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에서
이건청 시인
■ 시
겨울 산에서
이건청
나는 겨울 산이 엄동의 바람 속에서 꼼짝도 못하고 서서
겨울밤을 견디고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큰 그늘 속에 빠져 기진해 있는 줄만 알았다.
겨울 산 작은 암자에 며칠을 머물면서 나는
겨울 산이 살아 울리는 장엄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대개 자정을 넘은 시간에 시작되곤 했는데
산 아래, 한신계곡이나 칠선계곡 쪽을 지나 대원사 스쳐 남해 바다로 간다는
지리산 어느 골짜기 물들이 첫 소절을 울리면
차츰 위쪽이 그 소리를 받으면서
그 소리 속으로 섞여 들곤 하였는데
올라오면서 마천면 농협 하나로마트 지나 대나무 숲을 깨우고
산비탈, 마천 사람들의 오래된 봉분의 묘소도 흔들어 깨우면서
골짜기로 골짜기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오를수록 그 소리는 점점 더 곡진한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었는데
산 중턱을 넘어서면서 홍송들이 백 년, 이 백년씩
그들의 가지로 서로의 어깨를 걸친 채
장대한 비탈을 이루고 있는 곳까지 와서는
웅장한 코러스가 되는 것이었다.
그 소리는 내가 사순절의 어느 날, 대성당에서 들었던
그레고리 찬트의 높은 소절과 낮은 소절이 번갈아 마주치는 어느 부분과 같았다.
이따금 이 산에 사는 산짐승들이
대합창의 어느 부분에 끼어들기도 하는 것 같았는데
그때마다 그레고리 찬트 속에서 짐승들의 푸른 안광이 빛나곤 하였다.
겨울 산이 울려내는 대합창이 온 산을 울리다가
서서히 함양 쪽으로 잦아들 때쯤
건너 쪽 지리산 반야봉, 제석봉의 윤곽도 밝아오는 것이었는데
날이 밝고 산의 윤곽들이 선연해지면 자작나무도 굴참나무도
그냥 추운 산의 일부로 돌아가
원래의 자리에 가지를 늘어뜨리고 서는 것이었다.
그냥 겨울 산이 되어 침묵 속으로 잠겨드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