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5(수)

통합검색

검색형태 :
기간 :
직접입력 :
~

지리산문화 검색결과

  • 두루미천남성
    「섬진강 편지」 -두루미천남성 이름을 부르면 ‘첫남성’으로 들려 들꽃 출사지에서 하하호호 웃음을 주는 천남성, 숲속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천남성이지만 '두루미천남성'은 쉽게 볼수 있는 녀석은 아닙니다. '두루미천남성'은 산림청 지정 멸종위기의 희귀식물입니다. 다행히 지리산둘레길에서는 여기저기 보이니 숲길을 가면 이름을 불러보세요~~. 꽃의 모습은 뱀이 머리를 치켜든 것처럼 보여 사두초(蛇頭草)라 불리기도 하고 잎이 날개를 편 두루미를 닮았다고 해서 '두루미천남성'이라 불립니다. 옛날엔 사약으로 이용됐을 만큼 강한 독성을 가지고 있지만 독을 잘 다스려 약재로 많이 쓰이는 식물이기도 합니다. 만지면 알러지 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다니 조심하시구요.
    • 지리산문화
    • 섬진강 편지
    2024-05-13
  • 단 한 명을 위한 간이역 콘서트
    단 한 명을 위한 간이역 콘서트 ‘율촌역’이라는 곳이 있었다. 지금은 폐쇄된 율촌역은 전국의 12개 역사(驛舍)와 함께 문화재청에 의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다. 1930년 전라선이 개통되면서 만들어졌고 폐쇄되기 직전에는 열차가 하루에 2번 쉬었던 곳, 하루 열차 이용자가 다섯 손가락을 넘지 못했다는 초라한 간이역, 폐쇄일이 통보된 그날 그곳 역 마당에서 시노래 콘서트가 있었다. 그것은 지역의 이름 없는 가수와 시인 그리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 하는 하나의 기도 같은 거였다. 작고 초라하고 소멸되어가는 것들을 위한 기도를 시와 노래로 하는 콘서트였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사가 아니었기에 우리는 노을이 지는 주위의 편안한 시골 풍경과 잘 어우러질 수 있었다. 이 콘서트는 근대가 형성되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소멸되어 온 것들에 대한 레퀴엠에 다름 아니었다. 과학의 축적과 함께 근대가 진행되면서, 사과가 떨어지거나 강물이 흐르는 모든 자연현상을 수학적으로 계산해내고, 그 계산을 통해 자연을 착취하는 가운데 꾸준히 도태되어온 것들, 작고 힘없고 화폐가치로 환산이 안 되는 것들, 첨성산의 도롱뇽 같은 것들, 이 간이역처럼 끝내는 사라져야 할 것들, 그리고 또 그것들과 똑같은 처지의 사람들까지, 이 소외되고 소멸되는 것들을 위한 콘서트는 간이역 너머의 노을빛만큼이나 아름답고 슬펐다. 나는 이 콘서트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가 삶 속에서 꾸준히 잃어온 ‘가여워하는 마음’을 생각했다. 누군가, 무엇인가 그 대상과의 관계라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상대방의 ‘가여움’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 몸의 어느 구석에 힘겹게 숨 쉬며 남아있을 사랑의 마음, 자비의 마음이 바로 그 ‘가여워하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나는 내게서 버려진 안쓰러운 나를 가까스로 돌아볼 수 있었다. 콘서트의 막바지에 붉은 노을이 지고 막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율촌역에 드디어 하루에 두 번 쉰다는 그 두 번째 기차가 잠깐 멈추고 떠났다. 그리고 그 열차에서 단 한 명의 손님인 작고 꼬부라진 할머니가 내리더니 작은 보따리 하나를 들고 느릿느릿 역사(驛舍)를 빠져 나왔다. 우리는 그 단 한 명의 소중한 관객을 위해 시를 읽고 노래를 불렀다. 할머니 한 명을 위해서 존재할 수 있는 열차, 할머니 한 명을 위해서 열차가 멈추는 간이역, 그리고 할머니 한 명을 위해서 노래할 수 있는 콘서트를 위해서, 근대 이후 줄곧 잃어온 그 ‘가여워하는 마음’을 위하여, 우리는 혼신을 다해 노래했다. "......세상의 작고 가여운 것들의 어머니/ 서로 욕하고 싸우며 스스로 절망하는 것들의 어머니/ 어머니, 따뜻한 저녁밥을 지어놓고 애타게 우리를 찾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노을 속으로 흩어집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그 따뜻한 목소리에 화답할 수 없습니다./ 아직은 어머니의 품으로 달려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직도 나는 강남의 아파트가 부러워 보이고/ 누군가가 앞서 나가면 질투를 하고/ 내 자식만큼은 서울대에 들어가기를 바라고/ 가진 자 앞에서는 굽실거리고, 없는 자 앞에서는 우쭐대는/ 그러한 마음 때문입니다./ 세상의 불의와 폭력에는 분노하면서도/ 나의 불의와 나의 폭력에는 한없이 너그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머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머지않아 세상의 모든 생명들 / 그리고 만나는 누구에게나 고마움의 절을 할 수 있을 만큼/ 내 마음이 충분히 가난해졌을 때/ 그 때 어머니의 부름에 대답하겠습니다./ 따뜻한 밥 한 그릇 지어놓고/ 제가 먼저 어머니를 부르겠습니다./ 저녁노을 붉은 그리움으로 /어머니를 부르겠습니다./ 어머니." (박두규 시「어머니, 때죽나무꽃이 피었습니다」부분) -때죽나무꽃
    • 지리산문화
    • 지리산 편지
    2024-05-08

이야기 검색결과

  • 흙에서 나고 흙에서 살다 흙으로 돌아가는 삶
    흙에서 나서, 흙에서 살다, 흙으로 돌아가는 삶 안철환(전통농업연구소 대표) 흙에서 나다 하나님은 왜 인간을 흙으로 만드셨을까요? 더럽고 비만 오면 허물어질 흙으로 말이죠. 만약에 금으로 만드셨다면 평생 가난하지 않게 살 수 있고 대리석으로 만드셨다면 얼마나 멋진 모델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참 이상하죠? 그렇지만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가 있을 겁니다. 금과 대리석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지 않잖아요. 반면 흙에는 무궁무진한 생명들이 깃들어 있습니다. 우주의 별만큼이나 있을 미생물이 그것이고요, 그 말고도 지렁이를 비롯 작은 벌레와 두더쥐 같은 작은 동물이 흙에 의지해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몸에도 세포 수보다 더 많은 미생물이 살고 있고 나쁜 놈이긴 하지만 옛날엔 대장에 회충 같은 작은 동물도 살고 있었죠. 어쩌면 흙과 우리 몸은 비슷한 점이 의외로 많습니다. 우리 몸에 없어선 안되는 피도 흙에서 왔답니다. 바로 철이죠. 피의 주성분인 헤모글로빈이 철로 되어 있잖아요? 빨간 피의 색은 바로 산화된 철의 색깔이죠. 철은 지구 어디에나 고르게 있답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흙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은 흙에서 싹이 나는 걸 보고 떠올렸을 겁니다. 봄만 되면 길고 추운 겨울 동안 죽어 있던 생명들이 흙 틈을 비집고 올라오죠. 옛날 사람들에겐 아주 신기한 일이었을 겁니다. 사실 저도 우연히 심은 배추씨가 3일만에 땅 속을 비집고 올라와 싹을 틔우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그에 미쳐 농사를 짓게 되었어요. 씨가 싹이 트는 건 저에게 더 이상 과학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이었어요. 속으로 그랬지요.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사실 기독교만이 아니라 인류의 초기 종교나 신화나 전설에선 흙과 대지를 생명의 어머니로 여겼습니다. 흙으로 인간을 빚고선 하나님은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저는 그 숨을 씨앗으로 해석하지요. 흙에다 씨앗을 심은 겁니다. 그리고 봄에 싹이 올라오듯 인간(생명)이 움터 올라온 거지요. 그럼 흙이 어떻기에 수많은 생명을 품고 낳을 수 있을까요? 저는 흙 속에 물이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사막의 흙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물이 없어서입니다. 그렇지만 물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생명이 탄생하지 않습니다. 하늘의 작용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하늘의 작용은 불입니다. 그렇습니다. 물과 불이 만나야 생명이 나옵니다. 어떻게 만날까요? 바로 바람입니다. 하느님의 숨이죠. 물은 아래로 향하고 불은 위로 향하려 하죠. 그러면 만날 수가 없습니다. 바람은 하늘이 불의 기운을 아래로 향하게 합니다. 그리고 땅 속의 물을 위로 끌어올리는 작용도 합니다. 과학으로 말하면 베르누이 법칙, 유체역학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저 어릴 때는 모기약을 입으로 불었어요. 티(T)자처럼 생긴 빨대를 모기약이 든 병에다 꽂아 한쪽에서 훅~ 하고 불면 압력의 차가 생겨 병 속의 모기약이 위로 빨려지고 반대쪽 빨대 구멍으로 분사되어 나아가죠. 세게 불려고 큰 숨을 들이마시다간 모기약이 내 입으로 쳐 들어오는 낭패를 겪기도 했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부는 바람은 땅 속으로도 들어갑니다. 태풍처럼 센 바람은 흙을 날려 버리지만 봄바람처럼 살살 부는 바람은 땅 속으로도 스며 들어 숨길을 만들고 그길 따라 물길도 만들어집니다. 그 물길 따라 드디어 땅 속에서 올라온 물은 바람 따라 내려온 하늘의 불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물과 불이 만날 때는 회오리처럼 만납니다. 그 형상을 표현한 게 태극 마크입니다. 빨간 것은 불이고 파란 것은 물입니다. 물고기처럼 머리와 꼬리가 있어 불의 머리는 땅을 향하고 물의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있죠. 그렇게 서로 기운을 받아 불의 머리는 싹을 만들어내 다시 하늘로 향하고 물의 꼬리는 뿌리를 만들어내 다시 땅으로 향합니다.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물론 싹을 올리고 뿌리를 내리는 것은 식물이겠지요. 사람이 어떻게 식물처럼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못 움직이는 것이 식물의 본질이 아니라 늘 하늘과 땅과 소통하는 것이 식물의 본질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러면 인간도 식물처럼 살 수 있습니다. 늘 머리는 하늘과 소통하고 발은 늘 땅과 소통하는 삶 말이죠. 이것이 저는 하느님이 인간을 흙으로 만든 이유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늘의 기운을 넣어 흙으로 빚었으니 하늘과 소통하고 흙과 소통하며 살라는 것이죠. 흙에서 살다 흙에서 났으니 흙에서 살아야겠죠? 그럼 어떻게 하는 게 흙에서 사는 걸까요? 말 그대로 흙을 밟고 살면 됩니다. 간단하죠? 그런데 그게 어려워진 게 지금의 복잡한 우리네 삶입니다. 귀농운동을 하면서 저는 그랬습니다. 귀농하기가 이민 가기보다 어렵다고요. 그렇다고 귀농해서, 땅을 샀다고 해서 흙만 밟고 살면 흙의 삶이 되는 것일까요? 흙을 밟더라도 하늘과 소통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현재로는 그것에 가장 가까운 삶이 농사입니다. 지금은 고인이신 신영복 교수님은 농사를 공부와 같다고 했습니다. 한자 문화권인 한중일 나라 중에 공부(工夫)를 학습의 의미로 쓰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습니다. 일본에선 학습을 면강(勉强)이라는 한자로 씁니다. 중국에서 공부는 쿵푸입니다. 무예죠. 단련한다는 의미에서는 상통합니다. 공부(工夫) 글자의 상형은 대장간의 모루(工) 위에 불로 달군 쇠덩이를 대장장이(夫)가 망치로 두드리는 모습입니다. 두드려 단련해서 목적한 모양을 이루는 것이니 공부의 뜻 답죠? 그런데 왜 농사를 공부와 같은 일이라 했을까요? 단련해서 목적을 이루는 뜻이 농사에도 있다는 걸까요? 신영복 교수님의 또 다른 설명을 이어가보겠습니다. 교수님은 공부를 머리에서 시작해 가슴을 거쳐 발로 가는 여행이라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보고 공(工)의 뜻을 딱 떠올렸습니다. 공(工) 글자에서 위의 일(一)자는 하늘입니다. 머리와 맞닿아있지요. 머리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하늘의 뜻을 말합니다. 어떤 면에선 이론이자 말씀(Logos, 道)입니다. 가슴은 곤(丨)으로 사람이자 따뜻한 열정이며 실천입니다. 이론은 따뜻한 마음으로 실천해야 하는 겁니다. 발은 공의 아래에 있는 일(一)자로 땅이자 사람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을 뜻합니다. 하늘의 뜻이 사람의 실천을 통해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흙의 입장에서 보면 하늘의 뜻이 농부의 실천을 통해 흙에서 구현되는 것입니다. 비로소 흙의 삶이 하늘의 뜻과 만나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하늘엔 길이 있고 땅엔 흐름이 있습니다. 하늘의 길은 도(道)입니다. 도는 관념적인 게 아닙니다. 태양의 길은 황도이고 달의 길은 백도이며 지구의 길은 적도입니다. 덧붙여 목성을 비롯한 태양계 오행성의 길이 있으며 우주 전체의 별자리들도 길이 있지요. 땅의 흐름은 물과 바람입니다. 하늘의 길처럼 정해져 있지 않지만 흐름이 있고 이치가 있습니다. 천문지리(天文地理)라고 하죠. 별들의 길이 무늬(文)를 만들고 땅의 흐름이 이치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늘의 도가 땅의 흐름과 만나 비로소 대지에 우주만큼 무수한 생명의 세계를 열게 됩니다. 흙의 생명의 세계, 곧 토양 미생물의 세계는 인간이 아직도 5% 정도밖에 밝혀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주만큼이나 미지의 세계입니다. 특히 살아있는 흙에는 무궁무진한 생명의 세계입니다. 흙의 미생물 중에 흙을 살아있는 생명의 세계로 만드는 것으로 방선균이라는 게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항생제는 바로 방선균이 내뿜는 냄새에서 추출한 것입니다. 그러나 화학적으로 만든 항생제는 부작용이 있지만 방선균의 냄새에는 부작용이 없지요. 더구나 방선균의 냄새에는 항우울제 작용이 있다니 행복약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흙에서만 살아도 병원이 필요없고 스트레스가 발 붙일 곳이 없습니다. 에덴 동산, 유토피아, 샹그릴라, 무릉도원이 별거 아닌거죠. 흙이 이렇게 살아있으려면 하늘과 소통해야 한다고 했죠. 그 하늘이 알 수 없는 도(道)라고 하면 황당하지요. 하늘과 소통하는 구체적인 모습은 탄소와 질소의 순환입니다. 날씨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게 크게 보면 기후입니다. 날씨는 물과 바람의 작용입니다. 기후와 날씨는 태양과 달과 별들의 영향을 받지요. 아무튼 오늘날 기후위기는 바로 이 탄소와 질소의 순환에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땅으로 가고 싶어하는 탄소는 하늘에 정체되어 있고 하늘로 돌아가야 할 질소는 땅에 과잉되어 흙과 물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질소는 탄소가 땅으로 돌아가는 데 도움을 줍니다. 미생물이 지표상의 탄소들을 땅으로 돌아가게 하는 주역인데 미생물의 먹이이자 에너지인 질소가 꼭 있어야 합니다. 또 식물은 질소가 주성분인 엽록소를 통해 대기의 이산화탄소를 고정해 뿌리에 저장을 해둡니다. 바로 광합성입니다. 땅 속에서 유기물로 잘 저장된 탄소는 질소를 가둬두는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식물이 먹을만큼 내어주어 질소의 순환을 돕지요. 과잉된 질소가 그대로 용출되어 물을 오염시키고 땅을 망가뜨리는 일을 예방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공(工)의 뜻을 해석할 때 일방통행만 얘기했습니다. 하늘의 뜻이 땅으로 향하는 것만 말한 거죠. 사실 반대방향도 일어납니다. 땅의 좋은 기운이 하늘을 이롭게 할 수도 있고 나쁜 기운이 하늘을 노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기후위기는 후자에 속한다 할 수 있겠죠. 그럼 어떻게 하면 하늘을 이롭게 하고 어떻게 하면 하늘을 노하게 할까요? 바로 앞에서 흙의 삶을 농사짓는 일이라 했지요. 그런데 사실 지금의 기후위기와 흙의 삶을 왜곡시킨 원조는 바로 농사입니다. 농사로부터 잉여곡식이 생기니 소유와 독점이 생기고 빈자와 부자가 생기고 계급과 국가가 생기고 급기야 전쟁이 발발하기까지 했어요. 그 뿐입니까? 붙박이 삶으로 같은 땅을 지속적으로 수탈하고 숲을 파괴해 자연환경의 면역력이 감퇴하여 역병이 퍼집니다. 기후위기 같은 재앙이 오면 더욱 위기관리 능력이 고갈되어 피해는 급증합니다. 사실 농사가 아니더라도 기후위기는 주기적으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빙하기 소빙하기 간빙기 온난기 등 기후는 항상 변화합니다. 농사의 삶이 기후 변화에 대응력을 떨어뜨리고 기후위기를 더 부추기는 것이죠. 인류는 농경사회로 들어서면서 몇 가지 삶의 중요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채소와 과일, 견과류 중심의 먹을거리에서 곡물 중심의 먹을거리로 변화한 게 제일 큰 변화입니다. 사실 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들어선 중심엔 곡물이 있었습니다. 인류가 농사짓기 시작했다는 것은 곡물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곡물 중심의 먹거리 변화는 먹거리 다양성이 줄었다는 뜻이고 미네랄 섭취는 줄고 단백질과 탄수화물 섭취는 증가했다는 뜻이 됩니다. 에너지 섭취는 증가했을지 모르지만 면역력은 분명 감퇴되었을 겁니다. 역병이 농경의 산물이라는 근거입니다. 붙박이로 몰려 사는 삶이 더 역병을 부추겼을 겁니다. 곡물 중심의 농사는 필연적으로 단작(광작)과 연작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더욱 필연적으로 토양의 침탈과 숲의 파괴로 이어집니다. 단작으로 인한 식량의 증대는 인구수의 급격한 증가로 이어지지요. 단작 농사는 고대엔 노예제를 낳고 현대에 와서는 자본주의를 낳고, 고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전쟁을 일상화했습니다. 주기적으로 오는 기후위기는 더욱 폭발력이 커지고 주기도 빨라집니다. 인간이 땅을 망가뜨려 하늘을 더욱 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농사를 잘 지으면 땅을 살릴 수도 있고 그러면 하늘을 이롭게 할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이런 농사는 앞의 농사와 다릅니다. 단작과 연작이 아닌 혼작과 윤작을 짓고, 혼작과 윤작은 숲에도 적용되어 숲을 파괴하지 않고 숲과 공생하며 곡식농사만 하는 게 아닌 채소와 과일농사도 짓습니다. 뿐만아니라 농사만 짓는 게 아니라 구석기 채집의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들에선 냉이와 쑥을 캐고 산에선 취와 곤드레를 캡니다. 갯벌에선 조개를 캐고요. 그런 사회가 얼마나 되겠는가? 있어도 매우 미미한 것에 불과할 것이라 폄하할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류 문명사회는 분명 단작 중심의 농경을 했지만 지구 전체로 보면 소수였습니다. 대부분의 인류는 적어도 근대까지 흙의 삶을 살았습니다. 소수의 문명사회가 일찍이 고대부터 문명을 발달시켰다지만 그 말을 뒤집 보면 일찍부터 전쟁을 하고 숲을 파괴하며 대지를 침탈하고 선량한 백성과 소중한 뭇 생명을 수탈해 왔다는 뜻입니다. 그런 나라들 중심으로 역사가 쓰여졌습니다. 그러니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그만큼 평화롭고 소박한 흙의 삶을 살아 온 것입니다. 역사로 기록할 것도 없고 기록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소위 근대화가 늦었거나 실패하여 소위 빈곤 국가와 지역들입니다. 그렇지만 그 면적은 지구 대부분에 걸쳐 있었어요. 아프리카 원주민, 북남미 인디언, 호주의 에보리진들 뉴질랜드의 마오이족 , 남아시아 및 남태평양 폴리네시안, 북극의 이누이트인 및 시베리아 냉대지역 원주민들이 그들입니다. 그 중 특히 남미 아마존 숲을 지켜 온 원주민 얘기가 감동적입니다. 열대 우림지역의 흙이 비옥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비가 지력을 빼앗아 강 하류 온대지방으로 옮겨 놓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부자 나라들이 이 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것도 자기들이 잘 나서 부자가 된 게 아니라 이들 열대 지역 덕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아마존 숲은 좀 달랐습니다. 생태학자들이 아마존 땅의 지력을 조사해보니 의외의 비옥한 땅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도 어쩌다 생긴 특이한 지역이 아니라 자그마치 아마존 전체 중 약 12%에 육박하는 거대한 규모의 면적이었습니다. 처음엔 미스테리라고만 봤다가 자세히 조사해 보니 그것은 다름아닌 농경지라는 사실을 알고는 더욱 놀랐죠. 겉으론 보기엔 농경지가 아니었어요. 그냥 숲이나 다름없었죠. 그런데 자세히 조사해보니 숲을 파괴하지 않고 숲에 맞게 농사지은 것입니다. 당연히 농부는 원주민이었습니다. 우리식으로 하면 화전입니다. 화전은 숲의 파괴 현장이 아닙니다. 화전을 일구어 2~3년 농사를 지으면 다시 지력이 살아날 때까지 방치합니다. 나무에 불을 질렀기 때문에 숲을 파괴한 것이라 볼 수 있지만 넓게 보면 그 공간은 숲의 완충지대입니다. 숲이 너무 우거지면 빛도 들어가지 않아 숲 속은 생명이 살기 힘듭니다. 산불에도 위험하고요. 그래서 저는 인간이 이용하지 않아 우거진 숲을 비만병 걸린 숲이라 얘기합니다. 그런데 아마존 숲을 보전하기 위해 원주민을 내쫓고 있습니다. 그리곤 대규모의 단작 농장을 만들기 위해 숲을 파괴합니다. 하늘이 노하지 않을 수 없지요. 참으로 개탄스런 일이지만 그래도 아직 우리 주변엔 이런 지역과 사람들이 그 명맥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게 희망입니다. 우리나라도 비교적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살아있는 흙의 문화와 삶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급속히 사라지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희망의 불씨는 남아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흙의 삶이고 그것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말한 혼작 윤작의 농부, 곧 소농(小農)의 삶입니다. 그리고 이 소농은 신석기 농경의 산물인 면도 있지만 구석기 채집문화의 연속적 발전 형태인 면에 저는 더 주목합니다. 그런데 귀농귀촌하기가 이민가기보다 어렵다고 푸념했듯이 도시민이 당장 소농의 삶을 선택하기는 만만치 않습니다. 잘못하면 넓디넓은 태평양 바다에 오줌 한 방울 더하는 정도에 불과할 우려가 있지요. 저는 그래서 도시농부의 삶을 권합니다. 사실 흙의 삶은 도시가 더 절실합니다. 서울시의 경우 유엔이 권장하는 콘크리트 피복율 20%를 넘어 50%나 된답니다. 그것도 외곽을 둘러싼 산들을 제외하면 피복율이 80% 넘는다고 합니다. 도시의 흙을 살리는 일은 기후위기 시대에 절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힘든 귀농귀촌만큼은 아니어도 도시농부의 삶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도시엔 땅도 부족하거니와 콘크리트를 거둬내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도시농업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먹거리 운동입니다. 참 먹거리를 찾는 운동은 흙의 삶을 복원하는 간접적인 운동이 될 겁니다. 아마 도시민이 가장 접근하기 쉬운 운동이 될 것이고 나아가 흙을 복원하는 강력한 운동이 될 수 있지요. 그럼 참 먹거리는 무엇을 말할까요? 하늘의 뜻을 담아 대지에 구현하고 그렇게 살린 흙은 다시 하늘을 이롭게 하는 먹거리입니다, 이런 먹거리에 가장 근접한 것은 소농의 먹거리이고 로컬푸드, 곧 지역먹거리이며 토종 먹거리이자 친환경 먹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용적으론 육식을 최소화하고 채식, 그것도 재배한 채소 외에 야생에서 절로 자라는 거친 자연산 채소들, 밥은 백미를 지양하고 깎지 않은 곡식들이 그나마 흙을 덜 수탈한 먹거리들이라 봅니다. 앞에서 공부를 정의할 때 신영복 교수의 얘기를 소개했죠. 그 중 마지막으로 소개할 게 있는데 아주 놀라운 얘깁니다. 바로 달팽이도 공부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공부는 공자님 같이 머리 좋은 군자(엘리트)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들의 존재 형식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달팽이도 공부한다고 역설한 것이죠. 어느 날 저희 농장 옆의 산에서 하루종일 망개버섯을 쳐다보며 면벽수도하는 두꺼비를 발견했습니다. 아침 9시 쯤 처음 발견한 분이 그 때부터 제게 보여준 오후 4시까지 꼼짝않고 그러고 있었답니다. 아는 곤충박사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망개버섯에 자기가 먹을 곤충이 내려 앉기를 기다리는 중이랍니다. 그래서 알게 되었습니다. 달팽이도 공부한다는 말을요. 두꺼비도 하루종일 공부하고 있던 겁니다. 먹거리를 얻기 위한 인내 과정이 공부라는 거지요. 어떻게 보면 공부의 시작은 먹거리 공부이고 공부의 완성도 먹거리 공부일 겁니다. 귀농하지 않고 도시농부도 아닌 그냥 도시의 소비자일지라도 한계는 있겠지만 흙의 삶을 간접적으로 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바로 먹거리 공부입니다. 흙에서 나오고 흙을 살리며 결국 흙으로 돌아갈 먹거리를 먹는 일일 겁니다. 흙으로 돌아가다 죽으면 다 흙으로 돌아간다고 하지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흙으로 돌아가 좋은 거름이 되어야 할 몸이 에너지를 소모해 태워져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마니 말이죠. 저는 웬만하면 매장하기를 권합니다. 거름이 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거죠. 물론 모든 매장이 다 흙으로 돌아가는 좋은 방식이라 보진 않습니다. 저는 제일 좋은 매장 형태는 밭에다 모시는 것이라 봅니다. 묘비도 필요없고 돌로 성역화할 일도 없습니다.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만 남아있을 봉분이면 충분하죠. 결국 산소자리는 다시 밭으로 완벽히 돌아갑니다. 요즘은 너무 죽음을 멀리하는 문화가 자리잡았습니다. 원래는 늘 죽음이 우리 옆에 있었지요. 그래야 삶이 경건하고 신중하며 소중해집니다. 죽음은 피할 수가 없지요. 그렇다면 죽음을 삶의 한 과정으로 이해하고 삶은 죽음으로 가는 여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삶도 죽음의 한 과정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늘 태어나고 늘 죽는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태어나고 밤에 죽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또 태어나는 겁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이 이걸 말하는 것이라 저는 봅니다. 웰 빙(well-being)을 주 이슈로 퍼진 친환경유기농 운동이 저는 늘 아쉬웠습니다. 거기엔 흙이 없어요. 내 건강에 좋은 것인가 아닌가만 있죠. 이젠 웰다잉(well-dying)을 주제로 했으면 합니다. 단지 편안한 죽음이 아닙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을 말하는 거죠. 먼저 웰빙에서 말하는 건강을 살펴보죠. 건강을 정의한다면 아프지 않은 상태, 에너지가 넘치는 상태, 늙어 회춘하는 능력 등을 말할 겁니다. 그런데 저는 그렇게 정의하지 않습니다. 건강이란 나이에 따라 변화하는 몸과 마음에 적응하는 능력이라고 저는 정의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늘 아픕니다. 아프지 않으면 로봇이죠. 에너지는 젊은 한 때 넘치는 거지 늙어서도 넘쳐 늦둥이 나을 정도로 회춘한다면 그것도 이상한 일일 겁니다. 그래서 아프지 않은 게 건강한 게 아니라 아픈 것에 적응하는 것이 건강한 것입니다. 이것이 깊어지면 죽음에도 적응할 수 있을 겁니다. 늙는다는 것도 추한 일이 아닙니다. 토종 구하러 시골 구석을 돌아다니는데 어느 마을에 갔더니 늙은호박을 익은호박이라고 부르는 걸 봤어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이었지요. 늙는다는 것은 점점 흙과 하나되는 과정일 때 익는 과정이라 생각해봅니다. 콘크리트에 사느라 흙과 멀어진 늙은이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역합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흙의 무수한 항생 작용은 늙은이의 냄새를 구수한 익은 냄새로 바꿔줍니다. 옛날엔 메주를 띄울 때 가장 따뜻한 방에 두었습니다. 그 방엔 그 집의 제일 어른이 주무시죠. 메주 띄워주는 고초균(바실러스)은 노인의 냄새를 중화시켜주고 노인의 냄새는 메주를 더욱 구수하게 익게 해 줍니다. 구들방 데우는 장작 태우는 연기 냄새도 노인의 냄새를 중화시켜줍니다. 살아있는 흙에서 나는 건강한 먹거리들은 노인의 면역력을 높여 주어 악취의 역한 냄새를 줄여줍니다. 그래서 저는 늙는다는 건 썩는 게 아니라 발효되는 것이라 정의하고자 합니다. 발효되는 삶은 무수한 발효 미생물들과 함께 살 때 가능한 것이겠죠. 이렇게 점점 흙과 가까워지는 삶이 늙는 과정이라면 결국 흙과 하나되는 일이 자연스러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해봅니다. 죽음이 전혀 무서울 필요 없는, 그 또한 삶의 한 과정이라는 걸 도 닦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늘 태어나듯이 늘 죽는 실천이 있습니다. 바로 거름 만드는 일입니다. 무슨 거름일까요? 내 똥과 오줌입니다. 똥과 오줌은 또 다른 나의 분신입니다. 나를 어제 먹은 음식이라고 정의하는 말이 있지요. 그 음식의 또 다른 모습이 똥 오줌이니 나의 또 다른 분신이 되는 겁니다. 그 분신을 어쩌다 외출 나갔을 때 불가피하게 수세식 변기에다 누기라도 하면 영 찝찝합니다. 나의 분신이 블랙홀 같은 물 구멍에 휘리릭 빨려들어가 어딘가에서 자연을 더럽힐 것 생각하니 불편하지 않을 수 없지요. 웬만하면 집에서 거름 만드는 뒷간에 누려고 꽤나 애쓰는 이유입니다. 밥은 나가 먹어도 똥은 집에 와 누라는 옛말이 심상치 않게 느껴지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겁니다. 이렇게 똥을 정성껏 발효시켜 땅에 묻는 과정이 나를 매일 땅에 묻는 과정입니다. 늘 죽음을 간접적으로 실천하는 일인 것이죠. 그리고 열심히 내 똥을 전혀 냄새나지 않고 오히려 풋풋한 흙냄새 나게 발효시킨 후 작물을 키워 다시 내가 먹게 되니 이는 내가 부활하는 과정입니다.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자연스레 순환하는 모습입니다. 흙의 삶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글을 쓴 안철환 선생은 온순환협동조합, 전통농업연구소 대표이고 경기도 안산에서 ‘산림생태텃밭 먹거리숲 농장’을 운영한다. 남은 음식물과 똥오줌, 커피 찌꺼기를 받아 직접 거름 만들기를 실천하고 있으며, 우리 토종 종자와 전통 농업 살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25년 전, 처음으로 심은 배추 씨가 3일 만에 싹 트는 걸 보고 ‘씨 안에 누가 있었구나!’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우리가 먹는 배추는 단순히 물질적인 먹을거리가 아니라 나와 별 차이 없는 생명이며, 그래서 먹는다는 것은 생명을 먹고, 생명과 소통하고, 생명과 하나 되는 일이라고 믿는다.쓴 책으로 《시골똥 서울똥》(2009), 《24절기와 농부의 달력》(2011), 《호미 한자루 농법》(2016), 《토종농법의 시작》(2020)이 있고, 옮긴 책으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2004)이 있다.
    • 이야기
    • 여기저기 민들레
    2024-05-11
  • 돈 벌고 싶지 않았던 그녀가 미역장시가 된 이유
    구례장터에서 그녀를 본 적이 몇 번 있다. 구례 축협하나로마트 앞에서 진도산 미역과 다시마를 팔고 있었다. 내가 관심을 가진 이유는 진도산만 판다는 것 때문이었다. 미역이나 다시마라면 다른 곳도 많을 것인데 왜 진도산만 파는 것일까? 라는 호기심 때문이었지만 따로 묻지는 않았다. [구례 축협하나로마트 앞에서 진도산 해산물을 판다 / 사진 김인호] 어느 봄날 점심시간에 장터를 갔는데 그녀는 작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졸렸던 것일까? 3월의 햇살이 유독 따뜻해서였을까? 햇빛이 유독 잘 비치는 곳이라 그런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지만 따로 묻을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장진희이였다. 다시마 장사꾼에서 장진희라는 이름으로 그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또 하나의 직업도 알게 되었다. 시인… 다시마 장시와 시인은 어울리지 않았다. 시인이면서 장시가 된 그녀의 사연이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구례는 3일과 8일 장이 선다. 지난 5월 8일 어버이날 장이 끝난 시간에 그녀를 만났다. [구례 장꾼들이 즐겨 찾는 가야식당 / 사진 김인호] 구례장터에 있는 막걸리집 “가야식당”이었다. “막걸리부터 한 잔 주세요." 식당에 들어서자 마자 그녀는 막걸리를 시켰다. 그리고는 한사발을 시원하게 마셨다. “종일 장터에 있다가 끝나면 막걸리 생각이 딱 나더라구요." “힘도 들고 목도 축이고.” [그녀는 식당에 들어오자마자 막걸리 한 잔을 마셨다 / 사진 김인호] 막걸리 한 잔을 하고 나서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장사를 시작한 것은 12년전이에요.”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인데 아들이 이런 말을 하더라구요. “엄마는 돈 벌 능력이 되는데 비겁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아들에게 돈이 들어갈 시기가 온 것이다. 사실 그전에도 글을 쓰거나 기간제 교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래 일하지는 않았고 글을 써서는 밥을 먹고살 수 없었다. 그리고 교사는 맞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다시마 장사였다고 한다. 근데 어쩌다가 다시마를 팔게 되었나요? “ 제 고향이 진도입니다.” “ 진도에서 태어났고 목포에서 자랐어요." “그리고 서울로 대학을 갔죠.” “서울에서 20년을 살았구요.” “그런데 정말 서울에서 살 수가 없었어요." “경제적으로 힘들고 자본주의에 순응하며 살 자신도 없어 37살에 귀촌을 했습니다.” “그렇게 무주에서 7년을 살았어요. 농사 짓고 살았죠. 돈은 거의 벌지 않고, 농사를 지어 한 달에 6만원 7만원만 쓰면 살았어요. 나름 행복했는데 오래 살지 못했어요.” “그리고 진도로 이사를 갔어요”. 진도에서도 돈을 벌지 않았어요.” 물때 따라 물이 들어오면 산에 가고 물이 멀어지면 바다로 갔어요” 산에 가면 나물이, 바다에 가면 해산물이 있으니 끼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어요.” 돈이 필요하면 서울에서 횟집하는 지인에게 나물이나 해산물을 챙겨 보내면 적당히 돈을 보내줘요. 그것으로 살았어요. 어떻게 보며 그녀는 돈을 벌지 않기위해 부단하게 노력했던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벌지 않고 살수 있을까? 나도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있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답을 찾았을까? 찾았다면 다시마 장사꾼이 되지 않았겠지…. 그녀는 자본주의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 아니면 자본주의와 타협하지 않고 끝내 살고 싶었던 사람이었던것 같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자본주의보다 무서운 아들이 있었다. 아이는 학교에 진학해야 하니까.... 오래 전에, 뭐 오래전도 아니지만 “오래된 미래”라는 책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라다크라는 마을에서 자급자족 하며 자본주의 물결을 거부하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 나도 매료되던 적이 있었다. 매료된 이유는 당연하게 자본주의적 삶이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그리고 노동할 권리와 함께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유를 보장받은 결코 자유롭지 못한 삶에 지쳤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기에 끝없이 고통 당한다. 주어진 길이 없어 방황하고 선택을 하면 그 책임도 오롯이 자신이 지기 때문이다. 그녀는 돈에서 자유로워 지고 싶었지만 끝내 그렇게 살지는 못해던 것같다. “장사꾼이 되어서 시골마을을 많이 찾았어요. 거기서 할머니들을 많이 만났죠” “그 분들을 만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오래된 미래의 그런 삶을 마지막으로 사는 사람들이 지금 시골 할머니들 아닐까? 하는 생각요. “저는 그녀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자본주의에 가장 적응하지 않은 마지막 세대가 아니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녀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고 좋더라구요. 장사꾼이 좋은게 바로 그 점입니다. 그냥 가면 이야기 하기 어려운데 장사꾼으로 가면 할머니들이 경계를 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세요.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더라구요. 3월 3일 장터 설 쇠고 대보름 쇠고 이른 매화 산수유 피고 찬비 내리는 꽃샘추위 봄을 흔들어대는 세찬 바람 매화 얼리어 색죽이는 된서리 다 지나고 봄볕 따사롭고 바람 잔잔하고 한가한 장터 양지바른 한쪽에 미역장시 해바라기로 앉아 자울자울 졸고 있다. -장진희의 시- [돈 안 벌고 안 쓰고 안 움직이고 땅에서 줏어먹고 살고 싶은 사람 세상에 떠밀려 길 위에 나섰다고 한다. / 사진 김인호] 막걸리와 함께 이야기를 하는 중에 전화가왔다, 네; 안녕하세요. 저 미역장시맞아요. 미역이 필요한데..,,, 장은 못가겠고 언제 한 번와. 네.. 날 잡아서 갈께요, 낼 모레 사이에 갈께요” 그녀는 영락없는 장사꾼이었다. “한 여름이나 한 겨울엔 장에 나가면 손님이 없어요" “그때는 동네 마을회관을 찾아요?” “마을회관에서 장사를 하면 더 잘되거든요? “사실 처음부터 마을장사를 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어느날 파장을 하고 잠시 쉬려고 마을회관 공터에 주차하고 산책을 다녀 돌아 왔더니 동네 할머니들이 되게 궁금해 하시더라구요, 뭐하는 장시냐고요. 그래서 다시마나 미역을 판다고 하니까 그럼 여기서도 팔라고 하시더라구요. 장터가 따로 있냐고 사람있으면 그곳이 장이라고요. 그렇게 해서 마을장사를 시작하게 되었죠?” 다시마 장사는 어떻게 시작 하셨나요? “제가 진도로 이사하고 나서도 무주로 자주 놀러 갔었어요. 돈이 없어 궁리를 하다가 생각난게 있었어요. 무주장에 가보니 좋지도 않은 다시마나 미역을 삐싸게 팔더라구요. 그래서 진도산 다시마나 미역을 가지고 가서 귀촌한 지인들에게 판매를 했었죠. 그게 인연이 되어 다시마 장사를 하게 되었어요.” “12년 전에 처음 시작 할 때 정말 힘들었죠. 장터 장사꾼은 자리가 생명이니까요. 자리잡기가 쉽지 않았어요. 처음 시작 할 때 돈을 빌려 1,400만 원어치 다시마를 구입해 창고에 넣어놓고 시작했었요. 첫날 10만원어치를 팔았는데 이걸 언제 파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하지만 다행히 자리를 조금씩 잡고 장사도 그런대로 되는 편이라 아들의 학비를 마련 할 수 있었어요. 지금은 다른 장은 안가고 구례장만 나와요. 이제 좀 여유가 생겼어요. 아들이 다 컷으니까요.”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이 있나요? “최근에 “전라도닷컴”이라는 잡지에 장터 이야기를 3년간 연재했어요. 장사를 하다 보니 하나하나 기억되는 순간들이 있거든요. 12년간 장사를 하며 느낀 점들, 그동안 살면서 기억되는 순간들을 3년간 풀어서 글을 썼어요 그러고 나니까 마음이 가벼워졌어요. 쌓여 있던 것들이 해소된 기분이 들어요.” “그리고 논개 이야기를 장편 소설로 쓰고 싶어요. 무주에 살 때 장수에 있는 논개사당에 자주 가봤어요. 동네 할머니들이 논개노래를 부르시더라구요. 논개에 관심이 생겨서 논개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고 있어요.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쉽지 않지만 이제는 좀여유가 있으니 해보고 싶어요.” [자본주의 최후의 보루는 장터 아닐까요? 사진 김인호] 장사는 계속 하시나요? “장사는 팔십 먹어서까지 하고 싶어요. 재미가 있거든요, 장터에 가면 팔십 넘은 할머니들이 장사 하고 있잖아요. 저도 그렇게 늙고 싶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막걸리집에 나섰다. 그녀는 남은 막걸리를 살뜰하게 챙겨 식당을 나왔다. 막걸리는 따로 쓸 용처가 있다고 했다. 파장한 장터에는 짐을 정리하는 장꾼들과 마지막 장을 기웃하는 사람들 몇몇이 보였다, 어둠과 함께 5월에 초록이 노고단에서 구례로 내려오고 있었는데 그녀의 다시마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른 진도 바다에서 건져져 돈없는 그녀에게 희망이 되어준 다시마와 미역들이 초록물결처럼 너울거린다. “자본주의 최후의 보루는 장터 아닐까요" “가게를 마련할 돈도 없는 가장 가난 한 사람에게도 희망이 되어 줄 수 있는게 바로 오일장이죠. 물건만 있으면 가게세도 세금도 없는 곳, 그래서 누구나 자신의 물건을 자신의 가격으로 팔 수 있는곳, 돈 없는 가난한 사람도 돈을 얻을 수 있는곳 말이죠.” 그녀는 3일과 8일 구례 농협하나로마트 앞에서 진도산 미역과 다시마를 팔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 자리에 앉아 자울자울 졸며 시를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이야기
    • 지리산자락 사람들
    2024-05-09
  • 대지가 이끄는 길 따라 한 걸음씩
    머컬처 또는 숲밭을 가꾸고자 하는 사람은 『가이아의 정원』을 멋지게 번역한 사람으로 이해성을 기억할 것이다. 책이 나온 후 십 년이 넘게 흘렀는데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우리의 가이아가 신음 소리를 내며 죽어가고 있기에 이해성이 들려주는 오늘의 말을 듣고 싶었다. 그는 의외로 바로 우리 곁에 있었다. 지금은 지리산 활동가로, 그는 그 사이 한 번도 길을 벗어나지 않은 것 같다. 문 : 살아온 얘기랄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해성 : 저는 3년 전부터 ‘지금부터 판타지’라고 하는 이 공간을 운영해요. 카페이자 서점이지요. 이 공간 운영하면서 맡고 있는 부수적인 일들이 있지요. 이를테면 지리산케이블카반대 산청주민대책위에서 사무국장 일을 하고 있고, 올해부터는 필봉문학회에서도 사무국장 일을 하고 있어요. 창원에 마을공동체협력지원센터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 프리랜서 일을 했었어요. 기자 비슷한데 마을 공동체 활동을 취재해서 기사를 써서 보내주면 활동비로 고료를 주었거든요. 그래서 가게에 출근하지 않는 날에 그런 활동, 말하자면 취재를 하고 가게에 손님이 없으면 그걸 가지고 글을 쓰는 작업을 했었어요. 지리산케이블카반대 일은 ‘이로운 식탁’이라는 소셜다이닝 모임이 있었는데 그 회원들의 의견이 다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한번 목소리를내어보자, 반대하는 활동을 해보자 해서 시작이 되었어요. 그렇게 흘러흘러 어떻게 직함을 가지게 되었네요. (웃음) 처음에는 그럴 줄 몰랐어요. - 총선을 앞둔 장날이라 녹색당원들의 선거운동이 있었다. 이해성씨는 비당원 지지자라고 한다. 산청지역에서 녹색정의당은 362표를 득표했다. 울어야할까 웃어야할까. 문 : 산청에서 태어났죠? 해성 : 아니요. 태어나기로는 인천 어디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는데 정확히는 모르고요. 산청에는 다섯 살 때 내려왔어요. 부모님이 귀농하시면서. 문 : 자라온 과정이 범상치는 않았던 것 같은데? 해성 : 평범하다고 할 수는 없죠. 문 : 책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가이아의 정원』이라는 책과 함께 이해성이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 같은데요? 물론 그 전에 번역한 책도 있지만. 이 책의 반향이 컸죠? 해성 : 이 책이 10년 전에 나왔어요. 그때 당시에는 반향이 별로 없었어요. 좀 어려운 책이라고 해야 되나, 9~10년 정도 지나니까 지금 반향이 있어요. 읽었다는 분들도 많이 있고 역자를 만나고 싶다고 찾아오는 분도 있고, 만나고 싶었는데 당신이 이 사람이야? 하면서 반가워 하고 그런 분들도 계시고 정원 프로그램에서 추천받았다거나...... 문 : 제가 책 얘기를 꺼낸 이유는, 일반적인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고 부모님의 깊은 영향이나 아니면 자신의 성찰의 과정을 통해서 생태주의를 자신의 가치관, 세계관으로 받아들인 새로운 세대가 나타났구나 하는 ‘그런 사람이 다 있어?’ 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어쨓든 다섯 살 때부터 산청에서 쭉 살고 있는 거죠? 산청을 떠난 적은 없는 거죠? 해성 : 예. 여행 차원에서 간 적은 있지만 주소는 그대로였어요. 떠난 적 없다고 봐야죠. 주옥 : 세상으로 나오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지리산 활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해성이라는 사람을 몰랐는데 케이블카 반대 활동 속에서 어느 날 정말 혜성처럼 등장을 한 거에요. 저는 어느 신문사 기자라고 생각을 했어요. 제가 모르는 얼굴인데 젊었고 기자처럼 막 왔다갔다 하고 회의하는 자리에도 와서 앉아있고 그래서 누굴까 실은 굉장히 궁금했어요. 그러다가 조금씩 알게 되는 과정에서 어디에 있다가 나타난 걸까 왜 이제야 나타난 거지 생각을 했어요. 문 : 청소년기나 성장기를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면 좋겠어요. 해성 : 부모님이 귀농을 해서 살게 되신 곳이 오부면 일물마을 입니다.거기가 산청에서도 오지로 소문난 곳이에요. 비탈길을 올라가면 산꼭대기에 평평한 곳이 있어서 밭과 논농사를 지을 수 있어요. 이런 산동네에 들어갔는데, 원래 부모님이 연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후쿠오카 마사노부라는 일본분이 계시잖아요. <생명의 농업>이는 책을 쓰신. 그 책을 보고 감명을 받아가지고 직장을 때려치우고 자연주의적인 삶을 추구하겠다, 자급자족을 하겠다, 이러면서 내려오신 거예요. 진주에 집을 구해 살면서 여기저기 다녀보다가 그 동네를 선택해서 들어간 거지요. 그때 당시에는 동네에 차도 한 대도 없었고 부엌도 싱크대가 없이 부뚜막에서 밥을 해먹는... 전기는 들어왔어요. 문 : 어머니, 아버지가 의견이 완전히 일치하셔서? 해성 : 일치하셨겠죠. 저는 어렸을 때니까 속사정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일치하셨으니까 들어오신 거죠. 그 동네는 당시 여러 가지 작물들을 심어서 주민들이 먹거리는 자급을 하고 동시에 환금작물을 재배하거나, 당시에는 양잠을 해가지고 경제를 영위하는 형태의 동네였어요. 그런 모습을 보고 부모님이 그 동네를 선택하셨나 봐요. 문 : 부모님 연세가? 해성 : 60대 후반, 70 이렇게 되셨어요. 그래서 집집마다 누에를 키우는 별채라고 해야 되나 그런 걸 지어가지고 불을 때고 했는데, 지금은 누에를 안 키우지만 그런 건물들이 남아서 창고로 사용하는 경우를 볼 수가 있죠. 잠사라고 할 수 있지요. 그 바닥을 흙으로 마감을 했는데 누에를 키우려면 거기에 시멘트를 발라가지고 불을 땔 수 있게 한 거에요. 따뜻해야 누에가 클 수가 있으니까. 어렸을 때에는 누에를 쌓아놓고 투명해지면 골라내고 그런 일들을 동네아주머니들 도와서 하고 그랬죠. 그런 기억이 있어요. 부모님은 문명의 이기를 가지고 들어가서 그게 하나씩 고장날 때마다 하나씩 안 쓰게 되었어요. 처음에 티브이 가지고 들어가서 안테나 부러지면 안 보게 되고 세탁기 고장나면 안 쓰고 냉장고 고장나면 역시 안 쓰는 식이었어요. - 지리산 케이블카 반대 논의가 시작된 이로운 식탁 모임. 왼쪽부터 영권, 해성, 한범, 경옥, 현정. 사진은 현하. 문 : 부모님이 우리나라 생태주의 1세대 이전 0세대라고 할 수 있겠네요. 후쿠오카 마사노부가 소개되자마자 여기에 심취한 경우 같아요. 해성 : 맞아요. 그분 책을 번역한 최성현 선생님과 자연학교라는 모임을 만들어서 1년에 네번 정도 모임도 하셨어요. 그 모임을 우리 집에서 하기도 했고요. 제가 어렸을 때였죠. 그 모임 회원 가운데 실제로 귀농을 하신 분들은 얼마 안 돼요. 문 : 쉬운 일은 아니었겠죠. 그 모임을 하시면서 부모님께서는 자신들이 생태주의를 실천하셨을 뿐 아니라 자식에게까지 영향을 미치셨어요. 뭐랄까 생태근본주의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해성 : 모든 것에 자급자족을 추구하셨어요. 먹거리를 자급하고 연료를 자급하고 의료, 문화, 교육까지도 자급을 해보겠다 이런 태도이셨어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고 볼 수 있죠. 물론 한계도 있지만... 문 : 부모님한테 어학을 배우신 건가요? 『가이아의 정원』 책 얘기를 해볼까요? 해성 : 이 책을 제가 선정했어요. 친구 집에 가서 이 책을 발견하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소개를 받았어요. 한 챕터를 번역하고 나서 당시 들녘에서 귀농총서를 내고 있었기 때문에 원고를 보냈죠. 검토를 해달라고. 그런데 들녘에서 연락이 왔어요. 자기들이 이 책을 선정해서 옮기고 있다는 거예요. 이은주 선생님이라고, 근데 이분은 농사를 해보지 않으신 전문번역가이시잖아요. 책 내용은 농사와 관련한 전문적인 내용이고요. 농사와 관련한 경험과 지식을 가진 사람이 옮기는 게 낫죠. 그래서 이 두 개의 원고를 비교 검토를 해보고 들녘에서 저로 역자를 바꾼 거지요. 그래도 이현주 선생님이 반절을 옮겼으니까 그 부분은 제가 윤문을 했어요. - '지금부터 판타지'에는 기후위기 시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귀한 책과 자료들이 쌓여있다. 문 : 이 책을 보자마자 매료가 되었다는 거죠? 데이비드 홀그램이 쓴 『퍼머컬처』도 비슷한 시기에 나왔는데 내용이 너무 이론적이어서 읽기가 쉽지만은 않은데 반해서 『가이아의 정원』은 이야기 전개가 흥미진진하다는 느낌입니다. 퍼머컬처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네요. 해성 : 저도 이 책과 같이 해보려고 노력을 했지요. 그대로 못한 부분들도 있고요. 이 책에서는 관찰 과정을 굉장히 중요시하고 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관찰만 하는 기간이 아주 중요하고, ‘관찰 속에 해답이 있다’라고 하는데 내가 그만큼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관찰의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뭔가 기획하는 것도 의사결정 과정이 가족 안에서도 완전히 민주적이지는 않지요.(웃음) 즉 어떤 한계가 존재한다는 말이지요. 하고 싶지만 못하는 부분들도 있어요. 이를테면 무경운으로 풀을 둔 채 관리를 하고 있어요. 방치한 게 아닌데, 아버지가 ‘왜 먹는 것도 아닌데 심어놓았냐’고 하시면서 허브를 갈아엎어버린다거나 풀을 다 뽑아버린다거나 이런 일이 발생을 하는 거죠. 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좀 멀리 간다거나 접근이 어려운 곳에 가서 해야 하는 거에요. 왔다갔다 하는 일이 힘들잖아요. 이렇게 실제로 해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장벽에 부딪히게 돼요. 문 : 꽤 독특한 교육과정을 거치셨죠? 해성 : 초등학교만 다니고 중등과정부터는 집에서 공부를 했어요. 주경야독인데 정확히는 아침, 초저녁에 일하고 한낮에는 공부를 하는 거였죠. 문 : 의무교육을 안 해도 괜찮아요? 해성 : 이유가 있으면 안 해도 돼요. 제가 중학교에 들어가는 해에 중학교가 의무교육이 됐어요. 그래서 산청중학교에 적을 두고 계속 입학유예를 했어요. 그걸 3년인가 하면 자동퇴학이 되거든요. 그때는 그렇게 했었죠. 곤란했던 게, 제가 산청중학교에 적을 두지 않으면 학교에두 개 반이 있었는데 하나가 없어져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러니까 학교에서 간청을 하게 된거죠. 반을 유지를 해야 하니까. 그 시절에는 홈스쿨링이라는 단어가 많이 알려지지도 않았고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 비행 청소년인 때였어요. 학교 안 가니까 낮에 읍에 돌아다니면 ‘너 왜 학교 안 갔어? 학교 가라’ 이렇게 잔소리가 들어오는 거죠. 그러니까 일종의 대인기피증이 생겨버려요. 설명하기도 귀찮고, 설명하면 ‘너희 부모님은 왜 그러니? 잘못하는 거야!’ 그러면 또 제가 변명을 해야 되는 게 너무 피곤한 거에요. 지금 학교 안 다니는 친구들은 겪지 않는 문제죠. 저는 정말 강력한 태클이랄까 그런 걸 겪었어요. 그래서 몇 년 동안은 거의 두문불출했었어요. 문 : 책을 세 권 번역했고, 그리고 글 쓰는 일을 많이 하시는 것 같네요. 해성 : 그렇죠. 많이 쓴다기보다는, 번역을 하다 보니까 내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문 : 앞에서 요즘 들어 책에 대해서 관심을 표현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했죠? 전반적으로 퍼머컬처를 공부하거나 시도하는 분들이 많아졌기 때문이겠죠? 해성 : 퍼머컬처도 늘었지만 그뿐 아니라 정원, 시민정원사 과정 같은 게 많이 생겼구요. 정원디자인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많아진 거 같아요. 프로그램 강사들이 이 책을 추천하는 경우가 많아요. 퍼머컬처를 먼저 알아서 찾아본다기보다는. <가이아의 정원>은 농업분야라기보다 기본적으로 조경 디자인 서적이에요. 문 : 산청케이블카반대투쟁에 대한 얘기를 해주시죠. 해성 : 작년 6월 산청군에서 케이블카 신청서류를 환경부에 제출했어요. 이에 우리가 대책위를 조직해서 기자회견을 가졌고 꾸준히 월요일 아침과 수요일 오후 피케팅을 하고 있어요. 공개 질의서를 군에 내고 거기에 대한 답변이 오면 그 내용과 우리의 입장을 기자들에게 알리는 과정에서 제가 보도자료를 작성해서 배포하는 작업을 꾸준하게 했습니다. 저로서는 이렇게 사무국장 일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제가 회의록을 작성한다든지 기록하고 관리하는 일을 전에 좀 해봤어요. 다른 분들보다 제가 컴퓨터로 하는 일, 디자인 작업 등을 할 줄 알다 보니까 실무를 맡게 된거죠. 그 결과 사무국장이라는 직함을 갖게 되었죠. 문 : 지역에 케이블카 이외에 생태, 환경 관련 현안은 어떤 게 있나요? 해성 : 덕산댐 관련 이슈가 있는데 지금 추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유튜브 찾아보면 황당한 영상이 올라와 있어요. ‘산청의 천년대계 덕산댐’이라고. 덕산댐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이건 거기 사시는 분들도 반대를 해요. 생수공장 문제도 있어요. 기존에 지리산 산청샘물이라고 있는데 취소공을 더 파려고 하는 것이지요. 근데 공청회도 하지 않고 있어요. 그것 때문에 덕천강 물이 마르고 있는데요. 수위가 내려간 게 재작년부터 확연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제가 그쪽에 살고 있지 않으니까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듣기에 그렇습니다. 문 : 함께 하는 사람들 얘기를 듣고 싶네요. 해성 : 케이블카 반대운동을 한다니까 후원을 많이 해주시고 그래요. 지역에 계신 분들 가운데 관청과 관련된 일을 하는 분들은 관에서 추진하는 일을 대놓고 반대하지 못하는 입장이더라구요. 그런 분들은 반대 발언은 하지 못하고 그냥 후원을 하시죠. 주옥 : 지리산을 지키는 활동 속에서 어떤 부분은 어쩔 수 없이 내주고 어떤 부분은 기필코지켜야 하는 부분이 있을텐데 그건 어떻게 생각해요? 해성 : 많은 것들이 필수적인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일물 마을에 진입하는 도로가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몰라요. 아마 다섯 번 정도는 될 거에요. 점점 넓혀지고 지금은 아스팔트가 깔려 있으니까 이제는 상황이 종료된 것이겠죠. 근데 이것조차 한번은 우리 집 앞에 언덕을 밀어버리고 직선도로를 내겠다고 해서 반대해서 무산시킨 일이 있어요. 이 일도 지역 주민인 우리 가족이나 이웃들을 따돌리고 공청회를 진행하고 계획을 세웠었어요. 주민이고 내 곁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당연히 막아야죠. 정말 불필요한 일이지만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진행을 해요. 특히 도로공사 같은 경우에. 그리고 바로 아래 동네에 큰 댐을 만들었어요. 저는 몰랐어요. 근데 주민설명회, 공청회를 했대요. 제 경우 윗동네 사람이니까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수몰된 부분이 생기니까 도로를 부수고 다시 내는 건데 사실은 그 저수지도 필요가 없어요. 농업용수라는 핑계가 있지만요. 그게 없어도 다 농사를 지었었거든요. 그래서 어디까지를 양보하고 어디까지 막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정말로 거기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을 하고 이게 무엇을 위한 것인가 파악하지 않으면 어려운거 같아요. ‘나는 이제 이 땅을 사용할 일이 없을 거야. 이 땅을 팔 수도 없을 거야. 그러니 보상을 받아야겠어’라고 생각하고 공사를 진행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 경우에는 사실 필요가 없는데 하는 거죠. 목적이 따로 있는데 다른 핑계를 내세우기 때문에 그걸 확실히 알지 못하면 말하기가 어려워요. 그런 사건이 많이 있었어요. 문 : 자본이 굴러가고 우리 사회에 필요하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돈을 벌면 하는 거죠. 해성 : 돈 번다는데 왜 반대하냐 이런 논리가 있잖아요.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다 이런 논리. 저는 지원을 하고 싶다면 1/n로 나눠주는 게 제일 낫다고 생각해요. 이 사회는 인프라가 너무 충만합니다. 주옥 : 이렇게 전면적인 활동에 해성이 뛰어든 내적 동력이 무엇일까 궁금해요. 부모님의 영향이라든지 살아온 과정이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적극적인 활동가로 나서게 된 데에는 또 다른 계기라든지 이유가 있을 법도 한데...... - 인터뷰에 응한 이해성님과 함께 한 주옥, 밤구, 선재 해성 : 활동가 일이 게 제 의견을 표명하는 일이잖아요? 지금으로서는 글 쓰는 활동과 접목해서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산만하면 피곤해지거든요. 사회적 활동에 대한 관심은 제가 산속에서 가족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10년 동안 아이를 키우면서 해야 할 일이 있고, 그때 할 수 있는 일이 있잖아요. 어떤 일은 못하게 되는 거죠. 아랫동네에 저수지가 만들어지는데 그것도 모르고, 소식을 못 듣고, 그렇게 됩니다. 내 주변 일들을 알고, 넓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싶다는 욕구가 차츰 쌓여온 것이겠죠. 아이들도 충분히 크고 저도 마흔 가까이 되면서 폭발하듯이 전환이 된 것 같아요. 특히 이 가게를 하게 되면서. 그게 여러 층위에서 일어났고 사적인 부분들도 있어서 이 인터뷰 자리에서 다 말하기는 어렵네요. 인생이 2막이라고 한다면, 1막에서 경험하고 쌓아온 것들을 2막에서 좀 더 확장된 영역, 의미 있는 일들에 적용하고 싶어요. ‘하고 싶다’기보다는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있는 것 같아요. 문 : 『가이아의 정원』과 관련된 활동은 있을까요? 해성 : 산청에 ‘042(공간과 사는 이야기)’라는 모임이 있어요. 이 모임 후기를 매번 제가 써서 올리고 있는데, 저저번 모임에서는 이 책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눴어요. 제가 강연자로 초빙된거죠. 거기서 퍼머컬처 공부하는 모임을 하자는 얘기도 나오고 그랬어요. 다만 제가 시간상 가능할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지역에서 자기 정원, 텃밭 좀 봐달라, 컨설팅 해달라고 하는 분들이 계셔요. 그래서 가서 살펴보고 이렇게 하면 좋겠다 저렇게 하면 좋겠다 얘기 나누고 그래요. 문 : 홍성에 가보니까 풀무학교가 처음에 만든 정원을 이웃들이 따라하면서 퍼져나가더라구요. 그렇게 생태적 삶의 모델이랄까 그런게 퍼져나가는...... 해성 : 가족 단위의 퍼머컬처를 만드는 방법도 있지만 퍼머컬처가 그런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니까 소읍이나 도시의 공동 농장이라든가 군데군데 게릴라 가드닝을 한다든가 또는 퇴비장 사업 같은 일에도 관심이 있어요. 제가 이 가게에서 생활을 하는데 여기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를 통에 담아서 배출하지 않아요. 이 뒤쪽에 하나로마트 뒷마당이 있는데 거기가 방치가 되어 있어요. 나무들이 몇 그루 심어져 있고 여름이 되면 풀이 우거지고... 거기에서 퇴비를 만들어요. 그 퇴비를 쓰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는 나무들에게 돌려주면 좋고 해먹을 걸어서 누워있기도 하고요. 고추나 가지를 심어본 적도 있어요. 그런데 사람이 모든 걸 할 수는 없겠지요. 주옥 : 구례에 있는 한겨레생명평화공원도 함께 보고 거기서 활동하는 청년 활동가들도 만나면 좋겠어요. 해성 : 예, 갈게요. 저는 일단 이런 것들을 기사화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이야기를 많이 어떤 정보들이 가닿지 않는 곳에 전해지고, 그때그때 상황이 되는 사람이 적당한 일을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가이아의 정원』을 소개시켜준 니코라는 친구가 한국에 들어왔거든요. 그 친구는 캐나다에서 공동농장 매니저를 하고 있어요. 여기서 그 친구가 작은 강연회를 했어요. 사람들이 관심도 많고 호기심도 크더라구요. 후기를 제가 써서 올리면 사람들이 그런 곳도 있구나 인식을 하고, 상황이 되면 하겠죠. 그러면 제가 일종의 씨앗이 되는 셈이고... 문 : 조만간 구례에 오시겠군요! 해성 : 실은 지리산사람들 운영위원 함께 하자고 하셔서 거기까지는 못하겠고 그래도 같이 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아서 첫 번째 월요일은 비웠어요. 가게를 하면서 1주일에 사흘은 여기 나오고 나흘은 농사를 지었어요. 작년에 5일을 여기 나오게 되면서 농사일에서는 손을 뗐어요. 병행이 불가능해요. 언젠가 이 일을 그만 두고 돌아가서 농사를 짓는 삶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지금은 경작을 할 수가 없어요. 저는 사람이 농사를 지어야 한다 자급자족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거의 세뇌가 된 사람이라서 농사를 안 짓는 생활이 죄책감으로 다가왔어요. 머리로는 안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신체적으로 느끼는 반응이 있는 거죠. 지금은 많이 벗어났는데, 농사일을 여전히 좋아하긴 합니다. 문 : 예전에 어떤 강의에서 강사분이 말하길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농사짓는 사람과 안 짓는 사람’ 이렇게 말을 했는데, 저도 그때는 그 말이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식의 언술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해성 : 저 역시 그런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것 같아서 싫어요. 그런데 좀 완화해서 농사를 한번이라도 지어본 사람과 한번도 안 지어본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겠지요. 문 : 자본주의 물질문명이 마치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벗어나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데 그 결과가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있어요. 문(밤구) : 영성적인 사고나 몸살림같은 거 보면서 산속에서 살면서 그런 것들을 가까이 하게된 계기나 배경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요. 해성 : 몸살림은 아니고 10대 때 요가를 했어요. 원래 제가 몸치였거든요. 일은 해요. 오래 걷기도 해요. 그러니까 지구력은 있어요. 또 보기보다는 힘이 세요. 그런데 춤추라고 하면 못하고 정해진 동작을 따라 하는 것도 잘 못하고 그랬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걸 극복해보자, 몸치를 벗어나자, 해서 처음에는 요가를 했어요. 요가 선생님한테 거의 세 시간 강의 듣고, 그분이 추천한 『요가 디피카』라는 책을 보고, 책 내용 따라 하고 해서 다리도 일자로 찢어졌었어요. 지금은 못 하지만. 그런데 요가는 정적이잖아요. 그래서 그 다음에는 태극권을 했어요. 태극권은 꽤 오래 했죠. 밝은빛 태극권이라는 곳에서 한달의 반은 서울에 있으면서 중국 선생님이 강의한 내용 녹취해가지고 태극권 책 만드는 작업도 돕고 그랬어요. 문 : 앞으로의 계획은? 해성 : 1년 정도의 계획밖에 없어요. 1년 정도는 지금 하던 작업을 계속한다. 그 이후의 계획은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어요. 1년 동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비전 세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제가 타로를 해요. 한 삼년 정도 밖에 안 됐어요. 다른 사람들의 삶에 궁금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듣는 도구로 사용했던 거에요.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데이터를 모으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세상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그래서 이렇게 데이터를 모으는 작업을 1년은 더 할 겁니다. 문 : 그리고 지리산인에 한 달에 두 번씩 글을 올리는 것도 계획이잖아요? 5년 동안! 해성 : 5년이요? (웃음) 타로에 대한 책도 써야 돼요. 지금 70% 쓰고 있는데 그 다음에 탁 걸려가지고 안돼요. 그것도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올해는 될수록 그 작업을 마무리하고 싶네요. 문 : 타로의 방법론에 대한 책인가요? 아니면 인생에 대한 책? 해성 : 타로에 대한 해설서인데요 인생에 대한 책도 되겠죠. 타로 자체가 인생에 관한 것이니까. 인터뷰를 마치며 타로 또는 그가 풀어놓을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 이야기
    • 지리산자락 사람들
    2024-04-17

우리마을 검색결과

  • 대지가 이끄는 길 따라 한 걸음씩
    머컬처 또는 숲밭을 가꾸고자 하는 사람은 『가이아의 정원』을 멋지게 번역한 사람으로 이해성을 기억할 것이다. 책이 나온 후 십 년이 넘게 흘렀는데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우리의 가이아가 신음 소리를 내며 죽어가고 있기에 이해성이 들려주는 오늘의 말을 듣고 싶었다. 그는 의외로 바로 우리 곁에 있었다. 지금은 지리산 활동가로, 그는 그 사이 한 번도 길을 벗어나지 않은 것 같다. 문 : 살아온 얘기랄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해성 : 저는 3년 전부터 ‘지금부터 판타지’라고 하는 이 공간을 운영해요. 카페이자 서점이지요. 이 공간 운영하면서 맡고 있는 부수적인 일들이 있지요. 이를테면 지리산케이블카반대 산청주민대책위에서 사무국장 일을 하고 있고, 올해부터는 필봉문학회에서도 사무국장 일을 하고 있어요. 창원에 마을공동체협력지원센터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 프리랜서 일을 했었어요. 기자 비슷한데 마을 공동체 활동을 취재해서 기사를 써서 보내주면 활동비로 고료를 주었거든요. 그래서 가게에 출근하지 않는 날에 그런 활동, 말하자면 취재를 하고 가게에 손님이 없으면 그걸 가지고 글을 쓰는 작업을 했었어요. 지리산케이블카반대 일은 ‘이로운 식탁’이라는 소셜다이닝 모임이 있었는데 그 회원들의 의견이 다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한번 목소리를내어보자, 반대하는 활동을 해보자 해서 시작이 되었어요. 그렇게 흘러흘러 어떻게 직함을 가지게 되었네요. (웃음) 처음에는 그럴 줄 몰랐어요. - 총선을 앞둔 장날이라 녹색당원들의 선거운동이 있었다. 이해성씨는 비당원 지지자라고 한다. 산청지역에서 녹색정의당은 362표를 득표했다. 울어야할까 웃어야할까. 문 : 산청에서 태어났죠? 해성 : 아니요. 태어나기로는 인천 어디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는데 정확히는 모르고요. 산청에는 다섯 살 때 내려왔어요. 부모님이 귀농하시면서. 문 : 자라온 과정이 범상치는 않았던 것 같은데? 해성 : 평범하다고 할 수는 없죠. 문 : 책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가이아의 정원』이라는 책과 함께 이해성이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 같은데요? 물론 그 전에 번역한 책도 있지만. 이 책의 반향이 컸죠? 해성 : 이 책이 10년 전에 나왔어요. 그때 당시에는 반향이 별로 없었어요. 좀 어려운 책이라고 해야 되나, 9~10년 정도 지나니까 지금 반향이 있어요. 읽었다는 분들도 많이 있고 역자를 만나고 싶다고 찾아오는 분도 있고, 만나고 싶었는데 당신이 이 사람이야? 하면서 반가워 하고 그런 분들도 계시고 정원 프로그램에서 추천받았다거나...... 문 : 제가 책 얘기를 꺼낸 이유는, 일반적인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고 부모님의 깊은 영향이나 아니면 자신의 성찰의 과정을 통해서 생태주의를 자신의 가치관, 세계관으로 받아들인 새로운 세대가 나타났구나 하는 ‘그런 사람이 다 있어?’ 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어쨓든 다섯 살 때부터 산청에서 쭉 살고 있는 거죠? 산청을 떠난 적은 없는 거죠? 해성 : 예. 여행 차원에서 간 적은 있지만 주소는 그대로였어요. 떠난 적 없다고 봐야죠. 주옥 : 세상으로 나오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지리산 활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해성이라는 사람을 몰랐는데 케이블카 반대 활동 속에서 어느 날 정말 혜성처럼 등장을 한 거에요. 저는 어느 신문사 기자라고 생각을 했어요. 제가 모르는 얼굴인데 젊었고 기자처럼 막 왔다갔다 하고 회의하는 자리에도 와서 앉아있고 그래서 누굴까 실은 굉장히 궁금했어요. 그러다가 조금씩 알게 되는 과정에서 어디에 있다가 나타난 걸까 왜 이제야 나타난 거지 생각을 했어요. 문 : 청소년기나 성장기를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면 좋겠어요. 해성 : 부모님이 귀농을 해서 살게 되신 곳이 오부면 일물마을 입니다.거기가 산청에서도 오지로 소문난 곳이에요. 비탈길을 올라가면 산꼭대기에 평평한 곳이 있어서 밭과 논농사를 지을 수 있어요. 이런 산동네에 들어갔는데, 원래 부모님이 연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후쿠오카 마사노부라는 일본분이 계시잖아요. <생명의 농업>이는 책을 쓰신. 그 책을 보고 감명을 받아가지고 직장을 때려치우고 자연주의적인 삶을 추구하겠다, 자급자족을 하겠다, 이러면서 내려오신 거예요. 진주에 집을 구해 살면서 여기저기 다녀보다가 그 동네를 선택해서 들어간 거지요. 그때 당시에는 동네에 차도 한 대도 없었고 부엌도 싱크대가 없이 부뚜막에서 밥을 해먹는... 전기는 들어왔어요. 문 : 어머니, 아버지가 의견이 완전히 일치하셔서? 해성 : 일치하셨겠죠. 저는 어렸을 때니까 속사정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일치하셨으니까 들어오신 거죠. 그 동네는 당시 여러 가지 작물들을 심어서 주민들이 먹거리는 자급을 하고 동시에 환금작물을 재배하거나, 당시에는 양잠을 해가지고 경제를 영위하는 형태의 동네였어요. 그런 모습을 보고 부모님이 그 동네를 선택하셨나 봐요. 문 : 부모님 연세가? 해성 : 60대 후반, 70 이렇게 되셨어요. 그래서 집집마다 누에를 키우는 별채라고 해야 되나 그런 걸 지어가지고 불을 때고 했는데, 지금은 누에를 안 키우지만 그런 건물들이 남아서 창고로 사용하는 경우를 볼 수가 있죠. 잠사라고 할 수 있지요. 그 바닥을 흙으로 마감을 했는데 누에를 키우려면 거기에 시멘트를 발라가지고 불을 땔 수 있게 한 거에요. 따뜻해야 누에가 클 수가 있으니까. 어렸을 때에는 누에를 쌓아놓고 투명해지면 골라내고 그런 일들을 동네아주머니들 도와서 하고 그랬죠. 그런 기억이 있어요. 부모님은 문명의 이기를 가지고 들어가서 그게 하나씩 고장날 때마다 하나씩 안 쓰게 되었어요. 처음에 티브이 가지고 들어가서 안테나 부러지면 안 보게 되고 세탁기 고장나면 안 쓰고 냉장고 고장나면 역시 안 쓰는 식이었어요. - 지리산 케이블카 반대 논의가 시작된 이로운 식탁 모임. 왼쪽부터 영권, 해성, 한범, 경옥, 현정. 사진은 현하. 문 : 부모님이 우리나라 생태주의 1세대 이전 0세대라고 할 수 있겠네요. 후쿠오카 마사노부가 소개되자마자 여기에 심취한 경우 같아요. 해성 : 맞아요. 그분 책을 번역한 최성현 선생님과 자연학교라는 모임을 만들어서 1년에 네번 정도 모임도 하셨어요. 그 모임을 우리 집에서 하기도 했고요. 제가 어렸을 때였죠. 그 모임 회원 가운데 실제로 귀농을 하신 분들은 얼마 안 돼요. 문 : 쉬운 일은 아니었겠죠. 그 모임을 하시면서 부모님께서는 자신들이 생태주의를 실천하셨을 뿐 아니라 자식에게까지 영향을 미치셨어요. 뭐랄까 생태근본주의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해성 : 모든 것에 자급자족을 추구하셨어요. 먹거리를 자급하고 연료를 자급하고 의료, 문화, 교육까지도 자급을 해보겠다 이런 태도이셨어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고 볼 수 있죠. 물론 한계도 있지만... 문 : 부모님한테 어학을 배우신 건가요? 『가이아의 정원』 책 얘기를 해볼까요? 해성 : 이 책을 제가 선정했어요. 친구 집에 가서 이 책을 발견하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소개를 받았어요. 한 챕터를 번역하고 나서 당시 들녘에서 귀농총서를 내고 있었기 때문에 원고를 보냈죠. 검토를 해달라고. 그런데 들녘에서 연락이 왔어요. 자기들이 이 책을 선정해서 옮기고 있다는 거예요. 이은주 선생님이라고, 근데 이분은 농사를 해보지 않으신 전문번역가이시잖아요. 책 내용은 농사와 관련한 전문적인 내용이고요. 농사와 관련한 경험과 지식을 가진 사람이 옮기는 게 낫죠. 그래서 이 두 개의 원고를 비교 검토를 해보고 들녘에서 저로 역자를 바꾼 거지요. 그래도 이현주 선생님이 반절을 옮겼으니까 그 부분은 제가 윤문을 했어요. - '지금부터 판타지'에는 기후위기 시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귀한 책과 자료들이 쌓여있다. 문 : 이 책을 보자마자 매료가 되었다는 거죠? 데이비드 홀그램이 쓴 『퍼머컬처』도 비슷한 시기에 나왔는데 내용이 너무 이론적이어서 읽기가 쉽지만은 않은데 반해서 『가이아의 정원』은 이야기 전개가 흥미진진하다는 느낌입니다. 퍼머컬처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네요. 해성 : 저도 이 책과 같이 해보려고 노력을 했지요. 그대로 못한 부분들도 있고요. 이 책에서는 관찰 과정을 굉장히 중요시하고 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관찰만 하는 기간이 아주 중요하고, ‘관찰 속에 해답이 있다’라고 하는데 내가 그만큼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관찰의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뭔가 기획하는 것도 의사결정 과정이 가족 안에서도 완전히 민주적이지는 않지요.(웃음) 즉 어떤 한계가 존재한다는 말이지요. 하고 싶지만 못하는 부분들도 있어요. 이를테면 무경운으로 풀을 둔 채 관리를 하고 있어요. 방치한 게 아닌데, 아버지가 ‘왜 먹는 것도 아닌데 심어놓았냐’고 하시면서 허브를 갈아엎어버린다거나 풀을 다 뽑아버린다거나 이런 일이 발생을 하는 거죠. 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좀 멀리 간다거나 접근이 어려운 곳에 가서 해야 하는 거에요. 왔다갔다 하는 일이 힘들잖아요. 이렇게 실제로 해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장벽에 부딪히게 돼요. 문 : 꽤 독특한 교육과정을 거치셨죠? 해성 : 초등학교만 다니고 중등과정부터는 집에서 공부를 했어요. 주경야독인데 정확히는 아침, 초저녁에 일하고 한낮에는 공부를 하는 거였죠. 문 : 의무교육을 안 해도 괜찮아요? 해성 : 이유가 있으면 안 해도 돼요. 제가 중학교에 들어가는 해에 중학교가 의무교육이 됐어요. 그래서 산청중학교에 적을 두고 계속 입학유예를 했어요. 그걸 3년인가 하면 자동퇴학이 되거든요. 그때는 그렇게 했었죠. 곤란했던 게, 제가 산청중학교에 적을 두지 않으면 학교에두 개 반이 있었는데 하나가 없어져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러니까 학교에서 간청을 하게 된거죠. 반을 유지를 해야 하니까. 그 시절에는 홈스쿨링이라는 단어가 많이 알려지지도 않았고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 비행 청소년인 때였어요. 학교 안 가니까 낮에 읍에 돌아다니면 ‘너 왜 학교 안 갔어? 학교 가라’ 이렇게 잔소리가 들어오는 거죠. 그러니까 일종의 대인기피증이 생겨버려요. 설명하기도 귀찮고, 설명하면 ‘너희 부모님은 왜 그러니? 잘못하는 거야!’ 그러면 또 제가 변명을 해야 되는 게 너무 피곤한 거에요. 지금 학교 안 다니는 친구들은 겪지 않는 문제죠. 저는 정말 강력한 태클이랄까 그런 걸 겪었어요. 그래서 몇 년 동안은 거의 두문불출했었어요. 문 : 책을 세 권 번역했고, 그리고 글 쓰는 일을 많이 하시는 것 같네요. 해성 : 그렇죠. 많이 쓴다기보다는, 번역을 하다 보니까 내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문 : 앞에서 요즘 들어 책에 대해서 관심을 표현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했죠? 전반적으로 퍼머컬처를 공부하거나 시도하는 분들이 많아졌기 때문이겠죠? 해성 : 퍼머컬처도 늘었지만 그뿐 아니라 정원, 시민정원사 과정 같은 게 많이 생겼구요. 정원디자인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많아진 거 같아요. 프로그램 강사들이 이 책을 추천하는 경우가 많아요. 퍼머컬처를 먼저 알아서 찾아본다기보다는. <가이아의 정원>은 농업분야라기보다 기본적으로 조경 디자인 서적이에요. 문 : 산청케이블카반대투쟁에 대한 얘기를 해주시죠. 해성 : 작년 6월 산청군에서 케이블카 신청서류를 환경부에 제출했어요. 이에 우리가 대책위를 조직해서 기자회견을 가졌고 꾸준히 월요일 아침과 수요일 오후 피케팅을 하고 있어요. 공개 질의서를 군에 내고 거기에 대한 답변이 오면 그 내용과 우리의 입장을 기자들에게 알리는 과정에서 제가 보도자료를 작성해서 배포하는 작업을 꾸준하게 했습니다. 저로서는 이렇게 사무국장 일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제가 회의록을 작성한다든지 기록하고 관리하는 일을 전에 좀 해봤어요. 다른 분들보다 제가 컴퓨터로 하는 일, 디자인 작업 등을 할 줄 알다 보니까 실무를 맡게 된거죠. 그 결과 사무국장이라는 직함을 갖게 되었죠. 문 : 지역에 케이블카 이외에 생태, 환경 관련 현안은 어떤 게 있나요? 해성 : 덕산댐 관련 이슈가 있는데 지금 추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유튜브 찾아보면 황당한 영상이 올라와 있어요. ‘산청의 천년대계 덕산댐’이라고. 덕산댐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이건 거기 사시는 분들도 반대를 해요. 생수공장 문제도 있어요. 기존에 지리산 산청샘물이라고 있는데 취소공을 더 파려고 하는 것이지요. 근데 공청회도 하지 않고 있어요. 그것 때문에 덕천강 물이 마르고 있는데요. 수위가 내려간 게 재작년부터 확연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제가 그쪽에 살고 있지 않으니까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듣기에 그렇습니다. 문 : 함께 하는 사람들 얘기를 듣고 싶네요. 해성 : 케이블카 반대운동을 한다니까 후원을 많이 해주시고 그래요. 지역에 계신 분들 가운데 관청과 관련된 일을 하는 분들은 관에서 추진하는 일을 대놓고 반대하지 못하는 입장이더라구요. 그런 분들은 반대 발언은 하지 못하고 그냥 후원을 하시죠. 주옥 : 지리산을 지키는 활동 속에서 어떤 부분은 어쩔 수 없이 내주고 어떤 부분은 기필코지켜야 하는 부분이 있을텐데 그건 어떻게 생각해요? 해성 : 많은 것들이 필수적인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일물 마을에 진입하는 도로가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몰라요. 아마 다섯 번 정도는 될 거에요. 점점 넓혀지고 지금은 아스팔트가 깔려 있으니까 이제는 상황이 종료된 것이겠죠. 근데 이것조차 한번은 우리 집 앞에 언덕을 밀어버리고 직선도로를 내겠다고 해서 반대해서 무산시킨 일이 있어요. 이 일도 지역 주민인 우리 가족이나 이웃들을 따돌리고 공청회를 진행하고 계획을 세웠었어요. 주민이고 내 곁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당연히 막아야죠. 정말 불필요한 일이지만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진행을 해요. 특히 도로공사 같은 경우에. 그리고 바로 아래 동네에 큰 댐을 만들었어요. 저는 몰랐어요. 근데 주민설명회, 공청회를 했대요. 제 경우 윗동네 사람이니까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수몰된 부분이 생기니까 도로를 부수고 다시 내는 건데 사실은 그 저수지도 필요가 없어요. 농업용수라는 핑계가 있지만요. 그게 없어도 다 농사를 지었었거든요. 그래서 어디까지를 양보하고 어디까지 막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정말로 거기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을 하고 이게 무엇을 위한 것인가 파악하지 않으면 어려운거 같아요. ‘나는 이제 이 땅을 사용할 일이 없을 거야. 이 땅을 팔 수도 없을 거야. 그러니 보상을 받아야겠어’라고 생각하고 공사를 진행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 경우에는 사실 필요가 없는데 하는 거죠. 목적이 따로 있는데 다른 핑계를 내세우기 때문에 그걸 확실히 알지 못하면 말하기가 어려워요. 그런 사건이 많이 있었어요. 문 : 자본이 굴러가고 우리 사회에 필요하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돈을 벌면 하는 거죠. 해성 : 돈 번다는데 왜 반대하냐 이런 논리가 있잖아요.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다 이런 논리. 저는 지원을 하고 싶다면 1/n로 나눠주는 게 제일 낫다고 생각해요. 이 사회는 인프라가 너무 충만합니다. 주옥 : 이렇게 전면적인 활동에 해성이 뛰어든 내적 동력이 무엇일까 궁금해요. 부모님의 영향이라든지 살아온 과정이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적극적인 활동가로 나서게 된 데에는 또 다른 계기라든지 이유가 있을 법도 한데...... - 인터뷰에 응한 이해성님과 함께 한 주옥, 밤구, 선재 해성 : 활동가 일이 게 제 의견을 표명하는 일이잖아요? 지금으로서는 글 쓰는 활동과 접목해서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산만하면 피곤해지거든요. 사회적 활동에 대한 관심은 제가 산속에서 가족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10년 동안 아이를 키우면서 해야 할 일이 있고, 그때 할 수 있는 일이 있잖아요. 어떤 일은 못하게 되는 거죠. 아랫동네에 저수지가 만들어지는데 그것도 모르고, 소식을 못 듣고, 그렇게 됩니다. 내 주변 일들을 알고, 넓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싶다는 욕구가 차츰 쌓여온 것이겠죠. 아이들도 충분히 크고 저도 마흔 가까이 되면서 폭발하듯이 전환이 된 것 같아요. 특히 이 가게를 하게 되면서. 그게 여러 층위에서 일어났고 사적인 부분들도 있어서 이 인터뷰 자리에서 다 말하기는 어렵네요. 인생이 2막이라고 한다면, 1막에서 경험하고 쌓아온 것들을 2막에서 좀 더 확장된 영역, 의미 있는 일들에 적용하고 싶어요. ‘하고 싶다’기보다는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있는 것 같아요. 문 : 『가이아의 정원』과 관련된 활동은 있을까요? 해성 : 산청에 ‘042(공간과 사는 이야기)’라는 모임이 있어요. 이 모임 후기를 매번 제가 써서 올리고 있는데, 저저번 모임에서는 이 책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눴어요. 제가 강연자로 초빙된거죠. 거기서 퍼머컬처 공부하는 모임을 하자는 얘기도 나오고 그랬어요. 다만 제가 시간상 가능할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지역에서 자기 정원, 텃밭 좀 봐달라, 컨설팅 해달라고 하는 분들이 계셔요. 그래서 가서 살펴보고 이렇게 하면 좋겠다 저렇게 하면 좋겠다 얘기 나누고 그래요. 문 : 홍성에 가보니까 풀무학교가 처음에 만든 정원을 이웃들이 따라하면서 퍼져나가더라구요. 그렇게 생태적 삶의 모델이랄까 그런게 퍼져나가는...... 해성 : 가족 단위의 퍼머컬처를 만드는 방법도 있지만 퍼머컬처가 그런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니까 소읍이나 도시의 공동 농장이라든가 군데군데 게릴라 가드닝을 한다든가 또는 퇴비장 사업 같은 일에도 관심이 있어요. 제가 이 가게에서 생활을 하는데 여기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를 통에 담아서 배출하지 않아요. 이 뒤쪽에 하나로마트 뒷마당이 있는데 거기가 방치가 되어 있어요. 나무들이 몇 그루 심어져 있고 여름이 되면 풀이 우거지고... 거기에서 퇴비를 만들어요. 그 퇴비를 쓰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는 나무들에게 돌려주면 좋고 해먹을 걸어서 누워있기도 하고요. 고추나 가지를 심어본 적도 있어요. 그런데 사람이 모든 걸 할 수는 없겠지요. 주옥 : 구례에 있는 한겨레생명평화공원도 함께 보고 거기서 활동하는 청년 활동가들도 만나면 좋겠어요. 해성 : 예, 갈게요. 저는 일단 이런 것들을 기사화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이야기를 많이 어떤 정보들이 가닿지 않는 곳에 전해지고, 그때그때 상황이 되는 사람이 적당한 일을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가이아의 정원』을 소개시켜준 니코라는 친구가 한국에 들어왔거든요. 그 친구는 캐나다에서 공동농장 매니저를 하고 있어요. 여기서 그 친구가 작은 강연회를 했어요. 사람들이 관심도 많고 호기심도 크더라구요. 후기를 제가 써서 올리면 사람들이 그런 곳도 있구나 인식을 하고, 상황이 되면 하겠죠. 그러면 제가 일종의 씨앗이 되는 셈이고... 문 : 조만간 구례에 오시겠군요! 해성 : 실은 지리산사람들 운영위원 함께 하자고 하셔서 거기까지는 못하겠고 그래도 같이 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아서 첫 번째 월요일은 비웠어요. 가게를 하면서 1주일에 사흘은 여기 나오고 나흘은 농사를 지었어요. 작년에 5일을 여기 나오게 되면서 농사일에서는 손을 뗐어요. 병행이 불가능해요. 언젠가 이 일을 그만 두고 돌아가서 농사를 짓는 삶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지금은 경작을 할 수가 없어요. 저는 사람이 농사를 지어야 한다 자급자족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거의 세뇌가 된 사람이라서 농사를 안 짓는 생활이 죄책감으로 다가왔어요. 머리로는 안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신체적으로 느끼는 반응이 있는 거죠. 지금은 많이 벗어났는데, 농사일을 여전히 좋아하긴 합니다. 문 : 예전에 어떤 강의에서 강사분이 말하길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농사짓는 사람과 안 짓는 사람’ 이렇게 말을 했는데, 저도 그때는 그 말이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식의 언술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해성 : 저 역시 그런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것 같아서 싫어요. 그런데 좀 완화해서 농사를 한번이라도 지어본 사람과 한번도 안 지어본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겠지요. 문 : 자본주의 물질문명이 마치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벗어나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데 그 결과가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있어요. 문(밤구) : 영성적인 사고나 몸살림같은 거 보면서 산속에서 살면서 그런 것들을 가까이 하게된 계기나 배경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요. 해성 : 몸살림은 아니고 10대 때 요가를 했어요. 원래 제가 몸치였거든요. 일은 해요. 오래 걷기도 해요. 그러니까 지구력은 있어요. 또 보기보다는 힘이 세요. 그런데 춤추라고 하면 못하고 정해진 동작을 따라 하는 것도 잘 못하고 그랬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걸 극복해보자, 몸치를 벗어나자, 해서 처음에는 요가를 했어요. 요가 선생님한테 거의 세 시간 강의 듣고, 그분이 추천한 『요가 디피카』라는 책을 보고, 책 내용 따라 하고 해서 다리도 일자로 찢어졌었어요. 지금은 못 하지만. 그런데 요가는 정적이잖아요. 그래서 그 다음에는 태극권을 했어요. 태극권은 꽤 오래 했죠. 밝은빛 태극권이라는 곳에서 한달의 반은 서울에 있으면서 중국 선생님이 강의한 내용 녹취해가지고 태극권 책 만드는 작업도 돕고 그랬어요. 문 : 앞으로의 계획은? 해성 : 1년 정도의 계획밖에 없어요. 1년 정도는 지금 하던 작업을 계속한다. 그 이후의 계획은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어요. 1년 동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비전 세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제가 타로를 해요. 한 삼년 정도 밖에 안 됐어요. 다른 사람들의 삶에 궁금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듣는 도구로 사용했던 거에요.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데이터를 모으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세상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그래서 이렇게 데이터를 모으는 작업을 1년은 더 할 겁니다. 문 : 그리고 지리산인에 한 달에 두 번씩 글을 올리는 것도 계획이잖아요? 5년 동안! 해성 : 5년이요? (웃음) 타로에 대한 책도 써야 돼요. 지금 70% 쓰고 있는데 그 다음에 탁 걸려가지고 안돼요. 그것도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올해는 될수록 그 작업을 마무리하고 싶네요. 문 : 타로의 방법론에 대한 책인가요? 아니면 인생에 대한 책? 해성 : 타로에 대한 해설서인데요 인생에 대한 책도 되겠죠. 타로 자체가 인생에 관한 것이니까. 인터뷰를 마치며 타로 또는 그가 풀어놓을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 이야기
    • 지리산자락 사람들
    2024-04-17

2024 산청의 해 검색결과

  • 대지가 이끄는 길 따라 한 걸음씩
    머컬처 또는 숲밭을 가꾸고자 하는 사람은 『가이아의 정원』을 멋지게 번역한 사람으로 이해성을 기억할 것이다. 책이 나온 후 십 년이 넘게 흘렀는데 그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우리의 가이아가 신음 소리를 내며 죽어가고 있기에 이해성이 들려주는 오늘의 말을 듣고 싶었다. 그는 의외로 바로 우리 곁에 있었다. 지금은 지리산 활동가로, 그는 그 사이 한 번도 길을 벗어나지 않은 것 같다. 문 : 살아온 얘기랄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해성 : 저는 3년 전부터 ‘지금부터 판타지’라고 하는 이 공간을 운영해요. 카페이자 서점이지요. 이 공간 운영하면서 맡고 있는 부수적인 일들이 있지요. 이를테면 지리산케이블카반대 산청주민대책위에서 사무국장 일을 하고 있고, 올해부터는 필봉문학회에서도 사무국장 일을 하고 있어요. 창원에 마을공동체협력지원센터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 프리랜서 일을 했었어요. 기자 비슷한데 마을 공동체 활동을 취재해서 기사를 써서 보내주면 활동비로 고료를 주었거든요. 그래서 가게에 출근하지 않는 날에 그런 활동, 말하자면 취재를 하고 가게에 손님이 없으면 그걸 가지고 글을 쓰는 작업을 했었어요. 지리산케이블카반대 일은 ‘이로운 식탁’이라는 소셜다이닝 모임이 있었는데 그 회원들의 의견이 다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한번 목소리를내어보자, 반대하는 활동을 해보자 해서 시작이 되었어요. 그렇게 흘러흘러 어떻게 직함을 가지게 되었네요. (웃음) 처음에는 그럴 줄 몰랐어요. - 총선을 앞둔 장날이라 녹색당원들의 선거운동이 있었다. 이해성씨는 비당원 지지자라고 한다. 산청지역에서 녹색정의당은 362표를 득표했다. 울어야할까 웃어야할까. 문 : 산청에서 태어났죠? 해성 : 아니요. 태어나기로는 인천 어디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는데 정확히는 모르고요. 산청에는 다섯 살 때 내려왔어요. 부모님이 귀농하시면서. 문 : 자라온 과정이 범상치는 않았던 것 같은데? 해성 : 평범하다고 할 수는 없죠. 문 : 책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가이아의 정원』이라는 책과 함께 이해성이라는 이름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 같은데요? 물론 그 전에 번역한 책도 있지만. 이 책의 반향이 컸죠? 해성 : 이 책이 10년 전에 나왔어요. 그때 당시에는 반향이 별로 없었어요. 좀 어려운 책이라고 해야 되나, 9~10년 정도 지나니까 지금 반향이 있어요. 읽었다는 분들도 많이 있고 역자를 만나고 싶다고 찾아오는 분도 있고, 만나고 싶었는데 당신이 이 사람이야? 하면서 반가워 하고 그런 분들도 계시고 정원 프로그램에서 추천받았다거나...... 문 : 제가 책 얘기를 꺼낸 이유는, 일반적인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고 부모님의 깊은 영향이나 아니면 자신의 성찰의 과정을 통해서 생태주의를 자신의 가치관, 세계관으로 받아들인 새로운 세대가 나타났구나 하는 ‘그런 사람이 다 있어?’ 하는 느낌이 있었어요. 어쨓든 다섯 살 때부터 산청에서 쭉 살고 있는 거죠? 산청을 떠난 적은 없는 거죠? 해성 : 예. 여행 차원에서 간 적은 있지만 주소는 그대로였어요. 떠난 적 없다고 봐야죠. 주옥 : 세상으로 나오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지리산 활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해성이라는 사람을 몰랐는데 케이블카 반대 활동 속에서 어느 날 정말 혜성처럼 등장을 한 거에요. 저는 어느 신문사 기자라고 생각을 했어요. 제가 모르는 얼굴인데 젊었고 기자처럼 막 왔다갔다 하고 회의하는 자리에도 와서 앉아있고 그래서 누굴까 실은 굉장히 궁금했어요. 그러다가 조금씩 알게 되는 과정에서 어디에 있다가 나타난 걸까 왜 이제야 나타난 거지 생각을 했어요. 문 : 청소년기나 성장기를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면 좋겠어요. 해성 : 부모님이 귀농을 해서 살게 되신 곳이 오부면 일물마을 입니다.거기가 산청에서도 오지로 소문난 곳이에요. 비탈길을 올라가면 산꼭대기에 평평한 곳이 있어서 밭과 논농사를 지을 수 있어요. 이런 산동네에 들어갔는데, 원래 부모님이 연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후쿠오카 마사노부라는 일본분이 계시잖아요. <생명의 농업>이는 책을 쓰신. 그 책을 보고 감명을 받아가지고 직장을 때려치우고 자연주의적인 삶을 추구하겠다, 자급자족을 하겠다, 이러면서 내려오신 거예요. 진주에 집을 구해 살면서 여기저기 다녀보다가 그 동네를 선택해서 들어간 거지요. 그때 당시에는 동네에 차도 한 대도 없었고 부엌도 싱크대가 없이 부뚜막에서 밥을 해먹는... 전기는 들어왔어요. 문 : 어머니, 아버지가 의견이 완전히 일치하셔서? 해성 : 일치하셨겠죠. 저는 어렸을 때니까 속사정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일치하셨으니까 들어오신 거죠. 그 동네는 당시 여러 가지 작물들을 심어서 주민들이 먹거리는 자급을 하고 동시에 환금작물을 재배하거나, 당시에는 양잠을 해가지고 경제를 영위하는 형태의 동네였어요. 그런 모습을 보고 부모님이 그 동네를 선택하셨나 봐요. 문 : 부모님 연세가? 해성 : 60대 후반, 70 이렇게 되셨어요. 그래서 집집마다 누에를 키우는 별채라고 해야 되나 그런 걸 지어가지고 불을 때고 했는데, 지금은 누에를 안 키우지만 그런 건물들이 남아서 창고로 사용하는 경우를 볼 수가 있죠. 잠사라고 할 수 있지요. 그 바닥을 흙으로 마감을 했는데 누에를 키우려면 거기에 시멘트를 발라가지고 불을 땔 수 있게 한 거에요. 따뜻해야 누에가 클 수가 있으니까. 어렸을 때에는 누에를 쌓아놓고 투명해지면 골라내고 그런 일들을 동네아주머니들 도와서 하고 그랬죠. 그런 기억이 있어요. 부모님은 문명의 이기를 가지고 들어가서 그게 하나씩 고장날 때마다 하나씩 안 쓰게 되었어요. 처음에 티브이 가지고 들어가서 안테나 부러지면 안 보게 되고 세탁기 고장나면 안 쓰고 냉장고 고장나면 역시 안 쓰는 식이었어요. - 지리산 케이블카 반대 논의가 시작된 이로운 식탁 모임. 왼쪽부터 영권, 해성, 한범, 경옥, 현정. 사진은 현하. 문 : 부모님이 우리나라 생태주의 1세대 이전 0세대라고 할 수 있겠네요. 후쿠오카 마사노부가 소개되자마자 여기에 심취한 경우 같아요. 해성 : 맞아요. 그분 책을 번역한 최성현 선생님과 자연학교라는 모임을 만들어서 1년에 네번 정도 모임도 하셨어요. 그 모임을 우리 집에서 하기도 했고요. 제가 어렸을 때였죠. 그 모임 회원 가운데 실제로 귀농을 하신 분들은 얼마 안 돼요. 문 : 쉬운 일은 아니었겠죠. 그 모임을 하시면서 부모님께서는 자신들이 생태주의를 실천하셨을 뿐 아니라 자식에게까지 영향을 미치셨어요. 뭐랄까 생태근본주의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해성 : 모든 것에 자급자족을 추구하셨어요. 먹거리를 자급하고 연료를 자급하고 의료, 문화, 교육까지도 자급을 해보겠다 이런 태도이셨어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고 볼 수 있죠. 물론 한계도 있지만... 문 : 부모님한테 어학을 배우신 건가요? 『가이아의 정원』 책 얘기를 해볼까요? 해성 : 이 책을 제가 선정했어요. 친구 집에 가서 이 책을 발견하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소개를 받았어요. 한 챕터를 번역하고 나서 당시 들녘에서 귀농총서를 내고 있었기 때문에 원고를 보냈죠. 검토를 해달라고. 그런데 들녘에서 연락이 왔어요. 자기들이 이 책을 선정해서 옮기고 있다는 거예요. 이은주 선생님이라고, 근데 이분은 농사를 해보지 않으신 전문번역가이시잖아요. 책 내용은 농사와 관련한 전문적인 내용이고요. 농사와 관련한 경험과 지식을 가진 사람이 옮기는 게 낫죠. 그래서 이 두 개의 원고를 비교 검토를 해보고 들녘에서 저로 역자를 바꾼 거지요. 그래도 이현주 선생님이 반절을 옮겼으니까 그 부분은 제가 윤문을 했어요. - '지금부터 판타지'에는 기후위기 시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귀한 책과 자료들이 쌓여있다. 문 : 이 책을 보자마자 매료가 되었다는 거죠? 데이비드 홀그램이 쓴 『퍼머컬처』도 비슷한 시기에 나왔는데 내용이 너무 이론적이어서 읽기가 쉽지만은 않은데 반해서 『가이아의 정원』은 이야기 전개가 흥미진진하다는 느낌입니다. 퍼머컬처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네요. 해성 : 저도 이 책과 같이 해보려고 노력을 했지요. 그대로 못한 부분들도 있고요. 이 책에서는 관찰 과정을 굉장히 중요시하고 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관찰만 하는 기간이 아주 중요하고, ‘관찰 속에 해답이 있다’라고 하는데 내가 그만큼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관찰의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뭔가 기획하는 것도 의사결정 과정이 가족 안에서도 완전히 민주적이지는 않지요.(웃음) 즉 어떤 한계가 존재한다는 말이지요. 하고 싶지만 못하는 부분들도 있어요. 이를테면 무경운으로 풀을 둔 채 관리를 하고 있어요. 방치한 게 아닌데, 아버지가 ‘왜 먹는 것도 아닌데 심어놓았냐’고 하시면서 허브를 갈아엎어버린다거나 풀을 다 뽑아버린다거나 이런 일이 발생을 하는 거죠. 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좀 멀리 간다거나 접근이 어려운 곳에 가서 해야 하는 거에요. 왔다갔다 하는 일이 힘들잖아요. 이렇게 실제로 해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장벽에 부딪히게 돼요. 문 : 꽤 독특한 교육과정을 거치셨죠? 해성 : 초등학교만 다니고 중등과정부터는 집에서 공부를 했어요. 주경야독인데 정확히는 아침, 초저녁에 일하고 한낮에는 공부를 하는 거였죠. 문 : 의무교육을 안 해도 괜찮아요? 해성 : 이유가 있으면 안 해도 돼요. 제가 중학교에 들어가는 해에 중학교가 의무교육이 됐어요. 그래서 산청중학교에 적을 두고 계속 입학유예를 했어요. 그걸 3년인가 하면 자동퇴학이 되거든요. 그때는 그렇게 했었죠. 곤란했던 게, 제가 산청중학교에 적을 두지 않으면 학교에두 개 반이 있었는데 하나가 없어져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러니까 학교에서 간청을 하게 된거죠. 반을 유지를 해야 하니까. 그 시절에는 홈스쿨링이라는 단어가 많이 알려지지도 않았고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 비행 청소년인 때였어요. 학교 안 가니까 낮에 읍에 돌아다니면 ‘너 왜 학교 안 갔어? 학교 가라’ 이렇게 잔소리가 들어오는 거죠. 그러니까 일종의 대인기피증이 생겨버려요. 설명하기도 귀찮고, 설명하면 ‘너희 부모님은 왜 그러니? 잘못하는 거야!’ 그러면 또 제가 변명을 해야 되는 게 너무 피곤한 거에요. 지금 학교 안 다니는 친구들은 겪지 않는 문제죠. 저는 정말 강력한 태클이랄까 그런 걸 겪었어요. 그래서 몇 년 동안은 거의 두문불출했었어요. 문 : 책을 세 권 번역했고, 그리고 글 쓰는 일을 많이 하시는 것 같네요. 해성 : 그렇죠. 많이 쓴다기보다는, 번역을 하다 보니까 내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문 : 앞에서 요즘 들어 책에 대해서 관심을 표현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했죠? 전반적으로 퍼머컬처를 공부하거나 시도하는 분들이 많아졌기 때문이겠죠? 해성 : 퍼머컬처도 늘었지만 그뿐 아니라 정원, 시민정원사 과정 같은 게 많이 생겼구요. 정원디자인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많아진 거 같아요. 프로그램 강사들이 이 책을 추천하는 경우가 많아요. 퍼머컬처를 먼저 알아서 찾아본다기보다는. <가이아의 정원>은 농업분야라기보다 기본적으로 조경 디자인 서적이에요. 문 : 산청케이블카반대투쟁에 대한 얘기를 해주시죠. 해성 : 작년 6월 산청군에서 케이블카 신청서류를 환경부에 제출했어요. 이에 우리가 대책위를 조직해서 기자회견을 가졌고 꾸준히 월요일 아침과 수요일 오후 피케팅을 하고 있어요. 공개 질의서를 군에 내고 거기에 대한 답변이 오면 그 내용과 우리의 입장을 기자들에게 알리는 과정에서 제가 보도자료를 작성해서 배포하는 작업을 꾸준하게 했습니다. 저로서는 이렇게 사무국장 일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제가 회의록을 작성한다든지 기록하고 관리하는 일을 전에 좀 해봤어요. 다른 분들보다 제가 컴퓨터로 하는 일, 디자인 작업 등을 할 줄 알다 보니까 실무를 맡게 된거죠. 그 결과 사무국장이라는 직함을 갖게 되었죠. 문 : 지역에 케이블카 이외에 생태, 환경 관련 현안은 어떤 게 있나요? 해성 : 덕산댐 관련 이슈가 있는데 지금 추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유튜브 찾아보면 황당한 영상이 올라와 있어요. ‘산청의 천년대계 덕산댐’이라고. 덕산댐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이건 거기 사시는 분들도 반대를 해요. 생수공장 문제도 있어요. 기존에 지리산 산청샘물이라고 있는데 취소공을 더 파려고 하는 것이지요. 근데 공청회도 하지 않고 있어요. 그것 때문에 덕천강 물이 마르고 있는데요. 수위가 내려간 게 재작년부터 확연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제가 그쪽에 살고 있지 않으니까 확실하게는 모르지만 듣기에 그렇습니다. 문 : 함께 하는 사람들 얘기를 듣고 싶네요. 해성 : 케이블카 반대운동을 한다니까 후원을 많이 해주시고 그래요. 지역에 계신 분들 가운데 관청과 관련된 일을 하는 분들은 관에서 추진하는 일을 대놓고 반대하지 못하는 입장이더라구요. 그런 분들은 반대 발언은 하지 못하고 그냥 후원을 하시죠. 주옥 : 지리산을 지키는 활동 속에서 어떤 부분은 어쩔 수 없이 내주고 어떤 부분은 기필코지켜야 하는 부분이 있을텐데 그건 어떻게 생각해요? 해성 : 많은 것들이 필수적인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일물 마을에 진입하는 도로가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몰라요. 아마 다섯 번 정도는 될 거에요. 점점 넓혀지고 지금은 아스팔트가 깔려 있으니까 이제는 상황이 종료된 것이겠죠. 근데 이것조차 한번은 우리 집 앞에 언덕을 밀어버리고 직선도로를 내겠다고 해서 반대해서 무산시킨 일이 있어요. 이 일도 지역 주민인 우리 가족이나 이웃들을 따돌리고 공청회를 진행하고 계획을 세웠었어요. 주민이고 내 곁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당연히 막아야죠. 정말 불필요한 일이지만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진행을 해요. 특히 도로공사 같은 경우에. 그리고 바로 아래 동네에 큰 댐을 만들었어요. 저는 몰랐어요. 근데 주민설명회, 공청회를 했대요. 제 경우 윗동네 사람이니까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수몰된 부분이 생기니까 도로를 부수고 다시 내는 건데 사실은 그 저수지도 필요가 없어요. 농업용수라는 핑계가 있지만요. 그게 없어도 다 농사를 지었었거든요. 그래서 어디까지를 양보하고 어디까지 막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정말로 거기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을 하고 이게 무엇을 위한 것인가 파악하지 않으면 어려운거 같아요. ‘나는 이제 이 땅을 사용할 일이 없을 거야. 이 땅을 팔 수도 없을 거야. 그러니 보상을 받아야겠어’라고 생각하고 공사를 진행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 경우에는 사실 필요가 없는데 하는 거죠. 목적이 따로 있는데 다른 핑계를 내세우기 때문에 그걸 확실히 알지 못하면 말하기가 어려워요. 그런 사건이 많이 있었어요. 문 : 자본이 굴러가고 우리 사회에 필요하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돈을 벌면 하는 거죠. 해성 : 돈 번다는데 왜 반대하냐 이런 논리가 있잖아요.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다 이런 논리. 저는 지원을 하고 싶다면 1/n로 나눠주는 게 제일 낫다고 생각해요. 이 사회는 인프라가 너무 충만합니다. 주옥 : 이렇게 전면적인 활동에 해성이 뛰어든 내적 동력이 무엇일까 궁금해요. 부모님의 영향이라든지 살아온 과정이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적극적인 활동가로 나서게 된 데에는 또 다른 계기라든지 이유가 있을 법도 한데...... - 인터뷰에 응한 이해성님과 함께 한 주옥, 밤구, 선재 해성 : 활동가 일이 게 제 의견을 표명하는 일이잖아요? 지금으로서는 글 쓰는 활동과 접목해서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산만하면 피곤해지거든요. 사회적 활동에 대한 관심은 제가 산속에서 가족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10년 동안 아이를 키우면서 해야 할 일이 있고, 그때 할 수 있는 일이 있잖아요. 어떤 일은 못하게 되는 거죠. 아랫동네에 저수지가 만들어지는데 그것도 모르고, 소식을 못 듣고, 그렇게 됩니다. 내 주변 일들을 알고, 넓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고, 네트워크를 확장하고 싶다는 욕구가 차츰 쌓여온 것이겠죠. 아이들도 충분히 크고 저도 마흔 가까이 되면서 폭발하듯이 전환이 된 것 같아요. 특히 이 가게를 하게 되면서. 그게 여러 층위에서 일어났고 사적인 부분들도 있어서 이 인터뷰 자리에서 다 말하기는 어렵네요. 인생이 2막이라고 한다면, 1막에서 경험하고 쌓아온 것들을 2막에서 좀 더 확장된 영역, 의미 있는 일들에 적용하고 싶어요. ‘하고 싶다’기보다는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있는 것 같아요. 문 : 『가이아의 정원』과 관련된 활동은 있을까요? 해성 : 산청에 ‘042(공간과 사는 이야기)’라는 모임이 있어요. 이 모임 후기를 매번 제가 써서 올리고 있는데, 저저번 모임에서는 이 책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눴어요. 제가 강연자로 초빙된거죠. 거기서 퍼머컬처 공부하는 모임을 하자는 얘기도 나오고 그랬어요. 다만 제가 시간상 가능할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지역에서 자기 정원, 텃밭 좀 봐달라, 컨설팅 해달라고 하는 분들이 계셔요. 그래서 가서 살펴보고 이렇게 하면 좋겠다 저렇게 하면 좋겠다 얘기 나누고 그래요. 문 : 홍성에 가보니까 풀무학교가 처음에 만든 정원을 이웃들이 따라하면서 퍼져나가더라구요. 그렇게 생태적 삶의 모델이랄까 그런게 퍼져나가는...... 해성 : 가족 단위의 퍼머컬처를 만드는 방법도 있지만 퍼머컬처가 그런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니까 소읍이나 도시의 공동 농장이라든가 군데군데 게릴라 가드닝을 한다든가 또는 퇴비장 사업 같은 일에도 관심이 있어요. 제가 이 가게에서 생활을 하는데 여기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를 통에 담아서 배출하지 않아요. 이 뒤쪽에 하나로마트 뒷마당이 있는데 거기가 방치가 되어 있어요. 나무들이 몇 그루 심어져 있고 여름이 되면 풀이 우거지고... 거기에서 퇴비를 만들어요. 그 퇴비를 쓰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는 나무들에게 돌려주면 좋고 해먹을 걸어서 누워있기도 하고요. 고추나 가지를 심어본 적도 있어요. 그런데 사람이 모든 걸 할 수는 없겠지요. 주옥 : 구례에 있는 한겨레생명평화공원도 함께 보고 거기서 활동하는 청년 활동가들도 만나면 좋겠어요. 해성 : 예, 갈게요. 저는 일단 이런 것들을 기사화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이야기를 많이 어떤 정보들이 가닿지 않는 곳에 전해지고, 그때그때 상황이 되는 사람이 적당한 일을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요. 『가이아의 정원』을 소개시켜준 니코라는 친구가 한국에 들어왔거든요. 그 친구는 캐나다에서 공동농장 매니저를 하고 있어요. 여기서 그 친구가 작은 강연회를 했어요. 사람들이 관심도 많고 호기심도 크더라구요. 후기를 제가 써서 올리면 사람들이 그런 곳도 있구나 인식을 하고, 상황이 되면 하겠죠. 그러면 제가 일종의 씨앗이 되는 셈이고... 문 : 조만간 구례에 오시겠군요! 해성 : 실은 지리산사람들 운영위원 함께 하자고 하셔서 거기까지는 못하겠고 그래도 같이 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아서 첫 번째 월요일은 비웠어요. 가게를 하면서 1주일에 사흘은 여기 나오고 나흘은 농사를 지었어요. 작년에 5일을 여기 나오게 되면서 농사일에서는 손을 뗐어요. 병행이 불가능해요. 언젠가 이 일을 그만 두고 돌아가서 농사를 짓는 삶으로 돌아갈 수도 있지만, 지금은 경작을 할 수가 없어요. 저는 사람이 농사를 지어야 한다 자급자족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거의 세뇌가 된 사람이라서 농사를 안 짓는 생활이 죄책감으로 다가왔어요. 머리로는 안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신체적으로 느끼는 반응이 있는 거죠. 지금은 많이 벗어났는데, 농사일을 여전히 좋아하긴 합니다. 문 : 예전에 어떤 강의에서 강사분이 말하길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농사짓는 사람과 안 짓는 사람’ 이렇게 말을 했는데, 저도 그때는 그 말이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식의 언술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해성 : 저 역시 그런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는 것 같아서 싫어요. 그런데 좀 완화해서 농사를 한번이라도 지어본 사람과 한번도 안 지어본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겠지요. 문 : 자본주의 물질문명이 마치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벗어나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데 그 결과가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있어요. 문(밤구) : 영성적인 사고나 몸살림같은 거 보면서 산속에서 살면서 그런 것들을 가까이 하게된 계기나 배경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요. 해성 : 몸살림은 아니고 10대 때 요가를 했어요. 원래 제가 몸치였거든요. 일은 해요. 오래 걷기도 해요. 그러니까 지구력은 있어요. 또 보기보다는 힘이 세요. 그런데 춤추라고 하면 못하고 정해진 동작을 따라 하는 것도 잘 못하고 그랬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걸 극복해보자, 몸치를 벗어나자, 해서 처음에는 요가를 했어요. 요가 선생님한테 거의 세 시간 강의 듣고, 그분이 추천한 『요가 디피카』라는 책을 보고, 책 내용 따라 하고 해서 다리도 일자로 찢어졌었어요. 지금은 못 하지만. 그런데 요가는 정적이잖아요. 그래서 그 다음에는 태극권을 했어요. 태극권은 꽤 오래 했죠. 밝은빛 태극권이라는 곳에서 한달의 반은 서울에 있으면서 중국 선생님이 강의한 내용 녹취해가지고 태극권 책 만드는 작업도 돕고 그랬어요. 문 : 앞으로의 계획은? 해성 : 1년 정도의 계획밖에 없어요. 1년 정도는 지금 하던 작업을 계속한다. 그 이후의 계획은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어요. 1년 동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비전 세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제가 타로를 해요. 한 삼년 정도 밖에 안 됐어요. 다른 사람들의 삶에 궁금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듣는 도구로 사용했던 거에요.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데이터를 모으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세상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그래서 이렇게 데이터를 모으는 작업을 1년은 더 할 겁니다. 문 : 그리고 지리산인에 한 달에 두 번씩 글을 올리는 것도 계획이잖아요? 5년 동안! 해성 : 5년이요? (웃음) 타로에 대한 책도 써야 돼요. 지금 70% 쓰고 있는데 그 다음에 탁 걸려가지고 안돼요. 그것도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올해는 될수록 그 작업을 마무리하고 싶네요. 문 : 타로의 방법론에 대한 책인가요? 아니면 인생에 대한 책? 해성 : 타로에 대한 해설서인데요 인생에 대한 책도 되겠죠. 타로 자체가 인생에 관한 것이니까. 인터뷰를 마치며 타로 또는 그가 풀어놓을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 이야기
    • 지리산자락 사람들
    2024-04-17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