만큼은 서울대에 들어가기를 바라고/ 가진 자 앞에서는 굽실거리고, 없는 자 앞에서는 우쭐대는/ 그러한 마음 때문입니다./ 세상의 불의와 폭력에는 분노하면서도/ 나의 불의와 나의 폭력에는 한없이 너그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머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머지않아 세상의 모든 생명들 / 그리고 만나는 누구에게나 고마움의 절을 할 수 있을 만큼/ 내 마음이 충분히 가난해졌을 때/ 그 때 어머니의 부름에 대답하겠습니다./ 따뜻한 밥 한 그릇 지어놓고/ 제가 먼저 어머니를 부르겠습니다./ 저녁노을 붉은 그리움으로 /어머니를 부르겠습니다./ 어머니." (박두규 시「어머니, 때죽나무꽃이 피었습니다」부분) -때죽나무꽃
    • 지리산문화
    • 지리산 편지
    2024-05-08

이야기 검색결과

  • 흙에서 나고 흙에서 살다 흙으로 돌아가는 삶
    흙에서 나서, 흙에서 살다, 흙으로 돌아가는 삶 안철환(전통농업연구소 대표) 흙에서 나다 하나님은 왜 인간을 흙으로 만드셨을까요? 더럽고 비만 오면 허물어질 흙으로 말이죠. 만약에 금으로 만드셨다면 평생 가난하지 않게 살 수 있고 대리석으로 만드셨다면 얼마나 멋진 모델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참 이상하죠? 그렇지만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겁니다. 금과 대리석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지 않잖아요. 반면 흙에는 무궁무진한 생명들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주의 별만큼이나 있을 미생물이 그것이고요, 그 말고도 지렁이를 비롯 작은 벌레와 두더쥐 같은 작은 동물이 흙에 의지해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몸에도 세포 수보다 더 많은 미생물이 살고 있고 나쁜 놈이긴 하지만 옛날엔 대장에 회충 같은 작은 동물도 살고 있었죠. 어쩌면 흙과 우리 몸은 비슷한 점이 의외로 많습니다. 우리 몸에 없어선 안되는 피도 흙에서 왔답니다. 바로 철이죠. 피의 주성분인 헤모글로빈이 철로 되어 있잖아요? 빨간 피의 색은 바로 산화된 철의 색깔이죠. 철은 지구 어디에나 고르게 있답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흙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은 흙에서 싹이 나는 걸 보고 떠올렸을 겁니다. 봄만 되면 길고 추운 겨울 동안 죽어 있던 생명들이 흙 틈을 비집고 올라오죠. 옛날 사람들에겐 아주 신기한 일이었을 겁니다. 사실 저도 우연히 심은 배추씨가 3일만에 땅 속을 비집고 올라와 싹을 틔우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그에 미쳐 농사를 짓게 되었어요. 씨가 싹이 트는 건 저에게 더 이상 과학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이었어요. 속으로 그랬지요.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사실 기독교만이 아니라 인류의 초기 종교나 신화나 전설에선 흙과 대지를 생명의 어머니로 여겼습니다. 흙으로 인간을 빚고선 하나님은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저는 그 숨을 씨앗으로 해석하지요. 흙에다 씨앗을 심은 겁니다. 그리고 봄에 싹이 올라오듯 인간(생명)이 움터 올라온 거지요. 그럼 흙이 어떻기에 수많은 생명을 품고 낳을 수 있을까요? 저는 흙 속에 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사막의 흙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물이 없어서입니다. 그렇지만 물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생명이 탄생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작용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하늘의 작용은 불입니다. 그렇습니다. 물과 불이 만나야 생명이 나옵니다. 어떻게 만날까요? 바로 바람입니다. 하느님의 숨이죠. 물은 아래로 향하고 불은 위로 향하려 하죠. 그러면 만날 수가 없습니다. 바람은 하늘이 불의 기운을 아래로 향하게 합니다. 그리고 땅 속의 물을 위로 끌어올리는 작용도 합니다. 과학으로 말하면 베르누이 법칙, 유체역학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저 어릴 때는 모기약을 입으로 불었어요. 티(T)자처럼 생긴 빨대를 모기약이 든 병에다 꽂아 한쪽에서 훅~ 하고 불면 압력의 차가 생겨 병 속의 모기약이 위로 빨려지고 반대쪽 빨대 구멍으로 분사되어 나아가죠. 세게 불려고 큰 숨을 들이마시다간 모기약이 내 입으로 쳐 들어오는 낭패를 겪기도 했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부는 바람은 땅 속으로도 들어갑니다. 태풍처럼 센 바람은 흙을 날려 버리지만 봄바람처럼 살살 부는 바람은 땅 속으로도 스며 들어 숨길을 만들고 그길 따라 물길도 만들어집니다. 그 물길 따라 드디어 땅 속에서 올라온 물은 바람 따라 내려온 하늘의 불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물과 불이 만날 때는 회오리처럼 만납니다. 그 형상을 표현한 게 태극 마크입니다. 빨간 것은 불이고 파란 것은 물입니다. 물고기처럼 머리와 꼬리가 있어 불의 머리는 땅을 향하고 물의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있죠. 그렇게 서로 기운을 받아 불의 머리는 싹을 만들어내 다시 하늘로 향하고 물의 꼬리는 뿌리를 만들어내 다시 땅으로 향합니다.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물론 싹을 올리고 뿌리를 내리는 것은 식물이겠지요. 사람이 어떻게 식물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못 움직이는 것이 식물의 본질이 아니라 늘 하늘과 땅과 소통하는 것이 식물의 본질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러면 인간도 식물처럼 살 수 있습니다. 늘 머리는 하늘과 소통하고 발은 늘 땅과 소통하는 삶 말이죠. 이것이 저는 하느님이 인간을 흙으로 만든 이유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늘의 기운을 넣어 흙으로 빚었으니 하늘과 소통하고 흙과 소통하며 살라는 것이죠. 흙에서 살다 흙에서 났으니 흙에서 살아야겠죠? 그럼 어떻게 하는 게 흙에서 사는 걸까요? 말 그대로 흙을 밟고 살면 됩니다. 간단하죠? 그런데 그게 어려워진 게 지금의 복잡한 우리네 삶입니다. 귀농운동을 하면서 저는 그랬습니다. 귀농하기가 이민 가기보다 어렵다고요. 그렇다고 귀농해서, 땅을 샀다고 해서 흙만 밟고 살면 흙의 삶이 되는 것일까요? 흙을 밟더라도 하늘과 소통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현재로는 그것에 가장 가까운 삶이 농사입니다. 지금은 고인이신 신영복 교수님은 농사를 공부와 같다고 했습니다. 한자 문화권인 한중일 나라 중에 공부(工夫)를 학습의 의미로 쓰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습니다. 일본에선 학습을 면강(勉强)이라는 한자로 씁니다. 중국에서 공부는 쿵푸입니다. 무예죠. 단련한다는 의미에서는 상통합니다. 공부(工夫) 글자의 상형은 대장간의 모루(工) 위에 불로 달군 쇠덩이를 대장장이(夫)가 망치로 두드리는 모습입니다. 두드려 단련해서 목적한 모양을 이루는 것이니 공부의 뜻 답죠? 그런데 왜 농사를 공부와 같은 일이라 했을까요? 단련해서 목적을 이루는 뜻이 농사에도 있다는 걸까요? 신영복 교수님의 또 다른 설명을 이어가보겠습니다. 교수님은 공부를 머리에서 시작해 가슴을 거쳐 발로 가는 여행이라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보고 공(工)의 뜻을 딱 떠올렸습니다. 공(工) 글자에서 위의 일(一)자는 하늘입니다. 머리와 맞닿아있지요. 머리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하늘의 뜻을 말합니다. 어떤 면에선 이론이자 말씀(Logos, 道)입니다. 가슴은 곤(丨)으로 사람이자 따뜻한 열정이며 실천입니다. 이론은 따뜻한 마음으로 실천해야 하는 겁니다. 발은 공의 아래에 있는 일(一)자로 땅이자 사람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을 뜻합니다. 하늘의 뜻이 사람의 실천을 통해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흙의 입장에서 보면 하늘의 뜻이 농부의 실천을 통해 흙에서 구현되는 것입니다. 비로소 흙의 삶이 하늘의 뜻과 만나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하늘엔 길이 있고 땅엔 흐름이 있습니다. 하늘의 길은 도(道)입니다. 도는 관념적인 게 아닙니다. 태양의 길은 황도이고 달의 길은 백도이며 지구의 길은 적도입니다. 덧붙여 목성을 비롯한 태양계 오행성의 길이 있으며 우주 전체의 별자리들도 길이 있지요. 땅의 흐름은 물과 바람입니다. 하늘의 길처럼 정해져 있지 않지만 흐름이 있고 이치가 있습니다. 천문지리(天文地理)라고 하죠. 별들의 길이 무늬(文)를 만들고 땅의 흐름이 이치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의 도가 땅의 흐름과 만나 비로소 대지에 우주만큼 무수한 생명의 세계를 열게 됩니다. 흙의 생명의 세계, 곧 토양 미생물의 세계는 인간이 아직도 5% 정도밖에 밝혀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주만큼이나 미지의 세계입니다. 특히 살아있는 흙에는 무궁무진한 생명의 세계입니다. 흙의 미생물 중에 흙을 살아있는 생명의 세계로 만드는 것으로 방선균이라는 게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항생제는 바로 방선균이 내뿜는 냄새에서 추출한 것입니다. 그러나 화학적으로 만든 항생제는 부작용이 있지만 방선균의 냄새에는 부작용이 없지요. 더구나 방선균의 냄새에는 항우울제 작용이 있다니 행복약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흙에서만 살아도 병원이 필요없고 스트레스가 발 붙일 곳이 없습니다. 에덴 동산, 유토피아, 샹그릴라, 무릉도원이 별거 아닌거죠. 흙이 이렇게 살아있으려면 하늘과 소통해야 한다고 했죠. 그 하늘이 알 수 없는 도(道)라고 하면 황당하지요. 하늘과 소통하는 구체적인 모습은 탄소와 질소의 순환입니다. 날씨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게 크게 보면 기후입니다. 날씨는 물과 바람의 작용입니다. 기후와 날씨는 태양과 달과 별들의 영향을 받지요. 아무튼 오늘날 기후위기는 바로 이 탄소와 질소의 순환에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땅으로 가고 싶어하는 탄소는 하늘에 정체되어 있고 하늘로 돌아가야 할 질소는 땅에 과잉되어 흙과 물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질소는 탄소가 땅으로 돌아가는 데 도움을 줍니다. 미생물이 지표상의 탄소들을 땅으로 돌아가게 하는 주역인데 미생물의 먹이이자 에너지인 질소가 꼭 있어야 합니다. 또 식물은 질소가 주성분인 엽록소를 통해 대기의 이산화탄소를 고정해 뿌리에 저장을 해둡니다. 바로 광합성입니다. 땅 속에서 유기물로 잘 저장된 탄소는 질소를 가둬두는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식물이 먹을만큼 내어주어 질소의 순환을 돕지요. 과잉된 질소가 그대로 용출되어 물을 오염시키고 땅을 망가뜨리는 일을 예방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공(工)의 뜻을 해석할 때 일방통행만 얘기했습니다. 하늘의 뜻이 땅으로 향하는 것만 말한 거죠. 사실 반대방향도 일어납니다. 땅의 좋은 기운이 하늘을 이롭게 할 수도 있고 나쁜 기운이 하늘을 노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기후위기는 후자에 속한다 할 수 있겠죠. 그럼 어떻게 하면 하늘을 이롭게 하고 어떻게 하면 하늘을 노하게 할까요? 바로 앞에서 흙의 삶을 농사짓는 일이라 했지요. 그런데 사실 지금의 기후위기와 흙의 삶을 왜곡시킨 원조는 바로 농사입니다. 농사로부터 잉여곡식이 생기니 소유와 독점이 생기고 빈자와 부자가 생기고 계급과 국가가 생기고 급기야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했어요. 그 뿐입니까? 붙박이 삶으로 같은 땅을 지속적으로 수탈하고 숲을 파괴해 자연환경의 면역력이 감퇴하여 역병이 퍼집니다. 기후위기 같은 재앙이 오면 더욱 위기관리 능력이 고갈되어 피해는 급증합니다. 사실 농사가 아니더라도 기후위기는 주기적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빙하기 소빙하기 간빙기 온난기 등 기후는 항상 변화합니다. 농사의 삶이 기후 변화에 대응력을 떨어뜨리고 기후위기를 더 부추기는 것이죠. 인류는 농경사회로 들어서면서 몇 가지 삶의 중요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채소와 과일, 견과류 중심의 먹을거리에서 곡물 중심의 먹을거리로 변화한 게 제일 큰 변화입니다. 사실 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들어선 중심엔 곡물이 있었습니다. 인류가 농사짓기 시작했다는 것은 곡물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곡물 중심의 먹거리 변화는 먹거리 다양성이 줄었다는 뜻이고 미네랄 섭취는 줄고 단백질과 탄수화물 섭취는 증가했다는 뜻이 됩니다. 에너지 섭취는 증가했을지 모르지만 면역력은 분명 감퇴되었을 겁니다. 역병이 농경의 산물이라는 근거입니다. 붙박이로 몰려 사는 삶이 더 역병을 부추겼을 겁니다. 곡물 중심의 농사는 필연적으로 단작(광작)과 연작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더욱 필연적으로 토양의 침탈과 숲의 파괴로 이어집니다. 단작으로 인한 식량의 증대는 인구수의 급격한 증가로 이어지지요. 단작 농사는 고대엔 노예제를 낳고 현대에 와서는 자본주의를 낳고, 고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전쟁을 일상화했습니다. 주기적으로 오는 기후위기는 더욱 폭발력이 커지고 주기도 빨라집니다. 인간이 땅을 망가뜨려 하늘을 더욱 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농사를 잘 지으면 땅을 살릴 수도 있고 그러면 하늘을 이롭게 할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이런 농사는 앞의 농사와 다릅니다. 단작과 연작이 아닌 혼작과 윤작을 짓고, 혼작과 윤작은 숲에도 적용되어 숲을 파괴하지 않고 숲과 공생하며 곡식농사만 하는 게 아닌 채소와 과일농사도 짓습니다. 뿐만아니라 농사만 짓는 게 아니라 구석기 채집의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들에선 냉이와 쑥을 캐고 산에선 취와 곤드레를 캡니다. 갯벌에선 조개를 캐고요. 그런 사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있어도 매우 미미한 것에 불과할 것이라 폄하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류 문명사회는 분명 단작 중심의 농경을 했지만 지구 전체로 보면 소수였습니다. 대부분의 인류는 적어도 근대까지 흙의 삶을 살았습니다. 소수의 문명사회가 일찍이 고대부터 문명을 발달시켰다지만 그 말을 뒤집 보면 일찍부터 전쟁을 하고 숲을 파괴하며 대지를 침탈하고 선량한 백성과 소중한 뭇 생명을 수탈해 왔다는 뜻입니다. 그런 나라들 중심으로 역사가 쓰여졌습니다. 그러니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그만큼 평화롭고 소박한 흙의 삶을 살아 온 것입니다. 역사로 기록할 것도 없고 기록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소위 근대화가 늦었거나 실패하여 소위 빈곤 국가와 지역들입니다. 그렇지만 그 면적은 지구 대부분에 걸쳐 있었어요. 아프리카 원주민, 북남미 인디언, 호주의 에보리진들 뉴질랜드의 마오이족 , 남아시아 및 남태평양 폴리네시안, 북극의 이누이트인 및 시베리아 냉대지역 원주민들이 그들입니다. 그 중 특히 남미 아마존 숲을 지켜 온 원주민 얘기가 감동적입니다. 열대 우림지역의 흙이 비옥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비가 지력을 빼앗아 강 하류 온대지방으로 옮겨 놓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부자 나라들이 이 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것도 자기들이 잘 나서 부자가 된 게 아니라 이들 열대 지역 덕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아마존 숲은 좀 달랐습니다. 생태학자들이 아마존 땅의 지력을 조사해보니 의외의 비옥한 땅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도 어쩌다 생긴 특이한 지역이 아니라 자그마치 아마존 전체 중 약 12%에 육박하는 거대한 규모의 면적이었습니다. 처음엔 미스테리라고만 봤다가 자세히 조사해 보니 그것은 다름아닌 농경지라는 사실을 알고는 더욱 놀랐죠. 겉으론 보기엔 농경지가 아니었어요. 그냥 숲이나 다름없었죠. 그런데 자세히 조사해보니 숲을 파괴하지 않고 숲에 맞게 농사지은 것입니다. 당연히 농부는 원주민이었습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화전입니다. 화전은 숲의 파괴 현장이 아닙니다. 화전을 일구어 2~3년 농사를 지으면 다시 지력이 살아날 때까지 방치합니다. 나무에 불을 질렀기 때문에 숲을 파괴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넓게 보면 그 공간은 숲의 완충지대입니다. 숲이 너무 우거지면 빛도 들어가지 않아 숲 속은 생명이 살기 힘듭니다. 산불에도 위험하고요. 그래서 저는 인간이 이용하지 않아 우거진 숲을 비만병 걸린 숲이라 얘기합니다. 그런데 아마존 숲을 보전하기 위해 원주민을 내쫓고 있습니다. 그리곤 대규모의 단작 농장을 만들기 위해 숲을 파괴합니다. 하늘이 노하지 않을 수 없지요. 참으로 개탄스런 일이지만 그래도 아직 우리 주변엔 이런 지역과 사람들이 그 명맥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게 희망입니다. 우리나라도 비교적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살아있는 흙의 문화와 삶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급속히 사라지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희망의 불씨는 남아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흙의 삶이고 그것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말한 혼작 윤작의 농부, 곧 소농(小農)의 삶입니다. 그리고 이 소농은 신석기 농경의 산물인 면도 있지만 구석기 채집문화의 연속적 발전 형태인 면에 저는 더 주목합니다. 그런데 귀농귀촌하기가 이민가기보다 어렵다고 푸념했듯이 도시민이 당장 소농의 삶을 선택하기는 만만치 않습니다. 잘못하면 넓디넓은 태평양 바다에 오줌 한 방울 더하는 정도에 불과할 우려가 있지요. 저는 그래서 도시농부의 삶을 권합니다. 사실 흙의 삶은 도시가 더 절실합니다. 서울시의 경우 유엔이 권장하는 콘크리트 피복율 20%를 넘어 50%나 된답니다. 그것도 외곽을 둘러싼 산들을 제외하면 피복율이 80% 넘는다고 합니다. 도시의 흙을 살리는 일은 기후위기 시대에 절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힘든 귀농귀촌만큼은 아니어도 도시농부의 삶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도시엔 땅도 부족하거니와 콘크리트를 거둬내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도시농업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먹거리 운동입니다. 참 먹거리를 찾는 운동은 흙의 삶을 복원하는 간접적인 운동이 될 겁니다. 아마 도시민이 가장 접근하기 쉬운 운동이 될 것이고 나아가 흙을 복원하는 강력한 운동이 될 수 있지요. 그럼 참 먹거리는 무엇을 말할까요? 하늘의 뜻을 담아 대지에 구현하고 그렇게 살린 흙은 다시 하늘을 이롭게 하는 먹거리입니다, 이런 먹거리에 가장 근접한 것은 소농의 먹거리이고 로컬푸드, 곧 지역먹거리이며 토종 먹거리이자 친환경 먹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용적으론 육식을 최소화하고 채식, 그것도 재배한 채소 외에 야생에서 절로 자라는 거친 자연산 채소들, 밥은 백미를 지양하고 깎지 않은 곡식들이 그나마 흙을 덜 수탈한 먹거리들이라 봅니다. 앞에서 공부를 정의할 때 신영복 교수의 얘기를 소개했죠. 그 중 마지막으로 소개할 게 있는데 아주 놀라운 얘깁니다. 바로 달팽이도 공부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공부는 공자님 같이 머리 좋은 군자(엘리트)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들의 존재 형식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달팽이도 공부한다고 역설한 것이죠. 어느 날 저희 농장 옆의 산에서 하루종일 망개버섯을 쳐다보며 면벽수도하는 두꺼비를 발견했습니다. 아침 9시 쯤 처음 발견한 분이 그 때부터 제게 보여준 오후 4시까지 꼼짝않고 그러고 있었답니다. 아는 곤충박사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망개버섯에 자기가 먹을 곤충이 내려 앉기를 기다리는 중이랍니다. 그래서 알게 되었습니다. 달팽이도 공부한다는 말을요. 두꺼비도 하루종일 공부하고 있던 겁니다. 먹거리를 얻기 위한 인내 과정이 공부라는 거지요. 어떻게 보면 공부의 시작은 먹거리 공부이고 공부의 완성도 먹거리 공부일 겁니다. 귀농하지 않고 도시농부도 아닌 그냥 도시의 소비자일지라도 한계는 있겠지만 흙의 삶을 간접적으로 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바로 먹거리 공부입니다. 흙에서 나오고 흙을 살리며 결국 흙으로 돌아갈 먹거리를 먹는 일일 겁니다. 흙으로 돌아가다 죽으면 다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지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흙으로 돌아가 좋은 거름이 되어야 할 몸이 에너지를 소모해 태워져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마니 말이죠. 저는 웬만하면 매장하기를 권합니다. 거름이 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거죠. 물론 모든 매장이 다 흙으로 돌아가는 좋은 방식이라 보진 않습니다. 저는 제일 좋은 매장 형태는 밭에다 모시는 것이라 봅니다. 묘비도 필요없고 돌로 성역화할 일도 없습니다.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만 남아있을 봉분이면 충분하죠. 결국 산소자리는 다시 밭으로 완벽히 돌아갑니다. 요즘은 너무 죽음을 멀리하는 문화가 자리잡았습니다. 원래는 늘 죽음이 우리 옆에 있었지요. 그래야 삶이 경건하고 신중하며 소중해집니다. 죽음은 피할 수가 없지요. 그렇다면 죽음을 삶의 한 과정으로 이해하고 삶은 죽음으로 가는 여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삶도 죽음의 한 과정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태어나고 늘 죽는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태어나고 밤에 죽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또 태어나는 겁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이 이걸 말하는 것이라 저는 봅니다. 웰 빙(well-being)을 주 이슈로 퍼진 친환경유기농 운동이 저는 늘 아쉬웠습니다. 거기엔 흙이 없어요. 내 건강에 좋은 것인가 아닌가만 있죠. 이젠 웰다잉(well-dying)을 주제로 했으면 합니다. 단지 편안한 죽음이 아닙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말하는 거죠. 먼저 웰빙에서 말하는 건강을 살펴보죠. 건강을 정의한다면 아프지 않은 상태, 에너지가 넘치는 상태, 늙어 회춘하는 능력 등을 말할 겁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정의하지 않습니다. 건강이란 나이에 따라 변화하는 몸과 마음에 적응하는 능력이라고 저는 정의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늘 아픕니다. 아프지 않으면 로봇이죠. 에너지는 젊은 한 때 넘치는 거지 늙어서도 넘쳐 늦둥이 나을 정도로 회춘한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일 겁니다. 그래서 아프지 않은 게 건강한 게 아니라 아픈 것에 적응하는 것이 건강한 것입니다. 이것이 깊어지면 죽음에도 적응할 수 있을 겁니다. 늙는다는 것도 추한 일이 아닙니다. 토종 구하러 시골 구석을 돌아다니는데 어느 마을에 갔더니 늙은호박을 익은호박이라고 부르는 걸 봤어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지요. 늙는다는 것은 점점 흙과 하나되는 과정일 때 익는 과정이라 생각해봅니다. 콘크리트에 사느라 흙과 멀어진 늙은이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역합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흙의 무수한 항생 작용은 늙은이의 냄새를 구수한 익은 냄새로 바꿔줍니다. 옛날엔 메주를 띄울 때 가장 따뜻한 방에 두었습니다. 그 방엔 그 집의 제일 어른이 주무시죠. 메주 띄워주는 고초균(바실러스)은 노인의 냄새를 중화시켜주고 노인의 냄새는 메주를 더욱 구수하게 익게 해 줍니다. 구들방 데우는 장작 태우는 연기 냄새도 노인의 냄새를 중화시켜줍니다. 살아있는 흙에서 나는 건강한 먹거리들은 노인의 면역력을 높여 주어 악취의 역한 냄새를 줄여줍니다. 그래서 저는 늙는다는 건 썩는 게 아니라 발효되는 것이라 정의하고자 합니다. 발효되는 삶은 무수한 발효 미생물들과 함께 살 때 가능한 것이겠죠. 이렇게 점점 흙과 가까워지는 삶이 늙는 과정이라면 결국 흙과 하나되는 일이 자연스러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해봅니다. 죽음이 전혀 무서울 필요 없는, 그 또한 삶의 한 과정이라는 걸 도 닦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늘 태어나듯이 늘 죽는 실천이 있습니다. 바로 거름 만드는 일입니다. 무슨 거름일까요? 내 똥과 오줌입니다. 똥과 오줌은 또 다른 나의 분신입니다. 나를 어제 먹은 음식이라고 정의하는 말이 있지요. 그 음식의 또 다른 모습이 똥 오줌이니 나의 또 다른 분신이 되는 겁니다. 그 분신을 어쩌다 외출 나갔을 때 불가피하게 수세식 변기에다 누기라도 하면 영 찝찝합니다. 나의 분신이 블랙홀 같은 물 구멍에 휘리릭 빨려들어가 어딘가에서 자연을 더럽힐 것 생각하니 불편하지 않을 수 없지요. 웬만하면 집에서 거름 만드는 뒷간에 누려고 꽤나 애쓰는 이유입니다. 밥은 나가 먹어도 똥은 집에 와 누라는 옛말이 심상치 않게 느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겁니다. 이렇게 똥을 정성껏 발효시켜 땅에 묻는 과정이 나를 매일 땅에 묻는 과정입니다. 늘 죽음을 간접적으로 실천하는 일인 것이죠. 그리고 열심히 내 똥을 전혀 냄새나지 않고 오히려 풋풋한 흙냄새 나게 발효시킨 후 작물을 키워 다시 내가 먹게 되니 이는 내가 부활하는 과정입니다.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자연스레 순환하는 모습입니다. 흙의 삶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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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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