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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학의 길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학의 길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 박 두 규 (시인) 1 코로나 국면을 맞고 보니 그동안 꾸준히 거론되어 오던 기후변화에 따른 전 지구적 위기라는 것이 코앞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문학은 무엇인가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우리는 문학에 대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논의를 해왔지만 지금의 현실상황을 보면 ‘지구 위기, 인류의 위기’라는 관점에서 문학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학도 과학이나 기술처럼 현실에서 우선적으로 ‘지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삶 문학에 일정 부분 복무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도 문학은 문학대로 지금껏 확장해온 영역이 있고 인류사 속에서 다양하게 그 역할을 해왔으며 또 어떤 특별한 상황 속에서는 그 상황에 맞게 대응해왔기 때문에 지금처럼 그렇게 하면 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이 상상력의 문학이고 영적 문학이라는 점과 ‘지구의 위기, 인류의 위기’의 현실에 대한 복무를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100년의 지구, 100년의 인류를 염두에 두며 글을 통해 더 세밀하게 그려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현재의 과학과 기술보다 100년의 현실을 앞서 이야기하고 노래하며 올바른 방향의 길을 찾는 더듬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2 요즘 쏟아져 나오는 학자들의 글들을 읽어 보면 기후 환경으로 인한 지구의 위기 상황은 현실의 감도보다 훨씬 심각하다. 지금 우리가 해마다 역대 기록을 갱신하며 겪는 자연재해는 단순한 재해가 아니라 대량학살의 위기이며 재앙의 시작이라고 봐야 옳다는 것이다. 인류가 자본주의 문명의 현행 기조를 고수할 경우 2100년에는 탄소배출량으로 인해 지구의 기온이 약 4도 이상 상승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북극의 빙상은 이미 붕괴된 지 오래고 알프스의 만년설은 70% 이상 녹으며 해수면은 최대 2.4미터 상승할 수 있다고 한다. 인구 천만의 자카르타 같은 도시가 물에 잠기며 세계의 주요도시는 거의 2/3가 해안에 위치해 있으니 그에 따른 발전소, 항구, 농경지 등 주요시설도 함께 위험해질 것이다. 그리고 적도 지방의 주요 도시들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한다고 한다. 이미 2018년 폭염 시에 로스엔젤레스 42도, 파키스탄 50도, 알제리 51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물 부족과 폭염으로 북위도 지역마저도 해마다 수천 명이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21세기가 끝날 무렵이면 코로나와 같은 새로운 질병들, 상상을 초월하는 산불과 홍수의 증가, 수천만 명에 이르는 기후 난민, 경제 대공황과 지역 간의 기후분쟁, 농산물 생산이 크게 줄면서 일어나는 자원전쟁 등 한 해 기준 100조 달러의 세계 피해규모가 예상된다니 앞으로 80년 안에 변화될 지구의 모습을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지금의 자본주의적 개발과 소비 패턴에서 조금도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진행되었을 경우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코로나19가 해결된다 해도 이전의 시절로 돌아가 예전의 일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지구와 인류는 이미 변화의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고 새로운 문명이 일어나는 시점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기존의 자본주의를 토대로 이루어낸 과학기술문명, 물질문명의 틀에서 벗어나 이전의 의식에서 한 단계 점핑된 도덕적 과학기술과 새로운 정신문명으로의 판짜기 변화가 절실해진 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현재 소비와 개발성장의 자본문명에서 전환하여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 갈 것인가를 이야기해야 된다. 포스트 코로나를 맞아 변화되어야 할 의, 식, 주, 의료, 교육 그리고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까지 기존의 질서와 그 틀을 어떻게 바꿔가야 할 것인지를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문학은 이 현실 변화의 중심에서 어떤 마음, 어떤 영혼을 가진 인간이어야 하는 것을 그려내야 하는 것이다. 3 지금껏 지구와 인류의 위기를 초래해온 자본문명을 벗어나 새로운 문명을 꿈꾼다면 먼저 기존의 자본주의적 가치관과 세계관 등 일상 속의 대중들에게도 정신적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 생각이 바뀌어야 그 삶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정제 없이 그대로 반영된 이데올로기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그렇게 이익을 극대화하며 개발과 성장의 경제논리로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이 자본주의다. 자본은 배고픔과 위험한 환경 조건에서 풍요로움과 안전함과 편리함을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그 도를 넘어 인간의 끝없는 탐욕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렇게 인류는 풍요와 편리를 거느린 현실 자본주의를 앞세워 공존공생을 위한 사회적 도덕과 윤리의 경계를 깨고 탐욕과 욕망을 당연하고 정당한 인간 정서로 편입시켰다. 단순하게 이야기 했지만 사실 이런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자본주의와 잘 어울려 끝없이 달려온 결과 현재의 지구와 인류의 위기를 맞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개인의 인간도 그 탐욕이 지나치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처럼 반성과 성찰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면 인류는 21세기가 끝나는 지점부터는 지금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혹독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사피엔스의 종말을 향해 추락해 갈 것이다. 그래서 문학예술은 지금의 시점에서 좀 더 집중적으로 21세기 이후의 현실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한 새로운 문명, 새로운 문학예술에 복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문명에 대응하는 문학을 생각하려면 자본주의의 속성인 탐욕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철학, 새로운 문화를 궁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어쩌면 삶의 본질과 모든 생명을 아우르는 총체적 근원으로부터 오는 것이어서 그것은 현실 자본주의를 벗어나 근본 진리의 삶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본래 모든 생명들은 함께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공존공생의 공동체적 존재라는 것과 그것을 위해 인간은 가장 경계해야 할 본성인 ‘탐욕’을 꾸준히 정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4 나는 이것을 문학이라는 영역에서 생각한다면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는 ‘단순한 삶’과 ‘소박한 삶’을 하나로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인데 ‘단순한 삶’의 문학은 개인 스스로를 전체의 한 부분이면서, 그렇기 때문에 전체라는, 그래서 전체를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라는, 이미 붓다나 예수 등 많은 현자들이 발견했던 동체대비, 궁극과의 합일 등 진리의 삶과 연계되어 있는 것이며 이를 현실로 가져오기 위한 문학을 말한다. 이는 ‘단순성’이라는 진리의 영역을 문학으로 가져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실현할 수 있는 ‘단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리의 삶은 당장 그렇게 살려는 스스로의 결단과 실천만 있으면 되는 ‘단순성’에서 시작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진리에 의해 사는 삶’은 어떤 거창한 것은 아니고 현재의 실상을 바로보고 그것에 어긋남 없이 사는 것, 다시 말하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삶의 실상은 모두가 있는 그대로 어울려(연기적 관계를 가지고) 전체가 하나의 생명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있는 그대로(본질 그대로) 어울려 순환하고 진화하는 것이 바로 ‘단순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변곡점에서 문학이 주시해야 할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소박한 삶’은 이런 ‘단순한 삶’을 현실로 가져오기 위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 사실은 방법이면서 그 본질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를 진화시켰던 인간의 탐욕은 끝없는 집착을 가져와 현재 지구의 기후재앙과 함께 모든 문제의 화근이 되었고 이 탐욕과 집착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소박한 삶’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본의 끝없는 성장 시나리오는 이제 그 한계에 왔다. 대체 에너지 등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과학기술의 노력과 성과가 있다하더라도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충족시킬 수는 없다. 결국은 소박한 삶으로 가지 않으면 해결 될 수 없는 것이다. ‘소박한 삶’은 스스로의 탐욕을 다스리는 삶이고 우리 사회의 대립과 갈등을 조화와 균형으로 이끄는 해답이라고 본다. 이‘소박한 삶’을 통해 모든 생명과 지구가 하나의 완결체로 존재할 수 있는 공존, 공생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문명을 극복하고 새로운 문명의 길로 가는 길목에 이러한 물질 중심의 삶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 문학적 화두를 통해 개인의 이기(利己)를 극복하고 무아(無我)와 탈에고(脫ego)의 수준까지 의식을 확장하여 탐욕을 순치(順治)하는데 기여해야 하는 것이 현재의 문학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코로나19와 같은 새로운 질병들과 지구의 기후재앙을 막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첫눈이 내린 노고단
    • 지리산문화
    • 박두규 시인의 지리산에서 온 편지
    2022-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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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학의 길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문학의 길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 박 두 규 (시인) 1 코로나 국면을 맞고 보니 그동안 꾸준히 거론되어 오던 기후변화에 따른 전 지구적 위기라는 것이 코앞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변화의 급물살을 타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문학은 무엇인가를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동안 우리는 문학에 대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논의를 해왔지만 지금의 현실상황을 보면 ‘지구 위기, 인류의 위기’라는 관점에서 문학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문학도 과학이나 기술처럼 현실에서 우선적으로 ‘지구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삶 문학에 일정 부분 복무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도 문학은 문학대로 지금껏 확장해온 영역이 있고 인류사 속에서 다양하게 그 역할을 해왔으며 또 어떤 특별한 상황 속에서는 그 상황에 맞게 대응해왔기 때문에 지금처럼 그렇게 하면 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이 상상력의 문학이고 영적 문학이라는 점과 ‘지구의 위기, 인류의 위기’의 현실에 대한 복무를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100년의 지구, 100년의 인류를 염두에 두며 글을 통해 더 세밀하게 그려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현재의 과학과 기술보다 100년의 현실을 앞서 이야기하고 노래하며 올바른 방향의 길을 찾는 더듬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2 요즘 쏟아져 나오는 학자들의 글들을 읽어 보면 기후 환경으로 인한 지구의 위기 상황은 현실의 감도보다 훨씬 심각하다. 지금 우리가 해마다 역대 기록을 갱신하며 겪는 자연재해는 단순한 재해가 아니라 대량학살의 위기이며 재앙의 시작이라고 봐야 옳다는 것이다. 인류가 자본주의 문명의 현행 기조를 고수할 경우 2100년에는 탄소배출량으로 인해 지구의 기온이 약 4도 이상 상승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북극의 빙상은 이미 붕괴된 지 오래고 알프스의 만년설은 70% 이상 녹으며 해수면은 최대 2.4미터 상승할 수 있다고 한다. 인구 천만의 자카르타 같은 도시가 물에 잠기며 세계의 주요도시는 거의 2/3가 해안에 위치해 있으니 그에 따른 발전소, 항구, 농경지 등 주요시설도 함께 위험해질 것이다. 그리고 적도 지방의 주요 도시들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한다고 한다. 이미 2018년 폭염 시에 로스엔젤레스 42도, 파키스탄 50도, 알제리 51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물 부족과 폭염으로 북위도 지역마저도 해마다 수천 명이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21세기가 끝날 무렵이면 코로나와 같은 새로운 질병들, 상상을 초월하는 산불과 홍수의 증가, 수천만 명에 이르는 기후 난민, 경제 대공황과 지역 간의 기후분쟁, 농산물 생산이 크게 줄면서 일어나는 자원전쟁 등 한 해 기준 100조 달러의 세계 피해규모가 예상된다니 앞으로 80년 안에 변화될 지구의 모습을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지금의 자본주의적 개발과 소비 패턴에서 조금도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진행되었을 경우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코로나19가 해결된다 해도 이전의 시절로 돌아가 예전의 일상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지구와 인류는 이미 변화의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고 새로운 문명이 일어나는 시점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제 기존의 자본주의를 토대로 이루어낸 과학기술문명, 물질문명의 틀에서 벗어나 이전의 의식에서 한 단계 점핑된 도덕적 과학기술과 새로운 정신문명으로의 판짜기 변화가 절실해진 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현재 소비와 개발성장의 자본문명에서 전환하여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 갈 것인가를 이야기해야 된다. 포스트 코로나를 맞아 변화되어야 할 의, 식, 주, 의료, 교육 그리고 정치,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까지 기존의 질서와 그 틀을 어떻게 바꿔가야 할 것인지를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문학은 이 현실 변화의 중심에서 어떤 마음, 어떤 영혼을 가진 인간이어야 하는 것을 그려내야 하는 것이다. 3 지금껏 지구와 인류의 위기를 초래해온 자본문명을 벗어나 새로운 문명을 꿈꾼다면 먼저 기존의 자본주의적 가치관과 세계관 등 일상 속의 대중들에게도 정신적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 생각이 바뀌어야 그 삶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정제 없이 그대로 반영된 이데올로기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그렇게 이익을 극대화하며 개발과 성장의 경제논리로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이 자본주의다. 자본은 배고픔과 위험한 환경 조건에서 풍요로움과 안전함과 편리함을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그 도를 넘어 인간의 끝없는 탐욕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렇게 인류는 풍요와 편리를 거느린 현실 자본주의를 앞세워 공존공생을 위한 사회적 도덕과 윤리의 경계를 깨고 탐욕과 욕망을 당연하고 정당한 인간 정서로 편입시켰다. 단순하게 이야기 했지만 사실 이런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자본주의와 잘 어울려 끝없이 달려온 결과 현재의 지구와 인류의 위기를 맞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 개인의 인간도 그 탐욕이 지나치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처럼 반성과 성찰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면 인류는 21세기가 끝나는 지점부터는 지금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혹독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사피엔스의 종말을 향해 추락해 갈 것이다. 그래서 문학예술은 지금의 시점에서 좀 더 집중적으로 21세기 이후의 현실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한 새로운 문명, 새로운 문학예술에 복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문명에 대응하는 문학을 생각하려면 자본주의의 속성인 탐욕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철학, 새로운 문화를 궁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어쩌면 삶의 본질과 모든 생명을 아우르는 총체적 근원으로부터 오는 것이어서 그것은 현실 자본주의를 벗어나 근본 진리의 삶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본래 모든 생명들은 함께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공존공생의 공동체적 존재라는 것과 그것을 위해 인간은 가장 경계해야 할 본성인 ‘탐욕’을 꾸준히 정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4 나는 이것을 문학이라는 영역에서 생각한다면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는 ‘단순한 삶’과 ‘소박한 삶’을 하나로 추구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인데 ‘단순한 삶’의 문학은 개인 스스로를 전체의 한 부분이면서, 그렇기 때문에 전체라는, 그래서 전체를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라는, 이미 붓다나 예수 등 많은 현자들이 발견했던 동체대비, 궁극과의 합일 등 진리의 삶과 연계되어 있는 것이며 이를 현실로 가져오기 위한 문학을 말한다. 이는 ‘단순성’이라는 진리의 영역을 문학으로 가져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실현할 수 있는 ‘단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리의 삶은 당장 그렇게 살려는 스스로의 결단과 실천만 있으면 되는 ‘단순성’에서 시작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진리에 의해 사는 삶’은 어떤 거창한 것은 아니고 현재의 실상을 바로보고 그것에 어긋남 없이 사는 것, 다시 말하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삶의 실상은 모두가 있는 그대로 어울려(연기적 관계를 가지고) 전체가 하나의 생명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있는 그대로(본질 그대로) 어울려 순환하고 진화하는 것이 바로 ‘단순한 삶’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변곡점에서 문학이 주시해야 할 중요한 화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소박한 삶’은 이런 ‘단순한 삶’을 현실로 가져오기 위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 사실은 방법이면서 그 본질이기도 하다. 자본주의를 진화시켰던 인간의 탐욕은 끝없는 집착을 가져와 현재 지구의 기후재앙과 함께 모든 문제의 화근이 되었고 이 탐욕과 집착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소박한 삶’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자본의 끝없는 성장 시나리오는 이제 그 한계에 왔다. 대체 에너지 등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과학기술의 노력과 성과가 있다하더라도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충족시킬 수는 없다. 결국은 소박한 삶으로 가지 않으면 해결 될 수 없는 것이다. ‘소박한 삶’은 스스로의 탐욕을 다스리는 삶이고 우리 사회의 대립과 갈등을 조화와 균형으로 이끄는 해답이라고 본다. 이‘소박한 삶’을 통해 모든 생명과 지구가 하나의 완결체로 존재할 수 있는 공존, 공생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문명을 극복하고 새로운 문명의 길로 가는 길목에 이러한 물질 중심의 삶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단순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문학’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 문학적 화두를 통해 개인의 이기(利己)를 극복하고 무아(無我)와 탈에고(脫ego)의 수준까지 의식을 확장하여 탐욕을 순치(順治)하는데 기여해야 하는 것이 현재의 문학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코로나19와 같은 새로운 질병들과 지구의 기후재앙을 막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첫눈이 내린 노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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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16
  • 세석평전細石平田의 추억
    ☐지리산에서 온 편지 11 세석평전細石平田의 추억 잔돌평전의 저물녘 풍경 세석평전은 지리산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곳이다. 지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을 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경남의 중산리에서 바로 천왕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가 하나 있기는 하지만 그곳을 제외하고는 동서남북 어느 곳에서 오르건 세석평전을 거치지 않고는 천왕봉에 오를 수 없다. 그래서 지리산에 많은 대피소가 있지만 세석평전에는 늘 사람들이 많다. 세석평전은 오래 전엔 잔돌평전이라고 불렀다. 세細가 ‘가늘다’라는 뜻으로 세석은 작은 돌들이 많은 곳이라는 뜻이고, 높은 곳에 있는 펀펀한 땅을 평전이라 하니 세석평전은 작은 돌들이 많은 높고 펀펀한 땅이라는 뜻이다. 이 평전에는 철쭉이 군락을 이루며 피어 있고 지리산맥의 많은 능선들이 굽이치며 내리벋고 있어서 그 청량한 바람과 함께 펼쳐지는 풍광은 장엄 그 자체이다. 사람들이 지리산을 타면서 굳이 주능선 종주를 고집하는 이유는 노고단으로부터 천왕봉까지 서에서 동으로 전남과 경남에 걸쳐있는 첩첩 봉우리들이 만들어내는 긴 능선과 남과 북으로 여러 갈래 벋어있는 지 능선들의 유장한 지리산맥을 걷는 내내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곡과 능선을 넘나드는 구름들과 저물녘 빛을 받아 강하게 굼틀리는 산줄기들의 파노라마는 자신의 감옥에 갇혀 사는 이기적인 소인배를 벗어나 자연의 하나일 뿐인 알몸의 자신을 깊이 성찰하게 한다. 특히 겨울 산의 엄혹한 추위 속에서 수없이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하면 지리산의 저물녘 풍경은 언제나 깊게 사무쳐 온다. 오만과 편견 그리고 세석대피소 뒤에 솟아있는 봉우리가 영신봉靈神峰이다. 그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아 한때는 무속적 신앙을 가진 무리가 영신대 아래 기도처를 잡고 집단생활을 하던 때도 있었다. 30년도 더 된 어느 해에 대성계곡의 작은세계골을 타고 영신대까지 오르는 계곡등반을 할 때였는데 세석평전에 텐트를 칠 요량으로(그때는 텐트 치는 것이 허용될 때여서 세석평전에 가면 울긋불긋한 텐트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곤 했다.) 천천히 계곡을 올랐다. 그리고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 영신대 근처에 이르러 나는 깜짝 놀랐다. 바위 틈새마다 촛불들이 켜져 있고 군데군데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텐트와 작은 비닐하우스들이 좁은 공간 여기저기 있는 걸 봐서 이들은 집단 기거하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 말을 붙일 엄두도 나지 않아 조용히 그들을 방해하지 않고 그곳을 빠져 나왔다. 대피소 쪽으로 올라와 보니 불빛도 보이지 않은 구석진 곳이었는데 기도처로써는 참으로 명당자리였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엄격하게 관리하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을 위하여 이 높은 산에까지 올라와 무리지어 기도를 할까. 기도로 자신이 원하는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것일까. 그 원하는 무엇이라는 것이 겨우 자신이나 가족의 부富나 안위 정도의 이기적인 것은 아닐까. 젊은 치기가 앞서 있던 당시로는 순전히 자의적인 짐작만으로 그들을 재단하고 무시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니 나의 오만과 편견이 얼마나 심했었나를 알 수 있다. 요즘 세태를 보면 개인이건 단체건 기업이든 정당이든 혹은 지역과 나라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역만을 최우선적으로 옹호하고 챙기는 것이 일반화된 정서인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고 전혀 부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법으로 위법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괜찮다는 생활정서가 이미 우리의 구체적 생활에 깊이 들어온 듯하다. 하지만 이것은 왠지 마음이 불편하다. 양심이라는 것이 불편해 하는 것이다. 사람다운 무엇인가를 팽개치는 것 같아 어떤 헛헛함이 밀려오는 것이다. 세석대피소의 추석 그 시절에는 세석 대피소도 그야말로 조그만 대피소였다. 지금은 증축하여 넓은 공간에 난방도 되어 그때에 비하면 호텔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때는 매우 좁고 한 겨울에도 난방 없이 잠을 잤다. 그리고 추석연휴가 되면 세석대피소는 만원이었다. 언젠가 그 시절 추석연휴에 지리산에 올랐다. 여러 명이 갔는데 텐트 가지고 가기 귀찮아서 대피소를 이용하려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올랐는데 예상 외로 대피소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대피소 수용 정원이 몇 명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한 다섯 배는 많은 인원이 들이닥쳤던 것 같다. 전에 혼자 잘만한 공간에 다섯 명이 누워야 했기 때문이다. 대피소 직원들은 바로 눕지도 못하게 하고 옆으로 몸을 세운 채로 칼잠을 자듯 꼭 끼워 눕게 했다. 날이 너무 추워 밖에 재울 수는 없었던 거다. 지금은 반드시 예약을 해야 대피소를 이용할 수 있으며 예약이 안 된 사람들은 아예 하산 시간이 확보되지 않으면 산 아래 출발지점 관리소에서 올려 보내지 않고 있다. 어쨌든 화장실에라도 다녀오면 누울 공간이 없어지기 때문에 화장실에도 갈 수 없었다. 그래도 그 정도는 고마운 축에 들었다. 왜냐하면 복도 공간에도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서 밤을 새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상상할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시쳇말로 육이오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었다. 그래도 밖에서 추위에 떨면서는 잠도 오지 않을 뿐 아니라 몸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어서 그냥 안에서 버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많은 인원이 좁은 공간에서 함께 자다보니 코고는 사람들도 많았고 더욱이 땀 냄새며 발 냄새가 지독해서 웬만한 사람은 잠을 들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잠을 자기 위해서는 독한 술이라도 몇 잔 마시고 떨어져야 하는데 또 그런 사람들 때문에 고약한 술 냄새까지 합세해서 여간해서 잠을 잘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어찌하다 두서너 시간 잠들 수 있다면 그것만 해도 고마운 것이었다. 하지만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도 다음 날 산행에 큰 지장은 없었다. 아침에 약간 찌뿌듯했던 몸은 한 시간 정도 산을 타며 땀을 흘리면 바로 말끔해졌기 때문이다. 한 겨울에는 그래도 괜찮았다. 겨울 산을 오르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 지리산문화
    • 박두규 시인의 지리산에서 온 편지
    2022-10-08
  • 피밭마을의 골짜기
    지리산에서 온 편지 10 피밭마을의 골짜기 어머니의 단풍구경 나이 80대 중반 무렵이었을까, 어머니는 바람이 쌀쌀해지는 가을이 오면 단풍구경 가자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나는 그때만 해도 바쁘게 밖으로만 돌던 때여서 ‘네, 그래요. 언제 피아골에라도 한번 가게요.’ 하면서도 그냥 스쳐지나가기 일쑤였다. 구례에 살 때여서 한두 시간만 시간을 내도 금방 다녀올 수 있다는 생각에 더 소홀했던 것 같다. 막상 이제 돌아가시고 나니 가을이 오고 피아골에 단풍이 곱게 물들기라도 하면 그 말씀이 늘 밟힌다. 그래도 언젠가 한번 어머니를 모시고 피아골에 갔던 적이 있었다. 피아골 초입의 단풍잎들이 처연하리만큼 붉게 물든 나무 아래로 모시고 가면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은 고작 ‘야, 참 곱다’ 한마디였다. 그리곤 별 말씀도 없이 그냥 한참을 앉았다 돌아오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만 해도 노인네의 짧은 한마디에는 한 생이 다 담겨있기도 하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젊은 것들은 지금 여기의 현재를 살아내기도 바빠서 울긋불긋 현란한 색들을 보며 그저 가을이니까 하는 정도의 계절감각을 가졌었다면 어머니 같은 노인네들은 저 화려한 시절의 절정기 뒤에 있는 인생의 외로움과 쓸쓸함을 절절하게 느끼셨을 것이다. 지금 여기의 붉디붉은 절정의 단풍이지만 당신에게는 젊은 날의 과거로만 보였을까. 씁쓸한 듯 가늘게 뜬 눈빛과 오랜 풍상의 눈가 잔주름이 아직도 생생하다. 붉은 골짜기 피아골 피아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끝 마을은 직전마을이다. 피 직(稷)에 밭 전(田)을 쓰니 그 옛날 곡식이 귀했던 시절의 이름이다. 그 피밭골이 육이오 전쟁을 거치면서 너와 나, 적군과 아군, 좌익과 우익의 갈등과 대립을 함축하고 있는 이름인 피아골로 불리게 되었다. 피아골은 전쟁 당시 한때 인민공화국의 구례 군당이 숨어들었던 곳이며 그 비트는 피아골 삼홍소에서 계곡 좌측의 지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지금도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전투가 잦았을 것이니 계곡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피아골의 피아는 한자로 상대방(피)과 나(아)를 뜻하는 말이건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붉은 피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떠도는 말로 전쟁 이후 이 골짜기에서 한 트럭분의 유골이 나왔다고도 하니 어쨌거나 그 상처가 골짜기만큼이나 깊다고 할 것이다. 전쟁 훨씬 전에도 피아골의 붉은 골짜기 이미지는 있었다. 골짜기의 중간쯤에 있는 삼홍소가 그렇다. 삼홍소는 한자로 三紅沼라고 쓰는데 ‘셋이 붉은 물웅덩이’라는 뜻이다. 조선조의 생육신이며 선도의 맥을 이었다는 김시습이 이곳에서 시를 한 수 지었는데 단풍이 붉고, 그 빛이 물에 어려 계곡물이 붉고, 도도한 흥취에 술 한 잔 걸친 얼굴이 붉다하여 삼홍이라고 노래했다는 것이다. 온 천지가 붉은 이 삼홍소의 계곡에 앉아 있으면 당시 왕권을 둘러싸고 진행되던 피비린내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뇌하는 지식인 김시습이 보이는가 하면 한편으론 현실을 극복하고 인생을 관조하며 지혜롭게 한 생을 건너는 현자 김시습의 풍모가 그려지곤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혹은 어느 시대라 할지라도 현실의 삶과 이상의 삶은 늘 함께 하는 것이 아니던가. 어느 한쪽에 빠져 허우적이는 것이 어리석은 삶이라면 어쩌면 김시습은 자신이 처한 현실과 자아가 추구하던 이상을 아우르며 균형 잡힌 삶을 꾸려낸 각자覺者가 아니었나 싶다. 계곡등반의 허와 실 20년도 훨씬 전이었을 젊은 시절, 한동안 계곡등반을 즐겨했는데 피아골도 계곡등반을 했던 적이 있다. 직전마을에서 피아골 대피소까지는 등산로로 가고, 대피소를 지나서 바로 등산로를 벗어나 계곡만을 타고 주능선까지 오르는 길이었다. 대피소에서 지정 등산로를 타고 오르면 주능선의 피아골 삼거리에 이르지만, 계곡을 타고 오르면 반야봉 바로 밑에 있는 주능선의 노루목 근처에 이르게 된다. 계곡등반을 하는 것은 다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계곡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 그 물줄기의 시원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물줄기의 처음은 어떻게 시작될까, 어디서부터일까, 하는 일반적인 궁금증과 함께 어떤 존재의 시원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 같은 것이 강했던 것 같다. 일반적으로 모든 자연의 사물에 대한 존재의 근원은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설화나 전설 같은 상상력들이 포진하게 된다. 그래서 더 궁금증을 자극하고 괜한 동경이 생기는 것 아니던가. 하지만 계곡등반 같은 경우에는 반드시 분명한 그 처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 나름 후련한 맛은 있었다. 하지만 ‘처음’이라는 막연한 시원에 대한 그리움의 의미는 깨지게 된다. 계곡의 끝자락에 이르게 되면 물도 없는 그저 돌멩이 몇 개 있는 평범한 지형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삶의 균형감각 나의 계곡등반은 어쩌면 이런 미화되고 포장된 의미들을 깨고 싶은 심정의 발로였는지도 모른다. 한 세상을 살며 이상과 동경은 꿈과 희망이라는 단어로 치환되면서 답답한 현실을 헤쳐 나가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환상과 비현실 속의 막연한 기대감으로 현실적이고 실질적 삶을 꾸려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계곡등반으로 계곡의 끝 지점을 확인하며 나의 현실인식을 다그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문학의 허구적 상상을 앞세워 살며 현실을 나의 에고로 왜곡하여 인식하거나 또는 그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피하지는 않고 있는가 하는 자기점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떤 뚜렷한 인식과 의도성을 가지고 계곡등반을 하지는 않았지만 돌아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얼마나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으로 살고 있을까. ‘실사구시’라는 말은 도법스님께서 많이 쓰시던 말씀이다. 나는 나름대로 ‘주어진 이 생生의 현실을 진리의 눈으로 바로 보고 그렇게 세상살이를 해내야 한다’는 말로 해석하며 들어왔다. 계곡등반을 그렇게 철학적으로 했다는 말은 아니고 그 행위의 저 깊은 안쪽에 그런 무의식적 발로가 있었기를 바라는 심정인 것이다. 모든 존재의 본성이 가지고 있다는 삶의 균형감각 같은 것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피아골을 자주 올랐다. 구례에 있는 가까운 곳이어서 그러기도 했지만 팔구십 년대라는 시대적 격동기를 살았던 내 존재의 현실을 올바로 가늠하고 또 그렇게 살기 위한 몸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지리산문화
    • 박두규 시인의 지리산에서 온 편지
    2022-09-08
  • 불무장등不無長嶝
    ☐지리산에서 온 편지 9 불무장등不無長嶝 불무의 꽃들 지리산의 8월이 오면 오르고 싶은 곳이 불무장등 능선이다. 숲은 무성하게 우거지고 숲의 오솔길엔 여기저기 여름 꽃들이 피어있을 것이다. 나는 꽃에 큰 관심 없이 산을 올라 다녔지만 불무장등을 다니던 어느 때부터 그 이름들이 궁금해졌다. 꽃이라기보다는 그 녀석들이 내 마음의 어느 구석을 침탈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가 마음에 새겨질 때면 이름부터 궁금해지는 것이 일상의 습習이어서 나는 그들의 이름을 찾아 불러주기 시작했다. 동자꽃, 솔나리, 수국, 꿩의다리, 비비추, 원추리...... 나는 평소 아름다움은 꽃이나 어떤 풍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행위,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오는 깊고 그윽한 어떤 느낌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산을 오르며 특히 지리산의 여름 산을 오르며 숲을 고요히 호흡해내는 작고 여린 꽃들의 순결한 숨소리를 들었던 것일까. 그 존재 자체부터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인간의 어떤 한계점에 있는 것이기도 해서 늘 막연한 슬픔으로 이어졌다. 그 무렵에 써졌던 시가 생각난다. 숲에 들어 비로소 나의 적막을 본다./ 저 가벼운 나비의 영혼은 숲의 적막을 날고/ 하얀 산수국, 그 고운 헛꽃이 내 적막 위에 핀다./ 기약한 세월도, 기다림이 다하는 날도 오기는 오는 걸까./ 이름도 없이 서 있던 층층나무, 때죽나무도 한꺼번에 슬퍼지던 날/ 그리운 얼굴 하나로 세상이 아득해지던 날/ 내 적막 위에 헛꽃 하나 피었다. (「헛꽃」전문) 불무장등의 이름 지리산 불무장등은 주능선의 삼도봉에서 화개 쪽으로 벋은 남쪽 능선인데 한자로는 不無長嶝이라고 쓰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그 설명도 각각이다. 불교와 관련한 설명은 ‘지리산은 문수보살의 일신인데 문수는 오로지 반야般若를 주관하며, 반야는 제불의 어머니(諸佛之母)이다.’ 라는 것에서 불모佛母가 불무不無로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불무장등 봉우리가 풀무 모양으로 생겨서 풀무잔등으로 불리다가 일제 때 국토의 우리말 지명을 한자화 시키는 과정에서 불무장등不無長嶝으로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무장등 능선을 올라가면 마지막에 주능선의 삼도봉에 이르는데 이 삼도봉도 본래는 날라리봉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그 형상이 낫날처럼 생겼다고 낫날봉인데 발음하기 쉽게 날라리봉으로 불리다가 한자화 과정에서 3개 도(전남, 경남, 전북)가 만나는 곳이니 삼도봉三道峰이라고 공식화 되어 지도에 올랐다. 하찮은 이름의 역사가 이렇듯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어디 있으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가를 따질 새도 없이 세월은 흐르고 흐르는 시간 중에 모든 것은 그렇게 변해간다. 우리 스스로도 늘 변하여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가 아니니 10대의 나와 50대의 내가 어찌 같은 ‘나’란 말인가. 위벽은 5일이면 바뀌고 피부는 한 달, 뼈의 골격조차도 3개월이면 모두 바뀌어 1년이면 몸속 원자의 98%가 바뀐다고 하니 사실상 고정된 ‘나’라는 실체는 없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오래된 기억만이 남아 세월을 왜곡할 뿐, 늘 새로워지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있을 뿐이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도계를 이루는 능선 불무장등 능선은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도계를 이루는 능선이다. 능선의 길을 오르다보면 발 한번 띄면 경상도요 또 한 발자국 옮기면 전라도일 때가 많다. 지금도 그렇지만 오래 전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동서 지역감정이 극에 있을 때 이 능선을 자주 올랐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왔다 갔다 도계의 경계를 지우며 이 능선을 오르면 마음의 지역 경계가 사라지는 듯도 하여 많은 위로를 받았던 것인데 한편으론 개인과 파당의 이익을 위해 남북으로 나뉜 나라를 다시 동서로 나누는 위정자들에 대한 분노가 증폭되기도 했었다. 내 주변에도 같이 NGO 활동을 했던 이들이 현실정치의 변화를 위해서라며 정가에 입문한 이들이 많이 있지만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는 것 같다. 물론 개인의 진정성이야 그대로 마음 속 어딘가에 있겠지만 일단 국회의원이 되었든 지방의원이 되었든 혹은 시장이 되었든 현실정치라는 것이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사람의 신념이라는 것도 수시로 변하는 일상 삶의 상황과 조건 속에서 원형으로 보존되어 그 신념에 의해 일상을 열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물며 정치에 있어서야 더 그렇지 않을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죽음을 담보로 그 신념을 지킨 자들도 없지 않았으니 희망이라는 단어도 빛을 잃지 않고 쓰이는 것 아니겠는가. 불무의 무덤들 하지만 내가 불무장등 능선을 오르며 가장 마음에 쓰였던 것은 죽음이었다. 이 능선에는 무슨 묘들이 그렇게 많은지 오르며 수시로 만나는 것이 무덤이었다. 누군가의 삶의 종지부들이 수없이 찍혀 있는 이 무덤들을 보며 숲의 살랑이는 무수한 이파리들만큼이나 많은 생령들의 부재를 떠올리곤 했다. 누군가는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라며 사는 것이 곧 죽어가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삶, 그 자체만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내 안의 어딘가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또 애써 무시하려는 것도 아니지만, 늙고 병든다 해도 삶 그 자체에만 집중하면서 사는 것만이 그나마 스스로에게는 답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불무장등을 오르며 많은 여름의 꽃들과 무덤들을 보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무심하게 지나쳐가는 것이다. -천마꽃 / 사진 김인호
    • 지리산문화
    • 박두규 시인의 지리산에서 온 편지
    2022-06-12
  • 지리산에서 온 편지 8
    ☐지리산에서 온 편지 8 남부능선이 준 옐로카드 틈만 나면 지리산에 오르던 그 시절, 산에 갈 때마다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힘들게 산에 올라가봐야 도로 내려올 것인디 머하러 그렇게 산에 대니냐?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쌀이 나오는 것도 아닌디.” 나는 어머니께 무어라 할 말이 없어 그냥 “다녀올께요!” 하고 나오곤 했다. 에베레스트 최초 등반을 꿈꾸며 수없이 목숨을 걸고 산에 올랐던 조지 맬러리의 ‘왜 산에 가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간단했다. ‘거기에 산이 있으니까.(Because it is there)’였다.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답이다. 그런 그에게 ‘왜 사느냐’라고 물었다면 아마도 ‘목숨이 붙어 있으니까’라고 대답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사는 동안 모든 행위들에 이유나 의미를 부여하며 산다. 그 이유나 의미가 불분명하면 어떤 행동이든 망설이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행위가 ‘자신의 존재(에고)’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그것 때문에 자신의 감옥에 갇히게 되기도 한다. 어쩌면 죽는 날까지 자신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종신형을 사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인류사 속에 성인이라고 하는 분들이 적은 것은 그것을 말해준다. 성인들이야말로 자신의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경지에서 타자를 위해 사신 분들이 아니겠는가. ‘에고’ 없는 순수의식으로 산다는 것이 그런 것일 터이다. 조지 맬러리는 오로지 에베레스트에 오르겠다는 일념으로 살다보니 그 집중력에서 오는 어떤 순수성을 감지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거기에 산이 있으니까’라는 답변이 나왔을 것이다. 그것은 말장난이 아닌 일관된 신념의 단순성의 삶에서 나온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지리산을 오르게 된 것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성을 지닌 빨치산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산에 오르고 또 오르다보니 정신과 육체 모두에 어떤 강한 에너지가 생겨났고 그로 인해 당시 처해 있던 개인적인 어려운 상황과 조건을 극복하고 삶의 의욕과 열정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때 자주 올랐던 곳이 남부능선의 지능선과 계곡들이었다. 지리산의 남부능선은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의 주능선 상에서 남쪽으로 내리벋은 긴 능선이다. 세석평전에서 시작하여 하동군에 이르는 능선으로 중간에 지능선들을 거느리고 있어 대성계곡과 단천계곡, 선유동계곡, 의신계곡 같은 지리산의 큰 계곡들을 형성하고 있고 그것들을 모두 품고 있는 지리산맥의 중요한 근간능선의 하나이다. 하지만 남부능선의 주능선 산행은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을 뿐 아니라 중간에 샘도 별로 없어 매우 지루한 등반로이다. 그렇다 보니 등산객들이 적어 길이 묵고 덤불이 우거졌으며 거미줄이 많아 더 불편하고 힘든 길이 되었다. 하지만 남부능선의 지능선과 골짜기들은 서로 잘 어울려 갈 때마다 새롭고 깊은 감동을 주었다. 어느 여름에 故 박배엽 시인과 함께 남부능선의 지능선에 있는 단천계곡을 타고 삼신봉에 올라 남부능선의 주능선을 따라 쌍계사로 내려오는 산행을 계획하게 되었다. 단천골은 현재 비등산로라서 다닐 수 없는 곳이지만 그 당시에도 7부 정도 오르면 길이 없어져서 나침반에 의지해 삼도봉을 향해 직선 구간을 치고 올라가야만 했었다. 어차피 길이 없어지면 스스로의 생각과 의지에 의해 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는 누구나 태어나면서부터 인생이라는 길을 걷게 된다. 그 길은 탐방로처럼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예측할 수 있는 길도 아니며 그저 나의 생각과 나의 의지에 따라 가고 있는 길일뿐이다. 그 생각을 이루려는 의지가 강하게 일어나는 순간 없던 길이 비로소 열리며 그 길이야말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오로지 나만의 길인 것이다. 물론 그것은 세상의 도덕률(야마)과 개인의 도덕률(니야마)이라는 바탕 위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야말로 세상을 제 홀로 사는 제멋대로의 길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단천골을 타고 남부 주능선의 삼신봉에 올랐고 하산을 위해 남부능선을 내려오는데 대학생으로 보이는 두 명의 청년을 만났다. 그런데 그들은 물병도 없이 알칼리성 음료 한 개를 달랑 들고 오는 것이다. 배낭은 매었지만 얼핏 보아도 산행 장비가 너무 허술하여 어디 가냐고 물으니 남부능선을 따라 세석평전까지가 오늘 산행이란다. 몇 마디 더 물어보니 산행 초짜들로 내 짐작으로는 그들의 산행이 좀 무리일 것 같았다.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해서 필요할 거라며 가지고 있던 물을 모두 내주었다. 그리고 삼신봉까지 가서 다시 생각해보고 세석까지 무리라고 생각하면 청학동으로 하산하라고 알려줬다. 삼신봉을 지나면 세석까지 가는 동안 하산할 길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들과 헤어지고 쌍계사로 내려가는 생불재(성불재, 상불재 등으로도 불린다) 삼거리에 이르렀는데 박배엽 시인이 여름해가 기니 바로 쌍계사로 내려가지 말고 능선을 더 타고 원강재를 지나 혜경골로 빠지자는 제안을 해왔다. 원강재로 가는 능선은 비등산로여서 길이 살아 있을지도 궁금하고 아직 안 가본 길이니 한번 가보자는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산행과 체력에는 자신감이 있던 때라 원강재 쪽으로 길을 잡았다. 그렇게 한참을 가는데 허리까지 올라오는 무성하게 자란 길가의 풀에 묻혀 길이 잘 안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희미하던 길마저 사라져 순전히 감각으로 능선을 찾아 걷게 되었는데 마침내 해가 기울고 말았다. 렌턴을 꺼내 지도를 보니 옛길은 능선을 타고 원강재를 지나 혜경골로 내려가는 길이 나와 있긴 했으나 현재의 상황에서 그 길을 찾아 내려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은 캄캄한 밤, 길이 사라진 지리산의 능선 위, 비축한 물도 식량도 없이 지치고 허기진 상태였다. 우리는 상의한 끝에 등산로는 어차피 사라졌으니 능선은 그만 타고 지금 이곳에서 바로 하산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신촌마을 쯤에 나침판 지표를 맞추고 화살표 방향으로만 직진하기로 하고 능선을 벗어나 바로 하산을 시작했다. 없는 길을 가려니 무성한 가시덩굴지대를 만나 얼굴과 온몸을 긁히고 헤쳐 나가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 벼랑을 만나 우회해야 했고 물도 못 마시고 비 오듯 땀을 흘리며 탈진할 지경에 이르렀다. 배가 너무 고파 시계를 보니 10시가 넘고 있었다. 낮에 대학생들에게 물을 다 준 것이 무척 후회가 되었다. 물이 없으니 계곡을 찾아 내려가며 물소리가 들리기만을 고대했으나 쉽지 않았다. 없는 길을 헤쳐 나가자니 평소보다 3~4배 정도 더 시간이 걸리지 않았나 싶다. 도저히 더 갈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쉬어가려고 앉았는데 어디선가 쫄쫄거리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때 물 한 모금의 기쁨이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원효의 해골물을 알고 마신다 해도 이처럼 꿀맛이었을 것이다. 물줄기를 따라 넓은 계곡으로 나오자 등산로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온 길에 비하면 너무 편한 길이었다. 속도를 내어 신촌마을 근처로 내려오니 거의 자정이 다된 시간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산에 자주 다녀 생긴 자신감이 오만으로 넘어가는 즈음 지리산은 우리에게 자연 앞에서 겸허한 자세를 갖추라고 옐로카드를 꺼냈던 것이다.
    • 지리산문화
    • 박두규 시인의 지리산에서 온 편지
    2022-05-09
  • 지리산에서 온 편지 6
    ☐지리산에서 온 편지 6 선한 바람에 일렁이는 연두와 초록의 물결들 - 왕실봉 칠순 노인네 이야기 모처럼 지리산에 오르니 어린 나무 건 고목이건 모든 나무들이 새잎을 피워 올리고 있다. 온통 연둣빛 초록물결로 산이 일렁인다. 바람이 한번 훑고 지나가면 초록의 파도가 한차례 밀려오는 듯한 서늘함과 그 상큼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초록빛은 마음을 가장 편안하게 해주는 색깔이라고 하는데 초여름의 산에 오르면 이 초록의 신록에 묻혀 몸 안에 쌓여 있는 스트레스와 강박과 두려움 등 세속의 삶이 만든 정신적 생채기들이 모두 치유될 것만 같다. 사람들은 보통 몸의 건강을 위해 산을 많이 오른다. 그리고 몸이 건강하고 편해야 마음도 편안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요즘은 그 생각에도 많은 변화가 오고 있다. 몸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으며 오히려 마음을 잘 다스려 불치의 몸을 극복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선진의학에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정신적인 영역을 치료에 활용하고 있으며 인간의 영성까지 의학은 확대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예전에는 별 생각 없이 산행을 했으나 요즘은 산을 오르는 일은 몸과 마음과 영혼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합일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특히나 요즘과 같은 신록이 우거지기 시작하는 계절이면 아무리 바빠도 산행을 한다. 숲의 모든 생명들이 가장 활발하게 생명력을 발현하는 시기여서 그런지 신록에 묻힌 나도 그 기운에 합류하여 내면의 에너지가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살아있음’의 순수한 생명력을 깨인 의식을 통해 접할 수 있는 명상의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오랜만에 그렇게 왕시루봉에 올랐다. 지리산 왕시루봉 정상 바로 아래에 쯤에 가보면 외국인 선교사들의 산장이 있다. 말이 산장이지 지금은 오래되어 거의 폐허 상태이며 남장로교회 쪽 사람들이 주도하여 문화재 등록을 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외국인 선교사 산장의 문화재 등록은 사실 많은 생태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어 신중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 왕시루봉은 정상이 해발 1240m이니 이 산장들도 해발 1000m는 넘나들 것이다. 원래는 노고단에 있었는데(선교사 산장 터는 노고단 대피소 바로 옆자리에 있었으며 아직 그 흔적이 남아있다.) 한국전쟁 때 폭파되어 비슷한 고도의 이곳 왕시루봉 자락으로 옮겨와 다시 여러 채의 방갈로를 짓고 삼각형의 조그만 예배당도 만들고 지형을 다듬어 작은 둑을 쌓고 물줄기를 막아 간이 풀장까지 만들어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 풀장이 연못처럼 남아있다.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와 산장을 지은 것은 외국인들이 무더운 여름에 풍토병을 피하기 위해 에어컨 바람 정도의 적정 온도의 높이에 피서지로 지었기 때문이다. 돌아가신 지리산 호랑이라는 함태식 선생께 들은 이야기인데 구례에 살던 자신이 10대 초반 때 여름에 노고단 외국인 산장에 가면(당시에는 노고단을 동네 뒷산 오르듯 쉽게 올라 다녔다 한다) 놀랄만한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우선 구례 사람들이 노고단 산장의 외국인 선교사 가족들에게 팔려고 나물이며 과일 등 다양한 먹을거리와 잡화를 이고 지고 가져와 작은 장이 섰다고 한다. 그리고 이 높은 노고단 산중에 발가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비키니 차림의 금발머리 여자들이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니 그 일제 강점기 시절에 어린 소년의 눈에는 별천지 세상에 온 것만큼이나 놀랐을 것이다. 80년대 후반 즈음이었을까. 내가 왕시루봉의 외국인 선교사 산장에 갔을 때 칠십이 넘은 산장지기 노인 한분이 계셨다. 하얀 수염이 덥수룩한 70대 중후반의 노인이었는데 작은 키에 산에서 다져진 다부진 몸을 가진 노인이었다. 산 아래는 고로쇠 물을 받아내는 2월의 봄이 시작되었건만 이곳은 아직도 한 겨울이었다. 식수로 쓰는 작은 물줄기가 꽁꽁 얼어 아직 다 풀리지 않아서 노인은 도끼로 풀장의 얼음을 깨어 물을 길어와 밥을 짓는다고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산장지기 노인이지만 이런저런 말을 붙여보니 산전수전 다 겪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신 분이었다. 이 노인은 왕실봉 아랫동네인 토지면에 사시는 분이었는데 젊은 시절 토지에서 왕실봉 산장까지 지게에 외국인 선교사 부인들을 지고 올라왔다고 했다. 70년대만 해도 서울역에서 짐을 나르며 생계를 유지하는 지게꾼이나 리어카꾼들이 있었다는 말은 들었는데 사람을 지게에 올려 산을 올랐다는 말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지게에 널빤지를 올리고 방석을 깔아 편안히 앉도록 해서 종종 선교사 부인들을 산장까지 데려다 주었다고 했다. 돈벌이가 귀한 시절이라 몇 푼 안 되는 돈이지만 마다하지 않고 그 일을 했다고 하는데 맨몸으로 오르기에도 버거운 해발 1240m의 왕실봉을 올랐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상당히 비만한 선교사 부인을 지게에 싣고 올라가는데 너무 무거워 중간에 쉬는 일이 잦았다. 점심 먹고 한참 후에 오르기 시작했으니 산장에 갔다가 어두워지기 전에 내려올 일이 걱정이었다. 어디쯤에서 쉬어 가게 되었는데 부인을 내려놓고 나무 그늘에 앉아 담배 한참을 하면서 혼자 푸념처럼 ‘아이고 뭘 처먹었는지 디지게 무겁네. 서양 년들은 다 저런가?’ 라고 내뱉었단다. 담배를 다 피우자 저만치에 앉아서 쉬던 선교사 부인은 아무 말 없이 다시 지게에 올랐고 다른 때보다 늦게 산장에 도착하여 내려가다가 지는 해를 볼 것 같았다. 그런데 지게 값을 달라고 하자 같이 올라온 그 선교사 부인이 한국말로 ‘저 사람이 올라오면서 나한테 욕 했어요. 돈 주지 말아요.’ 그러지 않은가. 우선 한국말을 할 줄 알았다는 것에 깜짝 놀랐고 돈을 안 준다는 말에 사색이 되었다. 어디에 호소할 수도 없는 힘없는 백성이 되어 노인은 터덜터덜 어두워진 산을 내려왔다고 했다. 그는 멀리 노을이 지는 아름답고 슬픈 섬진강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직도 왕시루봉 정상에는 낡은 방갈로들이 산재해 제국의 그늘이 가득하다. 나는 그 그늘 아래서 점심으로 가져온 주먹밥을 베어 물었다. 간단한 점심을 끝내고 지리산의 능선들과 계곡들을 바라보며 그 일을 떠올리니 새삼스레 아메리카라는 나라가 생각 속에 자리 잡는다. 인류 역사 속에서 가장 찬란한 문명이라는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종주국 아메리카, 한때는 우리도 아메리카 드림이라는 환상 속에 살았었지. 과연 인간이라는 종이 만들어낸 삶의 정답이 그곳에 있는 걸까? 나이 60을 넘어 알만큼 알고 살만큼 살아온 인생들에게 물어본다면 아마도 ‘천만에’라고 입을 모을 것이다. 돈은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에 매달려 돈보다 더 훌륭한 가치, 더 아름다운 가치를 모르고 인생을 다 소진한다면 그것 또한 우물 안의 개구리로 살다 가는 것하고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지는 해를 바라보며 산을 내려왔다. 저무는 빛을 받아 아스라이 보이는 섬진강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고 선한 바람에 연두 초록의 물결들이 일렁이고 있었다. 삶의 정답은 아마도 이 풍경의 어디쯤에 숨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끝> -왕시루봉에서 바라본 섬진강 / 사진 김인호
    • 지리산문화
    • 박두규 시인의 지리산에서 온 편지
    2022-04-13
  • 지리산에서 온 편지 5
    ☐지리산에서 온 편지 5 내원골 박처사 내원골 박처사를 만난 것은 지리산을 열심히 타던 시절, 아마 30대 후반이거나 40대 초반 쯤이 아니었나 싶다. 계곡의 얼음이 녹아내리고 산 구석지의 지저분한 잔설들이 바닥을 드러내는 봄의 초입이었을 것이다. 어느 주말, 지도를 보며 코스를 잡았는데 쌍계사 뒤쪽으로 들어가 내원골을 타다가 불일폭포로 넘어가는 코스였다. 쌍계사 조금 못 미쳐 오른쪽으로 계곡을 따라 오르면 내원골로 들어서게 된다. 이 내원골을 계속 타고 오르면 내원재를 만나게 되고 내원재에서 왼쪽으로 능선을 타고 오르면 생불재 삼거리를 만난다. 세석평전에서 내려오는 남부능선의 끝자락에 있는 삼거리인데 세석에서 삼신봉을 거쳐 내려오는 길과 불일폭포에서 오는 길과 청학동에서 오는 길이 만나서 생불재 삼거리다. 하지만 사실은 사거리였다. 이 내원재에서 생불재 삼거리에 이르는 능선길이 있기 때문에 사거리가 맞다. 그런데 생불재에서 내원재를 거쳐 원강재, 혜경골로 내려가는 길이 묵어버린 것은 사람들이 모두 유명한 쌍계사나 불일폭포를 찾아오기 때문이고 토착 주민들이 늙고 수가 줄어 내원골은 들어갈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나는 내원재까지 올라갈 생각은 없었고 내원골를 타다가 왼쪽의 능선을 가로질러 바로 불일폭포의 옆 사면길로 내려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내원골로 들어서 한참을 걸었는데 얼마나 되었을까. 갑자기 계곡 왼편 위에 자리 잡은 허름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은 불일폭포로 가기 위해 계곡을 벗어나 지능선으로 길을 갈아타야 하는 지점이었다. 가까이 가니 낡고 초라한 집이었지만 두 채가 더 있었다. 집을 들여다보니 잡초가 무성한 마당가에 늙은 감나무 하나가 지금은 없는 집주인의 한 때를 상상하게 해준다. 부엌문을 열어보니 먼지가 수북한 낡은 찬장에 아직도 가지런히 놓여있는 젓가락들이 보였다. 거미줄과 함께 벽에 그대로 걸려있는 망태기며 녹슨 호미도 그렇지만 방구들에 까지 올라온 잡초들을 보니 사람이 백년을 산다 해도 저렇듯 흐르는 세월의 한 과정일 뿐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한 집을 보니 초라한 양철 지붕집이지만 집 주변이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어서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담 너머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툇마루에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고 턱수염이 길게 자란 웬 도인이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봄볕을 가득 받은 툇마루에 고적한 산중의 고요 그 자체가 되어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 기운이 도저하여 말 한마디 붙이려는 생각도 못하고 문밖에서 망설였다. 그러다가 그래도 인사라도 나누고 갈 요량으로 사립문 옆에 주저앉아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의 명상은 꽤 길었다. 깜박 잠을 잤어도 잤을만한 시간이 지나고나니 명상을 끝낸 듯 했다. 내가 조심스럽게 기척을 내고 인사를 하니 들어오라 한다. 가까이서 보니 간간히 섞인 흰머리에 수염은 길었지만 노인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마른 몸매에 기름기 없는 건조한 얼굴이었지만 눈빛이 맑고 강한 느낌의 이목구비가 반듯한 중년의 사내였다. 먼저 인사를 하니 그는 긴 머리를 뒤로 묶으며 무슨 일로 여기에 왔느냐고 묻는다. 불일폭포를 가는 중이라고 했더니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불일폭포는 쌍계사 쪽으로 가면 되는데 왜 이 위험한 길을 타려는 거냐고 물어왔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질문과 너무 흡사했다. 나는 그가 명상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는 무슨 사연이 있어 살기 좋은 세상을 두고 왜 이런 궁벽한 곳까지 흘러들었는지를 묻고 싶었던 것이다. 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을수록 오히려 그에 대한 의문이 점점 더 많아졌고 흥미로웠다. 그가 바로 박처사라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다시 한 번 찾아올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불일폭포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했다. 우선 경사가 심했고 그 경사면의 길이 매우 좁고 미끄러워 잘못하면 굴러 떨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경관은 참으로 비경이어서 최치원이 은거했다는 설화가 괜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날 항상 정면 아래에서 올려다보기만 했던 불일폭포를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그 길은 바로 능선에서 폭포의 위쪽으로 내려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그 뒤로 나는 배낭에 쌀 한 말이나 라면 한 박스 등을 넣어가지고 박처사를 찾아가곤 했다. 그러다 조금 친해지는 즈음에 나는 박처사를 구례로 불러 식사 대접을 하면서 술을 한 차례 먹게 되었는데 말수가 적던 그의 말이 봇물처럼 터지고 말았다. 평소 하던 대화는 주로 그가 수련하는 도道에 대한 것이나 약초에 대한 것, 지리산 구석구석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는데 그날은 자신이 살아온 과거 이야기였다. 우리는 오랜 친구나 되듯이 서로 깊어져 많은 술을 마셨다. 그 후 바쁜 세속의 날들이 지나가고 다시 겨울이 오려는 즈음 내원골의 그를 찾아갔는데 집이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원래부터 박처사의 물건이라고는 옷가지 몇 벌이 전부여서 절방처럼 소박한 살림이었는데 그것마저 깔끔하게 치워진 빈집이었다. 나는 박처사가 떠난 것을 직감하고 편지라도 한 장 남겨놓지 않았나 찾아봤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왜 말도 없이 떠났을까? 아니, 왜? 왜 떠났을까. 물론 지금도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이제 짐작할 수는 있다. 그는 아마도 나를 만나는 1년 동안 즐겁기도 했겠지만 자신의 가던 길을 멈추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잠시 멈추었던 그 길을 갔던 것뿐이다. 진속불이眞俗不二라고는 하지만 그는 아직 속俗에 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진眞에 이른 것도 아니었을 것이니 나하고 어울리는 것이 스스로에게는 무척 큰 갈등이었을 것이다. 나는 겨울 초입에 그렇게 그를 잃고 허전한 마음으로 겨울을 맞았다. 그리고 그 겨울 어느 날 내원골을 찾았다. 골짜기의 침묵만큼이나 눈이 쌓여 있었다. 사람을 생각하는 일이 그리 겨운지 대숲에 쌓인 눈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후두둑 쏟아졌다. 볕 좋은 툇마루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깜박 졸았는데 잠 속의 깊은 골짜기에도 세속의 눈은 내리고 처사는 먼 길을 돌아와 토방에서 홀로 눈을 털고 있었다. 그 뒤에도 몇 번인가 내원골을 찾았지만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나도 언젠가부터 내원골에는 들지 않았고 그 후 지금껏 박처사의 소식조차 접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마도 그의 성품과 의지를 짐작하건데 이미 성통性通을 하고 진속불이眞俗不二의 경지에 이르러 세속의 저자거리를 활보하고 있을 것이다. <끝>
    • 지리산문화
    • 박두규 시인의 지리산에서 온 편지
    2022-03-09
  • 지리산에서 온 편지 4 - 문수골 문수 이야기
    ☐지리산에서 온 편지 4 문수골 문수 이야기 그 옛날,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지리산 이 깊은 문수골에도 들어왔을 것이다. 문수보살님의 공덕 한 조각이라도 얻으려는 생각으로 왔겠나, 그저 저버린 목숨 하나 의지할 구석 찾으러 허위허위 들어왔겠지. 이 골짝에 겨우 몸은 숨겼으나 나물만 먹고 살 순 없으니, 손바닥만 한 논배미라도 얻기 위해 함박꽃 지고 단풍잎이 붉게 물들 때까지, 축대를 쌓고 그 계단 위에 삿갓배미 논두렁을 올렸을 것이다. 그러구러 초승달 같은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해 아슬아슬한 계절을 건넜을 것이다. 그러고도 또 한 세월이 지나 인공人共 때 지리산에는 오갈 데 없는 한 무리들이 들어오는데, 아래 이야기 시 한편은 그때 이후로 이야기이니, 세월은 덧없이 흘러간다 하나 사실은 숱한 사연들에 떠밀려 가는 세월이 아닌가 싶다. 문수골에 사는 문수어매는 문수암에 밥하러 다니는 공양보살인데, 인공 때 그 불그스름허던 단풍들 죄다 꼬실라지던 무렵, 구례군당이 문수골로 숨어들어오던 이첨저첨에 부모 잃고 거천헐 데가 마땅찮았다. 그러다 문수암 늦은목재 너머 피아골 평도리 아재집에 오가다가 심심찮게 얻어먹던 절밥이 인연되어, 엔간히 철들 무렵에 아예 문수암 공양보살로 들어서게 되었더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부처님 고봉밥 올리며 이삼십 년 세월이 봄 한철 산벚꽃처럼 훌쩍 넘어가고, 소쩍새 청승맞은 울음소리에 밤은 그토록 깊어만 갔는데, 싸락눈 가물가물 내리던 어느 겨울 초입에 중년의 사내 하나가 문수암에 굴러 들어왔단다. 그는 하루에 두서너 마디 하는 말없는 불목하니가 되어 절마당에 널부러진 계곡 물소리도 쓸어내고, 남향받이 툇마루 밑에 잘 마른 장작개비 부처님들 가지런히 쌓아놓기도 하더니, 주지스님 세상구경 나가신 날이면 법당에 들어가 독경소리도 한 짐씩 져 나르는 것이었다. 한참 세월이 그렇게 또 가더니 어느 날, 공양보살이 사십구재 지내는 손님들 맞아 부산을 떨다가, 달빛도 없는 밤에 집에 가려고 지난 초파일날 쓸던 연등 하나 꺼내어 불을 밝히는데, 비가 오려나 바람이 불고 날은 심난한데 마침 그 말수적은 불목하니가 앞장을 서드란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중얼거리며 뒤를 따르는데, 그날따라 웬 미친바람이 그렇게 불어 나무 자빠지는 소리가 우지끈 계곡을 진동하고, 가물거리던 불빛마저 꺼지고 마니 허투루 사는 인생일망정 어찌 사연 하나가 없을 소냐. 물가에 풀 뜯는 흰 소 몰고 집에 들어와 애가 들어섰으니, 석씨 가문의 부처님 씨가 분명하고 문수골 문수암에서 태어났으니 애 이름은 석문수가 되어, 문수암 공양보살은 늙으막에서야 문수어매가 되었던 것인데, 문수는 계곡 날망 기슭에 비집고 자리잡은 집구석에서 뒹굴뒹굴할 때나, 애기나뭇짐 매고 문수골을 내려올 때도 말 한마디 붙여볼 놈이 없어, 저 혼자서 마당에서 푸덕이는 씨암탉이나 옷깃을 스치는 산죽, 자꾸만 다가오는 산그늘에게 무어라 중얼거리기만 하는 것이었다. 문수는 그 뒤로도 무어라 중얼거리기만 할 뿐, 세상 뭇놈들이 내는 소리는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 문수란 놈 문수암 절마당에서 장작 패며 코밑수염 꺼칠꺼칠해진지가 벌써 오래건만, 이적지 문수골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나무 자빠지는 소리만 들으며, 한 번도 이 골짜기 떠날 생각을 안 하고 중얼거리기만 하니, 누가 있어 어찌 그 속내를 알 수 있을 것인가. (졸시 「문수골 문수 이야기」 전문) * * 문수골은 구례의 유명한 아흔 아홉 칸 집 운조루가 있는 오미리 뒷고랑 물길을 따라 지리산을 올라가면서 시작되는 깊은 골짜기이다. 한참을 오르다 보면 문수암으로 오르는 길에서 물길이 나눠진다. 문수암 뒤편 능선이 왕실봉 능선인데 이 능선을 가로질러 늦은목재를 넘으면 바로 피아골이 나온다. 나는 언젠가 친구하고 이 늦은목재를 넘으며 왜 이 고개 이름이 늦은목재일까 생각했었다. 그 친구의 생각이 그럴 듯 했는데, 그것은 그 옛날 이 피아골 평도리 사람들이 구례에서 장보고 화엄사 뒷산 넘어 밤재마을로 와서 문수골을 건너 이 재를 오르면 해가 떨어지는 늦은 시간에 이를 것이니 늦은목재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랬다. 지금은 사라지거나 묻힌 길이 되었지만 능선을 가로지르는 길들은 당시 민초들에게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일상의 길이었다. 지리산 뿐 아니라 모든 산은 옛사람들에게는 삶터였고 생활의 현장이었고 일상의 길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산의 품성을 배우며 자랐다. 조급하지 않으며 숱한 생명들이 조화를 이루고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스스로도 모르게 얻은 그 자비의 품성으로 서로 나누며 모든 생명을 모시고 함께 살았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산에서 내려오기 시작했고 자동차와 함께 속도문화가 일반화되면서 산은 사람들의 일상에서 멀어졌다. 속도의 걸림돌이 되어 파괴되었고 구경거리가 되어 짓밟혔으며 오히려 산을 내려와야만 삶이 풍요로워지는 세상이 되면서 사람들은 산에서 얻은 본래의 품성을 잃어갔다. 그리고 사람들의 삶은 공격적으로 변하였으며 불신과 분노와 증오가 증폭된 일상을 스스로 살게 되었다. 또한 지리산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애달프고 서러운 목숨들의 역사를 안게 되었다. 지금도 수많은 백골들이 녹슬은 총열들과 함께 묻혀있고 아녀자와 어린아이들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묻혀있는 산이 지리산이다. 역사를 바르게 사는 일이 현실 속에서는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는 일이며, 뭇 생명들의 삶과 평화를 헌납해야 하는 일인지를 지리산을 오르내리며 비로소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지리산은 그동안 잃어온 산의 품성을 되찾게 해주는 산이기도 하다. 지리산은 모성의 산으로 잃어버린 사람들의 착한 마음, 착한 품성에 대한 기억을 되찾게 해주는 산이기도 하다. 우리 본연의 품성과 근원에 대한 그리움을 짐작하게 해주는 산이다. 우리가 이 그리움의 마음, 그 자비의 품성을 일상 속에서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지리산을 이야기해야 한다. 지리산은 이러한 새로운 우리의 삶의 가치를 내장한 소중한 산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이런 생각과 함께 지리산의 길을 열어준 친구가 있었다. 서둘러 이승의 길을 떠났지만 내 마음 속 오랜 벗, 지리산을 떠올릴 때면 어김없이 그가 함께 생각난다. 그 굳고 정하다는 갈매나무 같은 녀석, 윤동주의 시처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늘 괴로워했던 녀석,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사는 일의 전부라는 것을 깨우쳐준 나의 스승, 젊은 시절 쉼 없이 지리산을 함께 올랐던 그녀석이 오늘 따라 무척 보고 싶다. -형제봉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능선(사진 김인호)
    • 지리산문화
    • 박두규 시인의 지리산에서 온 편지
    2022-02-07
  • 지리산에서 온 편지3
    ☐지리산에서 온 편지 3 지리산, 비트 산행 어린아이는 엄마에게 많은 질문을 한다. “엄마, 코끼리는 왜 코가 길어?” 또는 “엄마, 바다는 왜 푸르데?” 이런 질문을 받으면 참 난감하다.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니 애가 못 알아들을 것이고 아니 그런 지식도 별로 없다. 그런데 아이들은 왜 그런 질문을 할까? 그건 당연히 그것이 이상하고 또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제 세상에 눈 뜬지 갓 4,5년 된 생명들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이상하고 신기하고 새로운 것들뿐이다. 그러니 외출하거나 여행을 할 때면 끊임없이 질문을 해대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낯선 이 세상은 얼마나 신기하고 즐거울까? 매일매일 주변에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면서 아직은 낯선 세상을 사니 그 세상이 얼마나 재미있고 즐거울까? 하지만 많은 어른들에게는 늘 똑같은 풍경에 반복되는 세상이고 그래서 지겨운 세상일뿐이다. 다시 말하면 새롭지 않다. 그래서 어른들은 여행을 하게 된다. 어린아이들처럼 새로운 세상, 낯선 세상을 보며 세상을 새롭게 보고 싶은 것이다. 사실, 똑같은 세상을 늘 새롭게 볼 수 있고 새롭게 살 수만 있다면 그건 이미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옛 시에 ‘깨달음’이란 선시가 있다.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나무를 하고 물을 길었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다. 이 시를 보면 깨달음을 얻기 전이나 얻은 후에나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다. 그래서 깨달음은 물을 긷고 나무를 하는 일상의 현실에 있다는 것과 그 일상을 새롭게 보고 또 새롭게 사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지겨운 일상(현실)을 새롭게 볼 수만 있다면 세상은 신기롭고 즐거울 것이고 그렇게 늘 새롭게 현재의 일상을 살아낸다면 그런 행복이 어디 있으며 그것이 깨달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고 보면 우리 같은 범인들에게 여행이라는 것은 낯선 곳에서 삶의 새로움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니 깨달음의 대리만족 쯤이나 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사실 여행을 많이 하지 못했다. 싫어하는 것은 결코 아니고, 돌아다니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편인데도 국내나 해외여행을 별로 하지 않았다. 다만 무언가 마음의 변화나 위로나 생활의 어떤 새로움이 필요할 때면 혼자서 훌쩍 산으로 간다. 가까운 산이 지리산이니 늘 지리산을 다닌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한때 한 몇 년은 작고한 박배엽 시인과 함께 지리산의 비등산로를 주로 다녔다.(그때만 해도 국립공원관리공단이 들어서기 전후여서 단속이나 벌금이 없었다) 그 길들은 한국전쟁 전후의 빨치산들이 주로 다녔던 길들이기도 하고 그 이전에는 나무꾼이나 장꾼들이 다녔던 길이고 현재는 고로쇠꾼들이 자주 이용하는 길들이다. 그 지리산의 낯선 지능선이나 지계곡을 혼자서 자주 탔던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따지고 보면 다 내 안의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였다. 지리산은 전북, 경남, 전남, 3개도에 걸쳐있는 넓은 산이어서 한번 헤매기 시작하면 요샛말로 장난이 아니다. 지금이야 GPS가 있지만 그때는 나침반과 지도 한 장 믿고 그냥 갔다. 그리고 사라진 길의 흔적을 더듬어 산을 타는 동안은 모든 걸 다 잊을 만큼의 긴장과 두려움이 함께 했다. 그것은 어쩌면 내면의 깊은 어디에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생명력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일상에서 데리고 사는 크고 작은 두려움들을 말끔하게 지워주는 역할을 했다. 나중에 지리산을 오르며 즐겨 찾아간 곳은 산사람(빨치산)들의 비트(비밀아지트)였다. 물론 처음에는 빨치산 출신 장기수 어른들이나 관련자들의 도움을 얻어서 찾아 다녔다. 비트라고는 하나 무슨 문화유산처럼 특정의 흔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현상 비트나 박영발 비트, 구례군당 비트는 그래도 그 흔적과 생활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으나 그 외의 환자트나 무기, 식량 등을 숨겼다는 비트들은 그저 이 근처였다는 것만을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들은 빨치산이라고 불렸지만 나는 그들이야말로 하나의 통일조국을 꿈꾸고 진정한 인간해방을 꿈꾸었던 한국전쟁 전후 당대의 역사를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사회가 그렇듯 모든 빨치산들이 그렇게 살았던 것은 아니겠지만 역사라는 큰 흐름에서 조망한다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나는 열심히 산을 찾던 8,90년대만 해도 시대적 상황 탓도 있었지만, 산을 오르며 비극적인 역사와 이데올로기보다는 빨치산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 그 사람들의 삶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를 사는 시인의 몫이기도 하고 지리산을 오르는 나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리산 연작시를 썼고 ‘그리움’이라는 단어에 모든 걸 담고자 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죽은 동지들에 대한 그리움, 조국 해방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존재의 고독에서 오는 근원적 그리움까지 지리산은 그 모든 그리움을 내장하고 있는 산으로 그려지기를 바랐다. 산은 언제나 그곳에 있다. / 오랜 마음 속 벗처럼 / 부르지 않아도 항상 / 푸른 대답을 보내오고 / 그리움이 깊을 대로 깊어 / 산빛 너울이 아프다. // 미친 눈보라, 갈 곳 없는 어둠에 묻혀 / 사십 년 징역을 곱게도 사는구나. / 물빛 하늘 얼굴들 / 살아서는 부둥킬 수 없었던 / 그리움 곁으로 가고 / 홀로 남아 / 상처 깊은 짐승처럼 / 우우우 웅크린 / 산. // 그대는 / 눈부신 억새꽃 바람결로 스미고 / 깊은 숲 그늘 돌 틈 / 철쭉으로 피어나 / 우리들 일상의 /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 다하도록 / 스스로가 다하도록 내려올 수 없어 / 산이 되었던 그대. // 우리 곁을 떠나간 벗들은 / 저 산 되었지. / 헐벗어 눈 덮인 저 산. / 그래, 바라던 조국을 만나 / 풀씨는 맺었나, / 슬픔은 없더나. // 저 산처럼 서야지. / 산이 거느리는 핏빛 그리움으로 / 살아남아야지. / 밤마다 이빨 빠지는 꿈을 꾸며 / 가버린 벗을 생각는 일은 / 이제 그만 두어야지. / 깊은 숲 그늘 바람, 숨 죽여 울면 / 아직도 너의 목소리가 들린다.// <졸시「지리산1-序」전문> 지리산 비트 산행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의 현장을 가는 것이기도 해서 어떤 묘한 비장감을 느끼게 해준다. 나는 그것이 매우 좋았다. 그리고 혼자서 하는 그 비등산로의 산행은 삶의 근원적 두려움과 외로움의 맨얼굴을 직접 만나게 해주었고 시종일관 긴장감과 어떤 설렘을 주는 신선한 것이어서 참으로 각별한 여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국립공원법이 정비되어 비등산로 산행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연구 목적이나 특별한 사유가 있다면 신고를 하고 허락을 받아 갈 순 있지만 쉽지 않다. 그래서 요즘은 정해진 탐방로만을 다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지리산을 오르는 일은 새롭다. 나무며 벌레며 새, 동물들, 그 모든 생명을 품은 산은 그 생명들이 뿜어내는 생명력으로 인해 하루하루가 모두 새롭고 신선하기 때문이다. -남부군 비트터 -남부군 학습장 -남부군 이현상 바위
    • 지리산문화
    • 박두규 시인의 지리산에서 온 편지
    2021-12-20
  • 지리산 이야기2 - 친구
    지리산이야기2- 친구 지리산을 늘 함께 오르던 친구가 있었다. 세상의 모든 빛 중에 저무는 빛이 가장 강한 빛이라는 것을 안 것은 친구의 죽음 때문이었다. 노을이 지는 동안 능선들이 모두 침묵 속에 숙연해지는 것도 저무는 빛으로부터 시작되는 시간의 죽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화려한 도시의 빌딩 사이로 저무는 강한 빛을 보며 문득문득 외로워지는 것도 까닭모를 그리움도 모두 여기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친구가 죽고 나는 혼자서 산에 다녔다. 산정의 차가운 샘물을 마시면 간절한 마음이 먼저 목젖을 적셨고 구상나무에 눈이 가득 내리면 눈밭에 텐트를 치고 그 안에서 술잔을 나누던 친구가 생각났다. 그를 잃고 여느 짐승들처럼 겨울잠에 들고 싶었고 스스로도 잊고 혹독한 바람에도 깨어나지 않는 오랜 침묵이 되고 싶었다. 무심한 계절이 숱하게 지나가고 저물어 가는 산들의 어둠 사이로 그와 함께 다녔던 길 하나가 살아남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홀로 빛나는 것들에는 언제나 슬픔이 묻어 있다.
    • 지리산문화
    • 박두규 시인의 지리산에서 온 편지
    2021-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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